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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나의 가족은 처와 아들, 딸 네 식구다. 결혼은 월간약국이라는 잡지사 다니던 79년에 하게 되었고, 80년에 아들 규진(외대 독문과 3학년 다니다 공익근무중)이, 83년에 딸 재현(경원전문대 사회체육과 1학년)이 태어났다.
아들도 나처럼 고교 때 수학에 약해 용인 강남대 다니다 2학년 마친 후 외대 본교 독문과 편입시험에 합격했다. 웃기는 이야기는 당시 외대본교 편입시험이 너무 어려웠던 까닭에 수험생들이 ‘신의 아들’이나 합격한다고들 떠드는 바람에 내가 졸지에 ‘신’ 비슷하게 되었는데, 내가 ‘신’은 아니니 아마 나의 아버님이나 할아버지가 ‘신’ 비슷한 분이셨을까?
딸 역시 수학 때문에 고전했지만, 크게 어려웠다는 2002 수능의 수학시험에서 몇 문제를 잘 ‘찍어’ 비교적 상위권 득점을 해서 전문대에서는 알아준다는 경전에 들어갔다. 건대 충주 등도 합격했는데 내가 강제로 경전에 보냈다. 중학때 부터 디자인과 색채 감각에 독창성이 엿보여 생활미술이나 디자인 쪽을 기대했는데 본인이 체육을 좋아하므로 과는 내가 양보했다. 내 욕심으로는 2년은 본인 뜻대로 사회체육을 하고, 나머지 2년은 아비 뜻대로 그래픽 디자인 을 전공하는 것이지만 뜻대로 될는지….
<회고-중학시절-교우> 중1 때는 정우택 이민우 등과 잘 놀았고 중2 때는 이건영, 박길용과 같은 반이라 매일 보면서도 집으로 ‘편지질’을 했을 정도로 친했다. 이건영은 예고, 음대 작곡과를 거쳐 서울음대 교수를 하다 지금은 예술학교 교수를 하고, 박길용은 홍대를 거쳐 국민대 건축과 교수를 한다. 그런데 학교 졸업 후 머리들이 커지면서는 자주 안 만나게 되고, 요즘은 동기회 모임에도 안나와 대단히 괘씸하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자식들을 마음대로 못하는 것처럼 ‘동생’들도 내 마음대로 다룰 수 없다는 사실을잘 알고 있으므로, 언젠가는 능력만큼 자랄대로 자라고 철이 들어서 ‘성님’에게 돌아올 날을 기다릴 뿐이다.
<회고-중학시설-야구> 소학교 3, 4학년 때부터 내수동 골목에서 우연히 얻게된 글로브로 형과 무수히 캐치볼을 했던 나는 도서반을 거쳐 중2 말에 야구부에 들어갔다. 그러나 좌익수 후보(정규 좌익수는 송인섭)로 벤치 근처에서만 ‘맹활약’을 했을 뿐, 중3초에 후배들에 밀려 야구계에서 은퇴하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내가 그때 타격만 뒷받침되었고 계속 야구를 했더라면 ‘현대 야구사’는 창조적인 것으로 달라졌을 것이다…. 각설하고, 당시 아래 운동장에는 농협 선수들이 와서 훈련했는데 원조 홈런 타자로 이름 높은 박현식 씨가 현역이었고 감독은 원로 김영조 씨였다. 그래서 김영조 씨에게 ‘레벨 스윙’ 등 타격 지도를 몇 차례 받기도 했는데, 타격은 혼자서는 훈련이 어려우므로 나는 별로 늘지 않았고, 당시 핵심타선 멤버들이 실전에서 애용하며 여의봉처럼 아끼던 검은 배트만 부러뜨리는 바람에 자진 용퇴하고 말았다. 나의 용퇴에 감동했는지 코치이자 감독이었던 고2 황세웅 선배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조금도 야단치지 않고 곱게 내보내 주었다. 당시 야구부에서 나오려면 배트로 몇십 대씩 맞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그 후 10여년 쯤 지나 종로2가 우미관 뒤에 동전 넣고 배팅 연습하는 피칭머신 오락장이 생겨서, 상당히 자주 찾아가 뒤늦게 타격연습을 열심히 했다. 그물 안의 맞은 편에 쟁반 만한 표적을 2개인가 달아놓고 타격한 공으로 맞추면 상으로 한 게임 더할 수 있었는데 나는 맹연습한 덕분에 서너 번이나 맞추었다. 이렇게 피칭 머신을 상대로 맹연습해 타격 실력이 늘자 야구계에 복귀하려고 밤잠도 설쳐가면서 고민도 많이 했지만 그만 두었다.
<회고-고교시절-신문반 등 특기사항> 고교시절은 내 생애에서 제법 유명했던 때였다. 중3 가을 토요일인가, 수업마치고 하교하다 참가상으로 공책을 준다며, 양구하가 ‘우정있는 설득’을 하는 바람에 참석한 교내 백일장에서 그만 장원을 하고 공책뿐만 아니라 탁상시계도 타서 졸지에 유명해졌는데… 바로 이 일이 화근(?)이 되었는지 고1 때 문예신문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나는 링컨 같은 변호사나 정치가를 희미하게 동경했는데 어쩌다 보니 문예신문반에서 만드는 ‘경희신문’ 기자 시험을 보아 합격했다. 이 시험에서 정승모가 수석을 하고 나는 차석이었는데, 정승모는 신문반 분위기가 싫었는지 한 달도 안되어 그만 두었고, 중3때 백일장 장원한 경력과 차석 합격 성적을 감안해 당시 고2로 반장이었던 장부일(울산대 교수를 거쳐 현재 방통대 교수) 선배가 나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래서 고 2때 문예신문반장을 하게 되었는데, 하여간 신문 만드느라 웃기는 일도 많았다. 이 때 이야기는 ‘서울고50주년기념문집’에 약간 소개되었으니 생략하고, 하여간 고1, 고2 시절을 회상할 때 떠오르는 사람은 신문반의 장부일, 곽명규 선배다. 장 선배는 ‘잉크빛 노을…’, ‘창부 애리…’ 등의 조숙한 시구로 한국 시문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할 듯했지만 어쩐 일인지 동화작가 겸 국문과 교수가 되었고, 곽 선배는 작곡가가 될 듯 했는데 한국유리에서 젊음을 보낸 다음 사업가가 되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깝다. 작곡을 해서 몇 곡만 히트하면 사업가보다 현찰 수입이 훨씬 많은데…(요즘 이야긴가?).
고1 때 여름인가 나는 곽 선배에게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 몇 곡을 배우게 되었다. 곽선배는 악보만 보고도 노래를 정확하게 할 수 있으며, 합창 지휘는 물론이고 작곡도 했지만 나는 준 음치라 곽 선배가 선창을 해주면 따라서 흉내내는 식으로 겨울나그네 32곡 중의 1곡 ‘밤 인사’와 4곡인가 ‘홍수’ 그리고 마지막 곡 ‘노악사’ 세곡을 겨우 배웠다. 곽 선배가 펼쳐놓은 겨울나그네 32곡이 실린 두툼하고 큼직한 악보 책을 들여다보며 도이치 리드 세 곡을 겨우 배운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샹송과 탱고의 ‘대가’도 되기로 결심하고, 없는 돈에 노래 책과 디스크도 몇 장을 구입해 열심히 흉내내기로 서너 곡 씩 배웠다. 그 중에서도 ‘폴링 리브스’로 흔히 알려진 샤르르 뜨레네의 ‘고엽’과 탱고 ‘까미니또(오솔길)’는 악보책을 보며 악전고투 끝에 겨우 배웠다. 특히 ‘고엽’은 본편보다 ‘전주(전문어가 있는데 생각이 안남)’ 부분의 가사가 훌륭한데 미국판이 되면서 가사도 바뀌고 앞부분이 모조리 잘려나가 개판이 되고 말았다. 하여간 미국으로 건너가면 유럽문화가 엉망진창이 되어버리나 보다. 각설하고 나는 50대 초까지도 술좀 먹으면 이 당시 배운 노래들의 몇 부분을 따내고 되는 대로 이어 붙여 혼자 있을 때 흥얼거릴 때가 가끔 있었지만, 요즘은 어쩌다 가게되는 노래방의 가요 소음과 굉음에 귀와 기억이 망가졌는지 거의 생각이 안난다. 어쩌다 노래방에서 술에 취해 이 때의 노래를 되살려 한번 해보려고 해도 목소리가 엉망이므로 분위기만 망친다고 눈총만 받을 뿐이다.
그때 사서 십여 차례 이사하는 동안 한사코 끌고 다닌 샹송 판 한장이 지금도 집구석에 색이 잔뜩 바래고, 헤어진 자켓 테두리가 누덕누덕 풀로 덧붙여져 쳐박혀 있다. 방금 찾아보니 ‘킹스타-’ 사에서 나온 10인치 짜리에 ‘빠담빠담’, ‘제자벨’, ‘파리의 다리밑’ 등 8곡이 들어있고, 구입 당시 적어놓은 일자를 보니 1963. 10. 20이다. 아, 옛날이여…!
<회고-직업-원양어선> 서른 살까지 한밑천 잡아 타임지나 사상계처럼 거창한 문화매체의 오우너가 되려는 헛되고도 야무진 꿈을 꾸게 된 나는 국립부산수대 어로학과를 졸업하고 원양어선을 7년 정도 타게 된다. 인도양, 캄차카 반도 남단 근처의 북태평양, 대서양의 라스팔마스 어장(정확하게는 모리타니아 서해안), 보스톤 근처의 뉴펀들랜드 어장, 이란 남부연안 근처에서 고기를 잡았는데 이 당시 이야기는 허잡한(허술하고 잡다한) 것이 많지만 두세 개만 소개하겠다.
73년부터 2년 반 동안 승선했던 601강화호는 한불차관 인지에 의해 프랑스 보르도에서 건조한 1500톤 짜리 스턴트롤 선이었다. 이 배는 당시 자매선인 602강화호와 함께 라스팔마스 어장에서 활약하던 130척 가량 한국 원양어선 선단의 ‘야마도 무사시’ 였다. 야마도와 무사시는 태평양 전쟁중 가장 강력한 일본 전함(battle ship)의 이름으로, 일본해군의 상징이자 정서작 의지처였다(물론 항공모함 시대에 접어들어 몰락했지만). 당시 라스팔마스 어장의 한국어선 대다수는 350톤 급이어서 이 배의 선원들은 강화호를 야마도, 무사시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하면서, 멀리서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정서적으로 안정되었다고들 했다. 그런데 내가 근무 마치고 귀국한 다음 5,6년쯤 지나 이 601강화호가 모리타니아인지 세네갈인지 아프리카 서해안 어느 나라 연안의 ‘전관수역’ 안에 무단으로 들어가 조업하다 좌초되어 막대한 벌금이 부과되는 바람에 포기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연안은 평탄하여 물표가 될만한 것이 없으므로, 다른 한국 어선들에게 아주 중요한 레이더 물표(radar reflector)가 되었다고 들었다. 나는 보지 못했지만 아프리카 서해안 바다에 좌초된 채 녹이 슬어 삭아가고 있을 601강화호가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어쩌면 차라리 고철로 분해되는 것보다 레이더 물표가 되어 부스러지고 있을 601강화호가 훨씬 더 명예스럽게도 여겨진다. 모르겠다, 지금쯤은 다 썩어 사라져버렸을 지도…. 그 배를 타고, 24밀리 정도의 와이어 로프로 2톤 가량의 오타보드에 연결된 그물을 막강한 윈치로 내리고 올리면서 얼마나 많은 까라마리(한치), 몽고이까(갑오징어), 덴텍스(도미), 뿔뽀(문어)를 잡았던가…. ‘(투망)스탠바이…렛고…양망시작…, 브릿지에서 이 오더를 몇백번이나 했을까? 아니 몇천번 정도 되는가보다. 하루에 1항사 당직시간에 10번 투망 양망, 2년반동안 대략 600일 조업이라 치면 합계 6천번 정도 되나 보다. 그 배를 타면서, 서울과 서울의 사람들을 얼마나 가슴저리며 그리워했던가…. 이 자리를 빌어 601강화호의 명복을 빌어야 마땅하겠다.
<회고-원양어선-전환점> 원양어선 이야기가 나왔으니 우정6호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이 배는 일본의 전형적인 중고 ‘산욘큐(349톤급의 속칭)’였다. 1975년인가, 한여름의 부산에서 이란까지 몰고 가 고기를 잡다가 나는 대략 17개월만에 귀국했는데, 수대 어로과 선배인 선장의 터무니없는 배신과 회사의 무고로 선상노동쟁위 주모자로 몰려 55일간 부산의 학장 구치소에 있다가 일심에서 벌금 10만원형을 받고 나왔다. 당시는 유신치하여서 아주 다행이라고 주변에서 위로했지만 나는 항고와 상소로 대법원까지 가면서 결백을 주장했다. 10만원 벌금이 틀렸다면서, 2백만원 이상을 들인 이 소송은 결국 대법원에서 기각되어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벌금10만원형은 내 경력에 오점을 찍어 내가 수산계를 떠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바람에 그때 이후로 변변한 직장을 잡지 못하고 옹색한 잡지계에서 20년 가량을 보내게 되는 전환점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확신한다. 우정6호 사건은 나의 오점이나 수치가 아니라 우리나라 법조계의 오점이자 수치였다고. 참고로 덧붙이자면 그 우정6호의 선장은 귀국해 몇 년이 지난 다음 200억원 가량을 고의로 부도내어 몇 년 실형을 살았고, 세일수산인가 하는 그 회사는 내가 귀국하고 1년 쯤 지나 다른 이란 진출 수산회사 어획물 대금 17억원 가량을 횡령해 순식간에 공중분해되고 사장이하 간부가 실형을 살게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허망한 이야기이지만, 우정6호 승선중 내가 제시한 몇가지 의견을 따랐더라면 모두 잘 되었을 것이다. 하여간 우정6호 사건의 초점은 ‘하선증명서’의 하선 사유가 ‘합의’로 명기되었음에도, 명백한 근거 없이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각설하고, 하여간 이 때 이후로 나는 ‘의리’를 크게 강조하는 사람을 경계하게 되고, 아울러 ‘민주’를 강조하는 정치가도 경계하게 되면서 성격이 병적으로 바뀌었구나 하고 자책해왔는데, 요즘까지 몇 번의 대통령을 겪고 정치꾼들의 행태를 보아오면서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후진들에게 ‘의리․애국․정의․진실․민주․개혁 따위를 함부로 강조하거나 이런 식의 추상적인 말로 꾸미기를 일삼는 사람을 경계하라’고 충고하고 싶다. 우리는 너무 가슴아프게 보아왔다. ‘있을 수도 없고 있지도 않다’는 주장이 ‘새빨간 거짓말’로 드러나고 ‘실체적 진실’이라는 주장이 ‘구체적 허위’로 드러나는 부끄러운 작태를. 최근 들어 ‘개혁’이라는 말이 지나치게 흔히 쓰이면서 한국인의 가치관을 크게 병들게 했다. ‘개혁’이란 말을 그렇게 흔히 써서는 곤란하다. ‘개선(改善)’이나 ‘변경(變更)’ 또는 ‘시정’이란 말을 써야만 마땅한 사안에 자의적으로 ‘개혁’이란 말을 붙이는 일은 십중팔구 ‘기망(欺罔, 속이기)’이 되게 마련이다. 간단하게 한가지만 놓고 따져보자. 교육을 ‘개혁’한다고 얼마나 많은 세월과 에너지와 비용이 낭비됐는가? 결국 금년 들어 경제계에서 고교평준화 망국론이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은 소위 교육 개혁이란 것이 우리사회를 크게 망쳐놓았음을 경제활동의 최전선에서 분투하는 경제인들이 뼈저리게 자각했기 때문이다. 고교 평준화 정책 및 그 후의 말도 안되는 소위 교육개혁은 마치 ‘첫단추 잘못 끼워 비틀어진 옷매무새를, 아래 섶이나 단 또는 소매를 이리 저리 자르고 꿰매 붙여가며 바로 잡겠다는 헛수작에 불과하다’.
<회고-직업-잡지-취미-사진> 상고이유서 제출하고 대법원 판결 기다리는 거의 1년 동안 몇 푼 벌어보겠다며 동아일보의 두 줄 짜리 광고를 보고 찾아가 입사시험에서 지원자 30여명 중 수석 합격해 시작하게된 옛날 종로1가 무과수 제과 건너편 화성빌딩 5층에 있었던 월간약국 기자, 편집장 일이 잡지계 인생의 시초였다.
기자도 둘 뿐이라 기사취재와 사진취재, 원고청탁, 편집 등을 모두 한꺼번에 해야되었으므로 상당히 힘들었다. 당시 지방 취재라고는 ‘전국순례 모범약국 탐방’ 뿐이었는데, 원양어선 초기 북양 다닐 때 하나 사서 실컷 찍으며 놀다 처분한 이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온 카메라의 배터리 때문에, 필요한 장면의 반밖에 못 찍어 실패한 경상북도 상주 사진취재를 두 번 간 이후로는 사진(정확히는 카메라)에 병적으로 빠지게 되었다.
<회고- 뒷세대에 당부> 잡지와 관련해서도 허잡한 이야기가 많지만 월간 사이언스 이야기만 해보자. 86년경 사이언스는 미국(사이언티픽 아메리칸, 디스커버, 더 사이언스, 내셔널지오그래픽 등), 영국(더 사이언티스트), 일본(뉴턴, 트리거 등)의 과학잡지 기사들 중에서 재미있고 유익한 것들만 뽑아 번역해 실었으므로 세계 일류급 과학잡지였다. 그러나 국제적 저작권이 강화되면서 무단 전재를 못하게 되자 본격적인 과학잡지 ‘사이언스’는 그만 시들어 죽고 말았다.
되돌아보면 안타까운 일은, 논문 스타일의 심층 기사 위주인 미국의 ‘사이언티픽아메리칸’의 일본어․중국어 번역판이 몇십년 전부터 나오고 있는데도 한국어 번역판은 없다는 점이다. 또 첨단 과학기술 정보에 가장 민감한 영국의 ‘더 사이언티스트’ 역시 우리나라에 널리 보급되지 않는 점 역시 안타깝다. 기초과학 분야의 열세를 회복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각종 정보가 오고 가므로 다소간 마음이 놓이기도 하지만 인터넷 상의 정보는 껍데기 뿐일 때가 많다. 이공계 후진들은 이 두 잡지를 가끔씩이라도 보아야 현실에 균형감을 유지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현재-취미-사진>
잡지 만드느라 사진을 많이 찍게 되자, 없는 살림에 장비도 꽤 갖추었다가 처분하기도 했으며, 이제는 디지털 카메라 위주로 찍지만 허잡한 이야기 거리가 적지 않다. 그중에서도 86년경 전후, 밤을 며칠씩 새워가며 방과 화장실에 어설프게 구성한 암실에서 흑백사진 작화하던 시절의 고생은 가히 엽기적이다. 86아시안 게임 레슬링 경기를 찍어 직접 인화한 흑백 조(組) 사진은 2점인가 입선해서 겨우 본전의 반을 찾았고, 88올림픽 때는 500밀리, F4.5 짜리 거창한 망원렌즈까지 끌고 다니며 대여섯 종목을 슬라이드로 찍었지만 한점도 입선하지 못해 허탕치고 말았다. 각설하고, 2002년 3월경부터 3백만 화소 짜리 코닥 DC4800으로 동기들의 결혼식 사진을 몇차례 찍게 된 경과는 이렇다.
푼돈 벌이 삼아 시작했다 123호까지 마치고 중단한 총동창회 신문 기사색인 작업 때 글자가 너무 작아 겹돋보기(눈에 하나, 손에 하 나)로 일하다보면 한두 시간만에 중병 환자처럼 ‘다운’되므로 1년 반쯤 전 최고화질의 보급형 카메라인 4800으로 신문을 한 면씩 찍어 모니터로 확대해 보며 작업할 생각으로 무리를 해서 구입했다. 그러나 총동창회 신문 글자의 크기가 너무 작아 제대로 되지 않으므로 포기하고 말았으며 한 달에 한두 번 씩 꽃이나 산 경치 사진을 찍던 중 아들놈이 집안에서 떨어뜨려 껍데기 구석이 조금 깨지는 바람에 8만원을 들여 A/S를 받게 되었다. 백만원 넘게 투입한 4800 일습이 원래 목적에는 실패하고, 1년여가 지나면서 60%로 가격이 떨어지고, 또 AS 비용까지 지출하게 되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졸업40주년 문집에 쓸 가족 사진을 찍기에 좋은 결혼식 가족 사진을 찍어 활용도를 높임으로써 아쉬움을 어느 정도라도 달래기로 마음먹었다. 신랑이나 신부 한쪽의 가족 사진만 찍자니 이상해지므로 결국 신랑신부까지 찍게된 것이다. 원래 잡지사 등 다닐 때 동료 직원이나 친척들의 결혼식 사진은 150 쌍이 넘게 찍으러 다녔으므로 베테랑 급이지만 필름 카메라 경험을 디지털 카메라에 적응시키기에는 몇 달에 걸쳐 서너 번의 시행착오가 필요했으며, 근간에는 나름대로 필카 수준의 80%정도까지 적응되었다.
이렇게 적응하면서 최근까지 5, 6명 동기의 가족사진을 결혼식장에 쫓아가 디카로 찍었고, 처음 찍은 것들은 다소 떨어지지만 차츰 쓸만할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또 사소한 문제들이 생겼다. 첫째는, 신랑이나 신부 한쪽의 직계 가족사진을 식장에서 안 찍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이 경우 1차적 가족사진 촬영에 허탕치고 만다. 둘째는, 찍힌 동기가 고맙다며 술한 잔 사겠다고 하는데, 술 먹기도 어색하므로 차라리 ‘의학탐정’을 열권 씩 도매가로 사서 아이들이나 직원들에게 선물로 주고 읽히라고 권했지만 별로 탐탁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제는 누구든 특히 요청할 경우에만 쫓아가 결혼식 사진을 찍기로 했으니 오해 없기 바랄 뿐이다.
<현재-출판-의학탐정-좁은 길> 윤정건이 잘 알고 있듯이 의학탐정은 준비 때부터 사연이 많았다. 하여간 간난신고 끝에 출간된 의학탐정은 탐구욕이 있으면 중학생이라도 한 쪽 한 쪽 넘기기를 아껴가며 탐독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겐 읽기가 고역일 듯한 책이다. 여러 서점에 내놓았지만 영업력도 약해 모두 주문이 끊어졌고, 요즘은 교보문고에서만 열흘쯤에 두세 권씩 한 달에 10권 미만의 주문이 팩스로 들어와서 애초 계약대로 정가 1만5천원의 70% 가격으로 납품하고 있다. 3천 권을 찍어 아직도 재고가 1천 권 이상이다.
덤핑은 싫어 태워버려야 마땅할 듯 하지만, 희망은 인간의 피할 수 없는 미덕임이 분명하므로, 작년부터 가까운 몇 사람에게, 소속된 회사나 단체에서 총회나 창립기념일 등의 행사 때 기념품․사은품 조로 백 권 내지 이삼백 권씩 서점도매가로 구입해 조직 구성원이나 직원들에게 나눠주고 읽히도록 두세 차례 권유해봤지만 단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맥이 빠지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세 번 이상 권유하기는 싫고, 독서 취향이 걸맞지 않는 사람들에게 책을 무더기로 사라고 권유하기도 부담 가는 일일뿐만 아니라 ‘소귀에 경 읽기’ 같기도 하므로 피차간에 피곤한 일이 분명하다.
그래서 다량 납품은 포기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의학탐정-2를 만들어 시세보다 정가를 낮추어 팔면서 의학탐정-1을 서점도매가격으로 끼워팔기 해볼 작정이다. 그러나 이역시 제대로 된 영업전략이 못되는 ‘좁은 길’에 지나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뒤늦은 출판 일을 가만히 따져보는 동안, 내가 살아온 지금까지의 삶이 좁은 문과 좁은 길로만 이어진 것 같아 한심스럽기도 하다.
<회고-특기사항-시> 어줍잖은 시로 중3때 백일장에서 우연히 장원을 하고, 고3때 경희문학상을 받음으로써 모교 재학시 글 관계 상은 17기 동기들중에서는 나 혼자 독식하고 만 셈이 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니 동기들에게 상당히 미안해지기도 한다. 앞날이 기대됐던 추호경, 양성식, 김선우, 정혜국, 박창훈 등이 나의 독식 때문에 글 쓰기가 싫어지고 방향을 바꾸지 않았을까 하는 노파심이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미안하고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17회 동기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나는 수대 4학년 마칠 때까지 시 4편을 수대학보에 실었고, 그후 30여년 동안 대여섯 차례 몇가지 글로 시도했지만 등단하지 못했다. 아니 전업 글쟁이가 못됐다. 내가 무의식중에 추구했던 ‘언어로 축조(築造)된 심상(이미지)’ 또는 ‘언어의 탑(塔)’이란 기본 취향이 ‘정서가 무절제하게 방임된 듯한’ 한국의 문단풍토에 어울리지 않은 때문이라고 억지로 자위할 뿐이다. 또 산문 역시 ‘반공 시나리오’와 단편소설이 입선을 했지만 등단은 못했다. 시나 산문이나, 한 10년쯤 전부터, 모두 다 부질없는 욕망과 노력이었다고 매듭지어 잊거나 잊으려 노력해온 지 오래다. 그래도 이렇게 지난 세월 회고담을 견본 삼아 구차하게 만들다 보니, 앞서 언급한 글재주 있던 동기들에게 이해와 용서를 구하면서 짦은 운문 하나라도 부족한대로 사과의 뜻을 담아 헌정하듯 소개하는 것이 모양이 좋을 것 같으므로, 수대 4학년 때 발표했던 것 하나를 소개하겠다. 그 당시 뱃사람과 바다를 주제로 썼던 글 중 ‘조난자부(遭難者賦)’라는 것에 가장 애착이 가지만 제법 길므로, 여기서는 다음의 짤막한 16행 짜리 부(賦)가 낫겠다.
<마지막 봄>
지난 겨울의 차가운 눈, 기다림에 우리를 떨게 하였고
쌓인 아픔은 무너진 행위의 이끼 낀 살갗을 헤쳐
부끄러움만이 굳어 고인 발자국을 앞질렀으며
이야기와 느낌표뿐인 세상에 도움의 손을 내밀었다.
넘어져 굴러오는 바다의 지껄임은 거짓 기쁨을 주며
소금 내 배인 우리들의 어깨를 더욱 여리게 만들고
길고 어두운 밤의 딱딱한 외투 자락에 매달린 가슴은
낡은 방부제 냄새에도 불구하고 새로움을 약속했다.
마침내 파내 온 삼베같이 성기게 짜여지고만 기다림
모르는 사이 두려움 없이 어색한 뜨개 일로 이어지고
이렇게 거듭되는 따듯함이 거짓이었음을 모르는 채
지나온 나라, 비어있는 세월에 텅 빈 웃음을 남긴다.
그토록 오래된 설레임 까지도 햇살 속으로 녹아들고
숨겨져 기다린 비둘기마저 잿빛 아침 속에 번져 갔으니
새로움은 덧없어라 봄 또한 가엾어라
바람이, 먼 나라에서 온 바람이 아픈 입술로 비켜선다.
(1969년 5월 수대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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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완배형
빨리 건강을 회복하시기를...
글을 잘 읽었어요... 의학탐정 이야기도....
여기까지 안부전하러 들어오기 참 어렵구려...
아무래도 우린 만년필세대 같아요..이날을 돌아보며 힘을 내요...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이제 완배가 토해낸 이 얘기는 내 얘기요 우리의 얘기 일 것이다. 완배야 어서 회복해서 다시 경희신문 만들어 다오.
완배의 <'개혁’이라는 말이 지나치게 흔히 쓰이면서 한국인의 가치관을 크게 병들게 했다.>는 의견에 깊이 동감하게 된다. 이 때가 거의 30년 전으로 진즉에 그 병폐를 예리하게 통찰한 의견인데.., 또 한참 전부터는 온 나라에 무슨 '혁신'을 그리 좋아하고, 어느 市는 또 '특별'이 되고 싶어 '법석'이다. 완배 의견대로 '기망(欺罔, 속이기)’이 없는 '개선(改善)’/ ‘변경(變更)’ / ‘시정’이란 말들이 나타내는 방향으로 바람직하게 향상되어가는 사회와 교육제도를 경험하고, 그 안에서 살면서 한 생을 지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램이 있다. 그런 환경과 풍토를 후손에 물려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