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조문학 시 원고 - 남진원
세월이 가면 외 9편
세월이 가면
남진원
저 산 아래에 있던 농촌 한옥 한 채 양철 지붕을 한 집
한때는 이 마을에서 떵떵거리며 살았다던 부짓집
그 할머니도 요양원으로 가시고
집은 집터조차 찾을 수 없는 풀밭과 숲이 되었구나
세월이
가면
누가 저 산 아래에
할머니가 자식을 낳고 살았던 흔적을 떠올리기나 할 건가.
사람이 살다가 가는 게 저런 것아로구나
( 2024. 9. 13 )
사는 일, 아이 좋아라
남진원
부자가 아니어서 편안하고
귀하지 않아서 자유롭고
영화를 탐하지 않으니 담백한 즐거움이 있네
굳이 높은 철학이나 깨달음이 무엇에 필요할까
이 평범한 생활에서 늘 안온한 기쁨을 만나니
행복하다네
사는 일,
그저 해뜨면 일하고 해지면 잠 자리애 드는 일이지만
사는 일
아이 좋아라
( 2024. 9. 10 )
초가을
남진원
밤에 잠들기 전
한 쪽 문을 열어둔다
내 잠속에서도‘ 풀벌레들이
놀러 오게 말이다
요즘, 맛있는 꿈을 꾸는 것도
풀벌레들 덕분이다
어디 그 뿐이랴
열린 문밖에서
별들이 들여다보며
정겨운 눈짓을 한다
참, 요즘은
별과 풀벌레로 행복한 밤이다.
( 2024. 9. 9 )
살맛 나는 일
남진원
버스 칸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밭에 뭘 심었냐고 묻는다
“심지는 않고 키우기만 했어요”
“무엇을 요?”
“풀입니다.”
사람들은 웃지만 나는 진심으로 대답한 것이다.
초가을 풀밭에 나가면
기분이 좋다
메뚜기 여치 풀무치들이
마구 튀어 오른다
풀밭을 만들어줘서
반갑다는 인사를 그렇게 하는 모양이다
저들의 모습을 보니
살맛이 났다
( 2024. 9. 9 )
시내 가는 길
남진원
시내 가는 길이었다
‘벌써?
’
벼 익는 진한 향기가 났다
고개 돌려보니
허리 숙인 벼들이 익어가며
향긋한 냄새를 보내는 것
초가을로 가는
길목에서, 내가 받은
가장 흐뭇한 선물이었다
( 2024. 8. 23 )
예술가의 정원
남진원
계곡이 싱그러움을 만들 수 있는 건
숲 덕분이다
계곡에
고요한 음익을 전하는
물소리는 늘 잰걸음을 하며 흘러가고
이따금 새들이 날아와
노래를 열매처럼 달아놓기도 한다
언제부터인지
계곡은
자연 속에서 서로 서로가
‘예술가의 정원’을 만들어 놓은 줄을
이제야 알겠다.
( 2024. 8. 21)
삶이 무엇인가
남진원
나이 70이 넘으니
주위의 좋은 벗들이 다들 떠나는구나
떠난 지 벌써 32년이 지난 최도규 형
지지난 해 세상과 이별한 김진광 시인
또 명리학의 독보적 존재이던 박성동
금년 8월, 이 폭염 속에
신완묵 시인이 가셨구나
5 여년 병상에 누워 지내더니 …
다들 떠나가는구나
병약하고 부실한 내 몸만
여지껏 살고 있구나
삶이 무엇인가
정다웠던 사람들의 모습을
다시 떠올리면서 진한 커피 두 잔을 연이어 먹으며
깊은 생각에 잠겨 본다
( 2024. 8. 20. 아침에 )
2024, 여름
남진원
최악의 폭염에
초열대야까지…
힘들지만
새벽녘 뒷산 숲을 흔드는
매미소리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다
유년의 고향 집 새벽
눈뜰 때 듣던
그 소리의 빛깔보다 더 빛나는
싱싱하고,
쟁쟁한
여름 아침을 물들이는 싱그러움
폭염에 몸은
어려워도
그 어느 여름날 보다
기쁘게 맞이하는
행복한 여름
밤이면 쏟아부을 듯 빛나는
별들을 생각하면
벌써 가슴이 뛴다
( 2024. 8. 15. )
나는 늘, 오늘입니다
남진원
나는 늘,
오늘입니다
나를, 나는 장사지냈습니다
69년의 육신과
영혼을 불 질렀습니다
최고의善, 최대의惡도
불질렀습니다.
善도 없습니다
惡도 없습니다
육신과 영혼도 없습니다
나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나는 없는,
나로 삽니다
나는 늘, 오늘입니다
늘, 현재일
뿐입니다.
우리네 삶, 늘 흔들리며 살지 않느냐
남진원
흔들리며 사는 일이
어제,오늘의 일이었던가
내 인생은 늘 4.8의 지진이 일어났으니
삶의 곳곳이 허기진 채
수 차례 여진도 다반사였지
선반의 그릇 흔들리듯 자네도
흔들리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오늘 전북 부안 땅 엉덩이에 4.8의 지진이 났는데도
전국 곳곳,
비틀
비틀
그래,
우리네 정치도 교육도 문화도 사회 곳곳에서
이미 지진수치 4,8도를 넘어
비틀거리고
우리네 삶,늘
흔들리며 살지 않느냐.
- 약력
* 1976년 샘터시조상 수상으로 등단
저서: 조그마하게 살기 외 다수.
강원도문화상 문학부문 수상
현, 한국문인협회 강원도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