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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평론]
민족문제의 재인식과 현대시의 역할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문학박사), 1989년 『실천문학』 등단, 시집 『그릇에 대한 기억』, 『까띠뿌난에서 만난 예수』, 『이름의 풍장』 등. 논저 『한국 현대시의 종교적 상상력』 외 다수, 제3회 『나혜석문학상』 , 민족문학연구회 편집위원장, 백석대 대학원 기독교문학 교수.
1. 들어가면서
스페인의 시인 가르시아 로르카는 “시인은 그의 민족과 울고 웃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 바 있다. 문학의 양상이나 형태는 다양할 수 있겠지만, 문학인도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한 민족의 씨알로서 가야 할 길은 동일한 가치를 지닐 수밖에 없다.
문학평론가이자 민족문제연구소장인 임헌영 교수는 “왜 아직도 민족 문학이냐며 세계화 시대의 국제적 세련미를 황금으로 도색한 신사들이 민족문학을 마치 산촌 서당의 상투 튼 선비 쳐다보듯 한다. 그러나 100여년에 걸쳐 한반도를 비롯한 약소민족들이 피 흘리며 전개했던 민족해방투쟁 주체 세력과, 제국주의의 식민지 노예로 굴종했던 민족반역자들이 전개해 왔던 두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오늘에도 여전히 싸늘한 적대감으로 존속되고 있다. 그래서 제국주의적인 침략정책의 속임수인 근대화론의 관점으로만 보노라면 국민국가의 주체성을 확립하려는 민족문학이란 한낱 시대착오적인 청산대상으로 폄하되어 이제는 그 술어조차도 구시대의 골동품도 못 되는 폐기품 쯤으로 간주하기도 한다.”고 개탄 했다. 이에 빈사상태의 민족문학을 부활시켜야 할 이유로 오늘의 민족문학은 한반도의 민주통일과 평화정착과 다르지 않으며, 그 최대의 장애인 외세열강의 실체를 밝혀내고, 민족의 정체성과 그 정신을 고양하는 작업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2. 민족정신의 상징적 인물에 대한 시적 구현
사실 민족의 역사를 외면하는 문학 행위는 그 자체로 모국어를 사용하는 독자에 대한 존중을 외면하는 것이고. 문학이 존재해야 할 근본 가치를 흔드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가진 일군의 작가들이 “민족문학연구회” 라는 문학공동체를 만들어 한국 문학의 역사적 자정 기능을 회복하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함께 추구하는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19년 3.1독립선언 100주년을 맞아 “독립지사기림시집 1집 『독립운동의 접두사』에서 50명의 시인이 50인의 민족 지사를 시로 표현했고, 이어 2020년 3.1절을 맞아 독립지사기림시집 제2집 『겨레의 큰 별들』에서 45명의 시인들이 시적 상상력을 통해 민족 지사 45인을 그려냈다. 민족 역사의 재인식을 통해 ‘금강산’을 소재로 서사시집으로 발간함으로써 오늘의 시문학에 ‘민족’이라는 담론을 재등장 시켰다.
독립운동가 기림시집 제2집에 수록된 몇 편의 시를 감상 하며 오늘의 민족문제에 대한 오늘의 시적 수용의 자세와 사례를 살펴보자.
먼저 조국독립과 반외세, 반분단, 민주주의 수호 운동에 앞장선 유림출신 민족운동가이자 성균관대 설립자인 심산 김창숙(金昌淑 : 1879∼1962) 선생에 대하여 배창환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그가 있어 조선 유교 오백 년 수작 헛되지 않았다는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그가 있어 오천 년 이 겨레
조선의 혼이 죽지 않고 오롯이 살아 있노라고
(중략....)
병든 노모 누이에게 맡기고 망명한 이듬해 어머니 잃고
파리 장서, 국내 군자금 모집, 나석주 의거 일으켜
나라 잃고 얼어붙은 조선 땅 하늘, 사람 혼 일깨우고
투옥, 잔혹한 고문으로 얻은 앉은뱅이, 만신창이 몸으로
14년 옥살이 사경을 헤매었으나 이 악물고 살아나 해방 맞았다
일제의 고문과 병으로 두 아이 먼저 보내고
해방 전후, 김구, 신채호, 여운형, 안창호, 김동삼… 동지들 모두 간 뒤에도
홀로 남아 남북 통일정부 수립의 대의를 움켜쥐고
한 걸음도 흔들리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청년을 일으킬 유학의 도량으로 유도회, 성균관대학교 세우고
이승만 종신 독재와 가난과 병마와 외로움에 맞서 싸우며
하루하루 죽음 문턱을 넘나들면서도
반독재 호헌 투쟁의 중심으로 우뚝 서서
마지막 숨결마저 민주주의의 제단에 바치신 크나큰 별
이 땅의 외세 침략자, 독재자 혹은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그 뜻을 꺾지 못하고
털끝 하나 훼손하지 못한
오직 한 분, 조선 선비의 고결한 넋이여
(후략..)
ㅡ 배창환, 「김창숙」 부분
심산 선생이 조선 유교 오 백년 이 아니라 오 천년 이 겨레의 혼이 되었다고 시인이 노래하는 이유는 김창숙 사상이 오늘의 겨레에 준 교훈은 사회지도층의 도덕성과 지식인들이 지행합일(知行合一)의 가치를 세우고, 온 겨레가 이기주의적 삶에서 공동체를 위한 대의(大義)가 무엇인지를 깨달아, 물질과 정신의 가치관 전도를 우려하고 무엇보다 국민통합과 민족통일을 이루기 위한 통합정신을 요청하고 있음을 배창환 시인은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영화로 제작되어 화제가 된 재일 독립운동가 박열 선생을 그린 김림 시인은 1인칭 화법으로 박열 지사를 더욱 선명하게 독자 앞에 모시기도 한다.
나는 적지 한가운데로 가기로 했소
조선 팔도를 뒤덮은 3•1 만세 함성이
그곳까지 닿지를 못하였는가
하여
차디찬 적의 심장 깊숙이 원한의 칼을 꽂아 넣으려
기미년 가을 현해탄을 건넜소
유난히도 시퍼런 물결
동포들이 통한의 아우성으로 건너간 바다
사람으로 태어난 나는
개새끼ⁱ가 되었소
내 나라를 도륙하는 야만의 무리를 향해
앙칼진 소리로 어둠을 쫓아야 했소
신문배달, 공장 직공, 우편배달부, 인력거꾼으로
의혈단 동지들과 반제국주의 투쟁을 전개 하였소
나는 뻔뻔스러운 조선인²
기꺼이 너희의 불령선인³이 되리니
폭압에 자유를 빼앗긴 항거에 두려움이란 없었소
(중략...)
우리는 기획된 죄인이었으나
피하지 않고 맞섬으로써 일본제국주의를 꾸짖어주었소
조선의 독립을 보기 전까지 22년 2개월을
나는 불발탄으로 견디었소
서서히 잊혀지는 형벌도 감내하였소
터지지 않았으나 언제든 불 당겨지면
끝내는 폭발하고야 말 도화선으로.
ㅡ 김림, 「박열」 부분
시인 김림은 박열 선생이 18세의 나이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흑도회’ 등 항일 사상단체를 이끌어 온 선생은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학살의 와중에 일본국왕을 폭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어 22년의 장기간의 옥살이를 치러야 했다. 해방 후 선생은 신조선건설동맹에 이어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의 초대단장을 맡았으며, 파란만장한 개인사와 더불어 자유정신에 입각한 선생의 항일투쟁 이력은 독립운동사에서도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을 문학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박열 선생이 일본 국왕 암살 혐의로 재판 받을 당시 그가 요구한 네 가지 사항은 오늘의 민족 자주 정신에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첫째, 나는 피고 아닌 조선민족의 대표로서 일본천황을 대표한 재판관과 동등한 자격으로 법정에 설 것이다. 재판관이 천황을 대신해 법관 법의를 입고 나온 것이라면 나도 조선민족을 대표하는 입장이니 왕관과 왕의를 착용케 해줄 것. 둘째, 재판관이 심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조선 민족을 대표한 내가 먼저 법정에 서게 된 취지를 선언하게 해줄 것. 셋째, 법정용어는 조선말만 쓰겠다. 넷째, 피고의 좌석을 재판관과 동등하게 높일 것.” 당시 독립 조선인의 기개와 자유정신을 박열 답게 보여준 놀라운 정신을 시인은 지사가 마치 말씀하듯 그려내고 있다.
다음은 일완(一阮) 홍범식(洪範植) 선생(1871~1910)의 유언을 다시 새겨 독립지사를 기린 박원희 시인 작품을 감상해 보자.
괴강에 가보았는가
느티나무 가로수 길 읍내로 향하던
거친 만세소리 들어 보았는가
총구 앞에 서있던 비무장의 사람들
함성을 들어 보았는가
유구한 괴강의 흐름을 보았는가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아들에게서 손자로
다시 손자에서……
흐르는 역사의 물줄기를 보았는가
“國破君亡 不死何爲(국파군망 불사하위)”
금산에서
경술국치에 죽어간 홍범식의 함성을 들어 보았는가
그의 아들 홍명희의 함성을
괴강의 물줄기는 흘러
한강으로 큰 물 되어 흐르고
역사도 한줄기로 흘러 강을 이루는데
여울로 흐르는 심성 고운 마음이
나라를 잃은 치욕에 죽어간
죽어서 산 사람들을 끌고
독립투쟁의 긴 강물이 된 사내 홍범식
추모비가 서있는 생가 앞
한 무리들이 만장을 들고 지나가는
망국의 서러움이 된 발자국을 따라 흘러
독립의 함성이 된 유언
(중략...)
갑오혁명 이후
척왜척화를 외치며
일어난 의병들
관리로서 무고한 민초를 일제로부터 보호한
금산군수 홍범식
괴강의 여울처럼 흘러간 역사
경술국치에 망국을 죽음으로 맞이한 선비
ㅡ 박원희, 「홍범식」 부분
박원희 시인이 노래한 홍범식 선생은 민족문학의 거두인 『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 선생의 부친이기도 하다. 선생은 한말 대한제국 시절에 진사 합격하여 1907년 전라북도 태인군수에 부임하였다. 당시 일제침략에 항거하는 의병이 전국에서 봉기하여 치열한 항일전투를 전개하고 있던 때로서 적극적으로 의병 보호에 힘써 일본군의 체포망을 피하게 하였다. 1909년 금산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주권이 강탈되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목매어 자결하였다. 홍범식이 장남 등 가족에게 남긴 유서 10여 통은 전해지고 있는데, 시인은 시 속에 홍범식 선생의 피 토하는 유언을 이렇게 옮기고 있다.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기엔 내 힘이 무기력하기 그지없고 / 망국노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 할 수 없어 /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구나 / 피치 못해 가는 길이니 / 내 아들아! / 너희들은 어떻게 하던지 / 조선 사람으로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 빼앗긴 나라를 기어이 되 찾아야한다 /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 그 요지는 “조선 사람으로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
다음 작품은 박관서 시인이 표현한 고당 조만식(1883~1950) 선생을 만나보자. 선생은 오산학교 교사로 출발한 그의 활동은, 열렬한 애국심과 독립정신 속에서 독립만세운동, 국산품 애용운동으로 확대하여 좌우파가 하나가 되는 신간회가 결성되도록 앞장섰고, 해방 후 반탁운동과 민족자주 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 활동한 민족의 사표(師表)였음은 온 겨레가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조만식 선생을 박관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북쪽의 소식은 항상 서늘했는데
古堂, 당신의 별호인 옛집을 생각하니 따뜻해집니다
누구도 두고 온 집이 있겠습니다만 제 것을 천시 말라며 양 무릎에 닿는 무명 두루마기를 입고 제주에서 나온 말총 모자를 쓰고 평양 고무공장에서 만든 고무신을 신으면서
종이 한 장도 우리 것을 써야 한다며 당신이 시작한 물산장려운동이 백년이 지난 지금도 NO 일본제품 불매운동으로 계속되고 있어 서늘해집니다 습관이란 허리뼈보다도 무서워서
허리가 휘도록 일하면서 다시 일으켜야할 나라를 함부로 들어먹지 말자고 당신이 오신학교에서 스스로 세우려던 민립대학에서 그리고 신간회와 6.10 만세운동으로 자주 민족국가로
평생 실천궁행으로 비폭력 비살생 무저항 불복종 운동으로 세우려던 당신의 집을 생각해봅니다 그저 잘 사는 집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과 함께 어울려 고향을 묻지 않고 살아가는
그 집 마당에는 장두감나무 석류나무가 안쪽 텃밭으로 오월 햇볕을 몰아넣고 창문 곁엔 멀구슬나무가 책 읽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겠지요 키 큰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로를 바라보는 사립문은
언제나 열려있어 누구나 출입할 수 있지만 비굴하고 비천한 이들은 스스로 들어서지 못하는 낮아서 높은 담장이 둘러쳐진 평양 산정현교회처럼 자존 깊은 이들이 살아가는 집이겠지요
古堂, 그대 오래된 집이 지금 다시
지어야 할 집이어서 북녘 하늘을 보며 뜨거워집니다
ㅡ 박관서, 「조만식」 전부
조만식 선생의 생애에 가장 영향을 준 인물이 둘 있는데, 먼저 청년기에 만난 도산 안창호 선생은 만민공동회 등에서 민족 각성의 연설과 활동이 조만식 선생의 독립운동 정신에 큰 영향을 끼쳤고 또한 선생은 유학 중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주의에 깊이 감동하여 민족운동을 하는데 있어 그의 평화사상을 본 받아 조만식 선생은 마침내 ‘조선의 간디’로 불리기도 했다.
특별히 박관서 시인은 단순히 「조만식」을 역사적 인물로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시적 풍경을 잘 담아 주제 의식과 시의 음유적 역할을 잘 조화시킨 작품으로 다가온다. 시적 대상과 시의 기능이 충돌하지 않도록 시 쓰기의 세심한 자세가 돋보이는 시다. 고당 선생의 온유한 인품과 결기어린 걸음이 눈에 선한 듯 묘사해 주었다. 민족정서를 시로 승화시킨 수려한 작품으로 평가할 만 하다.
이제 이번 기림시집 45편 중 마지막으로 죽산(竹山) 조봉암(1899~1959) 선생을 그린 채상근 시인의 시를 감상해보고자 한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심정으로 동경으로 건너가
엿장수를 하면서 번 돈으로 공부를 하면서
죽산은 대한민국이 독립해서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고루 잘 사는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상해로 건너가 조선독립운동 조직을 결성하던 죽산은
일본 경찰들에게 쫓기다 체포되어 징역 7년형을 받고
신의주 감방에서 고문과 동상으로 손가락 7개를 잃는다
(중략....)
대지주에게 모여 있던 토지를 실제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농지개혁법을 만든 죽산 조봉암을
이승만은 진보당을 창당하려 했다는 정치적 이유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엮어 서대문형무소 사형대에 세운다
(중략...)
죽산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뒤부터
큰소리로 우는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지만
서대문형무소에서 그 새를 보았다는 사람은 없고
형무관들과 징역꾼들에게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유를
사형집행장 앞 통곡의 미루나무는 알고 있다
죽산이 억울하게 죽어 환생한 죽산조竹山鳥라고
ㅡ 채상근, 「조봉암」 부분
시인이 인용한 구절에 의하면 조봉암 선생은 “기미년 꽃피는 봄날 섬마을 강화읍내 시장에 / 마을마다 온몸을 던져 삼일만세운동을 주도하던 / 스물한 살 조봉암은 독립투사가 되어 있었고 /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 새로운 사람이 되어 우리 민족을 위해서 /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뼈저리게 알게 된” 독립지사였다. 그러나 그는 해방된 조국에서 버림받은 비운의 지사였다. 광복 후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였고,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까지 역임하였으나. 친일파들로 장악된 이승만 정부는 소위 조작된 ‘진보당’ 사건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959년 7월 사형이 집행되었다. 분단된 조국 양측으로부터 버림받은 민족 기상과 민주이념의 표상이었던 그를 2011년 1월 대법원은 무죄판결로 복권시켰지만 선생의 한스러운 죽음을 달래기에는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이에 대해 채상근 시인은 죽산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뒤부터 / 큰소리로 우는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지만 / 서대문형무소에서 그 새를 보았다는 사람은 없고 / 형무관들과 징역꾼들에게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유를 / 사형집행장 앞 통곡의 미루나무는 알고 있다 / 죽산이 억울하게 죽어 환생한 죽산조(竹山鳥)라고” 표현하고 있다. 시인이 조봉암 선생은 죽산조라는 새로 그의 넋을 달래고 오늘의 민초들에게 그의 한을 노래해주고 있는 것이다.
정치권력이 전쟁의 아버지라면 문학은 평화의 어머니다. 인간을 다 구원할 것 같은 이데올로기는 이미 역사적으로 너무나 많은 분열과 상처를 남겼지만, 문학예술만은 언제나 평화의 메신저 역할을 자임해 왔다. 민족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국방을 강화해야 한다고 그래서 한미 동맹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지만 문학은 특히 민족문학은 힘이 아니라 상처에 대한 이해와 어떠한 세상 가치도 우방도 민족의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된다고, 가장 평화로운 방법으로 외치는 것이다. 분단 75년, 한국전쟁 70년을 맞아 민족의 명운을 밝혀 온 독립지사들을 기리는 시집은 그야말로 민족공동체에서 문학의 역할을 다시금 새기는 움직임이다.
민족문학연구회의 독립운동가 기림시집은 문학에 있어 민족 문제 인식의 시적 상상력을 발현시킴으로 온 겨레를 향한 민족문제 재인식을 촉구하고 모국어로 시를 쓰는 오늘의 시인들에게 소중한 문학지평을 제시하는 민족문학의 생명력을 보여준 소중한 문학적 업적으로 평가된다.
날마다 찾아드는 황혼에 평화 있어라
다리 위에 평화 있어라 술에 평화 있어라
내가 사용하는 언어에 평화 있어라
그리고 나의 가슴에 올라와서
흙냄새와 사랑으로 가득 찬 옛 노래를
펼쳐주는 언어에 평화 있어라
빵 냄새로 눈을 뜬
아침의 도시에 평화 있어라
(중략...)
살아 있는 모든 것에 평화 있어라
모든 대지와 물 위에 평화 있어라
-네루다(Pablo Neruda), <평화 있어라>, 김남주 역,
네루다의 시처럼 오늘날 한반도에서의 민족문학은 바로 평화문학의 애통함을 그려내는 몸부림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3. 민족 정서의 본향으로 표현된 시 ‘금강산’
“시대정신과 민족정신을 보다 창조적으로 인지하고 구현하는 사람이 시인이다”
ㅡ 요한 고트프리트 폰 헤르더
2004년 7월 금강산을 다녀 온 남녘의 시인 공광규는 분단현실을 그의 문학으로 그려 온 대표적 시인이다. 더 나이를 먹고 기억력이 감퇴되기 전에 그의 금강산 방문기를 시로 엮었다서사 시집 『금강산』에 나타난 시인의 감성은 어떤 당위론이나 격문을 옹호하는 성명서 형식의 시가 아니라 그야말로 민족의 한 씨알로서 산하의 아름다움과 민족의 정서가 남은 서사를 되새김질 하는 야윈 시인의 감성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작품집이다.
시인은 그동안 ‘비무장지대 평화 손잡기 행사’, ‘철책을 따라서 걷는 통일 걷기’, ‘남북 노동자 축구 대회 응원’, ‘서울 평양 마라톤 대회’ 다양한 통일 행사에 직접 참가했는가 하면 보수정권시절 ‘금강산 관광 재개를 촉구하는 토론회’ 패널로 참여 하고 ‘남북한 시에서 어휘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토론회’에서 발제를 하기도 했다. 이처럼 공광규 시인은 민족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각별한 인식과 정서를 간직한 문인이었다. 그 연장선에서 이 시집의 집필과 출판 의도가 남북 민중들의 정서와 정신의 근원이 일치함을 ‘금강산’을 통해 확인하려는 의도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시집 『금강산』은 1부 금강산에 가며, 2부 내금강, 3부 외금강, 4부 해금강, 5부 금강산을 나오며 로 구성되어 있다. 이에 필자는 시인의 아무런 제약 없이 금강산 여행이 가능한 평화와 통일의 갈망을 담은 작품 중 몇 편을 통해 민족 정서의 본향이라고 할 수 있는 금강산에서 오늘의 시인이 민족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조망해보고자 한다.
먼저 시집의 ‘여는 시’에 해당되는 표제시 금강산에서 시인의 노래를 먼저 감상해보자.
“전해오는 이야기에 / 어떤 산 하나가 동해 가까이에 있는데 / 전체가 금으로 된 것은 아니나 // 산의 동서남북과 위와 아래 / 흘러내려오는 물속의 모래까지도 / 금을 함유하고 있다고 한다 / 천하게 둘도 없는 이 돌산에서는 / 이따금 / 성현이 출현한다고 하는데 / 옛 인도의 성인 석씨가 이르기를 / 동쪽 바다 가운데 / 금강산이라 불리는 곳이 있어 / (중략...) // 우리나라 신령스런 / 세 개의 산 / 지리산 한라산 금강산 가운데 하나 / 백두산 묘향산 북한산 지리산과 함께 / 우리나라를 수호하는 / 민족의 성산 금강산 / (중략...) / 조선 시대에는 / 승려가 호국을 실천하고 / 선비들이 민족의 자부심을 기록했던 곳 // 구한말에서 동족상잔과 분단 이전 / 기울어가는 나라에 새로운 기운을 찾으려 / 몰려갔던 지식인과 학생들 // 이 모든 세월을 거쳐 / 민초들의 신심으로 / 일만 이천 봉 아래 팔만 구천 개 절을 세운 곳 // 사람이 죽어 지옥에 가지 않으려면 / 죽기 전에 한 번은 / 금강산에 올라야 한다는 부채 그림 // 분단 이후 / 늙어버린 얼굴로 이산가족 상봉하러 가서 / 울음바다를 만들고 // 잠시 금강산 관광 기회가 오자 / 그리웠던 금강산을 보려고 / 줄을 이었던 남녘의 관광 행렬 // 그리고 다시 길이 닫힌 지 오래 / 다시 우리 힘으로 열어야 하는 / 민족의 영지” (시 「금강산」 부분)
시인은 ‘금강산’을 민족의 정서적 본향으로 회복하고 한민족을 수호하는 영산(靈山)으로 노래하고자 하는 것은 ‘분단 이후 늙어버린 얼굴로 상봉’ 하는 이산가족의 아픔을 목격한 민족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산야를 표현하기 위함이다. ‘금강산’이라는 지명(地名)은 이미 고유 명사가 아니라, 대명사를 너머 민족의 정서를 오롯이 담은 상징으로 노래한 것이다.
시집 ‘금강산’에서는 시인이 방문한 지명의 외형적 이미지나 감성의 스케치에서 더 들어가 역사의 흔적을 그려내고 있다. 특정 지점을 할퀴고 간 민족의 역사를 시속에 표출시킴으로서 독자가 그 시의 풍경을 그냥 스칠 수 없도록 머물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작품 「내금강역, 옛 금강산 전기철도 종점」 을 살펴보자.
(...전략) // 일본 제국주의가 / 창도의 지하자원인 유화철을 / 흥남을 경유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하거나 / 중국인들을 고용하여 / 금강산전기철도를 건설하였다고 한다 // (중략...) // 금강산선은 1919년 착공 / 1924년 8월 철원에서 김화 구간을 / 1931년 7월 철원에서 내금강 전 구간을 개통 / 금강산 관광과 자원수송을 병행했다고 하는데 / 철원 김화 지역 학생들 통학과 / 금강산 수학여행 길이었다고 한다. (후략...)
“내강리와 만천교를 잇는 내강동에는 / 1940년대 금강산 전기철도 종점인 내금강역 / 지금은 중학교가 들어섰다” 라는 서두로 시의 첫 연을 연 시인은 아름답고 조용한 금강산 안쪽 마을 내강리와 만천교를 있는 마을에 일제의 민족 수탈의 도구로서 내금강역이 설치되었고 이로써 민족의 자산이 훼손당한 역사를 되새김질 하지만 해방 후 지역의 학교가 세워졌고, 타 고장 학생들의 수학여행 코스가 되었음을 통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교차점으로 상징화함으로서 외세의 흔적을 도리어 미래 세대의 국토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기록하여 노래하고 있다. 이는 남북의 이념을 초월하여 동일한 지향점을 그리는 시인의 시선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된 것이다.
금강산을 민족사적 상상력으로 표현하기도 했지만, 명산풍월을 마치 한 폭의 한국화를 그리듯이 시인의 감성으로 섬세하게 묘사한 작품도 여러 편 수록되어 있다, 그 중에 「영원동, 신령한 기운의 골짜기」 라는 작품을 함께 감상해보자.
“명경대 오른쪽 / 산 아래 바위절벽 / 바위굴 두 개 // 아래 것은 / 살아서 죄지은 사람이 죽어서 / 넋이 들어간다는 흑사굴 // 위 것은 // 살아서 선행을 한 사람이 죽으면 / 넋이 들어간다는 황사굴이다 // 흑사굴에서 / 영원문 앞을 지나면 / 대궐 터와 조탑장이 있고 / 조탑장이 있는 곳은 / 명경대와 수렴동과 / 영원동이 갈라지는 곳 // (중략...) // 영원, 그 이름처럼 / 신령한 근원이 있는 곳인가 / 전나무와 잣나무 숲을 지나니 영원암 터가 나온다 // 빈 절터 오른쪽 바위 절벽을 돌아 / 칡덩굴과 다래덩굴이 엉킨 뒷산에 오르면 / 영원동을 조망할 수 있는 옥초대가 나오고 / 옥초대에서 바라보는 / 봉우리가 둥근 흙산인 백마봉 / 산봉우리에 흰 바위가 드러나 있다 // (후략...) // ( 시 「영원동, 신령한 기운의 골짜기」 부분)
이어서 시인 공광규와 한국인의 영원한 향수인 시인 정지용의 문학적 상봉을 통해 우리 겨레의 상징과 연합을 느끼게 하는 작품 「비로봉, 일만 이천 기상이 모인」을 감상해 보자.
“금사다리 은사다리를 기어올라 / 비로봉과 영랑봉을 잇는 등성이에 오르면 / 비바람과 눈비가 뛰어놀기에 충분한 평지 // 바위에 눕고 엎드린 잣나무와 / 측백나무와 향나무와 소나무와 전나무들 / 자작나무가 드문드문 서있다 // (...중략..) // 한 그루 잡목도 허용하지 않는 / 어떤 위대한 정신 같은 / 가파르고 험준한 바위 봉우리 // 시인 정지용은 /1933년 6월
적요하고 아름다운 시 「비로봉1」을 발표했다 // ‘백화 수풀 앙당한 속에 / 계절이 쪼그리고 있다. / 이곳은 육체없는 요적(寥寂)한 향연장 / 이마에 시며드는 향료(香料)로운 자양(滋養)! / 해발 오천 피이트 권운층(卷雲層) 우에 / 그싯는 성냥불! // (중략...) // 그리고 또 한 편의 시 / 「비로봉2」에는 /담쟁이와 다람쥐와 자작나무와 바람이 보인다 // (중략...) // 바위가 틈을 보이는 곳에 / 뿌리를 내리고 납작 엎드려 붙어 있는 / 측백나무와 소나무와 진달래와 철쭉과 만병초 // 봉우리 아래서 발원한 물은 서남향으로 흘러 / 여러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줄기와 만나 / 만폭동이 되고 // 영원동에서 굽이쳐 오는 물과 만나 / 장안사 앞을 거쳐 / 산을 벗고 들을 건너 서해로 간다고 한다“ (시 「비로봉, 일만 이천 기상이 모인」 부분)
이 시에서는 시인이 금강산 비로봉의 위엄과 오묘한 조화 신비한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무엇보다 과거의 민족시인 정지용의 관련 시작품을 통해 현재의 민족시를 쓰고자 하는 과거의 시인과 오늘의 조우(遭遇)를 작품 속에서 목격할 수 있다. 이 조우는 시간을 초월한 시인끼리의 만남에 머물지 않고, 금강산 비로봉에 있는 우리 겨레의 흔적과 상징을 통해 민족 정서를 모우고 모아 ‘영원동에서 굽이쳐 오는 물’과 만나고 ‘장안사를 거쳐 산과 들을 건너 넓고 깊은 머언 바다와 만나는 민족과 겨레의 해후(邂逅)를 상상하도록 안내하고 있다.
시집 『금강산』에서는 시인의 발걸음에 묻은 역사적 흔적과 교훈을 놓치지 않고 노래하고 있다. 「애국투쟁의 거점 유점사」 등 에서는 1880년 원산 개항 이후 갑오농민투쟁이후 금강산 주변의병투쟁기와 을사늑약 이후 반일 투쟁사와 함께 금강산을 파헤쳐 광석과 목재를 무자비하게 캐간 비극의 역사를 고스란히 시로 기록함으로서 민족문학으로서 역사성을 외면하지 않는 시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공광규 시인은 시집 말미에 북한 해설원의 마지막 인사를 남겨 두었는데 그 내용을 통해 납과 북의 민중은 한결 같이 금강산을 그리워하고 함께 상봉하기를 고대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시인 선생님, 지난 10년 세월 막혔던 금강산으로 향하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으니, 많은 아랫동네 동포들 모시고 다시 오시기 바랍니다. 금강산 문화회관에 모여, 우리 민족 조상님들, 우리를 사랑했던 외국인을 모셔놓고 놀이판을 한판 벌이자고요. 금강산에 왔던 영랑 술랑 남랑 안상을 모셔오고, 나옹 서산 사명을 모셔오고, 양사언 김삿갓 정철을 모셔오고, 정선 최북 김홍도를 모셔오고, 황진이 김만덕 김금원을 모셔오고, 금강산을 좋아했던 중국인 일본인 유럽인 아라비아인 다 모셔와 놀자고요. 우리 북녘동포들은 언제나 금강산을 찾아오는 아랫동네 동포들을 따뜻하게 맞이할 것입니다.“ (ㅡ ‘해설원의 마지막 말’ 중)
문학하는 이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는 해설원의 인사에서 다시 가고픈 아니 함께 가고픈 금강산을 대신 전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시집 에필로그 에 속하는 ‘금강산을 나오며’ 라는 단락에서 「북극성을 바라보며」의 시를 통해 금강산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소회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 (...전략) // 어디를 가나 / 조국의 허리를 / 칭칭 감고 있는 / 내 맨발을 / 심장을 찢던 / 날카로운 철조망 // 천진한 남북의 아들들이 서로 / 조국의 심장을 향해 / 겨누고 있던 총구 // 민간인통제선 안에서 만났던 / 자식같이 어린 / 다인종의 미군들 손에 쥐어진 총 // 비무장지대와 통일전망대를 거쳐 / 6.25 전쟁 체험 전시관과 / DMZ박물관을 둘러보며 // 할아버지 할머니가 / 아버지 어머니가 겪은 / 전쟁의 상처를 되돌아보며 // 금강산의 연봉들 / 계곡과 바위 바위에 떨어지는 폭포와 / 흘러가는 개울물 // 풀과 나무와 새들의 노래 / 산봉우리와 절집 기와지붕을 가리던 / 산안개를 생각하며 // 커튼을 걷고 / 창을 여니 / 음력 열이틀 달이 배가 불러간다 // 바다를 건너와 / 분단조국의 슬픔을 위로하는 / 달빛 // 나는 슬퍼져서 / 내내 / 잠이 오지 않았다” (시 「북극성을 바라보며」 부분)
전무후무한 이번 금강산 서사 시집에 대하여 윤일현 시인은 “공광규이기도 하고 공광규가 아닌 시적 화자와 가설의 북녘 여성 해설원의 안내에 따라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을 돌아다니며 기암괴석과 봉우리, 계곡과 폭포, 절과 절터 곳곳에 가득한 수많은 전설과 일화에 귀 기울이다 보면 머리가 맑아진다. 어느 순간 나 자신이 우화등선의 즐거운 느낌을 받게 된다. 우리는 금강산 시편들이 주는 감동이 민족의 화해와 평화적 통일을 견인하는 힘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언급하고, “그리워야 화해의 마음이 생기고, 뼈에 사무쳐야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금강산 시편들은 정서적 공감을 통해 남북이 하나임을 깨닫게 해 준다. 절절하게 보고 싶고 간절하게 그리운 마음이 생기면 ‘반외세 자주 통일의 당위성’은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공광규는 『금강산』 속의 그리운 금강산을 통해 남북 민중의 ‘정서와 정신의 근원’이 서로 다르지 않고 같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평가는 필자의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남북한의 평화체제를 구축하면 암울한 시대를 이겨낸 동포들과 함께 금강산 비로봉에 올라보고 싶은 희망은 이번 시집을 위해 기억과 시적 상상력을 최대한 끄집어내고 다듬은 시인의 열정과 민족 사랑이 민족의 역사와 환경이 오늘의 시인들이 어떻게 구현시켜야 할 것인가 과제를 던져 준 시집이기도 하다.
4. 나가면서
민족문제와 역사에 대한 재인식과 함께 오늘의 시와 시인의 움직임들을 상고하면서 인간 본질에 관한 탐구와 다르지 않는 민족 정체성과 자주권의 온전한 회복을 추구하는 시인들의 노력을 살펴보았다.
2020년 3월 민족문학연구회가 펴낸 독립운동가 기림시선 『겨레의 큰 별들』에서 「민족정신의 상징적 인물에 대한 시적 구현」의 관점에서 작품을 탐색하였다. 두 번 째로 중견시인 공광규 시인의 서사 시집 『금강산』 에 내재된 「민족 정서의 본향으로 표현된 시세계」를 정리해 보았다. 이 두 시집의 공통점은 시인에게 민족의 역사와 문제는 외면하거나 회피해야 할 정치적 이거나 학술적인 소재가 아니라, 오늘의 삶과 인간의 존엄성을 생각하는 시 정신에 부합하는 민족공동체의 정체성 회복과 온전한 자유와 평화를 누려야할 보편적 가치에 복종해야하는 문학의 도리를 말하고자 함이다.
남한의 정치 경제적 상황은 물론, 문화 및 사고의 영역에서 여전히 일제의 흔적들이 잔존하고 있다. 특히 문학 영역은 더욱 노골적으로 그런 현상이 지워지지 않고 있다는 현실 속에 문학과 시인이 민족의 정신을 대변하지 않는 것은 겨레의 일원으로 자신의 역할을 방기(放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광복 75주년임에도 여전히 식민지 문화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민족의 미래, 문학의 미래는 암울할 것이다. 민족이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투쟁하고 희생한 우국지사들을 기리는 문학적 작업은 단순히 기록의 차원을 넘어 지금 우리 민족이 처한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완전한 정신적, 문화적 독립을 이루는 데 한국 시인의 민족 정체성을 구현하는 창작은 계속 되어야 하며, 문단과 독자들, 그리고 다양한 매체들이 함께 응원하고 참여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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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에고~ 감사합니다~^^ 긴 글 누가 읽으시려나~^^
올리자마자 히팅 수 200이 넘더니 지금은 446!!
김윤환 시인께서는 평론으로 전공을 바꾸셔도 될 듯...잘 읽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인용된 시들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평론을 뜨거운 마음으로 읽게 되다니,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