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鄭德濟 1742 1815 河東 明叔 鍾巖
정덕제(鄭德濟, 1742~1815?)로,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명숙(明叔), 호는 종암(鍾巖)이다. 일두 정여창의 후손으로 청하 현감(淸河縣監)을 지냈다.
승정원일기 1744책 (탈초본 92책) 정조 19년1795 5월 22일 임신 35/74 기사 1795년 乾隆(淸/高宗) 60년
○ 吏批, 再政。以趙鎭井爲掌樂正, 閔亨默爲興陽縣監, 安策爲海南縣監, 李潤明爲谷城縣監。全羅監司單徐鼎修。三政。以李義弼爲大司憲, 嚴耆爲執義, 朴瑞源爲司諫, 鄭毅祚·張錫胤爲掌令, 鄭魯榮爲持平。四政。
以鄭德濟爲淸河縣監。
송치규(宋穉圭) 1759년(영조 35)~1838년(헌종 4)
剛齋先生集卷之九 / 墓表 / 鍾巖鄭公墓表 *鄭德濟 11세
一蠧先生鄭文獻公後孫。綿延累世。不甚繁昌。識者疑之。至鍾巖公諱德濟。子姓振振。科第蟬聯。此固先生餘慶。而亦豈非公之厚德克享完福也耶。公字明叔。鍾巖其號也。鄭氏。系出河東。譜自贈密直副使諱國龍。六世而至文獻公。倡明道學。贈右議政。從祀文廟。公其十代孫也。高祖諱世杓。縣監。曾祖諱煕章。察訪。祖諱胤獻。當英廟戊申逆亂。率宗族倡義。贈吏曹參議。考諱鎭華。奉事。妣晉山姜氏。公齊女。以崇禎再壬戌三月七日生公。幼深沉厚重。不妄言笑。見者期以遠到。甫冠。奉事公歿于京邸。公千里戴星。奉櫬歸鄕。攀擗號痛。幾絶者數。以不得侍湯終孝。爲沒身恨。戊子。除厚陵參奉。移南部奉事。以事遞。又除昌陵參奉。移司甕奉事。司圃直長。忤上官棄歸。蓋公雖不辭世祿。不苟去就。未幾。又除肇慶廟參奉。移典牲奉事。陞司圃直長。禮賓主簿。肇慶廟令。出爲淸河縣監。縣土瘠民貧。賦稅煩重。公首蠲官用。火卜三十結。又減官屯稅穀,木炭元價。且以邑小吏多。害必及民。汰吏額三之二。蘇殘去瘼。隨事盡心。依文獻公安陰故事。春秋行養老禮。方伯寘中考。物論寃之。公夷然。卽束裝還家。杜門掃軌。更無進取意。詩酒優遊。以娛餘年。五子分日供奉。如陸賈故事。敎訓諸子。或不可意。對案不食。輒如萬石君之爲。家庭之內。肅如也。今上二十五年乙亥三月十七日。考終。葬郡西松坪南山丙坐原。配海州鄭氏。緯臣女。忠毅公文孚後。有梱範。事姑孝。承祀敬。處夫黨御婢僕。曲有恩義。後公二年生。先公二十九年卒。五男東老縣監,東民參奉,東蓍,東耉,東翊。女適崔寬賢,李頤鎭。李進士。曰東運,東彥。側出也。東老五男。煥輔進士,煥義司書,煥奭,煥祖生員,煥弼。一女適姜鍊。東民三男。煥忠,煥琦,煥震。伯仲進士。二女適宋觀洙,李克聞。宋參奉。東蓍三男。煥奎,煥斌,煥斗。二女適沈有述,黃得榮。東耉二男。煥道,煥文。三女適愼在中,金東昇,閔致惇。東翊一男。煥載。崔三男。李二男一女。東運五男。東彥四男。曾孫男在箕,在斗。女林觀洙。煥輔出。在修女李稷鉉。煥奭出。在璣女徐愚淳。煥祖出。其餘未冠笄者。不能盡錄。嗚呼。公以大賢嗣孫。有淳姿篤行。克承先徽。備享福履。天之報施。可謂無憾。而人猶有惜其屈於一縣。未獲究施者。斯可以知公矣。煥道,煥弼。久從余遊。今以其親命。持示姜大諫泰重所爲狀。而求墓表。余以不文辭。不獲。遂強病爲之櫽栝如此云。
강재집 제9권 / 묘표(墓表) / 종암 정공 묘표〔鍾巖鄭公墓表〕
일두(一蠧) 선생 정문헌공(鄭文獻公 정여창(鄭汝昌))의 후손은 여러 세대를 면면히 이어왔으나 그다지 번창하지 못하여 식자들이 의아하게 여겼는데 종암공(鍾巖公) 휘 덕제(德濟)는 자손이 많고 과거 급제자도 줄줄이 이어졌다. 이것은 참으로 일두 선생이 남긴 복이며 또한 공이 후덕하여 온갖 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의 자는 명숙(明叔), 종암(鍾巖)은 호이다. 정씨는 선계가 하동에서 나왔고, 계보는 밀직부사로 추증된 휘 국룡(國龍)에서 시작되었다. 6대를 내려와 문헌공이 도학(道學)을 앞장서서 밝혀 우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문묘에 배향되었는데, 공이 그의 10대손이다. 고조 휘 세표(世杓)는 현감을 지냈으며, 증조 휘 희장(熙章)은 찰방을 지냈다. 조부 휘 윤헌(胤獻)은 영조 무신란 때 친족을 이끌고 의병을 일으켜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부친 휘 진화(鎭華)는 봉사(奉事)를 지냈으며, 모친 진산 강씨(晉山姜氏)는 공제(公齊)의 따님으로 숭정 두 번째 임술년(1742, 영조18) 3월 7일에 공을 낳았다. 어려서는 침착하고 중후하여 함부로 말하거나 웃지 않아 보는 이들이 높은 벼슬에 오를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겨우 약관에 부친 봉사공이 서울 집에서 작고하였다. 공은 천 리 길에서 밤을 새워 달려가 관을 메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기절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약시중을 들면서 임종을 보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
무자년(1768, 영조44)에 후릉 참봉(厚陵參奉)으로 임명되었고, 남부 봉사(南部奉事)로 옮겼다가, 어떤 사건 때문에 교체되었다. 또 창릉 참봉(昌陵參奉)으로 임명되었고, 사옹 봉사(司甕奉事)로 옮겼다. 사포 직장(司圃直長)으로 있을 때 상관의 뜻을 거스려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대체로 공이 나라의 녹봉을 사양하지 않았지만 비굴하게 처신을 하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아 또 조경묘 참봉(肇慶廟參奉)으로 임명되었으며, 전생 봉사(典牲奉事)로 옮겼다가 사포 직장으로 승진하였으며 예빈 주부(禮賓主簿)와 조경묘 영을 거쳐 청하 현감(淸河縣監)으로 나갔다. 현은 토지가 척박하고 백성은 빈한하였는데 부역과 세금이 번거롭고 무거웠다. 공은 제일 먼저 관가 비용과 화전(火田) 30결(結)에 대한 세금을 줄이고 또 관에 소속된 토지를 경작하고 내는 세곡(稅穀)과 목탄(木炭 숯) 원가를 경감하였다. 또 고을은 작은데 아전이 많으면 폐해가 반드시 백성에게 미친다고 하여 아전 3분의 2를 내보냈다. 피폐한 백성들을 소생시키고 폐단을 제거하였으며 일에 따라서 마음을 다하였다. 문헌공이 안음(安陰)에서 행한 고사를 따라 봄가을에 양로례(養老禮)를 행하였다. 관찰사가 인사고과에서 ‘중고(中考)’를 매기자 여론이 빗발쳤다. 공은 태연하게 곧장 짐을 꾸려 집으로 돌아갔다. 문을 닫아걸고 세속 사람들과의 교제를 끊고 다시는 관직에 나가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와 술로 느긋이 지내면서 만년을 즐겼다. 아들 다섯이 날을 나누어 봉양하였는데 마치 육가(陸賈)의 고사 같았다. 자식들을 가르칠 때 간혹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밥상을 앞에 두고 먹지 않고 번번이 만석군(萬石君)같은 행동을 하였으며, 가정에서는 엄숙한 모습을 하였다. 금상 25년 을해년 3월 17에 작고하였다. 군(郡) 서쪽 송평(松坪)의 남산(南山) 병좌(丙坐) 언덕에 안장하였다. 부인 해주 정씨(海州鄭氏)는 위신(緯臣)의 따님이며 충의공(忠毅公) 문부(文孚)의 후손이다. 부녀자의 법도가 있어 시어머니를 효성으로 섬겼고, 경건하게 제사를 모셨으며, 남편 친척을 대할 때나 비복을 부릴 때는 은근히 은혜와 의리가 있었다. 공보다 2년 늦게 태어나 공보다 29년 먼저 작고하였다.
5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현감 동로(東老), 참봉 동민(東民), 동시(東蓍), 동구(東耉), 동익(東翊)이고, 딸은 최관현(崔寬賢), 이이진(李頤鎭), 이진사(李進士)에게 시집갔다. 동운(東運)과 동언(東彦)은 측실 소생이다. 동로는 5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진사 환보(煥輔), 사서(司書) 환의(煥義), 환석(煥奭), 생원 환조(煥祖), 환필(煥弼)이고, 딸은 강련(姜鍊)에게 시집갔다. 동민은 3남 3녀를 두었는데, 이들은 환충(煥忠), 환기(煥琦), 환진(煥震)이며 첫째와 둘째는 진사이다. 딸은 송관수(宋觀洙), 이극관(李克聞), 송참봉(宋參奉)에게 시집갔다. 동시는 3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환규(煥奎), 환빈(煥斌), 환두(煥斗)이고, 딸은 심유술(沈有述), 황득영(黃得榮)에게 시집갔다. 동구는 2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환도(煥道), 환문(煥文), 딸은 신재중(愼在中), 김동승(金東昇), 민치돈(閔致惇)에게 시집갔다. 동익의 외아들은 환재(煥載)이다. 최관현은 3남, 이(李)는 2남 1녀를 두었다. 동운은 5남, 동언은 4남을 두었다. 증손자는 재기(在箕), 재두(在斗)이고, 증손녀는 임관수(林觀洙)에게 시집갔다. 환보는 양자로 나갔는데, 아들은 재수(在修), 딸은 이직현(李稷鉉)에게 시집갔다. 환석은 양자로 나갔는데, 아들은 재기(在璣), 딸은 서우순(徐愚淳)에게 시집갔다. 환조는 양자로 나갔다. 그 나머지 미성년자이어서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은 대현(大賢)의 봉사손으로 순박한 자질과 독실한 행실로 선대의 아름다운 행적을 잘 계승하였다. 복을 마음껏 누렸으니 하늘이 보답으로 내려준 것도 유감이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고을 하나에 국한되어 가진 재주를 마음껏 발휘하지 못하였다고 애석히 여기는 사람이 있으니 여기서 공을 알 수 있다. 환도와 환필은 오랫동안 나를 따라다니면서 공부하였다. 지금 부친의 명으로 대간(大諫) 강태중(姜泰重)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와 보여주면서 묘표를 지어주기를 부탁하였다. 나는 글재주가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마침내 병을 무릅쓰고 글을 지었는데 대강 위의 글과 같다.
[주-D001] 정공 : 정덕제(鄭德濟, 1742~1815?)로,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명숙(明叔), 호는 종암(鍾巖)이다. 일두 정여창의 후손으로 청하 현감(淸河縣監)을 지냈다.[주-D002] 안음(安陰)에서 행한 고사를 : 일두 정여창이 1495년(연산군 원년)에 안음 현감으로 재직시에 선정을 베풀었으며 봄가을에 노인들에게 양로연(養老宴)을 베푼 것을 말한다.[주-D003] 육가(陸賈)의 고사 : 육가는 한 고조 유방을 도운 참모이다.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주면서, 자기가 찾아 갈 때에는 대접을 잘 하라고 부탁을 했다고 한다. 《漢書 卷43 陸賈傳》[주-D004] 만석군(萬石君) : 한(漢)나라 때 만석군(萬石君)으로 일컬어졌던 석분(石奮)이 자손 중에 과실을 범한 자가 있으면 굳이 말로 꾸짖지 않고 식사를 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잘못을 깨달아 고치게 했다는 고사가 있다. 《史記 卷103 萬石君列傳》[주-D005] 금상 25년 을해년 : 금상은 순조를 말한다. 순조 25년(1825)은 을해년이 아니라 을유년이다. 순조 을해년은 순조 15년(1815)이다. 착오가 있는 듯하다.[주-D006] 송평(松坪) : 경남 함양군 병곡면(甁谷面) 송평리를 말한다
[주-D007] 이(李)는 : 사위 이이진(李頤鎭), 이진사(李進士)인데, 두 사람 다 이씨로 누구를 지칭하는지 확실하지 않다.
ⓒ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 임재완 (역) | 2016
.....................
이(李)는 2남 1녀를 두었다.
.....................
접수번호 4574
제목 사위 이이진(李頤鎭), 이진사(李進士)인데, 두 사람 다 이씨로 누구를 지칭하는지 확실하지 않다.->이이진(李頤鎭)을 가리킨다.
신고자 김윤수
신고일자 2019-12-02
아이템명 고전번역서
오류유형 주석오류
[주-D007] 이(李)는 : 사위 이이진(李頤鎭), 이진사(李進士)인데, 두 사람 다 이씨로 누구를 지칭하는지 확실하지 않다.->이이진(李頤鎭)을 가리킨다.
*老栢軒先生文集卷之四十六
行狀 聾窩李公行狀
公諱頤鎭字稚養號聾窩星山之李以麗太祖佐命
公娶縣監鄭德濟之女 一蠧先生之裔也 婦德備 夫子在而爲良相 夫子歿而爲嚴君焉 子姪有過不少假貸 閨門整肅 人咸稱之 後公十四年丙辰八月九日卒 墓同封祔左 有二男一女 男長源一以文學聞 次源萬 壻權秉直
[주-D007] 이(李)는 : 사위 이이진(李頤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이진에 대한 행장인 《노백헌집(老柏軒集)》 권46 〈용와이공행장(聾窩李公行狀)〉에 이남일녀를 두었다고 기재되어 있다.
..................
증손자는 재기(在箕), 재두(在斗)이고, 증손녀는 임관수(林觀洙)에게 시집갔다. 환보는 양자로 나갔는데, 아들은 재수(在修), 딸은 이직현(李稷鉉)에게 시집갔다. 환석은 양자로 나갔는데, 아들은 재기(在璣), 딸은 서우순(徐愚淳)에게 시집갔다. 환조는 양자로 나갔다. 曾孫男在箕,在斗。女林觀洙。煥輔出。在修女李稷鉉。煥奭出。在璣女徐愚淳。煥祖出。-> 증손자는 재기(在箕), 재두(在斗)이고, 증손녀는 임관수(林觀洙)에게 시집갔는데, 환보 소생이다. 재수(在修), 증손녀는 이직현(李稷鉉)에게 시집갔는데, 환석의 소생이다. 재기(在璣), 증손녀는 서우순(徐愚淳)에게 시집갔는데, 환조의 소생이다.
*煥輔는 宗孫이니 양자로 갈 수없음
十二世孫煥輔。東老子。進士。蔭參奉。子在箕,在斗。庶子在翼監役。在煕武部將。
<一蠹先生續集卷之四 / 附錄 / 世系源流>
...................
일성록 정조 19년 을묘(1795) 5월 22일(임신)
19-05-22[25] 3차 정사를 하였다.
○ 정호인(鄭好仁)을 판의금부사로, 신광리(申光履)를 동지의금부사로, 유악주(兪岳柱)를 한산 군수(韓山郡守)로, 조유선(趙有善)을 익산 군수(益山郡守)로 삼았다.
○ 4차 정사를 하였다. 정덕제(鄭德濟)를 청하 현감(淸河縣監)으로 삼았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성재 (역) | 2012
....................
강 :
推淸河縣監 鄭德濟
목
政院啓言淸河縣監 鄭德濟 俄於筵席下詢之時旣以非賑邑迎對退出之後今乃謂以賑邑來呈下直單子奏對不審誠極矇然所當重勘而本院請推之外無他可施之罰 敎以爲先推考
일성록 정조 19년 을묘(1795) 5월 23일(계유)
19-05-23[13] 청하 현감(淸河縣監) 정덕제(鄭德濟)를 추고하게 하였다.
○ 정원이 아뢰기를,
“청하 현감 정덕제는 조금 전 연석에서 하문하실 때에는 진읍이 아니라고 대답했는데, 물러난 뒤 지금에서야 진읍이라고 하며 와서 하직 단자(下直單子)를 바쳤습니다. 주대(奏對)를 하면서 제대로 살피지 않았으니 진실로 지극히 흐리멍덩하였습니다. 응당 엄히 감처해야 할 것인데 본원에서 추고하기를 청하는 것 외에는 달리 시행할 만한 벌이 없습니다.”
하여, 전교하기를,
“우선 추고하라.”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성재 (역) | 2012
.....................
일성록 > 정조 > 정조 21년 정사 > 7월 10일 > 최종정보
정조 21년 정사(1797) 7월 10일(정축)
○경상 감사 이형원(李亨元)의 계본에,
“경주 부윤(慶州府尹) 유한모(兪漢謨)는 포폄 제목(褒貶題目)이 ‘폐단을 막을 생각을 하지만 어찌 옛 제도를 따르지 않는가.〔雖念防弊 盍遵舊制〕’이고, 성주 목사(星州牧使) 조영경(趙榮慶)은 ‘자신의 단속에 더욱 힘써야 하지만 다스림은 진실로 힘이 있다.〔約宜益勉 治固有力〕’이고, 영덕 현령(盈德縣令) 이노수(李潞秀)는 ‘바다의 폐단은 속히 바로잡아야 하지만 일을 처리하는 능력은 충분하다.〔亟矯海弊 才足剸理〕’이고, 신녕 현감(新寧縣監) 이귀석(李龜錫)은 ‘간리(奸吏)를 더욱 살펴야 하지만 잘못은 용서할 만하다.〔奸宜益察 過有可恕〕’이니, 모두 중(中)입니다. 의성 현령(義城縣令) 정재중(鄭在中)은 ‘창고를 어찌 문란한 대로 내버려 두며 조세도 어찌 살피지 않는가.〔倉胡任紊 稅亦未察〕’이고,
청하 현감(淸河縣監) 정덕제(鄭德濟)는 ‘남장에 대하여 신칙했는데 또 어찌 횡렴을 한단 말인가.〔旣飭濫杖 又何橫斂〕’이니, 모두 하(下)입니다.”
하였다.
강 : 開拆嶺南殿最
목 : 慶尙監司 李亨元啓本慶州府尹 兪漢謨雖念防弊盍遵舊制星州牧使 趙榮慶約宜益勉治固有力盈德縣令 李潞秀亟矯海弊才足剸理新寧縣監 李龜錫奸宜益察過有可恕竝中義城縣令 鄭在中倉胡任紊稅亦未察
淸河縣監 鄭德濟旣飭濫杖又何橫歛幷下
鄭德濟 1742 1815 河東 明叔 鍾巖
......................
東野遺稿 鄭相虎 (1680~1752) 善甫(선보) 東野(동야) 海州(해주) 거주지 : 晋州 佳谷(진주 가곡)
東野遺稿卷之二
附錄 墓碣銘 幷序
鄭氏之貫首陽者世多聞人有以倡明斯文扶植綱常爲己 任可以有辭於後世者東野處士諱相虎字仲善是已景 廟壬寅兇徒竊國柄誣殺諸大臣舘儒金範甲乘時跳踉發 通三南搜罰州鄕善類德標亦方設㐫䟽上侵母后下搆 名賢收一路名帖公誡勑子弟儕友使之據理嚴斥羣㐫甚 恚加公以不測之科削籍停擧一門偏被其禍公嘆曰橫逆之 來當順受而已已而與從兄萍軒公尙說倡義抗䟽請兩宋 先生從享其略曰祖述堯舜憲章文武者孔子也祖述孔
:: 0104 ::
孟憲章周程者朱子也祖述程朱憲章靜栗者兩宋也又 曰今日國賊之得罪於殿下者皆得罪於兩賢者也殿下 之討賊雖以明義理正倫常爲先討之以不討欲使二心之 徒媿服是固天地之仁也而臣恐明義正倫之方猶不得 其本也擧兩賢之從祀以示萬世之標準則倫常自正義 理自明詖淫邪遁不敢螮蝀於太陽之下上特優批以奬 之盖向後準請克擧縟儀公䟽實啓其端云丙子一鏡雖誅 而䟽下六賊尙未伏法公又慨然曰春秋之法亂臣賊子人得 以誅之遂與同志設請誅六賊䟽主倅鄭必寧搆誣公禍將 不測道伯兪公拓基爲辨其誣事得已愼後三代必寧而來
:: 0105 ::
爲弼顯泰徵所嗾駭機甚張未幾希亮叛一路靡然從 逆公持心益固不少撓奪亂已公記辛壬戊申事及論議 源流俾子孫尋得一箇是是爲公樹立始終也公以英廟 壬申三月二十一日卒距其生肅廟庚申十月十五日壽 七十三葬于固城梧方山子坐之原公性度剛毅氣宇俊爽 夙有才諝業功令策對騈儷靡不敏麗孝友篤至養親志物 兩至有色憂夜不交睫爲七日而不少懈前後喪持制甚嚴 與伯氏不忍暫離內憂時伯氏有疾公勸以滋味伯氏不聽 曰汝其先也公亦不聽曰無病者豈可先於病者乎及伯氏不 淑常以不先嘗肉以盡調護爲罪言及必垂淚拊育孤姪逾
:: 0106 ::
於己出見鄕俗椎魯思有以易之刱修黌序增廣學䂓克 殫心力晩年卜築琴湖爲藏修計山水淸絶花葯紛列翛 然有出塵想左右書史鑽硏名理尤肆力於洛建書時與士 友辯論太極圖洪範傳啓蒙大衍皇極經世律呂新書及先 後天朞三百等義開發蘊奧者多爲文章簡古而宏暢至 於趯勒亦甚精遒有遺集若干卷藏于家公以高麗侍中肅 爲始祖入我朝貞度公易知中樞忠碩直提學忱漁隱希儉 忠毅公文孚尤顯忠毅高祖也曾祖諱大榮生員贈執義 虜變後潔身不仕祖諱有禎贈左承旨號鳳岡尤庵宋先 生稱其孝友梅山洪先生撰狀考諱楫進士號四無齋亦
:: 0107 ::
以文行名妣安東權氏參奉克有其考也配晉陽河氏灦之 女慈良靜肅先公三十五年戊子十二月二十六日歿繼配 達城徐氏監役命新之女後公三十一年壬寅四月十九日 歿幷祔公墓凡三男四女男
經臣
緯臣女適金鍊采者河氏出男
綸臣女適河載大白東顯金洵者徐氏出績臣側出也
經臣男行毅世毅女適宋錫璟朴馨澈
緯臣男元毅亨毅女適金弼文
郡守鄭德濟
綸臣男晉毅宅毅觀毅泰毅 益毅咸毅女適姜遂大噫公之行治如彼其盛而沈屈阨窮 不少槩見固爲可惜然其秉執義理與辛壬士類同歸斯 可以百世不朽又何憾乎公後孫世敎來謁牲石之文竊有
:: 0108 ::
所曠感爲之銘銘曰
嗟公德行兼有文雅蘊而莫施知者盖寡明義斥㐫曰 吾所荷毅然不怵彌天之禍先立其大餘可略也梧水湯 湯梧山峨峨有侐堂斧有欝松檟有來百世有過此者 毋敢不式尙識其爲東野歟
崇禎五丙子五月日嘉善大夫吏曹參判大司憲兼經 筵官書筵官世子侍講院左諭善成均舘祭酒西河任 憲晦撰
.....................
老栢軒先生文集卷之四十六
行狀 聾窩李公行狀
公諱頤鎭字稚養號聾窩星山之李以麗太祖佐命
:: 0076 ::
功臣封星山君諱能一爲始祖至諱汝良官左正言 麗亡罔僕中世有諱廷賢號月峯師事寒岡鄭先生 得聞爲己之學不幸短命官至承文正字是於公爲 六世祖諱爾膺有志早世碩九號東溪文科執義敏 修通德郞是爲曾祖若祖若考也妣善山金氏寧野 翁履遠之女久庵文簡公之后也公以正廟己亥 五月十七日生于星州大浦里第自幼性謹厚儀度 沈靜就傅自能力學通德公學于渼湖金文敬先生 敎訓有法度公敬承允蹈其爲學務本實而刊枝葉 世俗芬華塗澤泊如也十五丁母憂哀毁而謹禮如
:: 0077 ::
老成人附身附棺之節誠信靡有悔三十七中純 廟乙丑增廣試生員自是不復求聞達惟讀書史訓 子姪爲事手寫經傳至於諸子百家葺要成編至百 餘卷藏之家晩寓安陰之花林洞狎泉石友猿鶴囂 囂然樂而忘憂簻軸爰得其所而猶不禁攀柏之感 敬梓之心往往發於篇章癸卯十二月七日考終于 寓第壽六十五始葬靈覺村麓後四十年癸未返葬 于故里牛峴負兌原公孝順天得也學以成之左右 就養愉愉翼翼未嘗違志竭力供甘旨不計家窶葬 祭以禮要盡己誠每臨祭鼎爼籩豆之實必在視致
:: 0078 ::
潔平居晨起拜廟非甚病不敢廢律己以敬動止整 肅待人以恭言溫而氣和門族鄕黨莫不依仰矜式 謂公庶幾於望儼卽溫者矣公娶縣監
鄭德濟之女 一蠧先生之裔也婦德備夫子在而爲良相夫子歿 而爲嚴君焉子姪有過不少假貸閨門整肅人咸稱 之後公十四年丙辰八月九日卒墓同封祔左有二 男一女男長源一以文學聞次源萬壻權秉直孫男 龍相女愼椀九鄭在元長房出男喜相女張近灝朴 鎭奭朴次房出龍熙權之繼子冡曾孫哲熙草 公行錄屬不佞序次爲狀不佞非其人屢辭不獲則
:: 0079 ::
竊嘗有觀感於長公者可以追想公典型謹櫽▼(括+木)而 第錄之如右遺文爲六丁下收收拾於燼餘僅一冊 在箱惜也
....................
老栢軒先生文集卷之四十六
行狀 求我齋李公行狀
公諱源一字子綏姓李氏系出星山生員聾窩頤鎭之子通德郞敏修之孫執義東溪碩九之曾孫一蠧祀孫縣監
鄭德濟之外孫上系詳聾窩公狀公生于 星之大浦里第實純廟乙丑十二月十二日也生 有異質儀貌岐嶷幼穎悟七歲讀通鑑授潘氏史論 文甚汗漫而一再過誦不錯一字聾窩公大奇愛之
:: 0080 ::
敎之有定矩鄭夫人閨範亦嚴公濡染服習德器早 就攻苦力學蕭寺巷塾多公啖薺處兼治擧業程文 各體無不嫺習精詣一時輩流皆讓一頭地然志氣 淸介言議亢直未嘗詭隨於人而爲世俗乞墦態以 故累擧而不利於有司旣而曰吾半生所營乃求於 人是求有命焉盍求諸我是求無不可得以求我名 齋族兄尙書公源祚爲之記所居安峽是聾窩公棲 遯之地而有花林猿鶴之勝公登臨嘯詠婆娑自適 居則兄弟對晤塤篪湛和出則朋友相酬律呂宣暢 悠然有林下之趣扶溪田公秉淳學於梅山洪文敬
:: 0081 ::
公而居相接日夕與之講討墳典樂飢忘貧不知年 數之不足焉今上丙寅十一月十八日考終于新 坪寓舍年六十二公仁善其德超越其才風神氣宇 昭朗有出塵之像篤於孝友事親而極其怡愉愛弟 而盡其和悅家素淸貧而喪祭之節克遵先法勿之 有憾先公幽宅寄在寓鄕罔保彼安求葬師而不憚 修程風雪竭誠緬襄觀者感嘆焉以公識趣之高氣 槪之峻俛首黽勉於公車之業蓋亦爲立揚顯親而 無時無命知其不可求則反以求之於內益究傳家 之學觀於齋扁其所存可見矣至季年喪子孤寓窮
:: 0082 ::
匱益深而未嘗有慽慽容望實俱邵遠近士友皆欽 慕之載圭嘗從芝窩鄭公奎元赴試同館鄭公聞公 至卽往拜之載圭竊視之執禮之恭致意之重迥異 於他人之高年富文者權公泰成於公爲友壻也性 亢於輩流無致禮者而對公則斂容肅敬其見重於 士友者如此公之歿侑誄之作甚盛而其族姪寒洲 公震相一句語爲寫眞也貌如霽月開金鏡心似淸 氷貯玉壺後之欲知公者於此可以得其七分矣始 葬寓鄕後戊寅卒襄于故山大浦東十里吾道艮坐 之原而夫人鄭氏祔焉鄭氏載圭叔祖弘民之女性
:: 0083 ::
度貞潔純淑配德無違六親稱誦之先公二年甲子 就幽一男龍相二女適愼椀九鄭在元龍相亦一男 哲熙愼四男炳禮炳義炳準炳斗二女呂翔鎭閔致 佑鄭一男璋鉉哲熙謬以狀行謁載圭載圭文拙何 敢顧念公委禽吾門與先子懼而軒相善嘗曰某也 內符於外行勝於文載圭每拜床承晤纚纚無倦意 而仁愛之發藹若春噓心竊識之今於賢孫之托有 不敢辭第惟公一子先亡一孫尙弱而平日行義宜 有耳目之不逮者且屢經鬱攸遺文盡入灰燼其緖 論不可考則今據哲熙所草錄而序次之只是鄕黨
:: 0084 ::
士友之所誦慕者曷足以狀公云哉然泰芒豹斑知 者亦可以推之用以吿于世之君子
:: 0085 ::
老栢軒先生文集卷之四十六
.................
함양 열녀 밀양박씨 지려 咸陽烈女密陽朴氏之閭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 349-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동연
[정의]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에 있는 조선 후기 임술증의 처 밀양박씨의 정려.
[위치]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 349-1번지 상림공원 역사인물공원에 있다.
[변천] 1797년(정조 21)에 세워졌다. 비문은 일두 정여창의 7대손인 정덕제(鄭德濟)가 지었다. 정려비는 원래 함양향교 입구에 있었으나 1932년에 도로 확장공사로 함양군 함양읍 백연리 111-69로 옮겨졌다. 이후 2009년 2월에 상림공원 내에 역사유적공원이 완공되면서 다시 이건되었다.
[형태] 석재의 돌기둥 4개에 가첨석을 올려 비각을 만들었다. 비명은 ‘열녀 학생 임술증 처 유인 밀양박씨지려(烈女學生林述曾妻孺人密陽朴氏之閭)’이다.
[현황] 역사인물공원으로 이건되고 난 후에도 후손들에 의해 상당히 잘 관리되고 있어 비석의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1997년 1월 30일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40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정려비 옆에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는 표지석과 밀양박씨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별도의 비석에 새겨져 있다.
[의의와 평가] 함양 열녀 밀양박씨 지려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이 안의현감으로 있을 때 한문소설화한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의 주인공인 임술증(林述曾)의 처 밀양박씨의 정려비이다. 『열녀함양박씨전』은 연암의 12편 한문소설 중에 실존 인물을 소설로 쓴 것 가운데 남겨진 유일한 작품이다. 연암 외에도 윤광석(尹光碩), 이학전(李學傳), 이면제(李勉齊), 승려 응윤(應允) 등이 「박열부전(朴烈婦傳)」을 저술하여 그의 정절을 기렸다. 동시대 여인의 정절을 유교와 불교 측에서 모두 기렸던 것을 볼 수 있다.
.................
김종후(金鍾厚) 1721년(경종 1)~1780년(정조 4)
本庵集卷七 / 碑 / 灆溪書院廟庭碑
我東。自箕子以夷爲華。旣二千有餘年。而儒學猶蔑蔑。高麗有一鄭圃隱。而論者或以忠節掩之。當時盖未知尊也。其卓然爲斯道倡。接墜緖於中土者。實自寒暄金先生,一蠧鄭先生始。繼之以諸老先生六七作。至于今磊落燀爀。而天下道統之傳。歸于我矣。猗歟盛哉。然而金,鄭二先生皆遘禍。言論風旨不甚顯。此學者所以想慕痛慨於千載之下者也。鄭先生世居咸陽。子孫尙傳守焉。嘉靖年間。有介菴姜先生翼。倡議立蘫溪書院。以祠先生。丙寅賜額。蓋國朝之有書院。創于周武陵之竹溪。而蘫溪次之。嗚呼。先生者學者之祖也。蘫溪者書院之宗也。豈復有尙於此者乎。書院之作。踰二百年而庭無碑。諸生方謀伐石刻辭以竪之。徵文於鍾厚。鍾厚不敢以匪人辭。謹按先生事行大致。略著於實紀。而其英姿異行。見聞皆服。斯固大賢之一節。至若究貫經子辨析性氣。則秋江南公贊述備矣。後生小子何敢更容模象也哉。其旌褒則發自靜菴先生。以及鄭文翼公光弼,李文忠公元翼相繼陳于朝。遂於萬曆庚戌。從祀孔子廟庭。肅宗乙卯以鄭桐溪先生配享書院。己巳又享以姜介菴。皆多士疏請得命也。介菴先生少斥弛不覊。變而之道醇如也。誠孝出天。學造精微。立法以貴自得務勉强爲主。用薦除昭格署參奉。未拜而卒。時年四十餘。而同時儕流推之爲老成宿德焉。桐溪先生諱蘊擧進士。薦以行誼。尋擢文科。官至吏曹參判。正色直言以立朝。廢主時。斥殺弟錮母妃之議。竄濟州十年。後當仁祖丙子。在南漢圍中。屢抗章力爭和虜。不得則抽佩刀剚腹不殊。屛居巖谷以終。遂以身負天下萬世綱常之重。噫。鄭先生之道尙矣。若姜,鄭二先生。或以篤學。或以峻節。皆從與享之。斯可以永垂來後而不泯。何待碑哉。雖然從今以往。入是院而睹是碑者。爲激感於諸先生之道德節義而知自勵。入而孝順於家於鄕。出而忠於國。則碑亦有助矣。諸君子盍相與勉之。
.................
靑莊館全書卷之六十九 完山李德懋懋官著男光葵奉杲編輯德水李畹秀蕙隣校訂 / 寒竹堂涉筆[下]
灆溪廟庭碑
灆溪書院。卽鄭文獻公一蠧先生俎豆之所也。其奉祀孫
德濟。建廟庭碑。本菴撰。鄕中諸大姓士族。評議峻發。以碑文列叙理學道統。而不錄晦齋先生。爲本菴之過。仍論德濟慫惥之罪。德濟不得已。禀本菴改撰。本菴遂刪諸賢之歷叙者。只稱六七作。仍上石。士論猶以爲六七作之中。亦含不錄晦齋之意。轉益層激。盧氏宣國。斧斲其碑。鑿去本菴姓名。鄭氏訴于監司。因係宣國于咸陽獄。今經二三監司。俱未决折。聞鄭氏言。則以爲鄕中士族之祖先。多有創建之功。而碑中祗稱姜介菴。它不槩見。故起爭端。聞士族之言。則以爲鄭氏不謀士林。半夜竪碑。公議不平云。其碑曰。我東自箕子。以夷爲華。旣二千餘年。而儒學猶蔑蔑。高麗有一鄭圃隱。而論者或以忠節。掩之當時。蓋未知尊也。其卓然爲斯道倡。接墜緖於中土者。實自寒暄金先生。一蠧鄭先生始。沿是而有靜菴,退溪,栗谷,牛溪,沙溪,尤菴,同春諸先生。代作。至于今磊落燀赫。而天下道統之傳。歸于我矣。猗歟盛哉。然而金鄭二先生。皆遘禍。言論風旨。不甚顯。此學者所以想慕痛慨於千載之下者也。鄭先生世居咸陽。子孫尙傳守焉。嘉靖年間。有介菴姜先生翼。倡議立灆溪書院。以祠先生。丙寅。賜額。蓋國朝之有書院。刱于周武陵之竹溪。而灆溪次之。嗚呼。先生者。學者之祖也。灆溪者。書院之宗也。豈復有尙於此者乎。書院之作。踰二百年。而庭無碑。諸生方謀伐石。刻辭以竪之。徵文於鍾厚。鍾厚不敢以匪人辭。謹按先生事行大致。畧著於實紀。而其英資異行。見聞皆服。斯固大賢之一節。至若究貫經子。辨析性氣。則秋江南公撰述。備矣。後生小子。何敢更爲模象也哉。其㫌褒則發自靜菴先生。以及鄭文翼公光弼,李文忠公元翼。連陳于朝。遂於萬曆庚戌。從祀孔子廟庭。肅宗乙卯。以鄭桐溪先生配。己巳。又享以姜介菴。皆多士䟽請得命也。介菴先生。少斥弛不覊。變而之道醇如也。誠孝出天。學造精微。立法以貴自得。務勉強爲主用。薦除昭格署參奉。拜而卒。時年四十餘。而同時儕類。咸推之爲老成宿德焉。桐溪先生諱蘊。擧進士。薦以行誼。尋擢文科。官止吏曹參判。正色直言以立朝。廢主時。斥殺弟錮母妃之議。竄濟州。十年後。當仁祖丙子。在南溪圍中。屢抗章。力爭和虜。不得則抽佩刀剚腹。不殊。屛居岩谷以終。遂以身。負天下萬世綱常之重。噫。鄭先生之道。尙矣。若姜鄭二先生。或以篤學。或以峻節。皆▣享之。斯可以永垂來後而不泯。何待碑哉。雖然。從今以往。入是院而覩是碑者。爲激感於諸先生之道德節義。而知自勵。入而孝順於家於鄕。出而忠於國。則碑亦有助矣。諸君子。盍相與勉之。後學淸風金鍾厚撰。黃運祚書。
청장관전서 제69권 / 한죽당섭필 하(寒竹堂涉筆下) / 남계묘정비(灆溪廟庭碑)
남계서원(灆溪書院)은 문헌공(文獻公) 정일두(鄭一蠹 일두는 정여창(鄭汝昌)의 호) 선생을 향사(享祀)하는 곳이다. 그 봉사손(奉祀孫) 덕제(德濟)가 묘정비(廟庭碑)를 세웠는데 비문은 본암(本菴 김종후(金鍾厚)의 호)이 지었다.
이 비문을 두고 마을의 대성(大姓)과 사족(士族)들의 비판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는 비문 내용에 성리학(性理學)의 도통(道統)을 열서(列書)하면서 회재 선생(晦齋先生 회재는 이언적(李彦廸)의 호)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본암(本菴)의 과실이라 하였다. 이어서 그렇게 쓰도록 종용한 덕제의 허물도 따졌다.
덕제가 부득이 본암에게 개찬(改撰)을 청하자, 본암이 드디어 제현(諸賢)을 차례로 기록한 것을 삭제하고 다만 ‘예닐곱 분이 나왔다.’고 써서 그대로 비석에 새겼다.
그러나 사론(士論)은 오히려 ‘예닐곱 분이 나왔다.’고 한 ‘예닐곱’ 중에는 또 회재를 넣지 않으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여기고 비판의 소리가 더욱 거세져서 노씨 선국(盧氏宣國)이 도끼로 비문을 찍어 본암의 이름을 깎아냈다. 정씨(鄭氏)는 감사에게 고소하였고 이어 선국(宣國)은 함양(咸陽) 옥에 갇혔다. 지금까지 두세 명의 감사가 바뀌도록 모두 이 사건의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다. 정씨의 말에 의하면,
“마을 사족(士族)의 조상들 가운데 이 서원(書院)의 창건에 공이 있는 이가 많은데 비문에는 다만 강개암(姜介菴 개암은 강익(姜翼)의 호)만을 일컫고 다른 사람은 조금도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쟁론(爭論)의 단서가 생긴 것이다.”
하고, 사족(士族)들의 말에 의하면,
“정씨가 사림(士林)들과 의론하지 않고 밤중에 비를 세웠으므로 공론들이 좋지 않다.”
하였다. 그 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는 기자(箕子)가 미개한 나라[夷狄]를 문명국[中華]으로 만든 이후 2천여 년 동안에 유학(儒學)은 존재가 없었다가 고려(高麗)에 와서 정포은(鄭圃隱 포은은 정몽주(鄭夢周)의 호)한 사람이 있었으나 논자(論者)들은 그의 충절(忠節)만을 말하고 유학은 덮어두고 말하지 않았으니, 당시에는 대체로 유학을 높일 줄을 몰랐던 것이다.
이에 우뚝이 사도(斯道)를 위하여 땅에 떨어진 유학의 실마리를 중국에서 이어온 이는 실로 한훤(寒暄 김굉필(金宏弼)의 호) 김 선생(金先生)과 일두(一蠹) 정 선생(鄭先生)을 필두로 하여 이를 이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호)ㆍ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호)ㆍ율곡(栗谷 이이(李珥)의 호)ㆍ우계(牛溪 성혼(成渾)의 호)ㆍ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호)ㆍ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호)ㆍ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의 호) 제선생(諸先生)이 대대로 일어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크게 빛나서 천하의 도통(道統)이 우리나라에 돌아왔으니 아름답고도 훌륭하구나.
그러나 김(金)ㆍ정(鄭) 두 선생은 모두 화를 입어 언론(言論)과 풍지(風旨)가 크게 드러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학자들이 오래도록 사모하고 가슴아파하는 이유이다. 정 선생(鄭先生)은 함양(咸陽)에 세거(世居)하였으므로 그 자손이 아직도 그곳에 살고 있다.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연간에 개암(介菴) 강익(姜翼) 선생이 발론하여 남계서원을 세워 선생을 제사하였고, 병인년(1566, 명종 21)에 사액(賜額)되었다.
대개 우리나라에 서원(書院)이 있게 된 것은 주무릉(周武陵 무릉은 주세붕(周世鵬)의 별호)의 죽계서원(竹溪書院)이 최초이고 남계서원이 그 다음이다. 아, 선생은 학자의 모범이고 남계는 서원의 으뜸이다. 어찌 이보다 더할 것이 있겠는가?
서원을 창건한 지 2백여 년이 지나도록 비를 세우지 못했는데 이제 여러 선비들이 돌을 다듬고 비문을 새겨 세울 것을 의론하고 종후(鍾厚)에게 비문을 짓기를 청하므로 종후는 감히 적임자가 아니라고 사양할 수 없었다.
삼가 상고하건대, 선생의 사업(事業)과 행실(行實)의 대체(大體)는 《실기(實紀)》에 대략 나타나 있다. 그 영특한 자질과 탁월한 행실은 보고들음에 모두 탄복하겠으니, 이는 진실로 대현(大賢)의 일절(一節)이라 하겠으며, 경(經)ㆍ자(子)를 연구하고 성정(性情)과 이기(理氣)를 명백히 분석한 것 등은 추강 남공(秋江南公 추강은 남효온(南孝溫)의 호)의 찬술(撰述)에 자세히 갖추어 있으니, 후생이 어찌 감히 다시 이를 본떠서 말하겠는가?
공을 정려(旌閭)하고 포장(褒獎)한 것은 정암(靜庵) 선생에서부터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ㆍ문충공(文忠公) 이원익(李元翼)에 이르기까지 조정에 계속 건의하여 마침내 만력(萬歷) 경술년(1610, 광해군 2)에 공자묘(孔子廟)에 배향되었다. 숙종 을묘년(1675, 숙종1) 정동계(鄭桐溪) 선생을 배향하였고, 기사년(1689, 숙종15) 또 강개암을 배향하였으니, 이는 모두 여러 선비들의 소청(疏請)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개암(介菴)은 젊어서 구속되는 바 없이 행동하였으나 자라서는 기질을 변화시켜 도(道)로 들어가서 마침내 순후(醇厚)하게 되었다. 타고난 효성에다 학문은 정미(精微)한 경지에 이르렀고 법도를 세움에는 스스로 터득하는 것을 주로 삼았다.
천거에 의해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에 임명되었는데, 임명되고 나서 곧 죽었다. 이때 겨우 40여 세였으나 당시의 동료들이 모두들 노성(老成)한 숙덕(宿德)으로 높였다.
동계(桐溪) 선생의 휘는 온(蘊)이다.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행의(行誼)로 천거되었다. 얼마 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
조정에서는 엄정한 태도로 곧은 말을 잘하였고 폐주(廢主 광해군) 때에는 아우를 죽이고 모비(母妃)를 금고(禁錮)하는 의론을 반대하다가 10년 동안이나 제주도에서 귀양살았다.
그후 인조(仁祖)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여러 번 소를 올려 오랑캐와 강화하는 것을 간쟁하다가 되지 않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할복(割腹)을 기도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그 후로는 은퇴하여 산속에서 세상을 마침으로써 천하 만대의 막중한 강상(綱常)을 한 몸에 짊어졌다. 아, 정 선생의 도는 높기도 하였고 강ㆍ정(姜鄭 강익ㆍ정온) 두 선생은 하나는 독학(篤學)으로, 하나는 높은 절의로써 모두 여기에 모셔지게 되었으니, 이는 길이 후세에 썩지 않을 만하다. 어찌 비석을 세워야만 전할 것이겠는가. 그렇지만 이후로 이 서원에 들어와서 이 비를 보는 사람들이 이 비로 해서 여러 선생들의 도덕과 절의에 감격하여 스스로 힘쓸 바를 알아, 들어와서는 집에서 효도하고 마을에서 공순하며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한다면 이 비를 세우는 것 또한 도움됨이 있을 것이다. 여러 군자들이여, 어찌 서로 면려(勉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후학(後學) 청풍(淸風) 김종후(金鍾厚)가 짓고 황운조(黃運祚)가 쓰다.
[주-D001] 김(金)ㆍ정(鄭) …… 화를 입어 : 김ㆍ정은 김굉필(金宏弼)과 정여창(鄭汝昌). 이들은 모두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연산군(燕山君) 4년(1498)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일파로 몰려서 김굉필은 희천(熙川), 정여창은 종성(鍾城)에 각기 유배되었고, 그 후 다시 갑자사화(甲子士禍 : 1504)가 일어나 김굉필은 사사(賜死)되고 정여창은 이미 죽은 뒤였으므로 부관참시(剖棺斬屍)된 것을 말한다.[주-D002] 죽계서원(竹溪書院) : 주세붕(周世鵬)이 안향(安珦)을 제사하기 위해 세운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순흥(順興)의 죽계(竹溪)에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주-D003] 실기(實紀) : 정구(鄭逑)가 인조(仁祖) 13년(1635)에 엮은 것으로 1책이다. 정식 명칭은 《문헌공실기(文獻公實紀)》.[주-D004] 추강 남공(秋江南公)의 찬술(撰述) : 《秋江集 師友名行錄》에 “정여창(鄭汝昌) …… 지리산에 들어가 3년간 나오지 않고 오경(五經)을 연구하여 그 깊은 진리를 다 터득, 체(體)와 용(用)은 근원은 한가지이지만 갈린 끝만이 다르고, 선(善)과 (惡)의 성(性)은 같으나 기질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 그의 성리학은 누구나 존경하였다 …… ”고 한 것을 말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승운 (역) | 1981
........................
正宗己亥(1779,정조3)廟庭碑成-남계서원지
灆溪書院院庭立碑時告由文 辛丑(1781,정조5)-정중헌농와유고
...........................
우천선생유집 묘갈명 정종암덕제 찬
...........................
남계서원묘정비(藍溪書院廟庭碑)
咸陽灆溪書院之碑」
咸陽灆溪書院廟庭碑後學淸風金鍾厚 撰」
奉正大夫前行 弘陵㕘奉黃運祚 書」
資憲大夫前兵曹判書兼藝文館提學洪樂命 篆」
我東自箕子以夷為華旣二千有餘年而儒學猶蔑蔑髙麗有▨鄭圃隱而論者或以忠莭掩之」
當時盖未知尊也其卓然為斯道倡接墜緖扵中土者實自寒暄金先生一蠧鄭先生始繼之以」
諸老先生六七作至于今磊落燀爀而天下道統之傳歸于我矣猗歟盛㢤然而金鄭二先生皆」
遘禍言論風㫖不甚顯此學者所以想慕痛慨扵千載之下者也鄭先生世居咸陽子孫尙傳守」
焉 嘉靖秊間有介菴姜先生翼倡議立灆溪書院以祠先生丙寅▨賜額盖 國朝之有書院」
創于周武陵之竹溪而蘫溪次之嗚呼先生者學者之祖也蘫溪者書院之宗也豈復有尙扵此」
者乎書院之作踰二百秊而庭無碑諸生方謀伐石刻辭以竪之徵文扵鍾厚鍾厚不敢以匪人」
辭謹按先生事行大致略着扵實紀而其英姿異行見聞皆服斯固大賢之一節至若究貫經子」
辨析性氣則秋江南公䝺述僃矣後生小子何敢更容模象也㢤其旌褒則發自静庵先生以及」
鄭文翼公光畢李文忠公元翼相繼陳于 朝遂扵 萬暦庚戌從祀孔子廟庭 肅宗乙夘以」
鄭桐溪先生配享書院己巳又享以姜介庵皆多士䟽請得 命也介庵先生少斥弛不覊變而」
之道醇如也誠孝出天學造精微立法以貴自得務勉强為主用薦除昭格署㕘奉未拜而卒時」
年四十餘而同時儕流推之為老成宿徳焉桐溪先生諱藴擧進士薦以行誼尋擢文科官止吏」
曹㕘判正色直言以立朝廢主時斥殺弟錮 母妃之議竄濟州十秊後當 仁祖丙子在南漢」
圍中屢抗章力争和虜不得則抽佩刀剚腹不殊屛居巖谷以終遂以身負天下萬卋綱常之重」
噫鄭先生之道尙矣若姜鄭二先生或以篤學或以峻莭皆從與享之斯可以永垂来後而不泯」
何待碑㢤雖然従今以徃入是院而睹是碑者為激感扵諸先生之道徳節義而知自勵入而孝」
順扵家扵郷出而忠扵國則碑亦有助矣諸君子盍相與勉之」
崇禎一百五十二年己亥十二月 日建」
.......................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시대 조선
연대 1779년(정조3년)
유형/재질 비문 / 돌
문화재지정 비지정
크기 높이 198cm, 너비 93cm, 두께 29cm
출토지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소재지 (한국)성균관대학교 박물관-서울특별시 종로구 성균관로 41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김종후(金鍾厚) / 황운조(黃運祚) / 미상
개관
남계서원(蘫溪書院)은 1552년(명종 7년)에 강익(姜翼)이 주도에 의해 함양부(咸陽府)에 세워져 정여창(鄭汝昌)을 배향(配享)하였으며, 1566년(명종 21년)에는 편액(扁額)을 하사받았다. 그 뒤 1675년(숙종 1년)에 정온(鄭蘊)을 배향하였으며, 1689년(숙종 15년)에 강익(姜翼)을 배향하였다.
남계서원의 묘정비(廟庭碑)는 서원이 세워진 지 200여 년 뒤에 봉사손(奉祀孫)인 정덕제(鄭德濟)에 의해 세워졌는데, 비문에는 남계서원을 세운 과정과 세 선생을 배향한 시기, 세 선생의 행적(行蹟) 등이 기록되어 있다. 김종후(金鍾厚)가 비문을 짓고, 황운조(黃運祚)가 글씨를 썼으며, 홍낙명(洪樂命)이 전액(篆額)하였다.
현재 탁본은 성균관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된 연대는 1970년대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단행본)정여창 지음, 박헌순 등 옮김, 민족문화추진회 편,『일두집』, 민족문화추진회, 2004
(단행본)정재경 저,『정여창연구』, 집문당, 1988
(단행본)조동원 편저,『한국금석문대계』4, 원광대학교 출판국, 1985
.........................
鍾巖遺稿
대구 |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 811.081-정덕제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