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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寺刹)
불보종찰 통도사
1. 사찰의 의미
사찰(寺刹, 절)이란 부처님을 모시고,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수행을 하여, 깨달음을 이룬 부처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며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찾아가 수행을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성스러운 장소를 말한다.
사미율의(沙彌律儀)에 의하면 '절'이란 "출가제자가 불법을 섬겨 받들어 가르침에 의거해 수행하는 곳"이라 하고 있다. 이에 근거해 볼 때, '절'이란 곧 '수행(修行)의 도량(道場)'을 말한다. 거친 번뇌 속의 우리 마음을 가꾸며 순간의 잘못을 반성하기도 하는 곳이므로, '절'은 '참회(懺悔)의 도량'이기도 하다. 또한 많은 이들을 위한 '교화(敎化)의 도량'이기도 하다.
또한 불교 교리에서 보면 부처님은 진리를 깨달으신 분이고 그 진리를 미혹한 중생들을 위하여 보이셨던 분이고, 스스로 진리를 구현하신 분이기 때문에 법신불(法身佛)이라고 한다. 법신불은 온 세상에 불법이 두루 미침을 의미한다. 그래서 부처님의 제자들인 불자들은 부처님에 대한 존경과 예경의 마음을 간직하기 위하여 부처님을 형상화하여 일정한 장소에 봉안하고 그 곳에 찾아가 스님들로부터 부처님의 법을 들으며, 예불을 올리는데 그곳이 바로 사찰이라고 하는 곳이다.
2. 사찰의 기원
사찰의 기원은 부처님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불교가 일어났던 기원전 6세기 무렵에 수행자들의 생활은 일정한 곳에 머물러 정주(停住)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바라문교 즉 브라만교의 타락에 반기를 든 수행자들을 사문(沙門)이라 일컫었다. 그 사문들의 생활은 철저한 무소유과 유행생활을 이상적인 수행자로서의 삶으로 여겼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도 처음 출가를 하셨을 때 사문의 삶을 사셨다. 붇다가야 보리수 아래에서 위없는 큰 깨달음을 얻으시고 제자들이 생긴 후 제자들에게 사문의 근본생활인 무소유와 유행생활을 철저하게 지킬 것을 요청했으며, 이에 수행자가 필요한 최소한의 4가지 조건을 '4의지(四依止)'라 하는데 이 네가지를 철저히 지킬 것을 강조하셨다.
그 네가지란,
① 걸식(乞食) : 밥은 걸식해 먹는다. 직접 해먹지 말며 또한 신도의 집에 초대되어 가 식사하지 않는다.
② 분소의(糞掃衣) : 남이 버린 천조각을 주어 모아 만든 옷인 분소의를 입는다.
③ 수하좌(樹下坐) : 지붕있는 곳에서 편히 자지 말고 나무 아래에서 좌선과 명상을 한다.
④ 부란약(腐爛藥) : 약은 소의 오줌으로 발효시킨 허술하기 짝이 없는 부란약을 사용한다.
이들 가운데 걸식, 분소의, 수하좌는 세속을 떠난 출가 수행자의 상징이었으며 불제자들은 철저히 준수하였다.
그러나 4월부터 시작되는 인도 여름 날씨 특성상 무더위와 우기(雨期)에 나오는 벌레들의 불살생을 피하기 힘들었다. 잦은 폭우로 도로가 유실되고 탁발하는데 목숨의 위태로움까지 위험성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우기인 3개월동안 탁발과 유행생활을 잠시 중단하는 것을 계율로 정하고 한 곳에 안주하여 생활하는 안거(安居) 제도를 마련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사찰은 건립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수행자들이 우기동안 친적이나 친구 인연있는 집 근처로 가 음식을 확보하고 숲속에 거주하며 수행 생활을 하였다.
이처럼 수행자들은 부처님과 떨어져 수행하는 것이 아쉬워 한 곳에 머물며 수행정진할 것을 갈망하였다. 그러한 열망이 부처님께서 녹야원의 전법 후 마가다국 왕사성 인근에 머물실때 빔비사라왕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빔비사라왕은 부처님께 적당하고 한적한 수행공간을 마련해드리기로 결심하며 다음과 같이 고심을 하였다.
"부처님께서 거처하시는 곳은 어디가 가장 좋을까. 마을에서 그다지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는 곳으로, 설법을 듣기 위해서 부처님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이 왕래하기에 수월한 장소가 필요하다. 더욱이 낮에는 많은 사람이 내왕하여 붐비는 일이 없고 밤에는 소란스러움이 없는, 조용하게 머물며 조용히 수행하기에 알맞은 곳이어야 한다. <사분율> "
이 내용이 훗날 사찰 위치 선정의 기준이 되었다.
당시 부처님을 존경한 빔비사라왕은 불법에 귀의하게 되었고, 빔비사라왕은 불교 교단에 가란타장자의 소유였던 죽림원(竹林園)을 희사받아 기증하게 되었고, 또한 마가다국의 한 부호가 죽림원에 오두막 60채를 지어 기증하게 됨에 따라 죽림원에는 불교 최초의 사찰인 '죽림정사(竹林精舍)가 탄생되었다.
죽림정사터 - 지금도 대나무숲 무성하다
죽림정사 연못
그 뒤 이 소식을 들은 코살라국 사위성의 부호 수닷타 장자는 죽림정사를 찾아 삼귀의와 오계를 받아 불교 신도가 되었으며 부처님께 다음과 같이 말씀을 올렸다.
"원하옵나니 사위성에도 오셔서 사람들을 제도해 주시옵소서"
"그곳에 비구들을 수용할 절이 있겠느냐?"
수닷타 장자는 사위성으로 돌아와 절을 세우기로 마음먹고 알맞은 장소를 물색하다 사위성의 왕자인 기타(Jeta, 祺陀) 태자가 소유 동산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 동산에는 숲과 꽃이 만발하고 수석과 기이한 새들과 짐승들이 조화를 이룬 그림같은 곳이었다. 장자는 기타태자에게 그 동산을 팔 것을 청하였으나 태자는 팔 생각이 없었다.
여러번에 걸쳐 장자가 청하자 태자는 귀찮은 듯 지나가는 말로
"만일 이 동산을 사려거든 금으로 그 동산을 다 채울 수 있겠느냐"
그 말을 듣자 마자 장자는 금을 수레에 싣고와 그 동산을 금으로 채우기 시작했다. 이를 본 태자는 "내가 지나가는 말로 농담을 한 것이었는데 그 땅은 사서 무엇하려고 하는냐"
"완전한 깨달음의 지혜를 성취한 부처님을 모실 절을 지으려고 합니다."
기타태자는 크게 감격하여 그 동산을 내어 주며 그 절에 내 이름을 올릴 수 없겠느냐며 부탁해 수닷타 장자는 크고 웅장한 절을 지은 후 그 이름을 '기원정사(祺園精舍)'라 했다. 다른 말로는 '기수급고독원(祺樹給孤獨園)'이라 불렀다.
기원정사 터
'기원정사란 '기타태자 동산에 세운 정갈한 절'이라는 뜻이며, '기수급고독원이란 '기타태자의 숲 즉 기수(祺樹)에다가 수닷타장자의 한역 칭호인 급고독(給孤獨, 외로운 사람을 돕는 사람)이 세운 사찰'이라는 뜻이다.
기원정사는 죽림정사 이후의 부처님 당시 불교 최대의 사찰로 부처님께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불법을 펼치시던 곳 중의 하나다.
기원정사에는 오늘날 사찰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요사채들 즉 부처님께서 머물어셨던 향전(香殿)을 비롯한 승당(僧堂), 근행당(勤行堂), 화당(火堂), 경행당(經行堂), 주방인 공양간(供養間), 창고, 화장실인 해우소 등이 있었다고 한다.
죽림정사와 기원정사 이외에도 녹자모강당(鹿子母講堂), 대림정사(大林精舍), 왕원정사(王園精舍), 온천정사(溫泉精舍) 등 유명한 사찰들이 부처님 당시 건립되었다고 한다.
정사 즉 사찰은 불교 교단의 공동 재산이었으며 안거기간 수행을 한 곳에 모물며 목적으로 만들어진 사찰들이다.
사찰은 정진을 위한 수행 공간으로서 수행자들의 점차 공동 주거지로 정착되어 갔으며 당시 수행자들의 생활 지침이었던 4의지를 지키려는 것이 점차 희미해져갔다.
3개월 안거가 끝난 뒤에도 수행자들은 유행생활로 돌아가지 않고 정사에 머무는가하며, 분소의 전통도 점차 사라져 갔고, 탁발인 걸식 또한 신도들이 정사에서 만들어 주는 음식을 받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그리하여 점차 수행자들의 생활은 유행생활에서 정주생활로 바뀌어 갔다.
하지만 이러한 수행자들의 사찰 정주생활은 불교 교단을 후세까지 존속시킬 수 있는 큰 요인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한편 이러한 사찰의 건립은 불교건축, 불교미술, 불교공예, 불교조각, 불교수행 등 불교문화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3. 사찰의 어원(語原) 및 유래
사찰(寺刹) 또는 사원(寺院)이라는 말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사찰의 어원은 상가람마(Samgharama)에서 출발한다. 상가람마는 승려들이 모였음을 뜻하는 상가(samgha)와 거주처를 의미하는 아라마(arama, 원림園林)와 합쳐진 이름이다. 그래서 사찰은 비구(남자스님), 비구니(여자스님), 우바새(남자 신도), 우바이(여자 신도) 즉 사부대중(사부대중 samgha)이 모여서 수도하는 곳(arama)을 의미한다.
또한 사찰은 범어로 '비하라(vihara)'라고 하고 비하라(毘訶羅)라고 음역하며, '수행을 하는 도량'이라는 뜻으로 주처(住處), 유행처(遊行處) 등으로 번역한다.
사찰(寺刹)에서 찰(刹)이란 산스크리트어 laksata로서 깃대 혹은 탑의 중심부를 일컫는 말이다. 이것은 불당 앞에 찰(刹), 당간을 세웠던 풍습에서 유래된 듯하다고 한다. 솟대와 같이 찰간, 당간을 세워 신성한 장소임을 표시하고 여기에 깃발을 매달아 행사가 있음을 알리거나 그 깃발의 색에 따라 화엄종, 법화종 등 종파를 표시하기도 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사찰은 중국에서 상가람마(Samgharama)의 음을 따서 승가람마(僧伽藍摩)로 번역하였으며, 부처님 당시 거주처를 의미하는 아라마(arama, 원림園林)가 확장되어 종합수도원의 성격을 띠게 되어 중원(衆園), 승원(僧院)으로 축약해 불리웠고, 상가람마를 줄여 '가람(伽藍)'이라 했다. 또 사부대중이 모여 수행하는 곳이라 하여 중원(衆園)이라 했다. 또, 사원(寺院), 정사(精舍) 등으로도 부르는데 모두 같은 뜻이다.
절을 사(寺)라고 부르게 된 것은 중국의 후한(後漢) 때이다. 당시 중국에 멀리 외국에서 온 승려나 사신을 머물게 하고 접대하던 관청인 사(寺)에서 유래한다. 그래서 사(寺)라는 말은 중국에서는 사찰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 이전에는 관아에 붙여 쓰던 말이었다.
중국에서 사(寺)로 불리게 된 유래를 살펴보면 후한(後漢)의 명제(明帝) 연평(永平) 10년(67)에 인도의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라는 두 스님이 흰말인 백마(白馬)에 장경(藏經, 경전)을 싣고 후한의 서울인 낙양(洛陽)에 왔다고 한다. 그 때 후한에서는 두 스님이 외국인이므로 관례에 의해 외국인을 위한 외무부 소속 관아(官衙)인 홍려사(鴻廬寺)에 머물도록 했다. 그러나 그 후 두 스님이 계실 마땅한 곳이 없어 그대로 그곳에 머물도록 하면서 홍려사라는 이름을 두 스님이 타고 오신 흰말을 기념하여 '백마사(白馬寺)'라고 고쳐부르게 되었다 한다. 이것이 중국 최초의 사찰이며 그 뒤로 중국에서는 불도를 수행하는 승가(僧伽)의 거처를 사(寺)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백마사
중국에서는 사찰을 '사원(寺園)'이라는 부르는데 사원의 원(園)이라는 말은 원래 사찰의 담장, 울타리를 의미했으나, 후에 담장을 두른 집을 의미하는 원(院)으로 변천되었다.
중국 당나라때 왕의 칙명에 의하여 대자은사(大慈恩寺) 등에 번경원(飜經院)을 세웠는데 이것이 불교와 관련된 건물에 원(院)이라는 이름을 붙인 효시라고 한다. 그리고 송나라 시대에는 나라에서 세운 큰 사찰에 원호(院號)가 붙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원(院)을 쓴 예는 신라시대 당나라 산동반도 등 신라사람들이 머문 집단 거주지를 신라방(新羅坊)이라 하고 신라인이 세운 절을 신라원(新羅院)이라 하는데 그 중 장보고가 세운 적산촌 '법화원(法華院)'이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사(寺)를 절 사(寺)라고 읽는데 사찰은 오로지 불교의 가람을 뜻한다. 사찰(寺)은 흔히 사찰에 가면' 절(拜禮)'을 많이 해 절이라고 한다고 하고, 일본 책에도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 한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중국 전진(前秦)왕 부견(符堅)이 순도(順道)로 하여금 불상과 불경을 가지고 오게 한 것으로, 2년 뒤에는 다시 진(晉)으로부터 아도(阿道)가 들어와 다음해 2월 나라에서는 성문사(省門寺, 또는 肖門寺)를 지어 순도를 있게 하고,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지어 아도를 머물게 했다고 전해지는데 '성문사(또는 초문사)와 이불란사' 이 두 절이 우리 나라 최초의 가람이라 한다.
또한 신라에서는 제19대 눌지왕 때에 묵호자(墨胡子)가 일선군(一善郡)의 모례의 집에 와 머물면서 몰래 불교의 가르침을 전했다고 한다. 모례는 원래 국어의 ‘털례’를 한자로 음사한 것으로 ‘털례’의 집에 불상이 모셔져 있고, 불교인들이 모여서 믿음을 행할 수 있는 곳이었으므로 털례의 집은 가람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에도 부처님을 모시고 불교를 행할 수 있는 집을 ‘털례’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 ‘털례’가 사찰 즉 '절'로 변한 것이라고 한다. 일본의 사(寺)를 일컫는 '데라(寺)'도 털례에서 변천된 것이라는 학설이 있다. 즉 모례라는 말이 털례- 철례-절례-절레-절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1) 인도
인도 최초의 절은 마가다국 빔비사라왕이 부처님께 헌사했다는 '죽림정사(竹林精舍)'이다. 죽림정사는 중인도 마갈타국의 수도인 왕사성에 자리하고 있었다. 부처님과 제자들이 죽림정사에서 기거하며 수행과 설법으로 중생을 교화했던 장소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의 사찰은 그 이전에서부터 있었다고 한다. 부처님이 태어나시고, 성불하신 그리고 설법하시고, 열반을 보이신 4대 성지(룸비니동산, 붇다가야, 녹야원, 쿠시나가라)가 모두 사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 절이라고 표현되었던 것은 수행하는 승려들의 거주처로 한정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아바사(avasa 住處주처), 아라마((arama 園林원림)의 구분이 있었다.
'아바사(avasa)'는 임시 거주처였다. 비가 많이 내리고 뭇생명이 소생하는 기간인 우기(雨期) 3개월 동안 생명을 밟아 죽일 수 있다는 염려와 해충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승려들은 홀자가 아니면 몇 사람씩 짝을 이루어 동굴 등에 거처를 정하여 살곤 하였는데 이것이 '아바사(住處주처)'인 것이다.
'아라마(arama)'는 영구적인 거주처를 말한다. 원림(園林)이라고 번역되는 '아라마'는 왕사성의 '죽림정사', 사위성의 '기원정사' 등 경전 상에 나타나는 많은 승려들이 모여 수행하는 곳을 뜻한다. 이 아라마가 넓어져 종합적인 성격을 띄게 된 것이 '승가라마(samgharama)'이며 이것을 '중원(衆園)' 또는 '승원(僧園)"이라고 한다.
'중원'에는 승가(僧家)의 운영에 필요한 건물들이 있어 비구들이 머무는 방과 포살과 자자를 위한 포살당((布薩堂), 법을 설하는 설법당(說法堂), 식당, 경행당(經行堂)등이 갖추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바사'와 '아라마'는 부처님 입멸 후 다른 양식으로 변화되게 된다.
부처님의 사리(舍利)를 나눠 안치한 '사리탑'이 절의 중심부에 놓이게 되었으며, 대승불교의 흥기와 함께 조성되기 시작한 탑과 불상을 모신 '예불당(禮佛堂)'이 절의 구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비하라'와 '아란야', '승가라마'로서 '승가라마'는 '비하라'와 일치한다고 할 수 있었다.
'비하라(毘訶羅 Vihara 정사)'는 대일경(大日經)의 설명에 의하면 머무르는 곳(住處)이며, 유행처(遊行處)의 뜻을 갖고 있어 지혜와 덕을 연마한 수행자들이 살 수 있도록 만들어진 사택(舍宅)을 의미하였다고 한다. 비하라에는 예불당이 갖추어져 있어 종합적인 수도원적 성격을 띄는 것으로 '정사(精舍)'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아란야(阿蘭若)'는 원래 숲 속이란 뜻이라고 한다. 세속을 멀리 한 곳, 새 지저귀는 소리를 제외한다면 일체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있는 곳으로 ‘수행하기 적당한 장소’로서 그 의미가 달라지기도 한다. 이것이 부처님 당시의 절과 부처님이 입멸하시고 난 후 인도의 절의 모습이었다. 모든 것은 수행하기 적합한 장소로서 수행을 위한 정진의 삶이 깃들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중국
중국에서는 수행자들을 위해 '객사(客舍)'라는 것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외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설치한 '홍려사'라는 관청이었으나, 한(漢)나라 명제(明帝) 영평 13년 인도의 스님 마등(摩藤)과 축법란(竺法蘭)이 흰 말에 불경(佛經)을 싣고 낙양에 들어와서 최초로 '홍려사'에 머문 것이 연유가 되어 이후 스님들이 머무는 곳을 '사(寺)'이 이름하게 되었다고 한다. 후에 그 홍려사는 '백마사(白馬寺)'라 고쳐 불렸다.
중국의 불교정착과정에서 사(寺)에 대한 각각 다른 명칭들이 생겨나게 된다. 그 첫번째가 정주(淨住)로 더럽고 탁한 것이 가히 함께 머물 수 없다는 뜻이며, 두번째는 법동사로 법답게 음식을 받을 수 있는 곳을 뜻하며, 세번째 출세사(出世舍)로 세속을 떠나 수행하는 장소를 말하고, 네번째는 추잡하고 포악함이 머물지 않는 곳으로 정사(精舍)라 하였으며, 입과 몸과 뜻으로 짓는 심구의 삼업(三業)에 물들지 않는 '청정원(淸淨園)'이라 하였다고 한다.
찰토(刹土)가 견고하고 도인이 거주하는 곳으로 금강찰(金剛刹), 기원정사에 연화장세계가 있어 그 세계를 칠보(七寶)로서 장엄함을 일러 적멸도량(寂滅道場), 그 안에 들어선 사람은 번뇌와 서로 접하지 않아 적멸에 가깝다는 뜻의 원리처(遠離處), 안락을 행함이 같아서 그 행이 법에 가깝다는 친근처(親近處) 등 절을 부르는 수많은 이름이 생겨났다.
이렇게 절을 말하는 많은 이름들이 있었으며 그 절을 포괄적인 의미로 말하는 또 다른 이름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총림(叢林)이다. 총림은 네 가지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고 한다. 선원(禪院), 강원(講院), 염불원(念佛院), 율원(律院)이 그것이다. 강원이란 부처님이 설하신 경전을 배우는 것이며, 율원이란 사분율 오분율 등 불교교단을 유지하게 위해 부처님이 설하신 계율을 연구하는 곳이며, 선원은 참선수행 도량을 일컫고, 염불원은 예경(禮敬) 및 모든 사찰의례를 관장하는 곳으로 강원에 강주(講主), 율원에눈 율주(律主), 선원에는 유나(維那) 혹은 선주(禪主), 염불원에는 노전(爐殿) 등의 책임자가 있게 된다. 그리고 각각 4원(院)을 총괄하는 스님으로 주지(住持)가 있으며 방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중국에서 총림이라 하면 승려와 세속의 사람들이 한 곳에 머무는 것을 말하였다. 그들이 서로 화합하고 한 곳에 머무는 것이 마치 많은 나무들이 숲을 이룬 것과 같다고 하여 총림(叢林)이라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총림은 선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종합 수도장을 말하였다. 전단향나무가 자라는 숲에 잡목이 끼어 자랄수 없고, 덩굴나무가 자라고 있다고 하더라도 전단향 나무에 의해 곧음을 유지할 수 있는 곳, 즉 인도의 비하라(毘訶羅)가 중국식으로 변형된 이름이 총림이라는 것이다.
또한 인도의 아란야(阿蘭若)는 중국식으로 변형되어 사(寺), 암(庵) 등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3) 한국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시대에 세워진 성문사(省門寺 또는 초문사)와 이불란사(伊弗蘭寺)가 최초의 절이다.
사찰을 우리 나라에서는 '절'이라고 하는 '절'이란 명칭의 어원은 고구려 승려 묵호자가 신라 일선군( 경북 선산)에 있는 '모례(毛禮)의 집'에 와 머물며 불교를 전파하였는다는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 처음 눌지왕 때 묵호자란 승려가 고구려로부터 와 신라 일선군에 이르니 그 고을사람 모례(毛禮)는 자기 집안에 굴방을 만들어 그를 있게 했다. …또 비처왕 때는 아도화상이란 이가 있었는데, 시종하는 사람 3명을 데리고 역시 모례의 집으로 왔는데, 그를 시종하던 사람은 남아 있으면서 경율(經律)을 가르쳤는데…”신라본기 권4에 나타난 문헌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모례의 집, '모례'는 이 표기로서 '텔례'라 적게 되고, 이것이 간소화되어 '털'이 되었고, '덜'로 변하여, 이후에는 '절'로 바뀌었다는 설이다. 이것이 우리 나라 '절'의 어원이다. 또한 사찰에서 사부대중이 절을 많이 한다고 해서 '절'이라는 명칭이 생겼다는 설도 있다. 말이 털례- 철례-절례-절레-절로 변하였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우리나라에 사찰이 가장 많이 세워진 시기는 통일신라 때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의상대사가 화엄사상을 전개한 화엄십찰(華嚴十刹)이다. 영주 봉황산 부석사, 중악 팔공산 미리사, 지리산 화엄사, 가야산 해인사, 서산 가야산 보원사, 계룡산 갑사, 금정산 범어사, 비슬산 옥천사, 모악산 국신사, 한주 부아산 청담사 등을 말한다. 그러나, 이들 사찰이 모두 의상에 의해 창건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초기까지는 우리나라 불교가 가장 번창한 시기로서 이때 화엄종 등 5교가 생겼으며, 뒤이어 선(禪)을 주장하는 구산선문(禪門九山)이 생겼다. 구산선문은 가지산문(장흥 보림사), 실상산문(지리산 실상사), 동리산문(곡성 태안사), 성주산문(성주산문), 사굴산문(강릉 굴산사), 사자산문(영월 흥녕사), 희양산문(문경 봉암사), 봉림산문(창원 봉림사), 수미산문(해주 광조사) 등이다.
한국의 삼보사찰이란, 불교의 삼보를 대표하는 사찰로서 양산 영취산 통도사(佛寶), 합천 가야산 해인사(法寶), 승주 조계산 송광사(僧寶) 등을 가리킨다. 또, 우리 나라는 중국불교의 명칭을 그대로 이어 받은 '총림'제도가 있으며, 한국의 5대 총림이란 선원, 강원, 율원을 모두 갖춘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 수덕사, 백양사 등과 같은 큰 사찰을 지칭하는 말이다. 최근에 동화사, 범어사, 쌍계사, 법주사가 총림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한국 사찰은 25개 본사와 그에 딸린 각각의 사(寺), 암(庵)이 형성되어 있다. 이것을 굳이 구분하여 말하지 않고. '암'를 '사'보다 규모가 작은 것을 뜻하며 사용되지만 그런 구분을 할 필요없이 '절'이나 '사찰'이라 하면된다.
4. 사찰의 명칭
사찰은 수행하는 장소라는 같은 의미지만, 사찰의 명칭은 아래같이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절'에 대한 명칭은 무수히 많다. 예를 들어, 사(寺), 사원(寺院), 사찰(寺刹), 가람(伽藍), 도량(道場), 정사(精舍), 총림(叢林) , 중원(衆園) , 승원(僧院), 청정원(淸淨園), 선원(禪院), 암(庵), 사암(寺庵) , 말사(末寺), 포교원(布敎院) 등이다.
사(寺) : '절'. 부처님을 모시고 부처님 가르침대로 닦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사찰(寺刹) : 대중이 모여 수행하는 도량. '사원(寺院)'이라고도 한다.
가람(伽藍) : 많은 대중들이 모여 살며 수행, 법회와 행사를 하는 곳.
도량(道場) : 부처님이 상주하며 불법의 도를 선양하고 구현하는 곳.
정사(精舍) : 수행을 하는 청정한 곳, 깨끗한 집.
총림(叢林) : 강원, 선원, 율원, 염불원이 두루 갖춰진 사찰. 원래는 모든 사부대중이 모여 수행하는 곳.
중원(衆園) : 중원이라는 말은 불교를 신봉하고 수행하는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사는 집.
승원(僧院) : 스님들이 수행하는 곳.
청정원(淸淨園) : 입과 몸과 뜻으로 짓는 신구의 삼업(三業)에 물들지 않는 청정한 곳.
선원(禪院) : 참선을 위주로 하는 사찰.
암(庵) : 암자, 규모가 작은 사찰 또는 큰 사찰에 딸린된 부속 사찰.
사암(寺庵) : 사찰과 암자를 동시에 아우러는 말.
말사(末寺) : 교구본사에 소속된 사찰.
포교원(布敎院) : 포교를 중점적으로 하는 사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