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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사(李匡師) 선생 『서결(書訣)』 번역(1)
2022년 6월 6일
이 글을 번역하는 까닭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한문이 중국의 한문 문법이나 서술방법과는 다릅니다. 이광사 선생이 직접 글을 지어 아들 이영익에게 전해주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광사 선생이 한국어로 사유하고 한문으로 번역한 글이기 때문에 한문은 중국의 한문 문법과는 아주 다릅니다. 따라서 현재 한문을 읽고 이해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 더러 있습니다. 둘째는 현재 이광사 선생 『서결』에 관한 연구논문이 많으나 논문 내용을 보면 전문을 모두 읽지 못하고 쓴 사례가 많습니다. 전문을 읽고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본문 내용을 오해하거나 또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을 고의로 빼고 논문을 썼습니다. 따라서 일반인과 연구자 모두 쉽게 읽고 이해하도록 한문을 현대 한국어로 되돌려 이해한 뒤에 번역합니다.
구두점은 현대 중국 방식으로 찍고, 문장 내용에 따라 단락을 나누고, 한자의 이체자(異體字)는 모두 현대 통용 자체로 바꾸었습니다.
명나라 말기에 풍몽정(馮夢禎, 1548-1606)도 팔꿈치를 어깨와 나란하도록 높이 들고 붓을 쥐는 방법을 강조하였습니다. 사실상 풍몽정도 당시 사람들의 붓글씨가 힘이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조선에서는 이광사 선생과 명나라에서는 풍몽정 모두 붓 쥐는 방법부터 지적하였습니다.
馮夢楨,『快雪堂日記』,卷四十九︰
(萬曆己丑六月)“十六日,悟懸肘運筆法,常欲使肘與肩平,稍下則無力矣。鍾、王復起,不易斯言。”
참고자료 : 명나라 말기 풍몽정(馮夢禎) 팔꿈치를 들고 붓을 쥐는 방법 (2020년 8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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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
1、심경호, 『(신편) 이광사 문집』, 384-394쪽.
2、『圓嶠集選』, 卷十, 『書訣』(七千二百五十四字)
번역문 참고 :
완도신문, 1-52회(2012년 10월 11일-2013년 11월 21일)
서예이야기-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의 서결(書訣)
(계명대학교 김남형(金南馨) 교수 번역 참고)
필자 목하 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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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서예가들(진한시기부터 위진시기까지)이 붓을 쥐고 쓰는 방법(筆法)은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부터 모두 붓대롱을 곧게 세우고 붓털을 아래로 바르게 펴서 글자를 썼기에 모든 붓털들마다 힘을 모으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한 획(畫)을 쓰더라도 붓을 쥐고 쓰는 방법은 위와 아래 또 안과 바깥이 서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최근 송나라와 명나라 시기에도 획이 경건(勁健)하고 정밀(精)하거나 또는 획이 부드럽고(脆, 柔媚) 뭉툭하다(鈍)는 수준의 차이가 있더라도 붓을 쥐고 쓰는 방법(運筆)은 대체로 옛날 방법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동국(東國, 中國에 대한 자국 명칭)에서는 고려 말기부터 붓끝(筆端)을 눕혀서 글자를 써왔기〔고려 말기부터 조맹부 서체가 유행하였음〕에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획을 시작하는 위쪽과 왼쪽은 붓털 끝이 힘있게(毫銳) 지나는 부분이기에 먹물이 진하고 붓털도 미끄럽게 나가지만, 획을 마치는 아래쪽과 오른쪽은 붓털 허리(毫腰)가 지나는 부분이기에 먹물이 모자라서 색이 옅고 붓털도 껄끄럽고 뻑뻑하게 나갑니다. 획의 위쪽과 왼쪽은 먹물이 많아 먹물 농도가 진하고 아래쪽과 오른쪽은 먹물이 부족하여 먹물 농도가 옅어서 하나의 획이 처음부터 끝까지 완정(完整)하지 않습니다. 둘째, 붓털을 둥글게 뭉치도록 다듬었더라도 눕혀 쓰려면 손이 붓보다 앞서서 붓을 끌고가기 때문에 결국에는 획이 뭉툭하고 느려서(鈍緩) 힘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동국에서 훌륭한 서예 예술이 끊어지다시피 아주 드문 까닭은 모두 붓을 눕혀서 쓰기 때문입니다. 타고난 재능이 아무리 높고 뛰어나더라도 붓을 눕혀 쓰는 나쁜 습관에 젖고 물들어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얽매어눌러놓다가 끝내 잃어버리고 스스로 촌스럽고 낮은 수준(鄙俗)을 지향하기에 나쁜 습관에서 벗어나서 높이 뛰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옛날 법첩을 임서하더라도 모습조차 흉내 내지 못하고 그냥 글자를 그대로 베껴 썼으니 정말로 안타깝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붓글씨를 배우면서 붓을 눕혀 쓰는 것을 이상하다고 의심하였기에 눕혀 쓰는 나쁜 습관을 바꾸려고 위진(魏晉)시기 법첩을 구하고 연구하여 획을 쓰는 방법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러나 헛된 이름이 일찍부터 알려져서 글자를 써달라는 사람들이 날마다 대문을 메울 만큼 많이 찾아왔기에 어쩔 수 없어 별다른 생각 없이 요구에 대응하면서(付急) 당송시기에 낮은 수준의 필법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나이 51살(1755년, 영조 31년 3월 30일)에 함경도 부녕(富寧)으로 유배 갔다가 58살(1672)에 다시 전라도 완도군 신지도(薪智島)로 유배지를 옮겼는데 지금(『서결』을 지은 1764년 6월)까지 가족과 떨어져 지낸 10년 동안 글자 써달라는 사람들을 사절하고 옛날 서법에 오로지 정진하였고 쓰려는 글자를 마음이 예상하는 대로 손도 따라줄(心思手追) 만큼 크게 진보하였으나 내 생각으로는 아직도 궁극적인 높은 경지(止)에는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나는 많이 늙었는데 이어받을 사람이 누구인가요?(거의 없습니다)
내가 보기에 서예가들이 도(道)에 부합하는 것(大期:張懷瓘,「書斷序」︰“書之爲徵,期合乎道。”)을 쉽게 기대하지 못하는데, 첫째 잘못은 옛것을 배우지 않는 것이고 둘째 잘못은 의지와 노력을 집중하여 기술을 정숙(精熟)하도록 익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나 옛것을 배우지 않고 수준 높은 방법을 얻는 것은 없습니다. 개인의 욕심과 감정 때문에 올바른 방법을 무시하는데 특히 옛것을 배우지 않는다는 것은 진(秦)나라 이사(李斯, 기원전 280-기원전 208, 秦나라 승상이며 대표적인 서예가)와 동진(東晉)나라 위삭(272-349, 衛鑠)도 한탄한 적이 있는데 현재 상황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나는 이런 문제를 걱정하여 옛날부터 내려오는 많은 요결(要訣)들 가운데 바른 것을 고르고 순서대로 편집하여 뒷사람들에게 알려주려고 합니다. 서예 요결이 당송시기에 나온 것이 많은데 아주 심한 오해 덩어리이며 왕희지와 위삭의 글(衛鑠의 『筆陣圖』와 왕희지의 「題『筆陣圖』後」)이 수준 높은 요령을 상세하게 설명하여 우뚝한 원칙(經)이 될 만합니다. 내가 이 글에 설명과 견해를 붙여놓으니 배우는 사람들은 여기에 의지하여 서법을 연구하면 옛날 방법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본인이 노력을 집중하여 기술이 아주 숙련되도록(專精) 익히지 못하면 끝내 성공할 수 없습니다. 동한시기 장지(張芝, ?-192, 字伯英, 敦煌郡淵泉縣人, 草書之祖)는 타고난 재능이 뛰어났어도 어려서 돈황 학관(學館)에서 5년 동안 글자를 배우며 죽간(竹簡)에 썼고 나중에 그동안 쓴 죽간을 연못물에 씻었더니 연못물이 모두 검도록 연습하여 초서의 대가가 되었고 동진시기 왕희지(王羲之, 303-361, 字逸少)도 “내가 만약에 장지(張芝)처럼 서예를 좋아하여 연습하였다면 어찌 그보다 못하겠는가?”라고 말하였습니다. 타고난 재능이 옛날 사람 장지보다 못하다면 어찌 쉽게 대가가 되겠습니까?
처음에 내가 서예를 배울 때는 누가 말로 설명해주거나 시범을 보여주지도 못하였기에 올바른 서법을 깨우치는 데 아주 어려웠습니다. 수십 년 동안 깊이 연구하고 붓 1천여 자루가 닳도록 연습한 뒤에야 서법을 익힐 수 있었습니다. 익히기 어려울수록 더욱 좋아하고 빠져들었습니다. 낮에는 밥 먹는 것도 잊고 밤에는 잠자는 것도 잊었고 여름에는 자주 밤새웠습니다. 누우면 손가락으로 배 위에 획을 써보고 일어나면 붓을 손에서 떨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옛날 사람의 지극한 경지에 이를 때까지 연습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중년에 학생들에게 서예를 가르치면서 반드시 상세하게 서법을 설명하고 또 내가 수십 년 동안에 깨달은 것들도 말해주었더니 이해력이 빠른 학생은 며칠 만에, 둔한 학생도 한 달 안에 이해하였으나 아무도 끝내 내가 가르쳐준 서법의 기술을 익히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이 깊이 잘 이해할수록 흥미가 얕아져서 빠져들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붓글씨를 써서 가르쳤고 말로는 설명하지 않고 학생 스스로 익히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서결』에서는 올바른 붓 사용법과 획 쓰는 방법 두 가지를 상세하게 설명한 까닭은 아침 이슬 같은 짧은 인생을 생각하니 아무래도 전수할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글을 지어 둘째 아들 이영익(李令翊, 1740-?)에게 전해주면서 “너는 마땅히 올바른 서예를 정숙(精熟)하도록 배우고 익혀서 내가 어렵게 알아낸 것을 이해하도록 하여라!”고 일러주었습니다.
『書訣』
古人筆法,自篆隸皆直管伸毫而書,使萬毫齊力,一畫之內,無上下內外之殊;下逮宋明,雖有勁脆精鈍之差,運筆大率皆然。吾東則麗末來,皆偃筆端書,畫之上與左,毫銳所抹,故墨濃而滑,下與右,毫腰所經,故淡而澁,畫皆偏枯不完。旣團挼其筆,又手先於筆而引之,畫遂鈍緩無力。東國善藝之絶罕,盡坐於此。雖天才高者,濡染梏喪,自趨鄙俗,不能超拔。是以臨古法書,尤無以像,只傳謄其字,甚可惜也!
余自幼學書,心疑于此,欲一變俗法,求究魏晉,始得行畫之妙。然虛名蚤播,求者以日塡門,不得已多草率副急,浮沈於唐宋下乘者亦多有之。年五十一,謫北塞,中又遷南,流離十年,謝絶求者,專精古法,心思手追,甚有進益,猶自揣未及乎止也,且余已老,後來者其誰哉?
余見治藝者多未易大期者,患在不學古也,患在不專精也。事未有不學古而能得者,夫緣情棄道,殊不師古,李、衛之世,猶有此歎,況在今日乎?余爲是懼,欲揀次古訣,以示將來。書訣多出唐宋洿舛,唯王、衛之文,高妙詳明,卓然可經。今就此敷演論著,學者依此求之,庶可易尋古道。然非專精,終無以成功。以伯英之才,池水盡黑而成,逸少猶曰:“吾若耽之若此,亦豈謝之?”況才不逮古者,豈易而能哉?
始余之學,無前人口授手提,故覺之甚難,潛心數十年,幾禿千穎而方有得。得之難,故嗜之深,晝忘食夜以忘寢,夏月或至徹夜,臥則以指畫肚,起則筆不離手,意不到古人至處不已也。中年敎人,必詳其言,語吾數十年間所覺者,而敏者數日、鈍者旬朔而知,亦無一人竟造工。余謂其知之銳,味淺而不癖,遂只筆授,罕以言敎,使自得之。今於此書,致詳於用筆運畫之方者,恐朝露遂及,竟未有傳,不得已也。書以授令翊,“汝宜精學,無使我苦心所得,終無發明也!”
* 梏喪 :
『孟子、告子上』:“其旦晝之所爲, 有梏亡之矣。”
* 李斯와 衛鑠의 한탄 :
李斯,「用筆論」︰“自上古作大篆,頗行於世,但爲古遠,人多不詳。”
衛夫人, 『筆陣圖』:“近代以來,殊不師古,而緣情棄道,才記姓名,或學不該贍,聞見又寡,致使成功不就,虛費精神。”
* 大期 :
李斯,「用筆論」︰“夫書之微妙,道合自然。”
唐、張懷瓘,『書斷』,「書斷序」︰“文章之爲用,必假乎書;書之爲徵,期合乎道。”
* 臨池學書,池水盡墨:
西晉、衛恒,『四體書勢』:“弘農張伯英者而專精其巧,凡家之衣帛,必先書而練之,臨池學書,池水盡墨。”
* 吾若耽之若此,亦豈謝之:
唐、孫過庭,『書譜』︰
夫自古之善書者,漢魏有鍾(鍾繇)、張(張芝)之絶,晉末稱二王(王羲之、王獻之父子)之妙。王羲之云:“頃尋諸名書,鍾、張信爲絶倫,其餘不足觀。”可謂鍾、張云沒,而羲獻繼之。又云:“吾書比之鍾、張,鍾當抗行,或謂過之;張草猶當雁行。然張精熟,池水盡墨,假令寡人耽之若此,未必謝之。”此乃推張邁鍾之意也。考其專擅,雖未果於前規;摭以兼通,故無慚於即事。
唐、張彥遠,『法書要錄』,卷一,「晉王右軍自論書」︰
吾書比之鍾、張,當抗行,或謂過之;張草猶當雁行。張精熟過人,臨池學書,池水盡墨。若吾耽之若此,未必謝之。後達解者,知其評之不虛。吾盡心精作亦久,尋諸舊書,惟鍾、張故爲絶倫,其餘爲是小佳,不足在意。去此二賢,僕書次之。須得書意轉深,點畫之間皆有意,自有言所不盡,得其妙者,事事皆然。平南、李式論君不謝。(平南即右軍叔,平南將軍王廙也。李式,晉侍中。)
北宋、朱長文,『墨池編』,卷二,「晉王羲之自論」︰
吾書比之鍾繇,當抗衡,比張芝草,猶當雁行。張精熟過人,臨池學書,池水盡黑,使吾耽之若此,未必謝之。後達解者,知其評之不虛。吾盡心精作亦久,尋諸舊書,惟鍾、張故爲絶倫,其餘爲是小佳,不足存意。去此二賢,僕當次之。頃得書意轉深,點畫之間,皆有雅意,自有言所不盡,得其妙者,事事皆然。平南、李式論君不謝。(張彥遠按︰平南即右軍叔,平南將軍王廙之。李式,晉侍中郎也。)
宋、陳思,『書苑菁華』,卷十一,「晉王右軍自論書」︰
吾書比之鍾、張,鍾當抗行,或謂過之;張草猶當雁行。張精熟過人,臨池學書,池水盡墨。若吾耽之若此,未必謝之。後達解者,知其評之不虛。我盡心精作所(所,亦)久,尋諸舊書,惟鍾、張故爲絶倫,其餘爲是小佳,不足在意。去此二賢,僕書次之。頃得書意轉深,點畫之間皆有意,自有言所不盡,得其妙者,事事皆然。平南、李式論君不謝。(平南即右軍叔,平南將軍王廙也。李式,晉侍中)
* 遂及 :
『詩、大田』:“有渰萋萋,興雨祈祈。雨我公田,遂及我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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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한 글을 볼 수 있어 영광입니다. 여기 곳곳에 보물이 숨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