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죽음
삶을 의미 있게 살았다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후회를 덜 할 것이다.
삶을 살아온 방식이 곧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이다.
평화롭게 살다가 고요하게 죽는 방법이 있다고 하면 누구나 솔깃할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고통으로 받아들인다. 누구나 피하고 싶어 하지만 아무도 피할 수 없다. 달갑지 않은 죽음이지만 두려움 없이 마주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마음을 고요하고 편안하게 유지하도록 만드는, 요인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삶을 살아온 방식이다. 삶을 의미 있게 살았다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후회를 덜 할 것이다. 살아온 방식이 죽음을 맞이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
일상생활을 긍정적으로, 또 의미 있게 살았다면 비록 원하지 않더라도 죽음이 다가올 때 기꺼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것이다.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일상을 의미 있게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과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목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우리 행복은 많은 요소에 의존하고 있다. 현실과 조화를 이루며 산다면 우리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혼자 살 수가 없다. 사는 데 의식주가 필요한데 모두 다른 사람의 수고를 통해 우리에게 제공된다. 우리의 기본적인 행복은 남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 부합되게 사는 것이 삶을 의미 있게 사는 것이다. 우리의 평화와 행복이 다른 사람에게서 영향을 받기에 타인을 보살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이 혼자서 모든 것을 달성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주요 관심사가 개인의 행복이라 해도 우리는 더 넓은 시각을 지녀야 한다. 더 넓은 시각을 지니면 다른 사람을 걱정하는 마음과 헌신하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날 것이다. 이런 마음은 신성하고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이 타인에게 의존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지극히 현실적인 관점일 뿐 아니라 세속적인 윤리의 기본이기도 하다.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타인의 권리나 견해를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비폭력적인 접근은 대화와 이해를 포함하고 있기에 인간적인 해결 방식이다. 인간의 대화는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려고 할 때 가능하다. 이것이 일상생활을 의미 있게 만드는 방법이다.
나는 평소에 불교의 본질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남들을 도와야 한다. 적어도 남들을 도울 수 없다면 최소한 해치지는 말아야 한다.” 이것이 부처님이 우리에게 준 가르침의 본질이다. 이 관점은 세속적인 측면에서도 적절하다. 어떤 사람이 자비로운 마음으로 남들과 관계를 맺는다면 그는 틀림없이 더 많이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이다. 당신이 악행을 저지른 결과로 일시적인 이익을 얻었다면 마음 깊은 곳에서 항상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자비심 즉 자비로운 마음가짐이란 동정심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의 경쟁 사회에서는 가끔 강경한 입장을 취해야 할 때가 있는데, 강경하면서도 자비로울 수 있다.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라면 후회 없이 죽음을 맞이하고 행복하게 삶을 마무리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①죽음은 삶의 일부
억겁 단위로 측정되는 부처님 법을 따르고, 몇 생애에 걸쳐 수행을 하겠다는 마음을 일으키면 죽음을 새롭게 바라볼 것이다. 윤회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마치 옷을 갈아입는 것과 비슷하다. 오래 입은 옷이 낡으면 우리는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 이런 관점은 죽음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영향을 미친다. 죽음이 삶의 일부라는 인식이 명확해진다. 거친 의식은 뇌에 의존하기 때문에 뇌가 작용하는 동안에만 작용한다. 거친 의식은 뇌가 정지하는 즉시 작용을 멈춘다. 뇌라는 장치가 있어야 거친 의식은 생겨난다. 그런데 마음의 실질적인 원인인 미세 의식은 다르다. 이 마음은 시작이 없다.
우리가 죽어가고 있을 때, 거친 의식이 해체되는 순간까지는 다른 사람이 옆에서 긍정적인 마음 상태를 지속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그러나 미세한 의식 상태에 들어가면 자신이 쌓은 업만이 자신을 도울 수 있다. 그 시점에 이르면 누구도 우리에게 도덕적인 수행을 상기시킬 수 없다. 그래서 젊었을 때부터 죽음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의식의 해체되는 과정에 익숙해지는 것이 중요하다. 명상을 통해서 마음이 해체되는 과정을 미리 연습해 두면 실제 죽는 과정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대신에 즐겁게 맞이할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죽음을 준비해 왔기 때문에 두렵지 않다고 느낄 수도 있다.
명상을 통해 깊은 단계의 미묘한 의식을 경험하고 나면 실제로 죽음을 조절할 수 있다. 물론 상급 단계 수행에 도달했을 때만 가능하다. 밀교 수행에서는 의식 이동 같은 상급 수행이 있기는 하지만 죽을 때 가장 중요한 수행은 보리심이라고 나는 믿는다. 보리심이 가장 강력하다. 나는 일상적 수행을 할 때 여러 밀교 수행과 관련시켜 죽음의 과정을 하루에 일고여덟 번씩 명상을 하지만 내가 죽을 때 보리심을 기억하기가 가장 쉬울 것이라고 여전히 믿고 있다. 보리심은 실제로 내가 가장 친밀하게 느끼는 마음이다. 물론 우리가 죽음을 명상함으로써 죽음을 준비하기 때문에 더 이상 죽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나는 아직 죽음과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지만 실제로 죽음과 마주하면 내가 어떻게 대처할지가 가끔은 궁금하다. 내가 더 오래 산다면 그만큼 더 죽음을 잘 맞이할 것이다. 삶에 대한 나의 의지는 죽음을 맞이하는 나의 설렘과 동일하다.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불교 수행의 일부이다. 여기에는 다양한 측면이 있다. 먼저 지금 이 삶과 이 삶이 갖고 있는 매력에서 초연해지기 위해 죽음을 끊임없이 명상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죽음의 가정을 미리 연습하는 것이다. 죽을 때 경험하는 다양한 층위의 마음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거친 의식이 멈춰질 때 미세 의식이 드러난다. 죽음의 과정을 명상하는 것은 이 미세 의식을 더 깊이 경험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중요하다.
죽음은 이 몸이 어떤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몸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때 우리는 죽어서 새로운 몸을 갖는다. 죽고 나면 더 이상 이 몸은 존재하지 않지만, 이 몸과 마음의 결합체였던 기본 존재, 즉 자아는 죽은 다음에도 지속된다. 미세한 몸은 남아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 존재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이 존재는 부처의 경지에 이를 때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 세상에 살면서 선행을 베풀었다면 그나마 다음 생이라도 보장받을 것이나 그것이 아니라면 악도에 태어날 가능성이 높다. 나와 티베트 사람들은 현생에 비록 조국을 잃고 망명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인간 세계에 살고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나 지지를 요청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은 다음에는 전혀 새로운 상황과 마주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일들은 대부분 도움이 안 된다. 우리가 적절한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더 불행해질 수 있다. 죽음을 준비하는 방법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자비로운 마음가짐을 진지하게 기르고, 선행을 하고, 다른 중생에게 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마음을 제어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다음 생을 준비하는 데 있어 더 효과적인 방법이다. 이렇게 하다 보면 마침내 우리는 마음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이것이 명상을 하는 주된 목적이다.
죽음 후에 일어나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죽음을 그저 삶의 일부로 여기는 것이 나을 것이다. 조만간 우리 모두는 죽음을 맞아야 한다. 최소한 이 사실에 대해서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죽음을 마주했을 때 두 가지 선택이 가능하다. 하나는 죽음을 외면하는 것이다. 죽음을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면 최소한 마음은 고요한데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선택은 그리 바람직하진 않다. 조만간 우리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또 다른 선택은 문제를 직시하고 죽음을 철저하게 분석하는 것이다. 실제로 전쟁에 나가 싸울 때보다 싸우기 전이 더 두려웠다고
말하는 군인들을 만난 적이 있다. 우리가 죽음을 거듭 생각한다면 죽음의 개념에 익숙해진다. 죽음이 실제로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 덜 당황하고, 충격을 덜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을 말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야 한다. 경전에서는 윤회 세계를 가을 하늘에 떠 있는 구름에 비유한다. 일시적이라는 것이다. 연극을 할 때 배우들이 무대에 등장하고 퇴장하는 것을 지켜보면 인간의 탄생과 죽음을 이해할 수 있다. 배우들이 처음에 어떤 의상을 입고 나왔다가 다음 장면에서는 다른 의상으로 갈아입고 나오기도 한다. 짧은 공연 시간 동안에 그들의 의상이 여러 번 바뀐다. 우리 존재도 그와 같다. 인간의 생명이 쇠퇴하는 것은 하늘에 번개가 치는 것이나 가파른 비탈에 바위가 굴러가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물은 항상 아래로 흐른다. 물이 위로 흐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생명은 다하고 만다. 수행의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들이라면 다음 생을 염두에 두겠지만 우리 대부분은 현생의 목적에만 집중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지에 휘둘리고 윤회 속에 갇혀 있다. 인생을 낭비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죽음을 향해 나아 가고 있다. 그런데도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내 편을 만드는 일에 생명을 소비한다. 죽는 순간, 우리는 모든 것을 두고 떠나야 한다. 심지어 동행할 가족이나 친구도 없이 혼자 떠나야 한다. 혼자 떠나는 이 여행에서 ‘나’를 도와줄 단 한 가지는 살아생전 수행을 통해 마음에 쌓아 둔 긍정적인 생각들 뿐이다. 우리가 인생을 낭비하는 것을 멈추고 수행을 하려면 모든 것은 늘 변한다는 무상,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 몸은 본래 일시적이고 흩어지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명상해야 한다.
수행은 단지 현생만 이롭자고 하는 것은 아니며 다음 생의 행복과 평화를 기약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수행을 할 때 조심해야 하는 한 가지는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이다. 우리는 마치 한 곳에 정차하기로 작정한 사람들 같다. 그런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세상사에 관여하고, 재산을 모으고, 건물을 짓고, 농사를 짓는다. 반면에 죽음 이후 다음 생에 관심이 더 많은 사람은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과 같다. 여행자는 목적지에 잘 도착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다. 수행자는 죽음을 명상했기 때문에 현상의 일들 –명성ㆍ명예ㆍ재산ㆍ지위- 에 덜 집착하게 된다. 죽음을 명상하는 사람은 세상살이에 필요한 일을 하는 동안에도 다음 생에 평화와 기쁨을 가져올 수 있는 힘을 키우기 위해 시간을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