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제원 이야기>>
◇ 홍제천의 지명 유래와 지리적 위치
ㅁ 홍제천의 원래 이름은 홍제원천(弘濟院川) 이라고 한다.
ㅁ 홍제원의 설립과 규모
홍제원은 '널리 구제한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고려 성종 4년 정현 이라는 승려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원(院) 제도는 고려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주로 승려들이 원을 맡아 보며, 해가 저물면 길손
들을 묵어가게 하고, 병이 나면 약을 베풀기도 하였다.
ㅁ 홍제원터 표석
여기서 약 50m 골목안 홍제동 138번지 일원은 홍제원(1394-1895) 터
홍제역 2번 출구 새마을금고 앞 인도변에 세워져 있다. (1987년)
ㅁ 홍제원의 모습
홍제원은 일반인이 이용하던 민영 숙박소였으며, 조선시대 한양에는 흥인문 밖의 보재원, 서대문
밖의 홍제원, 숭례문 밖 남산 기슭에 이태원, 광희문 밖의 전관원과 함께 궁궐에서 공용 여행자들
이 이용하게 되었다.
홍제원은 밭 2결(結) - 1결 5정보, 약 15천평, 2결 약 3만평 규모, 50부(負) - 말 50필을 소속시켜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였다.
조선왕조 실록에 나타나는 홍제원은 명나라 혹은 청나라와 관련된 사신의 영접과 전송, 함경도와
평안도 등에서 돌아오는 신하의 영접과 관련된 기록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홍제원이 언제 사라졌는지 사료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병자호란 중에 사라진 것으로 보이며, 1648
년 청나라의 칙사의 요청에 의해 홍제원에 참(站, 驛) 을 설치하고 홍제원을 다시 인경궁(경희궁)
의 아문 한곳에 옮겨져 다시 지었는데 고종때까지 유지되었지만 청일전쟁 이후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ㅁ 홍제원의 인절미 이야기
조선시대에 중국으로 가는 사신은 1년에 대여섯번 정도 되는데 사신 일행은 대개 수백 명으로
수석과 계곡이 좋은 홍제원에서 쉬게 되며, 상사, 부사, 서장관, 비장, 역관이 자리 잡은 차일(遮日)
아래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지고, 기생의 노래와 풍악소리가 요란한 환송연이 벌어지는데, 교군
이나, 마부, 군졸 등 하속들은 환송나온 가족이나 친지들과 술잔이나 나누며 씁슬하게 쉴 수 밖에
없었다.
세종 때 사신을 수행하던 하속 하나가 술이 잔뜩 취해 차일을 바라보며, "이런 제기랄 것, 벼슬
아치도 사람이요. 우리들도 사람인데 멀고 먼 수천리 길를 가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그런데,
벼슬아치 자리에는 기생까지 앉아 고운 노래도 듣지만, 우리 상놈들은 그런 노래 한 마디 듣지
못하고 간신히 막걸리 몇 잔으로 위로를 하니 차라리 죽어야지" 하고 떠들었는데, 그때 사신
환송을 마치고 돌아가던 정승이 이 광경을 목격하고 세종에게 "전하, 신이 보옵건데 홍제원에
노래하는 여자를 배치하여 사신을 수행하는 하속들도 위안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진언하자 세종도 그 말이 옳다고 생각되어 곧 한성부에 영을 내려 홍제원에 색주가(色酒家)를
두도록 하였는데, 그 뒤로 도성안에도 홍제원 색주가를 본 뜬 색주가들이 생겨났다고 한다.
한편, 홍제원에는 술을 마시지 못하는 행인을 대상으로 떡을 파는 집도 생겨났는데, 그 중에서도
인절미를 잘 만들어 '홍제원 인절미'가 특히 유명하였으며, 이로 인해 홍제원 주민들은 대개가
술집 아니면 떡집으로 생계를 삼았다.
ㅁ 홍제원의 술집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