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확산에 따라 수많은 의료진들이 환자들을 치료하는데 힘을 쏟고 있습니다. 질병을 가진 환자들에게 있어서 의료진의 손길은 정말 중요합니다.
코로나19 관련하여 들은 소식 중에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병원에 입원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의료진의 도움의 손길을 받아보지 못하고 사망한 환자의 소식이었습니다.
질병으로 죽어가는 환자에게 의료진의 손길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본문을 바라보면 예수님의 사역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공감이 될 것입니다.
죄인들을 부르시고, 그들과 함께 하셨던 예수님의 사역에 담긴 깊은 뜻을 오늘 함께 나누며 은혜 받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천국 복음을 전하신 후에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마태)를 부르십니다.
유대인의 이름 작명의 관습과 레위라는 이름으로 볼 때 레위는 레위인의 후손으로 짐작됩니다.
레위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하고 각 지파에 흩어져 있었던 것과 안티오쿠스 박해를 피해 갈릴리 지역으로 많은 레위인들이 이동하였던 것을 고려할 때 예수님이 부르신 레위는 각 성읍에 흩어져 있던 레위인의 후손이거나, 안티오쿠스 박해를 피해 갈릴리 지역으로 이동한 레위 족속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레위(마태)는 예수님께 예배드리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규례를 가르쳐야 할 사명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로마 제국의 수족이 되어 민족들을 수탈하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세리를 증오하였고, 부정하게 생각하여 함께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레위를 제자로 부르셨다는 것은 그 당시 사회적인 통념을 깨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기를 지내면서 선민으로서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우상이 만연하고 신앙을 포기하게 하는 수많은 유혹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으로서 그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목숨처럼 지키려 했던 것은 언약의 상징인 할례를 행하고,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준수함으로 언약 백성으로서 존재감을 확인하고, 특히 안식일을 지키는 행위가 하나님의 언약의 언약 안에서 선민으로서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상징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선민 유대인의 정체성과 연관하여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려는 유대인들 입장에서 안식일을 준수하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상징인 할례도 받지 않은 사람들과 어울린다는 것은 그 자체로 ‘죄’를 짓는 행위로 인식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레위는 세금 징수원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서 같은 민족을 수탈하였던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유대 민족들이 세금 징수원(세리)에 대한 마음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세금 징수원들은 로마 정부로부터 월급을 받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는 정해진 세금보다 더 많이 거두어야했습니다. 세금 징수원들은 상사인 세리장이나 세금 징수 담당 로마 정부의 관리에게 뇌물 등의 용도를 위해 필요한 이상의 많은 돈을 세금 명목으로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세금 징수원(세리)’은 그 당시 손가락질 받고 멸시당하는 윤락여성과 율법을 어긴 죄인들과 같은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 레위의 집에서 죄인들과 함께 한 자리에 앉아서 식사를 하십니다.
당시에 예수님께서 율법에 위배된 행위를 한 죄인들과 함께 세리의 집에 앉아서 식사를 하고 계신다는 것은 율법 우선주의에 빠진 바리새인들에게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상대해주지 않고 멸시하며 인간취급도 하지 않는 사회계층의 사람들,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를 때,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죄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 결과 예수님은 사회 주류층에 반감을 사고, 그들의 공공의 적이 되는 자리에 서게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상황 이외에도 사역하시는 동안 율법을 초월하는 언행을 많이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율법을 파괴하시거나 무기력하게 하시려고 하셨을까요?
왜? 율법을 목숨과 같이 알고 지키려는 바리새인들에게 지속적인 경고와 책망을 하신 것일까요?
예수님은 마태복음 5:17-18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예수님은 율법을 없애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완성하시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을 완성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로마서 3장20절에 보면,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이 인간들에게 주어짐으로 인해서 죄가 죄인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으로는 구원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완성하신다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성취하신다는 의미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오늘 본문에 명확히 설명하고 계십니다.
17절에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하십니다.
앞서 살펴본바와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완성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생각하고 바라는 메시야는 자신들의 ‘의’를 인정해 주는 분이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드러내며 인정받기를 원했던 그들은 그리스도 앞에서도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따라서 자신들을 책망하는 예수님을 받아드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의인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스스로 판단할 때 건강하다고 생각하면 의사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없는 것처럼 스스로 의인이라 생각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자신이 질병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의사를 찾는 사람들처럼 자신들이 죄인임을 알고 구원 받기를 소망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꼭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레위와의 그의 세리 동료들, 죄인 취급을 받는 사람들은 환자였습니다. 즉, 죄인이라고 스스로 고백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야(그리스도)를 찾는 이들에게 먼저 찾아 오셔서 만나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예수님께서 인정할 수 있는 의인들이 있었을까요? 로마서 3장 23절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로마서 5장 12절에 보면,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의인들을 부르시려 이 땅에 오셨다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으며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구원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부르시고 죄인들과 함께 하신 이유입니다.
환자들에게는 1타 강사나 돈 많은 회장님, 권력을 가진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의사가 필요합니다.
영적으로 죽음을 향해 달려가던 영적인 환자였던 세리와 죄인들에게는 예수님이 바로 생명을 살리는 의사였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죽어가는 영혼들을 어떻게 살리시는지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헌법과 형법과 같은 법전이 아니라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처방전입니다. 레위와 그의 동료 세리들, 그리고 예수님을 찾아와 함께 음식을 나눈 죄인들은 예수님을 영혼의 의사로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영적 치료를 위한 처방전을 받았습니다.
또한 신앙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감으로서 영원한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으로 가는 치료와 변화를 위한 길에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나서 치유 받았습니까?
예수님을 만났을 때 여러분의 죄 문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러분의 모든 죄 짐을 해결해 주신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미 여러분은 예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모든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고, 여러분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무너진 여러분의 영적인 건강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치유하기 힘든 질병을 가지고 있다가 ‘명의’를 만나서 치유 받고 회복되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어느 날 여러분이 치유 받었던 것과 같은 질병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여러분을 치유한 그‘명의’를 그들에게 소개하며 그들이 가진 질병이 치유될 수 있는 길을 안내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마찬가지, 여러분이 영·육간의 문제를 해결해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입어 그 질병에서 치유를 받았다면, 여러분과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소개하여 그들이 죄로부터 오는 고통에서 자유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렇게 치유의 경험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죄인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분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치유하심의 은혜를 함께 경험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구원의 특혜를 함께 나눌 수 있는 곳은 교회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스스로 내 삶을 통제하려는 교만을 버리고,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짐을 드리면, 우리가 수고하였고 무거운 짐을 지고 받은 고통을 벗을 수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외치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순응하여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는 주님의 제자의 삶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원합니다.
또한 우리 교회가 예수님의 치유하심의 은혜를 함께 경험하는 신앙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여러분을 부르시고, 여러분의 무거운 죄 짐을 대신 져주시는 예수님의 은혜로 새롭게 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qc86eFQm50I
3월 8일 오전예배(막 2장13-17) 설교원고.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