雲峯 이규완 현대민화를 말하다.
이규완 민화 이야기. (1)
오래전 화가의 꿈을 갖고 67년 아동만화를 그리는 화실에 입문하였으며, 사진관을 운영하시던 친척의 소개로 68년경 수당 강희원선생님의 문하에 입문 하였다. 경제적 사정이 여유롭지 못한 것을 스승님께서 아시고 월급을 받을 수 있는 경산景山 송윤안 화실을 소개하여 민화공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경산 송윤안선생은 민화를 그려서 생활을 하시는 분으로 이미 7~80년에 개인전을 수십회 하셨던 분으로 우리나라 최초 민화작가로 보면 될 것 같다.
민화를 그리던 시절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문제가 있었다. 지지리도 못그린 그림, 떠돌이 환쟁이들의 그림이라는 것 이다. 또 하나는 민화의 주재가 미신(도교) 따위와 뒤범벅이 되어 미학적 철학은 도무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림의 도상들도 하나같이 뒤틀리고 일그러져 미숙한 듯 한 그림들 이었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사대부, 일반백성들의 집안 곳곳을 장식했던 대중미술이었던 민화그림들 속에는 분명히 우리 민족이 사랑해온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이러한 궁금중 해결책으로 70년대 초, 골동품상이나 고물상(당시에는 고물상에서 민화를 취급)을 발로 뛰면서 공부를 했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민화를 구입하여 손으로 어루만지기도 하고 때로는 화지를 연구하기 위해 찢어보기도 하고 물에 불려 물감을 연구해 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안타까운 일 이지만 민화를 연구하던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70년대 십여년은 거의 재현 민화를 그리던 시절이었으며, 한편으로는 민화에 얽힌 이론과 함께 민화속에 숨어 있는 조형성을 찾고자 했다.
과거의 모든 문명들은 문자기록이 나타나기 이전의 시대라는 의미에서 선사시대先史時代라 말하는 원시시대를 가지고 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문화유산들은 미술의 최초의 기원으로 보고 있으며, 스페인의 북부, 칸타브리아지방의 알타미라 동굴, 알타미라 동굴벽화와, 프랑스 도르도뉴 몽티냐크 근처 베제르 계곡의 절벽 위쪽에 있는 라스코 벽화, 고구려 고분벽화의 미술에서 부터 장신구와 도기, 등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원시인들에게 있어 미술(벽화)의 제작목적은 주술적 의식이나 소망을 기원하는 것 으로서 자신들을 보호하려는 뜻에 있었다. 먹거리에 대한 욕구로서 풍요로운 먹이사냥, 사나운 짐승으로 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했으며, 노동력 확보를 위한 다산의 염원들이 내재되어 있었다. 이것은 곧 미술의 흔적으로 현시대 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들 원시미술에서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의식으로서 소망에 대한 미술을 부리는 도구로서 여전히 존재한다.
2020. 4.
한국민화국제교류협회 회장
운봉 창작민화 연구소 소장 이 규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