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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식 선생 『진단주보(震壇週報)』 「창간사」(1919년 10월 10일)와 독립혁명
2024년 8월 14일
신규식 선생(1880-1922)은 1911년 늦가을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혁명에 힘쓰면서 자유에 근거한 공화제를 주장하였습니다. 또 아시아의 영구평화를 위하여 대한의 독립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주요 우방국 인사들을 설득하였습니다. 또 아시아의 영구평화를 위하여 아시아 국가들이 공화제 국가를 만들어 새롭게 아시아를 개조하자고 주장하였습니다.
독립운동의 근본 목적은 국가를 회복하는 복국(復國)이며, 독립운동은 애국에 그치지 않고 세계 문제도 책임지는 출발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따라서 독립운동은 복국이며 건국이 아닙니다. 한국의 건국(Founding of Korea)은 단군의 건국을 말한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1917년 7월에는 독립혁명 인사 14분 함께 주도하고 조소앙 선생이 『대동단결 선언』을 지어 전국에 선포하여 정부기구(總機關)를 세울 수 있는 여론을 이끌었고 모두 5차에 걸친 독립선언(상해, 동경, 길림, 서울, 블라디보스토크)을 도왔습니다. 임시정부를 상해에 세울 수 있는 정치적 국제외교적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이런 공헌을 보면 신규식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를 세운 주도자였습니다.
1919년 3월부터 독립혁명이 번져나가고 4월 11일 상해에 임시정부가 세워졌습니다. 따라서 독립혁명의 상황을 이끌기 위하여 1919년 10월 10일(일요일, 8일 추석)부터 1921년 4월 4일까지(모두 22호) 상해에서 매주 『진단(震壇)』(週報)를 발행하였습니다. 독립혁명을 세계에 알리기 위하여 주보는 프랑스 파리, 미국 하와이, 워싱톤, 샌프란시스코, 독일 베를린, 러시아, 영국, 중국 모두 6개국에서 통신 판매하였습니다.
신규식 선생은 『진단』 「창간사」에서 분명하게 몇 가지 원칙을 주창하였습니다. 특별한 것은 신규식 선생은 독립운동이 아니고 독립혁명이라고 밝혔습니다. 독립은 자유 공화제를 실행하는 혁명이라고 주장하였기에 독립혁명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신규식 선생은 처음에는 기독교를 믿었으나 1909년 7월에 대종교 교인이 되어 국가의 독립을 위하여 민족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단군을 더욱 굳게 믿었고 단군을 기념하는 기념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신규식 선생은 우방 국가들(주로 중국과 미국)의 도움을 받으면 다행이지만 설사 받지 못하더라도 한국 사람이 자주적으로 최후의 한 사람까지 목숨을 걸고 독립혁명에 힘쓰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다만 당시에 중국 국민은 점차 깨어나고 있고 집정자(군벌)들은 여전히 꿈속에 있기에 도움을 받기가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진단』 주보에 실린 내용과 기사는 한편으로는 중국 국민을 각성시켜 함께 협력하자는 뜻도 있었습니다.
신규식 선생은 우방 국가들을 설득하면서 한국의 독립 문제는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되었던 발칸반도 문제만큼 커다란 국제문제이며, 또 동아시아의 영구평화와 세계의 영구평화는 한국의 독립부터 출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진단』, 창간호, 1919년 10월 10일, 「한국인 독립운동의 참뜻(韓人獨立運動之眞諦)」(중국인 기자)︰
“어떤 사람은 한국인 독립운동이 국가 회복(復國)에만 치우쳐서 국가에 관심이 편중되었다. 한국인이 목숨을 희생하겠다고 결심하였는데 어찌 세계 문제에 관하여 선구자 역할을 하지 않느냐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비난은 분명히 높고 먼 견해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떤 일이든지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얕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광명정대한 앞길도 반드시 한 걸음씩 걸어가야 하며 결코 한걸음에 건너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애국하려면 반드시 먼저 가정을 사랑하여야 하며, 세계를 관심 가지려면 반드시 먼저 애국하여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국인의 세계 관심은 「독립선언서」에서 명백하게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독립운동은 세계 문제를 해결하는 첫걸음입니다.
더구나 한국인은 일본인의 각가지 속박을 받고 있으니까 세계 문제에 관심을 발전시키려고 하더라도 여기저기에서 가로막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속박을 없앤 뒤에야 세계 문제에 관심을 자유롭게 발전시키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독립운동이 세계 문제 해결의 첫걸음) 한국인 독립운동의 참뜻이며 국가에만 관심이 편중되어 세계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커다란 책임을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중국인 기자 씀)”
「韓人獨立運動之眞諦」︰“有人以爲韓人獨立運動,僅偏於復國,側重於國家思想。韓人既具有犧牲的決心,何不爲世界問題之先驅?此等責備,固是高遠之見。然我以爲無論何事,總由小而大,由淺而深,由近而遠,光明的前途,也須一步一步走去,決非一步可以跨得到。如愛國須先愛家,愛世界須先愛國。韓人之世界思想,在「宣言」中已明白說過,所以有獨立運動,也是解決世界問題的初步。
況且韓人受日人種種束縛,雖欲對世界問題有所發展,亦阻力橫生,故非先將束縛除去,然後方可對世界問題,自由發展。此韓人獨立運動之真諦,非側重於國家思想,放棄解決世界問題之大責任也。)(記者)”
신규식 선생은 중국에서 손문을 비롯하여 다수의 혁명당 인사들과 교류하며 그들과 함께 한중 양국이 공화제를 추구하며 서로 협력하여 새로운 아시아의 영구평화를 만들자고 양국 혁명가들의 연대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들도 신규식 선생의 고결한 인격과 성실한 행실에 크게 감동하였고 양국이 협력하자고 주장하였습니다.
당시 중국 혁명당 인사 태구(台仇)의 「중한 양국의 협력과 아시아의 미래(中韓共進與亞細亞之將來)」(『진단』, 제2호, 1919년 10월 17일) 글을 보면 신규식 선생이 중국에서 혁명당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인품이 어떻고 설득이 어떠하였는지 또 중국인들의 한국 인식을 어떻게 바꾸어놓았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중한 양국이 협력하고 새롭게 아시아를 개조하자는 두 가지 주장은 신해년(1911)에 한국 지사 모군(신규식)이 처음 주장하였고 중국에서는 혁명당 당수 모모(손문, 孫文) 이외에는 호응하는 사람이 아주 적었습니다. 나(台仇)는 1913년부터 한국에서 온 동지(신규식)와 사귀었고 그의 성실하고 고결한 인품이 옛날 성현을 많이 닮았다고 느꼈습니다. 또 한국의 오천 년 역사를 두루 읽어보면서 풍속, 정치, 문화 등이 독립국가의 자격을 충분히 가졌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과거에 교통이 불편하던 시기에는 한국의 일부 집정자가 사신을 중국에 파견하여 공물을 바쳤다는데 이것은 국가 교제의 일반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나라(중국)가 때로는 한국을 번국(藩屏)으로 상대하였으나 큰 나라로서 어떤 책임을 다하지는 않았고 더구나 한국의 내정에는 조금도 간섭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어져 내려와서 관습이 되었습니다.”
『震壇』,二號,台仇,「中韓共進與亞細亞之將來」︰
中韓共進、改造新亞之說,往在辛亥(1911),倡自韓國志士某君(),在中國方面,除革命黨首某某外,應之者甚寡。余自癸丑(1913)以還,得與彼邦同志遊,覺其誠懇高潔,類多古風,再研覽五千年來之歷史,則風俗、政教、文化……等,無不具有獨立國家之資格。昔以交通不便,間有一部執政者,遣使來華貢獻,亦與國交際之常。吾國或待以藩屏,竊未盡何種大邦之責任,且毫無干涉內政,相沿遂成風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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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한국사 연구자 가운데 일부 인사가 뉴라이트라고 나서고 있습니다. 이들의 생각은 자신들의 연구가 깊고 넓지 못하고 어설퍼서 끝내 자신 입장의 논지를 개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본 학계가 오래전부터 말해온 것을 베낀 것입니다. 앞으로 한국사 연구자들은 한국의 독립운동사를 더 열심히 연구하고 전파하여야 할 책임을 통감합니다.
예를 들어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경도대학 시마다 겐지(島田虔次, 1917-2000)가 『중국 근대사유의 좌절(中国における近代思惟の挫折)』(1949)을 출판하였고 동경대학 미조구치 유조(構口雄三, 1932-2010)는 『중국 전근대 사상의 굴절과 전개(中国前近代思想の屈折と展開)』(1980, 荒木見悟의 권고를 받아 제출한 박사 논문)를 출판하였습니다. 모두 중국의 양명학을 다루면서 중국은 근대적 사유가 꺾이고(挫折) 부러져서(屈折) 근대화를 이룰 수 없거나 이루더라도 비정상적(유럽이나 일본과는 다른 비정상적 발전)이라는 뜻입니다.
왜 일본 학자들은 이웃 국가의 역사와 미래를 저주하듯이 생각하고 글을 쓰는지 그들의 의도를 잘 알아야 합니다.
저는 1980년대에 두 서적을 사서 읽어보고 일본인 학자의 도덕심이 한심하고 연구방법도 어설프다고 보았습니다. 이들은 알량한 서양 역사 지식을 배워서 일본 역사에 적용하여 해석하고 또 동아시아 국가 한국과 중국의 역사에 적용하고 미래를 저주하듯이 함부로 결론지었습니다. 이들이 연구한 동아시아 사상사 특히 양명학에 관한 지식 및 독서량과 독해력은 정말로 형편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그 뒤로는 다시는 읽지 않습니다. 또 1990년대에는 한국 학계에서 중국 고문 서적을 읽고 이해하지 못하는 일부 연구자들도 미조구치 유조(構口雄三, 1932-2010)의 『중국 전근대 사상의 굴절과 전개(中国前近代思想の屈折と展開)』와 『중국 연구방법(方法としての中国)』(1989)를 읽는 것을 보고 직접 이 서적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경계하도록 하였습니다. 2000년대 이후에는 한국 양명학계에서 일본 양명학 연구자들이 중국 양명학과 차별하여 ‘일본 양명학’이라고 주장하는 연구성과를 인용하거나 참고하는 것을 경계하도록 설득하였습니다. ‘일본 양명학’이라는 말에도 군국주의를 합리화하는 생각이 많이 담겼고 연구수준도 낮기 때문이었습니다.
현재 한국과 중국 모두 산업현대화를 이루고 한국은 민주화를 이루었습니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발전 성과는 일본 역사학자들이 저주하다시피 예견하였던 잘못된 생각을 뒤엎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학자들은 앞으로 더욱 깊이 반성하고 연구하여야 하며 아울러 우리 문제를 스스로 처방하려는 학술적 책임감과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한국에서 뉴라이트 인사들은 일제 강점시기에 근대화 기초를 놓았다고 보고 여기에 부화뇌동하는 몇몇 정치인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일본 학자들이 말하는 대로 동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일본만이 근대화를 이루었고 한국이나 중국은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거나 설사 이루더라도 비정상적이라는 억측과 저주를 닮았습니다. 한국이 산업근대화와 민주화를 이룬 것은 박정희 대통령 집권 이후부터 또 문민정부부터 오늘날까지 온 국민의 노동력과 민주화운동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또 독립운동에서 무력 사용을 테러라고 낮추어 보려는 못난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상해임시정부를 비롯하여 『진단』 신문도 독립운동은 평화적 행동(正義)과 함께 군사력(武力)을 동시에 사용한다고 밝혔습니다. 임시정부가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일본의 군국주의 침략전쟁이 평화운동은 아니었고 일본이 1945년 항복할 때도 일본 국민이 평화 사상을 절실하게 깨달아 일본 정부에 침략전쟁을 포기하고 항복하라고 시킨 것도 아닙니다. 일본 군국주의는 평화적이고 한국 독립운동은 테러입니까? 일본 사상사와 정치사에서 일찍부터 일본 국민이 군국주의와 전체주의에 열광하였고 개인 자유와 민주화를 확립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한국 학자들과 정치인들은 일본의 학자와 정치인을 만나 개인 자유와 민주화를 설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일본 국민 스스로 침략전쟁의 책임을 반성할 것입니다.
『진단』 「창간사」(一)︰“한국의 독립은 정의(正義)에 호소하여야 합니까? 아니면 무력에 맹서하여야 합니까? 대답을 말하면 ‘무력은 정의를 지원하는 뒷받침으로 삼아서 무력을 사용하고 또 무력을 준비하여야 합니다. 정의와 무력 두 가지를 병진시키고 독립에 사용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진단』 신문사를 조직한 이유입니다.”
“韓國之獨立將訴之正義乎?抑誓諸武力乎?曰︰武力爲正義之後盾,一方發揮,一方準備武力,分道并進,殊途同歸。此『震壇』報之所由組織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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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식 선생 『진단주보(震壇週報)』 「창간사」(1919년 10월 10일) :
,本報創刊辭(二),申睨觀(申圭植)︰
유럽의 세계 제1차대전(1914년 7월 28일-1918년 11월 11일)이 세상을 흔들었다가 이제는 파리평화회의(1919년 1월 18일)가 뜨겁다. 세계 제1차대전의 근원이었던 발칸 문제가 파리 평화회의에 이르러 해결되는 큰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지만 전 세계에서는 추세는 갈수록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공산주의가 동유럽에 만연해가고 노동문제는 세계 각국에서 격렬하게 일어나고 있다. 아시아 일본에서는 木展兒郎(?)의 아세아주의(Asianism)가 더욱 거세게 일어나며 그치지 않는다. 이러한 야심주의(공산주의와 일본 아세아주의)는 세계의 커다란 추세에서 말하면 강권(强權) 국가들(유럽의 삼국 동맹)이 자멸하였던 길을 다시 밟는 것이며, 또 세계 영구평화 입장에서 말하면 그들의 무력과 나쁜 수단을 더욱 용납할 수 없다. 우리는 아시아에서 나서 자라고 아시아 각국에서 생활하며 국민으로서 살아왔는데 끝내 일본이 아시아의 국가와 국민을 마음대로 베고 죽이는 비참한 상황을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탄식한다.
우리 대한(大韓)은 독립을 지키며 누구의 지배를 받지 않던 민족이며 정의롭고 용감하며 백절불굴의 특질을 일찍부터 갖고 있다. 동방의 침략국 독일(일본)이 아무리 무력으로 겁박하더라도 한국 사람은 과거의 역사처럼 맹렬하게 진격하고 분연히 싸우고 있다. 여러 민족은 각기 생존하여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우리 대한도 남의 지배를 받을 까닭이 없다. 또 제1차대전이 끝나고 평화가 실현된 뒤부터는 민족자결주의가 진화론에서 벗어날 수 없는 원칙이 되었다. 우리 한국 사람도 어찌 민족의 각기 생존원칙을 어기거나 민족자결주의라는 세계의 공리(公理)를 어기겠는가! 더구나 우리 대한의 국제적 지위는 세계정세에서 보면 발칸 문제와 똑같다.
우리 대한이 일본에게 강제로 무단(武斷) 당할수록 극동아시아 문제는 분란이 더욱 가중될 것이며 중화민족은 위기와 멸망(危亡)에 빠질 뿐만 아니라 열강들이 중국에서 얻은 기회 균등(미국 국무장관 John Milton Hay가 1899년 영국과 러시아 등 6개 국가에 중국에서 문호 개방과 무역 기회 균등을 요구하여 얻은 특권)의 상황도 남김없이 일본에 빼앗길 것이다. 현재 상황을 보면 중국 북부지역의 광산 채굴권과 철도 부설권과 경영권은 여러 열강이 탐냈으나 모두 일본이 가져갔다. 유럽 열강 국가들이 전쟁에 몰두하는 동안에는 극동아시아 문제까지 다룰 수 없었기에 일본이 이때를 틈타서 빼앗아갔는데 사실상 열강들이 아무리 아쉽고 안타깝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현재 무력주의(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 중심의 삼국 동맹)는 무너졌고 그래서 승전국가들(영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 미국 등)이 세계의 영구평화를 바란다면 동아시아의 영구평화를 유지하는 것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동아시아의 영구평화를 유지하려면 강권주의(authoritarianism)를 없애는 것부터 출발하여야 하며 강권주의를 없애려면 반드시 우리 대한의 독립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대체로 일본은 모든 이권을 독차지하겠다는 야심을 갖고 멀리 떨어진 유럽이나 미국 등 국가와는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인근 국가들을 침략하겠다는 전략에 따라 오래전부터 아시아 패권을 독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대한이 독립하여 일본의 침략을 막아내면 독립한 대한은 일본이 세계에서 야심을 전개할 수 없게 만들 뿐만 아니라 중국에도 아주 튼튼한 보장이 될 것이다. 더구나 유럽 전쟁이 끝난 뒤에 일본은 지상군이 자멸한다는 교훈을 얻었으나 해군을 여전히 확장하고 있으며 시베리아에 여전히 병력을 증강하고 있다. 이러한 정황을 보면 일본은 동아시아를 커다란 전쟁터로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 대한의 독립 문제는 일본의 무력정책을 해결하는 문제가 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동아시아의 영구평화와 세계의 영구평화를 위한 커다란 문제이다.
현재 우리 대한이 일본에 병탐된 역사를 되돌아보면 일본의 잔혹하고 폭력적인 행위와 약속 위반은 굳이 따질 것도 없다. 중화민국과 영국 미국 모두 우리 대한과는 예물을 주고받는 평화적인 외교관계를 맺었고 서로 믿음과 서약이 굳건하다는 것을 상호조약에 기록하였다.(信誓旦旦:『詩經、衛風、氓』:“總角之宴,言笑晏晏,信誓旦旦,不思其反。”) 그런데 일본은 세계가 아주 옳지 않게 여기는 것을 무시하고 우리 대한을 겁박하여 합병하겠다는 생각을 실행하였다. 그러나 중화민국과 영국 미국 모두 가을 매미처럼 입을 꾹 다물었고 국제적인 공리(公理)의 지킴이가 되지 못하였는데 많은 지식인은 아주 가슴 아프게 여긴다.
우리의 삶이 마침 재난시기(陽九)를 만났으나 국가의 수치를 씻으려고 온갖 고생을 감내하고 굶기도 하며 10년 동안 참담하게 지내면서도 의지를 굳게 하고 다른 길을 생각하지 않았다. 지난해(1919) 3월에 독립을 선포하자 세계 인사들은 우리 대한의 정신이 불멸하였다는 것을 비로소 인식하게 되었다. 그런데 일본은 조금도 움츠리거나 조심하지 않고 여전히 폭력으로 독립 인사들을 죽였고 인도주의를 땅에 떨어뜨렸다. 오히려 다행히 우리 국민은 포기하지 않고 더욱더 치열하게 전진하며 정의를 따르며 주저하지 않고 민족을 위하여 싸우고 조국을 위하여 싸우고 정의를 위하여 싸우고 공리(公理)를 싸우며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다시 살아갈 날이 없을 때까지 싸울 것이다. 이것은 우리 대한이 혁명을 진행해온 고통의 역사이지만 세계가 대한의 혁명을 주목한 계기가 되었다. 독립혁명의 형세가 전국으로 번져나가자 우방국 인사들도 갈수록 감동하여 공개적으로 관계를 유지하거나 몰래 도와주며 깊이 동정하여 우리도 감격하여 혁명에 더욱 매진하도록 하였다.
본 잡지는 혁명 추세에 부응하여 만들고 창간호에 우리의 오늘과 내일 책임 다섯 가지를 간단히 설명한다.
첫째, 민족자결을 발휘한다.
민족자결이라는 말은 미국 대통령 윌슨(Thomas Woodrow Wilson,1856-1924)이 주창하였고 세계가 호응하고 있다. 야심주의 국가의 침략을 방지하는 데는 이것보다 나은 것이 없으며 세계의 영구평화를 보장하는 데도 이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그래서 네루(?)도 “세계의 평화는 반드시 민족을 구별하여 스스로 국가를 세우는 것부터 출발하여야 하며 또 반드시 나라를 잃은 독립민족도 고유의 국가를 회복시켜주는 것부터 출발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또 쿨루(? Kulu)도 “세계 분란의 근원은 민족주의가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말하였다. 세 사람의 말에 따르면 국가의 생명은 민족의 존망에 달려있는데 민족이 있으면 국가가 비록 멸망되었더라도 멸망된 것이 아니고 민족이 없어지면 국가가 비록 존재하더라도 멸망한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강권 국가의 압제가 아니고 민족이 자결할 수 있느냐 여부이다.
높은 파미르고원에 올라가서 동서 양쪽을 내려다보면 끝없이 대륙이 이어졌는데 우리 가운데 누가 영웅인가? 러시아 민족은 자결을 조금이라도 알았기에 모국을 회복할 수 있었고 대만 민족은 자결을 모르기에 자신의 운명을 다른 나라(일본)에 여전히 맡기고 있다. 벨기에 민족은 자결을 잘 알았기에 옛날 제도를 광복할 수 있었고 헝가리 민족도 자결을 알았기에 완전한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이 가운데 민족자결을 결정하고 실행에 옮긴 민족들은 19세기 세계대전의 화근이 되었고 현재는 민족자결을 실행하면서 화근을 제거하고 있다. 민족자결을 절실하게 생각하고 실행에 옮기려는 민족들 또는 이미 민족자결을 결정하였으나 여전히 강권 국가에 압제를 당하고 있는 민족들 모두 다가올 20세기 대란의 화근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마땅히 20세기의 화근을 없애야 한다.
대체로 평등, 자유, 박애 3대 사상을 가진 국가들은 결코 민족 공동체의 의지(公意, general will)에 위반되는 나쁜 무력수단을 용납하지 않는다. 따라서 민족을 단위로 국가의 경계를 획정한다면 세계의 영구적 안녕은 모두 이 방법에 따라 실현될 수 있다. 비록 사해동포주의(cosmopolitanism)의 첫째 전제가 국가라는 우상을 타파하는 것이지만 과도시기에는 반드시 민족자결을 자치 실행의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민족자결에 애쓰는 이유이다.
둘째, 독립과 평등을 주장한다.
우리 대한은 5천 년의 위대한 문명을 지켜왔고 또 독립 국가의 깊고 넓은 기초를 유지해왔다. 이것은 세계인 모두 공인하는 것이다. 시조 단군은 처음부터 민치(民治, government by the people)를 내세워 사람들에게 호소하였다. 따라서 인민은 민치의 도덕과 교화를 받았기에 독립정신을 아주 드높게 세워왔기에 강권 국가에 꺾이는 것이 아니다. 역사 중간에 역사 서적에서는 중화 왕조에 조공(朝貢)하였다고 기록하였으나 이것은 단지 한국 왕실의 예의(禮儀)이며 결코 삼한 민족 공동체의 의지(公意)가 아니었고 또한 국내 정치는 완전히 독립하였고 어떤 간섭도 받지 않았다. 대한 민족이 남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는 특질은 여기에서도 더욱 믿을 수 있다. 근대 역사에 내려와서 일본, 거란, 몽고 등과의 전쟁에서 언제나 민족 배반자(妖氣)부터 제거하고 이민족에게 꺾이거나 굽히지 않았다. 역사에 나타난 영광들을 우리는 당연히 기억하여야 한다. 이민족에게 침략당하면 인민의 의기(義氣)가 더욱 격앙되었고 강권 국가 때문에 축소되거나 사라지지 않았다. 미국인 포드(Ford)씨는 “삼한 민족은 독립을 유지하며 남의 지배를 받지 않는 민족성을 갖고 있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우방국 인사가 관찰한 것이며 동시에 우리 인민이 자신하는 것이다.
더구나 오늘날 자유와 평등은 국가의 원리가 되었다! 우리는 세계적 조류에 따라 아래와 같이 세 가지 뜻을 가진 국민이 되어야 한다. 첫째는 국가 독립을 가진 국민, 둘째는 남의 지배에서 벗어난 국민, 셋째는 민족 스스로 생존을 쟁취하겠다는 것을 근본적으로 깨달은 국민이다. 따라서 국가 간의 평등 문제는 마땅히 완전한 독립 문제와 함께 동시에 해결하여야 한다. 독립 없는 평등이라면 인민은 여전히 타인의 지배를 받는 것이며, 평등 없는 독립이라면 국가의 국제적 지위는 여전히 평등의 수평선 아래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에 대하여 완전히 독립하여야 하며 세계에 대하여 국가 간의 평등을 요구하는 것이다. 독립과 평등의 국가를 위하여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수백만 리터의 붉은 피(1斛=10斗=100L, 數萬斛=200만-300만L, 성인 혈액량 5-6L)를 흘려서라도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셋째, 국제적 우방 국가들과 연대한다.
강권 국가와 강권 국가가 마주하면 공리(公理)가 이기지만 강권 국가와 약소 국가가 마주하면 강권 국가가 이긴다. 현재 20세기에는 공리가 비록 크게 밝아졌으나 평화적 외교(樽俎)보다는 전쟁을 선택하고 외교는 여전히 군사력(鐵血)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저 강권 국가들의 상식과 정의에 어긋난 행동은 세계를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무대로 만들었다. 하물며 우방 국가들 가운데 우리나라에 대하여 아직도 관망하는 국가도 있는데, 관계가 밀접한 중화민국도 위기에 있다는 것도 모르면서 편안히 잘 지내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앞가림하기도 어려우면서도 중국까지 걱정하여야 하는데, 힘든 속사정은 당사자가 아니면 참고 들을 수 없다.
여기에 더하여 일본은 우리 대한에 대하여 완전히 무력 압제를 제일의 수단으로 삼고 있으나 우리 대한 국민이 받는 고통의 진상을 세계는 거의 알지 못한다. 1919년 3월 독립혁명에서 우리 국민은 무수한 사람들이 목숨을 던졌으나 일본의 선전기관은 겨우 작은 일부분만 알리고 엄중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진상과 선전이 상당히 동떨어졌기에 결국 유럽과 미국 등 국가들은 우리가 민족을 독립시키겠다는 참된 정신을 자세히 알 길이 없다. 이것(우방 국가의 관망, 구미 국가들의 무지)은 우리가 무한히 아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민족 독립의 참된 정신을 알리는 방법을 아래와 같이 서술한다.
(가) 유럽과 미국 등 국가들에 알린다.
(나) 중국과 한국의 제휴를 주장한다.
유럽과 미국 등 국가는 일본의 야심주의에 대하여 일찍부터 예의주시하고 있으며 태평양과 대서양의 격리에도 불구하고 극동아시아의 형세에 관하여 여러 면에서 서로 대립하고 있다. 우리 삼한의 독립혁명에 대하여 깊고 두텁게 동정하는 사람들도 많으나 아직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우의가 손발처럼 가까운 중화민국에서 국민은 현재 깊은 잠에서 서서히 깨어나고 있으나 집정자들은 옛날처럼 깊은 잠에서 꿈을 꾸고 있다. 서로 관계가 밀접한 삼한 민족에 대하여 불구경하듯이 무관심하다.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 최선을 다하려는 몇 가지가 있다. (알리려는 상대방) 첫째, (유럽과 미국 등 국가에는) 마땅히 열성적인 글로 우방에 알려야 한다. 둘째, (중화민국의 국민과 집정자에게는) 마땅히 공동의 적(일본)을 물리치겠다는 의지와 기개를 갖고 중국과 한국의 제휴를 실행하여야 한다. (알리는 방법) 첫째는 올바른 진리에 호소하고 둘째는 아울러 감정에 호소하여 서로 합심하고 서로 돕도록 한다. 우리가 중국과 한국 및 유럽과 미국에 바라는 것은 바로 남을 구제하는 것이 자신을 구제하는 것이며 또한 세계를 구제하는 것은 각자 자신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넷째, 세계문화를 들여온다.
샘 헤일링(?)씨는 “문화는 세계를 진보시키는 어머니다.” “문화는 인류의 영혼(靈性, the spirituality of mankind)을 열어주고 사회의 행복을 증진한다.”고 말하였다. 우리 대한은 역사에서 문명을 지켜왔으나 낡은 제도에 얽매이거나 시대 상황에 어두웠다. 그런데 세계의 새로운 조류는 마치 밝은 해가 동쪽에서 떠올라서 숲속의 어두운 그늘까지도 비추고 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날 살아가려면 문화를 수입하여 문명을 발전시키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응당한 책임이다. 러시아의 부흥은 문화 보급을 알았기 때문이며 프랑스가 전쟁에 이긴 것은 문화 선전에 공로를 돌려야 한다. 우리 대한은 국가의 영혼을 회복하겠다고 생각하면 (단군) 개국을 기념하는 것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다섯째, 광복의 정세를 선전한다.
우리가 목숨을 내놓고 고토를 광복하고 있는데, (광복을 위하여) 돌아가신 열사와 지사들께서 무한한 슬픔과 고통을 감내하셨다. 그런데 일본은 “지방자치”와 “교육평등” 같은 거짓말로 우리 국민을 우롱하고 우리의 우방국들도 속이고 있다. 저들의 선전이 전파되면서 우리가 목숨을 내놓아 얻은 독립의 정세가 오히려 덮여가고 있다는 것이 정말로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다. (1919년 3월 1일 독립혁명) 행동은 문명적이었고 행사는 광명정대하였다. 이것은 한국에 머무는 외국인들이 모두 보았다. 비록 일본인들이 아무리 흉악하고 포악하더라도 우리의 독립혁명을 막을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상세한 소식을 마땅히 신속한 방법으로 우방국에 알리고 세계가 모두 공리(公理)가 사라지지 않았고 국가도 사라지지 않았고 인도주의도 사라지지 않았고 민족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도록 하여야 한다. 또 일본의 잔혹한 폭력 진상을 남김없이 폭로하여야 한다.
위에서 말한 내용은 모두 본 주보(震壇 週報)의 근본 취지이며 동시에 우리 국민이 앞으로 맡아야 할 책임이다.
우리는 우방국들에 “‘동아시아 평화’ ‘무력주의 제거’ ‘인도주의’ ‘정의’ ‘박애’ ‘평등’ 입으로 말하는 문명은 우리가 이미 들을 만큼 들었으나 실행에 옮길지 믿음은 우방국들의 최후 결심을 기다린다. 중국과 미국 두 국가에 바라는 것은 첫째 인도주의 관철과 둘째 상호협력(休戚相關)이다. 강권국가를 제거하고 약소국가를 돕겠다는 의지를 갖고 동아시아 영구평화를 보장하겠다면 그 혜택은 우리 대한뿐만 아니라 동아시아가 받고 세계가 받는다.”고 말한다.
또 우리는 가장 큰 목소리로 우리 국민에게 “(송나라 范仲庵) ‘세상의 흥망은 일반인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였다. 더구나 독립은 우리의 생존문제이다! 이렇게 커다란 재난을 극복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는 쉽게 사라지기에 공리를 크게 주장하여 다행히 우방의 도움을 얻는 것이 우리의 굳은 소원이다. 도움을 얻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한마음으로 협력하여 세계평화를 위하여 싸우고 인도주의를 위하여 싸워야 한다. ‘해와 같다는 너(일본)는 언제야 망하는가? 내가 죽더라도 너를 죽이겠다!’(『書』、「湯誓」︰“時日曷喪?予及汝皆亡!”)고 결심하고 싸울 것이다. 우리의 행동은 광명정대하며 결심은 철석과 같다. 저들(일본)이 속이더라도 우리는 정성으로 상대하고, 저들이 폭력을 쓰더라도 우리는 인(仁)으로 상대한다. 저들의 군사력이 우월하더라도 우리는 맨몸(肝腦)으로 상대하고, 저들의 무기가 좋더라도 우리는 죽음(목의 피)으로 상대할 것이다. (결국에는 저들이 겁을 먹어) 우리 강산은 우리를 지키는 요새처럼 보일 것이고 초목들은 우리의 병사처럼 보일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독립혁명을 지속하면 저들은 스스로 멸망한다.”고 말한다.
만세를 이어온 국가를 지켜서 무너뜨리지 말아야 합니다! 국민이여! 국민이여! 독립혁명의 햇볕이 정말로 뜨거운데 우리 함께 들고일어나 동참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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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震壇(週報)』,「本報創刊辭」(二),申睨觀(申圭植)︰
歐戰滔,和議熾,巴爾幹問題之亂源,至此遂告一大結果。然世界潮流,日詭月譎,共產主義,滋蔓東歐,勞動問題,喧激萬國。木展兒郎之亞細亞主義,更風涌雲沸、蓬蓬勃勃而不可渴。此種野心主義,就世界大勢言之,已蹈強權自殺之覆轍,即就永久平和言之,更不容此武力惡腕之存在。吾人生長亞細亞,食踐亞細亞,乃竟有此自由宰割之悲慘劇,此吾人之所以痛哭流涕、長太息者也。
夫吾韓乃獨立不羈之民族,剛毅果敢,早具百折不回之特質。即令東方德意志,任意劫持,然韓人之猛進如故,奮鬥如故。按諸民族生存原則,吾韓亦無受人支配之餘地,且自平和實現以降,民族自決主義,乃成爲天演上不可遁逃之原理,吾韓人又豈能違反生存原則,大背世界公理!況吾韓地位,對於世界,猶巴爾幹問題也。
吾韓如爲日本所□(武)斷,則遠東問題,益滋紛擾,非獨中華民族,瀕於危亡,即列強機會均等之局勢亦被剝喪而無餘。試以現狀論,中國北部之礦山權、路政權,凡列強所垂涎者,均爲日人囊括以去。蓋歐戰方酣之際,遠東問題,勢難兼顧,日本之得以乘機謀□奪者,實亦列強所痛心疾首,而無可如何者也。今武力主義,既已打破,故欲求世界永久平和則自維持東亞永久平和始,欲維持東亞永久平和,則自掃除強權主義始,欲掃除強權主義,則須自吾韓獨立始。
蓋日本以席捲囊括之野心,遠交近攻,久已獨占亞細亞之霸權。然使吾韓獨立,阻其侵略,則不特對於世界,無由發展其野心,即對中國,亦得一強固之保障也。況歐戰終結而後日本受□兵自焚之教訓,然海軍之擴張如故,西北利亞之增兵如故。推其意,殆非以東亞爲一大戰場不止。然則吾韓之獨立問題,非獨爲打破日本武力政策之問題,且爲東亞永久平和、世界永久平和一大問題。
今試回溯吾韓被併之歷史,日本之殘暴背約,固無論矣。即如中華與英美,均與吾韓聯玉帛之歡,信誓旦旦,載諸盟約。乃日本甘冒世界之大不韙,實行劫奪之合併主義,而中華英美,皆噤若寒蟬,不能爲公理之主持,有識者方隱痛之。
吾人生丁陽九,滌誓(滌雪)國恥,薪膽自甘,菽水非苦,十年慘淡,矢志扉(靡)他。迨客年三月,宣布獨立,世界人士,始有吾韓精神不滅之觀念。乃日本不稍歛戢,仍以暴力相殘,人道主義,掃地無餘。猶幸吾民未死,再接再厲,前仆後繼,義無追顧,爲民族而戰,爲祖國而戰,爲正義而戰,爲公理而戰,雖至最後一人,亦無生降之一日。此吾韓革命之痛史,然亦世界注目之所由起也。逮勢已燎原,友邦人士,益形震動,或明與維持,或暗助贊助,其深切之同情,足使吾人感激而益加自奮者也。
本雜誌應時勢而產生,於發行之初,略揭吾人今後之責任。
(一)發揮民族自決
民族自決一語,倡自威爾遜(Thomas Woodrow Wilson,1856-1924),而世界和之。蓋防遏野心國家之侵略,莫過於此,即保障世界永久平和,亦莫過於此。故那赫爾(?,Nehru)氏有言曰︰「世界之平和,須由民族之區別而自建爲國家始,且須令已失國之獨立民族,而恢復其固有國家始。」又苦魯氏有言曰︰「世界之亂源,即民族主義之未劃分也。」可知國家之生命,係民族之存亡,民族存,則國雖滅而未滅,民族亡,則國雖存而已亡。個中關鍵,不係於強權者壓制,而關於民族之能否自決耳。
登巴米高原(Pamir Plat)而左右顧,芒芒塵陸,我人誰是英雄?俄羅斯民族,僅知自決,故能灰復其母國,台灣民族,不知自決,故仍託命於他邦。此(比)利時民族,能知自決,故克光復其舊制,匈牙利民族,亦知自決,故完全造成其獨立。此中自決而見諸施行者,即過去世紀大亂之禍根,而今日始行芟夷之。其亟思自決而正能見諸實行,或已自決而仍爲强權所壓制者,則爲未來世紀大亂之禍源,而吾人今日亟宜芟夷之也。
蓋平等、自由、博愛三大主義下之國家,決不容有違反民族公意之惡腕。故以民族爲單位,而區劃爲國家界限,則世界永久之安寧,胥於是手賴。雖大同主義(cosmopolitanism),首以打破國家偶像爲前提,然過渡時期,要以民族自決,爲實行自治之張本。此吾人之所以兢兢於此者也。
(一)主張獨立平等
吾韓具五千年之偉大文明,挾獨立國家之深厚根砥,此殆爲世人所公認者也。始祖檀君,首以尊崇民治相號召,故人民薰沐德化,巍然峙(立)獨立之精神,而爲強權所不能摧殘者。即如中葉時代,史稱入貢中華,然僅表示王室禮典,並非三韓民族公意也,且國內完全獨立,不受干涉。民族之不羈特質,于茲益信。降至近代,于日本、契丹、蒙古諸役,均能掃除妖氣,不撓不屈。歷史上之光榮,吾人當能記憶之。迨淪於異族,而民氣之激昂,並未固(因)強權而有降替。美國博德氏有言曰︰「三韓民族,有獨立不羈性。」此蓋友邦人士之觀察,而亦吾民所自信者也。
況今日自由平等,已成爲國家原理!吾人隨世界潮流而產出,不可不爲國家獨立上之一種國民,尤不可不爲脫離羈絆之一種國民,更不可不爲根本覺悟上自爭生存之一種國民。故國家平等問題,當與完全獨立問題,同時解決也。蓋不獨立之平等,則人民仍屈於他人之下,不平等之獨立,則國際地位,仍在水平線以下。故一方面對於日本,完全獨立,一方面對於世界,要求平等。此爲國家計,不得不以數萬斛之頸血,而購求此代價也。
(一)聯絡國際親誼
強與強遇,則公理勝,強與弱遇,則強權勝。現世紀之公理,雖已大昌明,然樽俎猶寓干戈,外交仍持鐵血。彼強權者之倒行逆施,猶足使世界成悲慘之荊棘舞台。矧友邦之於吾國,尙有存觀望者。關係最密切之中華,燕巢危幕,嬉然自娛。吾人不暇自哀而代他人哀,此中苦況,殆非局外人所忍聞也。
加以日本對付吾韓,完全以武力壓制爲主腦,故吾韓民之苦痛,世界竟鮮知眞相者。即若此次獨立,吾民曾擲無量數之頭臚,而日本傳宣機關,僅言小小部分,且未有認爲嚴重者。情形隔閡遂蔓使歐美諸國,無由洞悉獨立民族之眞精神。此吾人不得不生無限之感恨也。今敢述其方法如左。
(甲)聲訴歐美諸邦
(乙)主張中韓提攜
歐美諸國,對於日本之野心主義,目已(目下?)萬目睽睽,無如地隔重洋,遠東形勢,諸多桿格(扞格)。三韓革命,固多具深厚之同情,而尙未深入腦海者,亦不乏人。若夫誼同手足之中華,在國民今日正酣睡初醒,而執政者,則大夢猶昔。對於唇齒相依之三韓民族,反如隔岸觀火,不關痛癢。
故吾人今後之盡力,第一、宜以熱忱的文字,告訴於友邦,第二、宜以同仇之志慨,實行中韓國民的提攜。一則告訴於眞理,一則兼訴於感情,和衷共濟。吾人之所望於中韓及歐美者,正冀救人以自救,且以救世界,非僅自己問題而已也。
(一)灌輸世界文化
善夫惠靈氏有言曰︰「文化者,世界進步之母也。」又曰︰「文化者,啟牖人類之靈性,而增進社會之幸福者也。」吾韓已擁有歷史上之文明,然削足就履,或不切夫(于)時勢,且世界新潮,正如旭日東升,直透森林之黑暗地域。
故吾人欲生存於今日,輸入文化以促進文明,正吾人應負之責任。加以俄國之復興,其知於文化之普及,法國之戰勝,歸功於文化之傳宣。吾韓如猶思恢復其國魂,則此其開國紀念嘺矢也。
(一)宣傳光復情勢
吾人捨生命以光復故土,此在先烈志士,實有無限之悲痛者。乃日本,欲假「地方自治」並「教育平等」諸邪說愚弄我邦人,欺我友國。風聲所播,幾使吾人頭臚交換之獨立形勢,爲所掩蓋,言之可爲一痛。舉動之文明,行事之磊落,此爲旅韓外人所共見。雖以日人之凶頑,亦不能遏止者。
故一切詳情,宜用迅速方法,傳宣友邦,俾世界咸知公理不滅,國家亦不滅,人道不滅,民族亦不滅,而日人殘暴之眞相,亦可宜洩而無遺矣。
以上各件,即本報之元素,而亦吾民今後之責任。
吾今敢正告訴友邦曰︰「東亞和平」、「爲除武力」、「人道」、「正義」、「博愛」、「平等」,口頭上之文明,吾人既已飫聞之矣,而實行上之徵信,尙望諸友邦之最後決心。所尤希望者,中美兩國,一則以主持人道,一則休戚相關。倘本其鋤強扶弱之志願,而保障東亞永久法之和平,則不獨吾韓拜其賜,東亞拜其賜,世界亦拜其賜。
吾又最大聲告我邦人曰︰天下興亡,匹夫有責,況獨立爲吾人生存問題!萬劫關頭,稍縱即逝,倘能公理大張,幸獲大邦之贊助,吾人固所願也。即不然,吾人亦當同心協力,爲世界平和而戰,爲人道主義而戰。時日曷喪?與汝偕亡。行動光明,肝腸鐵石。彼以其詐,我以其誠;彼以其暴,我以其仁。彼之兵雖精,我以肝腦塗之;彼之器雖利,我以頸血濺之。河山即我關塞,草木皆兵戎。我持以久,彼終自敗。
萬世一系帝王,能永保勿墜乎!國民乎!國民乎!驕陽正烈,曷興乎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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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
食踐︰食毛踐土︰
『左傳』,昭公七年:“封略之內,何非君土?食土之毛,誰非君臣?”
吳趼人,『痛史』,第二十一回︰“食毛踐土偏知感,地厚天高亂頌揚。”
吳趼人(1867-1910),原名寶震,又名沃堯。淸代譴責小說家,字小允,又字繭人,後改趼人。廣東南海(佛山)人,號沃堯,出生於北京,因居佛山鎮,在佛山度過靑少年時代,自稱我佛山人。以此爲筆名,寫了大量的小說、寓言和雜文,名聲大噪,成爲近代"譴責小說"的巨子。淸末(近代)小說家。活躍在淸代文學時期,代表作品:『二十年目睹之怪現狀』、『痛史』、『九命奇冤』等。
陽九:
『漢書、食貨志上』:“予遭陽九之阸,百六之會,枯旱霜蝗,饑饉薦臻。”
1、其說有二:(1)以四千六百一十七歲爲一元,初入元一百零六歲,內有旱災九年,謂之“陽九”。其餘尙有陰九、陰七、陽七、陰五、陽五、陰三、陽三等,陽爲旱災,陰爲水災。從入元至陽三,常歲四千五百六十年,災歲五十七年,共爲四千六百一十七年,爲一元之氣終。舉其平均數則每八十年有一災年。『漢書·律曆志上』:“『易』九戹曰:初入元,百六,陽九;次三百七十四,陰九;次四百八十,陽九;次七百二十,陰七;次七百二十,陽七;次六百,陰五;次六百,陽五;次四百八十,陰三;次四百八十,陽三。凡四千六百一十七歲,與一元終。經歲四千五百六十,災歲五十七。” 宋 洪邁 『容齋續筆·百六陽九』:“史傳稱百六陽九爲厄會,以曆志考之,其名有八。初入元百六曰陽九,次曰陰九;又有陰七、陽七、陰五、陽五、陰三、陽三,皆謂之災歲。大率經歲四千五百六十,而災歲五十七。以數計之,每及八十歲,則值其一。今人但知陽九之厄,云經歲者,常歲也。”
(2)太乙數。以四百五十六年爲一“陽九”,以二百八十八年爲一“百六”。宋 張世南 『遊宦紀聞』卷七:“此外有所謂太乙數,能知運祚災祥,刀兵水火,陰晴風雨……蓋太乙數中,專考陽九,百六之數。以四百五十六年爲一陽九,二百八十八年爲一百六。陽九,奇數也,爲陽數之窮。百六,偶數也,爲陰數之窮。大抵歲運值之,終有厄會。 洪文敏公『五筆』中,載陽九、百六之說,與此不同。”
倒行逆施:
『史記、伍子胥列傳』:“吾日暮途遠,吾故倒行而逆施之。”
燕巢危幕:
『左傳』,襄公二十九年:“夫子之在此也,猶燕之巢於幕上。”
吾人不暇自哀而代他人哀:
杜牧,「阿房宮賦」:“嗚呼!滅六國者六國也,非秦也;族秦者秦也,非天下也。嗟乎!使六國各愛其人,則足以拒秦;使秦復愛六國之人,則遞三世可至萬世而爲君,誰得而族滅也?秦人不暇自哀,而後人哀之;後人哀之而不鑒之,亦使後人而復哀後人也。”
稍縱即逝:
宋、蘇軾,「文與可畫筼簹谷偃竹記」:“振筆直遂,以追其所見,如兔起鶻落,少縱則逝矣。”
河山即我關塞,草木皆兵戎︰
『史記』、「項羽本紀」︰“人或說項王曰:‘關中阻山河四塞,地肥饒,可都以霸。’”
『晉書』、「苻堅載記」︰“堅(秦王苻堅)與(陽平公)苻融登城(壽陽城)而望王師,見部陣齊整,將士精銳,又北望八公山上草木,皆類人形,顧謂融曰:‘此亦勍敵也。何謂少乎!’憮然有懼色。”
曷興乎來,盍歸乎來︰
『孟子』、「離婁章句上」︰孟子曰:“伯夷辟紂,居北海之濱,聞文王作,興曰:‘盍歸乎來!吾聞西伯善養老者。’太公辟紂,居東海之濱,聞文王作,興曰:‘盍歸乎來!吾聞西伯善養老者。’二老者,天下之大老也,而歸之,是天下之父歸之也。天下之父歸之,其子焉往?諸侯有行文王之政者,七年之內,必爲政於天下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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