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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피 경전』은 사막을 여행하면서 느낀 감상을 그림처럼 보여준다. 「아기 미라」에서는 사막으로 나간 엄마를 기다리는 아기의 외로움을 읽는다. 「타클라마칸」에서는 돌아가지 못할 고향을 떠올리고 「녹피 경전」에서는 코란이 된 사슴처럼 누구를 위해 헌신한 적 있느냐고 묻는다.
김영재 시인의 시에는 곳곳에 눅눅한 슬픔이 묻어 있다. 가슴을 아리게 하고 눈가를 촉촉하게 한다. 그러나 시인은 고개만 떨구지는 않는다. 검은 땅을 헤집고 나온 봄풀처럼 절망을 넘어 삶을 긍정한다. 이는 그의 시편이 가진 최고의 미덕이자 사랑받는 이유다.
이번 시집에 담긴 시들의 무게는 한결 묵직하고 포근하게 가슴에 와서 안긴다. 새 시집에서 그가 보여주고 있는 변화는 다분히 둥글고 더욱 깊어졌다. 거칠고 팍팍한 도시의 한복판을 쉼 없이 헤쳐 나온 그의 열정적인 시간을 통하여 숙성된 시편에서는 상생도 상극도 모두 내 편으로 만들고 있는 서늘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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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클라마칸
없는 길 열어가며 건너간다 타클라마칸
가는 사람 많았어도 돌아온 사람 없다
어차피 돌아올 수 없는 우리가 가는 그 길
녹피경전
사슴이여 야생이여 그대 가죽을 벗겨
인간을 인도하는 신의 말씀 기록하노니
사막의 모든 족속들은 머리 숙여 경배할지니
사람이 한 번이라도 제 가죽에 경전을 적어
형제를 깨우쳤으며 제 몸을 헌신했느냐
녹피여 그대는 영생으로 뭇 생을 구했나니
사막 열흘
버리고 온다는 게 가지고 돌아왔다
낙타를 탄다는 게 낙타에게 끌려다녔다
발자국 지운다는 게 무수히 남겨놓았다
사막
당신이 사막이라면
풀 한 포기 가꾸지 마라
죽음을 생生인듯
껴안고 있음이여
죽음이 죽음을 견디며
생명을 잉태할 것이니
그, 시집
세상을 홀연 떠난 시인의 유고 시집
만취되어 집에 와 늦은 밤에 펼쳤다
그 사람 웃는 얼굴과 약력만 보고 잤다
서문은 아예 없겠고 서시는 어떤 시일까
피는 꽃 그늘에서 시 한 편 건졌을까
꽃 지고 열매 맺을 무렵 떠나갈 줄 알았을까
점자를 어루만지면
눈으로 읽을 수 없는
점자를 어루만지면
죽었던 신경들이
손끝에서 살아난다
왕모래
한입 삼켜도
을지 않던
심장이 운다
그늘
뙤약볕 속 그늘은
사람을 불러 모은다
그늘이 비좁아도
아무런 불평 없다
작아도
넉넉한 살림
그늘에서 배운다
후진
사십 년 탄 내 차는
후진이 서툴다
아내는 옆자리에서
주인 닮았다 타박이다
뒷걸음
칠 줄 알아야
사는 일 편할 텐데
변방
잊을 만한 그 배우
시골 버스 광고에 있었다
늙지 않은 그 모습
조금 잊혀졌을 뿐
인생은
내키지 않아도
변방이 있는 것이다
사막은 좌우가 없다
사막 횡단 차창 밖 전후좌우 모래다
졸다가 깨어나 이 생각 저 궁리 해봐도
사막은 모래뿐이다
좌우가 없었다
종일을 가도 가도 아스라한 모래 위에
살아 있기도 했지만 죽어 있는 호양나무
생사가 별게 아니었다
그 모습 당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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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재
전남 승주 출생. 1974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히말라야 짐꾼』 『화답』 『홍어』 『오지에서 온 손님』 『겨울 별사』 『화엄동백』 『절망하지 않기 위해 자살한 사내를 생각한다』 『참나무는 내게 숯이 되라네』 『다시 월산리에서』, 시화집 『사랑이 사람에게』, 시조선집 『참 맑은 어둠』 『소금 창고』, 여행 산문집 『외로우면 걸어라』 등 출간.
순천문학상, 고산문학대상, 중앙시조대상, 한국작가상, 이호우시조문학상, 가람시조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