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두산(龍頭山)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에 있는 산.
[명칭 유래]
용두산은 예전부터 짙은 곰솔[해송]들이 풍부하여 송현산(松峴山)이라고 하였다. 용두산의 지명은 산세가 마치 용(龍)이 머리를 들고 바다를 건너는 듯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현황]
해발 49m의 낮은 구릉성 산지인 용두산은 부산의 역사를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산으로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관광 명소로 알려져 있다. 조선 시대 초량 왜관이 이 산을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었고, 1876년 부산항 개항 이후 이 일대는 일본인 거리로 바뀌었으나 광복 이후 일본 신사가 헐려 없어졌고, 6·25 전쟁 이후 부산에 밀려든 피난민들의 판자촌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1954년 12월 10일에 일어났던 큰 불로 피난민 판자촌이 거의 다 불타 없어진 뒤 그 일대가 정리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재는 부산광역시의 도심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으며 정상부까지 시가지화되어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부산광역시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부산 탑[높이 120m]에서는 부산 시가지와 부산항을 조망할 수 있다. 또한 주변에 40계단문화관, BIFF 거리, 광복동 패션 거리, 백산기념관, 부산 근대 역사관, 국제 시장, 용두산 미술의 거리, 보수동 헌책방 골목, 자갈치 시장, 용두산 문화의 거리 등이 조성되어 있어 풍부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용두산이란 지명은 용 용(龍) 자에 머리 두(頭)자를 써서 '용의 머리 형상을 한 산'이란 뜻이다. 원래는 용두산보다 조금 작은 동산인 용미산(용의 꼬리)도 있어서 풍수지리적으로 대칭하여 한 마리 용의 형상을 이루었다고 하지만, 1936년 일제가 부산부청을 만들면서 착평(鑿坪)하여 사라졌다. 이후 부산시청으로 쓰였으며, 지금은 롯데백화점 광복점이 들어섰다.
본래 용두산에는 8.15 광복 이전에 일본식 신사가 있었다. 조선신궁을 비롯해 일제강점기 이후 세워진 신사들과는 달리, 용두산신사는 숙종 4년(1678)에 왜관의 일본인들이 현해탄을 건너는 동안 무사 항해를 기원하고자 쓰시마 번주가 세운 시설이었다. 즉 재한 외국인을 위한 정당한 종교시설이었으니,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시작부터 제국주의로 점철된 전국 다른 신사들과는 근본이 다르긴 했지만, 훗날 일제는 한국인에게도 이곳에 방문해 신사참배할 것을 강요했고 미운털이 박힌다.
이후 용두산 중턱에 있던 신사를 산 정상으로 옮기고, 일제강점기에도 신사 겸 공원으로서 '용두산공원'이 되었다. 주변 일대는 벤텐초(弁天町, 지금의 광복동)로 명명되어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였다. 광복 직후에도 일본으로 돌아가는 히키아게샤들의 결집 장소로 쓰이다가, 어떤 애국심 넘치는 집사[1]가 신사에 방화를 저지르고 말았다. 때마침 해풍이 불어 굉장히 잘 타올랐다고 한다. 당시 부산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조선 사람들의 억지 절까지 받아먹어 참 잘 탄다.' 생각했다고....
그 후 거주 구역으로 지정되었다가 6.25가 터지고 피난민들이 잔뜩 모였다. 1954년 겨울에 큰 화재가 났다. 판자집이 겹겹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불은 삽시간에 번졌고 지금의 용두산공원 일대는 말 그대로 전소되고 말았다.[2] 이후 1957년 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의 호를 붙여서 우남공원이란 이름으로 개명하기도 했으나, 1966년 다시 용두산공원으로 되돌아오고 현재까지 이어졌다.
이런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관광객을 의식해서인지 이곳이 원래 용두산신사가 있었던 곳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한국의 명소 중에 예전에 신사가 있었다고 알려주는 곳은 용두산공원이 유일무이하다. 신사 존재 자체가 문제시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일제 강점기에 강압적인 용도로 지어진 신사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전통적으로 이 지역은 초량왜관이 있던 지역으로, 조선과의 외교ㆍ무역을 위해 정당하게 왜관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종교 생활을 위한 신사가 존재하였기 때문. 따라서 조선통신사와 더불어 한일우호의 역사를 나타낼 수 있다. 물론, 일제 막판에는 용도가 변질되었고 한일 갈등의 골이 너무 깊어서 사람에 따라 거부감이 들 수는 있다. 사실 부산타워는 원래 '용두산신사 본전'의 터였고 종각은 '변천 신사'의 터이며 구 충혼탑의 위치는 '용미산신사'의 터였다. 그래서 이순신 동상을 갖다 놓은 거냐고도 한다. 이곳은 1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한일 거주자들의 새해 소원을 비는 곳이기도 하다.
2000년대엔 크루즈를 타고 부산을 찾는 중국인, 일본인 등 외국인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 곳으로 자리잡았다. 평소에는 그냥 놀러 나온 한국인들이 절반 이상이다. 하지만 날씨가 좋은 시즌이면, 매우 드문 확률로 중국/일본 학생들의 수학여행 버스가 방문하기도 한다. 아무래도 서로 가까운 나라인 데다, 항구의 중심에 놓인 공원이라 그런 모양. 여행 시즌 때는 용두산공원 내로 외국인 관광객들을 태운 수많은 관광버스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장엄한 광경을 볼 수 있다. 또한 매년 5월 초엔 조선통신사 축제 행사로 인하여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온다.
2008년 "용두산공원도시"란 이름으로 부산타워를 포함하여 전면적으로 개발하려는 계획이 있었으나[3] 주변 상인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부산타워의 수명 문제도 거론되고 한국에서 제일 오래된 공원 시설 중 하나라서 리뉴얼하자는 이야기는 자주 나온다.
타워가 있는 공원 테라스 난간에는 소원 빌기용 자물쇠나 쪽지들이 다닥다닥 매달려 있다.[4] 용두산공원 부속시설인 꽃시계, 팔각정, 이순신 동상 등은 뉴스에서 부산 전경을 파노라마로 보여줄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메뉴. 꽃시계는 계절마다 다른 꽃으로 장식된다. 2010년대 들어서 타워 주변에 하트 모양이 달린 의자가 생겼는데, 연인들이 앉아서 사진을 찍거나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덕분에 앉을 곳이 편의점 앞밖에 없다.
매년 새해 방송(지상파 3사가 보도하는 방송.)에서 부산의 타종을 담당하는 종루가 여기 있으며, 사실상 동부산권의 해운대 신도심 쪽의 명소(해운대, 영화의전당, 광안대교 등)와 함께 중부산권의 구도심에서 상징이나 다름 없는 곳이다. 때문에 평소엔 한적하다가 매년 12월 31일이 되면 용두산공원은 사람들로 인하여 인산인해를 이룬다. 용두산공원으로 들어오는 차량 교통도 전면 통제되므로 오로지 걸어서 가야만 한다. 부산 각지에서 사람들이 제야의 종소리 들으러 다 몰려오기 때문에 사람들이 밀집되어서 혼란에 빠진다.
한때 비둘기가 정말 많았었다. 그래서 매점에서 모이로 말린 옥수수를 팔기도 했으나, 현재는 비둘기 퇴치 작업을 해서 멸종 대부분 없어졌다. 지금도 몇마리 돌아다니긴 하는데 닭둘기가 아니라 진짜 산비둘기다.
고전 대전 액션 게임인 월드 히어로즈의 한국 스테이지 배경의 모델이 용두산공원이다.
80년대에는 용두타워 옆 건물에 수족관, 귀신의 집 등 위락시설이 존재했으며, 용두산공원으로 올라오는 계단 쪽에는 어린이용 기차의 레일이 머리 위로 지나가게 만들어놓았었다.
용두산에 관한 노래로 '용두산 엘레지'라는 곡이 있다. 본래 그렇게 유명한 노래는 아니었으나 미스트롯 우승자 송가인이 부르면서 엄청나게 유명해졌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용두산아 용두산아 너만은 변치말자
한발 올려 맹세하고 두발 디뎌 언약하던
한 계단 두 계단 일백구십사 계단에
사랑 심어 다져놓은 그 사람은 어디가고
나만 홀로 쓸쓸히도 그 시절 못 잊어
아 못 잊어 운다
용두산아 용두산아 꽃 피던 용두산아
세월 따라 변하는 게 사람들의 마음이냐
둘이서 거닐던 일백구십사 계단에
꽃 무지개 그려놓던 그 사람은 어디 가고
정을 주던 고요히도 추억을 못 잊는
아 용두산 엘레지
[1] 1945년 11월에 불을 질렀는데, 불을 지른 이는 민영석이라는 기독교 청년이었다. 이 사람은 일제시대에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두 번이나 투옥당하고 직장까지 잃은 경험이 있었다. 민영석은 훗날 목사가 되었다.
[2] 하필 화재가 난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창고에 인민군들을 피해 부산까지 옮겨 온 조선 국왕들의 어진이 보관중이었는데 그 어진들이 이때의 화재로 일부만 남기고 모조리 불에 타버렸다.
용두산 안내.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