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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혹시 주식회사삼동이라고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이 기업은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삼호리에 있는 절연금속 및 케이블 제조업체입니다.
본사는 충북 문경 폐광지역에 있습니다.
여기까지 듣고 이 기업에서 신입사원 모집한다고 한다면 여러분 지원하시겠습니까?
이 작은 중소기업은 국내 2개 공장, 미국에 테네시 공장과 오하이오에 2개의 공장을, 유럽에도 1개의 공장을 가진 기업으로 연 매출 1조를 이상을 올리고 있는 기업입니다.
전 세계에 무산소동과 연속권위권선 공급의 세계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는 히든 챔피언으로, 2013년 10월 KBS1 TV 히든 챔피언이라는 프로에서 ‘코일하나로 1조 클럽에 가입하다’는 제목으로 방송되었던 기업입니다.
중소기업이지만 대기업 부럽지 않는 복리후생을 지원하는 이 기업!
작지만 강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고, 대전에 기술연구소를 운영하여 각종 기술 특허를 보유하고 있는 기업으로 우리나라 그 어떤 대기업도 무시할 수 없는 강소기업입니다.
여러분 혹시 작고 볼품없다고 무시했다가 당황한 경험 없나요?
혹시 학력이 낮다고, 출신 때문에 무시한 적은 없나요?
방금 전 소개한 삼동의 기업주 이이주 대표는 최종학력이 고졸이며, 구로공단 노동자 출신입니다. 소재 전문 기업으로 세계 1등 제품을 만들어내는 이 기업은 작기만 세계 굴지의 대기업도 무시 못 할 강한 기업입니다.
보기에 작고 약하다고 다 약한 것은 아닙니다.
약한 것이라고 강한 것을 이기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911테러를 기억하십니까?
첨단 방공망을 뚫고 건물을 무너뜨려 3,000여명의 희생자를 발생시킨 이 사건에서, 테러범이 비행기를 납치할 때 사용한 무기는 커터칼이었습니다. 연필 깎는 커터 칼로 첨단 경계망을 뚫은 것입니다.
우리 사는 세상에서는 추한 것으로 버림받던 것이 상황이 바뀌어 귀한 대접을 받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버렸던 아귀와 같을지라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귀한 몸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약하고 미약한 것을 들어 강하게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귀한 시간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 2절에 이스라엘을 다스릴 새로운 통치자의 근본은 상고에 있고, 영원에 있다고 말합니다.
쉬운 성경은 이 구절을 “그는 아주 먼 옛날, 멀고 먼 옛날로부터 온다.”고 표현합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릴 새로운 통치자는 천지를 창조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새로운 통치자 예수그리스도는 유다지파의 에브랏이라고도 하는 에브라다 지역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 지역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거주하던 곳이며 보아스와 룻 사이에서 오벳이 태어난 곳입니다.
룻기 1:1-2에 보면,
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룻과 보아스의 이름은 마태복음 1장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은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합니다.
1-6절 상반절까지만 보면,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시는 1-6절 사이의 예수님의 족보에는 세 명의 여성이 등장합니다.
족보에는 남성 이름만 기록됨에도 여성이름이 등장함에는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족보에 걸맞지 않게 볼품없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라합과 룻은 이방여인이며, 라합은 이스라엘에서 멸시하는 기생이었으며, 룻은 적대약자였던 과부였습니다.
룻기에 등장하는 보아스는 기생 라합과 살몬 사이에 태어난 아들입니다.
살몬이 어떤 사람인지 잠깐 살펴보면,
마태복음 1:4-5에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살몬은 나손의 아들입니다.
이 나손에 대한 기록은 민수기 2:3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동방 해 돋는 쪽에 진 칠 자는 그 진영별로 유다의 진영의 군기에 속한 자라 유다 자손의 지휘관은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이요 라고 기록합니다.
나손은 출애굽당시 유다자손의 지휘관이었습니다.
따라서 보아스 집안은 유다 자손 중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나손 집안의 아들 살몬이 왜? 기생 라합과 결혼하였을까요?
여호수아 2:1에 보면,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12명의 정탐꾼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 만이 가나안 땅을 우리 밥이라 말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을 증언했었다는 것을 기억하시죠?
그렇다면, 여호수아가 다시 정탐꾼을 보낼 때 부정적인 증언을 하였던 10개 지파에서 두 사람을 선출했을까요? 아니면 여호수아 지파의 에브라임 지파에서 1명, 갈렙이 속한 유다지파에서 1명을 선출했을까요?
에브라엘 지파와 유다지파에서 정탐꾼을 선발했다면, 유다 지파에서는 유다 자손의 지휘관이었던 나손의 아들 살몬이 그 임무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살몬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나손에 이어서 지휘관이 될 사람입니다.
따라서 민족의 생사를 가늠할 중요한 임무에 적임자였을 것입니다.
여호수아 6:25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자들을 숨겼음이었더라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약속한대로 기생 라합과 그 가족들을 살려 이스라엘 중에 거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방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태도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점령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기생 라합은 정탐꾼 살몬의 목숨을 살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안에 거주하는 기생 라합은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사람의 혀가 얼마나 무서운지, 사람의 말로 상대방에게 얼마나 큰 아픔을 주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고난 중에 있는 라합을 이제 정탐꾼이었던 살몬이 살길을 열어 주어야 합니다.
살몬은 어떻게 라합을 살게 해 주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이런 추론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정직한 살몬은 목숨 값을 갚기 위해서라도 라합과 결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살몬의 아들 보아스가 결혼하였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습니다.
사회적 인식에 대항하여 옳은 일을 행하였던 살몬에게 있어서 결혼하지 못한 보아스는 참으로 무거운 마음의 짐이었을 것입니다.
왜 보아스가 결혼하지 못했을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이방인을 멸시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성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에 대한 인식이 좋지 못한 이스라엘의 처녀들이 이방인을 시어머니로 모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도 기생이었던 시어머니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아스는 자신의 어머니를 멸시하는 이스라엘 처자들과 결혼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당시 룻의 나이가 대략 30세로 볼 때, 보아스가 룻을 ‘딸’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고려하면 보아스는 대략 50세가 넘었을 나이입니다.
살몬의 마음에 무거운 짐과 그 어머니 라합의 마음에 죄책감을 가중시키며이렇게 늙어가던 보아스에게 룻이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는 룻기를 읽으면서 보아스가 인물 좋고 가문 좋고 재물도 많은 어디하나 흠잡을 곳이 없는 능력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분명 성문에 앉아서 장로들과 자리를 함께 할 수 있을만큼 사회적 지위를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조금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는 이방인 어머니 소생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다 지파의 유력한 살몬의 가문이 아니었다면 보아스는 수많은 멸시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보아스는 역시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이방 여인 과부 룻과 결혼하여 오벳을 낳았습니다.
그 오벳이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요 이새의 아버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보잘 것 없고, 사회적으로 멸시받는 사람들을 택하셔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셨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과 십자가 지심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전 우주를 통치하시던 예수님은 낮고 천한 말구유 위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날, 세상의 그 어떤 권력자나 종교지도자들도 예수님의 오심을 반기지 않았습니다.
그 누구도 이 땅에 오신 주님을 영접하시 않을 때, 이방인인 동방박사들과 당시 사회적인 멸시를 받던 목자들이 예수님의 탄생의 소식을 접하고 경배하였습니다.
유대인 중에 최초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찬양한 사람들은 종교지도자가 아니라 목동들이었습니다.
유대인 지도자들, 권력자들은 예수님의 나심을 인지하지 못했을까요?
헤롯왕은 예수님의 나심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동방박사에게 들은 내용을 토대로 2살 이하의 아이들을 다 몰살하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무엇이 그를 포악하게 만들었습니까?
그 안에 있는 죄성이 그를 지배하여 그를 악의 도구가 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선 이들만이 하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권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약하고 미약한 존재라 할지라도 작은 것에서 강함을 이끄시는 하나님은 약함을 통하여 강한 권능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1:25)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1:27)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10)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이사야 60:22)
예수님은 강함을 버리시고 연약한 자리에 오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힘없이 무력하게 육신의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약함이 죽음으로 강력한 진을 파하셨습니다.
약함으로, 미약함으로, 멸시천대 받는 사회적인 약자들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설의 방법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러한 역설의 은혜를 더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을 평강의 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평강이라는 단어는 부드럽고 따스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평강의 주님께서는 따스함과 단호함을 함께 가지고 계십니다.
4절에 보면 ‘평강’이신 주님께서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능력과 위엄을 의지하여 목축하신다는 말씀이 조금 부자연스럽습니다.
목축으로 번역된 단어는 먹이다, 풀을 뜯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양, 나귀, 소, 노루 새끼 등을 먹이고 돌보는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고작 목축이나 한다?고 생각하면 절대자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대 사회에서 왕들의 책무중의 하나가 백성들을 먹이는 것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해 할 수 있 습니다.
고대 왕들은 백성들을 먹일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입증하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고대 왕들을 목자라고 불렀습니다.
평강의 주로 오신 예수님은 양, 나귀, 노루 새끼와 같이 힘없고 연약한 백성들을 먹이고 돌보심으로, 연약한 그들이 창대하게 되어 땅 끝까지 그 영향력을 발휘하게 하실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평강의 주님은 이렇게 그의 백성들을 돌보심과 동시에 대적들을 진멸하십니다.
5-9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평강의 왕께서 건져주시고, 그의 대적들은 사자와 양을 찢는 것처럼, 즉, 대적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고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처럼 동일한 방법으로 그들을 처단하실 것입니다.
볼품없고 초라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로 이 땅에 다시 오십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가지 성도들은 기다리고 견뎌야 합니다.
3절의 말씀처럼 여인이 해산하는 것과 같은 고통을 이겨내면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의 날이 도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돌보시고 성도들의 믿음의 승리가 땅 끝까지 전달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성도들을 위협하는 대적들의 손에서 건져주실 것입니다.
우리와 같이 미약하고 볼품없는 자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라고 자책하고 낮은 자존감으로 낮은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연약한 우리를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게 하십니다.
유다의 아주 작은 곳 에브라다에 오신 주님처럼, 우리 또한 겸손하게 낮은 곳을 지향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평강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평강을 이루기 위해서는 때로는 사랑으로 교회 지체들을 섬기고, 때로는 단호한 결단으로 대적들과 싸워야합니다.
진정한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것을 내려놓고 영적 전쟁에 임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합니다.
제가 군 생활 하는 동안 매일 아침 군복을 입을 때 반드시 목에 거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군번줄이라고 하는 인식표입니다.
인식표를 목에 맨다는 것은 오늘 당장 내가 죽을 각오로 전쟁에 참여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성도들이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죽음을 각오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없어서, 내가 가진 능력이 미약하여, 내가 사회적 위치가 낮고 볼품없기 때문에.... 등등의 말들은 모두 핑계에 불과합니다.
평강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은 낮은 자를 높이시고, 탄압받고 불안에 떠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참 평안을 주시고 강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여러분은 평강의 왕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작고 볼품없는 지역인 에브랏에 오신 예수님을 본받아 겸손하게 여러분이 속한 모든 곳에서 견디고 버티고 저항하여 마침내 승리하는 평강의 주님의 온전한 제자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소명이 작고 미약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결실을 들어 크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크고 작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평강의 주님을 따르는 삶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성탄을 준비하며 기다리는 지금, 약한 나를 강하게 하시고 창대하게 하시는 평강의 주님을 겸손히 그리고 담대히 따르는 사명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