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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불장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나 제 생각대로 혼자 처리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서 혼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협조하여 일을 처리하라는 것을 강조할 때 사용됩니다.
이 시대는 똑똑한 한 사람보다 잘 연합된 조직이 승리하는 사회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IQ지수 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갈 때 IQ지수나 EQ지수보다 중요한 지수는 NQ(Network Quotient)지수 라고 합니다.
NQ 지수는 네트워크 지수 혹은 공존지수의 약자로 성공의 결정적 요인으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NQ지수는 네트워크 사회에서 서로 함께 잘 살기 위해 갖추어야 할 공존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즉, 혼자 잘해서 성공하는 시대가 아니라 함께 잘해야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옛 말에 팔방미인은 굶어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 저기 기웃대지 말고한 가지 전문적인 기술을 익히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죠?
그러나 한길만 파는 천착의 자세도 요즘 시대의 흐름을 쫓아가지 못합니다.
워낙 다양한 사회생태가 존재하고 사회의 흐름이 워낙 빠르게 변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은 전문가들이 뭉쳐서 새로운 힘을 발휘하는 융합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교회 공동체에서도 독불장군과 같은 리더가 있었는가하면 융합과 협력을 추구하는 지도자도 있었습니다.
연합과 협력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가이오라는 공동체 리더입니다.
따라서 융합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공동체에서 칭찬 받는 가이오에 대해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이 땅의 교회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 살피고, 그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을 나누기 전에 오늘 본문의 배경에 대해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쓰여진 당시는 영지주의가 발흥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영지주의자는 불완전한 신인 데미우르고스가 완전한 신의 영(프네우마)을 이용해 물질을 창조하였고,
인간은 참된 지식인 그노시스를 얻음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과 정통파 기독교인들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믿음이 아니라 앎(그노시스)이 구원의 수단이라고 여겼다는 것에 있습니다.
영지주의 운동가들은 그노시스를 통해 인간의 참된 기원이 지고한 신성(神性)에 있다고 주장했고, 인간이 참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물질계를 벗어나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악한 육신 안에 갇혀있는 영을 해방시켜서 자유를 얻고자 하거나 육신을 학대하는 수도원을 중심으로 하는 경건주의 분파들이 발생하였고, 육신의 행동이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생각하고 방탕의 길을 선택하였던 분파들이 일어났습니다.
기독교와 다른 또 하나의 차이점은 많은 영지주의자들이 윤회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사람이 구원을 성취하지 못하고 죽었을 때 받는 유일한 벌은 이 세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윤회의 교의로 인해, 악한 행위를 하면 죽어서 지옥에 가게 된다는 두려움이 없어짐으로 사람들이 선한 행위를 하게 만드는 '거룩한 두려움'이 사라져 버리는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영지주의 운동가들은 인간을 영 · 정신(영혼) · 물질(육체)의 세 요소로 구성된 존재로 보았으며, 이에 따라 인간을 영적인 인간(Pneumatics)·정신적인인간 (Psychics)·물질적인 인간(Hylics)의 세 부류로 구분하였고, 영적인 인간들이 구원을 성취할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여겼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인식에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예수님에 대한 인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 번째, 다수의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를 지상의 인류를 구원할 수단인 그노시스를 인류에게 가져다주고 가르치기 위하여, 기꺼이 고통이 가득 찬 물질계에 탄생하는 희생을 기꺼이 감수한 지고한 존재라 여겼습니다.
두 번째, 노쯔림과 만다야교 등의 일부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를 "거짓 메시아"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침례자 요한을 중시하고 예수가 침례자 요한이 위탁하여 맡긴 가르침들을 타락시켰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세 번째, 일부 영지주의자들은 노쯔림과 만다야교의 생각에 더해서 예수가 아니라 아담과 이브의 셋째 아들인 셋이나 마니교의 창시자인 마니를 메시아(구세주)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나그함마디 문서에 포함된 영지주의 문헌들 중의 하나인 《이집트 복음서》에서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 예수님이 메시야가 아니라 주장하는 것을 넘어서 애초에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시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주장을 가현설이라고 하는데, 절대자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처럼 인간들이 착각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지주의 운동은 3세기에 이르기까지 로마 제국과 고트족의 점령지, 또 사산 조 페르시아의 영토 등, 지중해 세계와 중동으로 전파되고 발전하였습니다.
이러한 영지주의 운동은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초기 교회 공동체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또한 영지주의 운동에 의해 교회 내부의 갈등이 증폭되었습니다. 이러한 영지주의 운동은 성서에서도 언급됩니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 등에 등장하는 ‘니골라당’이라는 표현은 초기 영지주의 운동의 지도자였던 니콜라스라는 이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니콜라스는 사도들에게 신앙을 전수 받고 집사의 직분을 받았지만 결국 이단의 길로 빠진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이단의 무리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 시점에 요한은 요한1서, 2서를 공동체에 보내어 복음을 잘 지키도록 단속하였고 요한 3서에 복음을 재교육하기 위한 데메드리오와 같은 순회 전도자들의 역할에 대해 설명하고 그들과 함께 동역하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당시 일부 순회전도자들 중에 비기독교 유대교인들은 일부 영지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고, 율법을 지키고 모세오경에 기록된 대로 할례를 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행위 구원론적인 교리를 교회 공동체 안에 심기도 했습니다.
이 당시 많은 신앙공동체에서 순회전도자들을 영접하여 그들의 설교를 듣는 것이 관습처럼 행하여 졌기 때문에 거짓 교사들이나 영지주의 운동에 영향을 받은 순회전도자의 가르침은 공동체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한 3서가 기록되었고, 가이오라는 교회 공동체 지도자에게 보내지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의 배경을 염두에 두고 오늘 본문을 잘 살펴보면,
사도 요한이 가이오를 축복하는 것이 상당히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이 가이오를 축복할 때,
먼저, 가이오의 영혼의 잘됨을 위해 축복합니다.
이러한 축복은 당시 영지주의 운동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영적인 인간을 지향하는 것과 유사한 것으로 이러한 축복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거나 어색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가이오를 향한 축복 두 번째는 범사에 잘되기를 축복합니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가 하고 있는 모든 일에 축복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관계된 일은 성스로운 일이고, 세상일은 악한 일이라는 이원론적인 사고를 벗어나서 가이오가 하고 있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이 가이오를 축복하는 세 번째는 육체의 강건함을 위해 축복합니다.
당시‘영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고 믿는 영지주의 운동의 이원론의 영향을 받아 사회 곳곳에 영적인 일에만 관심을 쏟고 육체적인 일은 터부시 하던 시대를 고려하면 사도 요한의 세 번째 축복은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이 가이오를 이렇게 축복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본문은 이 이유에 대해 세 가지를 언급합니다.
첫 번째, 형제들에게 신실하게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에 권위를 입히기 위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의 이름을 차용하였습니다.
도마복음, 빌립복음, 마리아복음서 등이 대표적인 외경들입니다.
따라서 정통복음과 이단적인 요소가 많은 외경을 구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외경들이 복음서와 뒤섞여서 전파됨으로 인해서 누가 거짓교사이고 진실한 교사인지 구별하기 어려웠습니다.
설상가상 이러한 상황에서 순수 복음을 전하는 순회전도자들은 소외받기 일쑤였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가이오는 순회전도자들을 잘 분별하여 영접하고 그들과 함께 사역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것입니다.
이단 사상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분별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필요했습니다.
초기 요한 공동체가 정한 기준은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복음의 요소가 있는가?
예수님의 가르침의 요소가 들어 있는가? 등이 중요한 분별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기준은 후대에 정경을 확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가이오는 분별을 위한 기준을 예수님이 주신 진리를 적용하였고 결과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 가이오는 사랑으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상황에서 의심하고 경계하다보면, 신실하고 보호해야 할 지체들까지 피해를 입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공동체에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잘 알고 있던 가이오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공동체에 속한 지체들과 순회전도자들을 대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위와 같이 행하는 가이오를 칭찬하면서 교회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첫 번째는 거짓된 진리를 전파하는 거짓 교사를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공동체가 사랑으로 파송하는 데메드리오와 같은 순회전도자를 영접하여 신앙을 더욱 굳건하게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순회전도자를 함께 일하는 자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 요한의 해결책에서 이 시대의 교회 공동체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찾을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어느 한 사람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 열심을 내고 다른 지체들의 참여를 막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열심이 교회 공동체를 망하게 합니다.
그 예로 오늘 본문에 이어서 등장하는 디오드레베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으뜸이 되기 위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책임을 다하기보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오히려 지도자로 인해서 복음 전파가 방해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혼자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일하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누구와 함께 일해야 할까요?
먼저, 주 안에서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지체들과 함께 협력해야 합니다.
혼자 일하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함께 일하며 동역의 기쁨을 나누어야합니다.
혼자서는 유혹에도 잘 넘어집니다.
혼자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일들을 여럿이 모이면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혼자서는 거짓과 진리를 분별하기도 어렵지만, 함께 하면 대적들을 상대하기쉬워집니다.
특히, 영지주의 사상이 되살아나는 현재는 협력이 중요합니다.
영지주의에 속한 대표적인 이단 두 개만 소개하자면 신천지와 구원파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신천지는 자신들만이 가지고 있는 영적 비밀을 깨달아야 구원 받는다고 말합니다.
자신들의 교주만이 성경의 비밀스러운 영적 지식을 알려주고 풀어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교주가 풀어준 지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진짜 믿음을 가질 수 있고, 성경의 비유와 계시록의 감추어진 비밀스러운 지식을 알아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구원파는 자신의 죄가 사해진 것을 의지와 관계없이 수동적으로 깨달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즉, 회개하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을 깨달음으로만 다시 죄를 짓지 않는 의인이 된다는 영지주의적 교리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우리는 의롭다 여김을 받았을 뿐이지, 의인이 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 안에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하였습니다(딤전1:15).
이렇게 이단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상황에서 독불장군은 유혹에 넘어지기 쉽습니다.
전도서 4:12에 보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동역자와의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 시대의 성도들에게도 중요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지체들과 함께 동역하는 것은 해도되고 않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함께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함께 일하여야 할 대상이 교회 지체들 말고 또 누가 있을까요?
우리는 지체들과 더불어 주님과 함께 일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12제자를 부르셨듯이 오늘 함께 일할 수 있는 동역자들을 부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동역자의 조건으로 돈이나, 명예나, 직위, 학식을 요구하시 않으십니다.
오직 복음을 위해서 아무 조건 없이 동역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 사는 자들을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6-9에 보면,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동역자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지체들끼리 협력하여 선을 이루고, 하나님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주 안에서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주 안에서 함께 일하자고 해서, 모두 신학교가서 목회자가 되자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의 작은 부분들도 하나님과 함께 일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역자가 되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 방법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발휘하여 행하는 모든 일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주님과 함께 일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여러분은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들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이후로 여러분의 삶이 주님의 동역자로 평가받는 귀한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복음을 드러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가며 부활의 증인답게 살아간다면, 여러분은 부끄럽지 않는 예수님의 동역자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 모두 세상이 신봉하는 것들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고, 주님의 동역자로 평생을 살아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