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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이 매우 과학적으로 만든 글자인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사용하는 한글은 원래의 글자보다 줄어들어
기능적으로 불완전한 상태가 돼버렸어요.
우리 학계가 15세기 천문 이론을 바탕으로 만든 한글을 19세기 말에 정립된 서양 언어학의 잣대로 연구하는
바람에 세종의 창제 원리를 놓친 측면이 있습니다.
한글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한글 세계화 운동’도 좋지만 그보다 더 시급한 게 전 세계의 외국어를
원 발음에 가깝게 표기할 수 있도록 한글의 옛 글자를 살려내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v와 f 발음은 훈민정음의 합용병서(合用竝書)인 삐, 삐으로 온전히 표기해낼 수 있어요.
훈민정음 해례본에 쓰여 있으나 근세에 사라진 합용병서를 복원하는 일이야말로 한글 세계화의
핵심 열쇠가 될 것입니다.”
초성 합용병서 사용을 주창하는 유일한 한글학자이자 연구가인 반재원 훈민정음연구소장(66)의 말이다.
40년 가까이 한글 한 분야만 연구해온 반 소장은 1443년 한글 창제 당시를 기준으로 하면 한
글은 세계 언어의 90% 이상을 완벽하게 표현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훈민정음에서 사라진 합용병서 중 외국어 발음 표기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몇 글자만 되살려내도 돼요.
우리는 이미 발음 구조가 굳어져 굳이 사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전 세계의 공용도구인 컴퓨터 자판에서
합용병서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놓기만 해도 괜찮아요.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한글로 자신들의 발음을 충분히 표기할 수 있도록 해놓으면
자발적으로 한글을 이용하는 세계 인구가 늘어날 수 있습니다.”
합용병서를 사용하면 과연 전 세계 언어를 한글로 모두 표기할 수 있을까?
내친김에 한국인들이 가장 발음하기 어려워하는 ‘th(θ· ð)’에 대한 그의 표기법을 들어보자.
이 글자는 훈민정음에서 반설음(끼의 합용병서인 끼(θ)과 끼(ð)으로 표기할 수 있다고 한다.
즉 ‘this’는 ‘끼 스’로 표기하고 발음할 때는 혀를 살짝 빼물어 ‘디-’하면 된다고.
마찬가지로 ‘tooth’의 경우 ‘투 끼+ㅡ’로 표기할 수 있으며 혀를 살짝 빼물어 ‘스’를 발음하면 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또 영어의 ‘r’는 물론, 중국어의 권설음 ‘ch’ ‘zh’ ‘sh’ 등도 모두 한글 표기가 가능하다고
했다.
“현재 한글은 자음 14자와 모음 10자를 합친 24자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글의 모체인 훈민정음은 원래 28자였습니다. 초성의 ‘ㆁ, ㆆ, ㅿ’ 자와 중성의 ‘ㆍ’자가 없어졌지요.
사라진 4자의 음가를 복원하고 앞서 말한 합용병서를 일부 사용하면 모든 언어를 제대로 발음할 수 있습
니다. 제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한글 28자를 사용하면 영어, 일본어, 중국어를 비롯해 아랍어, 힌디어, 몽골어,
네덜란드어, 루마니아어 등 21개국 언어의 발음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외국 학자들이 한글이 왜 가장 과학적이고 우수한 글자라고 말하는지, 왜 국제 공용어로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지요.”
반 소장은 유럽, 아시아 등 세계 각지를 다니면서 현지인의 정확한 발음을 채록해 한글이이들 언어를 표현할 수
있는 문자라는 것을 증명해냈다고 말했다.
○훈민정음 28자는 천문도 28宿의 원리
한글 예찬론자인 반 소장도 처음부터 한글에 푹 빠져 살아온 것은 아니다.
부친과 형제들 모두 교직자 집안인 그는 서울 시내 공립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2012년 정년퇴직한 ‘선생님’
출신이다. 그는 평소 동양철학과 역학에 관심이 많아 교직 생활을 하면서도 꾸준히 이 분야를 연구해왔다고 한다.
동양철학이나 역학과 관계된 분야면 어디든 마다 않고 찾아다니며 배웠다.
그러던 중 “훈민정음이야말로 가장 확실하게 역학이론에 근거한 언어”라는 어느 역리학자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고 한다.
“훈민정음에 목·화·토·금·수 5행과 10간12지의 이론이 다 들어 있다는 말을 듣고 정말 그럴까,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주학 대가를 찾아 사주 명리학을 배웠는데, 한 2년을 공부했는데도
뭔가 막혀서 잘 풀리지 않았어요. 그래서 5행 이론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한의학 공부에도 도전했지요.
당시 한약학원 같은 곳이 있어서 방과 후 수강을 하며 또 열심히 2년을 배웠지요.
덕분에 침놓는 법도 알게 됐지만 학문적 궁금증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어요.
그런 식으로 주역, 성명학 분야 등을 섭렵하면서 결국 천문학에까지 이르게 됐습니다.
그 과정이 근 40년 세월이었습니다. 그러고는 마침내 8괘의 근본 생성원리를 논하는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천문도임을 알게 되고, 훈민정음 역시 하도 및 낙서와 연계된 천문원리에 의해 정교하게 만들어진 글자라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그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훈민정음의 중성 배열 순서(· ㅡ l ㅗ ㅏ ㅜ ㅓ ㅛ ㅑ ㅠ ㅕ)는 동양천문도인 하도에
이론적인 바탕을 둔 것이고, 초성 배열 순서(?¤, 닌, 밈, 잇, ¤피,띠△)는 낙서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또 훈민정음이 28자로 만들어진 이유 역시 28수 천문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
우리나라의 천문 사상은 동서남북에 각각 7개의 별자리를 배치해 모두 28개의 별자리로 하늘을 상징한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433년 세종이 직접 28수 거리 및 도수 등을 일일이 측정해 천문학자
이순지에게 석판에 새기게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세종은 당시 혼천의·자격루·앙부일구 등 뛰어난
천문·계측기구를 만들었다. 그리고 정확히 10년 후 훈민정음을 완성했다.
반 소장은 “당시 중국의 책력·달력을 얻어다 쓰던 조선은 세종의 자주적 천문역법 제작으로 명실공히 주권국가로
발돋움했습니다. 이렇게 천문으로 ‘우리 하늘’을 찾은 세종이 그 다음 작업으로 천문으로 우리글을 창제한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고 말했다.
즉 세종은 명나라의 하늘에서 벗어나 ‘조선의 하늘’을 갖고자 했던 자주정신의 연장선상에서
‘조선의 문자’인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게 그의 해석이다.
그가 훈민정음이 천문의 원리라는 것을 깨달았을 당시 마치 도를 닦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개안(開眼) 같은
신비 체험도 했다고 한다.
“눈알에 덮여 있는 투명하면서도 하얀 막이 벗겨지는 듯한 현상이 찾아오더라고요. 그러고는 하늘의 별자리와
하도 및 낙서의 원리가 하나로 엮여져 입체적으로 보이는 거예요. 그리고 훈민정음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의 마음
이 읽혀지면서 한글이 철저히 28수 천문의 원리를 적용시켜 만든 글자임을 확연히 깨달았습니다. 저는 불교에서
말하는 견성(見性)이 바로 이런 체험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의 체험은 학문을 깊이 천착하다 보면 어느 순간 홀연히 모든 이치가 하나로 관통하면서 막힘이 없는
이통(理通)의 경지에 다다르는 것과 마찬가지. 그러나 그러기까지에는 집안의 희생이 있었다.
“제가 교사 생활하면서 받은 월급이 보름이 지나면 바닥이 나는 바람에 아내가 이웃들에게 생활비를 빌리는 일이
한두 해가 아니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어요. 1980년대 초반인가, 제 월급이 80만 원쯤 하던 시절입니다.
월급의 3분의 1을 제 공부하는 데 쓰다 보니 아내는 늘 생활비에 쪼들리고 아이들을 학원에 보낼 엄두도 못 냈다
는 거예요. 아내는 그런데도 한번도 월급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았어요. 결혼 선물로 받은 백금반지를 전당포에
맡겼다가 되찾아오는 일을 수도 없이 되풀이했다는 얘기를, 교사직을 은퇴할 즈음에 처음으로 듣고는 얼마나 미
안했던지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저는 집안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모르고 오로지 공부하는 데만 집중하느라
신나게 돈을 쓰고 돌아다녔던 거지요.”
아내의 희생 덕분으로 그는 2013년 그간의 천문학과 훈민정음 연구 결과를 논문(훈민정음 창제원리와 천문도와
의 상관성)으로 발표해 이 분야 최초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옛글자를 사용한 21개 외국어회화 표기 예’ ‘한글의 세계화 이대로 좋은가’ ‘한글 창제원리와 옛글자 살려
쓰기’ ‘씨아시말’ ‘쥐뿔이야기’ 등 한글 관련 저서를 꾸준히 펴냄으로써 한글의 우수성과 과학성을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한글이 훌륭하다는 걸 알면서도 의외로 훈민정음의 창제원리를 연구하는 학자가 적다는 점이 늘 아쉬워요.
경기도와 여주시가 여주 영릉에서 개최하는 한글날 기념식 때 훈민정음 서문을 옛 발음으로 낭독할 수 있는
이가 없어 할 수 없이 제가 수년째 낭독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도로명 주소는 정체불명의 안내판
그의 한글 사랑은 훈민정음 연구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는 한국땅이름학회 회장직도 맡고 있다.
순우리말 땅이름이 한자 이름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원래 지니고 있던 의미를 잃어버린 경우가 허다해
이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가 제시하는 몇 가지 사례. 전남 ‘목포(木浦)’라는 지명을 보자.
남쪽의 개펄이라는 뜻의 ‘남의 개’가 ‘나무개’로 변하고 그것이 나무 목(木)과 물가 포(浦)로
잘못 인지돼 오늘의 목포라는 지명이 됐다고 주장한다.
남이섬도 잘못 안 사례다. 이 역시 ‘남쪽의 섬’이라는 뜻인 ‘남의 섬’인데,
그것이 와전돼 ‘남이섬’이 돼버렸고, 엉뚱하게 남이장군의 가짜 무덤까지 만들게 됐다는 것이다.
남이 장군의 진짜 무덤은 경기 화성군에 있다.
또 여우고개는 산길이 넓지 않고 여윈(살찌지 않은) 길이 나 있는 고개라는 뜻의 ‘여윈고개’인데
여우고개로 둔갑했다.
몽촌토성의 ‘몽촌’은 어떨까. 원래는 큰 마을이라는 뜻의 ‘검마을’이었고,
이게 경음화 현상으로 ‘끔마을, 꿈마을’로 변했다. 그런데 ‘꿈’이라는 단어 때문에 한자음을 빌려
꿈 몽(夢), 마을 촌(村)으로 표기함으로써 오늘의 몽촌이 됐다.
원래의 우리말과 그 변천 과정을 아는 것은 우리 역사와 문화를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렇게 부지기수로 잘못 알려진 지명을 바로잡아야 우리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게
반 소장의 주장이다.
반 소장은 한국땅이름학회 회장 자격으로 2014년 7월부터 12월까지 6개월간 서울 종로의 종각 사거리에서 도로명에 동이름을 병기해야 한다는 길거리 서명 운동을 주도한 바 있다.
그 결과 현행 도로명 주소에 동명을 추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지역의 역사와 유래, 형세, 기후풍토, 지세 등이 종합적으로 반영된 것이 동네 이름입니다.
선비마을, 정승골, 비석골, 효자동, 삽다리, 양산다리, 너덜이, 놀뫼, 노루목, 구리골, 말죽거리, 마장동, 구파발,
역삼동, 역촌동, 비상리, 비하리, 무너미, 온정리, 초정리, 약수동, 옥수동 등은 그 마을의 유래와 용도를 정감 있
게 표현한 것입니다. 이런 지명에는 우리 역사와 문화가 들어 있어요.
그걸 행정 편의성을 이유로 ‘월가 몇 번지’하는 서구식 주소로 개편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현행의 도로명은 정체불명의 주소입니다. 오히려 우리 전통이 살아 숨쉬는 지명을 찾아내 적극적으로 사용해도
모자랄 판에 말입니다.”
그는 울분을 토해내듯 현행 도로명 주소의 문제점을 일일이 지적했다. 그의 한글과 우리 문화 사랑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옛날에 배운 한약 지식을 바탕으로 우리 토종의 홍화씨와 오이씨를 구해 20여 년 전에
구해 지금까지도 보존해오고 있을까.
“토종 홍화씨와 오이씨 등 우리 종자가 없어질까 봐 노심초사하면서 씨앗을 보관해오고 있어요.
저마저 이것을 갖고 있지 않으면 언제 멸종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는 상태예요.
진심으로 우리 토종 씨앗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는 나누어줄 생각도 있습니다.”
그는 기자와의 마지막 대화에서 ‘쥐뿔도 모르면서 아는 체 한다’는 얘기를 꺼냈다.
‘쥐뿔’은 ‘제 뿌리’라는 말로 제 뿌리도 모르는데 남의 일에 참견한다는 의미다.
비어로 알고 있는 ‘¤도 모르면서 까분다’는 말도 비슷하다고 했다. ‘¤’은 조상 조(祖)에서 유래한 것으로
역시 ‘조상도 모르면서 까분다’는 뜻이라고. 뿌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그의 말에 기자의 마음 한쪽이 뜨끔했다.
안영배 전문기자
훈민정음 창제와 천문도
1. 훈민정음 창제에 관한 이야기
한글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고 과학적인 문자라고 한다. 발성기관의 모양을 본떴기 때문에 과학적인 글자이며, 배우기가 쉬워서 우수한 글자라고 한다. 그러나 한글은 외국인에게 배우기 쉬운 글자가 아니다. 소리 나는 대로 적는 글자도 아니며, 포토그래픽의 측면에서 보면 변별력이 좋은 글자도 아니다. 글자의 공간 처리가 미흡하여 시각적으로도 아름다운 글자꼴만은 아니다. 한 예로 러시아 극동대학의 한국어학과 졸업생 탈락자가 절반에 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언어학자 에칼트 박사(P.Andre Eckardt) 는 그 나라의 문자로 그 민족의 문화를 측정하기로 한다면 한글이라는 문자를 사용하고 있는 한국 민족이야말로 단연코 세계 최고의 문화민족이라고 하였다. 프랑스의 동양학 연구소 파브르 교수는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뿐 아니라 이러한 일을 해낸 한국 사람의 의식구조를 한번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지구상에 발명자가 분명한 글자는 오직 한글뿐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세종이 과연 어떠한 이론을 창제의 바탕으로 삼았기에 세계의 석학들로부터 지구상에서 둘도 없는 가장 훌륭한 문자라고 찬사를 받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한글이 우리의 동양천문도에 이론적인 바탕을 두고 창제한, 자연에서 찾아낸 문자이기 때문이다
2. 훈민정음 창제의 주체
훈민정음 창제는 누가 했을까? 세종대왕과 집현전의 공동 연구인가 세종대왕의 연구 결과물인가. 세종 때 만든 해시계를 비롯한 30여종의 발명품에는 하나같이 그것을 제작한 실무자의 이름과 연유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훈민정음만 유일하게 실무자의 이름이 없이 세종 혼자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이 눈병이 나서 청주의 냉천으로 요양을 떠나면서도 훈민정음 자료를 한 보따리 챙겨 떠난 사실을 보더라도 얼마나 한글 창제에 몰두하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의 연구물이 아니고서는 가질 수 없는 애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 훈민정음 창제가 세종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바로 <세종실록> 103권과 <훈민정음 해례본> 61쪽의 정인지 서문에 ‘글자는 옛 전자를 모방했다(자방고전字倣古篆)’라는 문구 때문이다. 그동안 ‘고전’을 한자의 옛 서체나 범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필자는 여기에 나오는 ‘전문篆文’이나 ‘고전古篆’이나 최만리가 말한 ‘전자篆字’가 모두 단군 때의 ‘가림토’를 일컫는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토착吐着’이라는 문구 때문이다. 세종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 유사에 “세종이 방언이 문자와 서로 통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변음變音과 토착吐着을 여러 대군에게 풀어보게 하였으나 아무도 풀지 못하였다. 그래서 출가한 정의공주에게 보냈는데 곧 풀어 바쳤다. 이에 세종이 크게 기뻐하면서 칭찬하고 큰 상을 내렸다”라는 내용이 있다. 또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집현전학사들의 창제설도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신숙주가 귀양 와 있는 언어학자 황찬을 만나러 요동을 왕복한 것도 그 당시의 국제 공용어인 한자발음을 정확히 알기 위한 목적이었지 훈민정음을 창제하는데 자문을 구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신숙주가 황찬을 처음 만난 것은 훈민정음이 다 만들어진 세종 25년인 1443년 계해년 겨울(癸險)보다 1년 2개월 후인 1445년 1월 세종 27년이었기 때문이다. 또 신숙주가 집현전 학사로 들어온 시기가 그가 25세 때인 세종 23년(1441년)이었고 세종 25년(1443년) 2월에 27세의 나이로 일본 통신사 변효문의 서장관書狀官으로 곧 바로 8개월 동안 일본을 다녀오는 일 등으로 하여 그 시기에 훈민정음 제작에 참여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는 점이다.
성삼문도 훈민정음이 반포된 1446년 이후인 1447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 학사가 되었다. 따라서 신숙주는 세종의 명을 받아 이미 만들어진 한글로 언문 서적을 편찬하는 일에 참여했던 것일 뿐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전문지식은 없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것은 동국정운을 편찬할 때 세종이 일일이 신숙주의 번역 내용을 꼼꼼히 검토한 후 통과가 되어야 다음 내용을 번역할 수 있었던 것을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또 최만리가 그 당시 집현전의 두 번째 서열인 부제학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집현전학사들과 집단으로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린 것은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창제에 참여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같이 만들었다면 집현전의 부제학이라는 지위에 있던 사람이 뚱딴지 같이 상소를 올릴 이유가 없다. 또 성현의 용재총화에 “세종이 언문청을 설치하고 신숙주와 성삼문 등에게 명하여 언문을 만들게 하였다.”라는 내용도 또한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성현은 세종 21년에 태어난 사람으로 그가 4살 때 훈민정음이 창제되었기 때문에 창제과정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언문청도 훈민정음을 만든 후 글자를 백성들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지 훈민정음 창제를 위하여 만든 것이 아니었다.
세종 25년 이전까지의 어떤 기록에도 집현전 학사들의 협력을 얻었다는 기록이 없다. 최만리가 “언문이 조금도 이익 됨이 없는데 세자가 이 일에 정신을 쏟으면서 시간을 보내니 이는 시급히 닦아야 할 학문에 손해가 심하다.” 라고 불평한 내용이나 “그 일이 무엇이 그리 중요한 것이라고 정사는 행정부에 다 맡겨놓고 눈병이 나서 요양을 하러 떠나는 마당에 그곳까지 연구 자료를 챙겨간다는 말인가!”라고 한 기록으로 보아 아들 문종과 딸 정의공주 등을 조교로 삼아 세종 홀로 창제에 몰두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3.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에 반영한 동양 철학은 무엇인가
우리의 하늘지도인 천문도는 돌에 새긴 별지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 외에 <28수 천문도>가 있다. 그것은 천구天球를 동, 서, 남, 북, 4방으로 나누고 각각 7별자리씩 모두 28별자리를 배당하고 거기에 천간과 지지를 배치한 천문도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종이 천문 관측 및 연구에 몰두했다는 여러 기록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중에서 중요한 몇 가지만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세종15년(1433년)에는 자신이 직접 28수의 거리와 도수, 12궁에 드나드는 별의 도수를 일일이 측후하여 이순지에게 명하여 그것을 석판에 새기게 하고 천문 역법에 대한 책을 편찬케 하였다.
세종실록 15년조에 의하면 정초, 박연, 김진 등이 새로 만든 혼천의를 바쳤다. 세자(문종)가 간의대에 나아가 정초, 이천, 정인지, 김빈 등과 함께 간의와 혼천의 제도를 강문하였다. 김빈과 내시 최습에게 명하여 간의대에서 숙직하면서 해와 달과 별들을 관찰하여 그 문제점을 파악하게 하였다. 당시 숙직 때문에 고생하는 김빈에게는 옷까지 하사하였다.
세종16년(1434년)에는 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높이 31자(6.3m), 길이 47자(9.1m), 너비 32자(6.6m)의 돌로 쌓은 관측대를 만들었다. 또 그곳에 1년 만에 간의를 준공하였다. 이 간의대에는 혼천의, 혼상, 규표와 방위 지정표인 정방안 등이 설치되었다. 간의대 서쪽에 설치된 거대한 규표는 동표의 높이가 40자(8.3m)였다. 청석으로 만든 규의 표면에는 장, 척, 촌, 푼의 눈금을 매겨 한낮에 동표의 그림자 길이를 측정하여 24절기를 확정하는 데 사용하였다. 앙부일구를 처음으로 혜정교와 종묘앞에 설치하였다. 이것은 원나라 사람 곽수경이 세운 관성대觀星臺 이후 동양에서 가장 큰 간의대였다. 대 간의대는 하늘을 원으로 하여 365도 1/4의 눈금이 새겨진 적도환이 있었다. 그 안쪽에 12시 100각의 눈금이 새겨진 백각환이 있고 중심에 사유환이 있어 천체의 변화 위치를 관측하였다. 이 간의대는 세종 20년(1438년)부터 서운관書雲觀이 주관하여 매일 밤 5명의 관리가 교대로 관측에 임하게 하여 실질적인 기능을 다하였다.
그리고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던 서운관은 세종때 관상감觀象監으로 개편하였다. “관상감은 천문, 지리, 역수曆數에 관한 업무를 맡아본 관아로써 측우기, 물시계, 해시계의 발명도 여기서 이루어졌다.” 천문과 과학의 중요성을 인식한 세종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관상감의 관원을 30여명에서 80여명으로 확대하였다.” 당시 명나라 천문 기관인 흠전감欽典監의 인원이 11명이었던 점을 보면 세종이 얼마나 천문에 심혈을 쏟았는지 알 수 있다.
또 세종 16년(1434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세종20년(1438년)에 준공된 흠경각欽敬閣은 경복궁 강녕전 곁에 있었다. 12지신상을 만들어 때마다 시각을 알렸다. 세종 19년에는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라는 관측기를 완성하여 사용하였다. “평양에 있었던 고구려 석각 천문도가 전란중에 대동강에 빠뜨려 잃어버리고 없었는데 태조 등극 초기에 그 탁본을 바친 자가 있어서 전하께서 보물처럼 중하게 받았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태조 때부터 천문도제작에 커다란 관심을 가졌음을 볼 수 있다.
세종이 신하들의 극심한 반대를 물리치고 장영실을 중용하여 ‘혼천의’ ‘관천대’ ‘일성정시의’ 등 여러 가지 새로운 천문기기를 제작하게 한 것은 천문연구에 심혈을 기울였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이러한 천문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심으로 미루어 볼 때 훈민정음 창제원리와 천문 이론이 서로 연관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할 것이다. “훈민정음 지으심이 꾀와 재주로 한 것이 아니라 그 소리에 맞게 그 이치를 다하였을 뿐이다. 그 이치가 둘이 아니니 어찌 천지귀신과 그 쓰임을 다하지 않겠는가!”라고 한 내용에서 ‘천지귀신’이라는 말은 ’자연’ 또는 ‘천문’의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전통 문화와 영혼관은 천문을 떠나서 이야기할 수 없다. 궁궐의 건물 이름도 천문과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창덕궁 내의 정자와 전각의 이름도 28수의 이름을 따랐다. 돌아가신 선대왕들의 어진御眞을 모신 건물을 선원전璿源殿이라고 하고 왕실의 족보를 선원록璿源錄이라고 하는데, 선원璿源은 우리 민족의 별자리인 북극성을 뜻한다. 고구려 백제 등의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사신도四神圖도 28수천문도와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 우리 민족은 죽음이 곧 영혼의 본 고향인 우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망자亡者를 죽음을 관장하는 별인 북두칠성을 새긴 판에 뉘여 묻었으며, 무덤 내부의 천정을 우주로 보고 별자리로 장식하였다. 이는 전국의 고인돌 덮개에 북두칠성을 비롯한 28별자리가 발견되는 것을 보아도 선사시대부터 내려오는 우리민족의 전통문화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추분, 동지 ,춘분. 하지 등 우주변화의 원리에 이론적인 바탕을 두고 창제하였기 때문에 한글이 모두 28자가 된 것이다. 세종실록 12년 10월 23일조의 기록에 의하면 정인지가 부제학으로 있던 시절, <계몽산啓蒙算>이란 수학책으로 곱셈, 나눗셈, 분수, 원주율, 제곱근 등의 계산법을 공부하고 있는 세종을 만날 수 있다. 수학은 천문학과 과학의 기본이다. 세종이 문자 창제를 함에 있어서 수와 방위를 중요시하는 천문 이론에 바탕을 둔 것도 문자가 단순히 언어를 표현하는 도구로만 보지 않고 천문과 우주 변화의 작용까지 읽을 수 있는 도구로도 사용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
4. 동양 철학까지 수용한 한글
이 글은 기존의 훈민정음이 발음기관을 기초로 만든 과학적인 측면 외에 동양 철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설명해보았다. 특히 훈민정음이 모두 28자로 만들어진 이유는 동양천문도인 <28수 천문도>에 이론 적인 바탕을 두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천문 사상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7개의 별자리가 있고 28개의 별자리는 하늘을 의미한다. 세종대왕은 명나라의 하늘에서 벗어나 ‘조선의 하늘’을 가지고자 했던 자주정신 정립의 연장선상에서 ‘조선의 문자’인 훈민정음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쓰는 한글에는 하늘의 이치(천문)와 사람의 이치(천지인)가 그대로 녹아있다.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필자소개/반재원 소장
중앙대 사회개발 대학원을 졸업하고 훈민정음 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과학적인 훈민정음의 창제원리를 연구하여 소실된 4자의 재사용을 통해 세계적인 공용문자로써의 한글보급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글창제원리와 옛글자 살려쓰기’ 등의 저서가 있다.
전자신문 반재원 입력 2015.06.19. 11:24 수정 2015.06.19.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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