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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인-07: 박재하 (朴栽夏, 男, 1923年 2月23日生 충북 영동군 심천면) | |
*최초증언일: 1994. 9. 20 | *진상규명회 등록고유번호: OFIWE1945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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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반도제1차징용영장” 오미나토해군시설부 관할구역인 미사와비행장까지 끌려가 활주로도 만들고 비행기 격납고를 만들었지― |
박재하씨는 1923년 충북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 365번지에서 박씨 가문 1남1녀 중 외아들로 태어나 19세 되던 해에 결혼하여 부모를 모시고 농사를 지으며 단란하게 살았다. 그는 대전철도국에 근무하던 때에 일본으로 끌려갔다. 면서기가 “조선반도제1차징용영장”이라는 종이 한 장을 들고 와서 며칠 뒤에 영동군청으로 집결하라는 위협적인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그는 1994년 5월 현재 그가 마음에도 없었던 일본의 북쪽 가장자리 땅으로 끌려가던 그 집 그 자리에서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네 칸 방 집에서 살고 있다. 지금은 아들들이 장성하였고, 손자들이 공부를 잘하여 좋은 대학에 다닌다는 그는 애써 통한의 시절을 감추려는 안색이었으나 곧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무주구천동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고당리 앞을 지나면서 넓고 깊은 내를 이루어 심천深川이라 부르는 심천면 고당리에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이 유유히 흐르는 물과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있는 산자락은 사는 이들의 마음을 평온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고당리는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불리는 조선 세종 때 사람 박연 선생의 유적이 있는 마을이기도 하며 또한 박연 선생의 후손인 박재하씨는 어릴 적부터 총명하여 마을의 귀재鬼才로 총애寵愛을 받으며 당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전철도국에서 임시직으로 일하게 되었다. 사시장청 흐르는 깊은 강에서 물놀이를 해왔기에 수영을 누구 못지않게 잘한다는 그는 아마 심천 사람이었기에 악몽 같은 마이즈루만 바다 한 가운데에서도 살아날 수 있었다.
“조선반도제1차징용영장”을 내던지고 간지 며칠 뒤 아침 일찍 박재하씨의 집으로 들어 닥친 일본 순사가 연행해감에 따라 울부짖는 가족을 뒤로 한 채 집결장소인 영동군청으로 갔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다만 해군군속으로 징용된다는 말 한마디를 들었을 뿐이다. 영동군청에 가 보니 상촌과 용화를 제외한 영동군의 각 읍 면 사람 1백50명이 끌려와 있었다. 제천군, 단양군 그리고 괴산군에서 끌려온 5∼6백 명의 장정들과 함께 곧바로 열차에 실려 부산에 당도했다.
부산까지 연행한 뒤 일본헌병과 순사들은 한국인 장정들을 목선에 태워 영도로 끌고 가 예방접종과 신체검사를 강요한 다음 하룻밤을 재우고 한국인 징용자 수송선인 금강호에 짐짝처럼 실어 일본의 하카다항에 내려놨다. 여기까지 온 한국의 장정들은 이미 대기하고 있던 기차에 옮겨졌는데 박재하씨도 예외가 아니었다. 도쿄東京의 우에노上野역에서 기차를 한번 갈아탄 뒤 며칠을 달려보니 일본의 북부지방인 아오모리현 후루마키라는 곳에서 내렸는데 역시 대기하고 있던 군용트럭에 실려 오미나토해군시설부 관할구역인 미사와비행장三澤飛行場까지 끌려갔다. 여기서부터 그들은 집단 수용되어 파란만장한 고난의 세월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를 어찌 말로 다 형용할 수 있겠는가?
필자가 박재하씨를 찾아간 날은 1994년 9월20일이었다. 이에 앞서 영동신문 박기자가 우키시마호 사건 생존자를 탐문 취재하여 상세하게 기고한 바 있었다. 신문사측의 보도자료 제공과 친절한 안내와 배려로 영동군 지역의 생존자들과 처음부터 서로 신뢰로서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우키시마호폭침사건 당시 생존자들은 진상조사를 한다며 돌아다니는 사기꾼들한테 회비 명목으로 돈을 갈취 당하던 때였다. 그래서 진상규명회 회원들이나 필자가 만나려 해도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기도 했다. 박재하씨를 처음 찾아갔던 날에는 가족들과 함께 잘 차려놓은 점심식사를 같이했다. 두 번째 만남에서는 심천면 장동리 이기출씨, 학산면 학산리 이건태씨, 심천면 약목리 박이용씨를 만날 수 있었다. 세 번째 만남은 신문기자들과 동행했는데 틀에 짜인 질문 공세 때문이었던지 새로운 기억을 떠올린다거나 통한의 세월을 엮어내지는 못했다. 나는 박재하씨가 일본말에 능숙했고 분대장으로서 책임감을 갖고 일했고, 고향에서 일본 전쟁터로 함께 연행당했던 사람들에게 동지애同志愛를 충분히 발휘했다는 점으로 보아 숨은 애환哀歡이 얼마든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대전철도국에서 일하다가 왜 그만두게 되었습니까?」
「어느 날인가 철도국에서 일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오셔서 집으로 가야 된다는 말씀을 하셨습지요. 징용영장이 나왔다는 거요. 일본 순사들이 매일같이 찾아와 가족들을 못살게 굴어 살 수 없으니 네가 징용에 응해야 되겠다. 그렇지 않으면 순사들이 계속해서 우리 가족을 괴롭히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별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 하루를 지내고 나니 일본 순사가 집으로 쳐들어 온 것이지요. 따라갈 수밖에 없었지요.」
「일본의 아오모리까지는 어디를 경유하여 어떻게 갔습니까?」
「1943년 음력 4월19일 영동군청에 일단 집결하였다가 영동역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까지 갔습니다. 부산항에서 금강호를 타고 일본의 하카다에 도착하여 대기하고 있던 기차를 또 타고 감몬해저터널을 지나 도카이, 오사카, 나고야를 거쳐 동경의 우에노에서 신사참배를 해야 된다 해서 한번 내리고는 곧바로 아오모리로 갔습니다. 아오모리에서는 트럭에 실려 미사와까지 끌려갔습지요.」
「미사와에서는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보통학교를 졸업한 나는 일본말을 잘한다 하여 분대장을 시키더군요. 1개 분대가 19명이었는데 다른 사람이 일을 잘못하거나 늑장을 부리면 분대장인 내게 책임이 돌아와 몽둥이로 두들겨 맞게 되는 것이지요. 활주로도 만들고 비행기 격납고를 만들었지요. 진흙위에 통나무를 깔고 롤러로 다진 다음 디귿자 모양으로 둑을 쌓는 일이었습니다. 지하에 탄약고를 만들기도 하였는데 진흙밭이라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박선생님께서 일한 미사와비행장에는 한국인 몇 명 정도가 일했습니까?」
「내가 소속된 14부대에는 6개의 숙사가 있었는데 1개 동에서 50명에서 60명이 합숙했습니다. 14부대와 가까운 곳에 11, 12, 13부대가 있었고 역시 같은 규모였지요. 모두 징용된 한국 사람들이었는데 부대마다 3백명 정도지요. 미사와비행장 지역에 1천명 이상 되었던 것 같습니다.」
「감독하던 군인한테 매도 많이 맞았을 텐데요」
「말도 말아요. 다른 사람들이 잘못이라도 하면 분대장만 얻어터지는데 아침 조회 때부터 인원보고 잘못한다고 때리고, 게으름 핀다고 때리고 일하다가 다쳤다고 때리고 업어치기로 팽개치는 데는 어떻게 항의할 도리가 없습니다. 부상자가 생겨도 모두 동료들인데......., 약소국민의 서러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일본 해군 말고 다른 일본 사람들은 없었습니까?」
「있었지요. 그런데 일본놈들은 노약자, 신체불구자 그리고 노름쟁이 같은 사고뭉치들만 왔기 때문에 일도 못하고 능률도 없고 오히려 괴롭히기만 했지요.」
「월급은 받았습니까?」
「월급이래야 하루 65전이었는데 집으로 보내기도 했고 또 배고프니까 먹을 것을 사 먹어야 했지요. 받았으면 뭐합니까? 마이즈루 바닷물 속에 다 내던져 버렸는데......., (어이없이 허탈한 웃음)」
「미사와에서 오미나토까지는 어떻게 알고 가게 되었습니까?」
「일본이 전쟁에 패망하고 난 뒤 5일 동안 우리는 소일거리 없이 지냈습니다. 19일이 되자 한 장교가 우리를 모두 모아놓고 ‘짐을 싸라. 당신들은 처자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차를 타고 오미나토로 가게 되었지요.」
「오미나토에서는 배를 어떻게 탔습니까?」
「오미나토에 가니 이미 많은 한국 사람들이 배를 타기 시작했더군요. 4척의 거룻배가 오미나토 잔교에서 바다에 떠 있는 우키시마호까지 하루 종일 한국 사람을 실어 날랐습니다. 시모키타의 다른 가까운 지역에서 일하던 한국인들 보다 우리는 오미나토항에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맨 나중에서야 배를 탈 수 있었습니다. 승선 허가 같은 절차는 없었고 승선하는 사람들 이름을 적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저 부모와 처자식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쁨 뿐이어서 주위를 살펴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우키시마호에는 대략 몇 명이나 탔을 것으로 생각되십니까?」
「2년 전에 어느 기자에게 7천명 정도는 탔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배의 크기나 배안이 온통 빽빽이 들어찼었다는 점을 상기해 볼 때 7천명 정도라 해도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승선자 수나 사망자 수를 "몇 명이다." 고 단정해서 말할 수 없는 것이 당시의 상황입니다. 내가 정확한 근거와 숫자를 댈 수 있다는 것이라면 미사와에서 일했던 한국인 6백명에서 7백명 모두가 오미나토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곧바로 우키시마호를 탔다는 점입니다.」
「우키시마호의 승무원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일본 해군인데 높은 계급은 보지 못했고 주로 하사관급 정도의 사병들을 봤습니다.」
「우키시마호가 오미나토항을 출항한 뒤 항해할 때 배안에서 폭침과 관련될 만한 소문을 듣지는 못했습니까?」
「그 같은 소문은 듣지 못했고 마이즈루만에서 폭발소리가 나기 바로 전에 무슨 목적인지는 몰라도 고무보트를 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장교들이 먼저 그 구명보트를 타고 뭍으로 나갔습니다. 또 일본 해군들은 대낮부터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으며 ‘갑판위에 있는 조선인은 모두 배안으로 들어가라.’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소리쳤습니다. 배안에 있는 해군들에게는 회의가 있으니 밖으로 나와 갑판위로 올라오도록 했습니다.」
「배가 폭발하던 순간의 상황을 말씀해 보시지요.」
「우키시마호가 마이즈루만에 들어설 때는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날씨가 너무 무더워 바람을 쐬려고 갑판에 나와 서 있는데 갑자기 쾅!〜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내 몸이 1미터나 튀어 올랐지요. 배의 가운데 쪽에서는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배는 이미 두 동강으로 갈라지기 시작하더군요. 폭음은 한번 들었고 물기둥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폭발소리가 나자 어느 해군이 ‘여기는 마이즈루만이다. 육지와 가까워 수심이 낮으니까 이 같은 큰 배는 완전히 가라앉지 않으니 안심하라.’고 소리치더군요. 배 주위의 바다는 온통 기름으로 덮였고, 배의 아래층에 있던 사람들은 서로 엉켜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여기저기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며 살려달라는 외마디 소리 뿐이었지요. 얼마가 지났을까 인근 마을 주민들이 예닐곱 척이나 될까 하는 작은 동력선과 무동력선을 몰고 다가와 구조하더군요. 나는 어려서부터 강물에서 수영을 잘했으므로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먼저 배에 태워주며 헤엄치고 있었지요. 그런데 구조하던 일본 사람들이 ‘위험하니 빨리 배에 오르시오.’ 하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으나 계속해서 대 여섯 명을 더 태우고 나도 구조선에 올라탔습니다.」
「그 아수라장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날 수 있었습니까?」
「당시 미사와에서 오미나토에 도착해 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기구치 뜬다리 부근에서 대기하고 있더군요. 이미 배에 탄 사람도 많았습니다. 우리들 영동군 사람들이 많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배를 마지막에 탔으므로 선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갑판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갑판위에 서 있다가 초롱초롱한 정신으로 상황을 살피다가 능숙한 수영 솜씨 덕분에 살아났지요.」
「몇 명이나 살아났다고 짐작되십니까?」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뭍으로 나와 보니 그 때까지 배가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었지요. 밖으로 나온 사람은 병원이다 수용소다 해군부대다 하여 다들 뿔뿔이 흩어져 누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서야 미사와에서 일했다던 사람을 칠 팔 십 명 정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나머지는 다 죽었겠지요.」
「구조된 다음에는 어떤 처우를 받았습니까?」
「가진 걸 바다에 다 던지다 보니 모두들 벌거벗은 모습이었지요. 온몸이 기름투성이고 몸에 걸친 거라고는 없었지요. 주먹밥을 먹으며 3일이 지났는데 그제서야 해군 군부에서 다 떨어진 군복을 한 벌씩 주더군요. 20일여 동안 속옷도 없이 그 군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사고가 난 뒤에 고향에는 어떻게 돌아왔습니까?」
「해군 군부에서 보름이나 지났을까 할 정도를 지냈는데 마이즈루에서 배를 타고 가려면 타라더군요. 수용소를 옮기려고 배를 타라고 했던 것인지 실제로 부산으로 보내려고 그랬는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두 번 다시 속지 않겠다고 했지요. 그리고는 교토를 거쳐 오사카를 지나 결국은 센자키에서 다시 배를 타고 부산항에 도착하여 20여일 만에 고향집까지 왔습니다.」
「강제로 연행될 당시 탈출할 생각은 없었습니까?」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야 말하면 뭐하겠습니까. 부산에 도착하니 헌병이 꽉 들어찼는데 탈출이란 엄두도 못 낼 일이었지요. 나이가 나보다 열 살 정도 많은 동네 사람이 부산까지 같이 갔는데 그 사람은 항문 치질을 손톱으로 집어 뜯었나 봐요. 피가 심하게 흘러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처리되어 집으로 돌아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한 달 뒤에 홋카이도로 끌려갔다더군요.」
「어떻게 미사와에서 홋카이도 소식을 들을 수 있으셨죠?」
「우리들이 먼저 갔고. 뒤따라 계속 들어왔잖아요. 충청도에서 사람들이 계속해서 들어오니까 그 소문이 꼬리를 물고 내 귀에까지 들린 게지요. 미사와가 그랬어요. 끝이 눈에 보이지도 않아. 워낙 넓으니까 일할 사람이 많아야 했거든.」
한국에서 끌려간 힘 좋고 건장한 젊은이들은 아오모리현 미사와비행장에서 군사훈련을 받지 않은 것으로 보아 순전히 막일을 시킬 셈으로 끌고 갔다. 몽고 유목민의 파오같이 생긴 통나무집에 수용되어 매일같이 공사장을 왕복하며 짐승처럼 일만 해야 했다. 물론 휴식시간이나 자유시간은 허용되지 않았으며, 항상 해군 장교들의 감시를 받았다. 이유 없이 얻어맞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고름이 차도 치료받을 처지가 아니었다. 숙소 한가운데에는 난로를 피우고 둥글게 누워 잠을 잘 수 있도록 했는데 침상을 2단으로 만들었으므로 50명에서 60명 정도가 합숙할 수 있었다. 아오모리현 미사와에는 해군 11, 12, 13, 14부대가 있었는데 지역이 너무 넓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미사와에서 우리가 한 일은 비행기를 감춰 두려는 둑을 쌓는 일도 했어요. 미사와 지역은 모두 진흙땅이라서 진흙위에 소나무를 베어다 깔고 디귿자 모양으로 높게 쌓아 올리고 지붕을 덮어 비행기가 들어갈 수 있도록 했지요. 그리고 진흙탕에서 방공호를 파기도 했고 무기와 폭탄을 저장하는 지하실을 팠습니다. 한 10미터 여를 파내려 가면 그 때부터는 흙을 떠올려야하기 때문에 어지간한 힘으로는 못합니다. 사고뭉치만 모인 일본 놈들은 이처럼 힘든 일은 못했습니다.」
군대식으로 조직된 노무자들은 24시간 감시와 통제 속에서 굶주림을 면치 못하며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온종일 일해야 했다. 미사와의 허허벌판 한 모퉁이에 자리 잡은 해군 14부대의 한국인 노무자들의 명단 유무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민간인 복장으로 사무실을 드나드는 사람이 있었으나 그 사람의 소속은 알 수 없었는데 그들이 노무자 명부를 관리한 것이 분명하단다. 그들은 하청업체의 노무관리자로서 모집책일 수 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박재하씨는 일본말을 잘하여 분대장으로 뽑혔는데 다른 사람이 잘못해도 모두 분대장에게 책임을 돌렸다. 그 때마다 몽둥이로 얻어맞았다. 진흙을 나르는 일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다른 막일은 똑같았다. 하루는 이질에 걸린 환자를 병원으로 데리고 가게 되었다. 이리저리 다녀도 병원도 약도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바닷가에서 고등어를 살 수 있었다. 일본말을 할 줄 아는 박재하씨는 이 집 저 집으로 다니면서 요리를 부탁했는데 모두 거절당하고 마지막으로 어느 한 집에서 아주머니한테 부탁하여 승낙을 받았다. 그 아주머니가 고등어를 끓여 차려준 밥을 같이 간 사람들과 먹을 수 있었다. 너무나 고마워서 아들에게 주라고 3원을 아주머니에게 건넸으나 받지 않았다. 그러면서 ‘내 나라를 떠나 여기까지 와 부인도 가족도 없이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 면서 일본말을 잘하는 그 아주머니가 나도 조선인이라고 말하였다. 마음속으로 깜작 놀라 물었더니 전라도에서 왔다고 했다. 박재하씨가 아주머니에게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 이유는 묻지 않았단다. 이처럼 미사와비행장 인근 마을에서도 조선인 일가족이 살았다. 이 날 배가 아팠던 동료는 고등어찌개와 밥을 실컷 먹고 설사병이 완전히 나아 좋아하기도 했다는 얘기를 들려줬다.
「우키시마호 폭침과 같은 엄청난 사건이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정치적으로 들먹이는 얘기는 굳지 하지 않으렵니다. 다만 수 천 명이나 되는 젊은 생명이 죽도록 일하다가 남의 나라 땅에서 억울하게 죽은 것만은 사실입니다. 어찌되었든 해방되어 조국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빚어진 큰 사건은 온 국민의 관심사가 되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고 역사에 바르게 조명되는 것 또한 마땅한 일입니다. 정부가 앞장서서 해결해야 하는데 그러지도 아니하고 있지요? 한국 정부에서 1965년 3억 달러를 받고 모든 청구권을 포기했을 겁니다. 당시의 외교관들이 모든 걸 마무리했다는 식으로 돼버려 국민들도 그 같이 알게 돼 간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입니다. 사실상 마무리가 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경제협력문제였지 전후배상문제는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전후배상이라는 게 피해자한테 의견을 들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이뤄질 수 있습니까? 더구나 일제 패전 후의 사건을 말입니다. 국민이 이 사건을 자세하기 알지 못하는 것도 해결의 장애요인이 될 것입니다. 이제 나는 늙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살 만큼 살았지만 청춘시절에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국민들이 사실을 사실대로 알아야만 합니다.」
「우키시마호를 왜 폭파했을까요? 그 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틀림없이 일본 해군이 자행한 계획된 살인행위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을 한꺼번에 싹 쓸어버리려는 수작이었지! 그 당시에 배에 타고 있던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다 아는 사실이오.」
「이 사건과 관련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학자들이 등한시 하고 있습니다. 돈에만 눈이 벌겋고 정의실현이나 인권회복에는 달려들지 않고 있잖아요? 내 몸이 늙고 쇠약하여 만사가 귀찮을 뿐이지만 일본에 대한 원한은 저승에서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역사의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질 것이라고 믿습니다만 당사자인 내가 죽어 없어진 뒤에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박재하씨를 만나려고 네 번째 방문했을 때는 밤새도록 얘기나 나눌 셈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하룻밤을 머물고 다음날 떠나라고 했다. 뒷산에서 흘러내린다는 지하수가 시원하고 맛이 좋았다. 내가 박재하씨를 알고 방문하게 된 해에 그는 73세의 고령이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부인에게 안방을 내주고 좁은 온돌 사랑채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두 살 연상인 부인이 지병으로 몸이 편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날 나는 노인과 함께 그가 평소 생활하는 사랑방에서 동동주 한 병을 곁들여 저녁밥을 먹었다. 둘째 며느리가 차린 밥상이었다. 노인의 방 머리맡에는 평소에 읽던 책 몇 권이 놓여있고, 문설주 위쪽 시렁에는 몇 해 전부터 보관하고 있다는 신문 보도 자료와 사진 그리고 자신의 신분증과 호적등본이 있었다. 그간 일본을 상대로 싸워 온 자료들이었다. 밤이 이슥하도록 얘기는 끝나지 않았다. 영감의 줄담배 연기로 목이 아프지만 얘기를 다 들으려면 그도 그럴만한 일이었다.
「제가 일본으로 어르신들께서 일하시던 현장을 조사하러 갔을 때 일본사람들이 말끝마다 조선인이라고 말할 때 일본인과 차별하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지는 않았거든요. 미사와비행장에서 일하실 때 분대장으로서 “조센징! 조센징”이라고 하면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나요.」
「왜놈들은 우리들을 "조센징! 조센징 빠가야로!" 그렇게 소리치며 대했지요. 바보 같은 조선놈들이라는데 좋을 리가 있나. 하기사 우리도 왜놈! 왜구놈들! 쪽바리! 라고 하잖아.」
「양국 사람들은 서로 원수지간인지 오래거든요. 왜국이 삼국시대부터 남해안과 서해안 일대에서 노략질을 일삼았고 임진왜란, 동학농민군 학살......., 뭐 보통 괴롭힌 게 아니잖아요.」
「조선왕조가 길기도 길었는데. 저 쪽 산기슭에 사당이 있는데 내가 바로 그 박연 선생 후손이라오. 세종 때 분이요. 그런데 그 조선이라는 말이 나쁘게만 들린단 말이야. 이 또한 일본식민지 때부터 인식돼 온 피해지.」
「그것도 왜놈들 때문이죠. 일본은 조선왕조를 이씨조선이라 하잖아요. 이씨조선이라는 것은 씨족국가라는 것이죠. 국가를 형성하는 국민의 국가가 아니라 일개 집안이 만든 국가라는 겁니다. 명성황후를 민비라고 부르며 폄하한 의도가 다 우리나라를 얕보고 침략하려고 그랬던 것입니다. 일본사람들은요. 제놈들은 하늘 아래 제일 잘났고, 남의 나라 특히 한국과 중국 사람은 우매하다며 차별하고 멸시하는 풍조가 머릿속에 꽉 박혀있어요.」
「듣고 보니 그러네. 아 저 뭐냐!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이라 했고 나중에 대한민국이라 했는데 왜놈들은 조센징이라 하니까 지금은 우리들한테 욕설이 돼 버렸어.」
「그래서 광복운동 당시에 우리는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지요. 그러구 저러구요.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에서 우키시마호사건 원고단을 구성하여 교토지방재판소에 소를 제기해서 재판이 진행 중인데 전국적으로 생존자 분들이 모두 동참해야 되잖겠습니까?」
「아 그런데 일본 변호사측에서 돈을 십 만원씩 내라나 봐. 그 자체가 기분이 나빠서 나는 그들하고 같이 안 해요.」
「그래도 앞으로 새로 소식이 들려오는 생존자 분들이 한 분씩 한 분씩 합류하는 형식이면 좋겠는데요. 그것이 법적으로 또 순서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요. 저는 조사하고 찾아내고 서류를 만들고, 어른들께서는 참여하고 목소리를 높여 주시고 하면 한국 정부도 나설텐데요. 문제는 한국 정부가 나서야 합니다. 제가 볼 때는요 도대체 이 나라 정부는 국민을 생각하는 정부가 아닌 것 같아요.」
「나는 우리 정부한테 기대하지 않아요. 그저 그 날 젊은 시절에 죽은 동포들이 불쌍하지 정부, 국회의원 다 쓸데없어요. 전회장이 싹 걷어 논두렁에 묻어버려요.」
「정말로 나라에서 위령비도 못 세운다니 어처구니없잖아요.」
「어허! 전선생도 정신나갔구만. 그 놈들이 돈 생기면 권력을 사들여야 하는데 백성은 무슨 백성여! 우리가 죽고 한 세상 더 가면 이 나라는 또 망할테니 내 말을 잘 기억해 두시구려.」
박재하씨는 전국생존자합동증언대회에 참가하여 논리적인 증언으로 당시 상황을 낱낱이 그려냈다. 그는 희생자전국합동위령제에 참가하는 등 홍보활동에 적극 참가하는 열정으로 여생을 마쳤다.◼ <글·사진:우키기마호폭침진상규명회 대표 전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