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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己 詩에 대한 성찰과 방향>
비수를 품은 채 세상의 어둠을 투시하지 않겠다
- 김정호(시인, 수필가, 평론가)
1. 들어가기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필자는 일괄적으로 ‘삶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따뜻한 어머니의 약손’과 같다고 말한다. 그래서 시를 쓰고 시집을 발간하는 것은 일종의 축복과도 같다. 문제는 시집을 발간할 때마다 받아본 평론을 보면 마치 주례사나 발간 축사와 같이 우호적이고 호평 일색의 평론이 대부분이다. 작가와 평론가의 인간관계가 돈독한 경우 더욱 그렇다. 평론은 원래 작가의 글과 영원한 술래잡기와도 같아, 작가는 평론가가 자신의 글에 문학적 설명이나 비평하는 것에 거부하려는 성향이 있는 반면에 평론은 작가의 글을 붙잡아 해석하고, 고착하려고 한다. 또 글을 새롭게 정의하여 논리와 이성, 비평적 고찰을 통해 냉정하게 평가하여 독자들에게 감정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일이 목적이다.
그래서 이번 필자의 열한 번째 시집『낙타경』의 발간을 앞두고 평론에 대해 적잖이 고민한 것도 사실이다. 필자도 다른 시인`의 시집에 대한 평론이나 해설을 쓰는 일을 하고 있어, 필자의 시집에 스스로 해설이나 꼭지 글을 쓰는 일이 어려운 일은 아니나, 자칫 자기 글의 합리화나 자신이 쓴 작품이 가져올 언어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위험성을 내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글이 정직하고 진심이었는지, 평론을 통해 과대 포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었는지 평가하는 것도 한계에 이를 수 있으며, 자칫 감정을 자기의 작품의 방향으로 기울어지도록 하여 독자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번 필자 시집에 스스로 평론을 한 것은 기회를 통해 필자의 시와 문학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성찰을 통해 올바른 시적 방향을 제시하고 싶은 마음에 조심스럽지만, 이번 시집에 평론이라고 보다는 시의 느낌을 적어 보기로 했다.
2. 본문
1). 시의 행간 들여다보기
열한 번째 시집 「낙타경」은 제1부 <풍경 달다>, 제2부 <눈 부신 햇살로 오세요>, 제3부 <가짜 뉴스>. 제4부 <봄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온 꽃상여> 전체 4부 총 72편으로, 시집 내용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보았다.
(가). 거대한 벽 앞에 서다, 그래도 벽을 허물고 앞으로 나가보라는 속삭임
(나). 풍자와 모순이 불일치한 세상에서 진실 찾기란 과연 무엇인가?
(다). 자연(꽃)을 통해 파도와 같은 내면의 힘을 받아 세상과 소통을 시도하다.
(라). 인간성 회복을 위한 서정시로의 회귀. 시편이 이번 시집의 기본 틀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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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덤>, <백수 연습>, <손금 보는 여자> <결빙기>, <낙타경>, <포커페이스>, <오체투지>, <구조조정>
(중략)
덤을 생각하니 /아직 가슴 속에 선명한 아린 기억들/차가 완파되는 세 번의 교통사고/긴급호송마저 거부당한 의료사고로/저승 문턱 무늬마저 뚜렷한/젊어서 아팠던 세월/그런 내가 오늘을 사는 삶은 덤이다/내일은 덤에 덤을 더해 사는 거다//
(중략)
-<덤> 일부
집 근처 학교 앞을 지나다/한 여자의 손에 이끌려 천막 안으로 들어갔네/손금을 본다는 그 여자/왼손바닥을 해바라기꽃처럼 활짝 펴보라 하네//(중략) /이것으로 지난 삶을 보상받은 듯 위안이 될까마는/집으로 가는 발걸음/아무런 중력의 저항 없이/구름 위를 걷고 있다//
<손금 보는 여자> 일부
시인은 일련의 삶 속에서 모든 촉수는 항상 예민하게 열려 있어야 하며, 사물을 보는 시선 또한 언제나 촉촉하게 젖어 있고 넘치는 감정은 일상생활과 밀접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감각과 촉수는 현실적인 삶 속에 뿌리 항상 박혀 있어야 한다. 시는 곧 시인의 삶의 궤적과 같이하기 때문에 일상의 모든 것이 시적 소재가 된다. 그럼, 인간의 삶과 죽음의 경계는 무엇일까? 사람이 살다 보면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할 삶이 갑작스러운 사건, 사고로 파괴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필자는 차가 완파되는 세 번의 큰 교통사고와 의료사고, 약물 사고로 다섯 차례에 걸쳐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경험이 있다. 실제로 사람은 누구나 이승에서 저승으로 넘어가는 마지막 순간, 즉 죽음 직전에는 본인이 살아온 생애 중 가장 잘못하고 후회스러운 일이 마치 한편의 영상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런 예는 TV 드라마 속에서 생을 마감하기 전 누구나 눈물 흘리는 장면을 보았을 것이다. 이는 인간은 죽음 앞에서 삶의 유한성을 깨닫고, 살아온 매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이러기 때문에 사람들과 관계를 긴밀하고 후회하지 않도록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해 산다. 따라서 필자는 이런 몇 번의 경험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사는 동안 늘 올바르고 맑은 마음을 견지하며 살려고 노력했다.
물론 사람마다 모든 삶이 기쁘고 좋은 일로 가득 채워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보통 일반적인 사람들의 삶이 절망의 연속이 아닌 경우가 어디 한두 번뿐이겠는가? 또 누구의 사연인들 슬프거나 아프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따지고 보면 살아있는 것치고 허무하지 않은 삶이 없다. 그 속에서 그래도 열심히 살아보라는 속삭이는 목소리를 듣고 힘을 내고 용기를 얻어 자아를 찾아간다. <덤>과 <손금>은 이런 삶의 경험 연장선에서 쓴 시다. 그 때문인지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해 죽음에 대해서는 비교적 너그러운 편이고, 현재의 삶은 덤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여 항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물론 이러한 시적 표현이 필자의 모든 삶을 대변할 수는 없지만, 40대 이전 삶의 진지한 표정은 아픔과 상처를 경험한 시가 많은 탓인지 일부 독자들은 시가 아프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필자의 시 대부분은 이런 극적인 감정을 끌어와 쓴 시라 감정이 많이 이입된 탓이 원인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문학의 본질은 다른 가식적인 예술과는 달리 일종의 반성적 예술이다. 죄의식만큼이나 숨 막히게 조여오는 고통에서 비롯된다, 특히 시는 더 말해 무엇하랴.
헐떡이는 태양을 품은 채
스스로 채찍을 후려치며 사막을 걷는다
제 의지하고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이름표를 단 삶의 무게를 지고
모래에 발굽이 박혀 휘청거리는 걸음
가야 할 천 리 길이 위태롭다
(중략)
그래, 여기서 주저앉으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아
행장을 단단히 고쳐 매고
핏빛 성근 눈 부릅뜨며 길 찾아 나선다
결코,
뒤돌아보는 일은 없다
-<낙타경> 일부
삶이란 한결같이 변화무쌍하고 불확실성을 가지고 있다.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라서,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보편적인 가치는 통상적인 생활 속에서 이루어진다. 사람마다 자기 안의 이타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이런 마음은 자기 안의 다른 마음과도 불일치하면서 늘 대립한다. 필자 또한, 평생 이타적인 열등감을 가지고 살았다. 하지만 그런 삶의 결과가 어떻든 공직 생활 39년 그리고 퇴직 후 자본주의 집사로 몇 년 등 총 45년의 직장 생활을 하면서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남보다 두 시간 정도 조기 출근했다. 이러한 습관이 필자의 문학이나 삶에 유의미한 변화를 끌어냈으며, 문학의 원천은 대부분 여기서 비롯되었다 해도 무방하다.
지금과 같은 삶도 잠시 과거가 되었다가 다시 현재와 미래로 되풀이되기를 반복하다 한 생을 마감하는 것이 우리의 생이다. 이번 시집의 표제시 <낙타경>은 낙타를 통해 필자의 삶을 투영해 보았다. 낙타의 닫혀있는 환경 탓에 삭막한 세상(사막)만 볼 수 있어, 막혀 있는 가슴으로는 더 넓은 세계로 나갈 수 없는 안타까움을 표현 한 시다. 하지만 그게 운명이라면 이에 굴하지 않고 더 힘들고 고된 삶이라도 모든 것을 수용하고 나만이 가질 수 있는 삶의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려는 마음을 그려낸 시다. 문학이란 자기 삶을 사막에서 건져내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의 흔적이다. 따라서 자기 자신이든 자기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달래고 상처를 치유해 주는 것이다.
3) <마른장마>, <가짜 뉴스>, <영웅 만들기>, <보청기 하나 놓아드릴까요>, <생수와 아프리카 소녀>, <어떤 빨대>, <당랑권>, <달을 사다>,<복상사>, <생수와 아프리카 소녀>, <네발나비와 검은과부거미>
혼자서 막걸리 한 사발 마시다
우연히 경매 방송을 보다가
잠과 졸음 사이를 헤매던 중
갑자기 이게 뭐지
(중략)
내 몸 불타 땅속에 갇히기 전
덤으로 달려온 달에
나만의 미지의 세계를 설계하는 동안
큰 손 일론 머스크가
달러 가득한 가방과 비트코인 지갑을 들고 와
달 몇 평만 분양해 달라 애원해도,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줄 알아라
-<달을 사다> 일부
삶의 흔적이란 이미 지나가 버린 일상적인 시간 위에 남아있는 비가역성의 부유물이다. 다시 말해 역류할 수 없는 시간의 무상성과 함께 운명적이고 유한한 존재의 고통으로서 인식될 수밖에 없다. 필자가 시집에서 자주 ‘자본주의’의 역설을 강조한 것은, 자본주의를 이데올로기 방식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물질로 이분화하여 자본만 쫓아가는 ‘물질 자본주’의 즉 ‘자본주의 독재’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보면 어쩌면 나는 이러한 자본주의에서 철저한 실패자인지도 모른다.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연고주의, 지역주의, 패거리 문화, 편 가르기 문화 그리고 접대 문화에 타협하지 못한 내 책임도 크다.
<달을 사다>의 시는 삶의 모든 질서와 법칙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공간을 우주로 표현하였고, 오랜 공직 생활 중 채울 수 없었던 경제적인 취약함을 사용 가치가 없는 땅을 경매로 받으면서, 그 땅 위의 전깃줄에 걸린 달이 덤으로 달려온 상황을 무한한 상상력을 동원하였다. 이는 공직 생활을 하는 동안 빈약한 경제력 때문에 가장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해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한편으로는 무기력한 자신을 탓하며, 개인적인 입장에서 비록 달은 환가가치가 없지만, 유한한 가치로 보아 그동안 힘들었던 경제적인 여력을 달을 통해 보상받겠다는 엉뚱한 발상에서 비롯된 시다, 비록 덤으로 받은 달을 테슬라 최고경영자 ‘일론 머스크’가 거액의 돈을 들고 와서 몇 평만 분양해 달라고 사정해도 못 팔겠다는 것은 시인은 그만큼 기백과 때로는 만용으로 유한한 자본과 무한한 권력과도 맞설 용기를 가져야 한다. 즉 시를 쓰는 것은 세속적인 물질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 삶에 늘 당당하고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는 마음을 담은 시라 할 수 있다.
유년의 시절 한쪽 청력을 잃어버린 후/ 세상은 온통 바다였다/나이가 들어갈수록
/지구의 판이 빈번히 어긋나./남은 귀 소리마저 희미해져/나만의 비밀을 만들 수 없어/말투마저 거친 돌이 되었다//(중략)/ 타인에 의해 ‘바이든’이 ‘날리면’이 되고/‘의원’이 또 ‘요원’으로 들요라 강요하니/아니 그럼, 어쩌겠나/시시비비(是是非非) 언언시시(言言是是)사람인 척하는 사람 아닌 사람들에/보청기 하나씩 놓아 주어야지/ 아니 도청장치라도 달아 줄까//
-<보청기 하나 놓아 드릴까요> 일부
(중략)
투사의 눈길을 빌려 세상 부조리를 감시하며/분노는 내려놓고 비수를 품고 살았다고/그래도 무너질수록 늘 진실한 삶을 보듬고 살아/내 모든 시는/그런 삶의 자궁 속에서 태어났다고//
하긴, 뭐, 이제 곧 세상 소문 다 내려놓고 내가 만든 내 나라, 나의 공화국 내 산방으로 들어가 비록 스크린 골프장이나 굿당은 없어도 날마다 천왕봉에 걸터앉은 구름을 붙들어 와 산방 옆 계곡 바위 위에 쭉쭉 펼쳐 놓고 마음 나눌 친구 몇 명 불러다 한 손에 한량주(閑良酒)를 또 다른 한 손에는 세작(細雀)을 음미하며 배따라기 추며 하루하루 살아갈 생각을 하니 내가 부르주아 시인이 아니라고는 절대 말 못 하겠다//
-<부르주아 시인이라고> 일부
문학 또한, 현실 참여는 참여이고 비판은 비판인데, 그 비판의 엄정성이 현실 논리로 인해 늘 무너지고 부정당한 경우가 흔하다. 그렇다면, 문학 혹은 문인은 정치나 권력으로부터 초연하거나 멀리 떨어져 지켜만 보아야 하는가? 그건 아니라고 본다. 어쩌면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문인은 정의가 아니면 아니라고 소리칠 수 있어야 하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글에 의한 탐구를 통해 진리를 밝히려는 문인은 때에 따라서는 시대와 불화일 수 있고, 권력에 당당하게 맞설 수 있어야 한다.
정치와 권력은 늘 서로 밀집되어 있으며, 상호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정치의 사전적 의미는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이다.’ 즉 나라를 잘 다스리는 다는 것은 “국민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고, 나라에 대한 걱정을 없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답은 분명하고, 어렵지 않지만, 우리는 여전히 늘 그 답을 구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 그것은 정치가 권력을 독점하려 들고, 그 권력을 통해 권력의 주인은 국민을 지배하려 하기 때문이다. 권력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다. 그런 권력에 대한 욕망은 본래 인간의 모든 행위와 관계는 본질적이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 충분함에도 불필요한 영향 공급으로 비만을 초래하는 식탐처럼 넘치는 더 많은 것을 가지려다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
위의 시는 ‘보청기’와 ‘부르주아 시인이라고’를 통해 우리 현실을 풍자한 것이다. 그러나 풍자는 잠시 분노를 내려놓고 여유로운 척하지만, 언제나 가슴 속에 날카로운 무엇인가 숨겨져 있다. 이 날카로움이 상대를 겨눌 수 있고 혹은 자기의 몸을 상하게 할 수 있어, 문학은 작금의 현실에 비판과 참여를 하더라도 좌나 우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올바른 판단과 견제할 수 있어야 한다.
4) <부자가 다는 아니라니까(모란꽃)>, <늘 풍요로운 당신(접시꽃>, <한결같은 마음>, <영원한 이별(목련)>, <전설이 된(찔레꽃)>, <양반 가문은 아니지만(개망초)>, <지금까지 잘 견디어 왔잖아(겨우살이 꽃)>, <태양이 되는 꿈(사과꽃)>, <이 바람둥이 놈아(밤꽃)>
(중략)
슬하에 자식은
꽃인 듯 햇살인 듯
(중략)
아들, 딸 구별하고
생기는 대로 쑥쑥 낳는 일이
우리 가문의 오랜 전통이니
명심, 또
명심할지어다
-<처음 만난 그때처럼,(대추꽃)> 일부
시내 한 관서에 근무 당시 매일 온천천을 걸으며 봄, 여름, 가을이면 꽃을 대면할 수 있었다. 꽃을 매일 만난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으며, 삶에 윤활유 같은 역할을 하여 꽃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배웠다. 그런 꽃을 불교에서는 “육법공양(六法供養) 중 하나로 만행화(萬行花)한다. 한 송이 꽃이 피기까지는 만 번의 착한 일을 해야 핀다”라고 해서 인고의 세월을 견딘다는 의미로 수행을 의미하며, 장엄과 찬탄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인생은 꽃과 같고, 세상은 그 속의 꿀과 같다.”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꽃은 예로부터 우리 일상과 늘 공존해 왔으며 우리 생활과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무엇보다 글을 쓰는 문인에게는 꽃은 글감으로써 영감을 준다. 꽃은 저마다의 의미가 있다. 이러한 의미가 표현된 것이 꽃말이다. 꽃말을 잘 이해한다면 그 꽃의 특징을 알 수 있다. 그런 시집의 2부 전체를 은유와 비유법을 섞어 꽃에 대한 인격을 부여한 꽃 시로 채워 보았다.
위의 시 <처음 만난 그때처럼>은 ‘대추꽃’을 표현한 것으로 대추는 원래 암수한몸인 나무이다, 그래서 열매가 많이 열리는데, 꽃 하나에 반드시 열매가 맺어 후손의 번성함을 의미한다. 또한, 대추 씨는 통씨라 절개를 뜻하며, 순수한 혈통 즉 자손의 번성을 의미하여 과일 중 첫 번째 과일로 친다. 그래서 조상님을 모시는 제사상과 차례상에도 첫 번째 과일이 대추다. 이런 것을 보면 꽃 중에 제일 으뜸인 꽃이 아닐까? 또 대추는 단단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한 작용으로 나무에 상처를 입힌다. 나무를 찍어내야만 번식을 많이 할 수 있다. 그러한 자신의 상처를 안고서야 자신도 제 역할을 다하며 많은 열매를 생산할 수 있어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을 대추나무 스스로 터득한 것은 아닐까 싶다.
(생략)
네놈이 햇살 아래
알몸 드러내놓고
수음질 할 때마다
(생략)
아찔한 상상 속
밤새 잠 못 이루고
도회지로 도망치도록
충동질 한
네, 죄
어찌 모른단 말이더냐
-<이 바람둥이 놈아(밤꽃)> 부분
“꽃은 져도 향기는 멀리 나간다.” 말이 있다.“치자꽃의 향기가 남국의 싱그러우면서도 깔끔한 향기라면, 장미의 향은 남녀의 춘심(春心)을 발동시키는 향기이고, 라일락은 감미롭고도 낭만적인 향기를 낸다. 또한, 연꽃의 향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주는 향기”이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5월 꽃향기의 대표주자는 밤꽃이다. 밤나무는 남성을 상징하는 유일한 나무다. 그리고 밤꽃은 여인을 유혹하는 꽃이다. 속설에 의하면 밤꽃 향은 과부에게 잠 못 들게 하는 향기라고 한다. 그래서 밤꽃이 피는 철이면 과년한 딸은 밤나무 아래에 일을 시키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다.
또 예전에는 밤꽃이 필 즈음이면 시골의 아낙들이 바람이나 도회지로 도망간다는 소문이 무성하기도 했다. 밤꽃의 비릿한 내음이 정액 냄새와 유사한 것에 비롯되었다. 실지로 밤나무꽃에서 나는 시큼한 냄새는 남자의 정액 냄새와 같아 양향(楊香)이라 부른다. 그래서 옛날에는 사찰 근처 특히 비구니가 수행하는 사찰 근처에는 절대 밤나무를 심지 말라고 했다. 밤나무는 최초의 씨 밤이 다 자라고 난 뒤 죽은 밤나무를 캐보면 처음 싹을 틔웠던 씨 밤이 그대로 남아있어, 씨 밤(조상)과 나중 맺은 밤과 세대 간 교류를 의미하여 제사상에 대추 다음 두 번째로 올리는 중요한 과일이다.
5). <숲의 유혹>, <위험한 입춘>, <난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온 꽃상여>, <복상사>,< 허풍> <꾼들> <어떤 이력서> 등의 시편들이 이번 시집의 기조라고 할 수 있다.
(생략)
앞으로 여분의 생은
지리산 청학동 서당에서
천자문과 소학(小學)을 가르치고 싶다 하니
이력서를 제출하라고 한다
(중략)
이건 아니다 싶어
부질없는 이력 다 지우고
딱 한 줄만 써넣고 왔다
‘돌과 사발 감별사’라고‘’
-<어떤 이력서> 일부
혹자들은 지구의 온난화나 지구의 자전과 공전의 변화 등으로 멀지 않아 지구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다. 현재와 같은 정보화 시대에는 지구의 위기나 종말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인간성 회복을 통한 과거로의 회귀뿐이다. 그러한 위험의 신호를 최소한 문학인들이 먼저 감지하고 지구를 보전하는데, 앞장서야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필자의 시는 늘 그랬듯이 자기 고백으로서의 사물이나 관념을 디딤돌로 결국 완전한 서정으로 희귀를 고대하는 시가 주류를 이루가 있다.
이력서는 주로 취업을 목적으로 자신의 학력이나 경력 그리고 자격증 보유 현황을 기록한 문서이다. 필자가 공직에 있을 때 일정 직급으로 승진 실패 후, 퇴직 후를 대비해 못다 한 학업과 여러 종의 전문직 자격증과 문학과 연계한 자격증 등 십여 종의 일명 ‘士’(사)자 자격증을 획득했다. 하지만 그렇게 획득한 ‘士’자 자격으로 후학을 양성하고, 전문 지식이나 문학 지식을 이용 퇴직 후 조금 더 여유로운 삶을 준비할 수는 있었으나, 나는 이런 자격증을 이용하여 경제적인 활동을 하는 성향과는 맞지 않았다. 차라리 평소 희망했던 지리산에 작은 산방(山房)을 만들어 놓고 평생 벗처럼 수집한 수석, 사발, 연적 그리고 지리산 천왕봉을 넘나드는 구름을 불러다 놓고 남은 여분의 세월을 보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중략)
우물 옆 떨감나무 위 까치 떼/온 동네 소문 입 모아 퍼 나르고/무너진 툇마루 위 산호랑나비/흥이 났는지 춤사위 분주합니다/장독대 아래 깨진 옹이 속 소금쟁이/
가위질하며 호객을 하고 있습니다/마당에는 홀아비바람꽃과 금낭화/청사초롱 옆에 두고 맞절하다 엉덩방아 찧고/문 없는 외양간 옆 기둥에 코뚜레/집 나간 송아지를 기다리다 지쳤는지/게으른 하품을 하고 있습니다//
(중략)
- <풍경 달다> 일부
이번 시집에는 이전까지 시집에서 많이 보였던 사물 시를 최소한으로 하였다. 이번만큼은 지나칠 만큼 지독한 사물을 바탕으로 한 서정의 굴레에서 벗어나, 인간 존재 가치의 확인과 경험을 바탕으로 물질적인 세계를 상징한 관념시가 바탕을 이룬 시에 치중하려 했지만, 이러한 관념시 또한, 종국에는 서정으로 귀착되고 말았다. 이런 이유는 필자의 시에 대한 취약한 심안(心眼)의 한계성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요즘 등단작이나 잡지에 발표된 대부분 시는 시인 개인의 감정에서 우러나오는 시어가 아닌 각기 분리된 여러 언어를 모아 조립하는, 즉 시를 만드는 기술자 느낌을 주는 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시는 일련의 한 가지 사물이나 관념을 한 문장으로 연결하여 완성하는 시가 대부분이다.
위 <풍경 달다>의 시는 6번째 시집의 표제시『빈집에 우물 하나』와 시풍이나 전개되는 형식이 유사한 시이다. 아직 채색하지 않은 마치 한 폭의 수채화 밑그림처럼 순수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시다. 굳이 시풍이나 전개하는 방식을 따지자면 자기, 표절에 가까운 시다. 그런데도 이번에 다시 끄집어 온 것은 필자의 시풍이 워낙 사물 시에 치중한 서정에 강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앞으로 필자가 어떻게 시를 쓸 것인지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며, 앞으로 시풍의 변화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런 시의 유형은 아래 대부분 시에서도 잘 나타난다.
(중략) 사랑도 고집도 드센/방황했던 스무 살 무렵/빈 가슴 속에 나붓대는/바람입니까//아니면/서걱거리는 달빛을 기다리다 지쳐/잠 못 이룬/그리움입니까//
-<숲의 유혹(불면증)> 일부
(중략)꽃소식은 당당 멀었고/어젯밤 쏟아진 별똥별 무리/하늘로 돌아가지 못하고/바짝 물오른 개나리 우듬지 끝/노랑 엽서 한 장 달랑/입에 물고/포로시//매달려 있다//
- <위험한 입춘> 일부
때 이른 꽃샘추위/막 꽃대를 올린 자목련/파르르 떨고 있다//기어코/하혈을 하였는지/붉은 꽃물 흥건하다//그 모습에 놀라/어제밤 힘들게/힝태한 봄//허공에 퉁퉁 부은/바람 한 점/인질로 붙들어 놓고/천 리 길을 되돌아갔다//
- <난춘(難春)> 전문
3. 나가기
- 그리고 앞으로 시적(詩的) 방향
지금까지 열한 번째 시집 <낙타경>에 배경과 내용의 면면을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자기 시에 대한 ‘평론’이나 ‘평설’이라고 보다는 시작(詩作) 정도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번 시집에서도 어김없이 독자의 시선은 서정의 끈에 묶여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이렇게 지독한 서정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은, 아집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 아집은 정신적 군살이라 했다. 이에 따라 사람이나 사물 그리고 시적 대상을 보는 것도 차별적이고 애증의 폭이 크다는 것도 스스로 잘 알고 있지만, 이번 시집 역시 변화를 주저한 것은 갑작스러운 시풍이나 시류의 변화로 그나마 필자만의 강점인 서정적 감각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다만 앞으로는 지금까지의 사물적 서정을 벗어나, 관념과 타협을 통한 보편적 가치의 실현 그리고 시적 공간을 더욱 확대하여, 아픔이나 상처는 너그럽게 수용하는 대신, 연민과 함께 훈훈한 일정의 체온을 퍼담아,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에도 관심과 더욱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희망적 흔적이 가득하도록 시적 대상을 폭넓게 조망하여 지금의 한계를 극복하는 변화를 기대해도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입버릇처럼 늘 ‘시를 통해 해탈을 꿈꾸고, 문학으로 세상을 바뀌고 싶다.’ 한 말은 시를 쓰는 일련의 행위는 살아온 삶과 앞으로 남은 삶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통해 올바르고 정직한 세상을 지향하고, 시가 내 삶을 구원할 수 없어도 비겁하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나만의 경전(經典)과 같기 때문이다.
<해설 내용 중 일부는 필자의 2025년 한국문학상 평론 부분 신인상 작품을 인용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