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진화(一塵話)
대저 참선(參禪)이라하는 것은 군중을 놀라게 하는 별별 이상한 일이 아니라 다만 자기의 현전일념(現前一念)에서 흘러나오는 마음을 돌이켜 비추어 그 근원을 명백하게 요달(了達)하여 다시 외물상(外物相)에 섞이지 않고 안으로 헐떡이는 생각이 없어 일체 경계를 대하여 부동함은 태산 반석 같고 청정하고 광대함은 태허공(太虛空)과 같아서 모든 인연법을 따르되 막힘도 걸림도 없어 종일토록 담소하되 담소하지 아니하고 종일토록 거래하되 거래하지 아니하여 상락아정(常樂我淨)의 하염없는 도를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무진장으로 수용하는 것이니 이것은 억지로 지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평등하게 본래 가지고 있는 일이니 누가 들어올 분(分)이 없으리오. 현우귀천과 노소남녀가 다 분이 있는 것입니다.
다만 믿음과 원력이 없기 때문에 참여하여 들어오지 못하나니 믿음과 원력을 발하는 사람은 한번 뛰어 곧 여래(如來)의 땅에 들어가 대적광(大寂光)의 도량에 안신입명(安身立命)하여 삼라물물(森羅物物)이 정불국토(淨佛國土)가 아님이 없고 행주좌와가 모두 해인삼매라 어찌 그 다른 것이 있으리오.
설혹 근성이 열등하여 한 생각에 단번에 초월하지 못하더라도 오래 익히면 마침내 얻어 들어가리니 그러므로 대혜선사 이르시되 “날이 오래고 달이 깊으면 자연히 성돌 맞듯 맺돌 맞듯 한다” 하시고 또 조주화상이 이르시되 “너희들이 삼십년 이십년을 법다이 참구하여 만일 도를 알지 못하면 노승의 머리를 베여가라” 하셨으니 어찌 우리 중생들을 속이셨으리오.
오래 익히는 분상(分上)에 대하여는 첫째 이 몸과 마음과 세간에 있는 모든 것이 다 헛되어 하나도 실됨이 없는 줄로 간파하여야 합니다.
천마고의 영웅호걸 하나도 간곳없고
부귀문장 재자가인 북망산에 티끌이라
어제같이 청춘 홍안 어느덧 백발일세
아홉 구멍에는 항상 부정과 물질이 흐르고
가죽 주머니 속에는 피와 고름과 똥오줌을 담아있다.
광음이 신속함은 달아나는 말과 같고
잠깐 있다 없어짐은 풀 끝에 이슬 같고
생각 생각이 위태함은 바람 속에 등불과 같아서
이제 날에 비록 살아 있으나
내일을 편안이 보전하기 어려우니
무엇을 구집하며 무엇을 애착하리오.
이렇게 분명히 생각하면 자연히 망념이 담박해지고 도념이 중장하여 밖으로 일체 미혹한 경계가 끓는 물에 얼음 녹듯 합니다.
이렇게 망념이 공적하고 몸뚱이는 송장인데 그 가운데 앉고 눕고 가고 오고 잠도 자고 일도 하고 일체처소와 일체시중에 소소영령 지각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의심하고 의심하되 옷 입고 밥 먹을 때 오줌누고 똥눌때와 사람 대해 문답할 때와 글 읽고 싯귀쓸 때 일체처에 조금도 간단없이 성성하게 돈각하여 천가지 마장과 만가지 곤고를 당하더라도 더욱이 잡아들어 순일하게 나아가 잠자기도 폐해지고 밥 먹기도 잊어질 때 홀연히 깨달으면 본래 생긴 나의 부처 천진면목 절묘하다.
희도 않고 검도 않고 크도 않고 작도 않고 늙도 않고 젊도 않고 나도 않고 죽도 않고 아미타불 이 아니며 석가세존 이 아닌가. 천만가지 생각은 벌건 화로불에 한점 눈처럼 사라지고 큰 지혜광명은 곳을 따라 현전하리니 선지식을 찾아가서 요연(了然)히 인가(印可) 맞아 다시 의심없는 뒤에 소요방광(逍遙放曠) 지내가며 인연있는 중생을 제도하면 부처님 은혜와 부모은혜 시주은혜를 한꺼번에 갚아 마치리니 어찌 유쾌하지 아니하며 어찌 즐겁지 아니하리오.
오호라 성인이 가신지가 이미 오래고 겁화가 자주자주 변천하여 우리 중생이 무명의 긴긴밤에 잠을 깊이 들고 식경풍파(識境風波)에 나부껴 고동쳐서 마음을 돌이킬 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정법(正法)을 보기를 흙덩이 같이 보고 혜명(慧命)을 이어 가는 이 알기를 아이들 희롱 지껄이와 같이 알아 대도(大道)가 폐하여 행하지 못할 경우에 이르렀으니 어찌 애달프지 아니하리오.
이러한 때를 당해서 선사(禪社)를 경성 중앙에 건립하여 영령(英靈)한 신사(信士)를 권발(勸發)하여 이 도로 들어오게 함은 참으로 희유한지라 경에 이르시되 “한 가지 깨끗한 마음이 정각을 이루는지라 항사보탑(恒沙寶塔)을 조성하는 것보다 낫다” 하시고
또 영가선사가 이르시되 “듣고 믿지 않더라도 부처 될 종자의 바른 인연을 맺고 배워서 이루지 못하더라도 인천의 복을 덮는다” 하셨으니 하물며 듣고 신하며 배워 이루는 이야 그 공덕을 어찌 다 말하리오.
필자는 본래 저술에 능하지 못하고 또 지식이 천단하여 스스로 우로(愚魯)를 지키며 아무런 마음 쓸 일이 없으나 경성 안국동 40번지에서 「선원(禪苑)」이란 소지(小誌)를 간행한다고 선에 대하여 직절평범(直截平凡)하게 해설하여 보내라는 통지서를 받음에 자연히 감상이 떠올라 문사의 황졸과 어조의 실격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약간 이까짓 것을 초하여 송정 하나이다.
다시 한 말 있사오니 “이 법은 대승심(大乘心)을 발한 이를 위하여 설하며 최상승심(最上乘心)을 발한 이를 위하여 설한다” 하셨습니다.
다시 한 말 있사오니 “법 가히 설할 것이 없는 것이 이름이 설법이라” 하셨습니다. 다시 한 말 있사오니 “금일이 신미년 4월 9일이 올시다.”
오대산 상원사에서 (『禪苑』 發刊號, 1931.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