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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노래(蔘歌)」,李勉伯(1767-1830)
* 가족 계보:
李匡明--李忠翊--李勉伯---李是遠, 李止遠, 李喜遠
李是遠--李象學--李建昌, 李建昇, 李建冕
李建昌--李範夏
* 이면백 선생은 어려서부터 가난하였기 때문에 일찍 경제생활에 눈을 뜬 것 같습니다. 농사를 지어보려고 고구마를 심어보고 나중에는 인삼을 재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시장에서 일어나는 가격 변동을 보고 상품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구분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인삼을 재배하여 시장에 팔면서 경제활동의 동기가 이타적 도덕 또는 이기적 이익 둘이 있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선비가 경제활동을 하면서 개인의 이기적 이익에만 마음 두지 않고 이타적 도덕에 더 마음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조선후기에 선비들이 경세사상과 경제정책을 제시하면서 생각해낸 것입니다. 조금 지나친 말이겠지만, 이면백 선생의 경제활동과 생각은 당시 선비들의 상업정신이며 조선후기의 상업정신을 조금이나마 보여준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이면백 선생은 「인삼 노래」에서 상품과 시장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네 가지를 이해하였습니다.
첫째, 인삼을 재배하면서 도덕적 동기(仁)와 경제적 이익(利)을 구분하였습니다.
둘째, 인삼의 사용가치(常)와 교환가치(變)을 구분하였습니다.
셋째, 선비들 경제활동의 도덕적 동기(仁)를 사용가치에 두었는데 사용가치를 이타적 동기의 기초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타적 사용가치를 굳게 믿고 교환가치의 변동 때문에 재투자하거나 폐업하지 않아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조선후기 선비들의 상업정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곡학의 이타적 정신을 발휘한 상업정신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신대우 선생이 「이덕윤 선생 행장」에서 농업 경영을 설명한 것 있는데 여기에도 이러한 경제사상이 조금 반영되어 있습니다.(연구자료실, 2017, 8,21)
넷째, 농사를 지서 시장에 내놓아 돈을 벌려면 새로운 혁신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식구들을 살리기 위하여 시장 상황에 따라 상품작물을 바꾸고 개발하여야한다는 것입니다. 폭락한 인삼 가격에 대응하기 위하여 작물을 개성 상인처럼 인삼재배에서 벼 농사로 바꾼 것을 사례로 들었습니다. 혁신은 농업생산과 소비시장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개념이며, 시장에 대하여 참으로 중요한 상업정신의 하나라는 점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면백 선생은 인삼의 사용가치가 크고 가격이 내렸다가 올라갈 수 있기 때문에 인삼 재배를 포기하지 않았지만 혁신이 필요하다고 이해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인삼이 좋은 약재이지만 비싸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병들면 약으로 써보지 못하고 죽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인삼을 재배하여 많이 생산하여 가격을 낮추어 가난한 사람들까지 먹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인삼 재배의 동기는 많은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해주려는 이타적인 도덕적 동기(仁)입니다. 그런데 인삼을 재배하여 팔아 돈을 벌어 살림을 꾸려나가는 동기는 이기적인 경제적 이익(利)입니다.
또한 인삼이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의료적 효과는 인삼의 사용가치(常)를 말하고,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에 따라 일어나는 인삼 가격의 변동(變)은 시장의 교환가치(變)를 말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이 올랐다가 내려가고 내렸다가 올라가는 까닭은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경제학에서 말하는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면백 선생은 조선에서 산삼을 지나치게 채취하여 생산량이 확 줄어든 까닭은 관원의 공납과 상인의 수매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조선정부의 경제 행정이 부족하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조선후기 재배 인삼의 가격이 폭락한 까닭은 과잉생산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조선정부의 경제정책이 올바로 설정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조선정부가 시장을 안정화시키는 정책을 세우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조선시기에 비교우위의 상품이 많지만 수익이 가장 큰 것은 인삼입니다. 중국에서는 산삼이 금보다 몇 배 또는 몇 십배 비쌌다고 합니다. 인삼 시장이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컸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때는 큰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유럽에서도 중국의 인삼시장을 알고 있었구요. 영국 상인들이 배를 타고 조선에 와서 인삼을 사다가 중국에 팔려고 시도하였다고 합니다.이렇게 보면 조선 후기에 인삼의 생산과 가격을 국가가 잘 관리하고 외국에 수출하여 큰 돈을 벌었다면 근대화 비용을 충당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비교우위 상품을 갖고 있으면서도 국가 재정이 가난하였다는 것은 지식인들이 각성하지 못하였고 국가의 효율적인 정책도 부족하였다고 보아야겠지요.
강화도에서 방직공업도 발달하였고 인삼 농사도 많아 큰 돈을 벌었는데 현재는 많이 쇠퇴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국가정책 때문에 쇠퇴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면백 선생의 설명을 들어보면 이타적 도덕이라는 경제활동의 동기는 농공상 종사자 개인에 해당합니다. 강화도 상업정신은 이면백 선생의 설명처럼 이타적 도덕과 이기적 이익 둘의 균형을 잘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며 다시 강화도에서 일어나길 바랍니다.
현재 강화도에는 비교우위 생산품이 많다고 합니다. 군민 스스로 잘 관리하고 교역하여 부유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이때 강화도 상업정신을 잘 지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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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백 선생은 이충익 선생의 아들입니다. 이충익 선생은 친아버지가 이광현(李匡顯, 1708-1776)이고 양아버지가 이광명(李匡明, 1701-1778)입니다. 이충익 선생은 12살(1755)때에 을해옥사에 연루되어 친아버지 이광현은 경상도 기장(機張)에, 양아버지 이광명은 함경도 갑산(甲山)에 유배 갔기 때문에 남북으로 오가며 두 부친을 모시느라고 아마도 재산을 다 써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두 분이 돌아가신 뒤에는 여기 저기 떠돌다가 만년에 강화도 초피산 아래로 이사 와서 살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이광명 선생은 10살 조금 넘어 아버지 이진위(李眞偉)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 송씨 부인을 따라 외가집 강화도 사기리에 와서 살았습니다. 정제두 선생이 60살에 강화도 하일리에 이사 오시자, 이광명은 정제두 선생이 돌아가실 때까지 30년 동안 스승으로 모시고 배웠습니다. 또한 정제두 선생의 아들 정후일 선생의 장녀와 혼인하였습니다. 사실상 전주 이씨 덕천군파 후손들이 정제두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운 학술적 배경과 동기는 이광명 선생의 역할 컸다고 봅니다.
따라서 이면백 선생은 자연히 아버지 이충익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하곡학을 배웠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면백 선생이 아마도 가난한 집안 살림살이를 많이 걱정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실상 이면백 선생이 농업에 종사하였고 또한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관원생활도 하면서 재산을 저축하였다고 봅니다. 이러한 경제적 기반 위에서 이시원을 비롯하여 이건창 등 후손들이 공부하여 과거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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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 노래」,이면백,『대연유고』,권1.
「蔘歌」,『岱淵遺藁』,卷一
내가 의사들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
약효가 신통한 약 가운데 삼보다 좋은 것이 없다고 한다.
죽을병이 들어도 삼을 먹으면 살고,
삼을 다린 물을 조금 마셔도 아픈 신음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삼 때문에 염라대왕도 수명이 다한 사람들을 저승으로 데려가지 못할까 끝내 걱정스러워하고,
춘추시기 진(晉)나라 대부 조동(趙同)과 조괄(趙括) 두 노인이 억울하게 죽어 왕의 고황(膏肓)에 숨은 병마가 되었지만 삼 때문에 복수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중국 상당산에서 삼이 나는데,
약효가 특별히 신령스럽다고 하였다.
我聞醫師說,神藥無過蔘。死病得以活,一歃忘呻吟。
閻王竟惆悵,二豎違初心。舊稱上黨山,厥族尤效靈。
삼을 채취하는 데 아주 힘들고 얻기도 어렵다고 하는데,
낮에 별을 보는 것처럼 어렵다고 한다.
어디인들 삼이 나지 않겠는가?
그러나 삼의 약성이 모자라서 약효가 적을 뿐이다.
중국과 우리나라가 교역을 시작한 뒤에는,
좋은 삼의 공급은 우리나라에 달려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옛날에 삼이 많아,
어느 산에서나 삼을 캤다.
採多苦難得,有如晝見星。豈無各處産? 力微稀奏功。
所以一天下,餘波仰海東。海東昔多蔘,山山皆有之。
우리나라에서는 때로 벌거숭이산에서도 삼을 캤고,
반드시 잎 넓은 가죽나무 그늘에서만 삼을 캐는 것은 아니었다.
부자들은 삼을 먹어 아픈 날이 없고,
고귀한 관원들은 삼을 먹어 몸이 항상 건강하였다.
하얀 항아리에 삼을 넣어 다린 경옥고를 담아,
아욱 나물처럼 날마다 먹었고,
연경에 사신 가는 사람마다 인삼 80근(8包, 여덟 보따리)을 갖고 가서 팔아 여비에 쓰고,
큰 배에 인삼을 실어서 일본에 팔아 돈을 벌었다.
往往出童濯,非必椵漆宜。富家無疾日,貴人軆佳時。
白缸貯瓊玉,漫喫猶園葵。八包走燕市,大舶通倭夷。
삼은 쉼 없이 솟아오르는 샘물 같았고
샘물을 아무리 많이 퍼내도 마르지 않는 것 같았다.
옛날부터 이익이 삼에 있었지만,
모든 폐해도 삼에서 싹트고 있었다.
관리들은 마음대로 삼을 거두어들였고,
상인들은 마음대로 농간을 부렸다.
이때부터 갈산에서 화살 만드는 곧은 대나무가 없어지고,
광동성 합포현에서 고운 진주가 없어지듯이 삼 생산이 줄었다.
譬如混混泉,將若汲不渴。從來利所在,百弊仍牙蘖。
官吏恣誅求,商賈舞奸黠。曷山直箭盡,合浦明珠去。
현재 세상에서 값비싼 물품을 꼽아보면,
반드시 삼을 먼저 든다.
가난한 선비와 최저생활의 빈민들은,
삼의 모양도 본 적이 없다.
부모님 병환이 위독하여 이부자리에 누워계시고,
아이들이 병들어 목숨이 실낱같을 때,
삼을 먹으면 나아지는 것을 알지만,
값비싼 삼을 넣은 약재를 무슨 방법으로 얻을 수 있겠는가?
時俗數貴物,惟蔘必先擧。貧士與窮民,其形未曾見。
親疾革在牀,兒病命如線。雖知服蔘好,刀圭何由得?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운명에 달렸고 약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마음속으로 슬픈 것은,
천지에 삼이 있더라도,
삼이 부자는 먹고 병을 낫게 하고 가난한 사람은 못 먹어 죽게 하는데,
삼의 효용이 빈부에 때문에 평등하지 못한가?
그래서 따듯한 부모와 효성스런 자식들의 아쉬움과 후회가 사람을 망쳐버린다.
固知人死生,在命非在藥。吾所竊悲者,天地有此物。
貧富豈厚薄,爲德還不一? 慈父與孝子,終身恨銷骨。
어떻게 하면 삼 값을 흔한 흙처럼 내려서,
사람마다 먹고 싶은 바람을 이루게 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는 대대로 성인 같은 임금이 나셨는데,
상서로운 북두칠성의 끝별이 현재 다시 빛나고 있다.
천지가 발생한지 억겁이 되었지만,
가삼(家蔘, 〔稼蔘〕, 재배삼)이란 이름을 처음 들었다.
인삼 재배는 경상도(경주, 신라 소성왕 시기)에서 시작되었다는데,
재배방법이 어떤 것인지를 물어 배웠다.
安得賤如土,人人志願畢? 靑邱世聖君,搖光今復明。
剖判萬萬劫,初聞家蔘名。家蔘始嶺南,方法問何如。
산삼의 씨앗을 받아서,
(* 영남지방의 羅蔘, 영동지방의 山蔘, 강계지역의 江蔘, 재배하는 家蔘)
텃밭 채소처럼 삼 씨앗을 뿌려 심었다.
씨앗마다 무성하게 싹터서 올바르게 심었다고 생각하였는데,
잎이 시들고 누렇게 뜨기에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다.
정성을 다하면 해결하지 못할 것이 없다더니,
점점 갈수록 삼의 성질을 이해하였다.
남쪽 햇볕을 등지고 북향인 곳에,
부엽토가 썩어 검고 부드럽고 성근 흙이 재배에 적합하였다.
試取山蔘子,播種猶畦蔬。茂茁認得宜,萎黃覺有病。
至誠無不通,稍久諳情性。背南向北處,黑墳浮踈地。
구덩이를 파고 자갈과 모래를 깔고,
구덩이 안쪽 사방에 돌을 촘촘하게 쌓는다.
돌 구덩이 안에 부엽토를 채우는데,
부엽토를 채를 쳐서 채우되 굳게 다지지 않는다.
쥐들이 구멍을 뚫지 못하게 막되,
물은 스며들 수 있도록 한다.
삼 뿌리를 구덩이 안에 세우고,
뿌리들이 골고루 펴지게 하고 어지럽게 엉키지 않도록 해야한다.
坎中鋪沙礫,四面石櫛比。實以葉腐土,篩下不堅築。
爲防鼠穿穴,且欲水滲漉。蔘根樹其內,井井不紊錯。
긴 뿌리는 깊이 묻고 짧은 뿌리는 얕게 묻고,
삼 사이의 간격은 삼이 크면 멀리 심고 작으면 가까이 심는다.
삼 모종을 심는 재배방법이,
이렇게 정확하고 특별해야한다는 말인가!
흙과 심는 방법이 좋아야 삼이 잘 자라지만,
하늘의 날씨는 변화가 심하다.
아주 건조하거나 아주 습하지 않도록 하고,
아주 춥거나 아주 덥지 않도록 적절하게 해주어야한다.
深淺逐長短,踈密視大小。誰謂種植法,有如此精妙!
地理旣潤色,天道又變通。燥濕避偏甚,寒曝貴適中。
굵은 대나무를 엮어서 지붕을 만들고,
잘 자란 마 줄기를 엮어서 지붕을 덮어준다.
이렇게 햇볕을 막아 잠깐씩 햇볕이 새어들도록 하고,
비가 내리면 빗물의 반은 지붕 밖으로 흘러내리도록 한다.
이렇게 지붕을 만들면 양지 바른 곳에도 그림자가 생겨서,
자연히 볕드는 때와 그늘이 되는 때가 번갈아 된다.
3년 4년 5년을 잘 기르는 동안에,
천지의 정기가 뿌리를 통하여 삼의 약 주머니(몸통)에 들어간다.
縛竹作架广(子),編麻爲覆蓋。碍日乍漏光,停雨半在外。
悠揚(陽)地上影,自然生陰陽。三四五年間,根便入藥囊。
인삼 장사꾼들이 날마다 대문에 메우고,
삼을 팔아 쌓아놓은 돈은 높은 언덕처럼 많아진다.
생업 가운데 인삼 재배가 가장 좋아,
아주 가난한 사람도 잠깐 동안에 넉넉한 부자가 될 수 있다.
집집마다 인삼 재배법을 배우고,
사람마다 인삼 밭에 삼을 심는다.
사람들의 재배 기술이 발달하여 인삼이 튼튼하고 크게 자라게 하지만,
인삼의 약성은 갈수록 떨어진다.
蔘商日塡門,峙錢齊高岡。營生此最良,窶子俄饒戶。
家讀養蔘訣,人治種蔘圃。人巧得強長,物性非其眞。
재배 인삼의 약효는 산에는 나는 산삼보다 못하니,
누가 재배 인삼을 먹고 오래 살 수 있을까?
그러나 다행히 삼을 재배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세상 시장에서도 그렇게 진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돈이 없는 사람도 재배 인삼을 구할 수 있고,
아픈 환자들도 모두 인삼을 먹을 수 있다.
재배 인삼의 생산이 풍부하여 물과 불처럼 사람을 살릴 수 있으니,
하늘과 땅이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하는 것에 감사드린다.
功效减山產,詎能求延年? 但幸種者多,時俗不甚珍。
無錢亦可得,有疾皆霑唇。至足同水火,感荷天地仁。
우리집안은 가난하여 사방 담벼락밖에 없는데,
반평생을 어찌 엎드려 가만히 지낼 수 있겠는가?
공부를 많이 하여 아는 것이 많지만 생업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밭 갈고 모종을 심으려는데 힘이 달린다.
편안히 앉아 팔다리를 나태하게 놔두고,
부모님 모시고 처자식 데리고 살려니 부끄러움만 늘어나네.
옛날 사람들의 서적을 보았는데,
약을 지어 파는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한 선비이었다.
吾家立四壁,半世安雌伏? 文字富何益? 耕稼力不足。
安坐惰四肢,俯仰增愧恧。嘗見古人書,賣藥多貧士。
텃밭 15평(1畝는 대략 30평)을 따로 떼어내서,
내가 할 수 있는 계획은 인삼을 재배해보는 것이다.
텃밭에는 휘이 휘이 하늘에서 바람이 불어오구,
콸콸콸 높은 산에서 물이 흘러내리네.
재배법에 따라 인삼을 재배하였고,
생각했던 것처럼 잘 자라는구나.
정말로 열매가 붉었다가 보라색으로 바뀌고,
잘 자란 잎은 푸르고 파랗다.
園中半畝地,拙計歸於是。颼颼洞生風,㶁㶁巖鳴水。
栽培一依法,長養亦如意。的的實紅紫,猗猗葉靑翠。
소나무 빗자루(무슨 뜻?)로 고랑을 쓸어서 물기를 말리고 때로는 샘물을 뿌려주고,
아침마다 대나무 젓가락으로 지렁이를 잡아냈다.
이제는 인삼 재배에 푹 빠진 사람이 되었고,
벌써 6-7년이나 되었다.
멀거나 가까이 사는 아픈 사람들의 인삼 요구에 응하여 보내주었고,
노비와 종복들까지도 아프다면 인삼을 나누어주었다.
인삼을 나누어주는 것은 좋은 일이고,
많은 사람들이 고맙다고 말한다.
松帚暵灑泉,竹筯朝擒蛭。居然作蔘奴,已換春六七。
廣應遠近求,遍及婢僕疾。亦足爲好事,多致感謝說。
그런데 나에게 돈 한 푼도 주지 않았는데,
나의 인삼 밭에서 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상하여 손님에게 물었더니,
손님이 웃으면서 내가 세상물정 모른다고 까닭을 설명해주었다.
(손님의 대답은 아래 구절부터 송나라 사람이 돌멩이를 옥이라고 우기는 구절까지)
“자네는 귓구멍이 있으면서도,
인삼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는가?
큰길에 나가서 보세요,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니는 사람들을.
但無一文錢,云自蔘圃出。怪以問來客,客笑我迂拙。
“子耳亦有孔,不聞蔘事否。須看大道上,肩有重擔負。
모두 인삼 파는 사람들이고,
전국에서 생산된 삼이 서울 약재상으로 모입니다.
그러나 서울 약재상들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데,
인삼을 쌓아놓아도 아무도 사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난 가을에 인삼을 많이 사놓은 것을 후회하고,
커다란 인삼 보따리들이 아직도 벽에 걸려 있습니다.
인삼을 요즘 세상에서는,
아무도 돈을 주고 사거나 팔지도 않습니다.
都是賣蔘客,輻湊京藥舖。藥舖却掉頭,居蔘無人取。
前秋悔多買,大裹壁猶掛。蔘於今世上,誰用錢買賣。
집집마다 밭에 인삼을 재배하고 있는데,
누구에게나 속 썩이는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개성의 큰 부자들도,
모두 인삼 심었다가 망하였습니다.
당신은 아마도 가난한 궁상(窮相)을 타고났는지,
재배기술을 배운 시기가 이르지 못한 것이 답답합니다.
20-30년 전에는,
인삼을 사람들이 귀한 보배처럼 여겼습니다.
家家種蔘圃,盡是鉤腸債。開城大富者,皆以種蔘敗。
子應賦窮相,問術恨未早。數三十年前,此物人猶寶。
현재는 인삼 가격이 떨어져서 농민 생활을 어렵게 만드는 작물이 되어,
세 가지로 자라는 인삼은 일반적인 약초처럼 흔하게 되었습니다.
주나라 시조 후직(后稷, 이름 棄)이 처음 벼를 심기 시작하였을 때에는,
주나라 임금들만이 맛있고 좋은 쌀밥을 잡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쟁기가 세상에 널리 보급된 뒤에는,
거지들 바가지의 밥도 지금처럼 하얀 쌀밥입니다.
당신이 인삼을 재배하면 부자가 된다고 믿는 것은,
송나라 사람이 연나라 돌멩이를 주워서 옥이라고 믿고 우겼던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于今賤傷種,三稏是凡草。后棄始種稻,惟辟得玉食。
耒耜旣成風,丏瓢飯今白。子欲恃蔘富,何異藏燕石?”
나는 손님의 설명을 듣고 대답도 못하고 자신감을 잃어 허무한 생각도 들었고,
갑자기 손님의 설명이 옳지 않다고 부정하려는 생각까지 들었다.
옛날 요임금 시절에는 백성들조차 모두 현명하였고,
훌륭한 사람들을 현창하는 봉표를 대문에 붙인 집들이 많았다.
그러나 말세에는 나쁜 짓하는 사람들이 많아,
군자가 착한 사람이라고 존중을 받았다.
어찌 알겠는가? 최고가격까지 올랐던 인삼이,
최저가격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회복될지를.
余聞默悵然,忽復陋其言。堯民昔盡賢,封表可比門。
季世多作惡,君子以善尊。焉知至貴物,乃在極賤復?
잠깐 동안 손님이 설명하고 떠났는데,
인삼 재배에 대하여 걱정이 더 커졌다.
현재 시장에서 좋은 물품을 존귀하게 여기지 않는데,
내가 무슨 잘못된 오해를 말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낮은 가격에서 다시 높은 가격으로 회복될 때를 기다리는 것도,
황하가 다시 맑아지는 긴 세월이 될 것이다.
다만 인삼 재배를 고생하며 열심히 하더라도,
내 주머니에는 끝내 돈이 들어올 수 없을 것이다.
須臾客告去,對蔘更搔頭。今俗不尊善,我何言之謬?
若俟賤復貴,便是淸河壽。只恐種辛勤,我槖終烏有。
옛날에는 인삼 값이 싸지길 바랐던 적이 있는데,
현재는 오히려 인삼 값이 오르길 바라고 있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 바뀌는 까닭은,
이익 때문인지 아니면 착한 인(仁)인지 동기를 알 수 없다.
먹고살기 위한 생업은 새로운 혁신이 필요한데,
생각은 점점 굳어져 늙은이가 되었네.
선택할 수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남들은 잘 알아서 선택하는데 나는 다른 방법이 없네.
昔嘗願蔘賤,今反欲其貴。人心此變化,爲利仁則未。
活計欲圖新,頭腦漸成翁。歧路豈不多? 人通吾便窮。
다른 방법이 없다면 차라리 인삼 재배를 지속하겠지만,
인삼 가격의 상승을 운명에 맡기고 계속 재배하다가 죽을 수밖에 없다.
배고픔을 참고 하루 종일 가만히 앉아서,
못 먹어 바짝 말라버린 창자에게 혼자 아래와 같이 말한다.
“인삼에는 상품으로 팔려야할 까닭이 담겨있는데,
상품으로 팔려야할 까닭은 바로 인삼의 사용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인삼의 의료적인 사용가치(常)는 분명히 알겠는데,
인삼의 가격변동(變)이라는 교환가치의 변동 원인은 아무래도 알 수 없다.”
無寧守舊圃,委順以待終。忍飢坐終日,獨語向枯腸。
“蔘有可售理,此乃蔘之常。其常固可言,其變莫思量。”
농민이 할 일은 밭을 갈아엎고 씨앗 뿌리고 북돋아주는 것뿐이고,
풍작이 될지 흉작이 될지는 알 수 없다.
손님을 보낸 뒤 밖에 펴놓는 상에 앉아 저녁 해지는 인삼밭을 바라보며,
시를 지어 혼자 읊는다.
“내가 끝까지 인삼 재배를 포기하지 않으려는데,
인삼은 나에게 어떻게 해줄 수 있을까?
인삼 이파리들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조용하지만,
아마도 내가 슬퍼서 읊는 인삼 노래를 듣고 있겠지.”
農民職穮蓘,不敢計豐荒。風牀面夕畦,有詩自吟哦。
“我終不負蔘,蔘將如我何? 萬葉寂不動,似聽吾悲歌。”
참고자료:
二豎:晉大夫 趙同과 趙括
『左傳,成公十年』:“晉侯夢大厲,被髮及地,搏膺而踴,曰:‘殺余孫,不義。余得請於帝矣!’壞大門及寢門而入。公懼,入於室。又壞戶。公覺,召桑田巫。巫言如夢。公曰:‘何如?’曰:‘不食新矣。’公疾病,求醫於秦。秦伯使醫緩爲之。未至,公夢疾爲二豎子,曰:‘彼,良醫也。懼傷我,焉逃之?’其一曰:‘居肓之上,膏之下,若我何?’醫至,曰:‘疾不可爲也。在肓之上,膏之下,攻之不可,達之不及,藥不至焉,不可爲也。’公曰:‘良醫也。’厚爲之禮而歸之。六月丙午,晉侯欲麥,使甸人獻麥,饋人爲之。召桑田巫,示而殺之。將食,張,如廁,陷而卒。小臣有晨夢負公以登天,及日中,負晉侯出諸廁,遂以爲殉。”
晉、葛洪,『抱朴子,貴賢』:“二竪之疾既據而募良醫,棟橈之禍已集而思謀夫,何異乎火起乃穿井,覺飢而占田哉!”
童濯:
『孟子,告子上』:“人見其濯濯也,以爲未嘗有材焉,此豈山之性也哉?”
穮蓘:
『左傳,昭公元年』:“是穮是蓘。”穮,翻地;蓘,培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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