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부도지(신라 박제상이 엮은 우리 민족 상고사)를 통해 본 마고성은 어떤 곳이며 우리 민족의 주무대는 어디였을까? 그리고 어쩌다 좁디좁은 한반도로 물러나게 된 것일까? 마고성을 떠난 한민족은 어떤 달력을 사용하며 한족을 비롯한 주변 종족을 다스렸을까? 그리고 다시 마고성으로 돌아갈 방법은 과연 무엇인지 부도지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 글 싣는 순서 ] ❶ 마고는 중국 것인가? ❷ 요순시대를 종식시키다 ❸ 마고할미 곁으로 ❹ 단군임검의 달력 마고력 ❺ 마고력의 신비를 밝혀낸 인물
[ 부도지를 통해 본 우리 민족 상고사 ]
❶ 마고는 중국 것인가?
- 해운대문화원 향토사 세미나 질문에 새로이 답하다
지난해 12월 8일 해운대문화원에서 개최된 향토사 세미나에서 장산 마고당을 주제로 발표를 했다. 발표를 마친 후 질의응답 시간에 한 참석자가 “중국이 마고신은 자신들의 것이라고 하는데 이에 대한 발표자의 견해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을 받았다. 당시에는 답변을 한답시고 했는데 돌이켜보니 질문에 빗나간 대답을 했던 것 같다.
부도지(符都誌)에 따르면 황궁의 무리들이 마고성을 나와 북쪽으로 향했다가 황궁에게 천부를 이어받은 유인씨 무리는 동남진하게 된다. 유인이 세운 ‘한국’를 거쳐 다시 유인에게 천부를 이어받은 환웅이 ‘배달국’을 세웠다가, 다시 환웅에게 천부를 이어받은 단군임검이 부도를 건설하고자 명당을 찾아 도읍을 옮겼다.
부도가 완성되고 신시(神市)를 열자 주변의 많은 제족들이 모여들었고 임검이 제족 간의 언어를 통일시키니 부도를 중심으로 제족들이 하나가 되었다. 임검은 마고의 족보를 밝히며 마고성으로 돌아갈 방편으로 제를 올렸다. 하지만 임검의 이러한 방법에 따르지 않은 무리가 있었으니 바로 요(堯)와 그 일족들이다.
요는 큰집인 단군 임검의 부도에서 떨어져 나갔으니 작은집인 셈이다. 요 역시 엄연히 마고의 후손(백소 일족 중 지소씨 후손)일 뿐만 아니라 부도의 제시(祭市)에 왕래했고 단군 임검을 따르던 인물이었다. 이처럼 중국(요)은 작은집이지만 덩치가 크고 욕심이 많아 걸핏하면 큰집(임검)에 귀한 보물이 있는지를 기웃거려왔다.
◇ 중국에서도 마고 모셔
물론 중국에서도 마고를 모셨다. 1461년 발행된 <대명통일지(大明統一志)>라는 지리책에서 한나라 무제가 동쪽으로 순방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마고에게 제사를 올렸다. 그래서 마고성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부도지의 마고를 통해 본 한민족 창세신화’(한승용 국학연구소 연구실장) 참조]
여기서 이곳이란 우리 민족이 천제를 지냈던 곳으로 보이는데 이 같은 기록은 더 이전인 진시황 때도 등장한다. 하지만 이런 기록이 있음에도 마고성에 대한 언급이나 황궁, 청궁, 백소, 지소씨의 족보에 대한 기록은 중국에는 없다. 단지 마고에게 제를 올렸다는 내용이 전부인 것이다.
마고라는 이름만 존재하는 중국과 달리 부도지에선 마고성부터 단군임검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록이 나타나 있으며 다시 마고성으로 돌아갈 방법까지 기술해 놓고 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중국에서 마고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더라도 마고신의 기원과 족보까지 지닌 우리 민족이 마고의 계승자임이 너무나 분명하다.
오히려 마고신에 대한 연구가 활발할수록 중국이 족보를 지닌 우리 민족에게 허리를 굽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떼쓰는 동생을 어루만지듯 부도지를 펼쳐 마고할미의 근원을 알려주면 된다.
/ 예성탁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