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대장에서 독립군 영웅으로 백야 김좌진” 오류 《수정•교정》 요청
= 요 청 서 =
1. 취지
백야 김좌진 장군에 대한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 올바른 역사를 후세에 물려주기 위한 시도입니다. 이에 책의 내용 중 실존 인물에 대한 허구적 기술과 장군의 가족사에 대한 오류가 있어 이를 수정·교정하여 배포하자는 취지입니다.
2. 요청 사유 대상
-도서명: 주먹대장에서 독립군 영웅으로 백야 김좌진
-지은이: 김정헌
-발행인: 유성필
-발행처: 도서출판 행복한소통
-인 쇄: 2020년 10월 5일
3. 수정 요청 내용
가. 실존 인물에 대한 허구적 묘사
[김좌진이 7살 때 일어난 일들]
가-1. 땅벌과 싸움 (책 26쪽)
▶땅벌 수백수천 마리한테 쏘여…(책 27쪽), 삽 한자루 찾아가지고 나왔다. 삽으로 벌집을 파내기 시작했다. 땅벌들은 수백 수천마리가 새카맣게 몰려와서 공격했다.…(책 30쪽)
-7살 어린 나이에 수백수천마리 땅벌에 쏘이며 벌집을 혼자서 파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수십명의 나한상…(책 29쪽)
-당시 삼불암의 규모를 입증하여 과연 수십명의 나한상이 있었는지 증명해야 합니다.
가-2. 대단한 힘자랑(책 32쪽)
▶마당에 쌓아놓은 볏가마를 하인들이 두 명씩 짝을 지어 들어 옮겼다.… 하인들을 창고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는 무거운 볏가마를 한 개씩 들어서 창고 안쪽으로 집어 던졌다.… 하인들 둘이서 간신히 드는 볏가마였다.… 좌진은 마당에서 볏가마를 집어 던지고, 하인들은 창고 안에서 받아 쌓기만 했다.…(책 33쪽)
-김좌진은 동화나라 사람이 아닙니다. 갈산면에서 태어난 실존인물입니다.
▶목수들이 커다란 못을 망치로 힘들게 땅땅 때려서 나무에 박았다.… 좌진은 목수에게서 못과 망치를 빼앗았다. 못을 손가락으로 집어 들고 망치는 옆으로 집어 던졌다.… 끄응! 좌진이 못을 나무에 대고 엄지손가락으로 힘껏 밀었다. 커다란 쇠못이 미끄러지듯이 나무 몸통으로 깊숙하게 밀려 들어갔다.(책 34쪽)
- 김좌진은 7살에 무협지에 나오는 무술이나 장풍을 연마하지 않았습니다.
▶김좌진은 이처럼 무거운 들돌을 번쩍 들어 머리 뒤로 내던졌다.(책 34쪽)
- 김좌진은 7살에 차력술을 연마하지 않았습니다.
▶집 앞 와룡천 백사장에서 친구들과 줄다리기를 했다.…열 명도 넘는 친구들과 마주섰다.…(책 34쪽) 혼자서 줄을 당기던 좌진의 입에서 힘찬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열 명이 넘는 친구들이 우르르 쏠려왔다.(책35쪽)
-인터넷으로 온갖 정보를 접하는 어린이들에게 교육적 폐해가 우려됩니다.
▶단단한 놋쇠 그릇을 손가락으로 종이쪽처럼 쭈글쭈글 구부려 놓지 않나, 방안에서 엉덩이를 씰룩씰룩 방구들을 무너뜨리지 않나… 마당에 한가하게 누워있는 황소를 번쩍 들었다 놓지 않나… (책 35쪽)
-이 같은 허구적 묘사는 어른의 역사교육이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웃음거리가 될까 걱정스럽습니다. 이렇게 김좌진은 동화의 나라 사람으로 웃음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가-3. 산신령의 가르침(책 36쪽)
▶김좌진의 주먹이 땅바닥 속으로 쑤욱 들어갔다.… 사람들이 밟고 지나다니며 시멘트처럼 단단한 땅바닥이었다.… 상주의 주먹이 땅에 닿았다. 팔뚝 전체가 땅속을 깊숙하게 파고 들어간 것이다. 상주가 팔을 빼낸 땅속이 어두컴컴해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책 44쪽)
-삼불산 산신령은 가능하겠으나 좌진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가-4. 열세 살 새신랑과 신랑달기(책 66쪽)
▶좌진은 외양간 안으로 들어가더니 황소의 네 다리를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황소가 깜짝 놀라서 버둥거리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좌진은 황소를 번쩍 들고 안마당을 한바퀴 비잉 돌았다. 그리고는 다시 외양간으로 가서 점잖게 내려놓았다. (책 72쪽)
-13세에 장가가서 신부집에 간 김좌진은 힘센 산적 두목도 아니었고, 중국 중원을 배경으로 한 무협지에 나오는 무인도 아니었습니다. 이런 허구적 묘사는 장군의 청산리독립전쟁을 역사적 사실보다는 과장된 허구로 만들고 있습니다.
나. 김좌진장군의 공적과 가족사 오류 문제
나-1. 밤중의 귀중한 여인(책 116쪽)
이 단락은 홍성군이 발행한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 전기”에서 인용한 듯합니다. 저자가 김좌진이 김계월 집으로 뛰어들었다는 날짜를 제외함으로써 논란을 피해가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김좌진과 김계월이 만났다는 날은 1917년 9월 10일이라는 설이 압도적입니다. 물론 경성의 13세 어린 여자아이 김계월이 충청도 사투리 “능정게”라는 말을 할 정도로 소설적입니다.
하지만 김좌진은 이미 대한광복회 길림지부 부사령으로 발령받아 1917년 8월에 대한광복회의 한성 거점지인 어재하의 집에서 사령관 박상진, 충청도 지부장 김한종 그리고 김재풍과 함께 송별회를 갖고 만주로 향했습니다. 그러므로 9월10일에는 서울에 없었으며,더구나 김계월 집에서 3개월 처가살이니, 한 달 동거니 하는 설은 근거 없는 풍설입니다. 13세 어린이를 여인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책을 미래세대 교육자료로 물려줘서는 안 됩니다.
▶좌진이 몸을 피한 곳은 혼자 사는 여인 김계월의 집이었다. 김계월이 외출에서 돌아와 막 대문을 닫고 막 현관에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책 118쪽) 김계월의 집에 몸을 숨기고 한 달이 지나고 있었다.…(책 122쪽) 둘은 어느새 깊은 정이 들었다.…(책 122쪽)
-김좌진의 고향 홍성군 출신 작가들도 김좌진과 김계월의 조우 순간을 말하면서 어느 이는 “화장품 냄새와 여자냄새가 코를 찌르는 방”이라고 하고, 어느 이는 “현관에 들어가는 순간”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김좌진과 김계월의 조우설은 근거 없는 풍설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대목입니다. 김두한이 1918년 5월생이라는 것이므로 13세 여아가 팔삭둥이를 출산했다는 것도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정헌의 책 127쪽에는 1917년 8월에 만주지역 부사령으로 떠났다고 해 놓았고(책 127쪽), 전옥진의 책에는 김계월을 9월10일에 만났다면 이건 유령과의 밤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사실관계와 부합하지 않으니 이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
나-2. 청산리대첩의 시작, 백운평전투
김좌진 장군이 지휘한 백운평전투에서 일본군끼리 오인 사격을 한 사실이 없습니다. 홍범도 장군이 지휘한 피파골전투와 완루구전투에서 있었던 정황입니다. 야스가와 1개 중대가 먼저 백운평으로 들어갔고, 나카무라 1개 중대가 뒤따라 추격해 들어갔습니다.
일본 정규군 2개 중대라면 총 병력수가 400~600명을 넘지 않을 것입니다. 후에 상해임시정부는 일본군 전사자가 1,254명이라 독립신문에 발표했고, 해방 후 귀국한 이범석은 3,300명이라 했습니다만, 백운평 전투에서 일본군을 모조리 사살했다 해도 1.254~3,300명은 아니라는 것이 중국 연변대학 민족연구소 박창욱 교수의 연구 결론입니다. 이 같은 과대평가는 또 다시 김좌진의 역사를 끊임없이 왜곡하는 도미노현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기편끼리 쏜 총에 맞아 쓰러진 일본군의 시체가 백운평 골짜기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책 173쪽)
- 백운평전투에서 일본군이 자기편끼리 오인 사격은 없었습니다.
나-3. 김좌진 장군과 오숙근 여사의 유택 합장설의 문제
▶책 “주먹대장에서 독립군 영웅으로 백야 김좌진” 229쪽에 “좌진의 장례는 교포들의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해림시 외곽에 묘를 썼다. 10년 후인 1940년 9월에 오숙근 여사가 비밀리에 중국으로 들어갔다. 오숙근 여사는 방물장사로 가장하여 좌진의 유해를 국내로 모셔왔다. 충남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묘를 썼다.
이후 1945년에 조국 광복을 맞이했다. 1958년에는 부인 오숙근 여사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 좌진과 부인 오숙근 여사를 현 위치로 합장하여 모셨다. 현재 산소 위치는 충남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묘역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오숙근 여사의 큰아들 창렬은 1947년 만주땅에서 친일주구들의 모함과 음해에 걸려 중국공산당 토지개혁 야외심판대에서 맞아 죽었습니다. 이 처참한 광경을 지켜본 어머니(오숙근 여사)는 몸져누워 일어나지 못하고 두 달 뒤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 사실은 《중국공산당 보청현 만금산남향총지위원회》와 《중국공산당 추이란삼림공업엽위원회 조직부》의 당안에 기록돼 있습니다. 하여 1958년에 노환으로 한국에서 사망하여 이미 귀환했다는 장군의 유해와 합장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숙근 여사의 묘소는 흑룡강성 보청현에 있다고 김장춘은 말하고 있습니다. 1947년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오숙근 여사는 귀국한 사실이 없습니다. 책에서처럼 “10년 후인 1940년 9월에 오숙근 여사가 비밀리에 중국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김두한이 흑룡강성으로 가 오숙근 여사의 유해를 모셔왔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책 “대한독립군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 전기” 463쪽에는 “시어머니와 둘째 딸을 데리고 서울 필동에서 은거하면서 장군의 혈육인 김두한을 찾아 이재희(李載熙)와 결혼시켜 동거하면서 살다가 1934년에 방물장사를 가장하여 장군의 유해를 북만에서 보따리에 모시고 왜경의 눈을 피하여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밀장했다가 1958년 1월 15일 오숙근 여사도 노환으로 사망함으로써 충남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산 51번지에, 장군의 유해는 홍성에서 이장하여 오여사의 장례와 같은 날 합장했다.”라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시어머니와 둘째 딸을 데리고 서울 필동에서 은거하면서 장군의 혈육인 김두한을 찾아 이재희(李載熙)와 결혼시켜 동거하면서 살다가 1934년에…”라 하였으므로 1934년 이전이 되는데 그때라면 김두한 나이 16세가 아직 안 된 때일 것입니다. 김두한이 16세 이전에 결혼했단 말일까요? 김두한은 27세 때인 1944년에 이재희와 결혼했습니다.
김좌진의 고향 홍성군 출신 작가들도 어느 이는 “1934년”이라 하고, 어느 이는 “1940년”이라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김좌진 유해 귀환설”은 정설이 아닌 조작일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에 대해 행정기관에서 조사해야 합니다.
오숙근 여사는 1947년 사망에 이르기까지 단 한 차례도 귀국하지 못했습니다. 책에 “1940년에 비밀리에 중국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이미 ‘귀국했다.’는 것이므로 이에 대한 근거자료를 통한 고찰이 필요합니다.
다. 결론
김좌진 장군 가족사의 왜곡된 오류를 바로 잡아 미래세대에 일제침략사와 만주항일독립군 무장투쟁사 교육을 통한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할 수 있도록, 책의 수정•교정을 위해 배포를 중지하여 주시고, 김좌진장군학술연토회를 통해 장군의 역사를 증빙하여 바로잡을 수 있도록 조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라. 요청 사항
책 “대한독립군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 전기”와 “주먹대장에서 독립군 영웅으로 백야 김좌진”의 내용을 바로잡기 위한 《김좌진장군학술연토회》를 홍성군과 충청남도와 충남교육청이 주관하여 시행하고 김좌진의 전기를 다시 출판할 것을 요청합니다.
2. 책 “주먹대장에서 독립군 영웅으로 백야 김좌진”을 수정•교정해야 합니다. 수정이 불가능 할 때는 시중 또는 각 학교에 배포를 연기 또는 금지할 것을 요청합니다. 책의 표지에 쓰 여있는 대로 “자녀에게 선물로 주고 싶은 책”으로는 오류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를 후대 에 물려줘서는 안 되겠기에 이 요청서를 제출합니다.
3. 중공 흑룡강성 보청현 당안과 중공추이란삼림공업엽위원회 조직부 당안과 김명환의 유서 로서 김좌진장군의 부인 오숙근 여사는 1947년도에 보청현에서 사망하였는데, 김두한은 1958년도에 보령시에 장례를 치렀고, 김을동은 1950년(6세때) 사진을 찍었다는 것이므로 이는 모두 조작과 사기입니다. 유령이 아니고서야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문제는 어느 기관(청)을 막론하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 나서서 바로 잡아야 할 일이 라고 판단됩니다. 이를 바로 잡는데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4. 위 1항이 시행되지 아니하면 김좌진장군역사정립회(주비위)에서 김좌진장군역사•가족사연 토회를 시행하고, 출판할 예정인바 이 행사 제반 경비를 충청남도 문화재단이 지원할 것 을 요청합니다.
2020. 11. 25
위 요청인 전 재 진
김좌진장군역사정립회(주) 사무총장
010-4488-0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