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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8 강 - 懺悔品- 1
六. 懺悔品
時에 大師- 見廣詔二郡과 四方士庶가
騈集山中聽法하시고 於是에 升座告衆曰來하라
諸善知識아
此事는 須從自性中起니 一切時에 念念自淨其心하야
自修自行하라 見自己法身하고 見自心佛하야
自度自戒라야 始得이니 不假到此니라
旣從遠來하야 一會于此하니 皆共有緣이라
今可各各胡跪하라 先爲傳自性五分法身香하고
次授無相懺悔하리라
***
육조단경을 공부하면, 육조스님을 생각하면
차원 높은 입장에서 불교를 배우는 것 같이 되어 있는데,
그러나
또 아예 육조스님의 사상은
어떤 次第(차제)를
두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처음 배우는 사람 다르고, 나중 배우는 사람 다르고,
육조스님께서는 그런 불교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육조스님의 사상은
“頓悟頓修(돈오돈수)다.”
라고 하는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할 때,
그런 말을 쓰는데 “돈오돈수” 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 순서에 입각해서 불교를 아는 것이 아니고,
알면 한꺼번에 제대로 아는 것이고,
모르면 아예 모르는 것이다. 뭐 쉽게 표현하면
그런 뜻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천수경부터. 아니면 기초교리부터.
아니면 소승교니, 이런 교리적인 단계를
밟아 올라가서 공부한다는 것은 요즘에
생긴 일이지, 육조스님 생각에는 전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마음이
짧은 순간에 환히 밝아질 수 있는가?
아주
“환히 밝아질 수 있는가?”
그래서 모든 이치가 그냥 우리가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그렇게 환히 볼 수 있는 그런
길이 없을까? 어떻게 하더라도 그렇게 불교를
지도하는 것이, 당신이
“바라는 바다.”
라는 그런 말로 정리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얼른 생각하면 불교의 어떤 기초교리라든지,
기본교설 이런 것이 있어요. 흔히 말하는
“기본교리”
이런 말이 있는데, 그런 것은 근래에 우리가
정한 것이고, 진짜 선지식. 참으로 훌륭한 선지식은
그렇게 지도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들이 지도하는 대로 우리가
공부를 제대로 하면 더 이상 바랄 바가 없지요.
그래서 간혹 서장도 공부를 하십니다만,
과거 선지식들. 서장 같은 강의를 우리가 보면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요.
뭐 네가 기초교리를 알았느냐 몰랐느냐
이런 질문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입장으로 생각하면
육조단경부터 공부하든,
화엄경부터 공부하든, 하등의 문제될 바는 없는데,
그러나 또 요즘사람들이 불교공부 하는 상식에서
본다면 “상당히 차원이 높은 공부다.” 이렇게도
볼 수가 있어요. 불교라는 이것이 또 어떻게 보면
참 무슨 그런 순서가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고,
또 없는 가운데 어떻게 찾아보면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또 어떤 주장이 꼭 옳다 이런 것도 없어요.
순서대로 공부한다는 것도, 그 순서라는 것이
처음부터 이상한 소리고요.
그래서 순서대로 공부한다는 말도 모순을 많이
띠고 있습니다. 최소한도 불교 안에서는 그래요.
다른 데는 그렇지가 않지요.
다른 데는 수학을 공부하던지 뭘 하던지
순서가 다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만은 그런 단계를 밟아서 순서대로
공부한다는 것이 꼭 맞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육조단경을 공부한다.
아니면 다른 어떤
“禪書(선서)를 공부한다.”
아니면 “화엄경을 공부한다.” 고 하는 것이
꼭 차원 높은 공부라고 말할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문제들이, 요즘 불교를 공부하는
곳이 많으니까 그런 데서 우리가 공부한
어떤 선입관 같은 것이 있겠지요.
그런 것을 추려서 볼 때, 육조단경은
현재 내 입장에서는 좀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경전입니다.
오늘은 여섯 번째
懺悔品(참회품)이 되겠습니다.
참회라고 하는 것이 종교에만 있는 것이지요.
“뉘우친다.”
평소에 꼭 잘못을 했다고 해서 뉘우친다기
보다는,
聖人(성인)의 안목에서 볼 때 중생들의 삶이라고 하는 것.
보통 인간들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모순투성이고,
잘못 투성이니까요. 그래서 참회라고 하는 것은
그런 입장에서 나온 말입니다.
불교에서 보면요. 물론 당장에 어떤 행위를 했을 때,
그 행위에 대해서 참회를 하는 그런 경우도 많이 있고요.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중생의 삶이라는 것은
모순투성이고, 허물투성이고, 잘못 투성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알고 짓는 잘못도 있지만
모르고 짓는 잘못도 부지기수로 많으니까요.
그런 것을 모두 뭉뚱그려서
“참회한다.”
는 표현을 합니다. 우리가 육조단경을 공부 하는 것은,
일반적인 불교에서 말하는 참회를 알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육조스님께서 참회를 뭐 라고 가르치고 계신가?
어떻게 가르치고 계신가?
이것을 우리가 알기위해서 육조단경을 펴놓고
공부 하는데, 그러기 때문에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신 참회는 일반불교, 일반에서 말하는
그런 참회 하고는 조금 달라요.
다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동안 쭉 보아 왔듯이 선정이라든지 좌선이라든지,
이런 것들도 육조스님의 소견은 뭐라고 할까?
차원이 좀 달라요. 여기 금방 우리가
戒香(계향) ·
定香(정향) ·
解脫香(해탈향).
해가지고
五分法身香(오분법신향)의 설명이 나오는데
그것 역시 보통 상식적인 불교에서 보는 것
하고는, 상당히 다른 차원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불교공부 하다보면 혼란스러운 것이
바로 그 점이예요.
三寶(삼보)의 첫째가 부처님인데,
“부처님” 하면 설명이 각양각색입니다.
10명 붙들고
“부처님”
물어보면 10명 설명이 다 달라요.
예를 들어서 기독교 같은 데서나 천주교 같은 데서
하나님에 대해서 말 하라고 하면, 저도 어릴 때
교리문답도 돌돌돌 외웠지만 천편일률적으로
대답을 해요. 만 명에게 물어도 만 명의 대답이
똑 같아야 되는 거예요 거기는요.
그런데
불교는 부처님에 대해서 물으면 만 명에게 물으면
만 명 대답이 다 달라요.
그것은 틀리게 말한 경우도 물론 있지만,
틀려서가 아니라 견해가 달라서,
부처님을 이해하는데 대한 견해가 달라서 그렇지요.
그 표현이 자기 아는 대로 표현할 수있는
그런 아주 지극히 자유로운 그런 것도 있고요.
또 그 의미를 말뚝 박은 듯이 딱 박아놓고
부처님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또 그럴 수는 없는 것이 불교인 것이고요.
그래서 여기 참회니 오분법신향이니 좌선이니,
금강경에서
육조스님이 말씀하신 소위 극락세계라고 하는 것.
십 만억 국토를 지나서 서쪽에 있는 극락이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뭐냐?
이것도 육조스님의 아주 독특한 설명이 있습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 감히 뭐라도 이의를 달지를 못합니다.
보통 불교 일반에서 말하는 것하고 전혀 다른데도
불구하고요.
그것은 그 만큼 뛰어난 선지식의 안목으로
꿰뚫어보고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우리 상식과 상당히 많은 같은 점도
있으면서도 또 많은 다른 차이도 있습니다.
오늘 여기 참회라고 하는 것.
보통 우리, 천수경에서
“참회”
라고 하면
“懺悔眞言(참회진언)”
이 있고. 밀교적인 참회가 있고.
또 초발심자경문에는
“理懺(이참)
事懺(사참)을 하라.” 그래 돼있어요.
이참은
罪性(죄성)이 본래 空(공)한줄 알고,
“죄라고 하는 것이 본래 없는 거다.”라는
이치를 아는 것. 그것은
이참이고,
사참은 그런 줄 알고도 무릎이 닳도록
절을 하고 열심히 염불을 하는 이런 것이
사참이다
해서, “이참과 사참을 병행을 할 때,
가장 이상적인 참회가 된다.”
이렇게 설명을 하고, 참 여러 가지입니다.
그런데 여기, 그런 상식을 염두에 두고
육조스님의 설명을 보면 훨씬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六. 懺悔品(참회품)
時(시)에 大師(대사)가→ 육조대사께서
見廣詔二郡(견광소이군)과→
廣州(광주) 詔主(소주) 이군과 그리고 밑.
四方士庶(사방사서)가→
선비나 또는 보통 서민. 이런 이들이
騈集山中聽法(병집산중청법)하시고→
모두 법을 들으려고 산중에 모인 것을
見. “보셨다.” 이런 말입니다.
여기 廣詔二郡. 했는데, 육조스님께서 계셨던
조계산. 거기에 육조스님이 계셨던 곳 이라 해서,
우리나라 불자들도 상당히 많이 찾는 곳인데,
중국 남쪽에 광주라는 곳이 있어요.
아주 큰 도시지 않습니까? 홍콩 가까운데지요.
거기서 좀 더 시골로 기차를 타고 조금만 가면
소주라고 하는 데가 있습니다.
詔主(소주). 그러니까 좀 큰 도시가 광주이고
작은 도시가 소주예요.같은
權驛(권역)입니다.
소주에서 조금 더 산으로 들어가면 보림사.
조계산이 있고 “보림사”라고 하는 절이 있고,
거기 가면 육조스님을 모셔 놨어요.
육조스님의 육신을 모셔 놨다고 전해 내려오는데,
그래서 이
廣詔二郡이라고 하는 것은 그 당시는
광주소주 차별 없이 그렇게 나눴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 사방에서 모인 선비. 서민들이
산중에 많이 모였다 이것이지요.
그러니까 전번에는 육조스님이 내려갔지요?
於是(어시)에
升座告衆曰(승좌고중왈)하라→
자리에 올라서 대중에게 고해서, 가로대, 말씀하시기를
來諸善知識(내제선지식)아→
잘 오십시오. 여러 선지식들이여!
此事(차사)는→
이 일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에서 특히
禪門(선문)에서 이 일을, 차사라고 하는 말을 잘 써요.
“이 일”
하면 뻔한 일입니다.
딱. 한 가지 일 뿐이예요.
자기혁신!
요즘 말로 하면
自己改革(자기개혁)이예요.
불교적인 용어는 해탈이 되겠지요.
生死解脫(생사해탈)의 문제!
근원적인 자기혁신의 문제!
그것 때문에 불교가 있고,
불교가 하는 일은 바로 그것이니까요.
“이 일!”
“이 일”하면 그냥 다 그렇게 통하게 되어 있어요.
“이 일”
이라고 하는 것은
須從自性中起(수종자성중기)라→
모름지기 자성으로부터,
우리 자성이라는 것은 자신의
性品(성품)! 이런 말입니다.
자신의 성품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거기서부터 출발 한다 이겁니다.
“이 일!”
생사해탈의 문제라고 하는 것은,
내 마음으로 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그러니
一切時(일체시)에→ 모든 하루 24시간 중에
念念自淨其心(염념자정기심)하야→
순간순간.
“매 순간마다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비워내라.”
이 겁니다. 깨끗이 비워내서,
自修自行(자수자행)하라→
스스로 닦고 스스로 행하라.
그러니까
自淨其心(자정기심).
自淨其心. 어디서 들어본 소리 같지요?
아주 뛰어난 선비가
“어떤 것이 불교입니까?”
물었지요. 물으니까 어떤 훌륭한 선지식이 있다가
“諸惡莫作(제악막작)하고
衆善奉行(중선봉행)하라. 그리고
自淨其心(자정기심)하면
是諸佛敎(시제불교)니라.”
그야말로 이 말은 불교의 ABC나 마찬가지이지요.
그러니까 불교를 물으러 갔던 선비가 아이,
그거야 불교의 ABC아닙니까?
세 살 먹은 아이도 다 아는 불교인데,
무슨 악한 일 하지 말고 착한 일 하고
자정기심. 스스로 그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
이것이 불교다. 그거야 누군들 모르겠습니까?
불교에 안 들어와도 아는 이치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鵲巢(작소) 도림선사지요. 그 분이...
백낙천이라는 그 유명한분과의 대화인데...
그거야 뭐 하기사 세 살 먹은 아이도 알지마는
80세인 노인도 알지를 못하니 실천을 못한다.
실천하기는 80살 먹은 노인도 어려운 일 아니냐?
그랬어요. 그러니까 그 말에 천하의 백낙천이
그만 고개를 숙이게 되지요. 그러니까
아이 스님! 그 일은 그렇다손 치고...
쳐다보니까 아주 위험한 나무위에 앉아서
수행을 하느라고 졸지 않고
정말 마음을 칼날 위에 선 듯 한 그런 기분으로
수행하는 본보기를 보인다고
나무위에서 수행하던 스님이지요.
올려다보니 나무에서 떨어질 것 같은데
어떻게 노스님이 그렇게 위험하게 나무위에 있습니까?
내려오십시오. 이렇게 이야기를 했지요. 그랬더니
“내가 위험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위험한 것 같소.”
그러니까 이 사람이 하도 어이없는 말씀을 듣고는,
“나는 이 편안한 땅위에 서서 넘어져봤자
하등의 다칠 일 없는 이런 편안한 곳에 내가 있고,
스님은 떨어졌다 하면 목숨이 위태로운
그런 곳에 있는데, 어째서 내가 위험하고
스님이 편안합니까?” 그렇게 또 질문을 했지요.
그러니까,
“비록 나는 나무위에 있고,
당신은 안전한 땅위에 있다고 하지만,
당신은 지금 높은 벼슬을 하고 있기 때문에
시시각각 당신의 자리를 노리고 침범하는
사람이 많다. 각축과 경쟁이 얼마나 심한 자리냐?
당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이 아니냐?
솔직하게 이야기 해봐라.”
그러니까 '아, 맞다.'
사실 세상에 높은 벼슬을 한다는 일이
그런 입장이니까요. 그래서 뛰어난
선비를(벼슬도 그 당시 높은 사림이었어요.)
교화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여기 그대로 있네요.
自淨其心이나
自淨其意나 뜻은 똑 같습니다.
그런데 이거는 諸惡莫作 衆善奉行.
모든 악한 일은 하지마라.
그리고 온갖 착한일은 해라. 열심히 해라.
그것 까지는 좋아요.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소리지요.
초등학교 선생님들 제일 많이 할 수 있는 소리지요.
그 다음에
自淨其心. 이것이 문제예요 自淨其心...
이것이 어려운 일이라고요. 이
淨자는 비운다는 뜻입니다.
깨끗이 비워 낸다는 뜻이예요.
우리 마음에 때가 묻어서 물론 때를 닦는다
하는 그런 의미도 생각할 수가 있겠는데,
그것 가지고 도림선사가 하신 말씀은 아니에요.
이거는
본래 어디에 있지요?
법구경에도 있습니다.
초기경전부터 있는 말이에요.
이것이 초기경전! 법구경에 이 글이 있습니다.
自淨其心 是諸佛敎!
그래서 이것은 마음을 완전히 비운다는 뜻입니다.
우리마음 속에는 참 너무나도 많은 지식과.
너무나도 많은 경험과. 온갖 잣대와
온갖 틀과 자기 나름의 어떤 규칙과.
자기 나름의 어떤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하는 규정들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그 규정에 안 맞으면 틀렸다
그러고 나쁘다고 그러고, 인생을 잘 못산다고 그러지요.
그런데
그런 규정들이 과연 필요한 것이라서 있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면요.
사람은 규정할 수 없는 거예요.
아예 무엇으로도 잣대로 잴 수도 없고
선을 그을 수도 없고,
어떤 제도로서 규정 할 수 없는
그런 지극히 자유로운,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대자유가 우리들의 진정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볼때요.
그래서
그런 규정과 어떤 잣대와 틀과
우리들의 어떤 상식과 이런 것들을 다 비워버려라.
깨끗이 비워버려라 하는 것이 바로
自淨其心. 또는
自淨其意 라고 하는 이 말이됩니다.
그래서
이 말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앞의 두 구절은 아무 것도 아닌데,
세 번째 구절이 어려운 거예요. 그것의 뜻이 깊지요.
그러니까
是諸佛敎.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 구절 때문에 그래요.
自淨其心!
諸惡莫作 衆善奉行은
누구나 할 수 이야기인데,
自淨其心은 아무나 못하는 이야기지요.
불교가 아니면 못하는 일이지요.
그래서 그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라는 말에 아무도
異意(이의)를 달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念念에, 순간순간.
自淨其心하야, 그 마음을 깨끗이 비워서,
自修自行하라. 스스로 닦고 스스로 행하라.
이것은 뭐
自修自行이라고 하는 것이,
自淨其心하면 끝인데
그래도 말을 구체적으로 표현을 하자면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 이제 우선 서론 삼아,
육조스님께서
“선지식아 잘 오너라.
이 일은 우리마음으로 부터 출발 하는 거야.
그러면 한순간에 우리마음을 깨끗이 비워버리면
그러면 되는 것이다.”
見自己法身(견자기법신)하고→ 자기법신을 보고
見自心佛(견자심불)하야→
자신의 마음의 부처를 보라. 그렇게되면
自度自戒(자도자계)하라야
始得(시득)이니→
스스로 제도하고 스스로 경계해야
그것이 옳은 것이다.
始得. 그것이 비로소 옳은 것이다.
그래 뭐 타의에 의해서, 또 어떤 다른 모델을 두고
거기에 내가 맞춘다든지 이런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전부...
불교는 처음보터 자신의 문제이고,
중간도 자신의 문제이고,
끝도 자신의 문제이고,
전부 자기 속에 문제가 있고,
자기 속에 해결책이 있고,
전부 자기의 일이지
다른 사람은 정말 혀[舌(설)]도 못 댈 불교적인 일이다.
글리고 생사해탈의 문제이고,
自己改革(자기개혁)!
근원적인 자기개혁의 문제가
바로 거기에 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不假到此(불가도차)니라
旣從遠來(기종원래)하야
一會于此(일회우차)하니→
사실은 여기에 이를 것을
假者(가자)할 필요가 없다. 스스로 할 일이기 때문에
굳이 내가있는 이 산중에 까지 올 일이 없다 이겁니다.
나 하고는 관계없는, 궁극적으로
나 하고는 아무 관계없는 일이다.
본래
“이 일” 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되어있다.
네 혼자 알아서 해결할 문제이지,
不假到此.
여기에 이를 것을 假者할 필요가 없다.
그런 말입니다.
“빌리지 않는다.”
이 말이지요. 여기까지 올 필요 없다.
그런데
旣從遠來하야,
이미 먼데서부터 모두 이렇게 와서
一會于此라.
여기에 우리가 모두 함께 모였다.
一會. 여기에 함께 모여서...
그런데 그것은 뭐냐?
皆共有緣(개공유연)이라→
다 우리들의 인연이 있어서 이렇게 모였다.
여기 왔다고 해서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 와야만 해결된다는 그런 이유는 아니다.
요컨대 자신의 문제이지만,
그러나 여기 온 것은,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은 다
우리가 다 인연이 있어서 이렇게 모인 것이다.
今可各各胡跪(금가각각호궤)하라→
이렇게 이왕 왔으니, 형식적이나마
五分法身香을 받고, 그리고
懺悔(참회)를 하고
四弘誓願도 하고
三歸依도 하고,
사실은 삼귀의를 먼저 해야 되는데,
여기 육조스님은 사홍서원 먼저하고
삼귀의 하고, 그리고 三身(삼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그런 순서로 쭉 나가요.
참회품이 상당히 깁니다.
그래 인연이 있어서 여기까지 왔으니, 각각
胡跪(호궤)하라 그랬어요.
“호궤” 아세요? 胡跪!
호궤합장, 합장하고 꿇어앉아서 무릎을 세우는 거예요.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지 않고 세우는 것인데,
그것이 제일 힘들지요. 戒(계)받을 때 그렇게 합니다.
계를 설명 들을 때는 안 하는데,
약속할 때, “예 지키겠습니다.”라고 약속할 때는
꼭 “호궤 합장하라”고 그렇게 경전에 되어 있어요.
그 만큼 정신을 집중해서 한다는 그런 의미겠지요.
先爲傳自性五分法身香(선위전자성오분법신향)하고→
먼저 자성의 오분법신향을 전하고 다음에는
次授無相懺悔(차수무상참회)하리라→
“모양 없는 참회를 주겠다.”
여기 벌써 말씀이, 그냥
“오분법신향을 설명 하겠다.”
우리 같으면 그렇게 나가지요.
그런데 여기는
自性五分法身香 이라고
결론부터 벌써 가지고 문제를 던지고 있습니다.
답부터 가지고 문제를 던지고 있어요.
그리고
無相懺悔 라는 것도 참회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도 다 여기에 이야기하면서,
다 표현하면서 참회하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相이 없는 참회를 주겠다.”
두 가지를 일단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