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가(假)---거짓 가(假)자이다. 진실에 대응되는 말인데, 실체는 없고 이름만 거짓으로 붙어 있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가상(假像), 가면(假面), 가정(假定), 가설(假說) 등에 쓰인다.
특히 불교에서는 일시적으로 시설한 것을 말한다. 또한 허(虛)하다는 뜻이다. 만유는 제각기 실체가 없고,
서로 다른 것에 의지해 존재하는 것이므로 가(假)라 한다. 흔히 말하는 “나[我]”라고 하는 것은 5온(蘊)의 화합
으로 이룩되고, “집(家)”은 나무나 흙 따위로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나[我]나 집은 모두 그 실체가 없으므로
이런 것을 가(假)라 한다.
그리고 천태교학에서는 실상의 진리를 나타내는 ‘삼제원융(三諦圓融)’을 역설한다.
3제(三諦)란 공(空)ㆍ가(假)ㆍ중(中) 3제로서 모든 것은 실체로서 존재가 아니라 공(空)으로서 존재이며,
또한 연(緣)에 의해 가(假)로 존재하는 가적(假的)인 것이며, 더욱이 공이나 가의 어느 일면으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사려분별을 초월한 절대 존재로서의 중(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체의 것은 이처럼 3제의 면을 갖고 있으며, 더욱이 3제가 원융한 곳에 그 자체의 진실성이 있다고 하는
삼제원융(三諦圓融)이 주장된다. 모든 현상은 불변하는 실체가 없으므로 공(空)이고, 또 서로 의존해
일어나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가(假)이며, 그리고 이 둘의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것이 중(中)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가 막힘이 없이 어울린 원만한 모습이 삼제원융(三諦圓融)이라는 것이다.
--→가관(假觀), 가제(假諦) 참조.
* 가관(假觀)---용수(龍樹, 나가르주나)가 확립한 공관(空觀)ㆍ가관(假觀)ㆍ중관(中觀)이라는 삼관법(三觀法)이
중국으로 전해져서 수나라 때 천태대사(538~597) 지의(智顗-智者)가 세운 천태삼관(天台三觀)의 모태가
됐다. 천태삼관(天台三觀)을 ‘일심삼관(一心三觀)’이라 일컫는데, 즉, 공관(空觀)ㆍ가관(假觀)ㆍ중관(中觀)을
말한다. 이러한 삼관은 차차 관(觀)이 깊어지는 단계를 말하는데, 공(空)ㆍ가(假)ㆍ중(中) 세 가지 진리를
한마음 가운데서 원만하게 체득하는 것을 일심삼관이라 한다. 이 삼관은 천태종의 중요한 법문으로
교의와 실천의 골격을 이루고 있으며, 여러 삼관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설이다.
여기서 가관(假觀)이란 모든 현상은 여러 인연의 일시적인 화합으로 존재한다는 주장으로서,
우주의 모든 존재는 공(空)한 것이어서 실재(實在)하는 것이 아니므로, 비록 모양을 갖추고 있는 것이라도
실체가 없는 임시적인 가(假)의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가관을 종공입가관(從空入假觀)이라고도 한다.
모든 사물은 공(空)한 것이지만 가(假)라는 모양을 실어 표출된다는 말이다.
공관은 만유현상을 거울에 나타난 허상처럼 보는 것이고, 가관은 거울에 나타난 허상이 비록 실물이 아니나
보는 이의 시각에 들어와 차별을 느끼도록 하기에 그 허상대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차별의
허상을 그대로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가관이라 한다. 중생들이 보는 현상 세계가 바로 가관이다.
이와 같이 만유의 모든 법은 공한 것이어서 하나도 실재한 것이 없으나, 그 모양이 분명한 것은 대개 가(假)
의 존재라고 관한다. 즉,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고, 사물을 가설로 생각해 명상하는 것이 가관이다.
→일심삼관법(一心三觀法), 천태삼관(天台三觀), 공관(空觀), 중관(中觀), 종공입가관(從空入假觀) 참조.
*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 산스크리트어 Kātyāyanī-putra)---확실한 생몰연대는 미상으로, BC 150~50년경에
활약한 부파불교 시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說) 소속 불교학자였다. 원래 브라만계급 출신이었으나
불교에 귀의해서 유명한 <아비달마발지론(阿毘達磨發智論)=발지론(發智論)>을 저술함으로써 설일체유부
이론을 정립했다. 이 책은 설일체유부 교리를 체계적으로 확립시킨 대표적인 논서로서 널리 연구되며,
많은 주석서도 만들어졌다. BC 3세기경 상좌부에 지말분열이 일어나게 되는데, 맨 처음으로 설일체유부
(說一切有部)가 분별설부(分別說部 Vibhajyavādin)라 자처하던 본상좌부(本上座部)로부터 분리
독립해 나가는데, 설일체유부는 가다연니자를 파조(派祖)로 한다. 그러나 가다연니자의 생존시기와
설일체유부 성립 시기에는 1세기 정도 차이가 난다.--- →발지론(發智論) 참조.
* 가라분(迦羅分, 歌羅分, 산스크리트어 Kalà)---계분(計分) · 교량분(校量分)이라고도 한다.
시간의 극히 짧은 단위 또는 적은 수량을 말하는, 시간의 경우는 하루의 1,600분의 1, 수량의 경우는
터럭 하나의 100분의 1을 말한다.
* 가락가벌차(迦諾迦伐蹉, kanakavatsa)---16나한의 한 사람. 산스크리트어 카나카밧사(Kanaka-vatsa)의
500명의 아라한을 거느리고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카시미르)에 거주한다고 한다.
가나가바차(迦諾迦伐蹉) 카나카비트샤라고도 한다. 가락가벌차는 귀이개를 들고 있거나 귀를 후비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혹은 왼쪽 어깨에 지팡이를 두고 양손은 결인(結印)을 짓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가락가존자, 갈낙가박차 존자라고도 한다. 원래부터 불타의 제자였으며 선과 악의 모든 체계를 이해했다고 한다. 성품이 곧고 정직해 석가모니 부처님이 그를 말할 때마다 칭찬 했다고 한다.
* 가람(伽藍)---산스크리트어 ‘상가람마(sangharama)’를 소리 번역한 것이 승가람마(僧伽藍摩)이고,
이를 줄인 말이 가람이다. 승려가 살면서 불도를 닦는 집, 곧 절의 건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절, 사찰, 사원, 도량(道場), 정사(精舍)와 같은 말이다.
부처님 당시 마가다국(Magadha國) 빈비사라(頻毘娑羅, Bimbisara, BC 582~554 재위)왕이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王舍城, 산스크리트어 라자그리하/Rājagṛha) 부근에 지어서 부처님께 보시한 죽림정사(竹林精舍)가 가람의 시초이다.
중국의 선종사찰 이래로 정립된 가람의 기본구조는 7당(堂) 가람이다.
①불전(佛殿) ②강당 ③스님들의 생활공간인 요사(寮舍) ④부엌(주고/廚庫) ⑤욕실
⑥동사(東司, 뒷간, 해우소/解憂所) ⑦산문(山門) 등이 7당으로 꼽힌다.
그리고 큰 절의 경우, 금당(金堂) ․ 강당 ․ 탑 ․ 식당 ․ 종루 ․ 경장(經藏) ․ 승방의 일곱을 일컫기도 한다.
* 가루다(산스크리트어 Garuda)---가루라(迦樓羅)라로 번역하기도 하며, 불경에는 금시조(金翅鳥) 등으로
의역 되기도 한다. 독수리 머리에 사람 몸을 한 괴물로, 머리엔 여의주가 있고, 항상 입으로 불을 내뿜으며,
금빛 두 날개를 펼치면 그 길이가 336만 리나 되고, 용을 잡아먹고 산다고 하는 전설적인 상상의 새이다. 대승경전에서는 불교를 수호하는 팔부중[팔부신중(八部神衆)]의 하나에 들어가 있다
* 가릉빈가(迦陵頻伽, 산스크리트어 Kalavinka)---아름다운 울음소리로 불법을 설하는 상상의 새이다.
<아미타경>에 의하면, 이 새는 극락정토에 살며, 그 형상은 팔부중 하나인 긴나라(緊那羅)와 비슷해서
새 몸에 사람 얼굴을 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석탑이나 부도, 석등과
같은 석조물에 더러 조각돼 있다.
* 가리왕할 인욕선인(迦利王割忍辱仙人)---불교 설화에 가리왕이 인욕선인 육신을 토막 내 잘랐다고 하는
고사를 말한다. 석가모니불이 전생의 어느 때에 남인도 바라문가에 태어났다. 당시의 국왕인 가리왕은
성질이 포악하고 교만했다. 이때에 인욕선인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왕성 밖에서 선정(禪定)에 들어 있었다.
마침 왕이 신하들과 궁녀들을 거느리고 사방을 구경하며 시원한 나무 그늘에 이르렀다.
그런데 궁녀들이 왕을 버리고 인욕선인 주위로 모여 들었다. 그리고 인욕선인은 그들을 위해 법을 설했다.
왕이 그것을 보고 질투심에 불같은 노여움이 일어 인욕선인에게 물었다. “그대는 여기서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인욕을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인욕을 얼마나 잘 할 수 있는가?” “하는 데까지 노력합니다.”
“그런가, 그러면 이 사람이 한번 시험을 해 보겠노라.” 그러고 황은 칼을 뽑아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인욕선인 오른쪽 귀를 잘라버렸다. “그래 참을 만한가?” “참는 데까지 참겠습니다.” 왕은 다시 왼쪽 귀를 베었다. 그리고 손도 베고, 팔도 베었으며, 나중에는 두 다리도 잘랐다. 그리고는 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참을 만한가?” 하고 다급하게 물었다. 자신의 잔인한 행동에 대해 괴로워하고 살려달라고 애걸해야
마음이 시원할 텐데, 인욕선인은 태연하기만 하므로 폭군은 더욱 성을 내고 난폭해졌다.
그런데 이때에 갑자기 맑은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치며 돌과 먼지가 날아와 가리왕의 얼굴을 때리고 사나운 바람이 불어와 먼지를 날려 가리왕을 덮쳤다. 가리왕은 자신의 악행에 하늘이 벌을 내리는가 하는 무서운
생각이 들어 벌벌 떨며 기어 내려가고 말았다. 왕이 크게 놀라 두려운 마음에 인욕선인 앞에 참회하고
부끄러워했다. 인욕선인이 내 마음속에는 화내는 마음도 탐욕심도 없다고 말하니 가리왕이 더욱 참회하고 부끄러워하며 마침내 불문에 귀의했다고 한다.
* 가만(假滿)---간단히 말하면 법연(法緣)이다. 가만(假滿)은 불법과 인연을 맺고 공부하기 위한 여덟 가지
온전한 인간의 조건인 팔유가(八有暇)와 열 가지 바른 시공간의 인연을 얻는 십원만(十圓滿)을 말한다.
팔유가는, 지옥, 아귀, 짐승으로 태어나지 않음 등 여덟 가지이고, 십원만은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 법이
있는 곳에 태어나는 것. 신체가 온전하게 태어나는 것 등 열 가지이다...
---→팔유가(八有暇), 팔무가(八無暇), 십원만(十圓滿) 참조.
* 가명(假名)---모든 법은 인연이 화합해 되는 것이고, 진실한 자체가 없으므로 거짓 이름을 빌려서 구별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법을 ‘거짓 이름[가명]’이라 한다. 또 모든 법은 본래 이름이 없는데 사람들이
이름을 지어서 구별(區別-差別)을 말하는 것이므로 온갖 이름이 모두 거짓 이름이다.
이름뿐인 것, 실체가 아닌,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같은 것,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에 매달린다.
이름뿐만이 아니라 문자나 언설도 마찬가지 가(假)이다. 아니 사실은 온 우주가 가명(假名)과 가상(假相)
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음은 <염불론>으로 유명한 청나라 말기 담허(倓虛, 1875~1963) 대사의 법문이다.
『 어디에 또 ‘나’가 있겠는가? 일곱 가지 인연이 모여서 ‘나’를 형성했지만 사실상 더러운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 속에는 비린내 나는 더러운 물건들이 담겨져 있다. 지금 이 법문을 하는 이때, 어떤 사람이 가죽으로 된 자루에 똥을 가득 담고 꽁꽁 묶어서 이 법당에 들여 놓는다면, 우리는 더럽다고 코를 잡고 멀리 피할 것이다.
혹은 재빨리 이 자루를 법당 밖으로 멀리 버릴 것이다.
하지만 사실 우리들은 누구나 다 이 똥자루와 같다. 우리의 이 자루는 진짜 가죽자루에 똥을 담은 것보다 결코
깨끗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 자루는 아가리를 묶어 놓았지만 사람들의 이 자루는 아래위로 입을 벌리고
있으며, 더러운 냄새를 풍기고 아홉 구멍으로는 항상 부정한 것들이 흐르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더러운 가죽자루를 ‘나’라고 집착하고 아끼고 또 아낀다. 이렇게 화장도 하고, 저렇게
보양(保養)도 한다. 부처님의 눈으로 봤을 땐 어리석기 짝이 없다.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이 몸은 ‘나’가 아니라 내가 사용하고 있는 하나의 물건이며, 나(我) 밑에 적(的)이란 글을 붙여 나의 것이라 불러야 한다.
왜냐하면 이 몸은 나의 일부분이며, 마치 나의 물건과 같아 내가 사용하고자 할 때 사용하고, 사용하지 않을 땐
놓아 버리고, 폐가 되지 않아야 한다. 만약 내려놓지 못한다면 육신의 폐를 입게 될 것이다.
보통 사람들의 습관은 이 몸을 ‘나’라고 여기고, 나 밖은 사람(人-남)이며, 많은 사람이 모여서 중생이 된다.
모든 중생들이 오래 살고자하는 생각은 이어져 끊이지 않는데, 이것이 수자(壽者-생멸체, 목숨)이다.
사실 이런 것들은 모두 가명(假名)과 가상(假相)이다.
예컨대 사람(人-남)과 나는(我) 상대가(相對假)이다(대립법-남이 있으므로 내가 있고, 내가 있으므로 남이 있다). 중생은 인성가(因成假-잠시 여러 인연을 빌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이고, 수자(壽者)는 상속가(相續假-아ㆍ인(남)중생이 이어져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떠나면 어디에 또 ‘나’가 있겠는가. 하물며 나(我)란 주재(主宰)라는 뜻인데, 사람들의 이 색신(色身)의 ‘나’는 자신의 뜻대로 할 수가 없다. 예를 들면, 사람이 배가 고플 땐 음식을 먹지 않으면 안 되고, 갈증이 날 땐 물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된다.
목숨이 다하면 죽지 않으려야 안 죽을 수 없고, 예쁜걸 보면 보지 않으면 안 되고, 오욕(五慾)의 경계를 만나면
향수(享受) 않으면 안 된다. 이는 벌써 주재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다.
특히 이런 먹고 마시고 향수(享受)는 생명에 속하는 일인데, 생명은 생멸이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이 생명 밖에 또 하나의 혜명(慧命)이 있는데, 그것은 영원히 생멸이 없는 것이다. 무엇이 생멸이 없는 혜명인가?
바로 사람마다 본래 갖고 있는 지각성(知覺性)을 말한다. 이 지각성은 비록 형상이 없지만,
진허공 편법계(盡虛空 遍法界)에 없는 곳이 없고, 아닌 곳이 없다. 이른바 “허공은 큰 깨달음 가운데 생겨 바다의 한 방울과 같다.” 염불은 곧 자신의 법신혜명을 키우는 것이며, 부처님의 힘과 자력의 힘에 의지해 서방 극락세계 왕생을 구하는 것이며,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열고 자신의 본각(本覺)을 회복하는 것이다.
---→담허(倓虛, 1875~1963) 참조.
* 가미니경(伽彌尼經)---한때 부처님께서 나난다국(那難陀國)의 장촌나(墻村那) 동산에 머물고 계실 때였다.
그때 아사라천(阿私羅天)의 아들 가미니(伽彌尼)가 이른 아침에 부처님을 찾아뵙고 여쭌 내용에 대해
부처님께서 답하신 내용으로 꾸며진 경이다. 아래 내용은 <가미니경>의 일부이다.
「아사라천의 아들인 가미니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바라문은 스스로 잘난 체하면서 하늘을 섬기고 있습니다. 만일 어떤 중생이 목숨을 마치면 자유롭게 좋은 곳으로 오가면서 천상에 난다고 합니다. 세존께서는 법의 주인이시니, 원컨대 중생으로 하여금 목숨을
마치거든 좋은 곳에 이르게 하거나 천상에 나게 해주십시오.” 이에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가마니여! 저 남녀들은 게을러 정진하지 않고 그러면서 악한 법을 행하며, 열 가지 선하지 않은 업도
[十不善業道], 곧 생물을 죽이고, 주지 않는 것을 취하며, 삿된 음행을 하고, 거짓말을 하며, 나아가 삿된 견해를
성취했다. 그런데 만일 여러 사람이 합장하고 그들을 향해 칭찬하고 요구했기 때문에, 이것을 인연으로 죽어서
좋은 곳에 가서 천상에 태어날 수는 없다.
가미니여! 그것은 마치 이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깊은 못이 있다. 거기에 어떤 사람이 큰 무거운 돌을 그 물
속에 던져 넣었다. 만일 여러 사람이 와서 저마다 합장하고 그 돌을 향해 칭찬하고 축원하면서,
‘제발 돌아 떠올라다오.’라고 말했다. 가미니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무거운 돌이 어찌 여러 사람이 저마다
합장하고 축원했다고 해서 그 인연으로 돌이 물 위로 떠오를 수 있겠느냐? …“
“가미니여! 저 남녀들은 정진해 부지런히 닦고 그러면서 묘한 법을 행해, 열 가지 선한 업도[十善業道]를 성취해, 살생을 떠나고, 살생을 끊고, 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과 사음과 거짓말과 나아가 삿된 견해(見解)를 떠나고,
삿된 견해를 끊어 바른 견해를 얻었다. 그런데 만일 여러 사람이 저마다 합장하고 그들을 향해 칭찬하고 요구했기 때문에, 이것을 인연으로 죽어서 악한 곳으로 가서 지옥에 태어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가미니여! 이른바 이 열 가지 선한 업도는 깨끗해 자연히 위로 올라가 반드시 좋은 곳에 갈 것이기
때문이다. 가미니여! 그것은 마치 이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연못이 있는데, 거기서 어떤 사람이 기름병[酥油甁]을 물에 던져 부수면 병조각은 밑으로 가라앉고 기름은 위로 떠오르는 것과 같다.”」
<중아함경(中阿含經)>에 나오는 <가미니경(伽彌尼經)>의 일부이다.
이와 같이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은 자업자득(自業自得), 자작자수(自作自受)에 대해 가미니의 질문을 통해
명쾌하게 말씀하셨다. 만일 그가 선업을 쌓았다면 선처에 태어날 것이고, 불선업을 쌓았다면 악처에 태어날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자신이 지은 업에 대해 다른 누군가가 선처에 나게 하거나 악처에 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가미니경>에서 하늘의 신을 섬기는 자가 천상에 태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무거운 돌을 연못에
가라앉혀 놓고,“돌아 제발 돌아 떠올라다오.”라고 기도하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이는 하늘의 신에게 기도하는
행위는 돌덩이에 기도하고, 나무에 기도해 소원성취하려는 것과 같다는 지적이다.
이렇게 부처님은 어떤 대상에 기도하는 행위가 불합리 하다는 것을 연못에 가라앉은 돌덩이가 떠오르게
하려는 것과 같고, 병속에 들은 기름이 가라앉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초기경전에서 분명하게 말씀
하심으로써 기도 행위를 부정하셨다.
그런데 대승경전의 <불설우란분경(佛說盂蘭盆經>은 목련(目連) 존자가 아귀(餓鬼)의 고통을 겪고 있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구원하기 위해 세존의 가르침대로 자자일(自恣日)에 여러 부처와 보살, 그리고 승려들에게 갖가지
음식과 과일을 지성으로 공양해 어머니를 제도했다는 효성을 주제로 하고 있다.
즉, 하안거(夏安居)가 끝나는 음력 7월 15일 승려들에게 공양을 함으로써 전생 및 금생에 돌아가신 어버이
일곱 분을 구제한다는 내용이다.
이와 같이 초기불교경전의 부처님 말씀과 대승경전의 부처님 말씀이 다르다. 초기경전에서는 자업자득을
말하고, 대승경전에서는 인과를 ‘무시’하고 있다. <가미니경>에서 부처님은 철저하게 ‘개인이 지은 업이란
누가 대신 받을 수 없음’을 강조하셨지만, 대승경전인 <목건련경>에서도 부처님은 우란분재를 올린 공덕으로
어머니가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 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런 모순을 만약 외도들이 알게 된다면 뭐라 할지 심히 염려스럽다.
* 가범달마(伽梵達磨)---서인도 출신 승려, 본명 바가바드 달마(Bhagavad-dharma), ‘존법(尊法)’이라
한역하기도 한다. 당나라 때 중국에 와서 658년 <천수경(千手經)>을 한역했다.
천수경은 그 외에 불공(不空), 지통(智通), 보리류지(菩提流支) 등의 번역본도 있다.
* 가부좌(跏趺坐)---가부좌는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약어이다. 결가부좌란 앉는 법의 한 가지로서 가(跏)는
발의 안, 부(趺)는 발의 등을 말하며, 오른쪽 발을 우선 왼쪽 허벅지 위에 얹고 다음에 왼쪽 발을 오른쪽 위에
얹어 앉는 법이다. 그런데 가부좌한 정삼각형 모습은 기하학적인 의미에서 가장 안정된 모습이다.
둥그런 것은 아예 안정이 될 수도 없겠고, 네모꼴보다도 정삼각형은 아래가 무겁고 넓고 위가 좁아서
제일 안정된 모양이다. 그리고 이 정삼각형을 미타(彌陀)의 지인(智印)이라 한다.
아미타는 제불의 본사(本師)요 제불의 왕인데, 미타의 묘관찰지(妙觀察智)의 상징이 정삼각형이다.
밀교에서는 부처님의 참다운 지혜의 상징적인 표치가 정삼각이다. 이 모습이 가부좌하고 똑 같다.
따라서 가부좌할 때는 가장 몸이 안정되고 지혜가 제일 발동되기 쉬운 것이다.
실제로 수행을 하다보면 알게 되겠지만, 인간의 여러 자세 가운데서 가장 안정된 자세가 바로 가부좌이다.
석존께서도 보리수 밑에서 가부좌하신 채 성도하셨다. 보리 달마스님도 소림굴에서 계속 벽만 쳐다보고 앉아
있었기에, 벽관(壁觀)바라문이라 불렸다.
구조물 가운데서도 피라미드 같은 삼각형 구조물이 가장 안정돼있다 한다.
가부좌 자세를 올바르게 취하면, 앞과 뒤는 물론 옆이나 위에서 바라봐도 거의 삼각형 구조를 이룸을 알 수 있다. 또한 한 자세로 가장 오랫동안 견디기 쉬운 것이 바로 가부좌의 자세이다.
그러므로 참선이라 하면 먼저 좌선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결가부좌(結跏趺坐) 참조.
* 가불매조(呵佛罵祖)---<벽암록(碧巖錄)>에 실려 있는 공안(公案)이다.
‘가불매조(呵佛罵祖)’란 말을 문자적으로만 풀이하면 ‘부처를 꾸짖고 조사(祖師)를 욕하다’라는 말이다.
헌데 이 말이 나온 것엔 나름의 연유가 있다. 당(唐)나라 때 위산 영우(潙山靈祐, 771-853) 선사는 자기를 찾아와 문답을 나누었던 덕산 선감(德山宣鑒, 782~865) 선사가 떠난 뒤, 수좌들에게 이르기를 저 덕산은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욕하며[가불매조(呵佛罵祖)] 살아갈 자라고 평했다고 한다.
과연 위산 영우 선사 예언대로 ‘덕산 방(德山棒-덕산의 몽둥이)’으로 잘 알려진 덕산 선사는 어느 날 상당설법
(上堂說法)을 하면서 이렇게 설파했다. “부처도 조사도 없고, 달마는 냄새나는 촌뜨기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는 별 볼일 없는 마른 똥 막대기이고, 문수와 보현보살은 똥치는 사내에 불과하다. 등각(等覺)이니 묘각(妙覺)이니 하는 오묘한 깨달음도 족쇄를 벗어난 평범한 인간성에 지나지 않으며, 보리와 열반은 당나귀를 매놓는
말뚝에 지나지 않는다. 팔만대장경은 귀신장부이고, 종기의 고름을 닦아내는 휴지에 불과하다.”라고 했다.
가히 반어와 역설의 언설이었다. 그런데 덕산 선사가 이렇게 부처님을 비롯한 조사들을 욕되게 한 의도가
무엇일까?
자기보다 앞선 사람들에게 얽매임이 있어서는 결코 그 사람을 뛰어넘을 수 없다.
어떤 전통이나 권위에도 얽매이지 말고, 두려움이나 망설임이 없어야만 읽은 경문이나 들은 법문을 뛰어넘을 수 있다. 그래야만 지금껏 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비슷한 말에 ‘살불살조(殺佛殺祖)’란
말이 있다. 당 말의 고승 임제 의현(臨濟義玄) 선사 법어(法語)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말이다.---→살불살조(殺佛殺祖) 참조.
* 가비라국(迦毘羅國, 카필라밧투/Kapila-vatthu)---→카필라밧투(가비라성, 迦毘羅城, Kapila-vatthu),
정반왕(淨飯王, 숫도다나/Suddhodana) 참조.
* 가사(袈裟, 산스크리트어 kasaya)---가사(袈裟)는 승려가 입는 법의(法衣)의 하나. 동냥한 헝겊으로 이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그 이음매가 가로 세로가 마치 논두렁 같아서 전상의(田相衣)라고도 하고,
성내지 않는다는 뜻으로 인욕의(忍辱衣)라고도 하며, 물들인 옷이라 해서 염의(染衣)라고도 한다.
또 복전의, 해탈의, 출세복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공덕의(功德衣)는 공덕을 쌓는다는 의미의 옷이고,
해탈의(解脫衣)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의미의 옷이고,
출세복(出世服)은 세속을 벗어나는 옷이란 말이다. 규격에는 오조가사(五條袈裟, 일명 안타회/安陀會),
칠조(七條袈裟, 일명 울다나승/鬱多羅僧), 9조~25조가사(일명 승가리/僧伽梨)까지도 있다.
여기서 조(條)는 사각형 천 조각을 말한다. 따라서 오조가사란 다섯 조각의 천으로 만들었다는 말이다.
장삼을 입은 다음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걸쳐 끈으로 매어 고정시킨다.
우리나라 조계종의 승복은 대체로 장삼(長衫), 장삼 안에 입는 옷(평상복), 그리고 가사는 오조가사, 칠조가사,
대가사로 나누고 있다.
애초에는 사람이 내버린 옷, 죽은 사람의 옷을 주워서 만들었으나 후세에 이르러서는 가사를 만드는 재료가
풍부하고 다양해짐으로써 다소 화려해지는 등 법규에 어긋난 점도 없지 않았다.
승려의 의복을 법의(法衣)라 하는데, 법복(法服), 승복(僧服), 승의(僧衣)이라고도 한다.
근래에는 대개 가사와 장삼만을 일컫기도 한다. 부처님이 정하신 의복은 삼의(三衣)를 원칙으로 했었다.
그런데 더운 지방에 사는 이를 위해 만든 법의(法衣)로서 이것만으로 몸을 가리는 것일 뿐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중국, 일본 등지에서는 추운 날씨 관계로 가사 아래 장삼, 그 안에 내복을 입어 가사와 구별한다.
---→분소의(糞掃衣), 칠조가사(七條袈裟) 참조.
* 가섭[마하가섭(摩訶迦葉, 산스크리트어 마하까사빠/Mahākāśyapa)]---부처님 십대 제자 중 제일인자.
가섭파(迦葉波), 대가섭(大迦葉), 가섭 존자(迦葉尊者), 대음광(大飮光)라고도 한다.
불멸 후 부처님 제자들을 이끈 영도자 역할을 했으며, 불경 제1차 결집을 주도했다.
마하가섭은 마가다국 서울 라자그라하 에서 멀지 않은 마하띠라(Mahātittha)라고 하는 바라문촌 부호 집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삐빨리(Pippali)였다. 그는 결혼을 원치 않았으나 부모의 강권에 못 이겨 강제로 끌려
결혼했다. 그러나 서로의 합의로 첫날밤에 잠자리를 꽃 줄로 갈라놓고 각기 따로 잠을 잤다.
그리고 출가를 결심했다. 동시에 아내도 출가를 결심했다. 그들은 함께 머리를 자른 뒤 발우를 손에 들고
우는 하인들을 뒤로 한 채 집을 떠났고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그 후 까사빠는 죽림정사(竹林精舍)로 가서 부처님을 뵙고 제자가 됐고 아내는 비구니 교단에 출가했다.
가섭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거친 옷과 거처에 상관없이 진리를 깨치기 위해 용맹정진 해 두타제일
(頭陀第一)이라 일컬어졌으며, 부처님으로부터 첫 번째로 법을 전수 받은 제자이다(선종의 제1대 조사임).
가섭은 한곳에 삼일 이상 머물지 않았다고 한다. “이 자리는 내 자리, 이 곳은 내 자리로 정해진 곳”
한곳에 오래 머물면 이렇게 소유개념이 형성되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선종에서는 부처님의 법을 아난존자와 가섭존자가 이어 받았다고 본다. 아난존자는 팔만대장경으로 전해오는
부처님의 말씀을 통한 가르침인 교(敎)를 이어 받았고, 가섭존자는 말로서 못 다한 부처님의 비밀스런 진리인
마음을 전해 받았다고 한다. 이를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고 하는데 마음과 마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염화미소(拈華微笑)의 주인공이 바로 가섭존자이다.
선가에서는 빛을 마시는 뛰어난 존자란 뜻으로 음광승존(飮光勝尊)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부처님 당시 제자 가운데 가섭(迦葉)이란 분이 여럿 있었다.
① 첫째는 부처님의 심법(心法)을 바로 전해 받은 마하가섭(摩訶迦葉)이다.
② 둘째는 삼가섭이라고 하는 삼형제가 있었다.
삼형제 가섭은 가야성(迦倻城)이라는 지방에서 천명이나 되는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는 정신적 지도자였다. 그들은 불을 숭상하는 외도(外道)였으나 부처님을 만나 불교에 귀의했다.
③ 초전법륜 당시 녹야원에서 부처님 제자가 된 다섯 비구 중에 십력가섭(十力迦葉)이란 분이 계셨다.
와빠(Vappa, 바파)를 말한다.---→곽시쌍부(槨示雙趺), 염화미소(拈華微笑), 이심전심(以心傳心) 참조.
* 가섭마등(迦葉摩騰, 산스크리트어 Kāśyapa-mātaṅga)---중국에 불법을 최초로 전한 인도출신 승려.
축섭마등(竺葉摩騰), 섭마등(攝摩騰), 마등(摩騰)이라고도 한다. 매우 총명해 대, 소승의 경전과 계율에 통달했고, 중국 후한 효명제(AD 58~75재위) 때인 AD 67년 대월지국(大月氏國) 승려 축법란(竺法蘭)과 함께 불상과 경전을 가지고 뤄양(洛陽)에 이르러 백마사(白馬寺)를 짓고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등을 번역했는데,
이것이 중국 역경의 시초이다.---→축법란(竺法蘭) 참조.
* 가섭불(迦葉佛)---선가에서는 음역인 가섭불보다 의역인 음광불(飮光佛)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산스크리트 ‘카샤파부다(Kaśyapa-buddha)’의 음역이다. 석가모니가 출세하기 전, 인간의 수명이
2만 세였을 때, 바라내성의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바라문 종족으로 브라흐마닷타요,
어머니의 이름은 다나바티이다. 가섭불에게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라훌라라는 아들을 두었듯이 출가 전에
아들을 두었는데 아들의 이름은 집군이요, 당시 왕은 키키왕(汲毗王)이었으며,
나라의 이름은 바라나시(Baranasi)였다고 한다.
경론에 따라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과 제자, 국왕 등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다.
가섭불의 이름을 딴 마하가섭을 비롯 우루빈나가섭, 가야가섭 등이 활약하기도 했다.
장아함 제1권 <대본경(大本經)>에 의하면, 출가해 니구루다수(尼拘樓陀樹)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으며,
제자의 수는 2만 명이었다.
그 중 티싸와 바라드바가 큰 제자이고 집사 즉 비서의 직책을 맡은 제자는 사바미타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바로 전 부처님으로 과거칠불 가운데 제6불에 해당하는 분이다.
또한 현재 현겁에 일천불이 출현한다고 하는데 그 중 제3의 부처님이 바로 가섭불이다.
인간의 평균 수명이 2만 세일 때 출현한 부처님으로 이후 백 년마다 평균 수명이 한살씩 줄어 백세일 때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현한 것인데, 가섭불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만 년 전에 출현한 부처님이라 할 수 있다.
* 가섭선세(迦葉善歲)---부파불교시대 음광부(飮光部) 시조. 성은 가섭, 이름은 선세(善歲). 불멸 후 3백년(BC345~246) 말기에 활동. 어릴 적부터 어질고 총명해 7세 때에 아라한과를 얻고, 사람들의 귀의를 받았다.
또 상좌부 교의가 독자부(犢子部)ㆍ법장부(法藏部) 등으로 발전해가면서 대중에 너무 부화해 그 근본 뜻을 점점 잃어 감을 개탄하고, 상좌부 교의를 유지하기에 힘쓰는 한편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 음광부를 독립시켰다.
* 가소성(可塑性, plasticity)---대부분의 물질엔 탄성彈性)이란 게 있다. 탄성이란 외부의 힘에 의해
그 형체가 변형됐다가 힘이 제거되면 원래의 상태로 복원되는 성질을 말한다.
스프링 같은 것은 탄성이 센 물질이고, 점토 같은 것은 탄성이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가소성(可塑性)이란 점토처럼 물질이 가진 탄성 이상의 에너지가 주어졌을 때 물질이 변형한 후,
이 힘을 제거했을 때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는 성질을 뜻한다. 따라서 탄성의 반대되는 개념이다.
보통 여러 고분자에서 볼 수 있는데, 비닐을 쭉 잡아 당겨 늘어나게 한 후 힘을 제거해도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는 성질도 가소성이다. 이와 같이 원래 가소성은 물리학에서 논의하던 개념인데,
이런 가소성이 학습이나 수행을 규명하는데 응용된다.
특히 신경계 연구에서는 기억, 학습 등 뇌기능의 유연한 적응능력을 ‘뇌의 가소성’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기억, 학습에 있어서 비교적 짧은 기간 사이에 가해진 자극에 의해 뇌 내에 장기적인 변화가 일어나,
자극이 제거된 후에도 그 변화가 지속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가소성 변화가 일어나는 부위는
신경세포간의 접합부인 시냅스(synapse)이며, 적당한 자극을 가하면 그 이후 시냅스에서의 신호전달
효율이 장기적으로 변화되는 현상이 해마, 대뇌피질, 소뇌 등의 시냅스에서 나타나고 있다.
뇌기능의 가소성(可塑性)을 영어로 Neuro-plasticity라 하는데, 신경(neuron)도 플라스틱(plastic)처럼 성형이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1970년대까지는 뇌기능의 가소성을 부정했었다. 그러나 그 후 연구결과 뇌 구조는 노력
여하에 따라 변화하면 반영구적으로 유지된다고 한다. 뇌에 일정기간 이상 어떤 자극을 가하면 뇌신경계가
변화하고 유지된다는 말이다. 이런 뇌 가소성은 뉴런 피드백 뇌파훈련이 효과가 있다는 근거가 된다. 우리의
뇌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더불어 의지가 있어야 가소성이 커진다는 것이다.
※뉴런(neuron)---신경계의 단위로 자극과 흥분을 전달한다. 신경세포체(soma)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고, 신경세포체와 거기서 나온 돌기를 합친 개념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뇌는 각 부위마다 담당하는 기능이 있다고 한다. 대뇌는 기억과 감정을 담당하며, 소뇌는 평형감각과 운동능력을 담당한다는 식이다. 이러한 현상은 고정돼 있다고 해왔다. 그러나 가소성이 발견되면서 외부환경과 노력에
의해서 뇌의 담당부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뇌졸중환자가 언어능력을 상실했을 경우,
재활훈련으로 뇌의 다른 부위가 언어능력을 담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뇌 가소성에는 회복 가소성과 적응 가소성이 있다. 회복 가소성은 아동기에 신경세포가 파괴됐을 경우,
잃어버린 기능을 어느 정도 회복시킬 수 있다는 것이고, 적응 가소성은 새로운 환경과 노력(경험)으로
신경계의 스냅스가 강화 혹은 약화돼서 뇌 구조에 변화가 생긴다는 이론으로 주로 대뇌피질에서 생긴다고 한다. 이와 같은 적응 가소성은 후천적인 노력과 평생학습이 가능하다는 의미이며, 현실적인 노인성 치매 예방에
희망적인 이야기이다. 물론 나이가 어릴수록 가소성이 더 높지만 그렇다고 어른이나 노인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노인의 뇌도 가소성은 충분히 있기에 훈련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성은 있다.
훈련을 통한 긍정적인 뇌의 가소성은 훈련 이후에도 그 효과가 지속된다.
특히 최근 조사에 의하면, 건강한 70세와 건강한 20세는 뇌 혈류량과 산소 소비량에서 거의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실험실에 가만히 앉아 있는 노인들 뇌의 특정 영역들에서 사용되는 포도당의 양은 똑같이 실험실에 가만히 앉아 있는 20세들과 의미 있는 차이가 나지 않았다. 따라서 각종 질병이 없는 노인의 뇌는
얼마든지 가소성이 높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노인이 지혜롭다는 가설도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헌데 유동적 기능(流動的機能-기억할 수 있는 용량과 정보를 신속하게 처리하는 능력 등)만이 노화와 함께
유의미하게 퇴화한다. 결정적 기능(決定的機能)은 본래 유동적인 기능을 바탕으로 해 생겨나고,
개인의 문화적, 교육경험에 따라 영향을 받는 기능으로 40세까지, 환경에 따라서는 그 이후에도 발달하는
기능이다. 반면에 유동적 기능은 독특한 신체구조와 성장과정에 기초해 14세경까지 발달하지만 22세 이후
급격히 감소하는 선천적인 기능이다. 뇌 손상이나 정상 노화에 따라 감소되는 지적 능력은 유동적 기능이다.
건망증이 유동적 기능의 감소를 말한다.
이렇게 결정적 기능(決定的機能)이 노화에도 불구하고 유지되며, 심지어는 향상되고,
뇌 대사에 필요한 포도당 양이나 혈류량, 산소 소비량도 변함없이 유지된다는 사실은 노인들의 발전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래서 신경 과학자들은 현재 진행되는 뉴런들의 활동으로 인해 성숙한 뇌의 뉴런 간 연결의 강도가
바뀔 수 있다고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다. 그리하여 오늘날에 있어서는 신경 과학자들이 심지어 뇌의 노화를
환경에 규칙적인 변화를 줌으로써 상쇄시키거나 노화를 역행시킬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가소성은 종교적인 수행을 통한 행동의 변화와 용맹정진에 의한 해탈의 가능성을 과학적으로
설명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평범한 중생으로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뛰어난 조사들의 이적(異蹟)
같은 일들도 사실은 이런 가소성의 결과였던 것이다.
오늘날 교육학에서 평생교육이나 재학습(再學習, relearing)의 원리도 가소성에 기초하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도 일종의 재학습이고, 평생교육의 한 형태이다. 따라서 가소성이 그 수행에 따르는
과보에 대한 교육학적 근거를 제시한다고 하겠다. 예컨대 산사에 집거하면서 10년 동안 세간에 내려오지
않았다든지, 무문관 수행을 한다든지 하는 것도 뇌 가소성을 획득하기 위한 수행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극히 외람된 말씀이지만 한 소식했다, 득도했다, 깨달음을 얻었다 하는 것도 오랜 수행과 투철한 정진을 통해
뇌 가소성을 이루었다고도 할 수 있다.
* 가쇄난(枷鎖難)---옛날 죄인의 목에 씌우는 형구를 가(枷) 혹은 칼이라 하고, 쇄(鎖)는 발에 채우는 쇠사슬을
말한다. 따라서 가쇄난이란 죄인이 돼 목에 칼이 씌워지고 발에 쇠사슬이 채워지는 것을 말한다.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 나오는 칠난(七難)의 하나이다.---→칠난(七難) 참조.
* 가애(罣碍)---장애와 같은 말이다. 장애에는 물질적인 장애와 정신적인 장애가 있겠는데,
이 두 가지 장애가 적어야 된다. 장애가 많으면 수행을 할 수가 없다.
* 가애락(可愛樂)---<화엄경>에 잘 나오는 말이다. 가애락(可愛樂)이란 아주 사랑스럽다, 아주 좋다는 뜻이다.
그리고 <불소행찬(佛所行饌)> 파마품(破魔品)에 마왕(魔王)파순(波旬)의 셋째 딸 이름이 가애락이다.
* 가야(伽倻, Gaya)---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룬 곳으로. 부다가야(Buddhagaya) 혹은 보드가야(Bodhgaya)
라고도 한다.---→보드가야(Bodhgaya) 참조.
* 가야산(伽倻山-일명 상두산/象頭山)---부처님이 정각(正覺)을 이룬 보드가야(Bodhgaya) 부근에 있는 산이다.
가야시산이라고도 한다. 이 산을 경전에서는 상두산(象頭山)이라고 한다.
산이 코끼리 머리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코끼리 상, 머리 두자 해서 상두산이다.
이곳 현지에서는 가야Gaya)산이라고 부른다. 가야산 정상에 서면 보드가야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부처님께서는 어느 날 가야시산 정상에서 가섭 3형제와 그들이 거느린 일천 명의 제자들에 둘러싸인 가운데
삼화[三火=삼독(三毒)]를 처음 언급하셨다. 삼화란 탐(貪) ․ 진(瞋) ․ 치(痴)의 삼독심이 불타오르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은 가야시산의 산상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합니다. “수행자들이여, 온 세상이 불타고 있다.
온 세상이 불타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눈이 불타고 있다. 눈에 보이는 세상[色]이 불타고 있다.
눈의 분별[眼識]이 타오르고 있다. 눈에 보아서 즐거운 것이나, 괴로운 것이나 모두 불타고 있다.
무엇 때문에 불타오르고 있는가? 탐욕의 불이 타오르고 있다. 분노의 불이 타오르고 있다. 어리석음의 불이
타오르고 있다. 또한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근심 걱정과 고통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
이처럼 귀에서도, 코에서도, 혀에서도, 몸뚱이에서도 불이 타오르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마음에서도 불길이
훨훨 타오르고 있다.“ - <잡아함경(雜阿含經)>에 나오는 말이다.→‘삼화(三火)의 설법’, ‘불타고 있다’ 참조.
*가야산정경(伽耶山頂經)---줄여서 <가야정경>이라고 하며, 별칭으로 <대승가야산정경(大乘伽耶山頂經)>,
<가야정경론(伽耶頂經論)>이라고도 한다.
북위(北魏)시대에 보리유지(菩提流支, Bodhiruci)가 508년에서 535년 사이에 한역했다.
깨달음과 보리심, 6바라밀을 비롯한 보살도, 보살행 등에 대해 설한 경전이다.
부처님께서 가야성(伽耶城) 산정에 있는 정사에 머무실 때, 문수사리에게 방편으로 착한 행동을 하는 것과
모든 것을 통찰하는 지혜를 얻는 것 등 보살이 닦는 모든 수행은 공(空)의 이치에 바탕하고 있음을 강조하신
내용이다. 동일한 원본에 대한 이역본인 <불설상두정사경(佛說象頭精舍經)>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본문은 아래와 같이 시작된다.
* 가오욕(呵五欲)---선(禪) 수행에 들어가려면 일상생활 속에서의 번잡함, 사람들과의 관계, 생활에 관련된
잡다한 일들, 문자에 대한 집착 등으로부터 벗어나 모든 것을 내려놓은 상태에서 수행에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잡념 없이 수행정진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달마(達摩) 대사는 2조(二祖) 혜가(慧可)에게 이르기를,
“밖으로 모든 반연을 끊고 안으로 헐떡거림이 없어,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도(道)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했다.
그리고 수나라 시대에 천태 지의(天台智顗, 538~597) 대사는 선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갖추어야 할
5가지 항목을 제시했다. 즉, 구오연(具五緣) ․ 가오욕(呵五欲) ․ 기오개(棄五蓋) ․ 조오사(調五事) ․ 행오법(行五法) 다섯인데, 다섯 항목에도 각기 다시 다섯 사항이 있어서 이를 ‘25방편(方便)’이라 한다.
이 중 가오욕(呵五欲)이란 다섯 가지 욕망을 경계하라는 것으로서, 선 수행을 위한 준비로서
색(色) ․ 성(聲) ․ 향(香) ․ 미(味) ․ 촉(觸)이라는 인간의 다섯 감각기관에서 나오는 욕망에 반연하는 외적 조건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사람마음을 현혹시키는 아름다운 이성의 외모나 진귀한 물건, 고운 옷[色], 귀를 자극하는
온갖 소리, 음악[聲], 향기로운 냄새, 화장품[香], 미욕(味欲)을 부추기는 맛있는 음식[味], 따뜻하고 부드러운 촉감[觸] 등을 조심하라는 말인데, 정해진 계율뿐만 아니라 수행자 자신을 유혹하고 속박하는 외적 조건들을
경계하라는 말이다.---→오구연(具五緣), 기오개(棄五蓋), 이십오방편(25方便) 참조.
* 가이아(Gaia)의 이론---영국의 제임스 러브록(James Ephraim Loveloc)이 창시한 지구 시스템을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인 가이아로 보는 이론. 즉, 가이아 이론은 인류가 존속할 수 있는 물리ㆍ
화학적 환경을 유지하는데 전 지구의 생물권이 관여하고 있다는 이론이다.
가이아(Gaia)란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 이름이다.
현재 가이아이론은 과학계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이는 지구 환경변화에 대한 세계 과학자들의
선언문인 2001년 ‘암스테르담 선언’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또한 최근에는 지구온난화의 재앙을 경고하고
그 대책을 제안한 <가이아의 복수(2008)>, <가이아의 사라지는 얼굴(2009)> 등 저서를 통해
다시금 환경오염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줬다.
가이아이론에 있어서 ‘지구 생태계 전체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는 가설들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가이아는 스스로 모든 생물들에게 적합한 환경을 만들어 준다. 따라서 인간이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는다면, 가이아는 그 속성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
둘째 가이아는 생물과 같은 중요한 기관들과 함께 부속기관을 가지고 있어 필요에 따라
신축 ․ 생장 ․ 소멸이 가능하고, 장소에 따라 역할이 달라질 수 있다.
셋째 가이아는 매우 정교한 자기조절 체계처럼 스스로를 조절하고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가이아(Gaia)가설은 지구상의 모든 구성요소들이 서로 밀접하게 상호 작용하며, 물리적ㆍ화학적 환경을
생명현상에 적합한 상태로 유지하는 최적조건을 유지하려고 언제나 자기 제어기능을 갖추고
자기 스스로 조정하고 스스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 가설은 지지자들이 증가해 현재는 지구가 생물과 무생물로 구성된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로서
자가조절(self-regulating) 기능으로 환경을 조절해 존속돼 왔다는 주장이 일반화돼 있다.
그런데 인류는 이제까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지구의 다른 생물권을 무자비하게 착취한 암적 존재였다.
따라서 지구를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로 간주하는 이와 같은 가이아 이론이 주는 암시는 불교의
동체대비(同體大悲)나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 사상의 가르침이 인류의 지속적인 생존을 위해
불가결의 사상임을 가리키고 있다.
<화엄경> 핵심철학은 한마디로 ‘제망중중 무진연기법(帝網重重無盡緣起法)’이다.
이 말은, 연기법 세계관으로 볼때 세계는 본래 그물코처럼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생명공동체라는 것이다.
즉, 세계가 마치 살아있는 그물이라면 낱낱의 존재들은 그물코 같이 서로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관계에 있다.
이렇듯 세계는 본래부터 한 몸 한 생명의 생명공동체여서 함께 평화롭게 사는 길밖에 없다는 말이다. 마치 2000년 후의 가이아 이론을 예견하고 있는 듯한 언설이다.
즉, 2000년 후의 가이아 이론은 인간 중심적인 생각을 일변시켰다. 이러한 입장에서 말한다면 지구는
인류만을 위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인류는 지구라는 생명체를 구성하는 한낱 세포에 불과한 것이다.
우주시대를 의식한 인간의 시야가 지구의 생명권을 현실적인 대상으로 삼게 된 것이다. 우주시대라는 이 현황
속에서 가이아 이론은 크게 각광을 받게 됐다. 지구 생태계의 위기상황이 여러 각도에서 심각해지고 있다.
특히 지구가 무진장의 착취 가능한 자원을 갖고 있다는 기본적인 시각이 바뀌고
'우주선 지구호'를 실감하게 된 것이다.
지구는 우주를 여행하는 무기적인 수레가 아니라 모든 생명을 내장하는 유기적인 생명체 '가이아'로
바뀌어가고 있다. 지구는 살아있다. 러브록은 "기분 좋게 지구를 안을 때는 지구 전체가 성스러운 축제를
즐기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지구의 생명력은 수많은 생물의 종은 물론
유기물뿐만 아니라, 무기물까지를 포함해 서로 의존하면서 유지되고 있다.
선게(禪偈)에 나타나는 “산천초목은 물론 인간의 배설물까지도 불심이 있다. [실유불성(悉有佛性)].”의 정신은
아무리 보잘것 없는 것이라도 서로 의존하며 타(他)의 생존을 유지하게 한다는 내용을 말하고 있다.
이렇듯 불교에서 살생을 금하고 불필요한 소비를 최대로 억제하는 정신은 가이아 이론의 사상체계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불교와 가이아 이론의 발상법에 의하면 각 개체는 전체의 생명을 구형하고 있다. 즉 다즉일 일즉다(多卽一 一卽多)의 세계이다.
그런데 오늘날 서양에서 개아를 초월한 트랜스퍼스널 심리학(Transpersonal psychology)이 발달하고 있음도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즉, 개인(person)을 초월(trans)해 가족, 이웃, 사회, 각종 생물, 자연, 지구, 우주 등
모든 존재는 서로가 깊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개인이 병들면 연이어 가족이 병들고, 이웃, 사회, 생물,
자연이 병들며, 지구가 병든다고 보는 전포괄적 접근(holistic approach)의 시각이다.
마치 <화엄경>의 상의상관(相依相關), 중중무진(重重無盡)한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를 말하는 듯하다.
그리하여 서양의 근대 가치관의 근간이 돼 온 합리주의(rationalism), 개인주의(personalism), 객관주의(objectivism), 기계론적 세계관(mechanistic world view) 등에 대한 다각적인 재검토가 가해지고 있는 것이다.
뒤 늦게 화엄의 세계가 서양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 서구 학계에서 개아(個我)를 초월한 트랜스퍼스널 심리학(Transpersonal psychology)이
발달하고 있음도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즉, 개인(person)을 초월(trans)해 가족, 이웃, 사회, 각종 생물, 자연, 지구, 우주 등 모든 존재는 서로가 깊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개인이 병들면 연이어 가족이 병들고, 이웃, 사회,
생물, 자연이 병들며, 지구가 병든다고 보는 전포괄적 접근(holistic approach)의 시각이다.
이 또한 가이아의 이론이 심리학적 확장을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동체대비(同體大悲), 화엄 사법계(華嚴四法界),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 주반원명구덕문(主伴圓明具德門), 다즉일 일즉다(多卽一 一卽多) 참조.
* 가잉방불(假孕謗佛)---부처님이 전도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됐을 때의 일이다. 부처님의 명성은 날로 높아갔고 반대로 외도의 이름은 땅에 떨어져 그들을 따르는 무리는 줄어들었다. 외도들은 부처님의 명성이 계속 높아지면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공양을 올리지 않을 것을 두려워해 부처님의 이름을 손상시킬 음모를 꾸몄다.
외도들은 그들의 여신도 가운데 미모가 뛰어난 처녀를 불자인 것처럼 가장시켜 부처님이 설법하는 장소에 자주 들락거리게 했다. 그녀는 설법을 들으러 올 때마다 치마 속에 헝겊을 조금씩 감아 임신한 여인처럼 배를 부르게 했다.
어느 날 그녀는 치마 속에 큰 바가지를 넣어 만삭인 것처럼 꾸며 설법하는 자리에 나타났다.
미리 음모를 꾸민 한 외도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물었다.
“그대는 처녀의 몸으로 왜 이렇게 배가 부른가.”
“오랫동안 고타마 사문 처소에 다니다보니 정을 통하게 돼 임신했습니다.”
처녀가 거짓말을 하자 외도들은 부처님을 거짓 성자라고 비난하면서 사람들을 향해 속지 말라고 선전했다.
사람들은 외도의 음모에 속아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때 한 착한 사람이 부처님이 임신을 시켰을 리가 없다면서
처녀의 배를 만져 봤다. 외도들의 음모는 금방 탄로가 나고 진실은 밝혀졌다. 이를 가잉방불(假孕謗佛)이라 한다.
* 가전연(迦旃延, 빠알리어 Mahā-kaccāyana, 산스크리트 Mahakatyana) 1)---마하가전연(摩訶迦旃延),
가연 (迦延子)라고도 한다. 인도 서쪽에 있던 아반티국(avanti國) 크샤트리아 출신이다.
왕명에 따라 부처님을 그 나라로 초청하기 위해 찾아갔다가 출가했다고 한다. 부처님 10대 제자의 한 사람으로 부처님 말을 논리정연하게 해설해 논의제일(論議第一)이라는 말을 들은 4대 성문(聲聞)의 한 사람이다.
설법 제일이었던 부루나(富樓那) 존자조차도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모양이다.
설법 제일인 부루나와 논의 제일인 가전연을 비교하면 부루나는 재가자들을 상대로 말하는데 뛰어났고,
가전연은 출가자들에게 논리적이고 학문적인 해설을 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 한다고 한다.
많은 내용을 요약해 핵심만을 말하기도 하고, 너무 간략해 뜻이 모호한 내용은 자세하게 풀어서 설명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가전연은 총명한 머리로 명석 판명한 논리를 구사해 붓다 말씀을 해설하는데 걸림이 없었다.
그래서 증일아함(제2지품)에서는 “잘 뜻을 분별해 진리를 펴는 데는 가전연 비구가 으뜸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그만큼 논리력이 뛰어나 여러 가지 논서의 저자로 추정된다.
* 가전연(迦旃延, 산스크리트어 Kaccayana) 2)---여기 가전연은 부파불교 시대 설일체유부의 논사로서,
AD 2세기경에 행해진 북방불경 제4차 결집(結集) 때, 이에 참여해 <아비달마 대비바사론> 편집을
주도했다고 한다. 그런데 불경 제4차 결집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 하나는 불멸 600년경(AD 2세기경) 인도를 통일한 쿠샨왕조(대월지국/大月氏國) 카니시카(Kaniska)왕
후원으로 협(脇, 파르스바/Parsva) 존자를 중심으로 해서, 세우(世友), 법구(法句), 묘음(妙音), 각천(覺天) 등
500나한이 북인도 지금의 인도 캐시미르 지방 건다라국(乾陀羅國) ― 혹은 쿠샨왕국의 수도 환림사에 모여
<아비달마 비바사론> 10만송 등을 짓고, 율장, 논장을 해석하니, 모두 30만송의 주석서를 편집했다고 한다.
이때 산스크리트어가 불교 공식어가 됐다. 그리고 이때 결집된 경전이 중국에 전해졌기에 중국엔
산스크리트어 불경이 전파됐다.
• 다른 하나는 불멸 후 400년경(BC1세기말~AD1세기초) 500명 나한들이 모여 가전연(迦旃延) 나한을
상좌로 하고 마명(馬鳴)보살을 판수로 해서 <아비달마 비바사론> 1백만 게(偈)를 지었다는 설이다.
어느 주장이 맞는지 확실한 논증이 안 되고 있다. 아무튼 설일체유부 논사 가전연이
불경 제4차 결집에 참여해 <아비달마 비바사론> 편집에 공헌했다고 전해진다.
* 가전연경(迦旃延經, 빠알리어 깟짜야나 고따 숫따(Kaccāyanagotta Sutta)---초기경전 상윳따 니까야
[Samyutta Nikaya - 상응부 아함경(相應部阿含經)]에 실려 있는 초기불교에서 가장 핵심 되는 경의 하나이다.
주요 내용은 연기와 중도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연기와 중도의 관계는 <가전연경>을 이해
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다. <가전연경>은 있다(有, atthi) 없다(無, natthi)는 단정적 견해로 이 세상을 파악하지 말고 일어나고(samudaya, 起) 사라짐(norodha, 滅)이라는 연기적 사유로 세상을 꿰뚫어 보라고 한다.
이 경은 용수(龍樹, 나가르주나)의 <중론(中論)>의 근거가 되기도 하듯이 대승불교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경의 내용을 보자. <가전연경(깟짜야나 고따 숫따)>
•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 제따와나의 급고독원에 머무셨다.
• 그때 깟짜야나 고따 존자가 세존을 뵈러갔다. 뵈러가서 세존께 큰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 한 곁에 앉아서 깟짜야나 곳따 존자는 세존께 이와 같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올바른 견해[正見], 올바른 견해라고들 합니다. 무엇이 올바른 견해입니까?
• 깟짜야나여, 이 세상은 거의 모두가 둘을 의지하고 있나니 '있다(atthi)'거나 '없다(atthi)'는 것이다.
• 세상의 일어남(samudaya)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는 세상들이 없다는 그런 [견해가] 없다.
세상의 소멸(nirodha)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는 세상들이 있다는 그런 [견해가] 없다.
• 깟짜야나여, 세상은 대부분 끌림과 취착 때문에 독단적 해석에 계박이 돼버린다. 그리고 그런 끌림과 취착,
마음의 고집, 독단적 신조(편견), 잠재성향을 ‘나의 자아이다(attaa me)’라고 따라가지 않고, 취착하지 않고,
고집하지 않는다. 고(苦)가 생겨나면 생겨나는구나, 고가 멸하면 멸 하는구나 라고 해서 의심하지 않고 혼동하지 않는다. 여기서 [이런 것이] 그가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은 지혜이다. 이런 것이 참으로 바른 견해[正見]이다.
• 깟짜야나여, ‘모든 것은 있다’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은 없다는 것은 두 번째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여래는 이들 두 극단을 따르지 않고 중간에 의해서 법(dhamma)을 설한다.
• 무명을 반연해 [업] 형성들(상카라)이 있고, [업] 형성들을 반연해 알음알이가 있고, 알음알이를 반연해
정신 - 물질이 있고, 정신 - 물질을 반연해 여섯 감각장소가 있고, 여섯 감각장소를 반연해 감각접촉이 있고,
감각접촉을 반연해 느낌이 있고, 느낌을 반연해 취착이 있고, 취착을 반연해 존재가 있고, 존재를 반연해
태어남이 있고, 태어남을 반연해 늙음과 죽음과 근심ㆍ탄식ㆍ육체적 고통ㆍ정신적 고통ㆍ절망이 있다.
이것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일어남이다.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면 [업] 형성들이 소멸하고…
이것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소멸하는 것이다.
<가전연경>의 핵심은 상견과 단견이라는 양 극단을 떠나서 여래는 중도에 의거해서 법(法),
즉 연기(緣起)를 설한다는 것이다. 이 경에는 부처님이 정등각(正等覺)한 내용, 즉 중도(中道)와 정견(正見)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있다. 따라서 부처님 당시뿐만 아니라 그 뒤에도 <가전연경>에 대해서 논의가 많았다.
그런 만큼 아주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고, 또 중도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알려면 이 <가전연경>을
잘 알아야 한다. 여기서 가전연이란 붓다 10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논의제일(論議第一)이었던
마하가전연(摩訶迦旃延) 존자를 말한다.
* 가제(假諦)---삼제(三諦)란 용수(龍樹, 나가르주나)가 지은 <중론>에서 중도사상을 간명하게 표현한 것이다.
즉, 공(空)ㆍ가(假)ㆍ중(中)의 세 글자로 중도사상을 간결하게 요약한 것이다.
이 삼제게는 불교의 중도사상을 잘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천태종(天台宗)의 근본교의 이기도 하다.
중국 당나라 시대 천태종의 개조 지의(智顗)스님이 전개시킨 세 가지 진리관 역시 삼제이다.
즉 공제(空諦)ㆍ가제(假諦)ㆍ중제(中諦)의 셋이다. 여기서 ‘제(諦)’는 진리 라는 의미 이다.
여기서 ‘가(假)’란 ‘임시’라는 의미이다. 이 가제란 일체의 존재하고 있는 것은 여러 가지 요소가 여러 가지
인(因-원인)과 연(緣-조건)에 의해 임시로 화합해 형성됐다고 보는 것이다.
즉, 모든 존재는 일정한 기간 임시로 존재하는 인연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서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사물의 표면에 나타난 모습, 다시 말하면 현상(現象)의 면에 눈을 돌렸을 때의 인식이라고 하겠다.
이 일체의 현상은 여러 가지 요소가 인연에 의해 임시로 화합(和合)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로서,
이를 거꾸로 말하면 일체 모든 것은 그것을 형성하고 있는 원인과 조건이 없어지면 그 형태도 무너져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간단하게 말하면 생긴 것은 반드시 없어진다 ― 고 하는 냉엄한 법칙이라 하겠다.
가(假)는 유(有)라고도 하므로 공(空)의 반대 현상이다. 모든 사물이 공한 자리에 나타나는 모든 사물의 현상을
그대로 임시 거짓으로 모인 인연이 존속하는 한, 존속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의 반대현상인 유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들이 흔히 ‘있다’라고 말하는 따위는 아니다.
즉, 가제란 일체의 현상은 덧없는 것이며,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무상관(無常觀)에서 사물을 보는
입장이다. 이와 같이 현상계를 꿰뚫고 있는 냉엄한 무상(無常)의 법칙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응시해 가는 태도에 입각하고 있다.
* 가지(加持, 산스크리트어 adhisthana)---가지(加持)란 대자대비한 불ㆍ보살의 가호를 받아 중생이
깨달음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가피(加被)와 같은 말이다.
부처님의 위대한 힘이 나에게 더해지고 나는 그 힘을 받아 지니기 위해 힘쓰는데, 구체적으로는 여러가지
수행이나 의식에 의해 부처님의 힘을 자기가 얻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하는 행위 전반을 가리킨다.
가지의 가(加)는 가피加被), 지(持)는 섭지(攝持)의 뜻으로 호념(護念), 가호(加護) 등으로 번역도 한다.
즉 ‘가(加)’는 부처님이 지닌 대비심의 힘이 수행자에게 가해지는 것이고, ‘지(持)’는 수행자의 신심에 부처님이
감응하는 것을 수행자가 받아 지니는 것을 말한다.---→가피加被) 참조.
* 가지성불(加持成佛)---중생이 열심히 수행을 하고, 부처님을 흠앙하는 신심(信心)을 나타내면 부처님이
베푸는 대비력(大悲力)과 서로 어울려서 범부에게 본래 갖추어진 불성(佛性)이 나타나게 되는 것.
즉 수행하는 자의 공부가 깊어감에 따라 부처님 위력이 가지(加持)돼 성불하는 상(相)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밀교에서는 수행을 통해 붓다 삼밀(三密)과 중생의 삼밀이 깨달음을 통해 하나가 되는 경지,
즉 중생과 부처님 법신(法身)이 일여(一如)하게 되는 경지이다. 삼밀(三密)이란 신(身) ‧ 구(口) ‧ 의(意)
삼업을 이르는 말인데, 수행을 열심히 하면, 중생의 삼밀이 대일여래 삼밀과 일치하게 돼 중생과 대일여래가
한 몸을 이루는 경지가 되는데, 이것을 가지성불이라 한다.
* 가타(伽陀, 산스크리트어 gatha)---번역해서 게송이라 하며, 게타(偈陀) 혹은 가타(伽陀)라고도 한다.
---→중송(重頌), 게송(偈頌) 참조.
* 가피(加被)---가비(加備)ㆍ가호(加護)라고도 하는데, 가지(加持)와 비슷한 말이다.
부처님이나 보살이 자비의 힘을 베풀어 중생에게 이롭게 힘을 주는 것. 온 마음을 다 기울여 기도를 했을 때
부처님에게서 받는 과보인데,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 은총이라는 말과 비슷한 의미이다.
‘가(加)’는 부처님께서 내려주시는 것을 말하고, ‘피(被)’는 우리가 받는 것을 말한다.
종교 생활이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어떤 말을 일심으로 외우거나 대상(부처님)을 열심히 부름으로 해서,
자기 마음의 안온함을 얻는 것이다. 가령 어떤 재난을 극복하게 되는 것은, 주문을 외우거나 부처님을
찾음으로 해서 자기의 마음이 변화하고, 마음의 변화로 인해, 실망에 빠진 사람이 용기를 얻거나,
게으른 사람이 부지런해져서 새로운 환경을 창조(創造)해 내는 것이다. 그래서 어렵다고 생각했던 환경도
이겨내고, 안된다고 생각했던 일도 처리해내면, 이른 바 그것을 부처님의 가피(加被)라고 한다.
그런데 가피는 가만히 있는 자에게 내리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노력하는 자에게만 내린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과 같다.
가피에는 3종 가피가 있다. 즉, 몽중가피(夢中加被), 현증가피(顯證加被), 명훈가피(冥熏加被)가 그것이다.
1) 몽중가피(夢中加被) ― 꿈을 통해 불ㆍ보살이 나타나 소원성취를 예견하는 것.
1) 현증가피(顯證加被) ― 지극한 기도가 인연이 돼 눈앞에 바로 드러나는 가피를 말한다. 살아가면서 현실에서 직접 영험을 받는 것.
3) 명훈가피(冥熏加被) ― 은근히 자기도 모르게 은혜를 받는 것.
그리고 가피의 내용에는 ① 자리(自利)와 ② 이타(利他) 두 가지가 있고, 가피의 상(相-가피의 모습)에는
① 어가(語加-말씀으로 가피하다), ② 의가(意加-마음으로 가피하다), ③ 신가(身加-몸으로 가피하다),
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가지(加持) 참조.
* 가행(加行, 산스크리트어 prayoga)---가행이란 힘을 더해 더욱 정진한다는 의미로서, 더욱 힘써서 마음과
계행(戒行)을 닦고 수행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떤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본래의 수행에 힘을 더해 행하는
것을 말한다.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에서는 가행으로 얻어진 결과를 가행과(加行果)라 하고,
번뇌를 끊는 준비로서 수행하는 단계를 가행도(加行道)라고 한다.---→가행도(加行道) 참조.
* 가행도(加行道)---번뇌를 끊고 해탈하는 과정을 네 단계로 나눈 것을 말하며, 사도(四道), 수행사도(修行四道)
혹은 4종도(四種道)라고 하는데, 가행도(加行道), 무간도(無間道), 해탈도(解脫道), 승진도(勝進道)의 4단계이다.
이 중 하나인 가행도는 방편도(方便道)라고도 한다. ‘가행’이란 힘을 더해 더욱 정진한다는 의미이고,
가행도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수행하는 과정의 첫 단계로서 번뇌를 끊으려고 다시 힘을 더해
수행하는 기간을 말한다.---→사도(四道) 참조
※무간도(無間道)---간격이나 걸림 없이 지혜로써 번뇌를 끊는 단계. 즉, 바르게 번뇌를 끊는 도를 말한다.
※해탈도(解脫道)---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단계. 무간도를 닦은 다음에,
진리를 깨닫고 해탈을 성취하는 것.
※승진도(勝進道)---뛰어난 수행으로 해탈의 완성에 이르는 단계.
* 가행위(加行位)---유식불교(唯識佛敎) 이론에 보살이 부처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나아가는 수행단계로서
수도5위(修道五位)가 있다. 자량위(資糧道), 가행위(加行道), 통달위(通達位), 수습위(修習位), 구경위(究竟位)의
다섯 단계가 있어 이를 수도5위라 한다.
제1위인 자량위(資量位)는 깨달음을 실제로 체험하기 위해 수행에 필요한 복덕과 지혜를 쌓는 준비단계로서,
나와 네가 서로 짝으로 존재하고 상대적이고 의존적이라는 생각을 하는 상태이다. 이에 비해 제2위인
가행위(加行位)는 힘을 더해 더욱 정진하는 것으로 실질적인 유식수행(唯識修行)의 가장 중요한 영역이다.
제1위 자량위 단계가 복덕과 지혜로서 내적인 자질과 역량을 키우는 단계라면, 가행위는 본격적으로 노력하는
단계로서 인식의 주객이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통찰해 현상을 나와 너 또는 나와 대상으로 분별해서
받아들이는 정신적 습관을 자각하고, 그러한 습관을 제거하는 훈련을 닦아나가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는
참된 유식(唯識)의 도리를 깨닫는 것을 다섯 단계가 있어 이를 수도5위라 한다. →수도5위(修道五位) 참조.
* 가행정진(加行精進)---불교수행에서는 일정한 기간을 정하고 평상시보다 한층 더 정진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가행정진(加行精進)이라고 한다. 용맹정진의 별명이 가행정진이다. 따라서 가행정진은 기간을 정해놓고
하는 방법이 보통이다. 7일, 21일, 100일 등으로 할 수 있다. 단, 유념할 것은 처음부터 너무 욕심을 내 길게
기간을 잡으면 중도에 포기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기도가 탄력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는 100일 기도를 하기 위해서 3일, 7일 등 짧은 워밍업의 기도를 해 봐야 한다. 이는 3000배를 시도하기 위해 며칠간 300배, 500배 등을 하는 것과 같다.
기도 분량도 너무 많이 잡으면 나중에 감당이 되지 않아서 그만두는 수가 많으므로 마음만 앞서서는 안 된다.
또한 천일기도 등 장기적인 가행정진을 하는 불자들은 100일 단위로 끊어서 입재, 회향을 반복하면 훨씬
기도가 잘 된다고 한다.
가행정진 중에는 가급적 오계(五戒)를 범하지 말아야 하고, 혹시 무슨 일로 당일 기도를 놓칠 경우는
다음날에라도 보충하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100일 정도만이라도 가행정진을 제대로 한다면
그 법열은 이루 말할 수 없다.
* 각(覺, 산스크리트어 vitarka, 빠알리어 vitakka)---간단히 말하면 깨달음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불교에서는
그쓰임에 따라 해석에 차이가 있다. 우선 <대승기신론>에서 설명하는 각(覺)의 의미를 살펴보자.
「각(覺)의 뜻은 마음의 바탕이 망념을 여읜 것을 말한다. 망념을 여읜 모습은 허공계와 같아 어떤 곳이라도
두루 하지 않는곳이 없는 법계와 같은 모습이니 곧 여래의 평등한 법신(法身)이다.
이 법신으로 말미암아 본각이라고 한다.
(所言覺義者 謂心體離念 離念相者 等虛空界 無所不遍 法界一相 卽是如來 平等法身 依此法身 說名本覺).」 했다.
이러한 ‘각(覺)’은 크게 두 가지 뜻으로 나뉘어 쓰인다.
첫째는 산스크리트의 ‘bodhi’ 곧 보리(菩提)를 옮긴 말로, 부처님의 깨달음을 말할 때에 가장 완벽하고 지극한
최상의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구경각(究竟覺)ㆍ무상각(無上覺)ㆍ정각(正覺)ㆍ대각(大覺) 또는
아뇩다라 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三菩提), 곧 더없이 높고 가장 올바른 깨달음[無上正等正覺]이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을 중국에서는 각자(覺者)라고도 번역한다.
다만 보살들의 깨달음은 아직 원만하지 못하고 부분적인 깨달음이라는 뜻으로 수분각(隨分覺)이라 하며,
삼현위(三賢位)의 성자와 이승(聲聞乘·緣覺乘)은 아직 참된 이치를 완전하게 얻지는 못했으나
비슷하게 깨달았다고 해서 비슷한 깨달음[상사각(相似覺)]이라 한다.
또 범부는 깨치지 못했기 때문에 불각(不覺)이라고 한다.
그리고 깨달음(bodhi:菩提) 그 자체의 본질을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의 둘로 나누기도 한다.
본각이란 본디의 깨달음 성품[각성(覺性)]을 일컫는 것으로, 근본진리의 참된 본체[眞本體]인 진여(眞如)의
이체(理體)를 말한다. 이 진여의 이체인 본디의 깨달음 성품은 누구나 모두 갖추고 있으나, 중생은 오랫동안
무명(無明)의 삶에 물들어 무지와 욕망의 노예가 돼 어둠[迷惑] 속에 헤매고 있어 모르고 있다.
이러한 진실을 알고 이성의 본체를 비로소 깨닫는 것을 시각(始覺)이라고 한다.
본래 갖추어져 있는 깨달음이 본각이며, 시각은 수행을 통해 비로소 얻어지는 깨달음을 가리킨다.
이 두 가지 깨달음을 이각(二覺)이라 하고, 여기에 구경각(究竟覺)을 더해 삼각(三覺)이라 하며,
이 세 가지에 다시 앞의 상사각과 수분각을 합쳐 오각(五覺)이라 한다.
둘째는 산스크리트로 ‘vitarka’의 구역(舊譯)으로 각관(覺觀 :신역은 尋伺)의 앞부분인 각(覺 : 신역은 尋)을
이른다. 당나라 현장(玄奘) 이후로 심(尋)이라 번역하고 그 이전에 각이라 번역했던 이 비타르카(vitarka)는
선정의 마음[定心]을 방해하는 마음[心相] 중에서 거친 정신작용을 말한다.
이와 같이 범어로 ‘vitarka’인 각(覺)을 현장(玄奘) 스님은 심(尋)으로 번역했다.
그런데 ‘심사(尋伺)’에서 심(尋)은 거칠고 개괄적으로 사유하는 마음작용이며, 얕은 사유를 말하고,
사(伺)는 자세하게 고찰하는 마음작용, 깊은 사유를 말한다고 했다. 이상의 내용으로 한 각(覺)을 다시 정리하면,
첫째, 몇 가지 용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 보리(菩提)의 신역(新譯)인 각(覺)으로, 사물의 도리를 분명히 아는 것.
• 미(迷)함을 떠나 진리실상을 증득하는 것. • 성불(成佛)의 경지. • 불과(佛果)를 얻는 것 등을 의미한다.
그런데 소승불교에서는 불행의 원인을 번뇌라 했는데, 번뇌를 끊어버리고 삼혹(惑ㆍ業ㆍ苦)을 끊은 경지를
각(覺)이라고 했다. 그리고 즉신성불(卽身成佛)을 내세우는 대승불교의 <법화경> 등에서는,
번뇌를 끊지 않아도 각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둘째, 비타르카(Vitarka)를 각(覺) · 심(尋)이라고 번역한다.
관(觀)이 대상의 정밀한 관찰인데 비해, 대상의 대강만을 식별하는 마음작용을 각(覺)이라고 한다.
셋째,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각(覺)으로, 아뢰야식의 본체, 곧 진여(眞如)ㆍ불(佛)의 이체(理體)를 말하는데,
불(佛)의 삼신(三身)으로 말하면 법신에 해당하는 것을 각이라고 했다.
이상과 같이 각(覺)은 간단히 말하면, 깨달음을 의미하지만, 그 쓰임의 용처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 각관(覺觀)---각관은 사물을 지각함으로써 생긴 표상을 비교하고 추상하고 총괄하는 마음작용을 말한다.
각관은 총체적으로 사고하는 큰 생각과, 미세한 관찰을 말한다. 우리가 사물을 보고 거기서 분별하고
느끼고 아는 것을 각관(覺觀)이라고 한다. 들어서 느끼고, 알고, 거기서 판단하는 것이다.
‘각(覺)’은 사물을 미루어 짐작하는 마음의 작용 중에서 비교적 엉성한 작용을 말하고, ‘관(觀)’은 각보다는 조금 더 자세한 마음으로 분별하는 작용을 말한다. 이 둘은 모두 선정(禪定)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한다고 한다.
현장(玄奘) 이후 유식(唯識)에서는 이를 심(尋, 거칠게 관찰함)과 사(伺, 자세히 살핌)로 번역했다.
각(覺)은 산스크리트어로 vitarka로서 현장은 사(尋)로 번역했으며, 언어로 개념화하고 서술하는 단계의
인식 양상이다. 그리고 현장은 관(觀)을 사(伺)로 번역했으며, 언어로 서술되기 이전의 상념(想念) 단계를 말한다. 따라서 각관(覺觀)은 대상을 파악함에 있어서 언설로써 개념화하지 못하고 의식 속에 형상화하거나, 언설의
작용에 의해 개념화해서 객체화하는 작용으로서 이것에 의해 대상을 정립하므로 희론(戱論)이 이루어진다.
<대지도론>「초품중시바라밀」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수행자에게 이 각관(覺觀)이 좋은 법으로 생각되나, 실제로는 선정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마음에서 그것을 여의기 위해 말하기를 ‘이 각관이 선정을 요동시킨다’고 한다.
비유하면 맑은 물에 파도가 치면 비치지 못하는 것과 같으며, 또 몹시 피로한 사람이 쉴 틈을 얻어
자려고 할 때 곁의 사람이 부르면 갖가지로 어지러워지는 것과 같다.
이러한 인연으로 각관을 꾸짖어 없애면 속으로 청정해지고 기쁘고 즐거워서 제2선(禪)에 들어간다.”고 했다.
다음은 <육묘법문(六妙法門)>에 나오는 말이다.
“수행하는 사람이 숨을 헤아릴 때를 맞이해 세심하게 훌륭한 솜씨로 마음을 제약해 헤아리는
법문과 숨에 연유해 미세한 각관(覺觀: 선정의 장애가 되는 마음의 작용)도 일어날 수 없게 하면,
찰나간에도 다른 생각이나 분별심이 생기지 아니한다. 이것은 헤아리는 가운데 마음을 한 곳에 모으는
묘문(止門)이 성취된 것을 뜻한다.”라고 했다.
다음은 <잡보장경(雜寶藏經)>에 나오는 말이다.
욕심의 원인을 보건대, “진실로 그러합니다. 하늘 가운데 하늘이시여, 저는 지금 부처님께 그 이치를 듣고
의심 그물이 없어졌습니다.” 제석은 큰 기쁨이 생겼다. 그리하여 다시 다른 이치를 여쭈었다.
“욕심은 무슨 인(因)으로 생기고 무슨 연(緣)으로 자라며,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습니까?”
이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욕심은 각(覺)으로 인해 생기고, 각관(覺觀)으로 반연해 자란다.
각(覺)이 있으면 욕심이 있고, 각관(覺觀)이 없으면 욕심은 곧 사라지느니라.”
<대지도론>에서 말했다. “마음을 거두면 말이 없을 것이요, 마음이 흐트러지면 말이 있을 것이다.
설법은 각관(覺觀)에서 나오고, 각관이란 거친 일이다. 부처님에게 이런 거친 일은 없을 것이다.”
* 각(覺) ― 사념(생각)의 시작
* 관(觀) ― 사념(생각)의 이어짐
* 각덕(覺德)---신라 진흥왕 무렵의 승려. 성품이 총명하고, 학문이 뛰어났으며, 법을 구하러 중국 양(梁)나라에
건너갔다. 이것이 신라 승려로서 중국에 가서 법을 구한 최초의 일이다. 그리고 진흥왕 10년(549) 양나라
사신과 함께 부처님 사리를 가지고 귀국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 부처님 사리가 처음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때 임금은 백관으로 하여금 예의를 갖추고 흥륜사(興輪寺) 앞길까지 나가서 그를 맞이하게 했다고 전한다.
* 각천(覺天)---본명은 불타데바(佛陀提婆, Buddhadeva)이고, 발타제바(勃駝提婆)라고도 한다.
각천은 AD 1세기경 부파불교시대 설일체유부에 속했던 학승으로, 법구(法救, Dharmatrata),
묘음(妙音, Ghosa), 세우(世友, Vasumitra)와 더불어 바사 4대논사(婆沙四大論師)의 한 사람이다.
※ 바사(婆沙)---비바사(毘婆沙)의 준말. 비바사는 산스크리트어 vibhāṣā의 음사로서 각종 불경의 주석(註釋)
혹은 주석서(註釋書)를 말함.
* 각필(角筆)---각필이란 신라인들이 한자를 읽기 쉽도록 해석이나 발음을 적어 넣은 옛 글자인 구결(口訣)이
적힌 것을 말한다. 각필은 옛사람들이 경전 등을 읽을 때 뜻이나 독송을 위해 달은 읽기 부호다.
각필 문자는 상아나 대나무의 한쪽 끝을 뾰족하게 만든 젓가락 모양의 전통 필기구인 각필(角筆)로 쓴
글자라는 것을 뜻한다.
각필 연구의 권위자인 일본인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芳規) 히로시마대(廣島大) 명예교수는
“백제인들이 건축한 일본 나라시에 소재하는 세계최대 목조 사찰인 동대사(東大寺) 도서관에 있는
<화엄경>과 주석서인 <화엄간정기> 등 8세기에 만든 문헌에서 한자 옆에 발음이나 해석을 눌러 적은 각필
가점을 발견했다”고 말하고, '이것은 일본 문자인 가타가나가 한반도에서 유래됐다'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밝혔다.
그 이유는 <화엄경>과 <화엄간정기>에서 발견된 각필 가점에 사용된 부호들은 일본 오타니대학에서 발견된 7세기 신라 원효(元曉) 대사의 저술 <판비량론>에 보이는 각필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伊(이)'자를 각필로 새겼다면 주격 조사 ‘~이’ 라는 의미다. 고바야시 교수는 현행 가타카나의
'マ(마)'나 'リ(리)'와 비슷한 글자가 <판비량론>의 각필자에서 보인다고 했다.
그리고 한국 학자들의 조사에선 '以(이)'의 옛 글자인 ‘㠯('~로'란 뜻)’와 ‘白(사뢰다)’ 등 새로운 각필자를
찾아내, 고대 한국어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했다.
* 각행원만(覺行圓滿)---<법화경>에 나오는 말로 조계종 근본교리이다.
각행원만이란, 깨달은 것과 행하는 것이 원만하게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는 것을 말한다.
자기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남을 위하는 일이 되고, 남을 도와주고 있는 일이 어느 사이에 자기를 위하는 일이 돼, 자기와 남이 아주 원만하게 ‘큰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이 모든 사람에게
합장해 예배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한 삶을 산 결과로서 일생을 마치게 됐을 때,
<법화경>의 가르침이 자기의 마음에 울려 퍼지고 그것이 자기의 것이 된다.
그러므로 <법화경>을 그저 읽기만 하고 있는 동안 그것은 진정한 <법화경>이라 할 수 없고,
남을 위해 노력하고 또 자기 자신도 일심으로 수행해 자기와 남의 구별이 없으면, 그 때 자기의 마음 가운데
“아 이것이 <법화경>이로구나” 하고 깨달아지는 것이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면 그 때부터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자비심이 샘솟아 난다.---→삼각(三覺) ② 참조.
* 각황(覺皇)---깨달음의 황제, 곧 부처님을 가리킴. 각왕(覺王)이라고도 한다.
국보 제67호 구례 화엄사 각황전(覺皇殿) 이름이 바로 이에 연유하고 있다.
* 간경(看經)---간경(看經)은 경을 본다는 의미이다. 그냥 눈으로 스치면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깊이 꿰뚫어 본다는 말이다. 그렇게 마음의 눈으로 보면서 읽는다. 마음의 눈으로 보고 자신을 뒤돌아보며
부처님처럼 자기를 다스려 나가기 때문에 간경은 수행으로 자리 잡는다.
‘경을 읽다’라는 말엔 경을 소리 없이 마음속으로 읽다.[풍경(諷經)], 승당 불전 등에서 경을 송독(誦讀)하다
등의 뜻이었으나 뒤에는 소리 내어 경전을 읽는 독경(讀經)을 포함해서 경전을 연구하기 위해 읽는 것도
다 포함됐다. 뿐만 아니라 경전 말씀과 의미를 되새기면서 쓴다고 해서 사경(寫經)하는 것도
간경 범주에 들어갔고, 결국 불경을 공부하는 모든 것을 간경이라 하게 됐다.
강원에서 승려들이 간경, 즉 경전을 공부할 때는, 배우는 단계와 읽는 단계, 그리고 보는 단계의 구별이 있다.
그리고 보는 단계에 이르러야 비로소 진정한 자득(自得)이 된 것으로 생각한다.
여기서 ‘보는 단계’란 정신을 집중해 직관하는 수행 실천단계, 자기 마음을 비추어보는 단계를 말한다.
불자라면 부처님 가르침을 바로 알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해야 하며 그러한 노력을 통해 불교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불교교리를 공부하기 위해 부처님 말씀이 담겨 있는 경전을 읽고 공부하기 위해서는
정성을 다해 그 뜻을 이해하면서 마음으로 읽어야 하는데 이를 간경이라 한다.
자구에 얽매이지 말고 자기 본성을 볼 줄 알아야 산 공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지금 읽고 있는 이 설법이 과거 2500년 전에 인도에서 하신 설법이라고 여기지 말고,
지금 이 자리에서 부처님께서 나의 입을 빌려 나의 귀에 설하고 계신 것이라고 여겨야 한다.
이렇게 몸과 눈과 입과 귀와 뜻과 법문이 일체가 돼 경전을 읽을 때에 비로소 지혜가 열리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불자들이 경전을 읽는데 그 방법과 목적을 잘못 이해해 주술화 되고 신비화된 가피력 중심의
독송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스승이나 인도자도 없이 혼자 속사포처럼 읽어 내려가는 독송이 과연 법을
깨닫고 해탈을 성취하는데 무슨 도움이 되는지, 스님이나 법사, 그리고 신도가 함께 돌아볼 일이다.
경전 읽을 때 한 글자 한 글자의 뜻을 음미하고, 이해하면서 또박 또박 읽어 내려가야 한다. 경전은 삼보 가운데 법보에 해당하는 귀중하고 성스러운 의지처이다. 경전에 대한 존중심이 없다면 독송을 제아무리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경전 한 자 한 자의 뜻을 깊이 음미하고 이해하되 자신의 마음이 관조 되도록 읽어야 하겠다.
* 간경도감(刊經都監)---조선 세조 7년(1461년)에 불교경전을 번역출판하기 위해 설립된 정부기관.
신미(信眉), 수미(守眉), 학조(學祖) 등 승려와 김수온(金守溫), 한계희(韓繼禧), 강희맹(姜希孟) 등 학자가
실무를 맡았다. 특히
이때 한글로 번역한 불경 언해본은 불교학 연구뿐만 아니라 조선 초기 우리말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간교(看敎)---간교란 가르침을 보기만 한다는 뜻이다.
독경만하고 경전을 말로만 얘기해 실제 경전의 의미 깨닫지 못함을 의미한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백장회해전(百丈懷海傳)」에서 말했다.
“독경과 어언(語言)의 간교(看敎)만을 행하지 말라. 불법의 가르침은 모름지기 (자신을) 온전히 돌이켜 자신에
귀의함을 성취케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일체 언교(言敎)로서, 오직 각성된 자기를 밝히기 위한 것이다.
”고 해서, 독ㆍ간경의 궁극적 대상으로는 「자심(自心)의 경(經)」이 이에 해당함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듯 ‘자심경(自心經)’의 독ㆍ간경을 통해 진정 문자 읽음이 가능하다는 측면 속에 우리는 독ㆍ간경으로부터 참된 간경(看經)의 경지에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간교(看敎)’란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지 않고 보기만 한다는 뜻이다.
독경만하고 경전을 말로만 얘기해 실제 경전의 의미를 깨닫지 못함을 의미한다.
* 간다라(乾陀羅, Gandhāra)---지금의 인도 서북지방, 그리고 파키스탄과 아프카니스탄에 걸쳐 있는 지역이며 문명의 교차지점으로서 간다라미술이 번창했던 곳이다.
간다라(Gandhāra)의 중심지는 현재 파키스탄 북서부의 페샤와르(Peshawar)지역이었다.
간다라는 원래 간다리족(Gandhari族)이 사는 땅이란 말인데, 산스크리트어로 향기로운 땅이라는 뜻이다.
부처님 당시의 인도 지배국 16개국에 거론되기도 했다가 아소카왕의 마우리아 왕조를 거쳐, 쿠샨제국에 의해
간다라가 정복됐다. 그리고 1~5세기에 걸쳐 간다라는 쿠샨제국 왕들의 비호 아래 최정점에 이른다.
간다라의 수도는 푸쉬칼라바티(Pushkalavati-지금의 차르사다) 였다가 카니시카왕(Kanishka) 때
페샤와르로 옮겼다.
• 이 지역은 BC 6세기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 변경의 한 주였고,
• BC 4세기에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를 무너뜨리고 이곳을 거쳐 펀잡으로
진출했다.
• BC 3세기 인도를 통일한 아소카왕(268 BC. 즉위)의 마우리야 제국의 변경이기도 했고,
• BC 2세기 무렵 인도-그리스 왕국인 박트리아의 도시가 건설됐고,
• AD 1세기엔 월지족의 쿠샨제국에 속해 차르사다를 수도로 했다가, 카니시카왕(128∼153년 재위) 시대에
푸르샤푸르(페샤와르)로 옮겼다.
AD 2세기경 쿠샨왕조(대월지국/大月氏國) 카니시카(Kaniska)왕의 후원으로 제4차 불전 결집을 주도했던
협(脇, Parsva/파르스바) 존자 등이 간다라 출신이다.
이 지역은 부파불교 설일체유부의 근거지로서 유부의 유명한 논사로서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을
지은 법승(法勝, Dharmaśri, AD 3~4세기), <잡아비담심론(雜阿毘曇心論)>의 저자 법구(法救, Dharmatrāta)
등이 이 고장 출신이다.
훗날 유식불교를 발전시킨 무착(無着), 세친(世親), 중현(衆賢)도 이 곳 출신이다.
따라서 대승불교도 간다라 지방을 중심으로 흥기했다고 한다.
그런데 <자타카(Jataka, 本生經)>에는 현재 파카스탄 라왈핀디 부근의 지명을 탁실라(Taxila)라 했는데,
이곳이 한때 간다라 왕국의 수도였고, 학문의 중심지로 언급하고 있다. 문화적으로는 간다라 불교와
불교 미술이 퍼져 있던 곳을 넓은 의미의 간다라라는 뜻, ‘Greater Gandara’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소카왕은 다르마, 즉 정법에 의한 삶을 강조하는 칙령을 제국 곳곳에 돌에 새겨 세웠는데,
페샤와르 지역의 비석엔 이 지역 문자인 카로슈티 문자(Kharoṣṭhī script)를 썼다.
이 지방 방언을 간다리어라고 부르고, 이 지역에서만 특별히 쓴 문자를 카로슈티 문자라 했다.
이 시기는 인도 역사뿐 아니라 문화사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다.
이때 인도인들이 비로소 문자를 쓰게 됐다. 인도에는 오랜 종교 문화 전통이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인이 문자를 쓰게 된 것은 인더스 문명기를 제외하면 기원전 3세기 아소카왕이 비석에 새기게 한 문자가
가장 오랜 유물이다. 이때 두 가지 문자가 나오는데, 하나는 인도 본토에서 쓰던 브라흐미라는 문자이다.
다른 하나는 간다라에서 쓰던 카로슈티 문자이다.
인도 전역에서 브라흐미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간다라만 독자적인 문자를 갖고 있었다.
카로슈티 문자는 아마 페르시아 제국에서 쓰던 아람 문자를 기원전 4세기쯤 변형해서 만든 것 같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도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간다리어(Gandhari語)에 카로슈티 문자로 된 불경 고전이
가끔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간다라 불교의 중요성은 불교가 인도 본토에서 중앙아시아로 그리고 다시 중국으로 전파되는데
교량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연관 관계에서 새롭게 발견된 간다라에서 발견된 경전과 몇몇 초기에
번역된 중국 불전들 사이에 보이는 유사성은 매우 흥미롭다. 예를 들어, 대영 박물관 콜렉션에 포함돼 있는
<상기티수타(衆集經, 빠알리어 Saṁgīti Sutta)>의 간다라 사본은 한역의 <장아함>과 매우 밀접한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종류의 발견들은 간다라 지방의 불교가 인도와 동아시아 불교를 연결 지었다는 사실을
확고히 해주는 것들이다.
특히 간다라는 그리고 1~5세기에 걸쳐 쿠샨 제국 왕들의 비호 아래 전성시를 누렸으나,
1001년 마흐무드 오브 가즈니(Mahmud of Ghazni)가 간다라를 정복한 뒤 더 이상 간다라라는 이름은
쓰이지 않게 됐다. 사람과 국가가 소멸하듯, 지명과 국명 같은 명칭도 사라지거나 대체된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간다리어(Gandhari語) 참조.
* 간다라(Gandhāra)미술---간다라는 인도 서북지방, 지금의 아프카니스탄과 파키스탄에 걸쳐 있는
문명의 교차로이며, 지금의 페샤와르(Peshawar) 지방을 중심으로 했다.
간다라는 원래 간다리족(Gandhari族)이 사는 땅이란 뜻이다. 이 지역의 특별한 방언을 간다리어라 부르고,
카로슈티라는 문자를 썼다. 간다라 미술은 기원 전후부터 4~5세기 동안 간다라 지방에 유행한 미술이다.
기원후 5세기경이 되면 이 지역의 간다리어, 카로슈티라는 문자, 간다라 미술양식이 다 자취를 감춘다.
대신 인도 본토에서 흥기한 고전 산스크리트어, 인도 특유의 미술양식이 이 지역으로 올라온다.
헤게모니 경쟁에서 서북 인도가 패하고, 드디어 갠지스 강 중류의 인도가 승리해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인도문명을 형성하게 된다.
간다라 미술의 특징은 헬레니즘 양식이라 일컫는 그리스 ‧ 로마 풍 조각위주 불교미술을 일컫는다.
동서 문화교류에 의해 생겨난 서방요소가 짙은 미술로서 전통적인 인도미술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당시 로마세계에서 유행헸던 헬레니즘 미술의 강한 영향을 받은 것이 명백해 그 당시 서방 공장(工匠)도
들어왔음을 짐작케 한다.
그리하여 간다라에서 처음으로 불상(佛像)이 만들어졌다. 그때 까지는 보리수 ‧ 스투파(탑) ‧ 법륜(法輪) ‧
보좌(寶座) 등으로 불교를 상징적으로 표현 했을뿐 이었으나 간다라 미술부터 인간적인 모습의 불상이 조각되기 시작했다. 간다라 불상에서 특이한 것은 머리카락이 고수머리가 아니고 물결 모양의 장발이라는 점과 용모는
눈언저리가 깊고 콧대가 우뚝한 것이 마치 서양 사람과 같다는 점이다. 또 얼굴의 생김새가 인간적이고
개성적이라는 점, 착의(着衣)의 주름이 깊게 새겨지고, 그 모양이 자연스러워 형식화된 것이 아니라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즉, 간다라불상 표현은 헬레니즘 양식의 자연주의 ‧ 현실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 간다리어(Gandhari語)---간다라(Gandhara) 미술로 유명한 간다라는 곳은 인도 서북지방,
지금의 아프카니스탄과 파키스탄에 걸쳐 있는 지방으로, 이 지역이 쿠샨제국(대월지국) 지배지역이기도 했다.
간다라는 원래 간다리족(Gandhari族)이 사는 땅이란 뜻이고, 이 간다리족의 언어, 즉 간다라 지방의 언어가
빠알리어의 자매어격인 간다리어이다. 그러니까 간다리어(Gandhari)는 서기전 3세기부터 서기 후 4세기까지
간다라 지방(현재의 파키스탄 북부 페샤와르 지역)에서 쓰던 카로슈티(Kharosthi) 문자로 쓴 간다리족
언어라는 말이다. 간다리족은 인도 베다시대(BC 15세기~6세기)의 성전인 <리그베다>에
이미 언급돼 있는 것으로 미루어봐서, 인도 아리안족의 일파로 짐작된다.
간다라는 인도의 서북 관문으로서 BC 3세기 이래 인도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기는 했었지만 이곳은
서아시아, 중앙아시아적 요소를 고루 지니고 있고, 다양한 민족문화가 섞여 있어서, 여러 면에서 독톡한
지역이었고, 기후 풍토도 인도와는 달랐다. 따라서 인도에서 출발한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미술의 조형형식은
헬레니즘 양식을 적용시켜 일종의 혼합미술로 발전시켰다.
지금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불교 관련 사본들은 대부분 간다라 지방에서 출토된 것들이다.
이 사본들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간다리어나, 카로슈티 문자로 기록된 불교 사본군을 일컫는 것으로,
여기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법구경>이라든가 <코뿔소경> 등도 수록돼 있다. 카로슈티 문자는
현재의 중국 신장위 구르자치구 타클라마칸 사막 남단의 호탄(和田-옛 고탄)지역에서도 사용했었다.
그런데 최근 10여 년 동안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 만큼 다량의 새로운 필사본들이 등장한 것은, 아마도
아프가니스탄 에서 일어났던 정치적 변동의 결과로 생각된다. 이 새로운 사본들은 20세기 초에 발견된
사본들 보다 훨씬 오래된 사본들이 많고 그 분량도 상당하기 때문에 불교학자 들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새로운 사본에 대한 연구 결과를 통해서 불교의 전파나 불전 번역의 역사가 다시 이해되고 있다.
간다리어에 대한 정보의 수집이 상당히 진척 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지역의 불교가 원래 어느 정도의
규모였으며, 얼마나 다양한 종류의 문헌이 존재했었는지에 대한 간다라 불교의 구체적인 모습은 아직 베일에
싸여있다. 따라서 현재 진행 중인 사본 연구가 진척됨에 따라, 우리는 간다라 지방의 불교에 서서히 근접해
갈 수 있을 것이다.
리차드 솔로몬 교수는 1970년 미국 콜롬비아 대학에서 동양학으로 학사를 마치고,
1975년 미국 펜실바니아 대학에서 산스크리트어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산스크리트어와 특히 간다라에서 출토된 카로슈티 비문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이다.
솔로몬 교수는 “우리가 지금까지 발견한 간다리어로 된 수많은 불전 사본과 그 단편들은 단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으며, 간다리어 불장은 원래는 삼장을 두루 갖춘 완전한 형태의 경전군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솔로몬 교수는 이 지역이 AD 1~3세기경, 인도 불교인들의 종교와 학문의 중심지 중 하나였고, 지금 진행 중인
사본 연구를 통해 산스크리트어 에서 파생된 언어이자, 빠알리어의 자매어 격인 간다리어에 대한 이해가 크게
향상됐으며, 그는 그간 알려져 있지 않던 이 언어가 고대 인도 불교에서 사용된 중요한 언어적 표현 수단 중 하나였음에 틀림없다고 역설한다. 솔로몬 교수는 또한 대승 불교의 기원도 간다라 지방에서 시작됐다고 확신한다.
<현겁경(賢劫經)>은 기원후 2세기 경 제작된 것으로, 간다리어로 보고된 최초의 대승경전이라고 한다.
이 경전의 발견은 대승불교가 AD 2세기 무렵 간다라 지방에서 흥기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여러 비문들과 기타 자료들의 정보 내용과도 일치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간다라국(乾陀羅國, Gandhāra) 참조.
※ 현겁경(賢劫經)---현겁(賢劫)은 이 세상이 개벽해서 다시 개벽할 때까지의 기간으로, 현재의 세상을 이른다.
현겁에는 모두 1,000명의 어진 부처들이 출현하는데, 현겁경은 이 천불의 명칭과 경력을 소개한 경전이다,
산스크리트 원본은 전하지 않으며, 3세기 말 월지국 출신의 학승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했다.
* 간답바(빠알리어 gandhabbha)---산스크리트어로는 gandharva(건달바/乾達婆)라고 한다. 이에 대한 의미와
해석에는 여러 설이 있다.---→건달바(乾達婆), 업력(業力) 참조.
*간독(看讀)---간경(看經)과 독경(讀經)을 말한다.---→간경(看經) 참조.
* 간시궐(乾屍厥)---‘마른 똥 막대기’라는 말. 중국 송 대에 운문 문언(雲門文偃, 864~949) 선사가 던진
화두(話頭)의 하나이다. 어느 스님이 운문에게 “부처란 무엇입니까[여하시불/如何是佛]?”라고
물었을 때, 운문 스님 답이 ‘간시궐[마른 똥 막대기]’이었다.
흔히 우리는 진리는 성스럽다고만 생각한 나머지 성스러운 커튼에 가려 진실을 제대로 못 볼 수가 있다.
‘무슨 똥 막대기 같은 소리인가!’ 충격적인 이 말은 ‘진리는 성스럽고 고귀하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마음의 문을 열게 해주고, 깨달음을 얻게 해 주기 위한 화두였다.
“부처는 똥 막대기다. 그렇게 형편없고,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것도 부처다. 그러니 부처가 아닌 것이 어디 있겠나. 쇠막대기도, 금 막대기도 모두 똑같은 부처다. 그 공(空)한 바탕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온 세상이 부처다.
너도 부처고, 나도 부처다. 우리는 부처의 세계에 살고 있다. 운문 선사는 그렇게 똥과 금의 경계를 지웠다.…
우리는 부처의 세계에 살면서도 자신의 지옥에 빠져 있는 건 아닐까.” - 백성호
옛날 중국의 해우소(解憂所)에는 기다란 팽이채처럼 나무를 깎아 만든 막대기를 세워놓고 화장지 대신에
빙글빙글 돌려 뒤처리를 했다. 또는 우리의 재래식 화장실처럼 똥통을 휘젓는 막대기라는 설도 있지만 어쨌든
운문 선사가 똥 막대기를 들고 화장실을 나서는 순간에 어떤 납자가 “부처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던 것이기에 “응 그래 부처는 이거 똥 막대기야!”라고 했을 것 같다.
당나라 시대 위산 영우(潙山靈祐, 771-853) 스님이 제시한 [가불매조(呵佛罵祖) -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욕하다] 화두와 비슷한 말이다.---→운문 문언(雲門文偃, 864~949), 가불매조(呵佛罵祖) 참조.
* 간심간정(看心看淨)---‘마음을 보고 깨끗함을 본다’는 말이다. 그러나 육조 혜능(慧能, 638~713) 선사는
이것을 도(道)를 장애하는 인연으로 봤다.
즉, “마음을 보고 깨끗함을 본다고 하는 것은 도리어 도를 가로막는 인연이니라.” 하는 입장이다.
신수(神秀) 계통의 중국 북종선(北宗禪)에서 간심간정(看心看淨)은 더러운 것이 있으면 여의고
깨끗함을 형성하라는 뜻으로 해석해, 간심과 간쟁을 분리해서 닦음을 세우고 있다.
반면 육조 스님의 정혜사상(定慧思想)은 번뇌 그대로 깨끗한 것이고, 깨끗한 그대로 번뇌임을 보라는 것이다.
손바닥과 손등이다. 그래서 북종선의 간심간정은 잘못된 것이라고 <단경(壇經)>에서 말하고 있다.
다음은 하택 신회(荷澤神會, 670~762) 선사가 준엄하게 북종선을 비판하는 계기가 되는 글이다.
“마음을 본다는 것은 보는 마음과 보이는 마음이 따로 존재할 수 있다고 오해할 수 있다.
이는 능소(能所)와 주객(主客)을 분리하고 이원화하는 함정이 있다.
능소(能 : 보는 마음, 所 : 보이는 마음)와 주객은 본래 공한 것이다. ”라고 했다.
그리고 혜능(慧能) 선사의 언하변오(言下便悟)와 돈오돈수(頓悟頓修)의 선(禪)을 계승한 마조(馬祖道一, 709∼788) 선사는 우선 점수법(漸修法)인 수인증과(修因證果)의 주장을 부정하고, 그 실천법인 좌선에 의한 간심간정의
수행도 불필요하다고 거부했다. 그리하여 마조는 언하변오(言下便悟) 돈오견성(頓悟見性)의 선에 알맞은
수행법을 채택했는데, 그것은 설법과 문답을 통해 스승이 직지인심(直指人心)의 가르침을 펴면,
제자는 그 가운데에서 기연(機緣)이 맞는 경우 돈오견성하게 되는 그러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깨달음의 씨앗과 그 씨앗이 싹을 틔울 바탕이 되는 땅이 모두 당사자인 제자의 마음에
갖추어져 있다고 보고, 다만 스승의 설법과 문답을 통한 가르침은 그 씨앗이 싹을 틔우는 데 필요한 간접적
조건을 조성하는 빗물과 같은 것으로 보는 입장으로서, 수행이 씨앗이 돼 깨달음의 열매를 맺는다는
수인증과(修因證果)의 입장과는 다르다. ---→언하변오(言下便悟), 수인증과(修因證果) 참조.
※ 언하변오(言下便悟)---말을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즉각 깨닫는 것.
* 간심법문(看心法問)---제4조 도신(道信, 580~651) 대사 편 법문이다. 부처가 곧 마음이라는,
즉 마음 밖에 달리 부처가 없다는 법문이다. 간심법문(看心法問)에서는 마음의 본체를 알고,
마음의 작용을 안 다음, 마음이 항상 깨어 있도록 하며, 적문에서는 마음의 본체를 알고, 마음의 작용을 안 다음, 마음이 항상 깨어 있도록 하며, 신체가 공적(空寂)함을 관찰하면서,
하나를 지켜 흔들림이 없게 한다면[수일불이(守一不移)] 마음의 실체를 볼 수 있다는 법문이다.
헌데 간심법문에 관련된 일화가 흥미롭다. 도신선사가 쌍봉산에 사조사(四祖寺)를 세운 유래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새로운 절터를 찾는 도신에게 쌍봉산의 상서로운 기운은 감탄을 금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했다.
그리하여 며칠씩 금식을 하며 불경을 외우고 목어를 두드리니 이를 이상하게 여긴 한 노인이 다가와
그 사연을 물었다. “스님, 왜 여기서 불경을 외우고 목어를 두드리십니까?”
“가사 한 벌 놓을 만한 땅에 절을 짓고 싶습니다.”
“가사 한 벌의 땅 정도쯤이야, 좋습니다. 내가 시주하겠습니다.” 도신이 던진 가사 한 벌을 덮을 땅이란
말이 놀랍게도 사방 십 리에 미치는 넓은 땅을 시주받게 됐다.
마침내 사조 도신은 쌍봉산 자락에 사조사를 짓고 농토를 개간해 농사를 짓고 불법을 전파해 크게 선종의 문을 열었는데, 한 때 사조사의 수행 대중이 5백 명에 이르렀다. 대사는 참선과 노동은 하나라는 선농일여(禪農一如), 선논일치(禪農一致) 를 주장했다. 요즘 말로 하면 생활선(生活禪)을 하셨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선사는 몸소 농사와 참선을 병행하는 농선쌍수(農禪雙修)를 실천하기 위해 탁발에 의존하던 종래의 공양방식을 지양하고
사조사 주변의 농토를 개량해 자급자족하는 선풍을 확립했다.
그렇게 해서 스님들의 건전한 정신과 신체를 단련시켰고, 관(官)의 도움이나 백성들의 시주 없이 대중 살림이
가능해졌다. 대사는 한 승려가 먹을거리를 얻어 평생 굶주림을 면하려면 좌선을 근본으로 수행하되 15년은
노동을 병행해야만 된다고 했으며, 이는 훗날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고 하신
백장(百丈懷海, 720~814) 선사의 가르침보다 백년이나 앞선 선지식의 지혜였다.
도신 대사는 훗날 간화선 수행법으로 발전한, 부처가 곧 마음이라는, 즉 마음 밖에 달리 부처가 없다는 간심법문(看心法問)을 폈다. 간심법문에서는 마음의 본체를 알고, 마음의 작용을 안 다음, 마음이 항상 깨어 있도록 하며, 신체가 공적(空寂)함을 관찰하면서, 하나를 지켜 흔들림이 없게 한다면 마음의 실체를 볼 수 있다는 법문이다.
그리고 나아가서 수일불이(守一不移)를 주장했다. 지킬 수(守), 하나 일(一), 아니 불(不), 옮길 이(移),
그래서 하나를 지켜서 옮겨가지 않는댜. 하나를 지켜서 절대 흔들림이 없다. 이 말이다.
공정(空淨=空寂)한 눈으로 주의 깊게 일물(一物)을 지켜보고(看一物), 주야를 불문하고 힘을 다해 늘 움직이지
않는다(不動)는 말이다. 우리가 기도를 하거나 참선을 하거나 할 때는 그 하나를 지켜야 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정신을 가다듬어서 밤낮으로 노력해 마음을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것이 수일불이(守一不移)이다.
하나를 지켜서 흔들림 없이 나아가라 이 말이다. 마치 새의 발을 묶어놓고 날아가려고 하면 잡아당기고,
날아가려고 하면 다시 잡아당기고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섭심(攝心)이라고 한다.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해 흩어지지 않게 한다는 말이다. 즉 안정을 얻어야 한다는 말이다.
종일토록 지켜보기를 그치지 않으면, 산란한 생각들이 끊어지고 마음이 저절로 정(定)에 들 것이라고 했다.
관세음보살을 하든지, 화두를 잡든지 수일불이(守一不移)해야 한다고 했다. 수일불이(守一不移)를 다른 말로
일행삼매(一行三昧)라고도 한다.---→도신(道信, 580~651), 심지법문(心地法門), 수심법문(守心法問) 참조.
* 간탐심(慳貪心)---→육폐심(六蔽心) 참조.
* 간택(揀擇)---<신심명(信心銘)>에서 ‘유혐간택(唯嫌揀擇)’이라 할 때에 쓰인다. 분간(分揀)하여 고름,
가려내고 선택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쌀과 뉘가 섞여 있을 때, 돌이나 뉘를 가려내서 버리는 것이 간(揀)이고, 쌀을 취하는 것이 택(擇)이다. 그러니 간은 가려내 버리는 것이고, 택은 선택해서 갖는 것이다.
옛날 조정에서 왕비나 세자비를 뽑는 것을 간택이라 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와 같이 가려내고
선택함 으로써 구분 짓는 것을 기피한다.
그런데 간택(簡擇)은 '정확히 식별해 판단함'이라는 뜻의 불교 용어이고, 간택(揀擇)은 조선에서 왕실의 혼인을
위해 혼인상대자의 후보를 모아놓고 가려 뽑던 행사이다. 그렇기는 한데, 신심명에서 ‘간택(揀擇)’이란 말을 썼다.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 참조.
* 간택(簡擇)---택(擇)은 결택(決擇)의 줄인 말인데, '정확히 식별해 판단함'이라는 뜻의 불교 용어이다.
즉 여럿 중에서 골라내어 선택함의 뜻으로, 지혜 혹은 지혜의 작용을 말하는 한편, 지혜로써 번뇌를 소멸시킨
상태, 해탈 ‧ 열반과 같은 말이다. 그리고 지혜는 어두운 마음을 밝히고 사물을 바르게 관찰하는 것이라고 해서
정지(正智)라고도 하며 삼라만상의 진리를 바르게 가려내는 것이라고 해서 택법(擇法), 간택(簡擇)이라고도
칭한다. 그리고 여기서 지혜는 경험적 사실이나 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증득하는 성인의 간택(簡擇)하는 능력」으로서의 지혜를 말한다.
* 간혜(乾慧)---건혜(乾慧)와 같은 말.---→건혜(乾慧) 참조.
*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고려시대 보조(普照) 국사 지눌(知訥)의 저서. 매우 논리적인 논서로 수행방법에
대한 글이다. 보조 선사는 오교(五敎) 중에서는 화엄원교(華嚴圓敎)가 가장 뛰어난 것으로 봤으며,
선 수행에서는 대혜선(大慧禪)을 가장 뛰어난 것으로 봤다. 즉, 보조 선사는 화엄의 성불론(成佛論)을 주장
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화엄의 성불론이 구체적인 수행법의 제시라는 측면에서는 약점이 있는 것으로 봤다. 그런 반면에 대혜의 간화선(看話禪)이 ‘화두참구’라는 수행법이므로 화엄의 약점을 상보(相補)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그래서 저술한 <간화결의론>은 수행법으로 간화선을 강조한 논서이다.
※ 대혜선(大慧禪)---중국 남송시대에 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 선사에 의해 정립된 간화선법을 말한다.
* 간화선(看話禪)---28대 조사인 달마(達磨) 대사가 중국에 전한 선(禪)은 순수한 인도의 관심선(觀心禪)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 차츰 중국적인 것으로 면모를 바꾸면서 체계화돼 갔다. 달마 대사로부터 전승된 선(禪)이
6조 혜능(慧能) 대사 이후에는 여러 계파가 형성돼 9세기부터 11세기 사이에 5家 7宗이 생겨나 선풍(禪風)을
드날리게 됐다. 이 중에서 남송 이후 조동종(曹洞宗)에서 나온 천동 정각(天童正覺, 1091~1157, 일명 굉지 정각/宏智正覺) 선사가 널리 편 묵조선(黙照禪)과 임제종(臨濟宗)의 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 선사가 확립한
간화선이 가장 대표적인 선풍이었다. 간화선(看話禪)은 화두를 간(看)하는 공부 방법이다.
화두를 가지고 참선하는 것을 화두를 보는 선이라는 뜻으로 간화선이라 한다.
즉, 간화선이란 우주와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를 불교적으로 규명해 나가는데 있어서 화두(話頭)라는 주제를
가지고 공부해 나가는 참선법이다. “소승은 우리 마음의 흙탕물을 맑히는 공부를 하는 것이다.
마음이 고요하면 흙탕물은 가라앉는다. 그러나 그 가라앉은 흙탕물은 이를테면 죽음 직전의 위기에 처하면
다시 떠오를 수 있다. 소승과 달리 그 흙탕물을 흔들어 뿌리 채 뽑아버리는 것이 간화선이다.” -수불스님
이 간화선(看話禪)이 오늘날 한국불교의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본래 참선법에는 간화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동종(曹洞宗)의 묵조선(默照禪) 전통도 있는데, 한국불교에서는 조동종보다는 임제종(臨濟宗) 기풍이 주종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참선이라고 하면 간화선의 선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일반화돼 있다.
이러한 간화선이 대혜 종고(大慧宗杲) 선사에 의해 정립되기 이전에는
조사선(祖師禪)이 중국의 전통적인 참선법이었다.
간화에서 ‘간(看)’은 주시하다, 참구(탐구)하다는 뜻이다. 이것저것 주변 상황에 한눈팔지 않고 ―
딴 생각하지 않고 목표한 것에 정신을 집중해서 주시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화(話)’는 화두를 말한다.
화두를 들고 참선하는 것은 무분별 직관적인 방법의 참선법으로, 현재 우리나라 선종 사찰에서 현행하는
대표적인 참선법이다.
헌데 여기서 일컫는 화두(話頭)는 탐구해야 할 주제가 되는 언구, 즉 ‘말’이다. 그런데 말은 말이되 보통 말이
아니라, ‘말 이전의 말’이고, ‘말 밖의 말’을 의미하며, 주로 부처님과 조사 스님들 말씀이나, 행동,
그리고 문답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논리적으로 풀 수 없고, 생각이 끊어진 세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러한 화두 참선은 그 참구하는 방법이 분별 분석적인 것이 아니라 무분별 직관적인 것으로, 염불기도, 간경,
보살행 등 다른 수행법보다 힘들지만 더 빠르고 깊이 들어가며, 지혜와 직관력이 돈발(頓發:문득 떠오름)
된다고 해서 수행법의 으뜸으로 친다.
화두 참선법은 위빠사나나 사마타, 지관, 정혜를 닦는 최고의 수행법이라는 것이다.
화두를 참구하는 방법으로 일구의 공안에 몰두하는데, 예를 들면,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狗子無佛性),
뜰 앞의 잣나무(庭前柏樹子), 마 3근(麻三斤)… ” 등을 화두로 해서 마음에 의심 덩어리(疑團)을 일으켜서
참구해 의단을 깨뜨리는 것이다. 즉, 의단을 타파해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수행법이 간화선이다.
우리나라 에서도 마찬가지로 선종에서는 체계적이고 기본적 바탕 없이 최고의 경지인 일초직입 여래지
(一超直入如來地)를 목표로 하는 간화선 수행에 중점을 두고 있다.
간화선에 대한 대혜(大慧) 선사의 가르침을 들어보자, “간화선이란 수행 상에서 연구해야만 할 하나의 문제
(화두)에 전신을 집중시켜, 그것과의 대결을 통해 절대의 진실에 눈뜨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은 그 깨달음은 수행자가 스스로 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단어, 하나의 문맥 상에 심오한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그것이 깨달음 이라고
생각한다면 영원히 깨달을 수 없다. 오히려 그러한 생각을 모두 던져버리고, 마음을 공허하게 해서, 하나의 문제, 예컨대 ‘개에게도 불성이 있나(狗子無佛性)’와 그에 대한 조주 종심(趙州從諗, 778~897) 선사의 대답
[무(無)]처럼 화두 그 자체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열쇠이다.”
그런데 이러한 간화선에도 병폐가 있어서 대혜 선사가 그것을 지적했다.
즉, 그 하나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언구 가운데서 깨달음을 보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 반대로 언구는 필요하지 않다고 하면서 오로지 정좌(靜坐)와 관심(觀心)만을 고집하는 것이다.
대혜 선사는 이 가운데 특히 후자를 묵조선(黙照禪)이라고 해서 엄격하게 비판했다.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 서산 대사(西山大師)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기가 참구하는 공안(公案)에 대해서는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해야 한다. 마치 닭이 알을 안은 것과 같이 하고, 목마른 사람이 물 생각하듯 하며,
어린애가 어머니 생각하듯 하면 반드시 꿰뚫을 때가 있을 것이다. 닭이 알을 안을 때는 더운 기운이 지속되며,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는 마음과 눈이 움직이지 않게 된다. 굶주릴 때 밥 생각하는 것과 목마를 때
물 생각하는 것이나, 어린애가 어머니를 생각하는 것들은 모두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고, 억지로 지어서 내는
마음이 아니므로 간절한 것이다. 참선하는 데에 이렇듯 간절한 마음이 없이 깨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선가귀감(禪家龜鑑)
그리고 다음은 한국 현대불교의 대선사이며, 석가모니 이래 제77대 조사인 전강(田岡, 1898~1974) 스님의
가르침이다. “화두를 잡고 있으면 처음에는 사나운 소나 말처럼 마음대로 달아나고 망상 잡념이 생기고
또 해태심까지 생긴다. 그러나 퇴전하지 말고 계속하고 또 계속해 용맹정진을 다하면 반드시 화두라는 의심
뭉치가 가슴에 꽉 차게 된다. 즉, 늙은 쥐가 쌀 창고를 파고 또 파면 반드시 그것을 뚫고 쌀을 먹게 되는 것과
같이 참선법도 역시 이와 같다. 결심을 하고 또 계속하면 번뇌 망상의 물결 파도가 아무리 세지만 화두를
찾는 힘에는 모두 소멸되는 것이다. 그러니 공부하는 대중들은 해태심을 내지 말고 대신심(大信心),
대분지(大憤志), 대의정(大疑情)으로 화두만 잡고 매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언하대오(言下大悟)하리라.”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보조 국사(普照國師)가 간화선법(看話禪法)을 제창했다. 그리하여 고려시대에
보조 국사를 비롯한 여말(麗末) 태고보우 국사에 의해서 제창되고 실수됐던 선법(看話禪)이 조선시대까지도
면면히 계승돼 오다가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정혜(定慧)니 지관(止觀)이니 하는 근본불교의 명상법과
간화선법이 침체하게 된다. 그러다가 근대에 이르러서 경허(鏡虛) 선사가 간화선법으로 견성한 다음,
다시 참선법이 유행하게 돼 오늘날, 간화선법이 한국불교의 주류수행 가풍이 됐다.
→공안(公案), 화두(話頭), ‘공안(公案)과 화두(話頭)의 차이’, 대혜선(大慧禪), ‘재가자(在家者)와 수행’ 참조.
* 간화선(看話禪)의 특성---무비 스님은 선의 특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일곱 가지로 말했다.
<선(禪)의 7가지 정신>
1. 간소(簡素) 2. 탈속(脫俗) 3. 자연(自然) 4. 유현(幽玄) 5. 고고(枯高) 6. 정적(靜寂) 7. 변화(變化)
이처럼 선은 소박하고 간단한 것을 특징으로 하는데, 세속적인 것에서 멀리 떠나 고요한 분위기에서 어떤
고정된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스런 것이며, 동시에 변화무쌍한 것이라 했다.
일반적으로 화두를 든다하면 머리를 싸매고 의심하며 용맹정진 하는 것을 연상한다.
그런 화두에 비밀이 있다고 하니 궁금한 것이다. 그리고 흔히 화두의 비밀을 설명하는데,
양귀비(楊貴妃)와 안록산(安祿山)의 이야기를 들어 설명한다. 이는 대혜(大慧宗杲, 1089~1163) 선사의
<서장(書狀)>에도 있는 내용이고, 시(詩)로써 설명되고 있는데, ‘소염시(小艶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단풍광화불성(一段風光畵不成) 동방심처설수정(洞房深處說愁情)
빈호소옥원무사(頻呼小玉元無事)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
아름다운 맵시, 그림으로 그리려 해도 그리지 못하리니 깊고 깊은 규방에서 애만 태운다.
자주 자주 소옥을 부르지만 소옥에겐 일이 없고 오직 님께 제 소리를 알리려는 뜻이라네.
2010년 8월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라는 국제학술대회가 있었다. 이 대회에서 미국의 버클리대 교수인 로버트
샤프는 간화선이 재가자를 위해 창안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샤프 교수는 “간화선은 대혜 선사가 편지글을
이용해서 불교적인 지식이 부족했던 문인들을 위해 간소화된 선(禪)을 고안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는데,
바로 <서장>에서 보는 것과 같은 내용이다.
<서장>에서 대혜 스님의 상대로 등장하는 인물은 출가자가 아닌 재가자들 이었다.
그들은 세속에서 요즘말로 하면 장관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렸던 당대의 지식인 들이었다. 그들이 궁금한
사항에 대해 대혜 스님에게 묻고, 이에 관해 대혜 스님이 답변하는 형식으로 꾸며진 것이 <서장>이다.
이와 같이 당초 간화선은 재가자 ― 지식인들과 일부 비구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에 양귀비와 안록산의
일화를 예를 들어 설명한 것이라 보인다. 또한 하버드대의 나타샤 헬러 박사도 샤프 교수와 같은 입장을
보였는데, 그녀는 “대혜 스님의 가르침은 재가불교의 수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간화선은 재가 신자들의
요구에 맞도록 적응시킨 수행법이다.”라고 밝혔다.
만일 간화선이 오로지 출가자를 위한 것이었다면 ‘소염시’에서 보는 것과 같이 양귀비와 안록산의 불륜을 예로
들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서 오욕락(五慾樂) 등 이것저것 다 경험해 보고 은퇴한 재가자에게 알아듣도록
설명하기 가장 쉬운 것이 아마도 양귀비와 안록산의 정사에 대한 이야기 이었을 것이다.
‘소염시’에서 양귀비가 안록산과 밀회를 즐기기 위해 부른 말은 “소옥아”였다. 여기서 소옥은 하녀의 이름이다.
그래서 양귀비가 하녀를 “소옥아”하고 부르자 마자 “쿵”하고 담 뛰어 넘는 소리가 났다고 한다.
바로 이것이 화두 타파(話頭打破)라는 것이다.
양귀비가 하녀 이름인 ‘소옥’을 불렀는데, 왜 안록산이 담을 뛰어 넘었을까. 이에 대해 무비 스님은 설명하기를,
양귀비가 “소옥아”하면서 자기표현을 하자 이를 알아챈 안록산이 담을 뛰어 넘음으로써 양귀비의 의사표현에
답했다는 것이다. 화두를 타파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담 밖에서 언제 부를까 하고 대기하고 있던 안록산이 “소옥아”하고 불렀을 때 “왜 소옥아 하고 불렀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했다면 상대방의 마음을 못 읽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의심이 바로 화두(話頭)이다.
하지만 이는 바른 방법이 못 된다고 했다. “소옥아”하고 부르면 두 말 않고 알아차리는 것이 선인데,
“왜 소옥이라고 했을까?”라고 의심하면, 이는 부처님이 꽃을 들었을 때, “왜 꽃을 들었을까?”하고
의심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꽃을 들었으면 그것으로 끝난 것이지,
이에 대해 “왜?”라고 하면 이는 선방에서 참선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안거 철에 수천 명의 스님들이 선방에서 보낸다. 주로 화두를 들고 밤낮으로 용맹정진 하는데,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座臥 語默動靜)’을 특징으로 한다. 이는 화두를 타파함으로써 깨달음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데, 1~2년도 아니고 10년, 20년, 30년, 심지어 평생을 선방에서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무비 스님에 따르면 화두는 3일이면 타파할 수 있다고 한다. 길어야 7일, 좀 ‘둔한 자’는 ‘한 철(3개월)’
간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두를 타파하지 못한 이유는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못하기 때문이라 했다.
그런 좋은 예가 임제(臨濟) 스님이 황벽(黃蘗) 스님에게 몽둥이 세례를 당한 것이고 했다.
임제 스님이 어느 날 자신의 스승인 황벽 스님에게 “불교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 봤다고 한다.
스승의 문하에 들어 온지 수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큰마음 먹고 용기를 내어
스승에게 물어 본 것이다.
이에 대해 스승인 황벽 스님은 다짜고짜 주장자로 패기 시작했다. 무려 20대를 맞은 것이다.
더구나 황벽 스님은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생긴 모습도 우락부락 했다. 그래도 임제 스님이 반응을 하지 못하자 또 두들겨 맞았는데, 세 차례나 맞았다. 그래서 한 차례에 20방씩 모두 60방을 맞은 것이다.
이처럼 영문도 모르고 맞은 임제 스님은 “왜 때렸을까?” 하고 몇 달을 고민하다가 ‘대우 스님’이라는 분에게
물어봤다고 한다. 대우 스님과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임제 스님은 대우 스님의 옆구리를 세 번 쥐어 박았는데
바로 이것이 스승인 황벽이 자신을 때린 이유에 대한 답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스승은 제자에게 반 지성적이고, 언어와 문자를 거부한 반응을 보인 것일까.
이에 대해 무비 스님은 자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으로 설명했다. 자신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몽둥이질(棒)
이나 손가락 들어올리기[수지(竪指)], 꽃을 들어 보이기[염화(拈華)]와 같은 표현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왜 몽둥이질을 했을까?”라든가, “왜 손가락을 들어 올렸을까?”
또는 “왜 꽃을 들어 올렸을까?”라고 온갖 자신의 지식을 총동원해서 사량 분별해 밝히려 하다 보면
8만4천리로 빠져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몽둥이질, 손가락, 꽃 등은 그 것 자체로 봐야지 여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만 ‘차선책’은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차선책으로 얻어지는 것들은, “소옥아”하고 불렀을 때, 이를 알아듣지 못하고 담 바깥에서
“왜 소옥이라고 했을까?”라고 생각하는 것이 차선책인데, 바로 이것이 화두이고 참선이라는 것이다.
그런 차선책으로서 얻어지는 것도 많다고 한다. 이를 무비 스님은 정신에 근육이 생기고, 뼈가 생기는 것으로
봤다. 그래서 화두를 들어 참선하는 수행자들은 대담 해진다고 한다. 평소 얌전하고 자비롭게 보이던 사람들도
화두를 들면 용감해지고 대범해져서 본심이 드러나게 되는데, 호탕하게 웃는다든가 불같이 화를 낸다든가 하는 정신적인 변화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어는 스님은 화두를 들고 있는 스님들에 대해 한 마리의 호랑이를 보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또 부모를 죽인 원수를 만나면 단칼에 베어 버릴 듯한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는 깨달음을 위해 화두를 놓치지 않으려 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와 같은 차선책은 우리의 그릇이
거기 까지이고, 우리의 근기가 거기 까지이기 때문에 선방에 앉아서 참선하는 것으로 무비 스님은 설명한다.
그렇다면 진짜 화두 타파는 어떤 것일까. 있는 그대로 드러낸 것이 화두라 한다. 황벽 스님이 임제 스님에 대해
몽둥이질을 한 것도 있는 그대로를 드러낸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를 이해해 임제 스님이 대우 스님의 옆구리를 세 번 쥐어박는 액션을 취한 것도 있는 그대로의 현재를 드러낸 것으로 본다.
이처럼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기 위해 화두라는 방편을 사용하는데, 몽둥이질을 했다면 “왜 몽둥이질을 했는가”
라고 사량 분별하면 이는 차선책으로서 참선이 되지만, 그 자리에서 다시 되받아 쳐 알맞게
‘맞장구’를 쳐 준다면 이는 현상이 있는 그대로임을 알아 화두가 타파되는 것 으로 본다.
따라서 부처님이 꽃을 들어 보였을 때 가섭처럼 웃으면 되는 것이다. 그 너머에 별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꽃을 봄으로써 그 자리에서 더 이상 생각이 멈추어 버리는 것을 말한다.
이는 1억짜리 수표를 잃어 버렸을 때 하 기가 막혀 더 이상 아무생각이 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또 양귀비기가 “소옥아”하고 불렀을 때 담 넘어가는 “쿵”하는 소리가 나는 것과 같다.
‘쿵’하는 소리도 나지 않고, 왜 불럿을까? 하고 온갖 알음알이와 지식을 동원해 사량 분별하면 할수록 진리와
멀어지기 때문에 곧바로 현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화두 타파이고, 이것이 바로 ‘화두의 비밀’이라고 한다.
* 갈마(羯磨, 산스크리트어 karma)--- ‘갈마(羯磨)’란 산스크리트어 카르마(karma)의 음역어로서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업(業)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불교 교단 내부의 의식 절차인 작법(作法)을 말한다.
헌데 단지 ‘갈마’라고만 음역하는 경우에는 업을 의미하는 일이 거의 없고, 대개 불교 수행자가
계(戒)를 받거나 참회하거나 할 때의 의식행사의 작법(절차)을 말한다.
즉, 오계를 비롯해 보살계, 구족계 등 계를 받을 때, 악을 없애고 선을 낳게 하는 의식을 갈마라고 한다.
갈마는 참회(懺悔)를 비롯해 잘못된 일을 막고 나쁜 짓을 그치게 해 죄를 소멸하고 선을 낳는 목적으로 행해진다. 이 작법에 관계하는 지도 승려를 갈마사(羯磨師), 혹은 갈마아사리(羯磨阿闍梨)라고 한다.
갈마란 승가 고유의 의결법으로, 전원 찬성이라는 화합된 결정에 의한다.
모든 비구 스님은 동격의 권리(同格同權)를 가지고 행사 집행이나 결정 결의에 참가할 수 있다.
포살(布薩), 안거(安居), 자자(自恣) 등과 스님이 되고자 하는 이에게 입단을 허가하는 수계식(受戒式),
각종 출죄(중죄를 용서함)와 징벌 등 교단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항들이 승가의 전원 참석에 의한
전원 찬성이라는 화합된 결정에 의한다. 즉, 이러한 승가의 모든 일은 갈마로서 처리된다.
우선 갈마는 크게 법(法), 사(事), 인(人), 계(界) 등 네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 법(法)은 갈마의 방법, 각종 사안에 대해서 참회를 하거나 대중을 화합시키거나 물건을 분배하거나
수계나 포살을 하는 등의 작법(作法)에 관한 것이다.
• 사(事)는 갈마를 하는 행사, 계(戒)를 범한 일이나 분쟁이 발생했거나 갈마를 해야 할 일이 발생한 것이고,
• 인(人)이란 갈마에 관계하는 사람, 갈마를 행할 때 사안의 크고 작음에 따라서 갈마하는
스님들의 수가 정해지는 것이며,
• 계(界)는 갈마를 하는 장소를 뜻한다.
이러한 네 가지 조건을 현대사회의 법원에서 재판을 하는 일과 비교해 보면 법은 재판을 할 수 있는 근거인
각종 법 조항을 말하며, 사는 재판을 하게 된 각종 사안이 되며, 인은 재판에 필요한 인원인 판사 검사 변호사
등이며, 계는 재판을 진행하는 장소인 법원과 같다고 하겠다.
그리고 갈마의 방법은 다양하다. 누구의 앞에서, 몇 명이 모인 자리에서 갈마를 했느냐에 따라,
심념법(心念法), 대수법(對首法), 중승법(衆僧法)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 심념법(心念法)은 자신이 범한 일을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혼자 소리 내어 밝히는 것이다.
심념법은 사소한 죄를 참회할 경우와 주위에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사용된다.
• 대수법(對首法)은 대중이 두 세 명 모여 있을 때 그 앞에서 진술하는 방법이며,
대수법은 주로 삼의(三衣)와 발우를 받을 때 행해진다.
• 중승법(衆僧法)은 네 명 이상의 대중 앞에서 진술하는 방법으로, 포살이나 자자,
수계 등 중요 대중 행사 때 행해진다. 다시 중승법은 여러 대중에게 알리는 것으로 끝나는
단백법(單白法), 단백갈마는 출죄와 사미의 출가 삭발, 포살, 자자 등을 한다.
대중에게 한 번 알리고 가부(可否)를 한 번 묻는 백이법(白二法),
백이 갈마는 승물의 분배, 소임자 선출, 결계등을 처리한다.
대중에게 한번 알리고 가부를 세 번 묻는 백사법(白四法) 등으로 나눠지기도 한다.
백사법은 백사갈마(白四羯磨)라고 하기도 한다. 백사갈마(白四羯磨)란 가장 중대한 사안에 적용되는
갈마의 형식으로, 수계, 치죄(·治罰), 멸쟁, 승잔죄의 출죄 등을 의결한다.
그 자리에 모인 출가자들에게 세 번에 걸쳐 의견을 묻는다. 그 만큼 신중하게 처리돼야 할 사안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백사갈마(白四羯磨)는 고지(白) 1회, 갈마설(羯磨說) 3회이기 때문에 일백삼갈마(一白三羯磨)라고도 한다. 여기서 ‘백(白)’은 갈마 모임을 고지(告知) 하는 것을 말하며, 이 경우 백(白)은 결의문 같은 뜻이 있다.
* 갈마사(羯磨師)---갈마는 불교의식을 말하고[작법(作法)], 아사리는 불법의 스승을 일컫는데,
불교수행자가 계(戒)를 받을 때(수계할 때) 구족계(具足戒)를 주는 스승을 말한다. 수계(授戒)의 3사(師) 중
한 사람으로서, 갈마계사(羯磨戒師) 또는 갈마아사리(羯磨阿闍梨), 수계아사리(授戒阿闍梨)라고도 한다.
수계할 때 갈마문(羯磨文)을 읽고, 작법(作法) 등을 주도하고 지시하는 역할을 한다.
계단(戒壇)에서 계를 받는 이에게 지침이 되는 스님을 뜻하며, 소승계(小乘戒)에서는 학덕과 법랍을 갖춘
스님으로 선정, 원돈교(圓頓敎)에서는 문수를 갈마아사리로 한다.
※ 화엄의 교학은 원만무애(圓滿無碍)한 진리의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원돈교(圓頓敎)라고도 하고,
법계원융(法界圓融)의 진리라고 하여 원융종(圓融宗)이라고도 한다.
* 갈마아사리(羯磨阿闍梨, karma-acarya)---→갈마사(羯磨師) 참조.
* 갈애(渴愛, 빠알리어 kama-tanha)---초기불교 부처님의 말씀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이다.
심한 탐욕을 갈애라 했다. 즉, 목이 몹시 말라 갈증이 심할 때 간절히 물을 찾듯 범부가 5욕(欲)에 탐착해서
갈망함을 말한다. 부처님께서 4성제(四聖諦)에서 고(苦) 발생 원인을 갈애라 했다. 갈애를 일으키는 행을
하므로 고(苦)가 생긴다. 근본적으로 갈애는 무명으로 인하여 일어난다. 갈애는 사성제의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생긴다. 또한 연기ㆍ무아ㆍ공을 모르면 갈애가 생긴다. 이러한 갈애를 끊는 법은 8정도(八正道)를 닦는 것이다.
‘갈애(渴愛)’라 번역한 딴하(taṇhā)는 √tṛṣ(목마르다)에서 파생된 것이다.
문자적으로 타는 목마름이나 갈증을 뜻하며, 비유적으로 쓰여서 자극에 대한 갈망과 갈애, 채우지 못한 열망의
열병을 뜻한다. 즉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을 때의 강렬한 욕구와 유사하게 감각 대상들을 애타게 구하는 것을
그 특성으로 하며, 끊임없는 재생을 일으키는 마음 상태이다.
12연기에서는 여섯 감각기능(六根, indriya)들이 외부의 감각대상(六境, visaya)들과 맞부딪쳐 감각접촉
(觸, phassa)이 일어나고, 이러한 감각접촉에서 느낌(受, vedanā)이 일어나고 이러한 느낌에서 갈애가
일어난다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갈애는 다시 집착(取, upādāna)을 불러일으킨다.
그리하여 무명이 괴로움의 뿌리라면 갈애는 줄기와 같고, 괴로움은 그 열매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 정각을 처음으로 선포하실 때, 괴로움의 근원인 갈애는 성스러운 도(道)로 제거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출세간의 목적을 이룰 수가 있다고 하셨다. 마치 육체적인 갈증이 일어날 때 이 갈증을
채워주고, 없애지 않으면 죽음에 이르듯이, 정신적인 갈애도 완전히 뿌리 뽑고, 없애지 않으면 열반을 이룰 수가 없다. 이러한 갈애는 중생을 윤회(saṃsāra)의 사슬에 묶어놓아 계속해서 나고 죽는 과정을 반복하도록 한다.
이러한 과정은 아라한과, 즉 열반을 얻어 갈애가 종식될 때까지 반복된다. 갈애는 일어나는 형태에 따라,
①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kāma-taṇhā),
②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vibha-taṇhā),
③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無有愛, vibhava-taṇhā)의 셋으로 분류하기도 하고,
눈, 귀 등의 일어나는 장소에 따라 6가지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18가지가 되고
안팎의 장소에 따라 6가지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18가지가 되고 안팎의 각각으로 36가지가 되고
다시 과거, 현재, 미래로 모두 108가지가 된다. 연기의 구성요소들 가운데서 생사유전(生死流轉)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것이 바로 갈애이다. 그래서 사성제(四聖諦)에서도 고(苦)의 원인을 밝히는
집성제(集聖諦)에서 갈애를 괴로움의 원인으로 들고 있는 것이다. -실론섬 주해모음에서
중생은 갈애가 있는 한 끊임없이 끝없이 윤회한다고 한다. 갈애가 완전히 소멸할 때 윤회도 끝이 나며 윤회가 끝난 경지를 열반(무여열반, 반열반)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윤회하는 기간은 정해져 있지 않다. 윤회는 갈애가 소멸될 때 다하게 되며 이러한 갈애는 팔정도를 실천함으로 해서 완전히 소멸된다고 했다.
* 갈애(渴愛)의 소멸---초기경전 상윳따니까야의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
(빠왓따나경/Dhammacakkappavattana sutta)>에는,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갈애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포기하고 버려서 집착 없이 해탈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갈애를 소멸시키는 것이 해탈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말씀 하셨는데,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그 갈애를 소멸시켜야 하는가. 이에 대해 <초전법륜경>에 아래와 같이 멸성제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무명을 연유로 형성이 이루어지고,
형성을 연유로 의식이 이루어지며, 의식을 연유로 명색이 이루어지고,
명색을 연유로 육입이 이루어지며, 육입을 연유로 접촉이 이루어지고,
접촉을 연유로 감수가 이루어지며, 감수를 연유로 갈애가 이루어지고,
갈애를 연유로 취착이 이루어지며, 취착을 연유로 존재가 이루어지고,
존재를 연유로 태어남이 이루어지며, 태어남을 연유로 괴로움이 이루어지고,
괴로움을 연유로 믿음이 이루어지며, 믿음을 연유로 만족이 이루어지고,
만족을 연유로 희열이 이루어지며, 희열을 연유로 청정함이 이루어지고,
청정함을 연유로 지복이 이루어지며, 지복을 연유로 삼매가 이루어지고,
삼매를 연유로 있는 그대로 알고 봄이 이루어지며,
있는 그대로 알고 봄을 연유로 싫어하여 떠남이 이루어지고,
싫어하여 떠남을 연유로 갈애를 떠남이 이루어지며,
갈애를 떠남을 연유로 해탈이 이루어지고,
해탈을 연유로 소멸에 관한 지혜가 이루어진다."』
- 상윳따니까야 <우빠니사경- Upanisa sutta-연유의 경> - 전재성 역
<우빠니사경>에서는 12연기의 순관을 말하면서 역관이 아닌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괴로움 다음에,
“괴로움을 연유로 믿음이 이루어지며 …”하는 순이다. 이를 순서대로 나열해 보면 믿음- 만족- 희열- 청정함
-지복- 삼매- 있는 그대로 알고 봄- 싫어해 떠남-갈애를 떠남- 해탈- ‘소멸에 관한 지혜’ 순으로 돼 있다.
‘싫어해 떠남’은 있는 그대로 봤을 때, 즉 무상ㆍ고ㆍ무아로 봤을 때 이루어지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갈애 때문이다. 싫어하고 떠나야 될 대상, 염오의 대상을 갈애로 봤다. 이런 갈애가 강화되면 집착(執着)으로
발전한다. 한 번 붙으면 떨어지지 않아 집착 중에 가장 큰 집착이 ‘오온에 대한 집착’이다.
이를 한자어로 ‘오취온(五取蘊)’이라 한다. 그래서 <아닛짜경>, <둑카경>, <아낫따경>에서 오온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 집착은 다름 아닌 갈애의 또 다른 이름이다.
12연기에서 집착은 갈애의 다음 단계이다. 그런 집착은 일반적으로 ‘갈애가 더욱 더 강화 된 집착’이라 한다.
집착을 빠알리어로 ‘우빠다나(upadana)’라 하는데, 이는 한 번 붙으면 좀체 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온에 대한 집착 역시 마찬 가지이다. 그래서 나의 몸, 나의 마음이라 해서 집착한다.
이와 같은 집착이 일어나는 이유는 갈애 때문이다.
이런 갈애로 인해 존재가 윤회하게 되는데, 이런 갈애를 소멸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갈애가 발생되기 이전 단계에서 조치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느낌’이다.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근본요인이 갈애라 했다.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요인이 무명과 갈애이지만,
무명은 과거의 원인이고, 갈애는 미래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초전법륜경>에서도
갈애의 소멸이 괴로움의 소멸이고 동시에 윤회의 종식이 된다고 했다.
느낌의 단계를 지나 갈애로 발전하게 되면 이미 늦는다. 더구나 갈애가 더욱 더 강화 돼 집착이 되면
빼도 박도 못하게 돼 그대로 새로운 태어남(업유)으로 나아 갈 수밖에 없다.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몸과 마음 자체를 집착의 산물로 본다. 그래서 오취온이라 한다.
따라서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려야 한다. 그래서 느낌에 대해 “알아차려라!”라고 한다.
* 감로문(甘露門)---감로와 같은 열반에 이르는 문. 감로와 같은 법문, 즉 부처의 교법을 가리킨다.
가르침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면 감로의 맛을 본다고 한다. 그래서 오묘한 깨달음의 경지를 "감로미(甘露味)"
라고 하고, 열반에 도달하는 문을 "감로문(甘露門)"이라고 한다.
* 감로수(甘露水)---아름다운 이슬, 단 이슬이란 뜻이며, 일반적으로 맛이 썩 좋은 물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옛날에 임금이 나라를 훌륭하게 다스리면 하늘에서 감로(甘露)가 내린다고 하기도 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육욕천(六慾天)의 둘째 하늘인 도리천(忉利天)에 있는 신령스런 액체인 천주
(天酒, 천신들의 음료)를 말한다. 아주 좋은 약으로 한 방울만 먹으면 온갖 괴로움에서 해방될 수 있으며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불사주(不死酒)로도 일컬어진다.
그리고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하신 내용을 감로라고 한다. 중생이 부처님의 법을 듣고 알게 됨으로써 중생의 몸과 마음이 새로워지고 고통의 세상에서 깨달음을 향한 노력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또 부처님 앞에 올리는 찻물이나 깨끗하고 시원한 물을 말하는 것으로 쓰이고 있다.
* 감로탱화(甘露幀畵)---망자를 구제하기 위한 탱화를 일컫는다. 조상숭배와 영혼 숭배신앙이 가미돼 묘사한
불화로서 우란분탱화(盂蘭盆幀畫)라고도 한다. 목련존자(目連尊者)가 죽은 어머니 영혼을 아귀의 세계로부터
구하는 것을 주제로 한 <우란분경(盂蘭盆經)>에 사상적 근거를 두고 있다.
즉, 감로탱화는 우리나라의 강한 조상 숭배의식과 결합돼 널리 퍼졌던 우란분경 신앙을 배경으로 해서,
지옥이나 아귀도에 빠진 가족 ‧ 친지들을 위해 우란분재(盂蘭盆齋)를 올림으로써 그들이 고통을 여의고
극락에 왕생하는 전 과정을 그림으로 묘사한 것이다.
* 감산 덕청(憨山德清, 1546~1622)---감산 덕청 선사는 중국 명(明)나라 시대의 승려이다.
지금의 안후이성(安徽省)에 속한 금릉 출신이고, 속성은 채(蔡)씨, 이름은 덕청(德清)이며,
자는 징인(澄印)이다. 감산(憨山)은 호이며 일반적으로 감산대사라 존칭된다.
시호는 홍각선사(弘覺禪師)이다. 감산 선사는 염불과 간화선을 함께 닦은 분이다.
중국 불교사에선 중국불교를 마지막으로 집대성한 고승으로 네 분을 꼽는다.
후세들은 그들을 명나라의 사대고승(四大高僧)이라고 부른다. 즉,
주굉(袾宏. 1536~1615]) · 진가(眞可, 1543~1603) · 지욱(智旭, 1596~1655)과 감산이다.
감산 대사는 이들 사대가 가운데 한 분인데, 그 사대가들 가운데서도 제일인자로 추앙해도 손색이 없는 분이다.
그는 일찌기 법상종(法相宗)의 근본 논서인 유식학 연구에 조예가 깊었으며, 마침내는 천태학을 집대성한
천태학자가 됐다. 대사가 남긴 불교 관계의 저술은 방대해 이루 다 열거하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심지어는 노자(老子)와 장자(莊子)까지도 주석서를 써서 오늘에까지 전해오고 있다.
* 감응도교(感應道敎)---감응도교, 감동하면 이에 응한다는 뜻이다.
감동한다는 것은 불교를 믿는 사람이 부처님 은혜에 감동해 부처님의 거룩하심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면 부처님께서는 이에 응해 우리 마음에 커다란 힘을 주신다. 그것이 곧 감응이다. 예컨대 자식이 부모에게 감사하고 존경하면 부모는 더욱 자식을 사랑한다. 내가 저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저 사람도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부처님 은혜에 감동해서 법신 부처님을 철통같이 믿는다면 그 믿음의 힘에
의해 부처님 힘이 우리 몸에 가해지고, 그러면 또 더욱 믿음이 깊어진다. 이러한 신앙정서를 감응도교라고 한다. 부처님 마음과 응(應)이 돼 감응도교(感應道敎)가 돼서 중생을 제도하게 되는 것이다.
* 감인계(堪忍界)---불교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사바세계(娑婆世界)라고 하며,
이 사바세계를 감인계(堪忍界)라고도 한다. ‘참고 견디어야 하는 세계’라는 뜻이다. 이 사바세계는 울어 봐도
별 수 없고, 웃어 봐도 별 수 없고, 성을 내어 봐도 별 수 없고, 파닥파닥 뛰어 봐도 별 수가 없다.
괴로운 현실을 참고 견디고 받아 들이며 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 사바세계를 감인계 라고 하는 것이다.
* 감인대(堪忍待)---감인대(堪忍待)란 견디고 참고 기다려하는 말이다. 우리는 일기일경(一機一境)에
너무 일비일희(一悲一喜)하며 산다. "사바세계는 견디고 참고 기다리며 살아야하는 세상이다.
힘든 일이 있으면 견뎌 내야하고, 화나는 일이 있으면 참아야하고, 절망 앞에서는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며
살자는 말이다." 모든 수행은 고난과 분노를 견디고 참으며 때가 되기를 기다릴 줄 알아야 성취된다는 것이다.
비단 수행뿐이 아니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 또한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덜떨어진 사람일수록
금방 뜨거웠다 금방 차가워진다. 그 과보로 패가와 망신을 자초한다.
※ 일기일경(一機一境)---기(機)는 안에 속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며, 경(境)은 밖을 살피는 경계를 말한다.
부처님이 연꽃을 든 것은 경이 되고, 가섭이 웃는 것은 기가 된다. 다시 말하면, 기(機)는 심기(心機),
경(境)은 외경(外境)이라는 뜻으로서, 선사의 자유 자재한 마음 작용이 미묘한 언동
(눈썹을 치켜 올리거나, 눈을 깜빡거리거나, 할/喝을 하는 것 등)이 돼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 강거국(康居國)---강국(康國)이라고도 하는데, 당시는 소그디아(Sogdia)란 고대국가였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사마르칸트(Samarkand) 지방과 동 투르키스탄, 키르기스스탄에 걸쳐있었던,
즉 실크로드 중심에 있었던 나라로서, 중국에서는 강국 혹은 강거국이라 불렀다.
불교가 성했으며, 강거국 출신 승려가 중국에 와서 많은 활동을 했다.
그들이 중국에 올 경우, 성씨를 주로 강(康)씨로 했었다. 예, 강승개(康僧鎧), 강승회(康僧會).
당시 외국 출신 스님은 출신지역을 나타내는 말로 성씨(姓氏)로 삼을 때이다.
안식국 출신은 안세고(安世高)처럼 안씨(安氏), 인도(천축국) 출신은 축법도(竺法度)처럼 축씨(竺氏),
월지국(인도 쿠샨제국) 출신은 지루가참(支婁迦讖)처럼 지씨(支氏), 강거국(康居國) 출신은 강승회(康僧會)처럼
강씨(康氏)라 했다. 다만 월지국 인도 쿠샨제국 이었으므로 지씨(支氏) 대신 축씨(竺氏)로 표기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다가 동진(東晋)시대 도안(道安, 312~384)의 제안으로 스님들의 성씨를 지역이 아닌 법맥을 따라 모두
석씨(釋氏)로 통일하기로 했다.
당나라시대 현수 법장(賢首法藏, 643~712)도 강거국 출신이고, 안록산(安祿山)도 소그드인이었다고 하며,
심지어 고구려의 온달(溫達) 장군도 소그드, 즉 강거국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
소그드(Sogd) 문자는 아람문자(Aramaic language)에서 시작됐다. 소그드 문자는 자음 22자로 구성돼 있었고,
소그드 문자가 위구르 문자(回紇 文字: Uighur language), 몽골 문자, 만주 문자 등에 영향을 주었고,
우리 한글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소그디아(Sogdia) 참조.
* 강량야사(畺良耶舍, 산스크리트어 Kālayaśas, 383∼442)---그 이름을 중국식으로는 시칭(時稱)이라 했다. 서역 출신 승려로 성품이 강직하고 욕심이 적었으며, 여러 경전을 많이 열람해 3장(藏)에 통달했다. AD 424년 중국(劉宋)에 왔는데,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과 <관약왕약상이보살경(觀藥王藥上二菩薩經)> 을 한역했으며, 특히 선관(禪觀)에 밝아 참선(參禪)을 전수했다.
* 강승개(康僧鎧, 산스크리트어 상가바르만/Samghavarman, AD 3세기)---강국(康國-강거국) 출신 승려. 승가발마(僧伽跋摩)라 소리번역하기도 한다. ‘강(康)’자는 강거국(康居國) 혹은 강국(康國) 출신이라는 뜻이다. 중국 삼국시대인 252년 위(魏)나라 뤄양(洛陽)에 와서 중국 최초사찰로 일컬어지는 백마사(白馬寺)에서 <욱가장자경(郁伽長者經)>, <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 등을 번역했다.
* 강승회(康僧會, ? ~ 280)---강국(康國) 출신 승려로서 중국 삼국시대에 오(吳)나라에 불교를 전파하고,
역경승(譯經僧)으로 활약했다. <육도집경(六度集經)> 등을 한역했으며, <법경경주해(法鏡經注解)> 등
저서가 있다.
그는 교지(交趾:베트남 중부)를 거쳐 오나라로 와서 번역 사업에 종사했으나 그의 본뜻은 실천포교에 있었으며, 오주(吳主) 손권을 귀의시켜 강남에 처음으로 건초사(建初寺)를 건립한 것은 유명하다.
또 그는 지겸(支兼)과 더불어 범패에 뛰어났고, 미성(美聲)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