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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졸업 50주년 기념 제주행 부부 여행기(1/2)
2023. 4. 9
지난 4/3~4/6일 기간 우리 고교동기회 집행부가 넉달 전부터 치밀하게 기획하고 준비해온 졸업 50주년 제주 기념행사장에 참석한 뒤 이어진 여러 개의 제주 올렛길 중 두 탐방코스에 끼어 아마 이생에서는 마지막 제주여행일거라는 예감 속에 평생을 동고동락 함께 하며 늙어가는 커브도 비슷하게 타는 박모 와이프와 느긋하게 다녀왔다.
때로는 마주치는 다른 동기 개인이나 부부들과 살아온 얘기를 나누거나, 여러 단상들을 떠올리며 올레길 코스에 들어섰을 때는 가다가 멋진 풍광을 맞이할 때마다 ‘그래, 바로 이거지!’ 하는 감탄을 아끼지 않으며 ‘우리 삶과 존재의 본질을 운좋게 만나고 간다’는 인상을 줄곧 받았다. 전체적으로 이번 여행에서 치유의 고마움과 노년의 여유로움 속 희열을 줄곧 느꼈다.
<4/3일 첫째 날의 여정>
기념행사가 시작되는 첫날 우리 부부는 내가 다섯 달 전에 미리 예약한 대한항공 13시15분발 김포->제주행 비행기에 탑승하려 공항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운양동 우리집 아파트에서 둘째 아들이 운전해준 차를 타고 도착했다. 이놈도 오랜 내공연마 끝에 이제 방송음악 작곡계에 데뷔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여겼는지 요즘 들어 부쩍 예술계 말석 장인의 풍모가 엿보였다.
운전 보조석에 앉은 저그 옴마와 우리 부재시 홀로 생활 먹거리를 어떻게 조리해 먹을 것인가를 논의하다 둘이서 뒤쪽에 앉은 아배를 세태에 뒤떨어진 꼰대 취급하는 투의 가벼운 비아냥도 중간중간 날리면서 내가 부산에 떨어져 사는 동안 생성된 자기들 간의 특별한 유대감을 과시했다. 아무튼 제법 따사한 분위기 속에 우리 부부를 공항에다 잘 내려주고 아들놈은 돌아갔다.
공항 발권 키오스크에서 내가 제법 능숙하게 발권작업을 하는 것을 보고서는 마누라가 쪼금 기가 죽어주는 체 ‘와이고, 우리 서방 아즉 살아있네!’ 하며 또 부려먹을 궁리를 내심 꿍치며 ‘우쭈쭈!’해주는 것이었다. 귀가 얇아 금방 우쭐해 하는 김모와 함께 짐을 부치고 티케팅을 해보니 어찌된 게 비행 좌석이 앞뒤로 떨어져 있었다. 거 참 희안하다는 생각이 절로 났다.
근 40년 전인 83년 3월 막 결혼식 올리고 제주도 신혼여행 가는 대한항공 비행기에서도 좌석이 복도를 둔 채 서로 떨어졌던 기억이 바로 살아났기 때문이었다. 마누라와는 찰싹 붙어지내는 삶보다 살짝 떨어져 사는 게 더 큰 이별의 액땜을 해주는 계시처럼도 여겨졌다. 현대중공업 다닐 때의 울산총각 시절과 그 뒤의 부산 경성대 교수 시절, 그리고 지금의 영산대 법학도로써 홀로 지내는 부산의 로빈슨 크루소적 생활이 다 그런 팔자의 일환이거니 하고 믿겨졌다.
아무튼 우리가 1시간 여의 비행을 끝내고 4시 25분 경에 제주공항에 내려서는 숙박장소인 글로스터 호텔에 600번 리무진 버스를 타고 도착해 동기회에서 잡아준 방에 체크인을 하고서는 캐리어를 내려놓자말자 로비로 내려와 한 10분 거리에 있는 기념 세레모니 행사장인 메종글랜드 호텔로 셔틀 버스를 타고 갔다. 도착해 입장하니 무대 앞 테이블들은 참석자들로 꽉 차 있어 뒤쪽에 부부동반이 아닌 단신으로 온 친구들로 듬성듬성 채워져 있는 뒤쪽 테이블에 착석했다.
<하동거사와 함께>
앞과 옆을 살피니 안병찬, 김중철, 김재섭, 김철수군이 눈에 띄어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먼발치서 각 테이블을 돌아다니던 하동거사 김진회가 나를 발견하고는 얼른 찾아와 옆에 앉았다. 마누라를 보고서는 반가움을 표한다는게 ‘어째 못 본 사이 얼굴과 몸이 좀 부었소?’ 하며 예의 밉상화법을 또 날렸다. 그래도 자신은 혼자 산다는데도 노년 모델처럼 복장도 좀 펑키한 스타일에 허연 수염도 잘 다듬은 멀쑥한 모습으로 나타나 그런대로 혼자 유유자적한 삶을 잘 누리는갑다 하고 짐작하게 했다.
하지만 모처럼 여러 동기들을 만난 자리라 그랬는지 시종일관 좀 흥분한 목소리 톤으로 공식 테이블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우리 사이의 오래된 뻔한 사적 대화 패턴을 좀 지루하게 시도하길래 ‘니, 이런 자리에서는 술기운을 빈 안하무인적 언성을 낮추고 모처럼 만난 옛 동기들에게 예의를 차리는 화술과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살짝 조언했는데 약간 수긍하는 척 하다 일어나 다른 테이블들로 휙 옮겨가 버렸다.
기념행사는 이미 절반을 지나 색소폰동호회로 동기들에게 잘 알려진 토색모 악단이 그간 갈고 닦은 레퍼토리들을 정성껏 연주하고 있었다. 저 친구들은 참 운도 좋게 멋진 자아실현적 집중거리를 발견해 뿌듯한 노년의 유희적 삶을 보내는 게 꽤 그럴 듯 해 보였다. 그다음 우리 동기회의 준프로 밴드인 워커스가 보통 때 같으면 상당한 레퍼토리와 연주력으로 공연 퍼포먼스를 보여졌을텐데 주 기타리스트인 김현수 군이 한달 전 쓰러져 완전체의 공연은 무산되었지만 나름 관록의 공연을 해주었다.
<행사 전경>
성욱조 단장의 능란한 드럼 연주와 리드 보컬인 추재희 가수가 자신의 주 래퍼토리인 우리 가요와 외국 팝곡들을 성의 가득하게 들려주며 행사의 주축 엔트테인 시간들을 잘 담당해 주었다. 나는 공연 펼쳐지는 중간중간 화장실을 드나들며 그간 오래 못본 친구들을 만나 안부를 주고받았다. 김우진 원장과 유용호 박사 등을 만나 그들의 최근 근황을 묻고 나의 현재 생활을 전해주고 받았다.
돌아오니 행사 마지막 파트로 접어드는 동기들 가요경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40주년 행사 때도 MBC 출신 박찬용 국장이 행사 첫날 기획을 총괄하였다는데 이번에도 같은 역할을 관록이 물씬하게 펼치고 있었다. 10년 전에 본 자기 직장후배가 MC로 올라와 서로 구면의 반가움 속에 다정다감한 화술로 KBS 전국노래자랑을 뛰어넘는 진행능력을 보여주었다. B급 가수인 자기 경력을 밝히면서 경연 말미에 자신이 음반으로 발표했다는 두서너 곡도 거의 장원 수준의 가창력을 보이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행사의 피날레가 다가오자 동기집행부의 선심성 돈풀기 행사가 시작되었다. 노래경연 참가자들은 물론이고, 행사참석자 모두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돌아가는 추첨을 통해 3~6만원짜리 상품권 봉투와 50만원짜리 대상 상품권이 주어졌다. 예전처럼 무슨무슨 가전제품들이 아닌 현금성 상품권이 아싸리하게 분배되어 깔끔한 노년의 지혜가 크게 돋보였다. 내게는 3만원짜리가 얻어걸려 평소 뭐 뽑기에는 문디 손인 내 운세빨을 한번 더 확인시켜주었다.
행사를 모두 마치고는 참석자 모두가 레종 호텔에서 10여분 거리에 있는 글로스터 호텔로 이동하기 위해 떼를 지어 걸어갔다. 가는 중에 옆에 있는 동기들과 이런저런 얘기들을 반갑게 나누면서.. 배정된 호텔방에 들어서서는 씻고 내일 아침 8시 반까지 호텔 로비에 모이기 위해 우리 부부도 폰 시계를 6시10분에 맞춰놓고 바로 잠길에 들었다.
<4/4일 둘째 날의 여정>
폰 알람에 맞춰 정확하게 일어나 먼저 세면장에 들어가 20분 만에 마치고 나오니 평소 아침 잠 많은 와이프도 벌써 일어나 세면과 샤워를 위한 자기 차례를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는 7시 반에 3층 식당에 가자고 약속하고 각자 시간을 보내자고 했다. 난 가져온 노트북을 켜서 밤새 일어난 뉴스들을 읽어가며 시간을 보내었고, 박모는 샤워 실컷 하고 나와서는 폰으로 지 좋아하는 유튜브 방송을 켜놓고는 얼굴에 뭐 바르는 작업에 몰두했다.
시간이 되어 식당에 갔는데 사람들이 밀려 긴 복도줄에 두 겹으로 이어져 서있었다. 한 20여분 이상 기다려서야 식당입장이 가능했다. 앉을 자리를 잡은 후 뷔페식 조식줄에 섰는데 상황상 한번 만에 음식과 후식을 옮겨와 식사를 끝내야만 할 환경이었다. 한 15분 만에 급한 식사를 끝내고 붐비는 엘리베이터를 몇 번이나 놓치다 간신히 15층 우리 방에 도착해 허겁지겁 등산 복식으로 옷을 갈아입고, 와이프와 우리가 소속된 8호차 머체왓 숲속 올레길행에 합류하려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 안에서>
김경진 사장과 최성하 사장이 우리팀 인솔장이 된 버스를 타고 한 시간여 달려 서귀포에 들어와 산책길 입구 앞 주차장에서 사람들은 내렸다. 앞에 드넓게 펼쳐진 목장길을 따라 들어서니 ‘21년부터 제주의 웰니스 치유공간으로 선정된 머체왓 숲길이 나타났다. 제주 토속어로 명명된 ’돌이 쌓이고(머체) 나무가 한창 우거진 밭(왓)‘들이 숲속에 펼쳐진 올레길이었다.
<머체왓 숲 편백나무 길>
<머체왓 숲길에서>
독일시절 숲속에서 자주 본 전나무와 같은 외형의 편백나무들이 하늘 높이 빽빽하게 놓여있었다. 이 나무들은 인체에 좋다는 피톤치드를 다른 나무들보다 많이 뿜어준다고 하는데 그것도 좋았지만 그 호젓한 원시림적 분위기가 도시의 번잡함에 오랜 기간 쩔은 우리 노년층이 삶의 활성 기운을 재충전해주는 산림욕의 공간으로 받아들이기에 더할 나위 없어보였다.
<머체왓 서중천 생태 길>
일행을 놓쳐 뒤처지고, 어쩌다가 와이프와도 떨어져 앞으로 혼자서 걸어나간 일이십분의 시간은 그야말로 나의 독무대라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적 시간을 만끽하게 해주었다. 어느 지점에선가 따라오는 와이프와 합류했고, 저 앞에 떨어진 부부를 발견해 따라가니 조동구 교수 부부였다. 이 친구와 고교 졸업하고 처음으로 만나 중학시절의 추억을 반추하며 부경대에서 2, 3년 전 퇴임했고, 지금은 창녕 쪽에서 마늘농사를 한다는 소리도 들었다. 부인은 시민단체 일에 매진 중이라고 전하면서..
<기당미술관 내부>
숲을 빠져 나와서는 기당미술관을 방문했다. 본 미술관은 1987년 7월1일 제주도 출신 재일교포 사업가인 기당 강구범 선생에 의해 개관되었다 했다. 그후 서귀포시에 기증되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시립미술관이 되었다. 상당히 깔끔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인상이었다. 재경동기회의 정철길 회장이 미술사에 상당한 조예가 있다는 말이 들리던데 이번 여정에 미술관 탐방이 자주 있는 것을 보니 과연 그런 모양이었다.
<변시지 화백의 말 그림>
나는 이번에 방문조가 달라 9호차 탑승자들이 다녀온 이중섭미술관은 놓쳤지만 기당미술관에서 ’폭풍의 화가‘라는 변시지 화백의 토속적 제주화 화풍의 그림들을 만난 것이 적지 않은 소득이었다 여겨졌다. 이중섭이 생명의 에너지를 활활 뿜는 소를 대상으로 명화를 많이 남겼다면 이 양반은 성산일출봉을 배경으로 오두막에서 말 한 마리와 고즈녁하게 지내는 자신의 일상도를 독특한 민속화처럼 건져내었다. 타히티 섬에서 말을 그려내던 고갱의 그림 세계가 중첩되어 떠올라졌다.
<바다 본 돼지집 내부>
<바다를 본 돼지집의 흑돼지와 백김치>
미술관을 나와서는 ’바다를 본 돼지‘라는 옥호의 식당에 들렀는데 제주 흑돼지 삼겹살 전문집이었다. 이번에는 해양대에서 퇴임한 신한원 교수 부부와 테이블을 같이 했는데 말 그대로 바다 풍광을 즐기면서 특별한 맛을 보여준 흑돼지 메뉴가 아주 괜찮았다. 대학원을 같이 다녔다는 학연 속에 내게 상당한 호감을 드러내는 신교수와 모처럼 이곳에서 다시 동석하게 되어 같은 추억을 가진 대화를 나누자 순식간에 흐르는 시간이 아쉬울 정도였다.
<외돌개 옆에서>
<외돌개 전경>
<외돌개에서 토실토실 귀염동이 와이프와>
식사를 마치고 다음 코스를 찾아갔는데 ’외돌개‘라는 바다 위에 홀로 우뚝 솟아난 20미터 높이의 화산암석 기둥이었다. 화산 폭발시 생성되어 오랜 기간 파도에 침식되었지만 마지막 남은 강한 암석뿌리 같아 보였다. 외돌개의 꼭대기에는 소나무들이 자생하고 있어 무슨 독특한 머리카락 숲을 가진 형상체처럼도 여겨졌다. 그 주변 풍광이 조화롭게 펼쳐져 서귀포가 자랑하는 절경 한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와이프와 주변 산책로를 감탄 속에 서성이며 기념사진들을 많이 찍었다.
<바다 절벽 위 허니문하우스 테라스>
이제 오늘의 마지막 코스인 허니문하우스를 향했다. 8, 90년대 이승만별장으로도 잘 알려진 이곳은 호텔 파라다이스가 인수한 뒤 부대시설로 활용하다 80년대 초 깎아지른 절벽 위에 지중해풍의 아담한 건물들로 리빌딩하여 제주 최고의 명소가 되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대한항공에 인수된 이후 이런저런 사정으로 근 10년간 방치된 채 재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아 시설들이 노후화 되어가는 상태였는데 최근 다시 재오픈하겠다는 바람이 불어 왕년의 명성을 찾아가려는 와중에 우리가 방문하게 된 것이었다.
<허니문하우스 입구 전경>
<내부 산책로>
<길영공 부부와 환담 나눈 커피하우스 내부 전경>
아직 전체적 개축 효과는 눈에 크게 띄지 않았지만 덕분에 접근성은 좋아져 허니문하우스 경내를 주욱 돌아볼 수 있었다. 절벽 위에 세워져 바다를 굽어볼 수 있는 테라스나 산책로를 돌아보다 커피하우스에 모인 일행은 좋아하는 커피들을 주문한 뒤 같이 앉게 된 친구들과 환담하는 자리를 가졌다. 우리 부부는 길영공 부부와 동석하여 안부를 나누었다. 길영공은 나를 보자말자 오래 끌어오던 가족내 송사에서 마침내 승소했다며 뿌듯한 기분을 감추지 않았다. 축하를 하며 이 모두가 아픈 부인을 지극정성으로 뒷바라지하는 그의 인간성에 하늘이 화답하는 것이라는 덕담을 건네주었다.
차창 밖으로 비내리는 가운데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는 몸이 노곤하여 내내 졸았다. 숙소 호텔방에 와서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니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내일 코스는 오늘 놓친 송악산 올레투어팀에 끼워달라고 김동조 사장에게 부탁했는데 귀찮은 부탁 잘 받아주는 아재가 정철길 회장에게 특별히 간청하여 바라는 바대로 조정이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왔다.
15년 전 제주를 방문한 적 있던 와이프가 당시 인상깊게 가봤던 바다 굽어보는 산책길로 연결되는 이 코스를 못잊어 어떻게든 내일 이 투어에 낄 수 없는냐고 노래를 부르기에 한평생 김모를 챙겨주는 키다리 아재를 통해 마누라 소원을 들어줄 수 있게 되었다. 두 양반에게 진심어린 사의의 문자로 커다란 고마움을 표시했다. 정회장도 ’뭘요.. 천만의 말씀..‘이라는 겸양의 답신을 바로 보내왔다.
저녁은 둘 다 식욕이 없어 건너뛰기로 하고 나는 노트북 인터넷을 들여다 보다 가져온 서머셋 모움의 장편소설 ’면도날‘을 읽을까 하고 궁리하는데 옆에서 좋아하는 좌파논객들의 유튜브 방송을 듣던 와이프가 삼다수 물 2리터짜리 한 병과 속이 안좋기에 위생천도 하나 사오라는 오더를 주었다.
<호텔 로비에서 화기애애하게 찍은 단체 사진>
호텔 앞에 있는 편의점에 가려 로비에 내려가니 김진회를 비롯한 우리 친구 몇이가 기네스 흑맥 캔과 스낵 안주를 로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환담자리를 세팅하고 있었다. 진회가 합류하기를 권하기에 심부름 끝나고 바로 내려오겠다고 했다. 사온 물건 얼른 전해주고 다시 내려가니 더 많은 친구들이 모여있었고 계속 또 합류했다.
진회와 맥주를 나누는 중에 유봉군이 지나가다 옆에 앉았기에 서로 근황을 교환했다. 나는 영산대 늦깎기 법대생이고, 자기는 벨기에에서 연구소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요즘은 국내연구소 등에 다니며 자신이 닦은 전문 노하우들을 후배들에게 나눠주며 지낸다 했다. 그 옛날 강력한 슈팅력으로 ’유세비오‘란 별명을 가졌고, 구봉팀에서 파이팅 넘치는 야구 플레이를 주도했던 이 친구가 70 고개를 앞에 두고서도 여전히 운동근력을 유지하고 있는 듯해 경이롭게 보였다.
그리고는 사이클맨 김성주군과 미국에서 온 조보인 목사가 내 곁에 와서 학창시절 얘기들을 나누다 갔다. 특히 김감독의 유머러스한 몸개그는 여전히 모인 사람들을 들고놓았을 정도로 웃음을 빵빵 터지게 한 매력과 중독성이 있었다. 조목사를 통해서는 정중진 목사에 대한 근황도 전해 들었다. 의도하지 않게 우연히 모인 김에 우리는 단체사진도 찍고 삼삼오오로 모여 화기애애한 환담들을 나누다가 10시 경에 내일 아침 사흘 째 여정을 위해 자리를 파했다.
(2부로 계속..)
첫댓글 동기 여러분, 50주년 여행기를 지난 4/9일에 시작했다가 일부만 쓰고는 세달 반이나 학교 다닌다고 마무리를 짓지 못해 제 때 소개하지를 못했네요. 이번에 작심하고 마무리는 지었습니다만, 사진 이미지들이 40개 이상 들어가니 Daum 측의 20개 게시 제한에 걸려 부득이 1부와 2부로 나누어 올리게 됐습니다..
2부는 다음 주에 올릴 예정이니 기다려 주십시요. 우리 50주년 기념 여행에 대한 추억의 기록을 누군가는 남겨놓아야 하겠기에 한참 늦었지만 지금에사 올리는 점을 양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티케팅을 해보니 어찌된 게 비행 좌석이 앞뒤로 떨어져 있었다.
제주도 신혼여행 가는 대한항공 비행기에서도 좌석이 복도를 둔 채 서로 떨어졌던
기억이 바로 살아났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옛낭 극장 가서 1 ,2층으로 안 떨어지만 다행이다는 상황 설정을 해봅니다.
길영공 부인이 여러모로 많은 회복을 보였던게 아주 반가왔소. 계속 확실하게 잘 보살펴 부산 싸나이의 오도코를 만방에 보여주기 바람다. 여러 좋은 운도 선순환처럼 잇따를 것이외다.
역시 김박!^^ 50주년 행사에 못간 아쉬움을 정말 시원하게 달래주네요. 언제 김포 다시 가봐야 되는데...ㅎㅎ
수인공은 이번에도 제주여행 못가게 된 모양이구료. 71년 고2 때 제주행 수학여행도 제꼈다더니만.. 그 참 내가 두번이나 박모와 떨어져 제주행 비행기를 탔던 것처럼 무슨 징크스라도 있는 모양임다.
이제 서울에 완전히 올라 왔으니 재경 동기회 모임에 더 자주 참석할 수 있게 되었소이다. 날씨 선선해지면 김포에도 방문해 주소.
@김재민 그거 기억하시네 ㅎㅎ 수학여행 안간건 서울에 너무 가보고 싶어서 땡땡이...
사진을 보니 무엇보다도 두 내외분이..70이 아니라 40대 후반으로
보일 정도로 얼굴이 깔끔하고 젊어 보이는군요.
지난 번에 무슨 큰 보험금을 받았다더니..두 분이 무슨 좋은 영약을 드신 모양-^^
원익법사도 몇 회에 걸쳐 관련 참가기를 올려 주셨는데..글 잘 쓰시는 두 분이
이처럼 기록을 남겨 주시니.. 이후로 수십년이 흘러 모두가 저세상 사람이 되어도
이런 세밀한 내용은 창창히 남겨진 신화가 되어.. 후진들에게 지속 전해지리라 믿습니다.
서토도 그간 별고 없었능교? 기록적 폭염에 시달리는 한국만큼이나 미국도 기상이변이 장난 아니라던데.. 아무튼 더위에 어름어름 하다 온열질병에 걸려 갑작스레 이마에 도나스 달고 승천하는 일은 없기 바라요.
마누라는 자기가 무슨 그레타 가르보라도 된 양 나이 먹어 자연스레 투실투실하게 된 용모 사진을 검열도 안받고 마구 올린다고 난리요 난리.. 저작권 등에 관심이 많은 작은 놈까지 초상권 침해니 뭐니 하며 저그 옴마 역성을 들어주는데 벌써 부산 생활 접은 게 패착이 아닌가 하는 예감이 팍팍 들고 있심다.
신장암 수술은 잘되어 주치의가 이제는 6개월에 한번씩 오면 된다 합디다. 하지만 다른 쪽에서 뭐가 또 터질까 싶어 김포우리병원에 위와 대장내시경 검사 신청을 해놓았소이다. 말마따나 신장암으로 받은 보험금은 찌그러들던 우리집 가계재정에 큰 도움이 되었지만 그 효과가 딱 1년 만 가데요. 다행히 보험금 일부를 주식투자에 돌려 2차전지 주들 한 기십주씩 매입한 게 아다리 되어 그 덕에 요즘 쪼끔 숨통 트이는 생활을 하고 있심다.
최근 글쓰는 속도가 말도 안되게 느려졌지만, 그래도 서토 말대로 호랭이가 가죽을 남기듯 뚜벅뚜벅 기록물 사관이 되려 함다.
벌써 4개월 전이 되어 버린 행사를 다시 생각에 잠기도록 합니다
감사하며 다시 정독을 하고 갑니다
아, 김작가와 첫날 같은 테이블에 앉았었지요? 뭔가 놓칠 수 없는 작업에 몰두하는 양반답게 열정으로 둘러싸인 아우라가 범상치 않다는 인상을 줄곧 받았심다.
띄엄띄엄 농부의 일상도 생활인으로 보내겠지만 사진작가라는 예술인의 삶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노익장의 패기를 오래도록 보여주기를 앙망하네요. 건강 잘 챙기시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