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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0 강 - 定慧品- 1
四. 定慧品
師-
示衆云, 善知識아 我此法門은 以定慧로 爲本이니
是大衆은 勿迷하야 言定慧別이라하라
定慧는 一體요 不是二니 定慧體요 慧是定用이라
卽慧之時에 定在慧하고 卽定之時에 慧在定이니
若識此義하면 卽是定慧等學이니라
諸學道人은 莫言先定發慧하며 先慧發定이 各別이니
作此見者는 法有二相이라 口說善語하되 心中不善이니
空有定慧나 定慧不等이어니와 若心口俱善하면
內外一種이라 定慧卽等하리라 自悟修行은 不在於諍이니
若諍先後하면 卽同迷人이라 不斷勝負일새 却增我法하야
不離四相이니라
善知識아 定慧猶如何等고 猶如燈光하니 有燈卽光이요
無燈卽暗이라 燈是光之體요 光是燈之用일새 名雖有二나
體本同一이니 此定慧法도 亦復如是하니라.
***
네 번째 定慧品(정혜품)을 할 차례입니다.
정혜라고 하면 불교에서 상당히 중요시 여기는
그런 낱말인데요. 대개 삼학을 이야기 할 때,
戒(계). 定(정). 慧(혜) 이렇게 말하지요?
그렇게 해서 삼학과 연관 시켜서 생각할 수도 있는데,
육조스님은 삼학과 연관 시켜서 생각하기 보다는
定과 慧에 대한 단 두 글자의 뜻을 살펴보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속뜻은 무엇인가 하니,
禪(선)이라고 하는 것은,
“禪那(선나)다.”
선나를 줄여서 “禪” 이렇게 하는데,
선나를 참구 한다고 해서 “參禪(참선)”
이렇게 하고요.
“禪”하면 그것은 인도 말이고, “參(참)”자는
중국말 漢字에요. 그래서 선나를 참구한다.
이렇게 표현하는데,
禪那는 뭐냐?
靜慮(정려)다. 고요히 생각하는 것이다.
또는 思惟修(사유수)다. 사유로서 하는 수행이다.
이런 등등의 설명을 하면서,
또 선 이라고 하는 것은,
定慧를 한꺼번에 일컫는 말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정혜를 한꺼번에 일컫는 말이다.
여기서 定慧라고 할 때,
“아, 육조스님은
禪을 이렇게 한 마디로 定慧라고 푸는구나!”
이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그 근거가 선을 해석하는 말 가운데,
“定慧를 통칭할 때 禪이라고 한다.” 그 말이에요.
그 뜻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선을 풀어보면
“定慧라고 하는구나!”
하는 그런 차원으로 이해를 하면,
육조단경에 있어서의 定慧는
그런대로 이해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계정혜와 연관 시켜서 우리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定慧!
定慧는 곧 禪이다. 선은 곧 정혜라고 푼다.
이렇게 대강 정리를 해 두고요.
그럼 定과 慧는 무슨 말이냐?
定자는 아시는 대로
禪定(선정)!
安定(안정)!
선정이라는 말도 지금은 그냥 막 써 버립니다만,
마음이 지극히 고요한 상태가 된 것.
대강 그렇게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마음이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또 과거생각 미래생각에 흔들리지 않고,
안정된 상태를 定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안정이라고 하는 것은
보통 안정이 아니지요,
우리의 妄念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
그것을 구름이라고 한다면, 망념의 구름이
다 걷혀진 상태를 定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妄念(망념)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
망념을 구름이라고 한다면, 망념의 구름이
다 걷혀진 상태를 定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慧라는 것은.
우리가 마음이 지극히 안정이 되면,
나타나는 것을 바로 지혜라고 합니다.
지혜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마음이 안정이 안 됐다는 뜻이고,
마음이 안정이 안 됐으면 지혜가 안 나타나는
것이고, 그거는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정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선을 한다.
기도를 한다.
염불을 한다.
경전을 본다고
하는 이 모든 것은, 우리 마음을 결국
어떤 방향으로 몰고 가자고 하는 것인가
하면 定과 慧가 함께 공존하는.
드러나는 그런 상태로 이끌고 가자고
하는 것이 불교공부예요.
선정과 지혜가 함께 드러나는 상태가
불교공부의 목표지요. 그래서 선은
정혜를 통칭하는 말이다 이렇게 되는데,
定은 구름이 걷혔다고 하는 그런 정도의 차원.
생각의 구름이 걷히고, 망상의 구름이 걷혔다고
하는 그런 정도의 차원이라면,
慧는 뭔고 하니 우리 마음이 맑은 하늘처럼
환히 밝아진 상태를 혜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육조스님의 법문을 보면, 定이 곧 慧요.
慧가 곧 定이다. 그래서 定과 慧를 等持!
함께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함께 가져야 된다.
이런 표현이 있는데 그것을 비유로 이야기 하자면,
구름이 걷혔다고 한다면 어떻습니까?
맑은 하늘 이라고 하는 말하고 뜻은 똑 같습니다.
말이 다를 뿐, 뜻은 똑 같습니다.
맑은 하늘 이라고 하는 것도
구름이 걷혔다는 것과 뜻은 똑 같습니다.
구름이 걷혔다는 것을 定이라고 한다면,
맑은 하늘이라고 하는 것을 慧라고 하고,
그러면 맑은 하늘이라고 하는 것은
곧 구름이 걷혔다는 뜻이고,
구름이 걷혔다는 것은
곧 맑은 하늘이라고 하는 뜻하고 같으니까
定곧 慧요.
慧곧 定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우리가 선정이다. 기도를 한다. 참선을 한다
해서 마음이 정상적으로 안정된 상태에
이르렀다고 하면, 거기에는 정말 제대로 된
지혜가 나게 돼있어요.
“제대로 된 지혜!”
불교에서 말하는 제대로 된 지혜가 나지 않으면,
아직 우리가 간경이나 참선이나 염불을 통해서.
마음의 안정을 얻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제대로 얻었다면 지혜가 나게 돼있고,
지혜가 나게 되면 그것은 모든 문제의
해결의 열쇠가 바로 내 손안에 있는 것이지요.
이런 입장으로 보면
불교는 상당히 간단해요. 어떻게 보면
지극히 복잡한 것 같지만... 무슨 염불을
하든지 뭘 하든지 간에, 마음이 일념이 되면
그것이 곧 定이고, 일념이 제대로 됐다면
거기는 지혜가 나게 돼있어요. 그럼
그 자리는 곧 禪이라고요.
禪佛敎(선불교)에서는
“禪!”
하면 그 이상 더 덮을게 없습니다.
무슨 부처의경지다. 조사의경지다. 하는 것도
禪이라고 하는 그 말 한마디에 다
함축이 돼있어요. 요즘 결제철이라서 모두가
선방에서 열심히 정진을 하고 있읍니다만,
이런 아주 좋은 구절이 있어요.
萬緣都放下(만연도방하).
온갖 인연들을 다 놓아 버려라. 그리고
但念觀世音(단념관세음).
다만 관세음만 생각하라.
우리가 화두를 든다는 것을 최상의 공부라지만,
전혀 그렇지 않지요. 우리가 염불을 할 때.
우리나라 신앙 형태를 보면 대개 관세음기도를
하든지, 지장기도를 하든지, 옴마니반메훔을
하든지, 아니면 법화경이름을 외든지,
화엄경이름을 외든지, 어떤 이는 신묘장구대다라니,
혹은 반야심경, 그런 것들을 열심히 외우는
수행이 있습니다. 좋은 수행이지요.
그 중에 한 예로서 단념관세음하라.
다만 관세음만 생각하라. 만연도방하.
온갖 인연들. 숱한 인연들. 우리가 살아오면서
인연들 많지 않습니까? 연락해야 되고
연락받아야 되고, 또 궁금한 것이 있어서
알아봐야 되고. 알려줘야 되고
온갖 인연들 다 덮어두고, 사실 그것 다
덮어둬도 지구는 그냥 돌아가는데
쓸데없이 괜히 생각을 하고,
이리저리 분잡스럽게 우리가 기웃거리거든요.
마음을 그렇게 쓴다고요.
사실 그것 습관이 돼서 그래요.
그러니 제대로 된 공부를 하려면
만연도방하해야 돼요. 만 가지 인연들을
다 都. 모두 다 放下. 내려놓아라. 그리고
단념관세음 해야 돼요.
此是如來禪(차시여래선)이예요. 이것이야
말로 진짜 여래의 선이예요. 여래선.
이야말로 여래의 경지에 이르는 선 이지요.
그런데 이 선 에서는요.
如來禪보다도
祖師禪(조사선)을 더 높이 둡니다.
그래서 여래선이 높느니 조사선이 높느니...
그래 조사선이 높다고 하자. 그렇지만
다만 관세음만 생각한다면 여래선도 되고
또한 조사선도 된다.
如其祖師禪(여기조사선)이라. 참, 이 말 한마디가
무서운 말이에요. 화두 아니라 又(우) 화두를 해도
萬緣都放下
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고,
관세음보살 아니라...
옛날에 시골 어떤 할머니가 큰스님한테
법문 들으러 갔더니 큰스님이, 그 근기도
모르고 덮어놓고
“卽心(즉심)이
是佛(시불)이니라.”
이렇게 어려운 법문을 하니까
무식한 할머니는 ‘아, 짚신이 부처라고
하는 말이구나!’ 대충 그렇게 알아들은 거예요.
그래서 그 법문이 큰스님한테 들은 거니까,
소중하게 생각하고
“짚신이 부처다.” “짚신이 부처다.” 그것만 계속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도를 통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화두 아니라 어떤 화두를 들든지,
짚신이 부처라고 하든지 간에,
一念(일념)만 되면 그것이 여래선이요.
곧 .조사선이다. 여래의 境地(경지)요.
조사의 경지다 하는 그런 내용인데
참 무서운 이야기지요.
정말 이 한마디에 불교의 수행의 요체가
다 들어 있습니다.
이거 안 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아무리 깊고 높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一念이 안 되면 아무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제대로 된 기도나
제대로 된 염불이나 제대로 된 선이나,
禪을 설명할 때
定慧다.
定慧雙修(정혜쌍수). 또는
定慧等地(정혜등지).
이런 표현을 쓰는데, 불교의 수행이 제대로 되려면
萬緣都放下.
但念觀世音. 禪定)이 제대로 되면 그 다음 지혜는
나게 되어 있고, 지혜가 난다고 하는 것은 선정이
제대로 돼있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한 구절이
定慧를 불교의 모든 것이라고 표현한 뜻에
영합하지 않나 이런 생각입니다.
그런 뜻으로 여기 육조스님은 법문하고 계십니다.
정혜품에 단락이 세 단락으로 되어 있어는데요.
師,
示衆云(사, 시중운) 했는데, 師 = 육조스님이고.
示衆云 = 대중에게 보이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과거 조사스님들의 법문을 그 형식별로 보면
몇 가지가 있어요. 여기 나온 示衆이 있고,
시중보다도 상위 법문을
上堂法門(상당법문).=
법상에 정식으로 올라가서 격식을 제대로 갖춰서
하는 법문. 말이 짧고 뜻이 깊지요.
수행이 깊지 않으면 알아듣기가 힘들고,
법문하는 사람도 자신의
道力(도력)을 한껏 발휘해서 합니다.
割(할)을 하거나 주장자를 쾅쾅 치는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법문이지요.
아는 사람만 알지요.
示衆法門(시중법문).=
격식을 제대로 갖추지 않고 하는 보통법문.
고차원적인 내용이라 하더라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풀어서 이해시켜 주지요.
小參法門(소참법문).=
晩參法門(만참법문).=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을 소참법문이라고 합니다.
방장스님이나 조실스님이나 선지식쯤 되는 스님이
교학 적으로나 뭐 설명을 많이 해야할 필요가 있을 때,
법상에 올라가지도 않고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서
하는 법문. 여기서는 문답해도 좋고 경전. 설화. 소설.
전설이야기를 해도 좋지요. 밤에 하는 소참법문을
만참법문이라고도 합니다.
師
示衆云, 善知識(사 시중운, 선지식)아→
이 참, 육조단경만 읽으면 기분 좋은 대목이
딱 있는데, 육조스님께서 우리 읽는 사람을
보고, 또는 대중을 보고, 어떤 무지렁이를 보고도
무조건 선지식이라고 부르니까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어디 가서 선지식 소리 듣겠어요?
육조스님에게서나 선지식 소리 듣는 것이지요.
我此法門(아차법문)은→ 나의 이 법문은
以定慧(이정혜)로
爲本(위본)이니→
정과 혜로서 근본을 삼는다 그랬잖아요?
내가 가르치는 진리의 문에는,
定 慧로서 근본을 삼는다.
아까 뭐라고 그랬지요? 선은
定 慧로서 표현할 수 있다.
定은
禪이다.
이런 표현도 되고요. 그야말로 여래선과 조사선이
다 그 속에 포함됐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大衆(대중)은
勿迷言定慧別(물미언정혜별)이라하라→
대중은 미혹해서 말하기를
정과 혜가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定慧(정혜)는
一體(일체)요→ 정과 혜는 일체다.
일체인 것을 아까 말씀드렸지요?
하늘이 맑다는 것은, 구름이 걷혔다는 뜻이고,
구름이 걷혔다는 것은, 하늘이 맑다는 뜻이다.
그것이 일체지요.
一切智(일체지)요.
不是二(불시이)니→ 정과 혜는 둘이 아니니,
定是慧體(정시혜체)요→ 정은 지혜의 본체다.
慧是定用(혜시정용)이라→ 혜는 정의 用이다.
그러니까 마음이 안정이 되면 거기서
우리 마음으로부터 온갖 지혜가 나와서
모든 인생사 세상사를 꿰뚫어 보고 바르게 판단하지요.
그것은 쉽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定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
定은 體가 되고,
慧는 그 作用(작용)이 되는 것이지요.
卽慧之時(즉혜지시)에→ 곧 지혜가 있을 때,
定在慧(정재혜)하고→ 정이 그 지혜에 있고,
卽定之時(즉정지시)에→
곧 定이 제대로 드러났을 때는,
慧在定(혜재정)이니→
혜가 곧 정에 있다. 늘 붙어 다닌다. 이거예요.
예를 들어서 “몸”하면 몸에 팔다리가 다 붙어
있는 것을 합해서 몸 이라고 하지요. 그래 몸뚱이는
體이고, 팔다리는
用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지만,
그것을 또 분리할 수도 없는 것이 엄연한 사실입니다.
또 우리가 말도 그렇고 문장도 그렇듯이
완전한 한 마디의 말과 한 구절의 문장이 되려면
체언과 용이 제대로 갖추어 졌을 때 하나의 문장을
이루듯이, 體. 用이라는 것도 이런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卽定之時(즉정지시)에
慧在定(혜재정)이니→ 혜는 정에 있음이니,
若識此義(약식차의)하면→ 만약에 이러한
도리를 알면,
卽是定慧等學(즉시정혜등학)이니라→
곧 정과 혜를 평등하게 함께 배우는 것이다.
定慧等持(정혜등지). 라는 말도 있습니다.
等持門(등지문)이라고 하는 문도 있고요.
定과 慧를 함께 배우는 것이다.
諸學道人(제학도인)은→
도를 배우는 여러 사람들은
莫言先定發慧(막언선정발혜)하며
先慧發定(선혜발정)이
各別(각별)이니→
말하지 말라. 먼저 定이 있고서 뒤에 지혜가 發해지고,
또 먼저 慧가 있고서 그 다음에 定을 發한다. 그래서
定과 慧가 각각 다르다고 그런 말을 하지 말라.
그것은 하나다. 이겁니다.
“禪”하면
定慧를 통칭하는 말이다.
定慧가 한 덩어리일 때 제대로 된 禪이다.
이런 조사스님들 법문이 바로 그런 뜻이지요.
作此見者(작차견자)는→ 이러한 견해를 짓는 사람들은
法有二相(법유이상)→
법에. 진리에 두 가지 모양이 있는 것이라고 본다.
그렇지요, 진리는 하나이고, 하나여야 하고, 하나인데
거기에서 좀 소상하게 설명을 하고, 소상하게
나누어서 이해하려고 하다 보니까
방편상, 나누어서 定이니 慧니
이런 말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편의상 가설로 말하는 것이지요.
사실은 둘이 있어서 둘로 말하는 것은 아니지요.
예를 들어서 이런 말을 듣고 사물을 보고,
글자를 쫓아가면서 이해를 하는 그 의식 작용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마음의 본체에서 나오지요.
그러면
그 體와 用이 둘이 아니지요.
體에서 마음작용이 있고,
그 마음작용의 본체는 바로 마음의 뿌리지요.
본체가 어떤 물체로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또 그것을 엄격하게 나누어서 편의상 이해하기
쉽도록 이야기 하려면,
마음의 의식작용을
眼(안). 耳(이). 鼻(비). 舌(설). 身(신). 意(의).
6식으로...
의식이 작용하는 것은 그것은 하나의 用이고,
그 작용하게 이미 준비 되어있는 그 마음의 뿌리는
그것이 體다. 그것이 定이고 6식으로 여러 가지로
인식하고 분별하는 그런 의식 활동은 慧라고
나눠서 말할 수는 있어요.
말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잘 보면 하나지요.
한 가정으로 보면
여자는 定이 되고,
남자는 慧가 되고 그래요.
또 보살로 보면
定은 문수가 되고, 문수가 지혜라고 하지만
둘로 이렇게 나누어 볼 때
慧가 활동하는 입장이라고 본다면,
보현이 되고,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왼쪽은 定이 되고,
오른쪽은 慧가 되고요.
왼쪽은 體가되고,
오른쪽은 用이라고 나눠서 보고요.
그러나 그것이 완전히 나눠져 있으면
깨져버린 상태지요.
제대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 상태이고,
그래서는 안 될 그런 상황이지요. 그러나
제대로 조화를 이루었을 때는,
좌 우 라든지 부부라든지
왼팔 오른팔 관계가 되었든지,
그것이 한 몸으로. 그냥 하나로 움직이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로 움직여지지 않으면,
그야말로 일사분란 하지 않으면,
그것은 이미 제대로 된 體用관계가 못되는 것이지요.
그래
法有二相(법유이상)이라→
법에 二相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이지요. 하나가 되어야지요.
口說善語(구설선어)하되→ 입으로는 좋은 말을 하되,
心中不善(심중불선)이니→
마음 가운데는 선하지 못함이니,
이것은 두 모양으로 二相으로
나눠져 있기 때문에 그렇지요.
空有定慧(공유정혜)나→
공연히 쓸데없이 定과 慧를 두나
定慧不等(정혜부등)이어니와→
定과 慧가 평등하지 못하거니와
한 덩어리가 못 되거니와 그 말입니다.
若心口俱善(약심구구선)하면→
마음과 입이 함께 善하면, 마음과 입을
定慧로, 또는
體用으로 대비하면,
마음은 定이 되고 體가 되겠고,
입이 慧가 되고, 用이 되겠지요.
마음과 입이 한 덩어리가 될 것 같으면,
內外一種(내외일종)이라→
안과 밖이 한 덩어리라 이 말입니다.
定慧卽等(정혜즉등)하리라→
定과 慧가 곧 동등하리라.
自悟修行(자오수행)은→
스스로 깨달아서 수행하는 것은
不在於諍(부재어쟁)이니→
우리가 수행하고 깨닫고 하는 것은
옳다 그르다. 선정이다 지혜다 하고
다투자고 하는 것은 아니지요.
若諍先後(약쟁선후)하면→
만약에 선후를 다툰다면,
卽同迷人(즉동미인)이라→
곧 미혹한 사람이다.
그런 이치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을
“미혹한 사람이다.” 라고 합니다.
不斷勝負(부단승부)일새→
이기고 지는 것을 끊지 못 함일새.
이기고 지는 것을 끊지 못하면,
승부심이 항상 마음속에 내재해 있고,
그러면 기어이 이겨야 되고, 지면 큰 야단이고,
그러면 항상 갈등과 어떤 불안과 승부심으로
살 수 밖에 없지요.
却增我法(각증아법)하야→
도리어 我와 法을 더해서 나다 남이다.
주관과 객관.
我는 주관이 되고, 이럴 때의
法은 객관입니다. 세상사지요.
그러면 我相(아상) 또는
人相(인상) 이런 것이 더욱 더 불어나서,
不離四相(불리사상)이니라→
결국은 주관과 객관에서
我相 · 人相 · 衆生相(중생상) · 壽子相(수자상).
이렇게 벌어지게 되어 있지요. 그 온갖 相.
그 四相이 벌어지면 거기서
法相(법상)과
非法相(비법상)이 벌어지고,
일체하는 것 마다. 중생들이 하는 것 마다,
전부 相으로, 像(상)으로 맺혀버리지요.
우리 마음에, 몸에 무엇이 응어리 맺히듯이...
뭐 암이 되듯이...
結石(결석) 같이 그렇게 맺혀버리는 거예요.
마음으로부터 그런 것이...
마음에 그 어떤 상을, 생각 想(상)자를 쓰지 않고
모양 像자를 쓰는 것은, 이미 하나의 형상으로
굳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고체가 되어 있다
이 말이지요. 그랬을 때 그것은 부딪히면
결국은 소리가 나고, 소리가 나다가 더 부딪히면
그때는 깨지게 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모든 문제가 “나다.” 하는 그 알량한 자존심.
“나”라고 하는 자의식. 그것 때문에 온갖 불행이
거기서 싹트는 것이지요. 그거 하나 비울 줄 몰라서...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하더라도 자존심 건드리면
그것은 누구도 용납할 사람이 없어요.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하더라도...
어린아이라도 자존심 건드리면 반항하고,
용납을 안 한다고요. 하물며 다 큰 사람들에게야...
그것은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알고
살아야지, 그것을 모르고 자신만 자존심이 있고,
상대는 없는 것으로 알다가는 큰 코 다치지요.
그래서
결국은 我와 法=주관과 객관에서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 · 법상 · 비법상.
온갖 상으로, 팔만사천 중생상으로 벌어진다.
不離四相이니라.
四相을 떠나지 못하느니라.
善知識(선지식)아
定慧가
猶如何等(정혜유여하등)고→
定과 慧가 어떻게 해야 평등한 것이냐?
저는 定과 慧를 구름 걷힌 것과 맑은 하늘로
비유를 했는데,
육조스님은 아주 멋진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猶如燈光(유여등광)이니→
마치 燈光과 같으니, 그랬어요.
등불이 등이 있지요?
그리고 빛이 있다고요.
등 하고 빛 하고는 다르다면 다른 것이지만,
사실은 하나예요. 등이 있음으로 빛이 있고,
빛은 곧 등에서 나왔으니까
그러니 나눠놓고도 볼 수가 있고,
또 나누자니 좀 아닌 것 같고 그렇지요.
얼른 생각에... 등과 빛은 같은 도리다.
有燈卽光(유등즉광)이요→
등이 있으면 곧 빛이 있게 돼있어요.
無燈卽暗(무등즉암)이라→
등이 없으면 어둡지요. 캄캄하지요.
빛이 아예 없지요.
燈是光之體(등시광지체)요→
그 등은 빛의 本體(본체)가 된다 이것이지요.
光是燈之用(광시등지용)일새→
이 빛은 등의 작용이다.
이 비유가 참 명쾌하지요?
그러면 밝게 비추려면,
이 세상을 온통 더 밝게 비추려면
어떻게 해야 되지요?
등이 더 빛나야지요?
그러면 온 세상이 환하게 밝잖아요.
그런데 자기 방하나 겨우 비출만한 30촉짜리나
100촉짜리 정도 등이라면 그 방 하나 정도 밖에
못비추지요. 이것이 무슨 말인지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살아가는데. 사람 사람마다
이 세상에 끼치는 자기의 빛을 그 나름대로 비추고
있어요. 그 나름대로 빛을 비추고 있다고요.
그것은 본체가 얼마나 많은...
등불로 친다면.
등불이 얼마나 용량을 함유하고 있느냐?
거기에 따라서 비추는 범위와
빛의 밝기가 다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속에
공덕을 얼마나 쌓았느냐?
공부를 얼마나 했느냐?
그것이 우리가 함유하고 있는
등의 용량과 마찬가지이지요.
얼마나 자기 수행과 공덕과 공부가
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세상에 비추는.
세상에 영향력을 주는 범위가 전혀 다르지요.
기껏 자기 한 인생을 그저 소승으로
조그마하게 살다 가는 사람도 있고,
많은 사람에게 큰 공덕을 베풀며
사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입니다.
體의 本質(본질)은 누구나 똑 같지만,
그 닦은 공덕에 따라서
그걸 果報(과보). 報身(보신) 그러는데,
果報가 달라요. 영향력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과보는 영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名雖有二(명수유이)나→ 이름은 비록 둘이 있지만,
體本同一(체본동일)이니→
體는 본래 同一한 것이니,
此定慧法(차정혜법)도
亦復如是(역부여시)하니라.→
定과 慧는
우리 마음의 일이거든요.
마음속에 定과 慧 라는,
禪定(선정)과
智慧(지혜)라고 하는 것도,
安定(안정)과 智慧라고 하는 것도
또한 다시 그와 같다.
우리 마음이 얼마나 제대로 안정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지혜도 제대로 나올 수가 있다.
그것은 결코 둘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 이야기가 정혜품이 등장하게 된 내용입니다.
이 밑에는 定慧하고는 조금 달리
일행삼매라고 하는
삼매 이름을 가지고 이야기를 합니다.
三昧(삼매).
불교에서 삼매라는 말. 얼마나 잘 씁니까?
삼마디 · 삼마발지. 여러 가지 말을 쓰는데
삼매라고 하는 말을 제일 많이 씁니다.
이것도 역시 한 마디로 말하자면 禪定(선정)입니다.
앞에 定慧했을때, 定 이라고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