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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구불길
60 회갑 기념 우리 가족 (2010년)
아들이 그린 벽화 앞에서(1991년)
큰 아들과 손녀! (2019년)
큰 딸 가족 (2019년)
막내 딸 가족 (2019년)
사랑스런 손자와 손녀들!(2019년)
배움은 끝이 없다! (2019년)
광주 무등산에서(2016년)
아내와 내장산 백양사 단풍구경 (2018년)
자서전 쓰기반 (2019년)
해남군 65세 이상 치매 예방 글짓기 수상식 (2018년)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함께 한 동창들 (2017년)
자서전을 내면서
내 나이 70대에 들어서니 어릴 적 일들이 많이 생각난다. 부모님과 형님 살아 계실 때는 그냥 평범하게 생각했는데 그들이 얼마나 내게 소중했는지 이제야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나는 이 세상에 와서 기쁜 일과 슬픈 일 많이 겪으면서 큰일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내 인생은 남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하여 최선을 다해서 살아온 일들을 회억하면서 생각나는 대로 내 걸어온 흔적을 남기려한다.
내 이름은 김영산(金永山)이다. 1950년 생 범띠로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 량수향(凉水鄕) 량수촌(후에 영천촌(永泉村)으로 변경 되었다.)에서 태어났다. 음력 12월 18일 아침 3~4시경 어머니 뱃속에서 세상 구경 나오니 새벽닭이 꼬꼬댁 하더란다. 열이틀 후 설날, 한 살을 더 먹었다. 토끼띠와 불과 12일 차이로 소학교도 아홉 살에야 입학하였다.
1964년 가을에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학교는 집과 멀리 떨어져 있어 기숙사생활을 하였다. 중학생활 4년이란 세월을 보냈지만 전례 없던 문화대혁명의 격랑 속에 휩쓸려 배운 지식은 겨우 중학교 1학년 수준이다. 3년 중학지식을 완전히 배우지 못한 셈이다. 1968년 가을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와 농사일을 하게 되었다.
1970년은 나의 일생에 잊지 못할 커다란 전환점으로 되는 해라고 볼 수 있다.
1970년 3월 1일 당 조직에 가입하여 조직생활을 시작하였고, 8월에는 석 달 동안 트랙터 운전기술을 배워 그 후 10여년 운전 생활을 하면서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하였다. 또한 1970년 10월 초겨울에 결혼하여 “아버지”와 “남편”이란 이름으로 지금까지 생활하고 있다.
지금은 비교적 안정적이고 남부럽지 않게 생활하고 있지만 내 지나온 일생은 순리롭지 않았다. 리별의 상처, 가정의 생활난, 사회의 각종 쓴맛과 단맛을 맛보며 고생스럽게 살아왔다.
처음 결혼하여 아이 셋이 생기고 오순도순 잘 살아 갈려니 마누라가 갑자기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열흘이 못된 갓난 애기는 할 수 없이 한족 사람에게 맡겼다.
2년 후 다시 재혼하였다. 그때 우리식구 모두 다섯 명이다. 큰아들이 여섯 살, 둘째 딸이 네 살, 셋째인 작은 딸이 한 살이었다.
80년대 정책이 변하고 개방하여 나도 큰일을 해 보려고 애를 썼지만 순리롭지 못한 나의 팔자 집까지 팔아 본전까지 잃고 생활상 많은 고락을 겪었다.
1992년 배 타러 이란(伊朗)에 갔다가 2년 계약을 못 채우고 돌아와서는 1995년 4월 다시 친구의 소개로 천진(天津)시 탕구에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술집에서 일하게 되었다. 후에 점차 마누라와 자식들이 천진에 오게 되면서, 10여년 동안 천진에서 보냈다. 아들과 딸은 모두 천진에서 결혼시켰다.
2006년 9월 절강성(浙江省) 이우(义烏)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액세서리 공장에서 전공(電工)일을 맡아 하다가 11월 한국에 오게 되어 지금까지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1992년부터 우리 가족은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다. 이제는 아들과 딸이 모두 결혼하여 자기 살림을 하고 있으니 다시 함께 모여 생활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옛날 보잘 것 없는 집이었지만 그때 그 시절 생활이 그립다.
제l장 어린 시절
나의 소중한 가족들
나는 아들 3형제 중 둘째다. 내 기억에는 없지만 내 위로 누님 둘, 내 아래로 누이동생 하나 생겼던 것인데 모두 어렸을 때 요절(夭折)하였다고 한다. 그러기에 어머님도 남의 딸들을 많이 부러워하시며 이따금 딸 없는 신세타령을 많이 하셨다. 어머니는 언제나 “딸이 없어 신세 못 진다. 아들은 소용없다.”며 자주 투덜거리신다. 그러면 나도 짜증이 나서 “누가 딸들을 모두 죽이라나.” 한다. 실제 나도 누님, 누이동생이 없어 부러워하는 말이다.
아버지는 1910년 5월 14일 생으로 1982년 10월 3일 72세로 세상을 뜨셨다. 아버지는 마을에서 유명한 목수였다. 집 짓고, 농기구, 가구 등 목수 일을 하면서 가족 살림 남부럽지 않게 잘 꾸리며 우리 3형제를 모두 중학교까지 보내 주었다.
아버지는 성격이 급한지라 이따금 어머니 마음을 상하게 하시고 어머니는 고집이 센 성격이라 항상 말다툼이 생기군하셨다. 아버지와 어머니 나이 15년 차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같은 사람과 살면서 고생한다.”며 울며불며 한다. 그러면 아버지는 말은 못하시고 손찌검이 들어간다. 그러면 어머니는 “날 죽여라. 날 죽여라.” 하면서 더 야단이다. 그러다가도 이튿날이면 이런 일이 없는 듯하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건강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 이따금 보양식으로 삼계탕을 끓어 주시고 아버지 기침하신다며 흰쌀밥을 들기름으로 닦아 주시군 하셨다. 그러면 나는 곁에서만 보기만 한다. 어머니 말씀이 약이라는 것은 나누어 먹지 않는다고 하시기에 먹고는 싶었지만 참았다. 나는 말도 잘 들었다.
아버지 세상 뜨시는 날은 내가 생선 도매하면서 소형트랙터(小四輪)를 몰고 현에 생선 팔러 간 날이다. 시장에 도착한지 두 시간이 못되어 아버지가 세상 뜨셨다는 기별이 왔다. 팔다 남은 생선은 대충 처리하고 부랴부랴 집으로 왔으나 아버지는 이미 눈을 감으셨고 우리와 영영 이별 하셨다.
아버지는 세상 뜨실 때까지 위병으로 많이 고생하셨다. 젊었을 때 현에 회의 다니시다 찬 옥수수떡을 잡수시고 소화가 안 되어 걸렸다는 것이다. 그때는 속탈이라고 했다. 아버지 속탈이 발생하면 어찌도 급한지 베개를 끌어안고 “아이고, 아이고” 하며 밤을 새우신다. 그러면 어머님도 밤새 주무시지 못하시고 부지런히 잔등만 쓸어주실 뿐이다. 이따금 나도 잠에서 깨어나 어머니를 도와 주군 하였다. 밤중이라 의사 찾기도 미안하고, 날이 밝아야 의사를 찾는다. 의사들도 아버지의 병을 모두 아는지라 무조건 진통제(杜冷丁) 한 대 놓아주신다. 그제야 아버지는 편히 쉬신다. 아버지는 나이가 점점 드시며 이런저런 병이 많아지더니 결국은 자리에 눕게 되었다.
한번 장백 조선족 자치 현에서 조선족 연극단이 우리 향에 와서 연극을 놀게 되었다. 조선족 연극단이 와서 연극을 하니 큰 대사였다.
나는 소형트랙터(小四輪)에 볏짚과 이불을 깔고 아버지를 모시고 가서 좋은 자리를 맡아 구경하시게 하였다. 아버지는 몸은 조금 불편하셨겠지만 오랜만에 바깥에 나오셨고, 처음으로 조선족 연극을 보시니 기분이 아주 좋으셨다. 아버지는 연극 구경이 마지막 바깥 구경이 되었고, 몇 달 안 되어 세상을 뜨셨다.
어머니는 1925년 1월 21일 생으로 2000년 12월 24일 75세로 세상을 뜨셨다. 어머니는 다리가 조금 불편해 남들처럼 밭일을 못하셨다. 그러나 손재주가 좋아서 결혼 집 치마저고리 만들어주고, 베개마구리 수놓이 등 일로 살림 보탬으로 부지런히 일하셨다. 물론 내가 학교 다닐 때 학습장, 연필 등 사는데도 많은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어머니 세상 뜨실 때도 나는 지켜드리지 못했다. 천진에 있었다. 동생의 기별 받고 집에 오니 벌써 장례 전날이다. 나는 양부모님 영영 떠나시는 마지막 길을 지켜보지 못했고, 가까이 있으면서도 부모님 자주 만나 뵙지 못한 것이 평생 한(恨)이 된다. 서럽고 후회 할뿐이다.
외할머니도 같이 생활하셨다. 어려서 기억은 없지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장모님을 모셔다 같이 생활하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형님은 20살에 결혼하고, 얼마 안 되어 외할머니와 같이 분가하여 생활하시다 심양으로 이사 갔다. 형님이 분가하니 집에는 일할 사람도 없다. 아버지는 나이 드시고 동생은 아직 어려 학교에 다닌다. 그러니 나는 남과 같이 학교에 더 다닐 생각도 못하고 군대도 갈 수 없었다. 형님을 많이 원망하며 편지를 보낸 적이 있는데, 그때는 내가 너무도 세상일을 몰랐다. 내가 결혼하여 생활해보니 형님을 원망 할 필요가 없다.
어머니와 함께 가족사진(1985년)
어머니 환갑 기념(1985년)
형님은 소학교 다닐 적에 솜바지 입고 난로 쬐다가 바지 타는 줄 몰라 무릎에 화상을 입어 커다란 흉터가 남았다. 어렸을 때 집 마당에서 형님과 장난하다 무심결에 방망이로 형님의 무릎을 툭 때렸다. 바로 화상으로 흉터가 있는 그 무릎이다. 형님이 아프다 눈물 흘리며 땅바닥에서 뒹굴었다. 얼마나 아팠을까? 나도 몹시 놀랐다. 너무 어렸을 때의 일이지만 지금 나이 먹어가면서 그 일이 그냥 머릿속에 맴돌이치고 있다. 아직까지 형님께 잘못했다는 말 한 마디 하지 못한 것을 후회 한다. 형님이 먼저 돌아가셨으니 가슴이 더 아프다.
형님은 아버지의 목수기술을 이어 목수 일을 잘하셨다. 내가 재혼 후에도 고향에 왔다가 내 이불장을 새로 만들어주었다. 형님은 60세가 못되어 일찍이 돌아가셨다. 약을 옳게 드시지 못한 탓이다. 그때 나는 천진에 있다가 기별 받고 장례식 날 심양에 가서 마지막 얼굴을 보았다.
내 동생, 김흥산(2017년)
동생은 나보다 5년 어리다.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나와 같이 농사일하기 시작했다. 동생은 외지에 부업하러 많이 다녔다. 집체로 일할 때 현금을 손에 쥐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동생이 외지에서 현금 벌어오는 덕으로 결혼 때도 신어보지 못했던 가죽구두도 사게 되었고, 새것은 아니지만 남보다 먼저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이란(伊朗) 배 타러 가서도 동생과 같이 있으니 타국타향에서 일하면서도 든든한 믿음이 있었다. 맏형님은 멀리 이사 갔지, 나는 재혼하여 분가해 생활하게 되니 막내 동생이 부모님을 모시게 되었다. 동생은 부모님을 끝까지 잘 모시고 많은 고생하였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동생에게 “아주 고맙다”는 뜻을 표하는 바이다.
다섯 손가락 자리
아버지는 목수일 하시면서 용돈을 심심치 않게 벌었으니 내가 무언가 사달라면 꼭 사주군 하셨다. 그래서인지 아버지 일 하시는데 잘 따라 다녔다.
한번은 아버지가 다른 마을로 일하러 가시는데 며칠 있어야 했다. 나는 따라가겠다고 애를 먹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무리 달래고 큰 소리쳐도 나는 기어이 따라가겠다며 마을 어귀까지 따라 나섰다. 그러니 아버지는 정말 더는 참지 못하시겠는지 나의 뺨을 때리려다 엉덩이를 “꽝”하고 때린다. 진짜 때렸다. 어찌도 아픈지. 할 수 없이 어머니의 손에 끌리어 집에 와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를 만져보니 뻘겋게 된 다섯 손가락 자리가 뚜렷이 나타났다. 하니 어머니는 떠나간 아버지를 원망한다. 왜 이렇게야 때렸으랴. 후에 어머니는 세상을 뜨시기 전까지 항상 말씀 하셨다. 아버지는 애 몇을 기르면서 한 번도 때려 본 적이 없은데 그때 내 엉덩이를 때린 것이 처음이라고, 대여섯 살 일 것이라 생각하는데 마을 어귀에서 엉덩이를 맞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여 지금도 이따금 그때 일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엉덩이를 만져 보군한다. 그렇지만 지금까지도 아버지를 티끌만큼도 원망하지 않는다.
소금을 꾸러가다
나는 대여섯 살 때도 잠자리에 오줌 누는 습관이 있었다. 하루아침 이날도 일찍이 깨어났는데 어머니가 부엌에서 밥하시다가 심부름을 시킨다. 채소 하는데 소금이 없다며 뒷집에 가서 소금을 꾸어오라 하신다. 그러면서 창고에서 키를 가져다 내 머리에 씌우고 작은 사발을 손에 들려준다. 어린애라 머리에 키를 걸치니 무엇이 즐거웠던지 흥얼거리며 길을 건너 뒷집에 갔다.
이집 따님 이름이 순제다. 순제 어머니가 방금 부엌에서 아침밥을 준비하신다. 나는 “할머니 어머니가 소금 조금 빌려달라고 해요.” 하면서 사발을 내밀었다. 할머니는 웃으면서 “그래.” 하시면서 소금단지에서 한 사발 소금을 담아 주더라. 나는 소금사발을 받아 쥐고 돌아서 갈려니 할머니가 “잠깐” 하시더니 어느새 방 빗자루를 준비 하셨던지 내 머리를 콱 치면서 아주 노하여 말하신다. “너 요놈의 새끼, 또 이불에다 오줌을 싸겠느냐? 한 매 맞아보아라.”하면서 사정없이 몇 번 더 때린다.
사실 키를 머리에 씌었기에 아프지는 않다. 그러나 갑자기 이렇게 욕을 먹으며 매까지 맞으니 억울해서인지 울음이 쏟아져 엉엉 울면서 집에 왔다. 그래도 소금 사발은 손에 들고서 집에 오니 어머니는 활짝 웃으시며 내 손에 사발을 받아 쥔다. 그러면서 “괜찮아. 네가 잠자리에 오줌을 싸기에 습관을 고치느라 농담으로 하는 것이다.” 하신다. 그제야 나는 “윽, 윽”하면서 울음을 겨우 멈췄다. 그 후부터는 자리에 오줌으로 지도를 그리는 적이 없었다.
옛날에는 집에 어린애가 철이 들어 아직도 자리에 오줌을 누면 옆집에 소금 꾸러 보내는 관습이 있었다. 그러니 근처 동갑내기 친구들도 이 같은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먹을 것이 바른 시절
내 나이 7~8 살 때다. 인민공사가 성립되면서 모든 것이 집단화다. 농사하는 일도 집체적으로 일하고, 먹는 것도 하루 세끼 식당에서 가져다 먹는다. 때가 되면 인구 숫자로 죽을 나누어 주는데, 그릇을 가지고 가서 줄을 서서 기다린다. 옥수수 쌀 몇 알 섞이지 않은 물렁한 죽은 한 그릇을 먹고 또 먹어도 배 부르는 줄 모른다. 항상 배고프고 먹고 싶은 것이 많다. 어떤 때는 소여물 칸에 기웃거리며 떨어진 옥수수 알 혹은 부스러진 두병(豆餠)이 있으면 주워 구워먹기도 하였다.
봄이 오면 산나물을 캐어다 쌀에 섞어 밥하고 소나무 껍질을 벗겨다 강냉이가루에 섞어 떡을 만들어 먹는다. 쑥떡은 현재 별맛으로 먹지만 그 시절은 먹을 것이 없어 먹는 비교적 좋은 음식이었다. 보리밥도 도토리 밥도 먹어봤다. 지금은 입쌀에 보리 몇 알 섞어 보양음식으로 먹지만 보리밥만은 다시 먹으라면 먹지 못한다.
할머니는 추운 겨울에도 쉬지 않고 눈이 한자 깊이 덮었지만 키와 빗자루, 쓰레받기를 이고 타작이 끝난 마당을 찾아 간다. 그리고는 볏짚을 쌓아놓은 곳을 뒤지면서 흘린 낟알을 한 알 두 알 주워 모은다. 그리고 바람에 날린 벼쭉정이를 키로 몇 번 너풀거리면 반알 배기(여물지 않은 볏 알)낟알도 한줌씩 골라낸다. 나는 장난삼아 따라가지만 이렇게 반나절 주워 한 자루가 되어 머리에 이고 집에 돌아 올 때면 내 기분도 좋다. 이것을 집에 가져다 물에 깨끗이 씻은 후 햇빛에 말려 절구에 찧어 껍질을 벗기면 입쌀이 나온다. 대식품(代食品) 먹는 시절 아주 좋은 먹거리로 생활에 보탬이 된다.
후에 알게 되었는데 대약진 시기 연속 3년 자연재해와 소련의 빚 재촉으로 전국적으로 모두 고생하였다는 것이다.
지금 세대 사람들은 양식이 얼마나 귀한 줄 모른다. 먹을 음식이 너무도 넘쳐나니까. 나는 아직도 식당이나 집에서 먹다버린 고기반찬과 밥 덩어리를 보면 너무도 아깝다. 밭에 널려있는 낟알을 보면 줍고 싶다.
전깃불 없던 시절
어렸을 때 전깃불 없던 밤하늘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낮 같이 밝혀주는 보름달과 항상 방향을 가리켜 주는 북두칠성. 그리고 밤하늘을 가로 질러 넓게 펼쳐진 은하수, 반짝이는 무수한 별들을 바라보면 어린 마음에 꿈도 많았고 궁금한 일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화려한 밤하늘을 보려야 볼 수 없다. 고층건물의 휘황찬란한 전기불과 오색이 번쩍이는 네온등이 밤하늘을 삼켜버린 것 같다.
그 시절 명절에야 겨우 촛불을 켜고 평시에는 석유등이다. 석유등은 나무판에 기둥을 세우고 매달린 병에는 심지가 있다. 심지가 타고 조금 어두워지면 바늘로 심지를 돋워야 한다. 그러기에 기둥에는 언제나 바늘을 하나 매달아 놓는다. 석유등은 타면서 매캐한 냄새를 피울 뿐만 아니라 이튿날 깨어나면 콧구멍이 시커멓다. 그렇지만 연극을 놀아도 화투놀이를 하여도 아무런 지장 없다. 할 짓은 다 한다.
가을 수확이 끝나면 집집이 공량(公糧)을 말려 국가에 바치는 일이 큰일이다. 우리 고향은 논이 적고 밭이 많아 옥수수만 심는다. 하여 옥수수 알을 말려 국가에 세금으로 바친다. 젖은 옥수수를 집집이 나누어주면 밤마다 서로 돌아다니며 도와준다. 옥수수 알 뜯는 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친구들과 놀러 다니기 좋은 기회다.
친구 집 찾아가면 넓은 구들에 옥수수를 잔뜩 펼쳐 놓고 빙 둘러 앉는다. 한사람이 송곳으로 골을 타주면 그것을 받아 뜯는다. 이야기 잘하는 어르신은 옛말을 해주어 웃기도 하고 힘든 줄 모른다. 만약 누구인가 귀신이야기나 하면 캄캄한 밤에 집에 찾아오기도 무섭다. 한창 재미나는 이야기 듣다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지만 만약 생각지도 않게 주인집에서 부뚜막 아궁이에 묻어 놓았던 고구마를 가져오면 뜨거운 것을 후후 불면서 껍질을 벗겨 먹는 재미가 더 좋았다.
그때는 이도 많았다. 밤이 되면 아버지는 나의 속옷을 가져다 석유 등잔불아래서 이를 하나하나 잡아내고 서캐는 등잔불에 태워 죽인다. 겨울에는 속옷을 바깥에 내놓아 얼려서 아침에 화로 불에 쪼이며 털면 얼어 죽은 이들이 불에 뚝뚝 떨어지며 탁탁 소리가 난다. 머리에 생기는 서캐는 참빗으로 빡빡 빗어도 잘 떨어지질 않는다.
후에 이 죽이는 약이 나오기 시작했고 점차 생활도 좋아져 옷도 자주 빨아 입기에 현재는 이 구경하기도 힘들다. 지금 젊은 애들은 이가 무엇인지도 모를 것이다.
친구들과 함께 먹는 고구마
60~70년대 고향에서는 추석 후에 고구마를 캐기 시작한다. 너무 늦으면 고구마 넝쿨이 서리 맞아 새까맣게 죽어버리게 된다. 그때는 집집마다 소나 돼지를 한두 마리씩 기르니 고구마 넝쿨은 사료로 큰 보탬이 된다. 잎이 새파란 고구마 넝쿨을 걷어다 소는 그냥 먹여도 되고 그렇지 않으면 작두로 쑥덕쑥덕 썰어서 큰독에 꽁꽁 눌러 무거운 돌을 올려놓고 발효시킨다. 그것을 매일 한 바가지씩 퍼서 강냉이가루나 겨를 조금씩 섞어서 돼지 먹이면 일등 좋은 사료로 잘 먹는다.
어르신들은 고구마 캐는 시간을 보통 일요일을 이용한다. 어린애들이라도 도와 줄 일손이 더 있으니까. 그때는 조그마한 뙈기밭은 호미로 캐고 넓은 밭은 소 쟁기로 갈았다. 쟁기가 지나가면 줄기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고구마가 연달아 올라온다. 쟁기 뒤에 몇 사람이 따라가며 줍는다. 둥글고 길쭉한 큰놈이 보이면 손이 먼저 간다. 큰 것이나 작은 것을 모조리 주어서 군대 군대 모아놓고 햇볕과 바람을 쏘인다. 그래야 흙 털기도 편하고 보관하기도 좋다. 고구마를 달구지에 가득 싣고 집에 돌아 올 때는 벌써 날이 어두워진다.
고구마는 캐서부터 여러 종류로 분류하여 보관한다. 크고 상하지 않은 것은 종자로, 후에 먹을 것은 선반에 올려놓고, 작고 먼저 먹을 것은 주방 한 모퉁이에 쌓아 보관하여 매일 조금씩 쪄 먹는다. 고구마전분으로 만든 당면은 색깔이 검지만 감자 당면보다 질기고 맛이 좋다. 작은 것도 버리지 않는다. 손가락 같이 작은놈들을 깨끗이 씻어 삶아서 햇볕에 약간 말리면 쫄깃쫄깃 먹기 참 좋다. 어렸을 때 놀러 나가면 먼저 발 위에 말리는 고구마를 한 줌 지갑에 넣고 나간다. 친구들과 장난하고 놀면서 나누어 먹는다.
그 시절은 먹을 것이 충족하지 못하므로 고구마는 양식 대신 큰 보탬이다. 그러기에 집집마다 방안에는 고구마 보관하는 큼직한 선반이 있다. 겨울 긴긴 밤에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아궁이의 타다 남은 잿불에 고구마 몇 개를 묻어 구워먹기도 하지만 더 맛있게 먹는 방법은 따로 있다. 추운 겨울이 되면 언제나 방안에는 화로불이 있다. 장작을 태운 불덩어리를 화로 가득이 담아다 놓고 고구마 몇 개를 통째로 석쇠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면 한참 후 고구마 껍질이 부풀었다가 “픽픽” 소리를 내면서 터진다. 이것을 한두 번 뒤집어 놓으면 잘 익는다. 특히 그 고구마를 먹으려고 마주 앉은 친구들과 고구마에서 나오는 픽픽 소리를 들으면서 웃고 이야기 하던 시절이 더 재미있었다.
제2장 소학 시절
소학교 졸업(1964년)
방학 때 임무
소학교 때 방학하면 언제나 몇 가지 임무가 있다. 방학이 끝나고 개학하면 첫째는 거름을 얼마씩 가져와야한다. 둘째는 난로에 땔나무, 셋째는 싸리 빗자루 하나씩은 가져와야한다. 2~3학년 때는 전국적으로 사해(四害)를 소멸한다며 쥐꼬리 몇 개, 참새 발 몇 개, 파리 몇 마리 등등 임무가 주어졌다.
일반 땔나무는 부모님이 준비해주었고 쥐나 참새는 장난삼아 잡는다. 당시 모두 초가집이라 새들은 두꺼운 지붕 속에 굴을 뚫고 있다. 밤이 되면 손전등을 비추며 참새 굴에 손을 들이밀어 쉽게 잡아냈다. 쥐는 약을 놓거나 덫을 놓는다. 파리는 해가 쟁글쟁글한 날에 파리채를 들고 다니며 바람벽에 붙어 있는 놈을 때려잡는데 한참이면 성냥갑에 그득하다.
내 퍽 어렸을 때 매일 똥 주우러 다니는 중국 아바이를 항상 보군 하였다. 특히 겨울 이른 새벽에 광주리(粪筐)와 낡은 낫을 가지고 다닌다.(호미보다 편하다) 겨울에는 아무리 더러운 개똥이나 돼지 똥이라도 떵떵 얼었기에 광주리를 옆에 대고 낫으로 톡 까면 똥 덩어리가 광주리에 슬쩍 튕겨 들어간다.
이렇게 겨울동안 부지런히 주워 모았다가 채소밭에 밑거름으로 사용하거나 생산소대에 바쳐 공수(工分)와 바꾼다.
그 시대는 밭에 화학비료 사용량이 적었다. 옥수수를 심어도 조 씨를 뿌려도 모두 말린 인분이나 가축분(家畜糞)으로 포기거름을 한다. 그래서인지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암과 같은 성인병이 적은 것 같다.
나도 학교 다니기 시작하니 겨울 방학이 되면 어르신들처럼 매일 새벽 일어나 광주리를 들고 이 모퉁이 저 모퉁이 똥 찾으러 다닌다. 그렇게 며칠 집에 가져다 모았다가 개학하면 학교에 가져간다. 개털 모자를 쓰고 벙어리장갑을 끼고 다니며 춥기는 하지만 하나 둘 광주리가 채워지는 재미도 있다. 이런 습관으로인지 나는 지금까지도 늦잠 자는 버릇이 없다.
어떤 때는 낮에도 소똥 주우러 다닌다. 햇빛이 따시게 비치는 맑은 날 쪽 발구에 큰 광주리를 올려놓고 큰길 따라 가면 소발구가 지나가면서 남긴 소똥이 줄지어 있다. 어떤 산골 눈길에도 심심치 않게 얼어붙은 똥 덩어리들이 보인다. 하기야 소똥뿐이 아니라 이따금 개똥도 있고 길옆 으늑한 곳에는 사람 똥도 있다. 그래도 모두 떵떵 얼은 것이니까 냄새도 없어 괜찮다. 광주리가 가득 차면 돌아오는데 언덕을 오를 때는 땀방울이나 흘린다.
도시락은 별맛이다
나도 소학교 때 한번 도시락을 싸가지고 간적이 있다. 그때 산골 애들이 도시락을 가지고 학교에 와서 점심 먹는 걸 보면 맛있는 음식은 아니지만 나는 왜 그렇게도 부러워했던지 모른다. 산골이라 흰쌀밥이란 구경도 못한다. 강냉이 쌀에 빨간 팥 몇 알 섞은 밥, 혹은 좁쌀 밥, 이따금 흰쌀 몇 알을 섞는다. 반찬은 부추를 섞은 계란 볶음이고, 시냇가에서 잡은 물고기 반찬이다. 어떤 때는 그런 것도 없어 무말랭이 짠지다.
점심시간 되면 봄철에는 따스한 햇빛이 쟁글쟁글 비추는 돌담 벽에 기대어서, 여름이면 운동장 서늘한 나무 그늘 밑에서, 겨울이면 장작불이 뻘겋게 타오르는 난로 주위에 모여 앉아 오손도손 이야기도 하고 떠들고 웃어대며 맛있게 먹는 그 장면이 아주 재미있어 보였다.
며칠 벼르다 하루는 어머니 보고 도시락을 싸 달라고 졸랐다. 나의 집은 학교와의 5분 거리도 안 된다. 어머니는 가까운데 집에 와 따뜻한 밥을 먹으라고 하지만 내가 너무 조르기에 할 수 없이 아버지가 비행기 날개(납)로 만들었다는 밥통에다 강냉이 쌀에 많지도 않은 흰쌀 몇 알 섞어서 계란 부침을 해주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도시락밥을 생각하며 선생님의 강의도 귀에 들어가지 않는 것 같았다. 시간도 빨리 안 간다. 애타게 기다리던 밥시간이 되어 가까운 애들은 모두 집으로 갔지만 나만은 산골 애들과 같이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 그날 밥맛은 특히 좋았다. 맛있는 것도 아니고 따스한 것도 아니지만 처음 먹는 야외의 음식이여서인지 아니면 친구들과 같이 나누어 먹어서인지 그날 맛이 특별히 좋았다.
종이가 그립던 시절
소학교 다니던 시절 학생이란 종이가 많아야 글 연습을 많이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때는 종이가 어찌도 사기도 어려웠고 귀했던지 모른다. 지금처럼 인쇄 된 연습장, 작업장은 구경도 못한다. 새 학기 교과서를 받으면 어문, 수학, 한어 등등 각 과목 별로 작업장과 연습장을 준비한다. 보통 큰 백지를 사다 16절지, 혹은 32절지로 잘라 연습장을 만든다.
작업장은 반드시 새것으로 깨끗해야 하고 지웠던 흔적이 없어야 하지만 연습장은 나름대로 글 쓸 공간만 있으면 된다. 그러기에 전번 학기에 사용했던 작업장이면 된다. 앞면만 썼기에 뒷면은 깨끗해서 아무렇게나 글을 쓸 수 있다.
특히 수학은 가감승제 모두 손으로 필산하기에 종이가 많이 필요하다. 그래서 개학이 임박하면 쓰던 종이를 정리한다. 앞면만 쓴 종이는 무조건 모아서 연습장을 만든다. 16절지 종이는 32절지로 뒤집어 그때는 스테이플러(訂書机)도 없기에 실로 꿰매었다. 그러면 제법 좋은 연습장이 된다. 이렇게 종이 앞뒤 면이 모두 새까맣게 되어 쓸 공간이 없을 때에야 버리는데 그것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화장실에 가져다 화장지로 사용한다.
나의 흥취
나는 소학시절부터 학습이 우수했다. 하여 학습위원은 언제나 내 몫이다. 그렇지만 문체활동은 좋아했지만 뛰는 운동은 항상 꼴찌다. 그러기에 기말에 얻는 상장과 상품은 모두 학습 성적에서 따낸 것이다. 체육에는 내 몫이 하나도 없다. 언젠가 한번 뛰기에 겨우 3등 하여 딱 한 번 연필 한 자루 받은 적 있다.
나는 책읽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방과 후 집에 와서 소설책을 읽기 시작하면 해 가는 줄도 모르고 한 권을 끝까지 보고서야 일어설 때도 있었다. 내가 본 소설책은 아주 많다. 주요로 전쟁이야기와 옛날이야기다. 삼국지(三國演義). 수호전(水滸傳), 서유기(西遊記) 등 중국고전소설과 심청전, 춘향전. 흥부전, 전우치전, 임꺽정, 서산대사 등 조선고전소설, 그리고 씀바귀꽃(苦菜花), 붉은 바위(紅岩), 려량영웅전(呂粱英雄傳), 지원군의 하루(志願軍的一天), 구양해의 노래(歐陽海之歌), 철도유격(鐵道遊擊隊), 빨치산 참가자들의 이야기(조선), 강철은 어떻게 단련 되었는가(소련) 등 현대소설이다.
그림 그리기도 좋아했다. 그림 그리면 모두 우수다. 3 학년 때 그림그리기 활동에 나는 삼국지 관운장이 말 타고 싸우는 인물화를 그려 일등상을 받았다. 그리고 어머니 수놓는 베개 마구리 무늬도 모두 내가 그려 주었다.
그림 그리기는 조선에 계시는 외사촌 형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가봐. 그 형님은 조선에서 유명했는지는 모르나 그림을 아주 잘 그렸다. 폐결핵으로 우리 집에 와서 치료받던 중이다. 조선에는 폐결핵 치료에 필수인 페니실린(連莓素)이 없었다. 조선에서 입쌀밥 먹고 중국에서는 멀건 죽과 대식품을 먹을 때다. 형님은 시간 내어 유리에 호랑이 한 마리를 그렸는데 어찌도 잘 그렸는지 진짜와 꼭 같았다. 하여 방안 출입문 위에 걸어놓고 보군하였는데 후에 깨져버렸다. 화투도 잘 그렸다. 이에 나도 화투 그리기 연습하여 지금도 보지 않고 마흔여덟 장 그림을 모두 그릴 수 있다. 당시 오락이 화투놀이뿐이다. 하여 나는 친구들과 친척들께 많이 그려주었다.
난로(煖炉)
소학시절 난로에 유관된 일도 빼놓을 수 없다. 추운 겨울이 되면 학년마다 난로를 설치한다. 그러면 매일 아침 당직하는 학생이 먼저 와서 난로 불을 피운다. 나는 보통 집에서 아버지가 목수일 할 때 깎은 대패 밥을 가져가서 불을 피우군하였다. 난로불이 좋아야 교실 전체가 따스하여 간초시간 끝나면 인차 들어와 차디찬 손가락을 녹일 수 있다. 불이 좋지 않으면 자리가 좁아 여자들은 끼어들지도 못한다. 난로도 새것이라면 한해 겨울 편히 지낼 수 있지만 오래되어 연통이 낡아 연기가 잘 통하지 않으면 연기가 새어 연기에 취해 눈을 뜰 수 없이 눈물이 나오고 문을 열어 놓으면 발이 시리다.
점심때가 되면 먼 곳에서 다니는 애들 도시락을 데우기도 편리하다. 이따금 휴식시간에 고구마나 감자를 칼로 쑥덕쑥덕 잘라 연통에 고약 붙이는 것처럼 다닥다닥 붙여 놓으면 삽시간에 익는다. 하기야 어떤 못된 애는 장난으로 빨갛게 달아오른 난로에 침을 뱉기도 한다. 더럽다. 그렇지만 그런 것도 상관없다. 그냥 그렇게 먹어도 배탈 하는 애 하나도 없었다. 위생 관념 같은 것은 거의 모르고 살았다. 지금 말로 하면 면역력이 아주 높았던 게지.
원족
소학교 때 원족은 매년 봄에 갔었다. 원족 가는 날은 마치 명절 쇠는 것 같다. 옷도 새 옷으로 갈아입고 집에서는 흰쌀밥에 계란을 볶아주고 간식으로 과자나 사이다를 사준다.
따스한 봄날에 매일매일 학습만 하던 작은 교실의 공간에서 해방되어 들판이나 산에 가면 훨훨 날 것만 같다. 공기 좋고 경치 좋고 구경이 좋으니 이때만큼 즐거움이 없을 것이다. 유희놀음도 여러 종류다. 군사놀음도 있고 보배 찾기도 있다. 보배 찾기는 먼저 선생님들이 번호가 쓰인 종이쪽지를 돌 밑이나 나무새짬에 끼워 감추어 놓는다. 우리는 그 보배 찾느라 여기저기 돌도 뒤져보고 나무 위를 두리번거린다. 그러면 두세 장씩 찾아내어 활동이 시작된다. 보배 번호대로 노래하는 학생이 있고, 글 낭독하는 학생도 있고, 웃기는 말도 한다.
6학년 졸업 할 임박에는 고개 넘어 대전자(大甸子) 산 밑에서 유림 소학교 학생들과 연합하여 함께 즐겼다. 비록 서로 낯선 학생들이지만 선생님의 지도하에 둘씩 짝을 지어 춤추던 모습이 아직도 어렴풋이 생각난다.
“도미도미 도미도, 레미레미 레미레, 도레미도 도시라쏘.” 하면서 손잡고 발맞추어 둘레춤을 추었다.
잊을 수 없는 까마귀 밥
소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일요일만 되면 점심밥을 지고 새벽 일찍 고개를 넘어 고산자(孤山子) 개울에 고기 낚으러 가군 한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우리는 만반의 준비로 바지는 잔뜩 높이 허벅다리까지 걷어 올리고 밥통은 허리에 둘러매고 다래끼(버드나무로 만든 광주리) 배꼽까지 줄을 길게 늘여 목에 걸고는 낚시를 흐르는 물에 띄우고 낚시 시작한다.
점심때가 되면 낚은 고기는 내장을 빼고 소금을 약간 뿌리고 자갈 위에 펴 놓고 햇볕에 말린다. 뜨거운 낮 시간 푹 쉬고는 오후 3~4시에 다시 낚시를 시작한다. 그러다 날이 어둡기 시작해야 아쉬운 마음으로 할 수 없이 집으로 향한다. 집에 도착하면 이미 깜깜한 밤중이다. 하루 종일 낚은 고기는 많지는 않지만 산골에서 해산물이란 일 년 365일 한번 구경도 못하는 우리에게 아주 좋은 반찬이다, 비록 새벽부터 고개를 넘나들며 고생은 하지만 고기 낚는 재미로 매주 일요일이면 빠짐없이 같은 또래끼리 약속한다.
어느 하루 벼르던 일요일이 또 왔다. 이날은 친구 이명선과 같이 갔다. 오늘은 고기가 더 잘 물리는 것 같다. 장마철 홍수에 깨끗이 씻긴 개울 바닥은 너무도 말끔하다. 그러니 고기가 먹을 것 찾아 많이 올라온다. 미끼를 껴서 물에 척 던지면 마치 물고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낚시찌가 물속으로 쑥 들어간다. 그때 얼른 줄만 당기면 새하얀 행배리(피리) 혹은 시뻘건 소해가 무겁게 달려 나오군 한다. 보통 20센티미터, 한 뼘씩 크다. 물고기를 넣은 다래끼는 점점 무거워 진다.
개울을 한참 내려가다 보니 큰 돌에 막혀 물이 잔잔하다. 나는 새 미끼를 바꾸어 그곳에 낚시를 던지니 물에 닿기도 전에 낚시찌가 휙 물속으로 잠긴다. 나는 급히 줄을 당기니 어찌도 무거운지 낚싯대가 활등처럼 휘이면서도 당기질 않는다. 옳지, 큰 고기가 물렸다, 하여 더 힘을 주어 물가로 당겨 던졌다. 그러니 시뻘건 큰 고기가 끌려 나온다. 그때 어린 시절 큰 고기를 처음 낚으니 어찌도 기쁜지 모른다. 낚시를 물고 모래 위에서 펄떡펄떡 뛰는 그놈은 하얀 비닐에 빨간빛이 번쩍인다. 보통 고기보다 두 배 더 큰 강고기(어해)다. 점심때가 되어 이전과 마찬가지로 고기 내장을 빼고 돌 위에 펴 놓았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 조금 위 깊은 물에서 목욕을 한다. 오늘 나는 평상시보다 더 기쁘고 즐겁다. 우리는 서로 물싸움 하면서 한창 재미나게 물장난을 하는데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와서 고기 펴놓은 곳을 휘휘 맴돌고 있다. 고기를 발견했던 것이다. 나는 급하여 발가벗은 몸으로 소리치면서 뛰어간다. 때는 이미 늦었다. 까마귀는 씽하게 내려 덮치더니 고기 한 마리를 물고 먼 산속으로 사라진다. 바로 내가 몹시 기뻐했던 그 큰 고기를 물고 가 버렸다. 나는 울음은 나지만 울지도 못하고 아주 아쉽고 분하다.
만약 내가 그놈을 낚지 않았더라면 그놈은 아직도 물속에서 자유로이 헤엄치고 지낼 터인데 하필 까마귀밥이 되었을까?
고모 집에 놀러가다
작은 고모는 조선에 있다고 하지만 큰 고모는 통화(通化) 서강촌(西江村)에 계신다. 5학년 겨울 방학이다. 나는 근처 이모님을 따라 고모네 집에 놀러 가게 되었다. 현에 가서 기차 타고 통화에서 하룻밤 자고 아침 새벽 다시 버스 타야한다. 통화에 도착하여 “강계려관”에 들었다. 날이 아직 어둡지 않아 나는 놀러 나갈려 한다. 여관을 나설려니 이모님은 멀리 가지 말라고 부탁한다. 잘못하면 찾아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나도 속으로 무섭기도 하다. 나는 도시 구경이 처음이다. 거리에 나서니 차도 많고 사람도 많이 붐빈다. 이날 처음으로 하이야차를 보았다. 버스에 높이 앉아 내려다보니 버스 옆을 지나가는 납작한 차가 신기하기도 했다. 사람 키보다 더 작다. 거리는 이갈래 저 갈래 사방으로 통하고 모퉁이 길도 많다. 어디가 어딘지 기억하기도 어렵다. 그래도 나는 머리가 먹통은 아니다. 나는 지나온 길을 잘 기억했다. 좌로 돌아 몇 번 길 건너고, 우로 길 몇 개를 건넌지 똑똑히 기억했다가 그대로 돌아오니 여관에 잘 찾아왔다. 날이 어두워서야 돌아왔는데 이모는 애타게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나를 보자 반가워 하지만 걱정 많이 했다는 것이다. 후에 집에 와서도 부모님과 이야기하여 나를 총명한 애라고 칭찬하는 말을 들었다.
고모 집에는 나와 동갑인 사촌 형님이 있고 시집간 누님 여럿이 한 마을에 살고 있기에 조카도 많고 나와 같은 또래들이 많다. 동무가 좋아 한 달 동안 이집 저집 다니면서 군사놀음하고 숨바꼭질, 썰매도 타면서 재미있게 지냈다. 설(구정)도 고모네 집에서 지냈다.
한번 한 친구네 집에서 나오려니 큰 강아지가 “웡, 웡” 짖으며 나를 물려고 한다. 나는 갑자기 피할 수도 없고 하여 엉겁결에 내 조그마한 주먹을 개입에 확 밀어 넣었다. 개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주인집에서 나와서야 나는 손을 뺐다. 손잔등은 이빨에 긁히기는 했지만 물린 것보다 낫다. 이런 걸 보니 나도 담이 컸던 모양이다. 그때는 용감한 영웅이야기책과 영화를 많이 보았기에 영웅들을 본보기 삼는 것이다.
제3장 중학생활
중학교 제7기 1반 2반 졸업생 단체사진(1968년)
뒷줄 좌측 첫 번째 본인
중학교 입학
나는 1964년 9월에 중학교에 입학했다. 16살이다. 학교는 고향과 100여리 떨어져있는지라 첫날부터 기숙사 생활을 하였다.
집안시 제3중 조선족학교는 1957년 설립된 우리 현에서 유일한 조선족 중학교이다. 본래는 유림진(楡林鎭) 산골에 있던 것이 우리가 입학하는 1964년에 집안시(集安市)로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새집이 마련 안 되어 몇 달 동안은 현 당교(党校)에서 임시 자고 먹고 학습한다. 두 개 반 120여 명이 큰 례당(礼堂)에 모여 상과(上課)하니 아주 복잡하다. 먹는 것도 형편없다. 수수밥에 가지국, 혹은 호박국 한 가지 뿐, 아무런 반찬도 없다. 어떤 때는 고구마국도 먹었다. 큼직큼직하게 쑥덕쑥덕 썰어서 삶은 것이다. 그때 그 고구마국은 내 일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몇 달 후 새 학교로 이사했는데 그것도 새집이 아니고 벽돌 만드는 공장 건축물을 개조한 것이다. 그래도 교실과 교무실, 숙사, 식당 등 학년 별, 반급 별로 나누어 학습하고 생활하니 훨씬 편리했다. 선생님들은 모두 연변대학이나 기타 사범학교를 필업한 우수생(高才生)이라 교육 질량은 아주 좋았다. 이효 선생님이 창작한 교가(校歌)는 동창들의 애창곡으로 지금도 동창모임에서 부르군 한다.
나는 소학교 때부터 학습 성적이 우수였다. 중학교 입학부터 반급에 학습위원이고 교내 방송원으로 매일 아침 20분씩 방송을 했다. 주요 내용은 교내에서 생기는 토막 뉴스다. 입학 할 때 우리 반급에만 60여 명이었는데 몇 사람은 몇 달 후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반주임도 여러 번 바뀌었고, 이러저러한 여러 가지 원인으로 결국 필업 할 때는 겨우 30여 명 뿐이었다.
그때 교통이 아주 불편했다. 처음 입학하는 날도 아버지가 우리 몇을 데리고 고개를 다섯 개나 넘어서 학교에 온 기억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오솔길을 따라 걸어가면 7~80리, 7~8시간을 걷는다. 그러면 손가락은 퉁퉁 붓고 발바닥은 물집이 생긴다.
지금 같으면 걷는 것이 아주 좋은 건강운동이라 하겠지만 그때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버스 한 대가 하루에 한 번씩 네 개 향의 여러 마을을 지나가노라면 언제나 만원(滿員)이다. 자리가 없어 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무거운 짐은 먼저 아는 사람께 차로 보낸다. 혼자 다닐 때는 여름에는 쇠고랑을 굴리며 겨울에는 싸리나무로 지치게를 만들어 미끄럼질하며 가군 하였는데 그것도 재미가 있었다. 아직도 어린 마음이니까.
방학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영후(嶺后)의 학생들은 기차를 타고 다녔지만 영전(嶺前)의 태평, 량수, 대로(大路) 있는 우리는 버스를 탈 수 없어 걸어 다니는 수가 많다.
여름에는 몇 사람이 동행하여 함께 집에 갈 때도 있다. 집으로 가기 전날 밤은 잠을 설친다. 아침 일찍이 일어나 새벽 두세 시 날이 밝기 전에 떠난다. 걸어서 태평에 도착해야 닭 우는 소리가 간간히 들리고 날이 훤히 밝기 시작한다. 그러면 길가 식당에 들어가 간단히 아침을 먹는다. 밥 먹고 다시 떠난다. 강구(江口)와 유림에 있는 동창은 한 명 두 명씩 집에 도착되고 우리는 계속 몇 시간 더 걷는다. 나는 11시 량수에 도착한다. 바로 점심시간이라 “사회주의는 좋다”는 노래 소리가 전봇대에 설치한 확성기에서 크게 들린다.
몇 시간 고생하여 다리는 아프지만 집에 온 기쁨으로 즐겁기만 하다. 집에 몇 달 만에 찾아왔으니 실컷 놀고, 낚시도 하고, 먹을 것도 마음대로 배불리 먹게 된다.
이따금 학교에서 단체로 화물차를 구하여 집으로 가는데 여름에는 시원하여 괜찮지만 겨울에는 추위에 벌벌 떨린다. 그래도 반급 담임선생님은 우리들 발이 얼까봐 담배 가루나 고춧가루를 구하여 준다. 그것으로 발을 싸매고 신을 신으니 훨씬 따뜻하다. 그래도 엄동설한에 몇 시간을 덮개도 없는 차를 타면 귀나 얼굴, 코가 동상에 걸리기 일쑤다.
기숙사 생활
기숙사 식당에는 아줌마 둘이서 일한다. 국은 집에서 돼지먹이 끓이듯 가마솥에 채소를 쑥덕쑥덕 썰어서 물을 한 가마 부어넣고 소금을 몇 국자 뿌리고는 큰 국자로 마구 휘젓는다. 밥은 작은 밥주걱이 아닌 큰 삽으로 퍼 담는다. 여름 더위에 아줌마들도 많은 고생을 하신다.
먹는 것은 매일 매끼 수수밥이다. 수요일 점심 흰쌀과 팥이 조금 섞인 수수밥, 일요일 점심 한 끼만 흰쌀밥을 먹는다. 이따금 팥을 넣고 푹 익힌 수수밥이면 그 맛은 아주 좋다. 지금도 먹고 싶은 생각이 난다.
밥은 자기 맘대로 먹지 못한다. 아줌마들이 4량(兩)짜리 용기로 한 그릇씩 담아준다. 그런데 아줌마도 공평치 못하다. 어떤 사람은 꼭꼭 눌러 퍼 주고 어떤 사람은 허술하게 퍼준다. 한창 자라는 우리 체질에 4량 밥에 배부르지 못한다. 밥은 4량이 표준인데 개별적으로 가량표(加兩票)를 살 수 있어 2량 혹은 4량을 더 먹을 수 있다. 가량표는 보통 수요일과 일요일 점심 때 흰쌀밥 먹을 때 사용한다.
밥그릇은 모두 개인이 준비한 것이라 다종다양하다. 채소는 국 한 그릇 뿐 아무 반찬도 없다. 매 개인이 그릇 두 개, 숟가락 하나, 젓가락 한 쌍이면 된다.
숙식하고 있는 우리는 배는 항상 고프고 먹고 싶은 것도 많다. 요행 고향에서 누가 온다면 부탁하여 먹을 것을 가져다 달라고 한다. 삶은 고구마와 옥수수, 혹은 옥수수튀김, 미숫가루 등. 휴일이나 저녁에 배고플 때 조금씩 먹곤 한다. 삶은 고구마나 옥수수는 하루 이틀에 다 먹어 치워야한다. 지금처럼 냉장고가 없는지라 변하여 버릴 때도 있다. 한번은 보조금을 받는 김인철이가 한 푼이라도 아끼느라 매일 아침 식전에 거리에 나가 3푼짜리 콩국 한 사발을 사먹고 아침 한 끼를 댄다. (식당 한 끼 식비는 7~8전) 그것도 문화혁명 초기에 학교 보조금을 받으며 식당(下館子)밥 먹었다며 비판을 들었다.
숙소는 구들이 두 개 마주하고 구들 위에 또 한 층 마루가 있다. 여름에는 괜찮지만 겨울에 석탄을 때어 구들은 따뜻해도 위층에 자는 사람은 벌벌 떤다. 밤 자습이 끝나고 차디찬 이불속으로 들어가자니 너무도 끔찍하다. 하여 솜옷을 입은 그대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 날이 많다. 나는 보통 위층을 차지하게 된다. 위층은 두꺼운 볏짚 돗자리를 깔았지만 추위를 막는데 역부족이다.
노동과 문체활동
새로 이사한 학교라 학교일도 많다. 근검건학(勤儉建学)이란 원칙으로 많은 일을 학생들이 하게 되었다. 물론 학교마당을 정리 하던가 등 잡일은 많았지만 식당 비용을 줄이기 위하여 채소를 많이 심었다. 가지, 고추, 양배추 등. 벌레가 생기면 벌레를 잡아주고 어린 모종을 심은 후에는 물을 자주 주어야 했다. 한번은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 전교 학생이 총동원되어 먼 곳에 가서 물을 길어다 주었다. 이날 모두 고생했다. 나는 처음으로 멜대로 물을 긷는 일을 하는지라 훨씬 무겁다. 물 두 통의 무게에 어깨가 내리눌리고 허리가 휜다. 그날 잠자리에 누우니 어깨가 붓고 다리가 아프고 쑤신다.
통학하는 학생들은 모든 공구를 집에서 가져 올 수 있지만 우리는 근처 백성들 집에서 빌려온다. 어떤 집에서는 잘 빌려주지만 어떤 집은 빌려주지 않는다. 그러면 또 다른 집을 찾아다닌다. 그러나 그때 백성들의 마음은 좋았다. 보통 빌려 주군 한다. 호미, 삽, 곡괭이, 물통 등등.
한 번 압록강 건너편 조선 종이공장에서 불이 일어났다. 하여 현 모든 중학교 학생들이 불 끄러 갔다. 우리도 간다하기에 나도 갈고리를 빌렸는데 우리는 아직도 나이가 어리다며 윗반들만 갔었다. 돌아와 이야기하는 것이 압록강 물은 바지를 걷고 건널 정도로 깊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 반 라일관도 갔다가 이모네 집에서 빌린 호미를 잃어 버렸다고 한다.
문화혁명 전에는 학교에 다종다양한 문체활동이 아주 많았다.축구대, 배구대도 있어 이따금 외지에 나가 비결(比賽)한다. 축구는 통화지구(通化地區)에서 2등이고 배구는 집안 현에서 제일 잘 하는 현 배구 대표다.
남자 축구대원들 (앞 좌 세 번째 한기환)
여자 배구대 대원들 (앞 좌 세 번째 박영옥)
문예활동도 우수했다. 현적으로 문오연합활동(文誤聯合活動)이 있었는데 우리학교에서 몇 십 명이 참석한 대합창이 있었다. 신삼식 선생님의 독창 “공인 계급은 굳세다.(工人階級硬骨頭)”가 인기를 끌었고 농악무 모자 두르기 춤이 인기를 끌어 열렬한 박수 환영을 받았고 상도 받았다.
군사훈련도 빠지지 않는다. 지금 기억하기에는 두 번이다. 한번은 대낮에 적의 고지를 점령한다며 산에 오르는 훈련이다. 영화에 나오는 군인들처럼 이불 짐을 뒤집어 묶어 잔등에 지고 저마다 앞을 다투어 꼭대기(通沟촌 뒷산) 오르느라 온 몸에 땀이 흠뻑 젖는다. 눈은 깊어 발이 무릎까지 빠지고 상당히 미끄럽지만 춥지는 않다. 전투 영화를 많이 보았기에 그대로 해 보느라 재미도 났다.
한 번은 밤중이다. 역시 눈이 많이 내려 발이 푹푹 빠지는 겨울이다. 한 밤중에 호각을 불며 빨리 일어나라는 것이다. 하여 자던 학생들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급히 일어났다.
나도 급히 서두르느라 양말도 미처 신지 못하고 나갔다. 운동장에 학생들이 줄을 서고 반주임이 점명(点名)하고는 교장선생님이 말씀 하신다. 금방 뒷산에서 간첩이 활동한다는 정보가 있는데 간첩 잡으러 간다는 것이다. 정말로 믿었다. 하여 놀라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뒷산은 고구려시대의 공동묘지다. 그 때만해도 묘지를 보면 무서운 감을 버리지 못하는 나이다. 그렇지만 할 수 없다. 앞 사람을 따라 깊은 눈을 밟으며 요리저리 묘를 피하여 산으로 오른다. 다행히 가파르지는 않다. 이렇게 반시간이 넘도록 간첩 찾느라 헤매다 간첩 잡았다는 소식이 있기에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 선생님과 윗반 학생 몇이 간첩으로 가장하고 묘지로 돌아다녔던 것이다. 나의 옷은 눈에 푹 젖었고 양발도 신지 못해 동상까지 입었다. 그 동상으로 밤에 자습 할 때면 발이 너무 가려워 언제나 소금물에 발을 담그곤 하였다. 동상 때문에 졸업 후에도 몇 년 동안 많은 고생을 하였다.
한번 나일관 따라 상훠룽(上活龙) 놀러가서 하룻밤 자고 왔다. 여기는 압록강 변 땅콩만 전문으로 심는 고장이다. 토질이 땅콩 심기 제일 적합한 땅이다. 가을철이라 마당에는 전부 땅콩 더미가 여기저기 작은 산 봉오리처럼 가려있다. 우리 고향은 옥수수 무더기, 조 낟가리, 콩 낟가리, 벼 낟가리, 팥 낟가리 등 다종다양하지만 여기는 땅콩 밖에 없다. 그러니 마당에 쌓여 있는 것이 땅콩이요, 집의 구들에 펴 놓은 것도 땅콩이다. 나는 맘대로 실컷 먹고 올적에는 지갑에 가득 넣어 오면서도 먹었다. 참 그때 잘 먹었다. 그때부터 땅콩은 생것으로 먹어야 좋다는 것을 알았다.
일요일이면 태왕 동창 탁용무 집에 가서 공부하기도 했다. 반급 학생 몇이 모여 복습하고 작업을 완수하니 재미도 있었지만 철길 따라 오고가면서 장난하기도 좋았다. 철궤에 올라 비칠거리며 걷는가 하면 침목을 짚으며 세어보기도 한다. 그러다 기차가 오면 얼른 피하는데 멀리 피해서도 기차 지나가는 진동에 땅이 흔들리고 거센 바람에 바로 서 있기도 힘들다.
원족이라며 딱 한번 간 생각도 희미하게 떠오른다. 토구령(土口嶺)을 넘어 기차다리 밑 어느 자그마한 산골입구 큰 개울가다. 물 중간에 큰 바위가 있었고 그 위에서 집체사진을 찍었는데 깨알 같은 얼굴만 보이지 누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겠다. 그 사진도 지금은 없어졌다.
중학교 동창 탁용무와 나일관
문화혁명의 격랑(激浪)
중학 1학년 학습 마치고 2학년에 금방 올라 학습 며칠 못하고 “문화대혁명”이 폭발되었다.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문화대혁명의 물결에 학생들은 공부는 하는지 마는지 장애가 되었고 교장선생으로부터 주임, 반급선생님마저 당권파, 잡귀신으로 몰리며 학생들의 정상적인 학과(学課)는 마비상태다.
전 현적으로 당내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당권파(党权派)를 잡아낸다며 현장, 서기, 선전부장 등 각 부문의 간부들을 끌어내어 대중 앞에서 비판하더니 학교 내에서도 꼭 같은 형식이다. 처음에는 대자보를 쓰기 시작한다. 큰 종이에 붓으로 선생님들의 잘못을 공개한다. 학교의 질서가 너무 엄격하였다는 것도 잘못이고, 학생이 학습에 정신집중 못해 머리를 조금 다쳤다고 큰 문제다. 하여 결점 없는 선생님 하나도 없었다.
권재영 서기와 최성혁 교장선생님은 자본주의 교육방침이라며 먼저 비판 대상이더니 우리 반주임 송명선 선생님마저 잡귀신으로 몰려 자기가 가르쳐 주던 학생들 앞에서 비판을 받고 모욕을 받다 할 수 없이 조선으로 도망하였다. 권 서기도 그렇다. 조선으로 도망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은 잘 하셨다. 학생들한테 매는 맞지 않았다. 심지어 나도 반장(班長)책임에 문제가 있다며 자아 검토까지 한 기억이 있다.
학교에 계속 남아 계시는 최 교장 선생님과 백동현 주임선생님은 고깔모자까지 쓰고 매일 끌려 다니며 비판을 받고 지독한 매까지 맞는다. 어떤 학생은 왜 그렇게도 지독한지 조용한 숙사에 끌고 와서는 잘못한 점을 자백하라며 손가락질하며 마구 욕하고 심지어 나무판자로 엉덩이를 때린다. 그러니 아프다는 말도 못하며 땅에서 뒹군다. 백동현 주임선생님은 2층 침대에 널판자를 건너 놓고 그 위에 서 있게 한다. 내려다보면 벽돌을 깐 바닥이다. 나이 적지 않은 그분들이 어찌 이런 모욕을 받고 견디겠는가?
후에 권재영 선생님의 사무실을 정리하면서 사진첩을 보았다. 젊었을 때 아주 미남이다. 연변 대학교를 졸업하고 결혼 후 자녀 셋이다. 아들 둘, 막내 딸 하나. 이름은 권혁, 권명, 권자. 마지막 글을 모으면 “혁명자(革命者)”다. 이 얼마나 현명한 자식들 이름인가? 이런 사람들을 “반혁명”이라하니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 본인은 얼마나 억울했을까?
실제 그들의 잘못은 하나도 없다. 그들이 아는 지식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백동현 선생님은 일본대학교를 졸업하셨다고 한다. 그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나는 백동현 주임선생님이 하신 말씀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이빨은 반드시 저녁 잠자기 전에 닦아야한다. 잠 잘 때는 입을 다물기에 음식 찌꺼기가 썩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소금물로 행구면 된다.” 이 말은 내가 중학교에 가서 백동현 선생님께서 처음 들었고 아직까지도 그렇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식들께도 그렇게 가르쳐 주었다.
초기에는 대자보를 쓰면서 양비도 많았다. 대자보 쓰고 붙이는데 사용하는 밀가루, 먹물, 종이 등은 자동차로 실어 날라야 했다. 처음에는 큰 종이 한 장에 많은 글을 썼는데 후에는 한 장에 한 글자씩 쓸 때도 있었다. 그것을 바람벽에 붙이자니 많은 밀가루로 풀을 만들어야한다. 후에 “절약하면서 혁명한다”는 구호로 진흙물을 풀어 사용하게 되었고 겨울에는 물을 뿌려 얼려도 며칠은 떨어지지 않는다.
그때는 빨간 “홍위병” 완장만 끼면 왕따다. 홍위병조직이 설립되자 “낡은 것을 타파하고 새것을 세운다(破旧立新, 造反有理)”며 성분이 조금 나쁜(地富反壞右) 집에 찾아가 방마다 뒤집고 천정을 뜯어내고 벽지를 떼고 귀중한 사기그릇도 산산이 부순다. 그런데 이상하게 어떤 집 바람벽에서 감추었던 옛날 사진이 나타난다. 그러면 이집 주인은 큰 고생을 한다. 후에 북경 청화대학교에 전시한 것을 보니 해방 전 국민당 장교와 찍은 사진, 심지어 칼과 총도 감추었었다. 이들이 복벽을 꿈꾸고 있다는 것이다.
이뿐이 아니다. 상점에 진열된 화장품, 경극단(京劇團)에 사용하던 옷과 화장품도 모두 남기지 않는다. 중심가 사거리에 모아놓고 비판하고 선전하면서 밤새 불태운다. 농촌에서는 복(福)자나 희(喜)자 씌어있는 그릇도 남기지 않는다. 신수 보는 책, 상가(喪家)집에서 사용하는 병풍, 시집 갈 때 타는 가마, 심지어 여자들이 사용하는 구루무, 분까지 모조리 불태우고 부셔버린다. 모두 자본주의 생활 습관이란다. 심지어 여성들 기다란 머리카락도 시간 양비라며 단발머리도 아닌 혁명머리(革命头)로 잘라 버렸다.
그 후 4대 “大字報. 大鳴, 大放, 大辯論,”가 진일보 되면서 사람들의 보는 관점이 달라짐에 따라 두 패로 갈라진다. 길가에 나와서 많은 사람이 모여 서로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변론하는 일도 매일이다. 단에 올라 말하는 학생들은 기억력도 아주 좋다. 모 주석 어록 어느 단락이 몇 권 몇 페이지에 있다는 것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 그래야만 상대방을 설복하고 압도할 수 있다.
한번은 반급 학생들이 서로 쟁론을 하다가 손찌검이 생겨 한 학생은 다른 학생에 밀려 진흙물을 풀어 놓은 큰 독에 빠져 온몸이 싯누런 흙투성이 되어 웃음거리도 되었다.
공장 상점마다 심지어 농촌까지 두 패로 나뉘어졌다. 이것이 전국적으로 퍼지면서 완전 두 패의 국내 전쟁이 시작했다. 처음에는 말로 쟁론이었지만 점차 몽둥이를 휘두르고 결국은 현 무장부(武裝部) 무기창고를 열고 총칼을 꺼내어 무장하고 사용한다. 밤중에는 이따금 총소리도 난다. 완전 내부 전쟁이었다. 나도 이 형세에 휩싸여 며칠 참석하였는데 학생들 학과는 완전 정지 상태다. 영화에 나오는 장면을 모방하여 공장에서 사용하는 버드나무로 엮은 안전모에 새까만 먹칠을 하여 머리에 쓰고 손에는 몽둥이나 쇠붙이를 쥐고 순찰(巡察)이라며 재 밤중에 몇 번 거리를 돌군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무서운 세상이었다. 한번은 새벽에 거리를 한 바퀴 돌고 돌아오니 트럭 한대가 금방 들어 왔다고 하는데, 앞에 유리가 산산이 부서졌고 차체도 여기저기 무엇에 쳐서 상한 곳이 많다. 알고 보니 몇 사람이 이 차를 타고 오다가 어느 거리에서 다른 패거리의 돌 공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사람은 상하지 않았다. 또 한 번은 밤중에 생긴 일이다. 1중(中學)에 어느 누가 상하였다며 빨리 가서 담가에 싣고 오라는 부탁을 받았다. 하여 몇이 밤중에 떨리는 맘으로 갔더니 정말 누구인가 땅에 누워있고 몹시 상하여 아프다 흥흥거린다. 얼굴은 피투성이고 눈 바로 위에 칼에 맞아 한 치가량 쭉 째졌다. 두 패가 싸우다 칼부림까지 한 것이다. 다행히 눈은 상하지 않았다
이렇게 몇 번 위험한 일을 목격하고는 나는 무서워 그 이튿날 집으로 돌아갔다. 며칠 안 되어 1중 훙따(紅大) 학생 세 명이 쪼다(造大)학생의 총에 맞아 숨졌다는 소식이 전해온다. 이에 격분한 “훙다”학생들이 “쪼다”를 공격한다기에 “쪼다”학생들은 모두 통화로 피난 갔다는 것이다.
도보로 북경에 가다
한동안 변론하고 대자보 쓰고 하더니 따촨렌(大串联)이 시작되었다. 모 주석께서 홍위병을 접견하신다며 전국 각지 홍위병들이 밀물처럼 북경으로 몰리기 시작한다. 나도 학교 홍위병 대표로 북경에서 모 주석을 뵙고 40일 만에 돌아왔다. 와 보니 학교는 난장판이다. 숙소에 있던 개인 보따리와 가방은 누군가 뒤지고 물건은 방안 가득 너저분히 흩어져 있다.
학교에는 더 있을 수 없다. 상과도 하지 않고 학생들도 몇이 안 된다. 나는 오랫동안 집에 소식이 없었기에 먼저 집으로 갔다. 북경에 가서 한 달이 넘도록 있었으니 집에서는 내가 실종 되었다고 야단이다. 근처 친구들도 내가 돌아 왔다는 소식을 듣고 모여들 온다. 모두 내 소식이 궁금했던 것이다. 먼저 북경 갔다 돌아온 친구도 자기네도 많이 고생하였다는 것이다. 이제는 집에도 있기 싫다. 많은 동창들은 북경에 갔다 와 다시 전국 각지로 “촨렌”갔다는 것이다.
촨렌(串联)은 전국 각지를 다니며 외지의 경험을 서로 교류하고 대연합(大联合) 한다는 뜻이다. 나도 도보로 북경에 갈 마음이 생겼다. 벌써 우리 반의 박영옥 등이 북경으로 떠났다는 것이다. 그때는 학교에서도 이런 행동을 적극 지원해 주었다. “홍군 2만 5천리 장정”의 전통을 의미하는 행동이다. 하여 탁용무, 최운범, 한창진, 김인철, 고운봉 등과 떠나게 되었다. 여섯이서 학교 돈 몇 백 원을 빌리고 학교 공장(公章)만 찍은 공백 소개신 몇 장 가지고 떠났다.
“下定決心, 不怕牺牲, 排出万难, 去爭取勝利.”라는 글자를 이불 짐에 붙이고 누런 가방은 어깨에 메고 홍위병 빨간 완장을 팔에 두르고 앞에서는 “홍위병 장정대(紅衛兵長征隊)”라는 붉은 깃발을 들고 씩씩한 자태로 만리장정(万里長征)을 시작했다. 하루에 불과 5~60리 길이다.
아침이면 떠나고 해가 지면 여관을 찾아 하룻밤 지낸다. 학교 소개신만 있으면 아무 여관이나 우선이다. 도중 우리와 같이 붉은 기를 들고 이불 짐 지고 도보하는 패거리가 보인다. 모두 훌륭한 자세들이다.
우리는 태평, 대로, 오리전자(五里甸子), 사전자(沙尖子)에서 하룻밤씩 자면서 며칠 걸어 환인현에 도착했다. 환인현 여관에서 하룻밤 자고 또 떠날려니 중앙에서 “촨렌금지” 통보가 내렸다. 모든 홍위병들 “복과하여 혁명하라(復課闹革命)”는 지시가 내렸다. 앞으로 계속 가야 아무 여관도 자리 안배 안 한다기에 할 수 없이 버스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도보로 북경가다.(1966) 김은석 사진 제공
(세 번째 박영옥. 뒤 다섯 번 김은석 )
중학교 졸업
그 후 얼마 안 되어 “지식청년 농촌으로 내려가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는다”는 지시로 화전자(花甸子) 어느 농촌에 가서 며칠 일하고는 졸업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뭣도 모르는 우리는 그 물결에 말려 권력 다툼의 공구가 되어 멍청이 짓만 한 것 같다.
3년 중학을 4년 만에 졸업하는 셈이다. 졸업장은 받았지만 말로 중학 졸업생이지 각 과목은 겨우 1학년 수준이다. 그래도 중학졸업이라며 졸업사진도 찍었고 친한 친구들끼리 기념사진을 남겼다.
이제 와서 이런 사진을 보니 너무도 진귀하다. 한창 불타는 듯한 청춘시대의 사진이다. 졸업 후 몇 사람은 계속 고중에 다닌다며 통화 고중학교로 갔다. 하지만 나는 집에 노동력도 없고 가정 곤란으로 고중을 포기하고 고향에 돌아와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내 일생의 학창시절 종지부를 찍었다.
2반 남학생 동창들 (1968)
제4장 사회생활의 첫걸음
귀향
1968년 가을 중학교를 졸업한 나는 “회향지식청년(回鄕知识靑年)”란 자랑스러운 이름을 달고 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부 동창들은 고중으로 진학했지만 나만은 가정의 상황으로 못 가게 되었다. 조금 아쉬움은 있었다. 아버지는 연로하시고 위병으로 고생하신다. 맏형님은 세간 나가 심양으로 이사 갔고 동생은 아직 소학교를 다니므로 집에는 일 할 노동력이 없다. 그때는 소대 단위로 일하고 밥 벌어 먹는 시대이므로 가정에는 든든한 노동력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아무개는 군대 갔단다.” “아무개는 일자리 찾아 공무원이 되어 월급쟁이다.”는 동창들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도 절대 농사일만은 하지 않겠다.”는 단 한 가지 생각뿐이다. 하지만 주어진 내 인생 내 팔자 개변시키지 못하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아직도 불타는 열정
소대에서 일하면서도 학교 때 교육받은 영향으로 계속 시간을 짜내어 모 주석 어록을 학습하고 빈하중농 재교육을 받으며 혁명열정이 아주 높았다. 모택동 선집은 1~4권까지 모두 읽었고 학습심득과 일기도 많이 썼는데 그때 썼던 심득과 일기는 왜 남기지 못했는지, 나도 모르겠다. 하나도 없다. 고향에 돌아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해방군 의료진이 농촌에 내려와 “맨발의사”를 배양한다. 맨발의사(赤脚医生)란 농촌에서 언제나 약 가방을 메고 일하러 다니고 쩐쥬, 빠관(針灸, 拔罐) 등 민간요법(疗法)으로 간단한 통증을 치료해 주는 토종 의사다. 한 소대에서 한 사람씩 선발 되어 간단한 치료지식을 학습했다. 신체에 혈위(穴位)을 찾는 법, 침을 꽂는 방법, 약초 채집과 선별, 약효 등 기초지식을 한 달 동한 배웠다. 하여 이따금 어르신들의 두통과 치통 감기 등은 쉽게 치료 해준다. 새로 배운 지식이라 일하고 피곤하지만 누가 아프다하면 침통을 들고 나선다. 선배들의 말을 듣고 나도 침통에 꿩 털 하나 넣었다. 그 의미는 꿩이 모이를 주워 먹을 때 한 번 먹고 한 번 돌아보군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침을 꽂으면서 항상 병자를 주시해 보라는 뜻이다.
농사일을 하게 되었지만 중학교를 필업한 “지식분자”로 소대 회계, 정치대장, 그리고 민병패장 등 직책을 맡게 되었다. 아직도 문화혁명의 영향으로 불타는 젊은 혈기로 여유시간을 이용하여 소보(简报)를 꾸리고 전단(傳单)을 인쇄하여 문화혁명을 선전한다. 그때는 컴퓨터도 없다. 밤늦도록 커깡반(刻鋼板)하고 유인지(油印机)로 인쇄한다.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장부기록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상급 회의정신을 전달하고 신문을 읽어준다. 여러 가지 직책으로 각종 회의에 참가하는 시간이 일하러 다니는 시간 보다 더 많았다.
이럭저럭 일 년 동안 힘든 줄 모르고 열심히 노력하니 2년도 못되어 당 조직에 가입하였다. 20살이다. 젊은 나이에 입당하니 아주 영광스럽기는 하지만 나의 책임은 더 많아져 대대(大隊)민병련 지도원과 단지부서기까지 담임하게 되었다. 조선족과 한족 혼합 대대라 서투른 한족 발음으로 글을 읽어주고 음절도 맞지 않는 도레미파로 노래도 배워준다. 하지만 그때는 누구도 나를 비웃는 사람이 없었고 말도 잘 들었다.
나의 이런 상황을 알게 된 모교(母校)에서 나를 농촌에서 일 잘하는 전형적인 모범이라며 초청했다. 후배 학생들께 경험을 소개하라는 것이다. 경험이라는 것은 특별한 것이 없다. 처음 배우는 농사일이라 모르던 것을 보고 배우게 되었고, 어린 나이라 어르신들의 말을 잘 듣고 아무 일이나 막힘없이 잘 해주었을 뿐이다.
과수원에서
중학교 졸업한 이듬해 나는 과수원에서 일하게 되었다. 한 소대서 한 사람씩 뽑아 모두 비슷한 친구들이라 서로 일하기 재미난다. 과수원은 멀리 떨어진 산골이라 겨울에는 지키는 사람이 없다. 봄이 되어 땅이 녹으면 이불 짐과 먹을 것을 가지고 과수원에서 자면서 일한다.
봄철에 시작되는 일은 전지(剪枝)하고 접(接)하는 일이다. 기술자의 지도하에 몇 백 그루 나무를 전지하자니 며칠 걸려야한다. 전지는 소용없는 가지를 잘라내는 일이다. 지형에 따라 나무 모형을 만들고 방향에 따라 새싹을 남기고 죽은 가지는 잘라 버려야한다. 어떤 병든 나무는 칼로 깎아내고 약을 바른다. 접(接)하는 일도 기술이다. 야생 배나무를 떠다 옮기고 사과나무의 가지(枝) 혹은 싹(芽)을 접하여 사과배(苹果梨)나무로 키운다.
전지와 접하기 끝나면 나무 주위를 평하게 긁어내고 풀 뽑고 여름에는 병충해 예방하느라 약을 뿌린다. 약통을 메고 가파른 곳을 몇 번씩 오르내려야 한다. 과수원 주위 잡풀도 모두 제거해야 하는데 그때는 지금처럼 예초기가 없다. 모두 낫으로 후려친다. 그러니 벌에 쏘일 때도 있다.
가을이 되어 사과 수확이 끝나고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면 나무 밑둥 부분에 횟가루 물을 칠하고 볏짚으로 감싸 나무 동상(凍伤)을 예방한다.
과수나무 공간에는 콩과 조 같은 키 작은 곡식을 많이 심는다. 우리 몇이 일을 미처 하지 못하여 이따금 소대 사원들을 불러다 김을 맨다. 그날이면 사람들이 웅성웅성 일도 많이 해치우고 며칠 못 보았던 처녀 총각들 서로 만나니 히히 하하 말도 많고 웃음도 많다. 도시락은 제각기 가져왔지만 옹기종기 몇 사람씩 모여 앉아 먹으니 그 기분에 밥맛도 좋다. 이렇게 몇 달 일하고 나는 트랙터 운전 학습하러 현으로 갔다. 비록 과수원 일하는 시간은 짧았지만 아주 즐거운 회억이다.
트랙터 운전 학습반(1970년)
앞 두 번째 줄 좌 세 번째 본인
군사훈련
60년대 말 소련과의 진보도(珍宝島) 충돌이 생기고 소련이 수정주의라며 만단의 전쟁 준비가 되었다. “전쟁과 재해에 대비하고 인민을 위하라.(备战, 备荒, 爲人民)” 민병훈련도 아주 많았다. 농사일이 아무리 바빠도 민병훈련이 우선이다. 한 생산소대가 민병 패 단위로 총과 탄알을 배급 받았고 제대군인의 지도하에 각종 무기의 사용방법을 학습하고 실제 사격훈련도 하고 모 주석의 전략전술을 학습한다. 그때 나는 소련 “7.62”식 보총에 탄알까지 갖고 있었는데 총은 매일 닦아야 하고 저녁 당직할 때마다 가지고 다닌다. 사격훈련에서 나는 언제나 10점 9점으로 우수했다. 탄알은 공사 무장부(武裝部)에서 관할하였지만 사격훈련 명의로 사냥 다니는데 많이 사용했다. 나는 사냥을 다니지 않았지만 멧돼지, 노루고기는 이따금 얻어먹기도 했다.
그뿐이 아니다. 북조선도 수정주의라며 사양소 마당에 구덩이를 파고 비전량(备战糧)으로 벼나 옥수수를 묻어 놓는다. 압록강 건너오는 마을 입구와 길목이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에는 전호(战壕)를 파 놓았고 산골로 피난 가는 길도 만들어 방공동(防空洞)도 만들었다. 후에 이 방공동은 여름에 얼음 보관하기 좋은 창고로 되었고 산에 가면 아직도 그때 파 놓았던 전호 흔적이 보인다.
평시 비상훈련도 많았거니와 야영훈련도 한다. 한번은 초저녁에 총과 이불 짐을 걸머지고 량수에서 떠나 밤새 석청을 지나 대로고개(大路嶺)를 넘어, 다양차, 외차구(外岔溝), 통천(通天), 해관을 거치며 한 바퀴 돌았다. 걷다가 피곤하고 졸음이 오면 멈추어 힘차게 노래도 한 마디씩 한다. 산도 높고 캄캄한 밤이지만 우리들의 노래 소리에 잠자던 범이나 멧돼지도 놀라 달아날 기세다. 량수에 돌아오니 날이 완전 밝았다. 이날만은 대낮에 하루 종일 잠만 잤다.
장마철 홍수방지(防洪)도 민병단위로 진행된다. 폭우가 물을 퍼 붓는 듯 쏟아지고 귀청을 째는 듯한 우뢰와 대낮 같이 밝히며 뻔쩍이는 번개가 동반하는 밤중이라도 민병들을 동원하여 밤새 고생한다. 캄캄한 밤이지만 번갯불이 번쩍일 때마다 싯누런 흙물이 밀리고 큰 나무들이 뿌리째 둥둥 떠내려 오고 방둑이 힘없이 벌꺼덕 무너지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깜짝깜짝 놀란다. 그렇지만 저마다 앞을 다투어 나무를 찍어 물길을 돌리고 가마니에 흙을 담아 물목을 막는다. 밤새 아무 대가도 없는 중로동이다. 그때는 누가 시키는 일도 아니지만 모두 자발적이고 열정은 정말로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다. 마을이 홍수에 밀려 떠나갈까 봐, 수확 철을 앞둔 농작물이 홍수에 떠나갈까 봐, 온 마을 남녀노소 모두 총동원이다.
즐거운 문화 활동과 군 생활을 못한 유감
농사일이 바쁜 시기가 끝나면 여유시간을 이용하여 다채로운 문화 활동도 있었다.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12시가 넘도록 연극을 연습한다. 피곤하지만 모두 10대의 처녀총각들이라 밤새 노래와 춤 연습을 하면 서 힘든 줄을 모른다. 절일(기념일)이나 행사가 있으면 각 촌에 다니며 출연했다. 그때는 자동차가 없어 추운 겨울밤에 발구를 트랙터에 매어 끌고 다녔다. 인삼밭에서 사용하느라 만든 큰 발구에 볏짚을 깔고 지붕도 없고 난간도 없는 발구를 타고 다니자니 눈보라가 휘날려 얼굴에 뿌리고 커브를 돌 때는 떨어질까 봐 여자고 남자고 서로 부둥켜안는다. 춥고 위험하지만 “하하” 웃음만 나더라. 당시 처녀 총각들은 너무도 솔직하고 “양반”이었다. 밤중까지 연습을 마치고 마을 끝에 있는 처녀를 집까지 데려다 주군 하였다. 지금 같은 시절이라면 처녀 손목 잡을 수도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그런 일은 생각도 없었고 또 생각이 있었다 해도 감히 그런 농담도 하지 못했다.
젊은 총각들은 한창 서로 다투어 군대에 갈 때다. 나도 남자로 태어나 군대 생활은 한 번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하여 신청하여 신체검사까지 합격했지만 촌에서 보내지 않았다. 집에 노동력이 없다는 이유다.
당시 군인이라면 처녀들은 그 남자에 눈독을 들이고 약혼과 결혼은 쉽게 허락한다. 하여 사회에서 이런 말도 돌았다. “군대 간 사람은 꼬치에 금(金)물을 칠했나?” 사실 웃는 말이다. 웃는 말이기는 하지만 또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은 일자리 찾기가 아주 쉬웠다. 오자마자 일자리가 생겨 공무원으로 국가 양식을 타먹는 월급쟁이다. 그러니 왜 처녀들이 따르지 않겠는가 말이다.
농촌에서 일하는 농사꾼은 매일 땅 파느라 고생하고 온몸은 언제나 땀 냄새와 흙냄새가 떠날 줄 모르고 옷은 풀물과 먼지로 씻은 뒤가 없다. 손바닥은 일하느라 거칠다. 이런 총각은 아무리 맘이 좋아도 처녀들은 곁눈질도 안한다.
군대 입대하는 친구와 함께(1971년)
논과 밭을 누비는 농사꾼이 되어
우리 소대는 논(水田)이 적고 밭(旱田)이 많다. 그리고 100여 명이 넘는 인구를 겨우 십여 명의 힘으로 먹여 살리자니 사시사철 일이 끝이 없다. 타작이 끝나고 겨울이 오면 눈이 정말 많이 내린다. 눈이 내려 눈길이 생기면 여성들은 거름을 실어 나르느라 바쁘고, 남성들은 눈에 묻힌 옥수숫대를 사양소로 실어 나르고, 사양소 일 년 땔나무와 개인집 일 년 땔나무를 준비하느라 한 달 동안 고생한다. 그야말로 사시사철 푹 쉬는 시간이 없다. 하여 벌판 마을로 이사 가는 사람도 많았다. 벌판에 가면 논농사만 하고 매일 매끼 입쌀밥만 먹을 수 있고 모내기 때 며칠 고생하고 가을에 타작이 끝나면 아무 일도 없다. 겨울에 땔 나무 준비도 필요 없다
농사일은 모두 집체로 하는 일이라 공수(工分)제다. 평상시에는 밭갈이 군이 김 매는 사람보다 1~2공수 높다. 하기야 남자들이 연장 잡고 하는 일이라 힘들기는 하겠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불공평하다. 소가 힘들어 한다는 핑계로 쉬는 시간이 많고 저녁에는 일찍이 떨어져 소 풀 뜯기느라 시원한 그늘 밑에서 담배 대만 물고 있다.
김 매는 사원들은 날이 어두워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일하는 수가 많다. 그때는 일하면서 장갑 끼는 것도 몰랐다. 아마 장갑 사기 아까워서다. 하루 종일 호미로 긁고 풀을 뽑느라 손가락은 풀물에 시퍼렇게 된다. 잘 씻기지도 않는다. 단오절과 추석 명절이 임박하면 처녀총각들은 손가락을 깨끗이 씻느라 애쓴다. 다행히 “과이풀”이라는 풀이 있어 손에 묻은 풀물을 깨끗이 씻을 수 있다. 일이 끝나면 저마다 과이풀을 한줌씩 찾아 개울물에 씻어버린다.
평지밭은 허리 굽히고 하루 종일 호미질 하면 저녁에는 허리가 쑤시고 아프지만 가파른 언덕 밭은 김매기 쉽다. 허리를 굽이지 않고 호미로 슬슬 긁으면 된다. 하지만 이때마다 돌덩이가 내려와 발잔등을 깔 때도 있다. 여름이라 시원하게 신을 벗고 맨발로 일하니 조그마한 돌이라도 맞으면 몹시 아프다.
사원들 매일 일하는 공수를 장부에 기록하여 가을 분배할 때 공수의 적고 많음에 따라 양식을 분배하고 현금을 지급한다. 인구가 많고 노동력이 적은 가정은 현금이라는 것은 만져 볼 수 없고 마이너스다. 즉 빚을 진다는 것이다. 그래도 굶어 죽으라는 정책은 없었다. 빚진 가족(超支戶)이라도 매 인구에 기본 식량을 나누어 주었고 설 쇠라고 현금도 조금씩 빌려주었다. 추석과 음력설에는 한두 마리 돼지를 잡아 똑같이 나누어 준다.
집체로 하는 부업은 모두 공수를 받지만 개인 부업은 현금수입으로 가정에 많은 보탬이 된다. 고사리 꺾어 팔고 가을에는 도토리 줍고 머루와 다래를 따다가 판다. 인삼밭에서 사용하는 억새풀, 그리고 애쌔리도 좋은 부업이다. 그렇지만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십 몇 리 산골을 넘어 50~60근의 억새풀을 등에 지고 집에까지 걸어온다. 손은 억새풀잎에 긁혀 피 흘리고 잠자리에 누우면 온몸이 나른하고 어깨가 몹시 아프다. 그렇지만 현금 만지는 재미로 이튿날 새벽 또 떠난다.
그때는 자전거도 귀했다. 매일 일하러 2~3리 길을 걸어 다니느라 지금 같으면 몸 단련이라 하겠지만 하루 종일 일하고 돌아오는 발길은 무겁기만 하다. 나는 요행 동생이 림강(臨江) 가서 부업한 돈으로 40원 짜리 낡은 자전거를 마련했다. 하여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편했다. 지금 생각으로 보잘 것 없는 아주 낡은 자전거지만 요행 처녀들을 뒤에 태우고 다니니 어찌도 좋아하는지 모른다. 걷는 것 보다 빠르고 편하다.
농민들이 맘 놓고 휴식하는 때는 설 쇠는 며칠이다. 입춘(立春) 지나 보름명절을 쇠고 나면 겨울눈도 다 녹고 날씨가 따스해진다. 그러면 본격적인 농사준비다. 집집마다 이엉을 하고 인분을 파내어 말려 옥수수 심을 포기거름을 준비하는 것이다. 제일 더럽고 싫은 것이 인분 수거다. 집집이 다니며 인분을 파내야 한다. 그것도 얼었을 때 파내면 냄새도 보기도 괜찮은데 녹은 후에는 여기저기 흘리며 파내기도 불편하고 냄새도 독하다.
인분도 공짜가 아니다. 저울에 올려 무게에 따라 공수를 올린다. 돼지 똥도 그렇다. 부지런한 사람은 새벽에 일어나 광주리와 작은 호미를 들고 소똥이나 돼지 똥을 주우러 다니고, 며칠에 한번 돼지우리에 풀을 베어다 깔아주면 돼지도 좋아하고 거름도 많이 생겨 공수(工分)도 많이 번다,
“인분수거”라는 말이 나오니 아버지의 옛이야기가 생각난다. 한 부자 집에서 머슴을 찾아 변소 똥을 파내라고 한다. 좁은 모퉁이에서 일하다보니 몸과 손에 더러운 것이 묻는 것은 물론이다. 부자는 저놈이 어떻게 떡을 받아 먹나보자며 큰 절편을 하나 가져다준다. 그러니 머슴은 손도 닦지 않고 서슴없이 받아먹는다. 부자 놈은 눈을 찡그리며 한참 바라본다. 머슴은 그 떡을 맛있게 몇 입에 먹어치우고 두 손가락에 잡혔던 것만은 버린다. 얼마나 총명한가.
많지 않은 수전(水田)이라도 모내기 때는 제철에 심어야하기 때문에 새벽부터 저물도록 아주 바쁘다. 보통 단오 전에 끝내야 하지만 단오 후에도 며칠 더 하는 때도 있다. 하여 공수(工分)도 평상시보다 높다.
나는 회계(會計)로 줄모나 꽂아주고 매 개 줄의 번호와 평방을 적어 놓는다. 그래야 모 꽂는 사원들이 자기가 고생한 만큼 공수를 받는다.
모 꽂는 사람들은 허리가 아파도 그놈의 공수를 더 벌려고 악을 쓴다. 손놀림이 빠르면 곱을 벌 수 있고 손놀림이 늦어 남한테 뒤 떨어지면 큰일이다. 뒤떨어지면 밸 빠졌다고 한다. 즉 양 옆의 두 사람은 앞으로 지나갔는데 혼자 뒤떨어지니 허리가 더 아플 뿐만 아니라 모 줌이 남아 밀리기도 하고 모자라 가져와야한다. 그런데다 모 줌이 흩어진 것만 밀려있으니 더 늦어진다. 만약 땅이 좋지 못한 곳이라면 손톱이 닳고 아프다. 손가락에 끼우는 고무가 있기는 하지만 하루도 견지지 못하고 구멍이 뻥 난다. 볏모 나르는 짐꾼도 바쁘다. 여기서 모 가져오라고 하는가 하면 저기서는 모가 밀려 가져가라고 소리친다. 볏모를 지게에 지고 좁은 논둑을 밟으며 굽이굽이 돌아다니느라 옷은 지게에서 흐르는 물에 얼룩이 지고 푹 젖는다. 물갈이와 써레질하는 사람들도 하루 일하고 나면 소꼬리에 뿌리치는 흙탕물에 온 몸은 푹 젖고 얼굴마저 흙물이 튕겨 말라붙는다.
더욱 사람을 웃기는 것은 거머리를 무서워하는 여자들이다. 남자들은 다리에 붙은 거머리를 손으로 툭 치고 떼어 멀리 버리지만 처녀들은 그렇지 못한다. 다리가 근질근질하여 발을 들고 보면 발목에 시커먼 거머리가 붙어있다. 그러면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흙탕물을 튕기며 마구 뛰며 여자건 남자건 옆에 사람만 있으면 무조건 끌어안고 떼어 달라고 한다. 그러고 나면 금방 꽂아놓은 모들이 밟혀 흐트러지고 옷은 진흙탕에 튕겨 말이 아니다.
당시 술이 모자라 알코올을 사다가 사이다를 섞어 먹던 시절이지만 상점에서 모내기 술이라며 인구 수자로 나누어 준다. 일 하다 중간 휴식이 되면 진흙 묻은 맨발, 진흙 묻은 손을 대충 물에 씻고는 물이 없는 넓은 두렁에 앉아 한 잔씩 한다. 각기 집에서 가져온 김치, 두부, 계란 등 술안주는 푸짐하다. 어떤 사람은 술이 조금 과하여 물에 넘어져 옷을 푹 적시며 사람들을 웃기기는 하지만 일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 시절은 물 장화도 모르고 장갑도 모른다.
어느 해 봄철이다. 농업은 대채(农业学大寨)를 따라 배운다는 때다. 다락 밭을 만들라는 공사의 지시에 부소대장인 나는 젊은 총각들과 처녀들 데리고 한 산등성이에 새밭을 일구게 되었다. 조금 편하고 억세 풀밭인데 흙을 파서 둑을 쌓으며 다락 밭을 만든다. 둑을 만들고 억새풀을 태우느라 불을 달았다. 나는 둑에 막혀 불이야 넘어 가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그리고 사람이 많아 끄기도 쉬울 것이라 생각 했었다. 하지만 생각 밖으로 봄철이라 마를 대로 바싹 마른 억새풀이 불이 달리자 불길이 번개처럼 날리며 퍼진다. 나는 급하였다. 처녀들도 모두 급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호미와 삽으로 불을 끄기 시작한다. 고함도 지른다. 멀지 않은 산 밑에 남성들 몇 사람이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고함소리에 그들도 달려왔다. 요행 사람도 많고 바람도 없으니 많이 타지는 않고 불길을 제지시켰다. 그리고 서로 쳐다보는 순간 저절로 웃음이 쏟아진다. 서로 보고 웃는다. 저마다 얼굴에는 시커먼 흙과 재로 땀이 범벅이 되어 얼룩얼룩하다. 처녀애들은 더 웃긴다. 얼굴에 얼룩이 진 것보다 앞이마 머리카락이 타서 대머리 될 뻔했다. 아무튼 큰 화재가 아니어 다행이다. 얼룩진 얼굴은 씻으면 될 것이고 탄 머리카락은 다시 자라면 될 것이다.
결혼
1969년 봄이다. 사양소에서 이엉을 엮고 있는데 저 멀리 동갑동창이 옷을 잘 입고 몇이 차 타러 버스정류소로 가는 것이 보인다. 알고 보니 유림(愉林)으로 약혼하러 간다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벌써 색시 얻으로 가는가?” 하면서 이상하고 우습게 여겼다. 그때 나이 19살로 기억된다. 한창 학습하고 사회활동 많이 참가해야 할 나이다. 당시로 보면 조금 일찍 장가가는 셈이다.
나는 20살에 결혼하였다. 늙으신 부모님의 애절한 마음을 거절 할 수 없었다. 현에서 트랙터 운전 학습 할 때다. 갑자기 집에서 기별이 왔다. 추석에 집에 와서 여자를 만나보라는 것이다. 생각지도 않던 일이다. 아버지가 연로하시고 병환으로 나의 결혼을 바삐 서둘러 중매를 찾으셨나봐. 대양차(大陽岔)에 있는 여자인데 와서 선보라는 것이다. 나는 그저 부모의 말씀을 어기지 못하고 추석 휴식일이라 집에 가니 그 여자도 벌써 자기 고모 집에 와 기다리고 있다. 나는 중매쟁이를 따라 그 집 방안에 들어갈려니 아랫방에 낯 설은 여자가 앉아 있다. 나는 윗방으로 들어가 앉았다. 조금 후 중매가 그 여자를 소개하면서 어떤가? 동의하는가? 의견을 발표하라는 것이다. 나는 방으로 들어서면서 그 여자의 옆모습을 얼핏 보았었다. 얼굴이 아주 예쁜 여자라는 감각이 들어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하여 나는 “아들 삼형제의 둘째로 가정 상황으로 양부모를 모셔야한다. 부모와 같이 생활 할 수 있다면 다른 의견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니 그 여자 고모도 중매도 내 말이 꼭 맞는 말이라며 칭찬까지 한다. 그 여자도 아무런 의견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문을 나서 서로 인사하며 보니 키가 150cm쯤 작은 편이다. 그러나 얼굴을 다시 보니 참으로 예쁘다. 해맑은 눈정신, 환하게 웃는 얼굴모습. 그러니 키 작은 것에 조금 부족하다는 느낌이 사라진다. 이튿날 우리는 현에 가서 약혼 사진도 찍고 여관에서 하룻밤 지냈다.
결혼하는 날은 추운 초겨울이다. 색시 데리러 간다며 마차를 세 내었다. 형님은 멀리 이사 갔기에 따라 갈 사람이 없어 중매가 따라 갔었다. 아버지는 단자 돈이라며 1원 짜리 돈 한 뭉치를 내 지갑에 넣어준다. 큰상(잔칫상) 받으면서 처제와 처남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이다. 인생 처음으로 색시 데리러 가 큰 상 받는 일이라 아무 것도 모른다. 윗방에 금방 앉았는데 대여섯 살 처녀애가 발가벗고 베개를 업고는 내 앞에 와 외발로 깡충깡충 뛰면서 흥얼거린다. 우습기도 하고 귀엽다. 하여 나는 돈 1원을 꺼내어 주었다. 그러나 돈이라는 것도 모르는 나이라 손에 받아 쥐고는 그냥 저 좋다고 뛰어논다. 물어보니 여섯 살 먹은 막내 처제란다.
조금 후 작은 상에 글쪽지 몇 장이 올라온다. 처남과 처제들 그리고 마을 젊은이들이 단자 돈을 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전부터 내려오는 풍습이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처제와 처남들에게 1원씩, 청년들은 단체로 10원을 주었다.
결혼은 했지만 철모르는 어린아이와 같다. 나의 부담은 더 많아졌다. 집안 일도 돌봐야지. 장인 집에도 다녀와야지. 그런데다 아이까지 생기니 장부 정리하다가도 짜증 날 때도 있다. 다시 총각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일찍이 아들 보면 일찍이 이득을 본다.(早得兒 早得利)”고 하지만 결혼하고 나면 자연히 가정에 발목이 잡힌다.
봄철에 재미나는 두 가지 일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봄철에 재미나는 두 가지 일이 있다. 하나는 땔나무를 쌓는 일이고 하나는 집 이엉을 엮는 일이다.
설 쇠고 따스한 봄철이 되면 겨울동안 산에서 끌어 온 땔나무를 한 곳에 쌓아야 한다. 한 단 무게가 5~60근. 50단을 한 동이라 한다. 보통 한 집에서 석동 넉동씩 준비한다. 해질 무렵에 근처 누가 나무 쌓는다는 소식이 있으면 자기하던 일을 멈추고 도와주러 간다. 두세 명이 위에서 받아 쌓고 기타 사람들은 차례로 한 단씩 메여다 준다. 5~6명 혹은 10여명이 한 시간 가량 일하면 2~3미터 높은 나무더미가 완성된다. 다음은 저녁이나 얻어먹으면 된다.
그때 구들에 모여 앉아 채소는 간단하지만 독한 술 두어 잔 마시고 집에서 누른 국수를 시원한 자주색 갓김치 국물에 먹으면 한 그릇 먹고 또 반 그릇을 더 청한다. 아직도 그때 그 국수가 먹고 싶다.
두 번째 일은 이엉 엮는 일이다, 70년대 초기까지는 기와집이 아주 적었다. 집 지붕, 창고, 변소, 나무더미, 돼지우리 모두 볏짚으로 엮어 덮는다. 하루의 일이다.
햇빛이 쟁글쟁글 따스한 봄날 마당에 볏짚을 펴놓고 몇 패거리 나누어 이엉을 엮는다. 그러면 어린 아이도 좋다고 볏짚 위에서 뒹굴며 즐긴다. 어린 강아지도 좋다고 따라 다닌다. 엮은 이엉이 흐트러지고 볏짚이 여기저기 날리면 어르신들이 큰 소리로 물러가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애들은 들었는지 말았는지 저 좋을 대로 뛰고 뒹굴며 장난이다.
주방에서는 아낙네들이 바쁘다. 큰 대사를 치르는 것 같다. 술 안주하느라, 밥을 짓느라, 하얀 입쌀밥은 아니지만 싯누런 강냉이 쌀에 미리 삶아 놓았던 팥을 두고 푹 끓이면 그 향기로운 냄새에 배가 저절로 까르륵 거린다.
이 두 가지 일은 집집마다 하는 일이고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라 서로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도와준다. 술도 먹고 밥도 먹고 서로의 정도 깊어진다.
사양소(饲养所)
사양소라면 짐승을 기르는 집이라 할 수 있다. 인민공사가 성립되어 80년대 개방 전까지 매 생산소대마다 사양소가 있다. 농사하는데 꼭 필요한 소를 적어도 10여 마리 혹은 20여 마리 길러야한다.
봄에는 파종하느라 밭을 갈아야 하고 여름에는 달구지로 거름 싣고, 가을에는 수확한 낱알을 걷어 들이고 겨울에는 발구로 부업하러 다니고 땔 나무를 실어오는 등 사시절 모든 운수는 소가 있어야 한다. 농촌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자동차 엔진과 같다. 그러기에 전문 맡아하는 사양원(饲养員)이 있다.
사양소는 단지 소만 기르는 곳이 아니다. 생산소대의 중심으로 다목적으로 사용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매일 아침 여기 모여서 일을 분배 받고, 사원들이 모여 회의하고, 절일에는 소나 돼지를 잡아 고기 나누고, 가을에는 양식 분배하는 장소다. 양식 보관하는 커다란 창고가 있어 사료, 종자, 농기구와 달구지 등을 보관한다.
추운 겨울에는 소먹이 삶느라 밤낮 불을 때니 구들은 뜨끈뜨끈하여 추위를 피하는 좋은 장소다. 볏짚으로 새끼 꼬고, 광주리 엮고 하는 일, 모두 여기에 모인다. 추운 겨울이라 아무 일도 없이 심심한 사원들이 하나둘 모이면 이야기 하고 술 마시고 투전도 한다. 투전이라고 하지만 담배 한두 가치 왔다갔다 하는데 몇 번 지나면 담배 부스러기가 빠져 나와 물렁물렁 해진다. 이뿐이 아니다. 소여물 끓이는 가마에 물을 끊여 목욕하기 아주 좋다. 그때 목욕 하려면 현에 가야했다.
사양소는 이렇게 좋게 시간 보내는 곳이지만 또한 현재는 하지 말아야 할 일도 하기 좋은 장소다. 한참 젊은 시절이고 먹을 것도 모자라 궁금증이 난다. 그러면 밤중에 근처 집닭을 잡아먹을 궁리도 한다. 사양소라 사료를 여기저기 흘리니 대낮에 근처 닭들이 많이 모여온다. 닭들은 번들번들하게 살이 쪄 욕심이 난다. 그러면 조용히 닭을 유인하여 여물 칸에 들여보내 붙잡는다. 저녁 어두워지면 튀각 하여 좋은 술안주로 된다. 이따금 한족들 움에 들어가 배추 무도 훔친다. 한번은 어찌도 궁금증이 났을까? 몇이서 밤새 놀음하다 술 생각이 난다. 그러니 누구인가 낮에 길가에 죽은 돼지를 버렸다고 한다. 겨울이니까 떵떵 얼어 변질은 안했을 것이다. 당시 먹을 양식은 충족하지는 않지만 소대 콩 기름은 많았다. 하여 그놈을 주어다 껍질을 벗기고 다리 살코기만 베어 작은 가마에 콩기름을 많이 붓고 끓이니 그 맛이 어찌도 좋았던지 술도 많이 마시고 젓가락을 뚜드리며 춤까지 벌렸던 그때 일이 어제와 같다. 그놈의 죽은 돼지고기 지금 같으면 얼마나 위험한가? 하지만 그때 그 맛이 어찌도 그렇게 좋았는지? 지금은 상상도 못한다. 그렇지만 그 돼지고기 먹고 배탈한 사람 하나도 없다.
80년대 개방되어 집체가 해체되고 소와 달구지 마차 등은 개인적으로 분배 받았고 사양소는 개인 가정집으로 되었다.
나는 평생 농사꾼 팔자다. 중학 졸업 후 남과 같이 고중에 가지 못했고, 노동력 부족으로 촌에서 입대를 막아 군대생활도 못했다. 요행 농촌에서 공무원 모집한다 해도 잔폐군인(殘废軍人)의 자제가 우선이고 제대군인이 우선이었다.
제일 아쉬운 것은 너무 일찍 결혼한 탓으로 대학가는 기회를 놓쳤다. 1970년 청화대학(淸華大學)에서 공농병 대학생을 모집할 때다. 우리 현 모집 대상이 황백(黃柏) 1명, 량수에 1명이다. 조건은 중학졸업생. 당원. 미혼 청년. 나는 결혼했다는 점에서 떨어졌다. (20살에 결혼) 몇 달만 늦게 결혼했다면 내 몫이었겠는데 결국은 유림 4중 졸업한 한족애가 가게 되었다. 후에 듣건대 황백(黃柏)에서는 한 조선족 여자애가 갔다는 말을 들었다.
양어장을 꾸리다
정책이 개방되어 능력 있는 사람들이 먼저 부유해지라는 당의 정책에 나는 양어장을 꾸리겠다고 신청하니 솔선수범하는 선진분자라며 표창까지 받았고 은행에서 3,000원을 대출했다. 그리고는 동생과 같이 시작하였다.
소대서 항상 일하러 다니는 산골입구에 낟알도 심지 못하는 습지가 있다. 나는 이곳을 선정하고 양어장 주위 모든 밭은 내 것으로 바꾸었다. 먼저 불도저(推土机)를 찾아 며칠 동안 양어장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사람이 잘 수 있는 두 칸짜리 집을 지었고 돼지우리도 간편하게 몇 칸 만들었다. 돼지도 기르고 점차 닭, 오리도 기를 생각이다.
양어장이 완수되어 봄철이다. 요행 남방에서 어모(魚苗)를 팔러 왔다기에 다른 곳에 갈 필요 없이 연락하여 몇 십 근 달라고 했다. 그러니 그들은 마을에서 2~3리 떨어진 양어장까지 멜대로 가져왔다. 대껍질로 만든 광주리에 비닐을 깔고 물과 같이 어모(魚苗)를 담았다. 모두 10cm 크기로 팔팔하다. 아주 좋은 초어(草魚)다. 양어장에 도착하여 비닐을 빼고 고기만 저울에 달아 무게 확인하고는 그들이 직접 물에 들어가 고기를 놓아준다. 60근으로 생각된다.
이튿날 고기 노는 것을 보려고 양어장 주위를 살피는데 죽은 고기 한두 마리 보일뿐 떠돌아다니는 고기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다음날에도 또 다음날에도 며칠 지나도 고기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이거 웬일인지? 안타깝다. 후에 알고 보니 사기꾼에 사기당한 셈이다.
양어 시작하자마자 몇 백 원을 맹탕 물에 던졌으니 처음부터 순리롭지 않다. 분명히 광주리에 있는 팔팔한 고기새끼들을 물을 빼고 저울로 확인하고, 물에 넣고 하는 모든 과정을 나 혼자가 아닌 여러 사람이 구경했는데, 고기가 하늘로 사라졌나 땅 속으로 사라졌나, 고기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 이미 시작한 일이라 다시 어모를 몇 근 사다 넣었다. 고기를 넣었으니 이제부터는 매일 저녁 양어장에서 밤을 지내야한다. 고생은 지금부터다.
양어는 처음이라 유관 지식을 배우며 실천한다. 여러 종류 고기를 함께 기르는 입체양어(立体養魚) 방식으로 붕어와 잉어는 압록강 고기잡이꾼들에게 부탁하여 어린 고기를 가져다 넣었다.
붕어와 잉어는 밑에서 생활하기에 무엇이나 모두 잘 먹는다. 하여 고기 중에 “청소꾼”이란 이름이 붙어 있다. 그러니 따로 사료를 먹이지 않아도 된다. 초어(草魚)는 풀만 먹고 자란다. 초어는 비교적 빨리 자라는 어종인데 매년 자기 체질에 두 배씩 큰다고 한다. 주요로 갈대, 옥수수 잎 같은 좁은 풀잎사귀를 좋아한다. 매일 갈대와 옥수수 잎을 한 아름씩 베어다 뿌려주면 삽시간에 먹어치우고 줄거리만 남아 물위에 둥둥 뜬다. 고기들이 풀을 씹어 먹는 소리가 “와삭와삭”한다.
연어는 물에 떠돌아다니는 부유(浮游)물질을 먹는다. 그러므로 물의 투명도(透明度)는 언제나 20~30cm 보존하여 부유물질이 산생하도록 물이 비옥해야 한다. 밀게(麥夫), 옥수수가루 등 뿌려주면 모두 모여와서 주둥이를 내밀고 호물호물 먹는다. 이런 재미로 구경하면서 앞날에 큰 수확이 있을 것이라 꿈꾸며 열심히 일했다.
양어는 2년 후부터야 수입이 있다. 양어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고기는 먹을 것을 제 시간에 주면 된다. 돼지도 기르고 닭오리도 기를 계획이다. 나머지 대출 받은 돈으로 새끼 낳을 암퇘지 한 마리 샀다. 한 달 후에 임신했다. 새끼 낳을 때 새끼가 깔릴까 봐 며칠 밤낮 지켰다. 전기도 없어 촛불과 손 전기(電棒)로 밤을 지낸다. 밤은 캄캄하고 주위에는 무덤도 많지, 이미 귀신에 대해서는 무섭지는 않았지만 옛날이야기를 생각하면 겁은 있다. 그래도 요행 개 한 마리 키웠기에 많은 도움이 된다. 밤에는 개와 같이 볏짚 무더기에서 밤을 보냈다.
겨울에는 얼음이 얼어 밤에 지켜보지는 않아도 매일 자전거를 타고 가서 얼음구멍을 뚫어 주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물에 산소가 부족하여 고기가 죽을 수 있다.
양어장 옆에는 빈공지가 많다. 봄이 되어 공지에 잡나무를 제거해버리고 찔광(山査)나무를 심었다. 그 주위에는 그물로 돌려 막고 병아리와 오리를 사다 기른다. 오리는 고기를 먹는 놈이지만 깊은 양어장에서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 오히려 그놈들의 활동과 배분(排糞)으로 물이 비옥해져 연어 기르는데 좋은 점이 더 많다. 그런데 처음 습관을 시키는데 머리 아프다. 한번은 비 오는 날 오리를 풀어놓아 자유로 먹이 먹으라 했는데 저녁 날이 어두워도 우리에 들어가지 않는다. 어쩌면 “눈이 오면 개가 좋아하고 비가 오면 오리가 좋아한다.”고 도무지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 붙잡을러니 요리조리 풀밭으로 숨어 다니는데 잡을 수도 없다. 어쩔 수 없어 그대로 두었더니 이튿날 몇 마리 적어졌다. 산짐승이 물어 갔는가 봐.
또 한해 여름이 지나니 고기도 많이 컸다. 초어는 큰 것이 3~4근이 되고 연어도 한 근 이상이다. 하여 초겨울에 망으로 잡았다. 팔다 남은 고기는 독에 넣어 냉동했다. 나도 남들이 생선장사하는 것을 보았기에 소비자에게 피해는 있겠지만 나만의 이익을 위해 많은 수분을 넣어 냉동시킨다. 초어는 몸체가 크고 내장이 굵기에 빨대로 물을 넣으면 2~3량은 들어가는 것 같더라. 수입은 좀 보았지만 먹은 것이 많고 선물로 주기도 하고 홍수에 손실, 기편당하고 하니 대출한 돈은 한 푼도 갚지 못했다.
문제는 그뿐이 아니다. 돼지는 새끼 일곱 마리를 낳아 며칠 잘 크더니 점차 병에 걸려 뒷다리를 질질 끌며 다니다 죽었다. 어미 돼지도 끝내 그런 병으로 뼈만 앙상하게 되더니 죽어 버렸다. 돼지우리가 옛날 개울 바닥이라 습기가 있어 습성 관절염으로 죽어버린 것이다. 닭, 오리도 몇 마리 남지 않았다.
양식업에 아무런 지식이 없으면 성공 못한다. 이것이 나의 큰 잘못이다. 돼지우리 자리 선정을 잘못했고, 닭과 오리는 관리를 잘 못한 탓이다. 결국 대출 받은 돈으로 사들였던 돼지, 닭, 오리 모두 한 푼 수입도 보지 못하고 반면 사료 값 약값 몇 백 원 손해만 보았다.
아무리 고생해도 단맛이 없으니 이제는 혼자 외딴집에 있기 싫다. 그러나 물 안에 아직도 고기가 있으니 버리지는 못한다. 하여 두부장사하는 중국 사람게 집을 봐달라고 했다. 두부비지를 공짜로 고기 사료하니 내게도 좋다. 그 후에는 한마을 사는 후배가 세간나와 집이 없기에 내 집에 있으며 양어장을 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다 어느 날 집 비운 저녁에 얼마 남지 않은 고기마저 누구인가 몽땅 잡아갔다. 도적 마쳤다. 물 안에 가시나무를 많이 찍어다 넣었지만 그것도 무효다. 앞뒤 마을이 너무도 멀다보니 아무리 큰소리치며 잡아가도 아무도 모른다. 나는 집 보는 사람을 원망을 했지만 방법 없다.
이제는 양어라는 사업을 할 재미도 할 수도 없다. 본전은 다 털어 먹었지, 완전 포기하고 말았다. 몇 년 동안 나와 동생, 그리고 마누라 헛된 고생만 하고 이자와 본전 빚지고 큰 일 해 보겠다 시작한 것이 맹꽁이 되고 말았다.
양어장은 논으로 만들어 벼농사를 하다 외지로 나오면서 그 밭에 나무를 심고 말았다. 결국 양어장은 밭으로 변했다.
아들 여섯 살. 딸 네 살(1977년)
이별의 상처와 좋은 만남
나는 결혼을 일찍이 하였다. 아들딸도 생겼다. 훙카펜은 아니지만 향 기업에 출근하면서 월급 받아 내 집도 마련되어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아 갈려하니 마누라는 어린아이 셋을 남기고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 머리카락이 파뿌리 되도록 평생 살자는 약속은 물거품으로 되었다. 결혼 6년 후다.
이것이 나의 팔자인지! 마누라의 운명인지! 내게 남긴 것은 지울 수 없는 상처뿐이다. 혼자서 어떻게 아이들을 키울 것인가? 눈앞이 캄캄해지고 태산 같은 근심에 살아 갈 길이 막막하다.
그러나 떠나간 사람은 젊은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나 서운하겠지만 산 사람은 살아가라는 법인가 봐. 2년 후 하늘이 내려 주었는지 좋은 인연이 생겨 착하고 마음씨 고운 지금의 아내를 만나 재혼하였다.
아내는 훗어머니 훗자식이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어린아이들을 정성껏 키워주었고 나의 사업에 좋거나 나빠도 충성을 다하여 모든 고락을 겪었다. 아내가 고맙고 감사하다.
제5장 종합장(綜合厂)에서
트랙터 운전(1974년)
향기업(綜合厂)에 출근
나는 농사일을 3년 하다가 1972년 운이 좋아 향 기업(鄕办企业)직원으로 트랙터를 운전하게 되었다. 비록 훙카펜(紅佧片)공무원은 아니지만 월급을 받는 직원이 되었다. 농촌에 자동차 한 대 없는 시절 트랙터 기사는 남들이 부럽게 보는 직업이다. 매달 월급을 받으며 일하니 가정생활도 비교적 안정되었다.
트랙터는 밭에서 일해야 하지만 3톤 바구니를 끌고 다니며 운수 일만 하였다. 처음에는 향에서 관리하였다. 각 촌에 다니며 거름 싣고 가을에 타작하는 등 농사일을 도와주었다. 그러다 향 기업(綜合厂)에 넘겨 더 많은 운수 일을 하게 되었다. 먼 길 다니며 이사 짐 싣고, 와창(瓦厂)에 시멘트 싣고, 모래 싣고, 삼밭(蔘地))에 재료 실어 나르고, 매일 휴식일이 없다. 주로 산골에 가서 목재를 실어오는 일이 많다. 그리고 철목사(铁木社)에서 가공한 삽자루, 낫자루, 술 상자 등을 현으로 실어간다. 그때 술 공장에 가면 금방 졸졸 흘러나오는 따뜻한 그 술맛이 너무도 좋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한번 시멘트 실러 갔다가 반갑게도 시멘트공장 시험실에서 일하는 여동창 김선녀를 만났다. 중학교 졸업 후 처음으로 만남이다.
후에 자동차를 사게 되면서 자동차 운전에 욕심은 있었지만 제대 군인 몫이다. 이일로 주임과 말다툼이 생겼다. 할 수 없이 나는 계속 산골에서 트랙터 단거리 운수만 하였다. 그러다 얼마 안 되어 낡은 차를 촌에 넘겨주고 나는 잠시 다른 잡일을 하였다. 이따금 주임 따라 봉성(鳳城), 단동(丹東) 등에 트랙터 산다며 며칠 다녔지만 헛수고였다.
사슴농장(鹿場)에서
잠시 차가 없으니 사슴농장(鹿場)에서 사슴 먹이는 일을 하란다. 마을에서 6리 떨어진 해관(王沟) 산골이다. 금방 시작이라 사슴 열두 마리다. 기술자가 창장(場長)을 겸하고 세 명이 사슴농장에서 자면서 생활한다.
낮에는 풀을 몇 단 베어다 주고 물 구이에 물을 채우고 먹고 남은 나무 가지들을 주워내고 분비물을 청소해 내면 끝이다. 사료는 두병(豆餠)과 강냉이 알을 푹 삶아 섞어서 하루 두 번씩 준다. 일은 힘들지 않다.
사슴은 아직도 야생성질이 있어 잘 놀라고 사람과 가까이 못한다. 봄철 교배할 시기이면 수놈은 아주 무섭다. 사람들 감히 맞서지도 못한다. 수놈들은 암놈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며칠 힘을 겨룬다. 사슴 암놈과 교배하는 시간은 순간이다. 수놈이 암놈을 따라 돌고 돌다가 순식간에 올라타고 찌르는데 눈 깜박 할 새도 없다. 하여 이따금 잘못해 항문을 찔러 죽는 놈도 있단다.
내가 다시 차운전하기 시작 몇 달 안 되어 사슴농장은 석청(石靑道西沟)으로 이사했다. 이사 간 후에도 차 운전하여 사슴농장에 자주 다녔다. 매번 사슴뿔(록용) 자를 때는 아침 일찍 가서 도와준다.
그때는 마취라는 것을 모른다. 뿔 자를 사슴 한 마리를 좁은 모퉁이로 몰아넣어 밧줄로 공중 매달린 다음 여러 사람이 붙잡고 쇠톱으로 뿔을 자른다. 그리고 약을 발라준다. 영화에서 나오는 장면과 꼭 같다. 그러니 사슴은 얼마나 아프겠는가. 지금은 마취약을 사용하니 사람도 짐승도 편하다.
트랙터 운전과 교통사고
사슴농장에서 몇 개월 일하고 다시 철목사(铁木社)에 와서 목재가공(火鋸) 일을 하게 되었다. 큰 나무통을 매어다 기계톱에 올려놓고 판자와 방목(方木)을 가공하는데 위험하고 쉽지는 않다. 나는 곁에서 보조일이지만 잘못하면 판자가 튀어나와 사람을 친다. 그리고 오전에 한번 오후에 한 번씩 물을 열 아무 통 길어다 물통을 채워야한다. 지금 같으면 수도를 설치하겠지만 그때는 우물에서 큰 물통으로 들어 올려 변대로 매어다 넣는다. 중학교 다 닐 때 채소밭에 물 길어다 주는 날 고생했지만 오늘 또 물 변대를 매게 되었다. 이렇게 6개월이란 시간을 보냈다. 물량이 많아 어떤 때는 야간도 하였다. 그때는 고생은 하지만 같은 또래가 몇이 있어 재미는 있었다. 더운 날씨에 일하다 자전거 타고 개천에 가 목욕도 하고 일요일에는 어디에 놀러 다녔다.
그러다 다시 새 트랙터 산다며 부주임과 같이 장춘(長春) 트랙터 공장에 찾아갔다. 넓은 공간에 새로 만들어낸 동방홍~28 트렉터가 줄지어 가득하다. 그 중에 조선으로 보낸다는 꼭 같은 차인데 조선글로 “천리마”라는 글자를 붙였다. 그때 휘남(輝南)에 있는 사람도 차 사러갔었다. 모두 셋이다. 우리는 저마다 한 대씩 골라서는 오후에 공장을 떠나 장춘시를 빠져나왔다. 그때 어떻게 시내 복잡한 길을 찾아 나왔는지 나도 지금 궁금하다. 장춘을 떠나 이퉁(尹通)에서 하루 밤 자고 다음날은 서로 갈라져 우리는 집안(集安) 방면으로 오다가 날이 저물어 통화 신짠(新站) 여관에서 또 하루 밤 잤다.
아침에 일어나 집으로 올려 차를 시동할러니 배터리(電甁)가 안 보인다. 밤중에 누구인가 도적질 했다.
내가 새벽에 한번 나오니 어떤 사람이 차 뒤에서 우물거리는 그림자가 보였다. 나는 경비원이 새 차 구경하나 생각했지 배터리 뽑아 갈 줄은 생각도 못했다. 분명히 그때 그 사람이 배터리를 뽑느라 우물거린 것이다. 당시 가까이 가 보았으면 잃지 않았을 것이다. 신고도 하였지만 찾을 희망도 없다. 하여 수동(手動)으로 겨우 시동하여 집안 량수(凉水)에 도착하니 날이 어두웠다. 3일 만에 안전하게 돌아왔다. 2~3일 시운전하고 일을 시작하였다.
목재가공이 많으니 매일 새벽부터 산골에 가서 목재를 싣고 운반하는 일이다. 혼자서 새벽부터 일하니 너무도 피곤하다. 후에 운전수 한분 찾아 둘이서 바꾸어 운전하니 훨씬 편했다.
철목사에서 같이 일하던 친구들(1978년)
마누라 일하던 기와공장(瓦厂) 친구들(1980년)
음력 12월 23일 작은 설날이다. 날씨는 청량하고 따스하다. 나는 목재를 싣고 와서 직원들 부리라하고는 사무실에 들어갔다. 점심시간이다. 이때 갈(葛) 주임이 차 바구니를 떼고 차머리만 운전하고 거리에 나선다. 내가 사무실에서 내다보니 얼굴이 빨간 것이 술 마신 것 같다. 운전 면허증도 없다. 다른 사람이라면 말리겠는데 부주임이고 장춘서부터 같이 먼 거리를 운전하고 왔다. 기본 운전은 평상시도 잘 한다. 그러기에 나는 굳이 말리지 않았고 김 주임도 말리지 않는다. 그도 며칠 운전을 못했으니 손바닥이 근질거리는 모양이다.
갈 주임이 트랙터를 몰고 나간 지 한 시간도 못되어 한 젊은 애가 헐떡이며 사무실 들어와 급하게 말한다. “트랙터가 길가 개천에 굴러 떨어졌다.”고 한다. 우리 모두 놀랐다.
우리는 급히 사고 현장으로 갔다. 가보니 마을에서 1리 떨어진 급커브에서 차가 몇 미터 아래 개천에 굴러 떨어졌다. 몇 바퀴 굴러 시동은 꺼졌지만 개천 얼음판에 그냥 그대로 바로 서있다. 높이 꽂혀 있던 배기관(排氣管)이 부러져 없어졌고 핸들(方向盘)이 찌그러진 상태다. 사람은 이미 병원에 실어갔다. 병원에 가서 죽었단다. 현장을 보니 길가 작은 나무에 실장갑 하나가 걸려있고 그 밑에 큰 돌이 하나 있다. 길은 급커브다. 눈길은 아직 잘 녹지 않아 미끄럽다. 그가 위에 갔다가 내려오던 중 빠른 속도라 미처 커브를 꺾지 못하고 차가 길 밑에 떨어지면서 자기는 작은 나무라도 붙잡았지만 차는 턱밑으로 굴러 떨어지고 사람은 바로 돌에 머리를 치고 상한 셈이다.
이튿날 입관(入棺)할 때 내가 그의 머리를 들었는데 머리 되통뼈(뒤통수)가 부스러진 잔뼈가 손에 잡힌다. 그 큰 돌에 부딪힌 것이 확실하다.
해는 지고 어둡기 시작한다. 그래도 차는 가져와야지. 시동은 잘 되어 천천히 얼음판을 벗어나 큰길에 올라서 집으로 향한다. 핸들이 찌그러져 불편하고 사람 죽음으로 사고 난 차여서인지 무서운 감과 불안한 감으로 속이 떨려 겨우 철목사까지 찾아왔다.
그 후 몇 달 안 되어 철목사는 해산되어 직원들 각자 집으로 갔고 나도 작은 트랙터(小四輪)을 사서 개인 운수 일을 시작하였다.
나는 종합장(綜合厂)에서 차 운전 십여년 동안 위험도 있었고 고생도 했지만 큰 사고 없이 비교적 넉넉한 생활로 2~30대를 지냈으니 이것도 행운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많은 기술을 보고 배웠다. 용접, 톱질, 대장간, 목수, 기와, 목이버섯(養木耳), 사슴사양 등, 익숙지는 못하나 모두 할 수는 있어 후에 생활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우리 가족과 오른쪽 새로 구입한 소형트랙터(小四輪)(1982년)
제6장 외국으로 진출
이란인 기사와 함께(1993년)
고향을 떠나 상선(上船)
80년대 개방 후 농촌 인력이 외국수출(勞務輸出)이 시작 되었다. 우리고향은 뒤늦게야 배 타러 가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배 타러 가면 뭉칫돈을 번다는 것이다. 당시 40세 넘은 사람은 못 간다하여 나는 42세를 39세로 속이고 신청했다. 그리고는 10월 4일부터 18일까지 환인현에 가서 학습하고 집에 돌아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언제 갈지 모를 통지만 기다린다. 1992년 12월 11일 첫눈이 푹 빠진 이튿날이다. 향정부의 통지를 받았다. 요행 동생과 같이 가게 되어 다행이다.
북경 천안문 광장에서(1992년)
고향을 떠나 타국 땅에서 고생하게 될 것인데 서로 의지 할 수 있으니 마음이 놓인다. 모두 열 명이 한 배에 오르게 된다. 먼저 병원에 가서 예방주사를 맞고 그리고는 외무부 사람의 안내로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면서 이튿날 열시 반에 북경에 도착했다. 우리는 잠자리를 정하고 나서 식당에서 식사하였다. 우리 몇은 술을 마시면서 배에 올라 서로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만약 한국 사람들이 너무 욕하고 못살게 손해 보게 한다면 해 보자는 것이다.
북경에 처음 왔는지라 천안문 광장을 구경하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지금도 이따금 그 사진을 꺼내어 보군하는데 누구나 기분 좋고 유쾌한 얼굴이 아니었다. 처음 외국으로 바다에 일하러 가는 길이라 살아 돌아오겠는지 모를 일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튿날 저녁 아홉시 북경 공항에서 비행기 타고 다음날 12월 15일 새벽 네 시(북경시간보다 네 시간 늦다)에 이란(伊朗) 테헤란에 착륙했다. 테헤란 공항에서 입국수속을 마치고 다시 비행기를 타고 반드르아바스라는 해변도시에 도착하였다. 고향을 떠나 버스와 기차 그리고 비행기를 여러 번 바꾸어 타면서 4일 만이다. 해변에 도착하니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고 시퍼런 물결이 햇빛에 반짝이면서 출렁인다. 우리는 다시 보트를 타고 2년 동안 일해야 할 배에 올랐다.
내가 탔던 배, CTHAFAR 9호(1992년)
우리가 배에 오르니 먼저 온 한국 선원이 우리들이 앞으로 생활해야 할 침실로 안내한다. 우리는 짐을 침실에 옮기고는 화장실도 가야했다. 밖에 나와 일하는 어느 한국 선원께 화장실이 어디인가 물어보니 큰 것인가 작은 것인가 되묻는 것이다. 처음 듣는 말이라 조금 어리둥절하다. 그 선원은 다시 작은 것이면 아무데서나 해결하고 큰 것이라면 종이를 깔고 변 후 물에 던지라는 것이다. 알아듣기는 했는데 대소변을 큰 것 작은 것으로 말하니 속으로 우습기만 하다.
잘못된 생각
내일부터는 일 해야 하는데 마음은 아주 불안했다. 학교 다닐 때 교육 받은 것처럼 한국은 자본주의 국가라 자본가들이 일꾼을 우마(牛馬)처럼 부려먹고 욕하고 때린다면? 혹은 밥에다 흥분제를 섞여 먹이고 일 시킨다면?
우리가 시작한 일은 생각 밖이다. 배를 타고 바다로 갈 줄 알았는데 배를 수리한다는 것이다. 이 배는 1944년 일본에서 만든 고기잡이 배다. 운수배로 고치자니 많은 일들이 생긴다. 운수에 소용없는 설비는 모두 떼 내어 태울 수 있는 것은 태워버리고 태울 수 없는 쇳덩이는 모두 바닷물에 던진다.
며칠 동안 한국선원들과 같이 일하면서 접촉시간은 얼마 안 되었지만 사회주의 교육 받고 자란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느낌이 많이 변하였다. 우마처럼 부려먹고 욕하고 때리고 밥에다 흥분제를 섞여 먹인다는 것은 모두 헛소문이다.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우리가 먹는 것은 한 가마 밥이고 우리 고향에서와 꼭 같은 전통 조선족 음식이다. 시원한 김치에 된장국, 조선족 반찬이라 마음속으로 다행이라 생각이 든다. 일요일과 절일(빨간 날)은 무조건 휴식이고 중간 휴식에는 참이라며 빵이나 과일을 간식으로 준다. 솔직히 말한다면 당시 집에서 먹는 것보다 훨씬 좋았다. 커피는 말만 들었지 마셔보지도 못했지만 배에서는 마음대로 먹는다. 일하다 피곤하면 큰 버치에 타 놓은 커피를 바가지로 퍼 먹는다. 처음에는 일하면서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않고 한국인의 “쾌쾌디(빨리빨리)”와 중국인의 “만만디”(천천히)의 차이로 한국인은 짜증을 내고 중국인은 욕먹고 듣기 싫은 소리도 많이 듣는다. 그것은 우리가 처음이라 말도 못 알아듣고 일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그들의 심정은 우리와 꼭 같다.
한국선원들과 함께(1993년)
첫 출항(出港)
12월 16일 상선하여 부터 2월 20일까지 꼬박 두 달 반 동안 배 수리다. 배 위에서 1993년 새해를 맞이했고 일을 하면서 많은 것도 배웠다. 그러나 매일 꼭 같은 자리에서 일하고 생활하니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이 어제와 꼭 같은 바다, 만나는 사람도 어제와 꼭 같은 그 사람들이다. 오직 날씨가 이따금 맑고, 흐리고, 비 오고, 덥고, 춥고 변화가 있을 뿐 기타 모든 것이 그것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부지런한 솜씨로 배는 점점 새로워진다.
2월 27일 배는 출항한다는 것이다. 우리 배는 운수 배라 식수와 채소 그리고 기름을 실어다 깊은 바다에서 일하고 있는 고기잡이배에 넘겨준다. 올적에는 그들이 잡은 고기를 싣고 오는 일이다.
전재(转載)는 밤과 낮을 가리지 않는다. 도착되면 바로 시작이다. 도착하자마자 물건을 넘기고 인차 고기박스를 옮겨 싣는다. 냉장고에 내려가서 고기 배에서 건너 주는 4~50근 짜리 고기 박스를 들어 올려 쌓는 일이다. 냉장고라 솜옷을 입고 솜 모자까지 써야한다. 그렇지만 한창 바쁘게 일하다보면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연이어 3일 밤낮없이 하다 보니 시계바늘은 열두시를 가리키고 있지만 밤 열두 시인지 낮 열두 시인지도 분간 못한다. 그리고 냉장고를 자주 출입해서인지 다리 허리가 지긋지긋 쑤시고 잠이 모자라서인지 머리까지 흐리멍덩하다.
전재일은 사흘 만에 끝났다. 일이 끝나자 전재비라며 30달러 현금을 준다. 이것은 월급 외 부수입이다. 만약 이렇게 한 달에 세 번 출항하면 봉급 외에도 많은 돈을 버는 셈이다. 몸이 피곤하고 힘은 들어도 2년만 일하면 뭉칫돈을 한 짐 지고 돌아오는 것은 문제없다.
뭉칫돈 벌려는 꿈은 사라졌다
5월 5일까지 몇 번 출항하고 처음 배 수리하던 이란 반다르아바스 부두에 돌아와 출항도 안하고 아무런 일도 없이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그동안 기관사, 냉동사 등 한국 선원들이 여러 번 바뀌면서 “회사에 돈이 없다”, “이란에서 고기 잡는 허가를 주지 않는다”, “회사가 망한다” 등등 이상한 말이 많았다. 그러던 한 달 후 6월 29일 회사가 망했다고 선장님이 정식 통보한다. 모두 집에 돌아 갈 각오를 하라는 것이다.
한국선원들 하나하나 한국으로 돌아가고 선장님도 마지막에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니 우리 중국선원들만 애타고 조급하다. 할 수 없어 대표를 파견하여 테헤란 중국대사관을 찾아갔고 한국대사관도 찾아갔다. 하지만 해결이 되지 않는다. 중국에 전화 연계하러 몇 번이나 배에서 기지를 오갔는지 모른다. 보트도 요행 한번 타기는 좋지만 매일 오가니 이제는 보트 타기도 끔찍하다. 파도에 너무 들추어 엉덩이도 아프다. 식수가 떨어져 육지에서 가져다 먹는다. 먹는 것도 변변치 않고 잠도 안 오지 짐도 몇 번이나 챙겼다 풀었고, 풀었다 다시 꾸미고 하면서 얼마나 빨리 귀국하길 안타깝게 기다렸던가. 꿈은 매일 집에 가 있는 꿈이다.
우리는 2년 동안 배 타면서 뭉칫돈을 한 짐 지고 고향에 돌아갈려는 달콤한 꿈을 꾸었지만 1년도 못되어 고생만 하고 빈털터리로 집에 가라니, 참으로 황당한 일이다.
회사가 망한 지 두 달이 넘어 9월 5일 소식이 왔다. 배를 팔아 비행기 표를 해결했다는 것이다.
며칠 후면 그렇게 그립던 고향땅에 도착하게 될 것이고 그립던 가족도 만난다. 몇 달 동안 정들었던 배의 생활도 끝마치게 된다. 앞으로 다시 겪지 않을 배의 생활은 영원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날아다니는 갈매기도 몇 번 더 바라본다. “찌으 찌으.” 듣는 갈매기 소리도 쓸쓸하다. 배 지키느라 남은 네 사람은 후에 어찌 됐는지 궁금하다. 너무도 적적하고 지루했을 것이다.
제7장 천진(塘沽)에서의 10여년
천진 수상공원(水上公園)(1995년)
난다랑(蘭多廊)에서
배 타러 갔다가 회사가 망하여 뭉칫돈 벌려던 꿈은 산산이 깨져 2년 계약도 못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막일(打工)이라도 해야겠다.
1994년 봄으로 생각된다. 친구 누이동생의 소개로 천진시 탕구(天津塘沽)에 가게 되었다. 한국 사람이 꾸린 술집이다.
난다랑은 2층짜리 건물로 아래는 식당, 위층은 노래방으로 주방에 아줌마, 요리사, 복무원, 접대원 등 모두 30여 명이다.
난다랑(蘭多廊) 직원들(1995년)
출근 첫날 사장님이 시키는 일이 판자로 공구함을 만들라는 것이다. 아마 나의 손재간을 보려는 것이겠지.
나는 집에서 목공일도 조금 했는지라 요쯤은 문제 아니다. 톱질 쓱쓱 망치로 뚝딱 반나절이 안 되어 보기 좋게 만들어 놓았다. 하니 사장님은 만족한지 희죽이 웃는다.
다음날은 사거리에 세워놓을 커다란 광고 패를 용접하는 것이다. 용접은 철목사(铁木社)에 출근하면서 조금씩 해 보았지만 서툴다. 하지만 아는 척 하면서 앵글(角鐵)을 사다가 높이 5m나 되는 것을 만들어 사거리에 우뚝 세웠다.
내가 하는 일은 수리공이자 잡부다. 큰 건물이라 문제도 많이 생겨 할 일도 많다. 스위치(開關)를 바꾸거나 전등알을 바꾸고 전선(電线) 설치하는 전공(電工)일, 미닫이와 의자를 수리하는 목수일, 하수도가 막히면 뚫어야하고 수도꼭지 바꾸는 등 잡일이다. 모든 일은 밤중에 일한다. 손님들이 다 가고 가게 문 닫은 후 아홉시가 넘어서야 일을 시작한다. 그러면 보통 열한시 열두시가 넘어야 휴식한다. 그렇다고 낮에 휴식하는 법은 없다.
월급은 처음 450원으로 후에 조금씩 올라 800원을 받았다. 술집이라고 하지만 할 일도 너무도 많다. 길가와 옥상에 대형 광고패만 해도 몇 번 만들었는지 모른다. 도면(圖面) 그리고 옥상에서 철재를 용접하고 세우는 것은 모두 내가 책임지고 한다. 고생은 했지만 용접기술은 그때 많이 배웠다.
난다랑 입구(1995년)
이곳은 양화시장(洋貨市場)으로 이름나고 북경과 가까워 토요일과 일요일이면 밥 먹는 사람들이 붐비고 북적인다. 전문 손님 끌어들이는 본 지방(本地) 할배, 그리고 손님맞이하는 복무원, 주방 아줌마 모두 제각기 바쁘다. 이럴 때면 나도 바쁘다. 밖에서 손님 끌어들이는 일도 해야 하고 주방에서 그릇도 씻어야한다.
북경에서 온 손님들은 주요 해산물을 찾는데 척 지켜보면 별일이 많다. 입구에는 대형 어항에 여러 종류 해산물을 진열해놓았다. 손님들은 들어오자마자 여기서 자기가 먹을 것을 골라 주문한다. 그러면 복무원이 저울로 달아 손님께 값을 보이고 주방으로 가져간다. 그렇지만 주방에 가면 딴판이다. 그 산 놈은 다시 뒷문으로 돌아와 어항에 넣고 전에 죽은 것을 대신 가공하여 손님상으로 올린다. 이런 방법은 보통 식당에서 다 그렇단다.
사장님은 장사하는데 어찌도 신경 쓰는지 건물을 털어 고치고 장식하고 광고 뿌리는 일은 매일이다. 그러면 복무원들 심지어 주방 아줌마까지 많은 고생이다. 한번은 이층 옥상에 집 몇 칸 짓는다며 벽돌과 모래, 시멘트를 한 차 실어왔다. 짓는 일은 사람 찾아 맡겼지만 자재 올리는 것은 모두 우리일이다. 저녁 영업이 끝난 후 아홉시 주방 아줌마, 복무원 모든 사람이 동원되어 벽돌을 2층 옥상으로 올린다. 한 사람이 두 장씩 젊은 애들은 넉 장 다섯 장씩 가파른 쇠사다리를 몇 십번 오르내린다. 이렇게 열시가 넘어 끝마치고야 휴식한다. 모래와 시멘트는 남자 복무원들이 점심 영업 끝난 후 주머니에 넣어 져 올린다. 그러다 다섯 시 저녁 출근 시간이 되면 부랴부랴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다시 정상 근무한다. 이렇게 고생하여 지은 집을 며칠 사용하지 못하고 옥상에 불법으로 지은 건물이라며 모두 철거해 버렸다.
식당일만이 아니다. 사장은 당산풍남(塘山丰南)에 솔 공장도 함께 운영하여 내가 할 일은 더 많아진다. 2~3일에 한 번씩 기차타고 당산(唐山)과 탕구(塘沽)를 왕복해야한다.
한번은 공장을 다른 곳으로 이사한다며 젊은 애들과 같이 큰 고생을 하였다. 아침 새벽에 밥도 못 먹고 떠나 당산에 도착하여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인차 이사 짐을 옮긴다. 아침밥도 못 먹었지 여름이라 햇빛이 쨍쨍 쬐이는데 배도 고프다. 그런데 12시 넘어도 밥 먹으라 하지 않는다. 이날은 나도 어찌도 기분이 나쁜지 그만하고 집으로 올 생각도 있었다. 이렇게 일 시키면서 물 한잔 커피 한잔 먹으라고도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어떤 때는 젊은 애들 즐거운 시간을 준다. 천진(水上公園)에 놀러도 다니고 누구 생일, 혹은 절일에는 장사 끝난 후 깊은 밤이라도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여 밤새 즐기게도 한다.
한번은 새천년 새해 해돋이 구경을 한다며 새벽 세시에 떠나 해변에 가서 추운 겨울에 한 시간 동안 기다렸지만 안개가 너무 짙어 해돋이를 끝내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날 북경, 천진 등에서 사람들도 많이 왔지만 모두 헛걸음이었다.
나는 이렇게 고된 일로 2년 동안 일하다, 갑자기 간염에 걸리게 되었다. 입원 하려니 돈이 모자라 방금 월말이라 월급 줄 날이 되었지만 사장님께 아무리 사정해도 주지 않는다. 아주 독한 사람이다. 나는 전염병 병원에서 한 달 동안 입원치료를 받았다. 그래도 내 병은 얼른 나았다.
병이 나아 퇴원했는데도 사장님은 내가 전염병에 걸렸다며 다시는 출근하지 말란다. 짤리운 셈이다. 그것이 핑계다. 이제는 술집 큰일은 모두 해버렸다. 후에 지나보니 무슨 큰일 할 것이 있다면 일을 시키려고 남자 복무원도 더 찾는다. 일 끝나면 하나 둘 잘라버린다. 나쁜 사람이다.
장사하려고 뭉칫돈 투자
회사서 짤리웠으니 이제는 내가 일을 찾아해야겠다. 3년 동안 마누라와 자식들이 막일(打工)하면서 조금 모은 돈 입원하여 만여 원 까먹었지만 아직도 여유가 있다. 나는 이 돈으로 개인 장사를 하련다. 하여 “조선족 냉면점” 이란 천막을 걸고 자그마한 가게를 도맡아 꼬치구이(燒烤店)를 꾸렸다. 작은 식당이라 요리사 한분 마누라와 딸님이 있어 많은 사람 소용없다. 그러기에 나는 다른 장사라도 할 생각이 있던 중 요행 연변 사람을 만나 탕구 꼬싸링(高沙嶺村)에서 시장관리하고 음료수를 만들고 해수욕장에 쓰레기봉투를 만들어 팔면 장사된다는 말에 귀가 홀딱하여 좋은 생각 좋은 꿈으로 만 원을 투자하였다.
그런데 일이라는 것은 생각과 같이 순리롭지 않다. 우리는 외지 사람이라 시장관리비 받는 일도 어렵다. 크게 희망 두었던 음료수(矿泉水) 생산하는 일도 많은 문제가 생겼다. 물병은 촌에서 쓰다 남은 빈병이 창고에 가득하고 간단한 설비도 있었지만 정수하는 일이 문제다. 위생부문의 허락도 없다. 지하수를 끌어올려 큰 용기에 부어 24시간 정수한 다음 병에 포장하는 일인데 대충한 설비라 정수가 잘 안되어 며칠 안 되어 포장한 물병 밑에 오물이 가라앉아 팔지도 못한다.
해수욕장에 쓰레기봉투는 하남성 패현(沛縣)에 가서 생산한 것을 도매하여 약간의 수입은 있었다. 그러다 일 년이 못되어 이것도 외지 사람이라고 받지도 않는다.
시장관리비도 받지 못하지 광천수도 생산 못하지 쓰레기봉투도 못하지 이제는 아무것도 못한다. 촌에 투자한 돈도 돌려받을 수도 없다.
내가 하던 식당도 일 년 후 집을 허문다며 나가란다. 결국 고생만 하고 돈은 벌지 못하고 내놓게 되었다. 마누라는 다른 식당으로 일하러 가고 딸님도 다른 회사 일자리 찾아 나섰다.
나는 가만있을 수 없어 여러 갈래로 일자리를 찾아보았다. 북경에서 일용품 조립하는 것도 알아보았고, 당시 한국에 다니는 보따리 장사꾼이 많으므로 보정(保定)에 다니며 고추장사도 몇 번 하다 어느 한국회사서 용접공 구한다기에 찾아갔더니 일은 할 만한데 월급을 한 달씩 미루어준다고 한다. 하여 2~3일 일하고 돌아왔다.
이제는 작은 장사라도 혼자 해야 먹고 살지. 해수욕장에 몇 달 있었으니 아는 사람도 있고 하여 꼬싸링(高沙嶺) 마을에 조그마한 식당을 꾸렸다. 일요일에는 해수욕장에 나가 담배와 음료수를 팔고 오징어도 구워 판다. 인력거(三輪車)로 물건을 싣고 다니며 고생은 하지만 그래도 수입이 괜찮았다. 그 대신 얼굴은 새까맣게 타버린다.
그러다 두 달 후 탕구(塘沽)에 식당 꾸리는 한 친구가 자기 식당을 맡아하라는 요청이 왔다. 즉 도와달라는 것이다. 하여 다시 탕구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 식당도 일 년하고 임대(轉讓)라는 패쪽을 걸어놓고 문을 닫았다.
이제는 본전을 다 털어먹고 큰 장사는 못한다. 여름 더운 날씨에 천진 사람들도 시원한 냉면를 좋아한다. 하여 냉면 장사를 시작했다. 냉면 가공 장에서 냉면을 가져다 1인 분량으로 진공 포장하여 식당에 넘긴다. 계란, 고추장, 탕을 포장하여 배달한다. 여름에는 할 만한 장사다. 하루에 적어도 몇 백 인분(百人分)은 나가야 하니까, 3륜 인력거로 이 모퉁이 저 모퉁이 다니며 각 식당에 돌린다. 그 무더운 날씨에 어떤 때는 집에 돌아오기 전에 또 보내 달라고 야단이다. 하여 배달애도 한 명 구했다. 그러나 이일은 여름 서너 달 한 때다. 나는 진공 포장하여 큰 마트에 넘기면 더 좋을 것 같아 천진시와 탕구마트에 연락하였다. 하지만 위생부문의 허락과 가공설비의 문제로 또 몇 십 만원 투자해야겠기에 포기하고 말았다.
조선족노인협회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니 냉면장사도 안 된다. 손녀를 유치원에 보내고 나면 할 일이 없다. 그러다 한 친구의 소개로 탕구지역 “조선족노인협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모두 동북 각지에서 모여온 퇴직 노인들이다. 그들은 퍽 오래 전 한국에서 돈 벌어 탕구에 와서 다시 장사를 하여 부자 되어 하던 사업은 모두 자식들께 맡기고 여유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때 59세로 나이가 제일 적다. 그들은 모두 돈이 많은 사장이지만 나는 돈도 없고 사업도 없다. 하지만 협회에 가면 사장님으로 불린다. 매주 한 번씩 활동하는데 남녀 20여 명이다. 건강지식을 배우고 춤과 노래를 배우고 회원들 생일축하 모임으로 여기저기 구경도 다닌다. 그리고 문예절목을 연습하여 축하공연에도 여러 번 참석하였다. 색소폰, 헤이관(黑管), 쇼호(小號), 피리, 북 등 할 줄 아는 사람도 많다. 나는 피리 전문이다. 한번은 “천진시 조선족노인연합회”에서 주최한 행사에 몇 백 명이 모였는데, 우리 “조선족노인협회”가 악기를 합주하여 3등상을 받았다. 나는 피리 연주를 했다. 당시 동영상을 촬영 했지만 그 동영상을 남기지 못한 것이 아쉽다.
탕구는 나의 두 번째 고향
나는 탕구에서 10년 동안 집을 얼마나 많이 옮겼는지 모른다. 평균 일 년에 한번 씩은 이사한 것 같다. 어떤 집은 맘에 안 들어 몇 달 있다 이사 갔고, 어떤 집은 마누라 일하는 곳이 멀어서 이사 가고, 어떤 집은 주인집에서 집을 판다기에 이사 가고, 이사하다 보면 물건도 많아진다. 버리기는 아깝고 살림하는데 없으면 안 되겠고. 사람을 찾아 이사하면 돈도 써야하기에 작은 3륜차(인력거)로 하나하나씩 운반하군 하였다.
나는 난다랑에서 자고 먹고 하니 문제없지만 후에 마누라도 탕구에 일자리 찾아오고 아드님도 딸님도 일자리 찾아오니 가족들이 모일만한 집은 있어야겠더라. 하여 처음 집을 잡게 되었다. 돈이 아까워 큰 집은 염두도 없고 단칸짜리 집을 잡았다. 주방이라는 것은 따로 없었고 겨울이면 난방에 많이 고생한다. 각 방면에 많이 불편은 하지만 그래도 외지에서도 한 가족이 모이군하니 좋기는 하더라. 앞으로 좋은 생활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으니 요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탕구에서 지내다 한 아줌마의 소개로 절강성 이오(義烏)로 가게 되었다. 한국 사람이 액세서리 제품을 만드는 공장이다. 전공(電工)으로 한 달에 천 원 월급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러다 반년도 못되어 한국에 올 기회가 되어 2006년 말에 한국에 오게 되었다.
천진 탕구에서 10여년 동안 돈을 많이 벌었다가 까먹고 사기도 당하며 고생했지만 그만큼 생활의 신맛단맛(酸甛苦辣)을 보았고 많이 숙련되어 후반생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2000년 아들이 결혼하여 손녀가 생겼고, 딸이 결혼하여 손자도 생겼다. 그러니 탕구에서의 생활은 내 일생의 한 페이지로 고생하면서도 행복하게 생활해 온 일부분으로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탕구는 두 번째 고향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절강성 이우(義烏)에서(2006년)
제8장 한국에서의 생활
언제나 좋은 심정으로(2018년)
일을 찾아서
나는 2008년 1월에 딸님의 초청으로 마누라와 같이 한국에 왔다. 경북 구미에 자리 잡았다. 처음에는 용돈이라도 벌려고 부부가 같이 할 수 있은 양계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닭장을 다섯 동이나 관리하니 쉬운 일이 아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외바퀴 손 밀차로 사료를 한 번 돌려주고 8시가 넘어서야 아침밥을 먹는다. 아침밥을 먹고 한 시간 쉬고 닭장에서 계란을 꺼낸다. 아무리 부리나케 손놀림을 하여도 3~4시간이 걸린다. 계란 줍는 일은 재미나는 일이라고 하지만, 너무도 많고 매일 하는 일이니 허리가 아프다. 돈을 벌기 위해 겨우 하는 일이다. 12시 혹은 오후 1시가 넘어서야 점심을 먹는다. 점심 식사 후 조금 휴식하고는 또 사료를 한번 준다. 그러고 나면 날이 어두워진다. 그제야 저녁을 해먹고 8시가 넘어야 잠을 잘 수 있다.
월급은 둘이서 170만원 몇 달 지나도 더 안준다.
“에라 못하겠다.” 하여 다섯 달 하고는 떠나고 말았다. 아무리 돈 벌러 왔다고 해도 돈이 너무 적고 너무도 고생이다.
전라도 땅끝 해남에 와서는 부부가 함께 일 할 마땅한 자리가 없어 따로 갈라져 일하게 되었다. 마누라는 어느 식당에서 일하게 되었고, 나는 인력소개소에 다니며 현장일 하였다. 나는 매일 다른 일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 여기저기 다니며 구경도 하고 이것저것 모든 일을 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젊은 세대들 중에서 어떤 외래어를 자기의 한국말로 알고 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한번 30대 젊은 애와 일하게 되었다. 현장에서 일하면서 내가 손 밀차를 가리키면서 “이것을 뭐라고 하냐?”고 물으니 “리어꺼”라 한다. 그는 내가 중국 사람이라 한국말 모르는 줄 아는가 봐. 내가 다시 “리어꺼가 어디 말이냐?” 물으니 아무 망설임도 없이 “한국말이다.”고 대답한다. 나는 너무도 기가 막혀 “야. 너는 한국 사람으로서 한국말도 제대로 모르고 있느냐? 리어꺼는 일본말이야.” 그러면서 나는 속으로 소용없는 걱정이지만 “이러다간 한국인이 한국말을 잊고 모두 외래어만 사용하게 되겠구나.” 하는 근심도 나더라.
나는 몇 년 전 배 타러 가서 한국인과 일하면서 많은 외래어를 배우기는 했지만 이번에도 또 여러 번 애를 먹었다. 한번 현장에서 일하면서 목수가 완바를 가져오라고 한다. 하여 무엇이 “완바”인가 물으니 “야, 이놈아 완바도 몰라. 망치. 큰 망치다.”라고 한다. 나는 속으로 ‘벌써 망치라고 했으면 인차 알지.’ 하고 생각했다. 왜 하필 한국 사람이 한국말을 안 하고 외래어를 사용하는지 모르겠다.”
노가다일 처음 시작하는 첫날이다. 나 혼자 업주를 따라 일하러 갔었다. 화장실 구덩이 파는 일인데 마을 좁은 골목이라 포클레인도 들어가질 못하는 모퉁이다. 만약 포클레인으로 작업한다면 몇 삽 퍼내면 끝이다. 그렇지만 장비가 들어갈 수 없으니 사람이 괭이질하고 한 삽씩 퍼내야했다. 본래 해남이라는 이 지역은 아무리 깊이 파도 돌 하나 보이지 않는 황토 땅이지만 이곳만은 자갈이 많이 섞인 굳은 땅이다. 그런데다 물까지 스며 나오니 괭이질도 삽질도 너무도 힘들었다. 직경 2미터 깊이 2미터의 구덩이를 둘이서 아침부터 저녁 해질 때까지 제대로 휴식도 못하고 겨우 일을 마쳤다. 나뿐만 아니라 업주도 땀도 많이 흘리고 지쳤다. 해남말로 너무 뻗쳤다.
첫날 고생하고는 만약 매일 이렇다면 어떻게 “노가다”일을 하겠는가 걱정이 들었다. 일을 못할 것만 같았다. 그래도 나는 몇 달 “노가다”를 하면서 못해 본 일이 없다. 미장 따라다니며 폼 나르고, 벽돌과 모래 져 올리고, 밭에서 퇴비 뿌리고, 약할 때 줄 잡아주고, 볏짚 운반하고, 고구마, 양파, 배추작업, 벌초, 그리고 바닷가에서 가두리 만들고, 잔디 심고, 나무 심고, 분뇨처리장 지하실 청소, 철근 절단하고 접고, 섬에 나가 염전 일 등등. 어디든 일만 있으면 가서 했다.
나는 어느 한번 칼을 휘두른 일로 경찰까지 출동한 적이 있다. 하루는 저녁이 되어 일꾼들이 하나 둘 돌아오고 우리 몇은 이미 저녁을 먹었다. 그런데 한국 한 분이 술이 푹 취하여 들오더니 내보고 술 부어달라고 한다. 그는 내가 중국 술 사다가 먹는 줄 알고 있다. 그도 중국 독한 술을 먹기 좋아한다. 내보다 퍽 후배다. 나는 이미 술 먹고 밥도 먹은지라 그와 맞서기도 싫다. 내가 술통이 저 방안에 있는데 가져다 마시라고 했다. 그런데 나보고 가져다 부어 달라는 것이다. 둘이 몇 마디 오가다 “중국에서 온 놈의 새끼가 왜 말이 많은가.” 한다. 이 말에 나도 폭발적인 성질이 있는지라 “뭐야. 또 말해.” 하고 소리 지르면서 싱크대 위에 식칼을 집어 들고 찌르는 시늉을 하였다. 어찌 찌르랴. 단지 위협을 줄 뿐이다. 그도 술 취한 상태라 비틀거리며 내게 맞서려다 침대에 넘어지면서 이불장 문에 부딪혀 이마에서 피까지 나온다. 그러니 칼로 자기를 찔렀다며 밖에 나가 경찰에 신고 했는가 봐. 조금 후에 경찰 몇이 왔다. 나도 겁은 났다. 중국으로 추방 할까 봐. 구경꾼도 몇이 있었다. 소장님도 있었다. 소장님이 일의 자초지종을 말하고, 사람들의 증명으로 경찰은 싸움을 해도 칼을 들면 범죄라며 말하고는 돌아갔다.
남향레미콘 회사에 취업
삼호산업에서(2009년 추석)
이렇게 몇 달 동안 현장 일을 하다가 우연히 남향레미콘 회사의 경비로 일하게 되었다. 2009년 3월 9일부터다. 월급은 100만원. 돈은 적지만 밤에 자기만 하고 낮에는 별일이 없다. 먹을 근심, 잠자리 근심 아무런 부담도 없다. 아주 편한 셈이다. 처음은 돈이 적어 계속 할까 말까 하면서 고민했지만, 벌써 10년이란 시간을 이 회사에서 세월을 보냈다.
처음에는 남향회사의 분사(分社)인 산이면 구성리 삼호산업에 6년 있었다. 삼호산업에 있는 동안 영산강 다리 놓고 자동차 경기장 건설하면서 레미콘과 아스콘 생산량이 아주 많았다. 시험실이 바빠 몰드 청소하고 기름 발라주고 매일 한 두 시간씩 일하였다. 이 일은 본래부터 도와주라 하였기에 할 일이였지만 해도 되고 안 해도 될 일도 많이 했다. 본래 문 앞에 자판기가 있던 공간이 있다. 나는 이 공간을 이용하여 조그마한 화단을 만들었다. 돈 한 푼 쓰지 않고 내가 밀차로 흙을 실어오며 고생을 조금 했을 뿐이다. 버리는 몰드, 현장에서 남아 버리는 시멘트 모두 공짜다.
화단이 완성되어 봄이 되자 꽃씨를 뿌려 알록달록 여러 종류 꽃들이 피어 보기가 좋다. 그러니 사무실 직원들, 식당아줌마들도 좋아한다. 화단을 만든 계기로 글이 생각되어 “화단”이란 짧은 글을 한편 쓰게 되었고, 이 글을 “샘터”잡지에 올려 상금까지 받았다.
사무실 뒤에도 본래는 모기와 벌레가 번식하고 거미줄만 가득하던 잡풀 밭이다. 이 공간도 나는 정리하여 밭을 만들었다. 하여 토마토, 참외 등을 심으니 나도 실컷 먹고 사무실 사람들도 먹는다. 이따금 회장님이 오시면 따다 드리면 맛있다고 하신다. 비료 없이 약도 하지 않았으니 맛은 확실히 시장에서 산 것보다 퍽 낫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힘들게 소용없는 일을 한다고 한다. 왜 고생하느냐고? 이 모든 것은 회사일도 아니고 하라고도 하지 않았다. 남들은 그렇게 생각해도 나는 그렇게 생각 안한다. 일없이 누워만 있으면 뭐하랴. 조금이라도 움직이며 “건강관리”한다는 생각으로 일하니 조금도 힘든 줄 모른다. 또한 주위 환경도 좋고 직원들도 좋아한다.
내가 회사 입구에 만든 화단(2010년)
나의 여유생활
한 달에 휴가일은 3일이다. 이 3일은 내가 친구 만나고 산행하고 여행하는 유일한 시간이다. 산악회 다니는 것도 내가 낮에는 할 일이 없어 생각한 것이다. 텔레비전에서 산행 다니는 사람들이 알록달록 등산복에 커다란 배낭을 지고 스틱(지팡이)을 짚고 정상을 향하여 오르는 모습, 정상에 올라 자랑하듯 크게 웃는 모습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토요일 일요일은 내가 회사를 떠날 수 없으니, 평일에 다니는 산악회를 찾아 지금도 꾸준히 다니고 있다.
산악회를 따라 다니며 한국의 이 모퉁이 저 모퉁이 산구경하며 평상시 받는 스트레스도 풀고 배우는 것도 많다.
이런 기회가 있었기에 백두산 천지연을 닮은 제주도의 한라산(1950m)에 올라 백록담을 구경했고, 강원도 설악산 대청봉(1708m) 정상까지 올랐다. 그리고 흑산도와 홍도 섬 구경도 다녀왔다.
한라산 백록담(2015년)
제주도 한라산 등정 인증서 (2015년)
자호감을 느끼는 성과
2020년 3월 9일이면 남향레미콘에 근무한지 딱 11년이다. 그동안 남들과 같이 큰돈은 못 벌었지만 배운 것이 많았고 내 몸 관리에 아주 편리를 주었다. 산악회 따라다니며 구경하고, 친구 사귀고 하면서 돈도 많이 낭비했다. 그러나 나는 아깝다는 생각 조금도 없다. 후회도 없다. 남이 주는 돈 쓰는 것도 아니고 내가 벌면서 쓰는 것이기에.
나의 최대 성과는 컴퓨터를 배운 것이다. 중국에 있을 적에 컴퓨터를 배울 생각은 있었지만 시간이 없었고 조건도 허락되지 않았다. 회사 사무실은 온통 컴퓨터다. 직원들이 퇴근하고 난 밤에는 나 혼자, 일요일에도 나 혼자 있는 회사에서 컴퓨터를 조금씩 만져보군 하였다. 컴퓨터를 더 배우고 싶어 12만원 학비내고 해남 컴퓨터학원에 다니며 한 달 동안 기초지식을 배웠고 조그마한 노트북을 샀다. 이렇게 시작되어 지금은 글도 쓰고 사진과 동영상을 편집하는 등, 내가 필요한 것은 모두 할 수 있게 되었다. 컴퓨터가 있기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70대 문턱을 넘게 된 내가 컴퓨터로 글을 쓰고 세상만사를 볼 수 있으니 나는 자부심을 느낀다.
나의 건강과 습관
나의 현재 건강상태는 비교적 좋은 편이라 할 수 있지만 행동하는 모든 방면에 이전과 완전히 다르다는 감각이 든다. 이것은 모든 생명이 막을 수 없는 자연적인 법칙이다.
나도 지금까지 사는 동안 몸이 편치 않을 때가 많았다 중학교 다닐 때 치통(牙痛)으로 이(齒牙)를 뽑기 시작하여 20대에 치질(痔瘡)과 폐결핵으로 고생하였다. 본래 나도 공짜 담배가 생기면서부터 점차 담배인(煙因)이 오군 하였었다. 그러다 폐결핵에 걸려 석 달 동안 치료 받으면서 담배를 쉽게 끊었다. 천진 난다랑에서 일 할 적에는 너무 고된 일로 간염에 걸려 전염병원에서 한 달 동안 치료를 받았다. 간염으로 치료를 받았지만 지금까지 무슨 간염인지 모른다. 그냥 돈 만여 원 전염병원에 기부했다.
첫째 나의 생활습관은 언제나 일찍 일어나 활동하기 좋아한다. 지금까지 늦잠 자는 법이 없다. 잠을 푹 자고 일어나면 잡생각이 없어지고 머리가 아주 맑아 무슨 일을 생각 하던지 어떤 일을 하던지 정신이 집중된다.
어렸을 때 내가 한번 특수한 만화를 본적이 있다. 외국 어느 사람이 추운 겨울에 웃옷을 벗어던지고 큰 도끼로 굵은 나무토막을 짜개고 있다. 열 내어 추위를 막기 위하여 우정 옹이 배긴 나무를 골라 도끼질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도 추운겨울에 아침 일찍 일어나 장작패기를 좋아했다. 비록 손이 시려 몇 번씩 부엌에 들어가 손을 녹이지만 한 시간 동안 도끼질 하고나면 땀방울이 맺힌다. 그리고 세수하고 아침밥 먹으면 반찬이 별치 않아도 밥맛은 특이하게 더 향기롭다.
둘째는 지금까지 사시절 아침 세수를 더운 물로 한 적이 없다. 추운 겨울에도 냉수로 세수하는 습관이다. 내 집 앞에 조그마한 양어장이 있다. 겨울에는 매일 얼음 구멍을 뚫어야 한다. 구멍을 뚫고는 바로 그 물에서 얼굴을 문지른다. 그러기에 길 가던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바라본다. 수건도 언제나 적셔서 얼굴을 마구 비비며 씻는 습관이다. 젖은 수건은 하루 밤 마르면 부드럽지 못하다. 아주 뻣뻣하다. 아침에 물로 세수하고 그것으로 얼굴을 문질러 자극을 주면 안마하는 것보다 더 정신이 확 트인다. 그래서인지 나는 남보다 감기에 덜 걸리는 것 같다.
우리 집안시에 지금도 추운 동삼(冬三)에 동영(冬泳)하는 사람 몇이 있다. 나는 그들을 부럽게 본다. 나도 젊었다면 같이 참석하고 싶다.
셋째는 아무거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모두 잘 먹는다. 그러니 어느 때 어디서나 굶을 근심은 없다.
한국에서 10여년 일하고 생활하면서 정(情)들고 마음이 안착되어 더 오래 있고 싶지만 이제는 내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 이제는 자식들 모두 제 가족 살림하기에 이전처럼 함께 모여 살지는 못하겠지만 우리 부부 둘이서라도 마음 푹 놓고 자유로이 생활하면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즐기고 싶다.
제9장 맺는 말
가족 설악산 여행(2018년)
희망과 함께
이로써 나의 자서전 끝말을 맺습니다. 나의 지나온 삶을 회억록으로 적어놓았습니다. 이 글의 결말을 맺으면서 우선 감사드려야 할 분은 해남 땅끝순례문학관(土末巡禮文學館)에서 자서전반을 꾸리면서 사심 없이 지도해주신 소설가 이원화 선생님입니다.
작가 이원화 선생님
나는 중국조선족으로서 한국문화와 차이점이 너무 많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원화 선생님의 친절한 도움으로 순리롭게 자서전을 (이글을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이원화 선생님 참말로 고맙고 수고하셨습니다.
내 자서전은 보잘 것 없는 글이겠지만 내게는 아주 뜻깊은 회억입니다. 후에 누구인가도 이글을 보게 된다면 “갖은 고락을 겪으며 인생을 살아 왔구나.” 하는 느낌이 있을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일생 살아가는데 탄탄대로만이 아닐 것입니다. 높은 산을 올라야 하고 가시덤불을 헤쳐야 하고 거센 파도도 앞질러가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벽 동녘하늘이 밝아지는 것처럼 점점 희망이 보이고, 희망 끝에 낙이 올 것입니다. 뒤돌아보니 나의 일생이 그렇습니다. 나는 지금 건강상태가 좋은 편이고, 우리가족 모두가 남부럽지 않게 비교적 온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내 인생살이 순리롭지는 못했지만 고난(苦難)이 복(福)과 낙(樂)으로 쉽게 풀리면서 비교적 편히 지내왔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나를 낳으시고 키워주신 아버지와 어머님의 덕분입니다. 부모님은 지금 저 멀리 계시지만 이 기회에 지난날 생각하여 자서전을 쓰면서 다시 한 번 허리 굽혀 인사 올립니다.
특히 감사드려야 할 분이 있습니다. 나로 하여금 보잘 것 없지만 자서전(이런 글)이라도 쓰게 된 것은 나를 가르쳐 주신 학교 선생님 덕분입니다. 선생님의 덕으로 아홉 살부터 아, 야, 어, 여, 1, 2, 3, 4를 배웠기에 자라면서 세상을 알게 되었고 지금까지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소학교 때부터 중학교까지, 나를 가르쳐 주신 모든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내가 사는 동안 나를 많이 도와준 친척들과 마을 사람들, 그리고 같이 자라고 같이 일 했던 친구와 동창들의 아낌없는 도움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모두 감사합니다.
아내에게 하고 싶은 말
사랑하는 아내(2017년)
오늘 이 글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내가 다시 한 번 감사드릴 사람은 나의 아내 김금옥 당신입니다.
지금 우리는 아무런 근심 없이 화목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남들이 재혼부부라 믿지 않을 만큼 아주 행복하고 다정합니다.
오늘 이 가족의 화목과 행복은 당신이 묵묵히 가정을 지켜왔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이 가정을 위하여 일편단심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쳤습니다. 젊음도, 마음도, 육체도, 고생이란 못한 고생이 없었고, 오직 가정이란 생각으로 모든 스트레스도 참고 받아 들었지요.
지금까지도 항상 밝은 웃음으로 가정주부의 책임을 잘 지키고 있는 당신,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젊었을 때 우리는 너무 많이 고생했소. 집 고생과 빚 재촉. 그때 그 사정(事情)은 우리 삶에 영원히 잊지 못할 한 페이지입니다. 다시는 그런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나간 것을 몽땅 잊어버리고 오직 건강관리에만 신경을 쓰면서 얼마 남지 않은 여생 건강하게 지내면서 젊었을 때 못했던 즐거움과 행복을 찾아 살아갑시다.
당신 사랑합니다!
자식들께 하고 싶은 말
아들 동욱아! 딸 은화! 춘녀야!
동욱, 은화, 너희들 벌써 40대 퍽 넘어 50대를 바라보는구나. 춘녀도 40대에 접어들고 두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지만 나는 아직도 너희들을 이렇게 부르고 싶구나.
너희들도 크면서 모두 알고 있겠지. 아버지의 무능으로 모든 사업은 실패하면서 너희들까지 많은 고생시켰다. 집에서는 집 고생, 외지에서는 돈 버느라 고생, 참으로 우리가정은 많은 고생을 하였다. 1992년부터 지금까지 남과 같이 한 곳에 모여서 오손도손 살아보지 못했다. 지금 너희들도 가정을 꾸리고 애기 키우고 있으니 한창 살아가노라면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람이 일생 사는 것이 어떤지? 애들 키우는 일이 어떤지? 그러니 너희들도 지금의 아버지를 많이 양해 해 주면 좋겠다.
우리는 이제 너희들을 돌볼 힘도 없다. 그러니 너희들 힘 가는대로 열심히 애들을 잘 키우고 정성껏 살아가기 바란다. 살아가는데 너무 잘 사는 사람만 바라보지 말고, 나보다 못한 사람과 비하면서 언제나 만족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욱 편하단다. 욕심 너무 많으면 사회와 사람 사는 도리에 어긋날 수도 있고 무리하여 건강에 많은 해가 미치는 것이다. 너희들도 이제부터 건강을 주의해야 할 나이다. 미리부터 건강관리 잘 해야 한다. 60이 넘어서도 건강한 몸이라야 자식들도 편하단다.
나는 두 가지 원칙이 있다. 돈은 쓸 만큼 벌고. 그렇지만 여유는 있어야 한다. 생각치도 않은 일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이고 노후(老后)를 생각해서다. 두 번째는 오래 사는 것보다 죽는 날까지 자기 나름대로 제 발로 움직이며 살다가 죽는 것이 제일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사위, 철성! 세운!
나의 딸을 데려다 가정을 꾸리고 의좋게 잘 살고 있으니 나의 마음 흡족하네. 자식들도 잘 키우고 있으니 참으로 고맙네. 앞으로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서로 사랑하며 잘 살기 바랄 뿐이다.
대한민국 한국 땅끝 해남에서
2020년 5월
김영산 글
1950년 12월 18일 출생
1959년 9월 집안시 량수향 량수촌 조선족 소학교 입학
1964년 9월 집안시 제3중 조선족 중학교 입학
1968년 9월 중학교 졸업. 농사일 시작
1970년 10월 결혼
1973년 1월 향기업(鄕办企業) 근무(차운전)
1976년 10월 사별
1979년 8월 재혼
1982년 개방되면서 기업은 해체되고 개인적으로 농사
1992년 12월~1993년 9월 이란(伊朗)에서 배 생활
1994년 2월~2006년 3월 중국 천진에서 생활
2006년 4월~2006년 8월 절강성 이우 악세사리 회사 근무
2008년 1월부터~현재 한국에서 생활
2020년 현재 해남 소재 남향레미콘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