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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 가경자 최양업 사제의 발자취
(탄생 200주년 기념)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 두 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성지순례 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 기도
거룩하신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순교자들을 통하여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려 주시고
특별히 김대건 안드레아를 부르시어
머나먼 타국에서 사제로 축성하시고
마침내 순교의 영광을 주셨으니 감사하나이다.
진리의 근원이신 하느님,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처럼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굳게 믿으며
고통 속에서도 십자가의 길을 따랐던 순교의 삶을 본받아
저희가 어떠한 현세적인 어려움과 고통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주님을 증언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희망의 근원이신 하느님,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가 고대하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며
세상의 유혹을 거슬러 용기를 내고 자비의 삶을 살아
저희가 다른 이들과 화해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도와주며
희년의 기쁨을 살게 하소서.
사랑의 근원이신 하느님,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를 이 땅의 첫 사제로 불러 주셨듯이
훌륭한 사제와 수도자가 많이 나게 하시어
이 땅의 복음화와 세계 선교를 위하여 열정을 다하게 하시고
저희도 복음을 전하는 사랑의 일꾼으로 기쁘게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주교회의 상임위원회 승인]
이 순례는 두 분사제의 탄생지로부터 순교지까지
국내, 외 관련 성지와 사적지를 돌아보는 성지순례 코스로
관련 자료를 모아 편집한 순례 안내서입니다.
자료편집: 성지순례 후원회
성지순례후원회 ❙ http://cafe.daum.net/holyplacek
목 차
■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
제1편 김대건. 최양업 가문과 성장기
1.김대건신부 약전
가.이존창 루도비꼬
나.김대건 신부 가문과 순교사
1)신유박해: 김진후, 김종한
2)기해박해: 김제준, 김데레사, 손연욱
3)병오박해: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4)병인박해: 김재한
2. 최양업 신부 약전
가. 최양업 아버지 성, 최경환
나. 최양업 어머니 복자 이성례 마리아
다. 최양업 네 동생 이야기
3. 제1편 관련 성지
가. 여사울 성지(이존창)
나. 솔뫼성지
다. 해미읍성
라. 한덕골
마. 골배마실
바. 다락골
사. 담배골(수리산)
아. 포도청
자. 당고개 성지
제2편 신학생 선발과 유학 길
1. 한국최초의 신학생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2. 유학길 새로 밝히다.
3. 유학길 관련 성지
가. 만주 변문
나. 만주 마가자
다. 북경 서만자
라. 만리장성 장가구 관문
마. 마카오 신학교 터
바. 마카오 김대건 동상(카모에스공원내)
사. 마카오 바오로 성당 터
아. 마카오 안토니오 성당
자. 필리핀 마닐라 도미니꼬 수도회 터
차. 필리핀 롤롬보이 성 김대건 성지
제3편 선교사 입국로 개척
1. 선교사 입국로 탐색 일정
2. 선교사 입국로 탐색 관련자료
3. 선교사 입국로 탐색 관련성지
가. 만주 차쿠성당
나. 만주 백가점
다. 만주 태장하
라. 만주 양관성당
마. 만주 압록강(의주-변문)
바. 만주 소팔가자 성당
사. 새만금 신시도(고군산도)
제4편 사제서품과 귀국 길
1. 사제서품과 귀국관련 자료
2. 사제서품과 귀국관련 성지
가. 상해 김가항 성당
나. 상해 만당(횡당)성당
다. 상해 서가회 성당
라. 상해 장가루 성당
마. 제주 표착지(용수성지)
바. 황산벌(나바위성당)
제5편 사제 활동
1. 사제활동 관련자료
2. 사제활동 관련 성지
가. 배티성지
나. 도앙골 성지
다. 죽림굴(대재공소)
라. 손골성지
마. 은이성지
제6편 순교 및 유해 안장
1. 순교 관련 자료
2. 성 김대건사제 유해 안장 경로
3. 순교 관련 성지
가. 새남터 성지
나. 왜고개 성지
다. 미리내 성지
라. 진안리 성지
마. 배론 성지
관련 성지 합 42곳 (국내 22곳 , 해외 20곳.)
■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
김대건 신부는 '피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는 '땀의 순교자'로 대별 되어 불린다.
김대건 신부는 25세의 젊은 나이로 사목생활 1년 만에 순교했으나, 최양업 신부는 12년간 7000리 길을 걸어 다니며 사목활동을 하다 과로로 쓰러졌다.
김대건(8월21일)과 최양업(3월1일)은 1821년생 동갑이다.
그러므로 2021년이 되는 내년이면 두 분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진외 6촌간이다. 김대건의 증조모 이멜라니아는 '내포의 사도'이존창의 딸이고, 최양업의 어머니 이성례(마리아)는 이존창의 손녀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16살 되던 해인 1836년, 파리외방전교회 모방 신부에 의해 비슷한 시기에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두 사람은 마카오 유학 시절에 교수 신부들로부터 늘 비교 대상이 되었다. 교수 신부들의 기록에 따르면 김대건은 병약 했지만 활동성이 강했다.
반면 최양업은 내성적이었으나 학구적이고, 판단력이 뛰어났다.
페레올 주교는 1844년말 조선 입국을 계획하면서 이미 조선의 서북방과 동북방 입국로 개척 경험이 있는 김대건을 조선 입국의 동반자로 결정했다. 이로 인해 김대건을 먼저 사제품에 올릴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김대건은 1845년 8월17일 중국 상해 금가항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고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된다. 이때 최양업 부제는 소팔가자에서 신학공부를 계속하고 있었다. 최양업 부제는 1846년 두차례에 걸쳐 변문를 통해 조선 입국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김 신부보다 4년 늦은 1849년 4월15일 중국 상해 서가회성당에서 한국인 두번째 신부로 서품된 최양업 신부는 그해 12월 변문을 통해 고국땅을 밟는데 성공했다. 조선 입국로를 개척한 지 7년6개월 만의 일이다. 그후 최 신부는 과로로 쓰러지기까지 12년간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파했다. 그래서 '땀의 순교자', 라고 불리는 것이다.
김대건 신부는 짧은 생애 동안 25편의 서한과 일종의 행정지도인 '조선전도'를 남겼다.
또한 최양업 신부는 19통의 라틴어 서한을 남겼고, '성교요리문답', '천주성교공과' 등 2편의 교리서와 '사향가', '사심판가', '공심판가' 등 다수의 천주가사를 저술했다.
이처럼 김대건과 최양업 신부는 '피'와 '땀'의 순교자라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 한국교회를 지탱하는 두 기둥이 되었다.
자료참조: [평화신문, 2000년 6월 25일 제583호, 리길재 기자]
제1편 : 김대건 최양업 가문과 성장기
1. 성, 김대건 신부 약전
김대건(1821~1846). 최초의 한국인 신부. 순교자. 성인(聖人).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안드레아. 아명(兒名)은 재복(再福), 보명(譜名)은 지식(芝植), 대건은 관명(冠名)인 듯. 본관은 김해(金海).
생애 : 김대건은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현 忠南 唐津郡 牛江面 松山理)에서 천주교 신자 김제준(金濟俊)과 고 우르술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집안은 부유하고 지체 높은 양반 집안이었으나 천주교로 말미암아 전락하였다. 그러나 모범적 신앙생활과 순교자들을 배출함으로써 한국 교회사에서 유명한 집안이 되었다.
이 집안과 천주교와의 관계는 김대건의 증조부인 김진후(金震厚)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한국 천주교가 탄생한 지 얼마 안 되어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이래 그는 1791년의 박해 때부터 체포되어 관가에서 신앙을 고백했고, 1801년에는 유배되었으며 1805년 해미(海美)에서 다시 잡혀 10년 동안의 감옥살이 끝에 1814년 옥사 순교하였다.
끊임없는 박해로 말미암아 자연 이 집안은 많은 가족이 한데 모여 살기가 어렵게 된 것 같고 그래서 김진후의 셋째 아들 김종한(金宗漢)은 어느새 솔뫼 고향을 버리고 안동(安東)으로 피신해 살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1815년 을해박해(乙亥迫害) 때 잡혀 대구(大邱) 감영으로 이송되어 거기서 이듬해 참수(斬首) 순교하였다.
그 후 김진후의 둘째 아들, 즉 김대건의 조부, 김택현(金澤鉉)도 박해 때문에 솔뫼를 떠나게 되었는데, 그 때가 1827년의 정해박해(丁亥迫害)였던 것 같다. 김택현은 서울의 청파(靑坡)를 거쳐 용인(龍仁) 땅 골배마실[寒德洞]에 정착하였다. 그 때 김대건의 나이 7세였는데, 그는 여기서 그의 나이와 그의 신분에 적합한 한문 공부를 했을 것이 틀림없다.
김대건의 부친 김제준은 1836년 초에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가 입국하자 곧 서울의 정하상(丁夏祥) 집에 거처하던 모방 신부를 방문하고 그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모방 신부는 서울에서 부활절(4월 5일)을 지내고는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 공소순방에 나섰는데, 그는 먼저 용인지방의 골배마실에 이웃한 ‘은이’ 공소에 들러 아주 열심하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소년 김대건을 보고 총명한 그를 대견스럽게 여겨 신학생으로 간택하였다. 이 때 김대건이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김대건은 곧(7월 11일) 서울로 올라와 이미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던 같은 또래의 최양업(崔良業), 최방제(崔方濟)와 함께 한문과 라틴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박해 때문에 이들은 국내에서 성직자로 교육시킬 수 없다고 판단한 모방 신부는 연말의 동지사편을 이용하여 우선 그들을 마카오의 파리 외방전교회 경리부로 보내기로 하였다. 그런데 세 소년 중 김대건만은 수련기간이 짧아 처음에 같이 보내기를 주저했으나 다시 그런 기회가 없을 것 같아 결국 함께 보내게 되었다.
세 소년은 출발에 앞서 모방 신부 앞에서 성경에 손을 얹고 장차 조선 포교지의 장상과 신학교 교장에게 절대 순종할 것을 엄숙히 선서한 다음 이튿날, 즉 12월 3일 예정대로 서울을 떠났다.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 정하상(丁夏祥), 조신철(趙信喆) 등 약 10명이 동행하게 되었는데, 유 신부는 조선 포교가 어렵게 되어 중국으로 돌아가는 길이었고, 정하상 등은 세 소년을 국경까지 인도하는 동시에 새 선교사를 영입(迎入)하게 되어 있었다.
일행은 12월 28일 변문(邊門)에 도착해 대기 중인 조선 선교사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신부를 만났다. 세 소년은 샤스탕 신부를 조선 국경까지 안내한 중국인 안내원들을 따라 요동(遼東)과 만주를 거쳐 중국대륙을 횡단한 끝에 1837년 6월 7일 목적지인 마카오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마카오 주재 파리 외방전교회 경리부장 르그레즈와(Legregois) 신부는 당시 페낭 신학교[파리 외방전교회 경영의 동양인 성직자양성소]의 중국인 학생들의 정신이 좋지 못해 조선인 신학생들을 거기로 보내지 않기로 하는 한편 새로 임명된 조선교구장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그들을 경리부에서 맡아 교육하기로 하였다.
처음에 칼르리(Callery)[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어 입국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부가 조선 신학생들의 교육을 담당했으나 곧 르그레즈와 신부가 대신하게 되었다. 그는 신학교장인 동시에 교사, 사감, 의사 등의 역할까지 하였다. 칼르리 신부는 조선 신학생들에게 성가를 통해 발성법까지, 르그레즈와 신부는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이들이 교리와 라틴어에서 보인 성적은 매우 만족스러운 것이어서 그들에게 많은 희망을 갖게 하였다.
칼르리 신부는 한때 만주에 조선신학교를 세울 계획도 가졌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김대건 등은 마카오에 도착한지 2개월 만인 8월에 마카오에서 일어난 민란(民亂) 때문에 잠시 마닐라로 피신해야만 하였다. 또 1년 후(1838. 11. 27)에는 최방제와 사별(死別)해야 하였다.
칼르리와 르그레즈와 신부만이 아니라 경리부 차장 리브와(Libois) 신부, 데플레시(Desfleches) 신부 등도 조선 신학생의 교육을 도왔다. 데플레시 신부는 중국 사천교구(四川敎區) 선교사로서 마카오에서 입국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그 후 사천주교).
1839년 아편 거래로 인해 광동(廣東)과 마카오에 다시 민란이 일어나 4월 초 김대건과 최양업은 또 마닐라로 피신해야 하였다. 칼르리, 데플레슈 신부들이 그들을 동행하였다. 그들은 4월 한 달을 마닐라의 도미니코회 수도원에서 지내고 5월초부터는 마닐라에서 30리 떨어진 롤롬베이(Lolombey)의 수도원 농장으로 가서 그 해 11월 마닐라로 돌아올 때까지 그 곳에 머물렀다.
이곳은 경치도 아름답고 거처도 넓고 편하였다. 데플레슈 신부로부터 매일 강의를 들었고 또 자주 외출하면서 식견을 넓혔다. 8월에는 뜻밖에 고국으로부터 소식도 받았다. 모두가 건강했으나 김대건만은 복통, 두통, 신장병 등을 앓았다.
11월 마카오의 상태가 좀 진정되자 그들은 마카오로 돌아왔다. 데플레슈 신부가 곧 임지로 떠났으나 1840년부터 메스트르(Maistre)와 베르뇌(Berneux) 신부가 김대건과 최양업의 교육을 도왔다. 이들은 이해 9월에 마카오에 도착했는데, 메스트르 신부는 임지의 결정을 기다리면서 경리부의 일과 조선 신학생의 교육을 도왔고, 베르뇌 신부는 임지인 통킹으로 떠날 기회를 기다리면서 약 100일 동안 김대건과 최양업에게 철학을 가르쳤다.
그러는 동안 1842년을 맞았다. 이 해에 김대건과 최양업은 뜻밖에 신학공부를 중단하고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때는 아편전쟁이 끝날 무렵이었다. 차제에 프랑스 정부는 중국에서 이권(利權)을 얻어 보려는 목적에서 중국에 외교사절을 파견하는 동시에 2척의 군함으로 하여금 중국 해안에서 시위하게 했는데, 하나는 세실(Cecille)이 지휘하는 에리곤(Erigone)호였고, 하나는 파즈(Page)가 지휘하는 파보리트(Favorite)호였다. 세실 함장은 차제에 조선과 통상 조약을 추진시킬 계획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마카오 경리부 책임자 리브와 신부를(그 동안 르그레즈와 신부는 파리로 전임되었다) 방문하고 그의 조선원정을 위해 조선 신학생 한 명을 통역으로 동행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리브와 신부는 세실의 계획이 평화적일 뿐더러 이것이 몇 년째 두절된 조선 교회와의 연락을 재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판단하고 세실의 청을 기꺼이 받아들일 뿐더러 조선인 신학생과 세실 함장 사이의 통역을 돕기 위해 메스트르 신부까지 동행하게 하였다
.
메스트르 신부는 김대건을 택하였다. 그는 군함에서의 생활조건이 병약한 김대건의 건강 회복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김대건은 자주 앓았고 군함에 탑승할 당시도 독감을 앓고 있었다.
김대건은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2월 15일 마카오를 출항하였다. 에리곤호는 마닐라, 대만을 거쳐 주산(舟山)에서 2개월쯤 체류한 후 다시 북상, 6월 27일 오송구(吳淞口)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조선으로 떠나기를 기대했으나 상황의 변화로 그 희망은 사라졌다. 남경의 함락과 더불어 청국이 영국 측에 강화를 제의함에 따라 남경에서 강화조약이 체결되기에 이르렀다.
세실은 남경으로 가려했으므로 김대건은 통역관의 자격으로 그를 동행하였다. 8월 29일 남경조약에 참석하고 오송구로 돌아오니 최양업과 만주교구 선교사 브뤼니에르(de Bruniere) 신부가 탑승한 파브리트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김대건은 최양업을 만나게 되니 무척 기뻤다. 그러나 그의 기쁨은 곧 슬픔으로 변하였다. 왜냐하면 조선으로 가는 일이 더욱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최양업 일행은 하선했으나 김대건 일행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에리곤호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세실은 환자가 많고 또 조선으로 갈 시간의 여유가 없다고 하며 마닐라로 돌아갈 것을 선언하였다. 그래서 김대건 일행도 9월 11일 에리곤호를 하직하고 강남교구장 베지(Besi) 주교관으로 가서 최양업 일행과 합류하였다. 베지 주교의 알선으로 이제 그들은 중국배를 타고 다시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김대건 일행은 10월 2일 상해를 떠났다. 도중 역풍을 만나 곤욕을 겪기는 했으나 10월 22일 태장하(太莊河) 부근 요동땅에 이르렀다. 최양업이 먼저 내렸고 김대건은 선교사들과 같이 밤에 상륙할 계획이었으나 대낮에 상륙하게 되었다.
이 때 세관에서 30명 가량의 사람들이 몰려와 신부들을 포위하고 여러 가지로 질문하였다. 김대건은 재치와 열변으로써 그들을 쫓아버렸다. 일행은 우선 두(杜) 회장 집에 유숙하였다.
그러나 그 지방 교우들이 신부들을 유숙시키기를 거절하므로 최양업 일행은 양관(陽關)으로 가고,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는 백가점(白家店)에 머무르면서 입국을 시도하게 되었다. 김대건은 입국의 기회를 기다리면서 메일 메스트르 신부로부터 신학 강의를 들었다.
11월 7일 변문을 다녀온 중국인 보행꾼이 조선에 박해가 있었을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는 입국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만주교구장 베롤(Verrolles) 주교는 그들의 결심이 무모하고 위험하다고 하여 반대하였다. 이에 메스트르 신부는 김대건의 위험을 덜어 주고자 입국을 단념하였다. 그러나 김대건은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성모의 도우심에 절대적 신뢰심을 갖고 입국의 모험을 감행하기로 하였다.
김대건은 가난한 나무꾼으로 변장하고 12월 23일 변문으로 떠났다. 변문에 이르러 다행히 북경으로 들어가는 사신 일행 중에서 김 방지거를 만날 수 있었고 그로부터 비로소 조선 교회에 대한 확실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기해년(1839년)의 박해로 선교사들이 모두 순교했을 뿐더러 김대건의 부친과 최양업의 부모를 위시하여 200여명의 교우들이 순교했다는 것이다. 김대건은 김 방지거와 작별하고 단독으로 입국을 시도하였다. 그는 국경선을 넘어 의주를 통과할 수 있었으나 위험을 느끼고 발길을 돌렸다. 도중에 눈 위에 쓰러져 동사할 뻔했으나 기적처럼 살아남아 백가점으로 돌아왔다
(1843. 1. 6).
김대건은 1843년 음력 3월에 다시 변문으로 가서 북경에서 돌아오는 김 방지거를 만나고 팔가자(八家子)로 갔다. 음력 9월에 김대건은 세 번째로 변문으로 가서 김 방지거를 만나고 동북국경쪽 입국방법을 의논하고 팔가자로 돌아왔다.
이어 12월 31일 양관으로 가서 페레올(Ferreol, 高) 주교의 성성식에 참석하고 주교와 같이 봉천(奉天)으로 가서 이듬해 1월 24일 김 방지거를 만났다.
김 방지거는 당장은 선교사의 입국이 어렵고 1845년 초에나 가능할지 모른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으로 하여금 동북국경을 통한 입국방법을 시도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김대건은 2월 4일 팔가자를 출발, 3월 8일 훈춘(琿春)에 도착, 두만강을 건너 개시(開市) 기간을 이용하여 경원(慶源)에서 조선 교회의 밀사들과 만났다. 그러나 동북국경을 통한 입국이 의주길보다 더 어렵다고 판단하고 팔가자로 돌아왔다
(4월).
약 2개월 동안 그는 2,000리 길을 걸었다. 육지와 바다에서 겪은 그의 여행은 병약하던 그의 체질을 발달시키는 동시에 그의 기력과 타고난 대담성을 더욱 원숙하게 해주었다. 팔가자로 돌아온 김대건은 최양업과 같이 이 해에 소정의 신학과정을 끝내고 연말에 삭발례로부터 부제품까지 받았다(12. 15 이전) 연령 미달(법정 연령 만 24세)로 사제품까지는 받지 못하였다.
12월 말 김대건은 주교와 같이 김 방지거를 만나기 위해 팔가자를 출발, 이듬해 1월 1일 변문에서 김 방지거를 위시한 조선 교회의 밀사들과 접촉하였다. 그러나 선교사의 입국은 불가능하다고 하므로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부제만을 입국시키기로 하고 김 부제에게 해로로 상해에 오도록 지시한 후 자신은 마카오로 가서 김 부제의 소식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한편 김 부제는 타고난 기지와 대담성으로 온갖 위험을 극복하고 국경선을 넘는 데 성공,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데다 중병까지 앓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학생을 뽑아 교육하고, 조선지도를 작성하고, 순교자에 관한 자료를 수집했고, 무엇보다도 상해길을 준비하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하였다.
마침내 준비를 완료한 김대건 부제는 4월 30일 11명의 사공과 같이 작은 배, 즉 라파엘호에 탑승, 상해를 향해 제물포를 떠났다. 두 번의 풍파와 해적을 만나는 등 1개월여의 모험 끝에 오송구를 거쳐 6월 4일 상해에 도착하는 데 성공하였다. 김 부제는 곧 그의 도착을 페레올 주교에게 알렸고 이어 페레올 주교는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와 함께 상해로 왔다.
페레올 주교는 출발에 앞서 8월 17일 상해 부근 김가항(金家巷)에서 김대건 부제에게 사제서품을 주었다.
이로써 김대건은 한국인 최초의 사제가 되었다. 일주일 후 김 신부는 만당(萬堂) 신학교 성당에서 다블뤼 신부의 보좌를 받으며 첫 미사를 올렸다.
신품성사의 은총과 미사성제의 봉헌으로 더욱 큰 힘과 용기를 얻게 된 김 신부는 그의 라파엘호에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를 태우고 8월 31일 상해를 출항함으로써 귀국길에 올랐다.
이번에도 제주도에 표착하는 등 큰 위험이 없지 않았으나 40여일 동안의 모험 끝에 10월 12일 강경(江景) 부근 황산포(黃山浦)에 상륙할 수 있었다.
김 신부는 곧 서울로 올라와 서울과 그 인근, 특히 용인지방을 중심으로 교우들을 방문하고 성사를 집전하였다. 그의 깊은 신앙과 신심, 놀라울 만치 유창한 말씨는 단번에 신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얻었다.
이 때 김 신부는 10년 만에 처음으로 어머니를 만났고 또 어머니 곁에서 부활절(4. 12)을 지내고 다음날 서울로 올라왔다.
이어 김 신부는 주교의 지시로 선교사 영입을 위한 새 통로의 개척에 나서게 되었다. 그는 중국어선과 연락을 취하고자 5월 14일 7명의 사공을 거느리고 마포를 출범하였다. 연평도를 거쳐 백령도에 이르러 청국어선과 접촉, 편지와 지도를 탁송(託送)하고 순위도(巡威島)로 돌아왔을 때 뜻밖에 6월 5일 그 곳 관헌에게 체포되었다.
등산진영(登山鎭營)에서의 취조에 이어 5일 후 해주 감영으로 이송되어 4차의 문초를 받았다. 중국어선에 탁송했던 편지와 지도의 압수와 더불어 사건이 심각해짐에 따라 김 신부는 서울로 압송되어 포청에 갇히게 되었다(6. 21).
그 다음날부터 그는 좌우포청에서 7월 19일까지 무려 40차의 신문을 받았다. 7월 20일 김 신부는 르그레즈와와 리브와 등 선생신부들에게 하직 편지를 썼다.
김 신부는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정부의 요청으로 세계지도 2매를 영어에서 번역 작성했고 또 지리개설서를 편술하였다. 그러는 동안 세실이 기해년에 3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살해한 책임을 조선정부에 묻기 위해 서해안에 나타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8. 20).
정부는 김 신부를 전권대사로 파견하기로 결정했었고 그래서인지 김 신부 자신도 미구에 석방되리라는 일루의 희망을 가졌었다.
뿐더러 일부 정부의 고관들도 김 신부의 박학한 지식과 고결한 인격에 감동되어 그의 구명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세실이 프랑스 선교사를 학살한 책임을 묻는 서한을 조정에 보내고 또 서해안에서 물러감에 따라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김 신부의 사형이 앞당겨지게 되었다.
김 신부도 순교를 각오하고 페레올 주교와(8. 29) 교우들에게 하직편지를 썼다. 9월 15일 연석(筵席)에서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은 김대건이 외국인과 교섭했다는 죄목으로 그에게 역률(逆律)을 적용할 것을 주장하였고 다른 대신들도 이에 동조함에 따라 김대건에게 군문효수의 형이 내렸다.
이에 따라 김 신부는 그날로 또는 그 다음날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김 신부의 시체는 40일 후 새남터에서 미리내로 안장되었고, 1901년 용산신학교로 이장되었으며, 1951년 혜화동 대신학교 성당으로 이장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1857년에 가경자, 1925년에 복자가 되었고, 1984년 한국 교회 창설 200주년을 계기로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다른 한국 순교자 102명과 함께 시성됨으로써 성인위에 올랐다.
또한 김 신부는 한국 교회의 모든 성직자의 주보이다(1949년 이래).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애국선열동상건립위원회’에 의해 1972년 5월 14일 절두산 성당광장에 건립되었다.
자료 참조: [가톨릭대사전]
가. 이존창 루도비코(내포의사도)
충청도 아산지방으로부터 태안반도에 이르는 일대의 평야를 내포(內浦)지방이라 한다.
이 내포평야의 접경에 천안군 '여사울'이란 곳이 있다. 지금의 행정구역상으로는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에 해당하는 여사울에서 이존창(루도비코, 1752~1801, 일명 단원)은 농가의 양민으로 태어났다.
그는 타고난 재주가 비상하여 처음에는 자기 집에서 글을 배우고 있었으나, 더 깊은 학문에의 열정으로 스승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 때 삼남에 그 위명이 자자하던 권일신선생 형제들을 알게되어 그의 문하에 들어가 제자가 되었다.
권일신은 젊고 총명한 농민출신의 학자인 이존창의 자질과 품성에 이끌려 그에게 마음을 쓰고 있던 중, 천주교를 신봉하게 되어 사베리오라는 세례명으로 입교하였다.
사베리오는 즉시 이 신앙의 은혜로움을 제자인 이존창에게 전하였다. 스승은 제자에게 특히 천주교에서 믿어야 할 중요한 신조뿐만 아니라 천주교인의 본분과 그 실천방법까지 철저히 전수하였다.
이존창이 루도비코라는 세례명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을 때, 스승 권일신은 고향으로 돌아가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그에게 일깨워 주었다. 그는 스승의 명에 따라 고향으로 가서 머무는 동안 가족과 친척, 그리고 벗과 이웃들에게 천주교를 전하였고 그의 지식과 덕행을 보고 끌려오는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다.
저 유명한 내포천주교회의 기초가 이렇게 이루어 진 것이다. 이존창에 의해 이루어진 내포천주교회는 다른 어느 곳보다 열심했고, 이후 백년간의 박해 때마다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여 한국교회의 굳건한 토대 역할을 해냈다. 그리고 이 지역에 복음을 널리 전파한 이존창은 오늘날 “내포의 사도”라고 불리게 되었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은 열렬한 신앙심과 학구심을 갖고있었기에 한국초대교회에 있었던 평신도에 의한 임시성사집행기에 그도 평신도의 임시 성직단(聖職團)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성품성사를 받지 않고 성사와 전례를 집행하는 것이 잘못인 줄을 알자 그 일을 즉시 중단하고 사제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되어 윤유일, 지황, 최인길 등과 함께 사제영입운동을 도와 마침내 주문모 신부를 맞아들이는 데에 기여하였다.
그는 1791년 신해박해 때 체포당하여 심한 고문과 교활한 꼬임에 빠져 한 때 배교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도 베드로처럼 즉시 뉘우치고 이 배교에 대한 양심의 가책으로 그의 땀이 어린 고향 내포지방을 떠나 새로운 회개의 삶을 살게 되었다. 홍산(鴻山)으로 이사한 그는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며 더욱 열심히 수계생활을 하고 전교에 힘썼다. 이로 인하여 그의 눈물과 땀으로 전교한 내포와 홍산 지방에서는 박해 중에 불굴의 증거자들이 잇달아 배출될 수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성김대건 신부의 집안도 그의 전교로 입교하였는데, 김대건신부의 할머니가 그의 조카딸이 된다. 그리고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이며, 실로 이 땅에서 12년간 사목활동을 통해한국교회의 오늘이 있도록 기여한 최양업 신부는 그의 생질의 손자가 된다.
이렇게 그가 전교한 그의 친인척 가운데 사제가 배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전교한 결과로 입교하게 된 한국초대교회의 신자들에 의해 오늘날의 교회가 유지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그의 활동은 온갖 기대를 넘어서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교우의 상당부분이 그의 전교로 입교한 교우들의 자손들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그의 전교상의 공헌은 지대하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1795년 말에 이존창은 지방관리들에 의해 다시 체포되었다. 그는 고향인 천안으로 이송되어 사도직 활동의 기회를 박탈당한 채 강제로 연금생활을 하게 되었다. 연금생활 중에서도 이존창은 열절한 기도와 탁월한 교리지식으로 주변에 많은 감화를 주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정조가 재위 24년만에 승하하고 열한 살의 어린 나이로 순조가 왕위를 계승하자, 궁중의 어른인 정순왕후 김계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권력의 변동이 일어나면서 한국교회는 최초의 전국적인 박해인 1801년의 신유박해를 맞게 되었다. 이때 이존창은 6년간의 연금생활 끝에 그 해 3월 18일(음력 2월 5일) 다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1801년 4월 8일 명도회 초대회장 정약종 선생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의 사형은 출신지 감사가 있는 곳인 공주로 호송되어 이루어졌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 그의 일생은 사도적 열성으로 불탔고 그의 전교업적은 교회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적 약점을 멍에처럼 지니고 있어 한차례 나약한 배교의 아픔을 체험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차라리 이 약점 때문에 더욱 그를 가까이 하고 싶어진다. 그의 뉘우치는 삶은 잘못을 참회하는 깊이 만큼 짙고 치열하였다. 이 뉘우침과 회개의 삶과 보속을 본받고 싶어진다. 이 화해의 새 삶이 그를 내포의 사도가 되게 하였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이 공주에서 장렬하게
참수되어 순교할 때,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역사는 내포가 늘 열심한 천주교인들과 훌륭한 순교자의 못자리로 기억될 때마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도 함께 기억될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1년 4월 22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나. 김대건 가문의 순교사
1) 신유박해 1801년
1784년 탄생한 가톨릭교 신앙 공동체는 ‘진산사건’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1795년 중국인 주문모 신부님의 조선 입국 이후 교세가 크게 확대되었고, 1800년 무렵에 이르러 신자수가 10,000명을 헤아리는 공동체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1800년 6월 정조의 사망 후 어린 나이의 순조(純祖)가 즉위하고, 그 후 견인 대왕대비 김씨를 중심으로 하는 노론 벽파가 득세하면서 가톨릭교는 또한 차례의 박해를 겪어야 했다.
임금도 몰라보고 아비도 몰라보는 무군무부(無君無父)의 무리로 간주된 가톨릭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1801년 신유년 1월 조정의 공식적인 박해령과 더불어 시작되었던 것이다. 1801년이 신유년이기에 신유박해라 칭한다.
남인 시파를 제거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가 내포된 이 박해는 서울에서만이 아니라 지방에까지도 확대된 대대적이고 전면적인 박해로 가톨릭교 신앙 공동체에 큰 희생을 초래하였다.
이 박해 중에 300명 이상이 희생되었는데, 사학죄인(邪學罪人)으로 몰린 이승훈, 정약종, 최창현, 최필공, 홍낙민 등이 참수형을 당했으며, 이가환과 권철신은 고문을 이기지 못한 채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주문모 신부님이 의금부에 자수하여 군문효수(軍門梟首)의 형을 받은 후, 가톨릭교에 대한 박해는 6년간 주문모 신부님을 헌신적으로 도왔던 강완숙을 비롯하여 주신부님과 관계했던 인물들로 확대되었다.
이 박해는 같은 해 말 황사영을 비롯하여 이른바 ‘백서사건(帛書事件)과 관련된 많은 이들의 희생을 초래하며 막을 내렸다.
신유박해로 인해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증조 할아버지인 김진후(비오)는 10여 년간의 옥살이 끝에 1814년 옥사하였다.
또한 작은 할아버지인 김종한(안드레아)는 1816년 안동에서 체포되어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 당하였다.
가) 김진후 비오 1739~1814년
충청도 내포 면천의 솔뫼에서 태어난 김진후(운조) 비오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증조부이고, 김종한 안드레아의 부친이다.
김진후가 천주교 신앙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맏아들인 김종현이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에게서 교리를 전해 듣고는 이를 형제들에게 전하면서였다.김진후는 1791년 조상 제사 문제로 일어난 신해박해 때에 처음으로 체포되어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이후에도 네다섯 차례나 체포되었다가 풀려나곤 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김진후는 1805년에 다시 체포되어 해미로 압송되었다. 하지만 10년이란 기간 동안 신앙인으로 옥중 생활의 고통을 잘 참아왔었지만, 결국 그는 1814년 12월 1일에 옥중에서 7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나) 김종한 안드레아?~1816
충청도 내포 면천의 솔뫼에서 태어난 김종한(한현) 안드레아는 김진후 비오의 아들로, 김 데레사 성녀의 아버지이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작은 할아버지이다.
김종한 안드레아는 이존창 루도비코의 도움으로 신앙을 받아들인 맏형 김종현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1815년 을해박해가 일어난 뒤, 김종한은 영양에서 체포되어 안동으로 끌려갔으며, 그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대구로 이송되었다.
김종한은 옥에 갇힌 뒤 1년 6개월 정도가 지나서야 사형을 받게 되는데, 그는 지도층 신자로 지목되어 가장 먼저 칼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16 12월 19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대구 감영에서 첫 번째로 순교한 첫 순교자가 되었다.
2) 기해박해 1839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하여 지도층 인사들이 거의 다 순교하거나 유배에 처해지거나 혹은 산간 벽지로 피신함으로써 조선교회는 존망의 절대적 위기에 처한 듯 했다.
그러나 가톨릭교에 대한 박해는 교우촌의 형성과 확산 속에서 조선 사회 전역으로 파급되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하였고, 이전과 달리 양반이 아니라 중인 이하 신분층을 중심으로 교회가 재건되었다.
그리고 1811년과 1825년, 두 차례에 걸쳐 교황에게 서한을 올리며 지속적으로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1831년조선 대목구가 설정되고, 1836년과 1837년에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인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신부님, 샤스탕(Jacques Honore Chastan)신부님, 앵베르(Laurent Joseph Marie Imbert)주교님이 조선입국에 성공하여 사목활동을 전개 함으로써 조선의 가톨릭교 신앙 공동체는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였고, 1838년 말 그 수는 9,000여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기해년인 1839년 형조판서 조병현을 중심으로 한 벽파(僻派) 풍양 조씨가 시파(時派)인 안동 김씨로부터 정치권력을 빼앗으려는 과정에서 신자 수 10,000명을 헤아리는 가톨릭교회는 또 다시 박해의 시련을 겪어야 했다.
1839년 기해년에 일어난 가톨릭교회에 대한 박해라 하여 기해박해라 칭하고 있다.
사실상 이 박해는 조정이 가톨릭교 신자들에 대한 공식적인 체포령을 발표하기 전인 1838년 말부터 서울에서 시작되어 이후 1840년 말까지 계속되었는데, 조신철·정하상·유진길 등 당시 조선교회를 이끌어가던 핵심적인 신자들이 희생되었다.
앵베르 주교님은 박해로 인한 피해가 신자들에게 더 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홀로 자수하고 다른 두 선교사에게도 자수를 권고하였다.
이에 따라 모방 신부님과 샤스탕 신부님도 자수하였는데, 이들 모두 군문효수의 형을 받고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김효임 골롬바와 김효주 아녜스 자매가 신앙을 위해 동정을 지키다가 체포되어 순교한 것도 이 박해 시기이다.
기해박해의 여파로 김대건 신부님의 아버지 김제준(이냐시오) 성인은 1839년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수 당하였으며, 당고모였던 김 데레사 성녀는 앵베르 주교의 처소를 돌보며 신앙을 전파하다 체포되어 1840년 초 서울포청에서 교사 당하였다.
가) 성 김제준 이냐시오 1796년~1839년
최초의 한국인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의 부친이다.
김제준은 충청도 면천 솔뫼(현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에서 김택현의 차남으로 태어나 조부인 김진후와 계부 김종한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고, 장성하여 고 우르술라와 혼인하였다.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날 무렵, 부친인 김택현과 함께 서울 청파를 거쳐 경기도 용인 땅 한덕동에 정착하였다가 이웃의 골배마실로 이주해 살았다.
그 후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7월에 사위 곽씨를 앞세운 밀고자 김순성일당에게 체포되었다. 즉시 서울로 압송된 그는 포청과 의금부에서 아들을 외국에 보낸 사실을 자백함으로써 국사범으로 취급되어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다.
9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다른 8명의 교우와 함께 43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나) 성 김데레사 1779년~1840년
독실한 신자였던 김종한 안드레아의 딸이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당고모인 김데레사는 충청도 솔뫼(충남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에서 태어나 17세 때 교우인 손연욱 요셉과 혼인했고, 여러 자녀를 낳아 모두 열심한 신자로 교육시키며 집안을 모범적인 신자 가정으로 만들었다.
1824년 남편이 해미에서 순교하자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혼자 생활하면서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 대제를 지켰었고, 염경이나 묵상에도 열심하며 수계하였다.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본래 순교할 원의가 있었으므로 피신하지 않고 있다가 7월 19 정 엘리사벳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6개월 동안 갖은 문초를 당하던 그는 1840년 1월 9일 포청 옥에서 이아가다와 함께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다) 손연욱 요셉 ?~1824년
손연욱 요셉은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났다.
손연욱은 1811년 김종한 안드레아의 딸인 김데레사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1817년 10월 덕산 배나드니에서 마을 교우 30여명과 함께 체포되어 해미 진영으로 압송되었고, 그곳에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으며, 해미 진영의 영장이 신자들을 밀고하고 천주교 책을 갖다 바치며 배교하라고 하였지만 그는 끝까지 신앙을 고수하였다.
우연한 기회에 관장의 허락을 받아 감옥 근처에 있는 어떤 집에서 동생과 같이 몇 주일 동안 머무르다가 숨을 거두었다.
3) 병오박해 1846년
조선인 성직자 양성의 중요성을 절감한 모방 신부는 1836년 말 최양업·최방제·김대건을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마카오로 보냈다.
이들 중 충청도 솔뫼 출신의 김대건은 신학교 생활을 마치고 선교사의 조선 입국로를 개척하던 중 1845년 8월 17일 중국 상해에 위치한 진쟈샹(金家港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는데, 이로써 최초의 조선인 사제가 되었다.
이후 바닷길을 통해 페레올(Jean-Joseph Ferreol)주교님, 다블뤼(Davely)신부님과 함께 지금의 강경에 잠입하여 사목활동에 투신한 그는 1846년 선교사의 입국을 위한 항로를 탐색하던 중 백령도 부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혹독한 고문과 조정의 회유 속에서도 신앙을 굳건히 증거하다.
같은 해 9월 16일 서울 한강변 새남터 모래사장에서 순교하였다.
1846년 병오년에 일어난 박해이기에 병오박해라 일컬으며, 한국의 첫 사제였던 김대건 신부님의 체포를 계기로 가톨릭교에 대한 박해가 다시금 일어나 현석문을 비롯한 신자들이 순교하게 되었다.
4) 병인박해 1866년
‘기해박해’와 ‘병오박해’처럼 가톨릭교에 대한 박해가 계속되는 가운데 많은 신자들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게 신앙을 증거한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는 더 많은 가톨릭교 신자들을 탄생시키는 씨앗이 되었고, 이전보다 더 넓은 지역에 복음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선교사의 계속적인 조선 입국과 활동 재개로 가톨릭교 신앙 공동체는 눈에 띄는 발전을 이루었는데, 1857년에는 그 수가 15,000명을 넘어섰으며, 1865년에는 23,0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러나 1864년 초, 고종(高宗)이 즉위하고 그의 아버지 흥선 대원군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후, 가톨릭교 신앙공동체는 다시금 박해의 시련에 직면해야 했다.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와의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러시아 세력의 남하를 저지하고자 계획하였던 대원군이 태도를 바꾸어 가톨릭교에 대한 박해를 감행한 것이다.
병인년인 1866년에 시작된 이 병인박해는 1873년 말까지 계속되었다.
이 박해는 ‘병인양요’를 촉발하였고, 전국에서 8,000명 이상의 신자들이 희생되었는데, 박해가 일어날 당시 한국에서 있던 12명의 선교사들 중 베르뇌 주교님과 다블뤼 주교님을 포함하여 9명이 순교하였으며, 홍봉주·남종삼·황석두 등 수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들과 운명을 같이 하였다.
병인박해 당시 김대건 신부님의 사촌들과 친척들은 공주황새바위에서 순교하였다.
1866년에는 김제항이, 1869년에는 김진식과 김근식이, 1873년에는 김제교가 순교함으로 인해, 김대건 신부님 집안은 4대에 걸쳐 11분의 순교자를 배출하는 신앙의 명문이 되었다.
가) 재항 루도비코?~1866년
김재항 루도비코는 김진후 비오의 넷째 아들인 김희현의 아들로서 충청도 면천면 솔뫼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인 김진후가 해미 감영에서 옥사 한 후 모든 일가 친척들이 흩어지면서 그의 가족들은 온양의 배여동으로 가서 살았다. 그러다가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온양 포졸들에게 잡혀 공주로 이송되었다가 그해 6월 6일에 치명하였다.
나) 근식 베드로 1825~1867년
김근식 베드로는 김대건 신부의 작은 삼촌인 김재철의 아들로서 충청도 면천 솔뫼에서 태어났다.
조부인 김진후 비오가 해미 감영에서 옥사한 후 그의 부친이 조부 김택현과 증백부인 김제준 이냐시오와 함께 서울 청파동을 거쳐 용인 한덕골에서 얼마간 피난을 살다가 산 넘어 골배마실로 옮겨 살았다.
그 후 다시 공주 금동에서 살다가 서울에서 포교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형과 가족들을 피하라고 권면하여 피난을 보낸 후 그는 자진하여 잡혀 공주에서 1867년 11월 43세의 나이로 치명하였다.
다) 김진식 프란치스코 1827~?
김진식 베드로는 김대건 신부의 작은 삼촌인 김재철의 아들로서 충청도 면천 솔뫼에서 태어났다.
조부인 김진후 비오가 해미 감영에서 옥사한 후 그의 부친이 조부 김택현과 증백부인 김제준 이냐시오와 함께 서울 청파동을 거쳐 용인 한덕골에서 얼마간 피난을 살다가 산 넘어 골배마실로 옮겨 살았다.
그러다가 1839년 기해박해 후에 그의 부친과 함께 가족들은 다시 충청도 고향 쪽으로 왔서 살았으나, 1846년에 병오박해를 만나 덕산 고을로 피난을 가서 살다가 병인박해(1866-1973 때 해미 포교에게 잡혀가서 순교하였다.
라) 김준명 제교 1927~?
김준명은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의 동생인 김귀조의 손자로서 김대건 신부의 칠촌 아저씨이다.
그의 가문은 증조부인 김귀조 때부터 큰 집과 함께 신앙을 받아들인 듯하며, 그는 1827년에 김관현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들은 충청도 여사울에 가서 살다가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본을 포교에게 잡혀 배교하고 나와 살았다.
그러나 배교하고 나왔음을 항상 원통하게 생각하여, 다시 공주 포교에게 잡혀 치명하였다.
2. 최양업 신부 약전
최양업(1821∼1861). 두 번째 한국인 신부. 세례명 토마스. 양업(良業)은 아명(兒名)이고 관명(冠名)은 정구(鼎九), 본관은 경주. 충청도 다락골[일명 대래골, 현 靑陽郡 化成面 禮岩里]에서 출생.
생애 : 최양업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 최경환(崔京煥)과 이성례(李聖禮)의 장남으로 태어나 부모로부터 철저한 신앙교육과 신앙생활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그의 가족은 이미 증조부 때 이존창(李存昌)의 권고로 천주교에 입교했었다. 본시 서울에서 살았는데 조부 때 박해를 피해 낙향, 당시 홍주(洪州) 땅인 다락골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최양업의 부친 최경환이 출생하였다. 최경환은 이성례와 결혼함으로써 김대건 신부 일가와 친척 관계를 맺게 되었다(최양업과 김대건은 진외 6촌간).
다락골에서 점차 생활이 넉넉해지고 또 외교인 친척들과의 접촉으로 인해 신앙생활이 해이해지자 최경환은 보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영위하고자 형제들을 설득하고 그들과 같이 서울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3년만에 천주교 집안인 것이 탄로되어 서울을 떠나야 했는데 이 때 최경환은 과천(果川)의 수리산 뒤듬리로 피신하였다. 여기서 그는 산지를 개간하며 연명해 나아갔는데, 틀림없이 이 곳 수리산에서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발탁되었을 것이다.
1836년초 입국에 성공한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는 즉시 방인(邦人) 성직자 양성을 위해 신학생 선발에 착수했는데, 맨 먼저 최양업이 발탁되었고, 이어 최방제(崔方濟)와 김대건이 발탁되었다. 최양업 등 세 소년은 서울의 모방 신부 곁에서 라틴어를 배우며 출발을 기다렸다. 왜냐하면 모방 신부는 그들을 국외로 내보내어 성직자로 양성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세 소년은 마침내 그해 12월 3일 마카오로 가기 위해 의주(義州)를 향해 서울을 떠났다. 이들은 출발에 앞서 그 전날 모방 신부 앞에서 소명(召命)에 충실하고 장상들에게 순종할 것을 선서하였다. 정하상(丁夏祥), 조신철(趙信喆) 등 유지 교우들이 그들을 동행했는데 이들은 세 소년을 변문(邊門)까지 인도하고 거기서 새 선교사를 맞아들이게 되어있었다. 일행이 12월 28일 변문에 도착한 후, 세 소년은 중국인 안내원을 따라 중국대륙을 횡단, 이듬해 6월 7일 목적지인 마카오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마카오 주재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경리부 책임자 르그레즈와(Legregeois) 신부는 경리부 안에 임시로 조선신학교를 세워 조선인 신학생 3명을 교육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르그레즈와 신부 책임 하에 경리부 차장 리브와(Libois) 신부가 주로 그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후에 조선 선교사로 부임한 메스트르(Maistre)와 베르뇌(Berneux) 신부처럼 선교사들이 마카오에 체류하는 기회에 그들의 교육을 돕기도 하였다. 최양업과 김대건은 아편전쟁을 전후해 현지에서 일어난 민란(民亂)으로 인하여 두 번이나 마닐라로 피난해야 했고, 또 최방제와 1년여만에 사별(死別)하는 등 그들의 유학생활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으나 그래도 1842년까지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1842년 그들은 아직 수학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왜냐하면 세실(Cecille) 함장이 마카오의 경리부를 찾아와 조선원정계획을 알리면서 조선인 신학생 1명을 통역으로 동행시켜줄 것을 요청했고, 경리부장 리브와 신부는(그간 르그레즈와 신부는 파리본부로 전임되었다) 벌써 몇 년째 조선교회와 소식이 끊겨져 있었으므로 세실의 요청을 하느님의 섭리처럼 생각하고 쾌락했기 때문이다.
아편전쟁의 종말이 가까워지자 프랑스 정부는 중국에서 어떤 이득을 얻어 보려는 심산에서 군함 2척, 즉 에리곤호와 파보리트호를 파견했었는데 세실은 에리곤호의 함장이었다. 리브와 신부는 건강이 약한 김대건을 메스트르 신부와 같이 먼저 에리곤호에 태워 보냈다(2월 15일).
한편 최양업은 파보리트호로 떠나게 되어 있었는데 입항(入港)이 늦어져 7월 17일에야 요동(遼東)교구 선교사 브뤼니에르(Bruniere) 신부와 같이 마카오를 출항하였다.
8월 23일 오송(吳淞)에 이르러 최양업은 먼저 떠난 김대건과 만났다. 그런데 세실은 남경조약이 체결되자(8월 29일) 더 이상 북상(北上)하기를 포기했으므로 두 신학생은 프랑스 군함에서 하선하고 다른 방법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다행히 강남(江南)교구장의 주선으로 중국배 한 척을 얻어 우선 요동을 떠날 수 있었다. 그들은 이 배로 10월 2일 상해(上海)를 떠나 10월 23일 요동에 도착하였다. 김대건은 그 곳에 남아 입국을 시도하였고, 최양업은 몽고땅 팔가자(八家子)로 가서 페레올(Ferreol, 高) 신부와 합류하였다.
최양업은 소팔자가(小八家子) 교우촌에서 신학공부를 계속하였다. 한편 김대건은 입국에 실패했으나 그간의 조선교회 소식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1839년 기해박해로 3명의 선교사를 위시하여 그의 부친 최양업의 부모 등이 순교한 소식에 접하게 되었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최양업은 오히려 그들의 순교에 동참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그러는 동안 페레올 신부가 제3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었고, 1843년 12월 31일 개주(蓋州)에서 주교성성식을 갖게 되었다. 성성식에 참석한 후 최양업은 메스트르 신부와 같이 소팔가자로 돌아왔고, 얼마 뒤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도 소팔가자로 돌아왔다. 그간 김대건은 다시 한 번 훈춘을 통해 입국을 시도했었다.
1844년 최양업과 김대건은 소정의 신학과정을 끝내고 연말에(늦어도 12월 15일 이전)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까지 받았으나 교회법이 요구하는(만 24세) 연령 미달로 사제품까지 받지는 못하였다. 최양업 부제는 계속 소팔가자에 남아 있었다. 한편 김대건 부제는 페레올 주교와 같이 입국을 시도한 끝에 성공하지만 주교를 대동하지는 못하였다.
최양업은 1845년 한 해를 기다림 가운데 허송한 뒤 1846년초에 메스트르 신부와 같이 두만강 쪽을 통해 처음으로 입국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최양업은 요동교구의 베르뇌 신부의 사목활동을 도우며 1846년을 보냈다. 1846년 말 변문을 통해 두 번째 입국을 시도했으나 또 실패하였다. 이 때 그는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소식을 들었다. 이제 최양업은 육로(陸路)로의 입국을 단념하고 해로(海路)로의 입국을 시도하고자 홍콩의 경리부로 갔다(그간 경리부는 마카오에서 홍콩으로 이전되어 있었다).
1847년 초에 홍콩에 도착한 최양업은 입국의 기회를 기다리는 동안 페레올 주교가 보내온 한국순교자전기를 프랑스어에서 라틴어로 옮겼다. 드디어 입국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 라피에르(Lapierre) 함장이 조선정부로부터 회답을 받기 위해 조선해안으로 떠난다는 것이었다. 1년 전 세실은 조선 서해안에 나타나 1839년 3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살해한 책임을 묻는 서한을 조선정부에 보내면서 1년 후 그 회답을 받으러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왔었다.
라피에르 함장은 메스트르 신부, 최양업 등과 같이 군함 2척을 이끌고 1847년 7월 28일 마카오를 떠났다. 그러나 두 군함은 고군산도(古群山島)에 이르러 완전히 난파하였다. 상해로부터 구조선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최양업은 육지로 잠입하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부득이 구조선을 타고 상해로 돌아와야 하였다. 난파된 군함의 잔해(殘骸)를 거두러 갈 것이 거의 확실시 되었으므로 그 기회를 기다렸으나 그것도 프랑스의 국내 사정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는 동안 1848년도 지나가 버렸다.
1849년 최양업은 백령도를 통해 입국을 네 번째로 시도했으나 또 실패하였다. 상해로 돌아온 그는 4월 15일 강남교구장 마레스카(Maresca) 주교로부터 숙원인 사제품을 받고 동료 김대건에 이어 두 번째 한국인 신부가 되었다. 최 신부는 다시 육로 입국을 시도하고자 5월 요동으로 떠났다. 연말을 기다리며 7개월 동안 베르뇌 부주교를 도우며 사목경험을 쌓았다. 12월 변문으로 떠났고, 이번에는 입국에 성공했다. 그러나 메스트르 신부와 같이 입국하지는 못했다. 실로 입국길에 오른 지 7년 6개월, 입국의 시도를 거듭하기 다섯 번만의 성공이었다.
사목활동 : 귀국하자 최양업 신부는 휴식을 취할 겨를도 없이 5개 도를 두루 다니며, 그것도 선교사들이 들어갈 수 없는 산간벽지만을 찾아다니며 교우들을 심방하고 성사를 집전하였다. 1년간 7천여리를 찾아다니며 4,000여명의 고해를 들었다. 그는 건강한 편이었으나 워낙 그가 맡고 있던 지역이 넓고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어서 여간 힘들지가 않았다.
철종년간(1850∼1863)은 천주교가 묵인되던 때여서 정식 박해는 없었으나 소위 사군난(私窘難)은 그칠 날이 없었다. 사군난은 그의 전교여행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외교인들의 습격을 받으며 체포될 뻔도 했고, 추방되고, 관가에 고발되는 등 도처에서 중대한 위험을 겪어야 하였다. 그러나 최 신부는 이같이 말할 수 없는 어려움과 궁핍 가운데서도 많은 개종과 용감한 입교자들 앞에서 위로와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최 신부는 이같이 바쁜 전교활동 중에서도 신학생을 선발하여 페낭 신학교로 보냈고 또한 선교사들의 입국을 주선했으며 순교자들에 관한 증언과 자료까지 수집하는 등 지칠 줄 모르는 열성을 보였다.
최 신부 혼자만도 1,000여명의 예비자를 기록함으로써 개종운동이 그 절정에 달했을 때 뜻밖에 1859년말에 박해가 일어났다[庚申迫害]. 이 박해로 인해 최 신부는 경상도의 한 공소에서 여러 달 동안 외부와 완전히 소식이 두절된 채 갇혀 지내야 하였다. 포졸들의 포위망을 빠져 나갈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선생신부들에게 고별편지를 쓰고 순교까지 각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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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박해는 다행히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최 신부는 다른 선교사들과 같이 중단되었던 전교활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개종운동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최 신부는 박해 때문에 밀린 공소를 너무 무리하게 추진시켰다. 그는 하루에 80리 내지 100리를 걸었고 밤에는 고해성사를 주고, 날이 새기 전에 다른 공소로 떠났다. 그러면서 그는 한 달 동안 나흘밤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성사집전을 끝낸 그는 주교에게 보고차 상경하던 중 1861년 6월 과로로 경상도 문경(聞慶)[충청도 鎭川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에서 쓰러져 장티푸스로 보름만에 사망하였다. 최양업 신부 집안에 전해지는 구전에 의하면, 쇠고기에 체해 사망했다고 하는데 아마 처음의 식중독이 겹친 과로로 합병증을 일으켜 장티푸스로 사망한 것 같다. 최 신부는 이렇게 사목활동 12년 만에 기진맥진한 끝에 순직하였다.
장례식은 베르뇌 주교의 집전으로 선교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배론 신학교에서 장엄하게 거행되었고, 신학교 산기슭에 매장되었다. 최 신부의 사망은 조선교회를 위해 그가 유일한 한국인 신부였고, 열렬한 선교열에 학덕을 겸비한 모범적 사제였다는 점에서 당장은 그 무엇으로써도 보충하기 어려운 가장 큰 손실이었다. 교구장을 위시하여 선교사들이 한결같이 그의 유덕을 추모해 마지않았다.
저술활동 : 최양업 신부는 19통의 라틴어 서한[그 중 1통은 遺失]을 남겼다. 그는 라틴어를 정확하게 말하고 쓸 수 있을 뿐 아니라 미사여구를 구사할 정도였다. 또한 그는 라틴어 작문 2통을 남겼다. 최 신부의 서한들은 최 신부 자신에 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한국교회사 연구에 필요불가결의 기본자료이고 또한 한국 근세사 연구에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최 신부는 그의 부모의 순교사적을 위시하여 한국 순교자에 관한 증언과 자료도 수집했는데 다블뤼(Daveluy, 安敦尹) 보좌주교는 그것을 그의 비망기(備忘記)에 수록했고, 달레(Dallet)는 그것을 그의 ≪한국천주교회사≫에 수록하였다.
최 신부는 또한 ≪한국순교자전≫을 번역했는데 그 제목은 이러하다. “1839년과 1846년에 조선왕국에서 발발한 박해 중에 그리스도의 신앙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의 전기. 현 가롤로와 이 도마 수집. 벨리나 주교의 프랑스 원문으로부터 최 토마스 부제 번역”.
최 신부는 또한 보다 완전하고 보다 정확한 교리문답의 출판을 준비했는데, 이것이 1864년 목판본으로 간행된 ≪성교요리문답≫이었을 것이고, 주요 기도서도 번역했는데, 그것은 틀림없이 같은 해 간행된 ≪천주성교공과≫였을 것이다.
최 신부는 또한 사향가, 사심판가, 공심판가 등 많은 천주가사(天主歌辭)를 저술했다고 하는데 그 확실한 저자성(著者性)에 관해서는 좀 더 객관적이고 서지학적(書誌學的)인 연구의 뒷받침이 있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사상과 영성(靈性) : 그의 성성(聖性)은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보좌주교의 찬사에서처럼 굳건한 신심, 드문 덕행, 구령(救靈)을 위한 불같은 열심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의 덕행 중에서 첫째로 그의 겸덕(謙德)을 들어야 할 것이다. 이 겸덕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자신을 완전히 하느님의 뜻에 맡기고, 순명을 기다리는 것이었고(이것은 그의 7여년에 걸친 입국시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대인(對人)관계에서는 인간을 인간의 존엄성에서 올바로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의미하였다.
영혼을 구하기 위한 최 신부의 지칠 줄 모르는 열성은 그의 12년간의 사목활동에서 여실히 입증되었다. 그의 동료 김대건 신부의 성성이 한마디로 피의 증거(순교)였다면 최신부의 일생은 땀의 증거(순교)였다.
최 신부의 선교정책은 세 가지 점에서 매우 예언자적인 것이었다. 첫째로 그는 교회와 국가의 장래를 위해 양반제도의 폐지를 주장해 마지않았다. 양반제도는 모든 악의 근원으로서 교회 내에서는 분열을 초래하여 교회에 큰 손실을 가져오고, 국가를 위해서는 인재등용에서 인권이 무시되기 때문이었다. 둘째로 선교사에 관해 최 신부는 그들이 사전에 조선의 실정과 풍속을 익혀야 할 것을 주장했고, 셋째로 한국적인 선교대책으로서 조속한 종교자유의 획득과 이를 위한 프랑스 정부측으로부터 조선정부에 대한 적극적인 외교활동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崔奭祐)
자료 참조: [가톨릭대사전]
가, 최양업 신부 아버지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1805-1839년, 회장,
기해박해 때 옥사)우리 나라에서 두 번째 신부가 된 최양업 토마스 신분의 아버지인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흥주군 다랫골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한국교회 창설기부터 천주교를 믿었던 집안이다. 최경환은 원래 성질이 괄괄해 불같이 일어나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업어서 작은 일에도 화를 잘 내고 곧잘 다투었다. 이러한 성질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여 후일에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온화해진 성품을 보고 탄복하였다.그가 살던 지방 교우들은 오랫동안 성직자가 없었기 때문에 겉으로는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대부분 미신과 우상숭배에 빠져있었다. 그래서 최 프란치스코는 신앙생활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서울, 강원도, 부평 등을 전전하며 살다가 경기도 과천 수리산 뒷듬이 마을에 정착하였다. 뒷듬이마을 사람들은 드문드문 집을 지어 담배일 을 일구고 옹기장사를 하며 살고 있었다.최경환은 산을 개간해 밭을 일구고 살면서 새로 찾아오는 교우한테는 집을 마련해 주었다. 밤에는 교우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치고 함께 묵상하며 기도를 드리는 등 마을을 교우 촌으로 만들어 나갔다. 훗날 최양업 신부는 아버지를 이렇게 회고하였다. "부친은 자주 묵상을 하고 신심서적을 대하였으며, 언제나 종교와 신심 이외의 것은 말하지 아니하셨다. 또한 아버지의 말씀은 힘있고 설복시키는 능력이 있어 모든 이에게 천주의 사랑을 심어주셨다."1863년 모방(Maubnt) 신부가 입국하여. 조선에서는 서양신부가 들어와 전교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비밀리에 신학생을 선발하고 있었다. 어느 교우가 최경환의 맏아들이 총명한 아이라고 천거하였다. 모방 신부는 그들 부부를 찾아가 최양업(토마스)을 신부로 만들자고 하였다. 그때 최경환은 "신부님, 고맙습니다. 이것은 저희들의 뜻이 아니라 천주의 부르심이요 소명입니다. 저희 집안에 이러한 기쁨이 찾아올 줄은 참으로 몰랐습니다" 하며 흔쾌히 승낙하였다. 당시는 유교적 관념이 뿌리박고 있어서 자기가 낳은 자식을 형이나 아우한테 양자로 보내는 것도 꺼려하던 때였다.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대 회장이 된 그는, 의연금을 모아 옥에 갇힌 교우들과 가난한 이들을 찾아다니며 나누어주었고, 순교자들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였다. 그리고 집안사람들한테는 순교할 준비를 하라고 이르고 성패와 성물을 감추었다. 같은 해 7월 13일 밤,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이 마을을 포위하고 욕설을 퍼부으며 그의 집으로 들어왔다.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친구를 대하듯 포졸들을 반가이 맞으며 요기를 하고 쉴 것을 청하였다. 그의 이러한 태도에 안심한 포졸들은 그날 밤 평안히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잠을 깬 포졸들은 아침을 푸짐하게 대접받은 뒤 최경환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체포해 서울 포청으로 이송하였다.포장은 프란치스코에게 주리를 틀게 하고 뾰족한 몽둥이로 살을 찌르면서 고문을 하게 하였다. 그의 아들 최양업이 신부가 되기 위해 나라밖으로 나간 사실이 알려지자 포장은 더욱 화가 나 무지하게 매질하여 그의 팔과 다리의 뼈가 어그려졌다.
교우들은 형벌을 못 이겨 대부분 배교하여 석방되었다. 하지만 그는 태형 삼백사십 도와 곤장 일백여 도를 맞으면서도 아내(이성례 마리아)와 친척과 함께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였다.
9월 11일 프란치스코는 포장앞에 끌려가 치도곤 오십대를 더 맞으니 그것이 최후의 출두요 형벌이었다. 옥으로 돌아온 그는 "예수께 내 목숨을 바치고 도끼 날에 목을 잘리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옥중에서 죽는 것을 천주께서 원하시니 천주의 성의가 이루어졌다"라고 말한 뒤 포도청 옥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때는 1839년 9월 12일, 그의 나이 서른 다섯이었다. [경향잡지, 1996년 8월호, 편집부]
나.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는 조선의 유명한 이씨 가문에서 출생했는데, 그 가문에서 유명한 인사들이 여러 명 배출됐습니다. 그중에 한 분이 단원 이존창이었습니다. 그는 첫 선교사 신부님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조선에 오기 전에 시골 지방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사제 직분을 집행했던 분입니다.
이존창 집안이 처음에는 모르고서 가짜 사제를 냈으나 나중에는 진짜 사제를 내는 영광을 갖게 됐습니다.
그 집안의 딸들에게서 사제 두 명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의 딸 멜라니아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조모이고, (모친은) 이존창의 사촌누이 멜라니아의 조카딸입니다.
이 마리아는 4남 6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남성처럼 씩씩한 정신을 타고났는데, 열여덟 살 때 프란치스코와 결혼했습니다. 마리아는 집안을 지혜롭게 꾸려나갔으며, 식구들 간에 불화 없이 지내게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고향과 재산을 모두 버리고, 극도의 궁핍과 굶주림 가운데 험한 산속으로 방황하기를 수년을 거듭했는데도 이 모든 것을 기쁘게 참아 받았습니다. 남편을 따라 먼 곳으로 이사 갈 때나 먼 길을 걸을 때 어린 자식들이 굶주림에 지쳐서 칭얼거리면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와 요셉이 이집트로 피난 가시던 이야기와 갈바리아산에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는 예수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자식들에게 인내심과 참을성을 키워줬습니다.
남편이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데도 남편을 공경하고 순종하며 부부가 한마음 한뜻으로 화목하게 살았습니다.
위 내용은 한국교회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1821~1861) 신부가 1851년 마카오에 있는 스승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낸 편지 일부로,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에 관해 언급한 대목입니다.
편지에 나오는 아버지 프란치스코는 103위 순교성인 가운데 한 분인 성 최경환(1805~1839). 장남 최양업을 한국교회 주춧돌로 키우고, 남편을 따라 순교로써 하느님 품에 안긴 한국의 여인이 바로 이성례(李聖禮)입니다.
1801년 충청도 홍성에서 태어난 이성례는 최경환과 혼인한 뒤 청양 다락골에 살면서 1821년 장남 최양업(토마스)을 낳았습니다. 가족과 함께 한양으로 이사를 했다가, 박해 위험이 있자 강원도와 인천 부평을 거쳐 수리산(현 경기도 안양시)으로 이주했습니다.
고향과 재산을 버리고 낯선 곳으로 옮겨 다니는 가운데서도 이성례는 모든 어려움을 기쁘게 참아냈습니다. 수리산에 정착해서는 남편을 도와 마을을 교우촌으로 일구는 데 헌신했습니다. 장남 최양업은 이때 신학생으로 선발돼 마카오로 떠났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남편 최경환은 한양을 오가면서 순교자들 시신을 찾아 묻어주고 교우들을 돌봤으며, 이성례는 남편 뒷바라지를 하면서 자식들을 보살폈다. 부부는 자신들도 곧 체포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부부는 새벽에 수리산 교우촌을 급습한 포졸들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반갑게 맞았습니다. 최경환은 포졸들에게 교우들과 함께 질서정연하게 따라갈 테니, 잠시 쉬었다가 식사를 하고 떠날 것을 권합니다. 이성례는 포졸들을 위해 밥상을 차렸고, 최경환은 포졸들이 식사를 마치자 장롱에서 옷을 모두 꺼내 포졸 한 명 한 명에게 입혀줬습니다. 순교하면 필요 없게 되는 옷이었습니다.
그 사이 감옥으로 떠날 준비를 마친 남녀노소 신자 40여 명은 행렬을 이뤄 한양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이성례도 젖먹이를 포함한 아들 5명을 데리고 남편을 따랐으며, 신자들이 달아날 염려가 없다는 것을 안 포졸들은 이들을 오랏줄로 묶지도 않았고 합니다. 끌려간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들이 순순히 나선 것은 순교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이성례는 남편과 격리된 채 젖먹이 아들(스테파노)과 함께 여인 감옥에 수감됐습니다. 잡혀온 다음날부터 문초와 형벌을 받아 팔이 부러지고 살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졌지만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이미 순교를 각오한 터였기 때문입니다. 정작 이성례를 괴롭힌 것은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옥에 함께 있는 젖먹이였습니다. 젖은 나오지 않고 먹일 것이 없어서 막내아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편은 매를 맞아 순교하고, 젖먹이는 더러운 감옥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이성례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순교하면 젖먹이뿐만 아니라, 밖에서 구걸로 연명하고 있는 나머지 4형제 모두 고아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스테파노가 굶어 죽자 이성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습니다. "천주를 모른다"고 외치고 감옥에서 풀려나왔습니다. 남은 아이들마저 잃고 싶지 않은 지극한 모성애였습니다. 얼마 후 이성례는 큰아들 최양업이 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다시 압송됐습니다. 그는 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 격려에 힘을 얻어 전에 했던 말을 용감하게 취소했습니다. 잠시나마 배교한 것을 뉘우치고 영광스럽게 순교하기로 굳게 결심하였습니다. 둘째 아들 야고보는 감옥을 드나들며, 구걸한 돈으로 마련한 음식을 어머니께 갖다 드렸습니다. 이성례는 철모르는 어린 자식들이 부모 없이 지낼 것을 생각하자 모정에 다시 한 번 몸을 떨어야 했습니다.
이성례는 문초와 형벌 끝에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감옥으로 찾아온 야고보에게 형장으로 오지 말 것을 당부했습니다. 마음이 약해질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성례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제 그만 가거라. 절대로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잊지 말아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토마스(최양업)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야고보는 모정에 눈물짓는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야고보는 감옥 사람들에게 어머니를 마지막 순간까지 조심스럽게 지켜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1840년 1월 31일, 이성례는 동료 신자들과 함께 형장으로 정해진 당고개(현 서울 용산구 신계동)로 끌려가 참수로 순교했습니다. 안온하고 평화로운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나이 39살이었습니다.
최경환ㆍ이성례 후손에 따르면 최양업 신부 첫째 동생 야고보는 둘째를 목천 서덕골 큰아버지 댁에, 셋째를 용인 한덕골 작은아버지 댁에 나눠 의탁했습니다. 그리고 넷째 동생은 진천 동골에 있는 친척 집에 맡겼습니다. 신부가 돼 돌아온 맏형 최양업은 1849년 용인 한덕골 작은 아버지 집에서 동생 4형제를 만났습니다.
몇 년 후 최 신부는 셋째ㆍ넷째 동생을 신심이 깊은 송구현(도미니코,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의 장녀 송 막달레나, 차녀 송 아가타와 결혼시켰습니다. [평화신문, 2012년 10월 28일, 남정률 기자]
다. 최양업 신부의 네 동생들 이야기
당고개에서 이성례 마리아가 순교한 후 최양업 신부의 네 동생(희정, 선정, 우정, 신정)의 후일담을 셋째 동생인 최우정 바시리오의 큰아들 최상종이 1939년에 기록한 내용과 넷째 동생인 최신정 델레신포로의 아내 송 아가타(1838~1930)의 구술을 바탕으로 정리하였다.
최양업 신부의 증조부 최한일은 이존창의 전교로 천주교인이 되었는데 아들 최인주 하나를 두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1791년 신해박해 때 과부가 된 부인 이씨(이존창의누이)는 아들 최인주를 데리고 서울을 떠나 청양 다락골에 정착하였다.
그 후 최인주가 결혼하여 아들 셋을 두었는데 최영렬, 최영겸, 최영눌이다.
최영눌이 최양업 신부의 부친 최경환 프란치스코다.
삼 형제는 나중에 서울에 와 살다가 박해로 도피하게 되는데, 첫째인 최영렬은 목천 서덕골, 둘째 최영겸은 용인 한덕골에 와서 살다가 골배마실로, 최경환은 여러 지방을 거쳐 과천 수리산에 있는 교우촌으로 각각 피신하였다.
1836년 15살의 최양업은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마카오로 떠났고 3년 후인 1839년 기해박해 때 담뱃골의 최경환, 이성례 부부는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최희정 야고보는 어린 동생들을 목천 서덕골 큰 아버지(최영렬) 댁과 한덕골 작은아버지(최영겸) 댁에 나누어 의탁하였다.
그리고 셋째 동생 최우정 바시리오는 진천 동골에 있는 친척집에 부탁하였다.
1849년 큰형 최양업이 신부가 되어 돌아왔다. 최 신부는 용인 한덕골 작은 아버지 최영겸 집에서 동생 사 형제를 만났다. 그때 페레올 주교가 최 신부의 거처를 진천 동골 공소로 배정하여 그곳으로 떠났다. 몇 년 후(1853년경 추정) 최 신부는 열심한 교우 송구현 도미니코(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의 장녀 송 막달레나, 차녀 송 아가타가 정숙함을 알고 두 동생과 결혼을 시켰다.
첫째 동생 최희정 야고보는 박해 기간 세 어린 동생을 데리고 많은 고초를 겪었으나 그에 대한 행적은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말년에 충북 진천군 바라산 교우촌에서 선종하였다는 기록만이 전해지고 있다. 최희정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막내아들 최유종의 손자가 원주교구 최기식 신부다.
둘째 동생 최선정 안드레아는 사람됨이 비범하고 성정이 걸걸하여 모친 이성례 마리아의 성품을 많이 닮았던 듯하다. 슬하에 딸만 둘 두었다. 후에 경기도 광주군 시어골 교우촌에서 선종하였다고 한다.
셋째 동생 최우정 바시리오는 송 막달레나와 결혼한 후 수년을 진천 동골에서 살다가 박해로 피해 다니며 묵주와 상본을 만들어 팔고 송 막달레나는 바느질로 어렵게 생활하였다. 그 후 집신 장수가 된 두 내외는 무사히 박해 시대를 넘겼다.
위로 딸 둘과 아들 둘을 두었는데 큰딸(아나타시아)에게서 박우철 신부를 배출하였고, 장남 최상종이 수기의 주인공 빈첸시오다. 병인박해 이후 10년 가까이 신발 장수를 하던 최우정은 블랑 신부(후에 제7대 교구장)의 복사가 되어 가정은 돌보지 않고 전국을 순회하다가 1886년 56세 정도에 당시 유행하던 악질로 7월 7일 고백의 기도 속에 숨을 거두었다.
막내 동생 최신정 델레신포로는 송 아가타와 결혼 후 최 신부를 모시고 광주 소리울에서 살다가 몇 해 후 최 신부의 권유로 다시 안양의 담뱃골 옛 고향으로 이사하였다. 종종 최 신부가 그곳에 들르면 부친 묘에 올라가 묵주 기도를 바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나중에 심해지는 박해를 피해 광주군 함박동에서 살다가 포졸들이 들이닥쳐 피신하고 구걸을 하면서 유랑 생활을 하였다. 장사를 시작하려고 빚을 내었지만 실패하고, 어느 날 읍내 저자에 다녀오겠다고 나간 후 소식이 끊겼다.
[자료: 《한국 초기 천주교회의 여정》(장영돈 편저)에서 발췌 요약]
3. 1편(김대건.최양업 가문과 성장기 관련 성지 해설
가. 여사울 성지(내포의사도 이존창 루도비꼬)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李存昌, 1759-1801년)의 생가 터가 있는 여사울은신례원 본당의 공소를 거쳐 2008년 성지본당으로 지정되었으며, 주민의 상당수가 천주교 신자로 구성되어있는 선교의 요람이다.
‘내포’(內浦)라 함은 충남 아산(牙山)에서 태안(泰安)까지의 평야 지대를 일컫는 지명으로, 삽교천(揷橋川)과 무한천(無限川)의 두 물줄기가 흐르는 충남 중서부 지역의 총칭으로 사용된다.
이 지역은 이존창을 비롯해 복자 김진후 비오(金震厚, 1739-1814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1821-1846년) 신부 등 많은 순교자를 배출해 낸 곳이다. 김대건 신부의 출생지인 솔뫼와 인근의 합덕, 이존창의 출생지인 여사울 등 유서 깊은 교우촌과 본당들 그리고 해미 · 덕산 등의 순교자들이 이 지역에 산재해 살았다.
농민 출신으로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의 여사울에서 태어난 이존창은 초기 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權日身, 1742-1792년)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열렬한 신앙심과 학구심으로 초기 교회 가성직단(假聖職團)의 일원이 되어 신부로서 고향인 충청도 지방 복음 선교의 사명을 받았다.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가족은 물론 내포 지방 일대에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훗날 ‘내포의 사도’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가성직 제도가 교리에 어긋남을 깨닫고 신부 영입을 위해 복자 윤유일 바오로(尹有一, 1760-1795년)와 지황 사바(池璜, 1767-1795년) 등에게 여비를 주어 중국 북경을 찾게 하여 마침내 복자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1752-1801년) 신부를 맞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1791년 신해박해 때 그는 다른 수많은 천주교인들과 함께 관헌에게 붙잡혔다. 혹독한 고문과 가혹한 매질은 그로 하여금 배교의 쓴맛을 보게 하였다. 그 뒤 양심의 가책으로 내포 지방을 떠나 홍산(鴻山)으로 이사하여 전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전보다 더욱 열심히 신앙을 지키며 전교에 힘썼다.
그 결과 내포 지방은 다른 어느 지방보다도 교세가 크게 성장했고, 이에 따라 박해 때마다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 집안도 이존창의 전교로 입교했는데, 김대건 신부의 할머니는 그의 조카딸이 되며, 최양업 토마스(崔良業, 1821-1861년) 신부도 그의 생질(甥姪)의 손자이다. 더욱이 오늘날 조선 교우의 거의가 그가 개종시킨 교우들의 자손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그가 전교 활동에 끼친 공헌은 지대하다.
1795년 말에 이르러 그는 다시금 지방 관리들에게 체포되어 고향인 천안으로 옮겨져 6년 동안 연금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1801년 다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그 해 4월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丁若鍾, 1760-1801년)와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충청도의 감사가 있는 공주(公州)로 호송되어 황새바위에서 42세를 일기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나. 솔뫼성지(김대건)
1845년은 한국 교회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金大建, 1821-1846년) 신부가 사제품을 받고 귀국한 역사적인 해이다. 세계 교회 역사상 그 유래가 없이 자생적으로 설립된 한국 천주교회는 그 해 김대건 신부의 사제 서품과 귀국으로 비로소 명실상부한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솔뫼는 바로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탄생지로서, 성인이 박해를 피해 조부 김택현(金澤鉉)을 따라 용인 땅 골배마실로 이사 갈 때인 일곱 살까지 살았던 곳이다.
‘소나무가 우거진 작은 동산’이라는 뜻을 가진 ‘솔뫼’는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이곳은 김해 김씨 안경공파에 속한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金震厚, 1739-1814년 순교), 종조부 김종한 안드레아(金宗漢, ?-1816년 순교, 족보에는 漢鉉으로 나옴),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金濟俊, 1796-1839년 순교) 그리고 김대건 신부 등 4대의 순교자가 살던 곳이다. 김대건 신부는 바로 이곳에서 사제품 받고 1년 만인 1846년 순교하기까지 그의 삶을 채웠던 뜨거운 신앙과 열정을 배웠던 것이다.
이 작은 마을에 복음이 전래된 것은 김대건 신부의 조모 이씨의 삼촌이며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코가 그의 고향인 충청도 지방의 전교를 맡으면서 시작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가 면천 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그는 이존창으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는 곧 벼슬을 버리고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로부터 이곳 솔뫼는 교우촌이 되었다.
하지만 1791년 전라도에서 제사 문제로 일어난 진산 사건으로 그 역시 신해박해의 회오리에 휩쓸려 홍주 · 전주 · 공주 등지의 옥에 갇히게 되었고,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귀양을 떠나야만 했다. 그 후 귀양에서 풀려 돌아온 후 1805년 또다시 붙잡혀 해미 감옥으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10년간 옥중 생활의 고통을 참아내던 중 1814년 12월 1일(음력 10월 20일) 75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1821년 8월 21일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와 모친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김대건 신부는 재복(再福)이라는 아명으로 솔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 김대건 일가가 살던 집은 아흔아홉 칸이나 되는 큰 집이었다고 한다.
솔뫼에서 대대로 명망이 높았던 김씨 가문이었지만 김진후가 수차례 체포되기를 반복하고, 1805년부터 10년간의 긴 옥중 생활을 하면서 가세가 기울어 신앙을 지키고 살기가 어려워졌다. 셋째 아들 종한은 부친이 옥중에 있을 때 경상도 안동 땅으로 피난을 갔다가 붙잡혀 1816년 대구 감영에서 순교하였다.
둘째 아들 택현은 1827년 아들 김제준과 손자 김대건 등을 데리고 경기도 용인 땅 ‘골배마실’이라는 산골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오랫동안 살아왔던 집과 땅이 있는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김씨 일가의 피난길은 설움과 눈물이었지만 신앙을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에서 나온 결단이었다.
선대의 신앙을 이어받은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은 성 모방(Maubant) 신부로부터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고 회장에 임명되어 전교에 힘쓰면서 자신의 아들을 사제의 길로 인도하였다. 그리고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그 해 9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다. 해미 읍성(김진후)
▲ 해미읍성 옥터와 김진후(비오) 동상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처형한 해미는 일찍이 천주교가 전파된 내포 지방의 여러 고을 가운데서 유일하게 진영이 있던 군사 요충지였습니다.
1418년에 병영(兵營)이 설치되었고. 1491년에 석성이 완공된 해미 진영은 1790년대로부터 100년 동안 천주교 신자들을 무려 3천 명이나 국사범으로 처결한 곳입니다. 내포 일원의 해안 수비를 명목으로 진영장은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해미 진영은 홍주 진관(洪州鎭管)에 속하며 홍주 영장(종3품)의 지휘를 받아, 서해안 일대의 고을에서 잡힌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이 신자들 중의 지체가 높은 사대부 출신들은 모두 상급 기관인 홍주 영장 및 충청 감사가 있는 공주로 이송하고, 신분이 낮은 서민들만 자의적으로 대량 처단한 것 같습니다.
해미 읍내에는 순교 기념지가 여러 곳이 있으나. 공식 형장은 서문 밖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음은 성내에 있던 옥 터인데 여기에서 많은 교우들이 옥사 또는 교수형을 당하였습니다. 해미의 첫 순교자는 1797년의 정사박해로 체포되어 1800년에 순교한 인언민 마르티노와 이보현 프란치스코 입니다.
이어 1814년에는 김진후 비오가 해미에서 옥사로 순교했으며, 그 외에도 1811년∼1839년의 중기 박해 기간 동안 민 베드로 첨지 등, 9명이 해미에서 신앙을 굳게 증거한 뒤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1866년 이후로 진행된 병인박해 때에는 모두 122명에 이르는 순교자가 해미에서 탄생 하였습니다.
해미읍성 감옥 터와 호야나무
높이 5m 길이 1,800m의 석성으로 옹벽을 두른 해미 진영 안에는 동헌 동남쪽 1,800평 대지 위에 내옥, 외옥으로 구분되던 감옥이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 시대의 감옥은 높은 담으로 둘러쌓은 울안에 있었는데. 바닥에 멍석을 깔아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말할 수 없이 더워, 한여름 매 맞은 상처는 곪기 일쑤였으며. 고문과 굶주림과 갈증과 질병으로 순교자들의 몸이 스러져 가던 감옥은, 헐려 없어졌으나 최근 다시 복원하였습니다.
그 감옥 터 옆에 있는 호야나무는, 지금도 묶어 매달고 몽둥이로 치면서 고문하던 흔적으로, 오늘도 이 나무의 묵은 가지는 녹슨 철사 줄에 움푹 패이도록 옛 님들의 아픔을 살갗에 두르고 있습니다.
병인박해 때 이 감옥 사정을 목격한 이주필(李周弼)씨는 이렇게 증언했다고 합니다.
"성 중앙에 담을 길반이나 넘도록 쌓아올린 3간 와가가 있으니 그것이 옥이다. 그 속에 30-40명 가량이 갇혀 있었다. 그 담 밖에 큰 고목이 하나 서 있었는데 그 나무에 교우들의 목을 옭아 매여 죽였다.
그 옆에 또 바깥옥이 있는데 역시 3간 와가이다. 그 안에는 십자 패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는데 문을 열어 놓아도 도망치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이 천주학 하는 사람들이었다. 거기서 북쪽 산 밑에 10여간 되는 와가가 관아이고 여기서 영장이 정사를 다스렸고, 그 우편 아래로 또 큰 와가가 있었는데 그것이 객사였다.
특히 당시 토포병방(討捕兵房)이던 박영완이란 자는 살기가 등등하여 무죄한 사람을 많이 죽였다. 박영완은 심지에 불을 붙여갖고 죽은 사람마다 눈에다 대어보고 아직 덜 죽은 사람을 발견하면 막 때려 죽여 버렸다. 박영완은 얼마 후에 홍주로 잡혀가서 맞아죽고 자손없이 절손으로 끝을 맺었다. 외교인들까지 모두 천벌이라고 말했다."
고 전합니다.
해미지역 순교자 복자 김진후 비오
충청도의 내포 평야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면천의 솔뫼(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태어난 김진후 비오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증조부요, 1816년에 순교한 김종한 안드레아의 부친이다. 족보에는 그의 이름이 ‘운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라. 한덕골
▲ 한덕골 성지 최양업 김대건 동상
경도 용인시 이동면 묵 4리(龍仁市 二東面 墨4里)에 위치한 한덕골(閑德洞)은 박해시대 천주교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들어 교우촌(敎友村)을 이루고 살았던 사적지이다.
한국인 첫 사제인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1821-1846) 신부 가족들은 박해를 피해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솔뫼를 떠나 서울 청파를 거쳐 이곳으로 피난 와서, 처음에는 기거할 집이 없어 마을 근처 성애골(현재는 매몰되었음) 골짜기에 들어가 산(生) 나무와 산 나무에 칡으로 얽어매고 억새풀을 덮고서 살았었다는 눈물겨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곳 한덕골 출신 순교자로는 성 김대건 신부와 부친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 1795-1839 성인을 비롯하여, 김 시몬(1870년 순교, 40세), 김 마리아(1866년 순교, 42세) 등이 있다.
마. 골배 마실
골배마실은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가 소년 시절을 보낸 곳이다. 그 옛날 김대건 신부는 그의 나이 15세 때 신학생 후보를 찾아 헤매던 모방 신부에 의해 장래 조선 교회를 이끌 목자의 재목으로 선택된다. 그리고 사제가 되기 위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몸과 마음을 준비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김 신부의 집안에 신앙이 스며든 것은 그의 증조부 김진후로부터 시작된다. 그가 면천 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그는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으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곧 벼슬을 버리고 신앙에 전념한다. 하지만 1791년 진산 사건으로 그는 옥에 갇히고 1801년 신유박해 때는 유배를 가기도 한다. 1805년 다시 붙잡힌 그는 결국 10년의 옥고 끝에 순교한다.
그로부터 7년 후 김대건 신부가 탄생하고 재복이라는 아명으로 7살까지 솔뫼에서 성장한다. 그러다가 김진후의 둘째 아들이자 김 신부의 조부인 김택현이 가세가 기울고 더 이상 신앙을 지키기가 어려워지자 가족들을 이끌고 바로 이곳 경기도 용인 땅 골배마실이라는 산골로 삶의 터를 옮겼다. 오랫동안 살아왔던 집과 땅을 떠나야 했던 이들의 피난길은 설움과 눈물로 가득 찼지만 이는 신앙을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에서 나온 결단이었다.
한편 골배마실에 살던 김대건의 부친 김제준은 사위 곽(郭) 씨의 밀고로 체포되어 순교하였으며, 아내 고 우르술라는 동냥으로 목숨을 부지해야만 하였다. 그러니 첫 번째 방인 사제가 되어 귀국한 뒤 모친을 뵙게 된 아들 김대건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김대건이 골배마실로 돌아와 모친과 함께 생활하면서 은이 공소를 중심으로 활동한 것은 1845년 말부터 다음해 부활절까지였다. 그러다가 그는 황해도 지방의 해로를 개척하러 나갔다가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김대건 신부의 가족이 고향인 충청도 솔뫼를 떠나 서울 청파동을 거쳐 용인 땅에 정착한 것은 대략 1827년경이었다. 당시 그의 가족이 정착하여 교우촌을 일군 곳은 골배마실이 아니라 남쪽 산너머에 있는 '한덕골'(寒德洞,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묵4리)이었다.
김제준은 그 후 가족들을 이끌고 1835년 무렵에 한덕골에서 골배마실로 이주하였다. 이 골배마실은 본래 한덕골에서 북쪽으로 뻗은 산과 어은이 고개를 넘으면 곧바로 갈 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이 길이 막혀 버리고, 양지 방면에서만 들어갈 수가 있게 되어있다. 한편 골배마실 서쪽에 있는 '숨은 이들의 마을'인 '은이'는 지금으로부터 약 160년 전에 형성된 교우촌으로, 이곳 형제봉 아래는 박해 때문에 떠돌게 된 경기도와 충청도 교우들이 모여 비밀리에 신앙 공동체를 이룩한 곳이다.
모방 신부는 1836년 초에 김제준의 방문을 받고, 7월경에 골배마실을 들러 김대건을 신학생으로 선발한 뒤 은이 공소에서 성사를 집전하였다. 이처럼 이동면의 한덕골, 내사면의 골배마실과 은이 공소는 일찍부터 교우촌으로 일구어진 곳이며 김대건과 최양업 두 신부 집안과 관계가 깊은 곳이었다. 또 한덕골에는 김 신부의 조부인 김택현과 숙부인 김제철의 무덤, 최 신부의 중백부인 최영겸의 무덤이 있었고, 1839년에 체포되어 순교한 김제준 성인의 무덤도 골배마실 어딘가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 이들의 무덤을 찾을 길은 없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8년 6월호]
바. 다락골 성지, 새터 (최양업 생가터)
신학생 아들을 둔 부모들이 밤낮을 기도와 희생으로 살아가며 부디 아들이 성인 사제되기를 염원하듯이 최경환 성인은 아들 양업을 위한 끝없는 기도의 삶을 살았고 마침내는 굳건한 신앙으로 순교의 길을 걸었다.
차령산맥의 줄기가 지나는 청양군은 대부분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지대가 높은 편이다. 청양읍에서 대천에 이르는 서쪽으로 포장도로를 가다 보면 화성면이 나오고, 면 소재지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계곡을 따라 오르면 최양업 신부와 그의 부친 최경환이 탄생한 당시 홍주(洪州) 다락골이 나온다.
36번 국도에서 다락골 줄무덤 입구까지는 순례자들이 찾기 쉽도록 잘 포장되어 있는 양업로가 뻗어 있다. 이 양업로를 따라가다 보면 최경환 성인의 생가터가 눈에 띄는데 마치 수줍은 새색시 모양 숨어 있다. 인근에는 최경환과 최양업 신부의 목을 축여 주었던 새터 우물이 아직도 보존돼 있다. 최양업 신부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한 최경환 성인의 생가터에는 박물관 겸 소성당이 들어설 예정이다.
다락골은 최씨 문중이 오랫동안 살아온 곳으로 최 신부의 조부 최인주가 신해박해(1791년) 때 피난해 정착함으로써 유서 깊은 교우촌이 됐다. 하지만 이곳에서 남부럽지 않은 집안을 일구어 오던 최씨 문중은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고향을 멀리 떠나 방랑 생활을 해야만 했다.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최경환의 집안은 원래 교회 창설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오던 집안이라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 생활을 했고 성장해서는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李存昌)의 후손인 이성례(李聖禮)와 결혼한 뒤 가족들과 상의해 교우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로 이주한다.
청양 다락골에서 3대째 신앙을 지켜 왔고 지역에서 당당한 풍모를 자랑하던 최씨 집안은 장남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돼 마카오로 떠난 후 고발을 빙자한 수많은 협잡배들로 인해 가산을 탕진하고 가족과 함께 서울 벙거지골, 강원도 춘천 땅으로 유랑길을 나선다. 하지만 계속되는 배신자들의 등쌀로 다시 경기도 부평으로 옮겨야 했고 최후에 정착한 곳이 바로 수리산 깊은 골짜기였다.
내포지방에 대한 박해의 손길은 이곳 다락골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포졸들이 포악하게 교우들을 잡아갈 때 어린 아이들이 무서워 울음을 터뜨리니 엄마가 "얘야, 지금 죽어야 천당간다."라고 달래어 함께 천당으로 데리고 갔다 합니다. 그 당시에 감영은 홍주, 그러니까 지금의 홍성에 있었습니다.
1866년 대원군에 의한 병인박해 때 순교한 치명자들의 묘소로 추정되는 37여기 묘가 이곳 다락골에서 줄무덤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묘들의 주인공들이 누구인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홍주와 공주에서 순교한 교우들이라는 설과 해미나 갈매못에서 순교한 교우들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다만 최양업 집안에서 이들의 유해를 순교지로부터 야음을 타 급히 옮겨다가 이 마을 뒷산인 이곳에 매장하였다는 증언을 이 마을 노인들이 전하였습니다. 최양업 신부님 집안들은 박해가 닥칠까봐 이 무덤이 신자들의 것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으나 몇 년 뒤 이 사실을 안 조정에서 이 마을을 불살랐고, 교우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사. 담배 골(수리산 성지) 최경환. 이성례
서울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는 안양 수리산은 예로부터 담배를 재배해 왔다 해서 ‘담배 골’ 또는 골짜기의 생김새가 병목처럼 잘록하게 좁다고 해서 ‘병목골’이라고도 불리었던 곳으로 깊은 골짜기가 많아 박해 시대 때 외계와 단절된 천혜의 피난처 구실을 해왔다. 수리산 속에 있었던 '뒷듬이' 마을은 푸른 소나무 숲 속에 숨겨진 작은 마을이었다.
이곳은 땅이 척박하였으므로 담배밭을 일구고, 옹기장사를 하며 살아가던 작은 마을이었지만, 기해박해(1839년) 때 천주교인들이 들어와 살면서 오랫동안 교우촌으로 이어져왔다. 천주교도들이 조정의 천주교 박해로 인하여 이곳에 정착 이주하면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하여 담배를 경작했다고 하여 담배촌이라 칭하게 되었다. 수리산은 박해 시대 때 외계와 단절된 천혜의 피난처 구실을 해 왔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로 피땀 어린 사목 활동을 폈던 최양업 신부의 부친 최경환(崔京煥, 1805-1839년) 성인의 묘가 수리산 적막한 골짜기에 모셔져 있다. 이곳에는 남부럽지 않은 집안을 일구어 오다가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고향을 멀리 떠나 방랑해야 했던 그들 일가의 애환이 서려 있다.
최경환 성인은 본래 청양 다락골 사람이었다. 3대째 신앙을 지켜 왔고 지역에서 당당한 풍모를 자랑하던 최씨 집안은 장남 최양업이 신학생이 되어 마카오로 떠난 후 고발을 빙자한 수많은 협잡배들로 인해 가산을 탕진하고 가족과 함께 서울 벙거지골, 강원도 춘천 땅으로 유랑길을 나선다. 하지만 계속되는 배신자들의 등쌀로 다시 경기도 부평을 헤매야 했고 최후에 정착한 곳이 바로 수리산 깊은 골짜기였다.
1837년 7월 수리산에 들어와 산을 일구어 담배를 재배하면서 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을 모아 교우촌을 가꾸면서 그는 전교 회장직을 맡아 열렬한 선교 활동을 편다. 하지만 그를 쫓는 발길은 이 깊은 산 속에까지 미쳐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하지만 기록에 보면 그는 체포라기보다는 스스로 순교의 각오로 포졸들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는 어느 날 새벽 포졸들이 집앞에 들이닥치자 "어찌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우리는 당신들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직 동이 트질 않았으니 좀 쉬었다가 떠납시다."라며 동네 사람들에게 순교의 용기를 북돋는다.
그의 부인 이성례(李聖禮)가 차려 준 아침을 먹고 난 포졸들은 40여 가구에서 골고루 한 명씩을 잡아갔지만 최경환만은 아들을 유학 보냈다는 죄목으로 부인 이성례, 아들 희정·선정·우정·신정 그리고 젖먹이까지 모두 일곱 식구를 잡아가 옥에 가두었다.
1839년 9월 12일 최경환 성인은 치도곤을 맞은 후유증으로 옥에서 치명한다. 그리고 이듬해 1월 31일에는 그 부인 이성례가 당고개에서 참수된다. 어머니의 참수를 앞두고 소식을 들은 어린 4형제는 온종일 동냥한 쌀자루를 메고 희광이를 찾아가 단칼에 어머니를 하늘 나라로 보내 달라며 쌀자루를 건네는 눈물겨운 장면을 연출한다.
그리고 당일 한칼에 목이 떨어지는 어머니를 먼 발치에서 바라보던 어린 자식들은 동저고리를 벗어 하늘에 던지며 어머니의 용감한 순교를 기뻐했다고 전한다.
아. 우,포도청과 좌,포도청(최경환)
우포도청 터: 우포도청은 조선 중종 무렵 설치되어 1894년까지 350여 년 동안 존속한 서울의 포도, 순라 기관으로 중부 서린방 혜정교 남쪽 인근(현 광화문 우체국 자리)에 위치하였으며, 서울 서부, 북부와 경기 우도 등을 담당하였다.
103위 성인 중 22위, 124위 복자 중 5위가 포도청에서 순교하였는데, 기록상 분명히 우포도청에서 순교한 성인으로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순교의 영광을 얻은 유대철 베드로 성인이 있으며, 병오박해 때 한이형 라우렌시오, 우술임 수산나, 김임이 데레사, 이간난 아가타, 정철염 가타리나가 우포도청에서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가 혹독한 매질 아래 순교하였다.
‘기해일기’를 쓴 현석문 가롤로 성인도 우포도청에 갇혔는데, 신자들을 위로하고 순교로 나아갈 수 있도록 권면하였다.
특히 우포도청은 한국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장소이다. 1879년 드게트 신부와 함께 체포되어 우포도청에 수감되었던 이병교 레오, 김덕빈 바오로, 이용헌 이시도로가 이곳에서 아사하여 한국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가 되었다.
또한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순교를 앞두고 그의 마지막 옥중 서간을 작성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좌 포도청 터: 좌포도청은 한성부 정선방 파자교 동북쪽(현 종로구 단성사 일대)에 위치하여 조선 시대 서울 동·남·중부와 경기좌도를 관할하였으며, 중종 무렵 설치되어 고종 31년(1894년) 7월 경무청으로 개편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포도청에서 천주교 박해에 개입한 것은 1795년 북산 사건으로 발생한 을묘박해 때가 최초였다. 박해 시기 수많은 신자들이 좌·우포도청에서 순교하였으나, 기록상 좌·우포도청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103위 성인 가운데 22명, 124위 복자 가운데 5명이 포도청에서 순교하였다. 기록상 명확하게 좌포도청에서 순교한 성인으로는 최경환 프란치스코, 유대철 베드로, 민극가 스테파노, 허임 바오로, 남경문 베드로, 임치백 요셉 성인이 있다.
복자 가운데에는 1795년 을묘박해 때 윤유일 바오로, 지황 사바, 최인길 마티아가 좌포도청으로 끌려와 혹독한 매를 맞고 순교하였다.
또한 기해박해 때 103위 성인 가운데 70명이 포도청에서 온갖 문초와 형벌을 받았는데, 정하상 바오로,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 모방신부 등이다.
자. 당고개 성지(이성례)
당고개 순교지는 서소문 밖 네거리, 새남터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성인을 탄생시킨 성지이다. 한국 교회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서소문 밖 네거리 형장에서 41명의 순교자들이 목숨을 잃은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이곳 저자거리를 중심으로 하던 장사치들은 음력설 대목장에는 처형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서소문 밖 형장을 피해 조금 한강가로 나간 곳이 당고개이다. 원효로 부근 만초천(蔓草川) 변에 위치한 이곳은 1840년 1월 31일과 2월 1일 양일에 걸쳐 10명의 남녀 교우들이 순교함으로써 기해박해를 장엄하게 끝맺은 거룩한 곳이다.
특히 이들 가운데 어린 자식을 거느린 세 어머니는 천주에 대한 뜨거운 사랑에서 모성애까지도 초월하고 순교의 월계관을 차지했다.
이곳에서 순교한 이들 중에서 박종원 아우구스티노, 홍병주 베드로와 홍영주 바오로 형제, 손소벽 막달레나, 이경이 아가타, 이인덕 마리아, 권진이 아가타, 이문우 요한, 최영이 바르바라 등 9명이 성인품에 올랐다.
하지만 당고개의 순교자이면서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의 부인이요,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어머니인 이성례 마리아만은 시복 조서에서 제외돼 성인품에 오르지 못했다.
기해박해 순교자의 시복 조서를 꾸밀 때 왜 이성례 마리아를 제외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그가 옥에 갇혀 있을 때 젖먹이 자식이 아사(餓死)를 당함으로써, 나머지 네 아들의 목숨만이라도 살리겠다는 일념에 잠시나마 배교를 범함 때문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본래 부모와 함께 어린 아이를 투옥시키는 일은 국법에도 없었으나 큰아들 최양업을 사제로 봉헌하기 위해 외국에 유학 보낸 이 집에 대해서는 예외였다. 어머니와 함께 옥에 갇힌 아이들은 국법에도 없는 일이라 밥도 나오지 않고 어쩌다 한 덩어리 밥이 나오면 어린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굶기 일쑤였다.
세 살짜리 막내는 그나마도 얻어먹지 못해 빈 젖을 빨다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어린 자식의 죽음을 눈앞에서 당한 어머니는 자칫 네 자녀를 모두 죽이고 말 것만 같아 짐짓 배교하겠노라고 하고 옥을 나왔다.
지극한 모성애와 극도의 슬픔 속에서 그는 어쩔 수 없는 인간적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성례 마리아는 아이들과 문전걸식으로 목숨을 부지하다가 남편 최경환이 홀로 감옥에서 겪을 고통을 생각하고 아이들이 동냥 간 사이 다시 남편 곁으로 돌아와 다시금 갇힌 몸이 되었다.
6세부터 15세까지 네 형제가 부모를 가둔 옥에 찾아와 울부짖자 철이 든 맏이 희정은 어머니가 다시 배교할 것을 우려해 어린 동생들을 달래 발걸음을 돌렸다.
그 후 동냥한 음식을 틈틈이 부모에게 넣어 주면서 이성례가 참수되기 하루 전 어린 형제들은 동냥한 쌀과 돈 몇 푼을 들고 희광이를 찾았다.
“우리 어머니가 아프지 않게 한칼에 하늘나라에 가도록 해주십시오.” 이에 감동한 희광이는 밤새 칼을 갈아 당고개에서 그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먼발치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본 어린 4형제는 동저고리를 벗어 하늘에 던지며 용감한 어머니의 순교를 기뻐했다는 눈물겨운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모성을 초월해 순교한 이성례 마리아는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있던 예전 당고개 성지에 올라서면 한가운데 순교 현양탑이 있고 한쪽으로는 기념제대가 있었다.
이 제대는 여성 순교자가 많이 시성된 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1986년 서울대교구 가톨릭 여성연합회에서 봉헌하였다.
제대 뒤로 당고개 순교자들을 표현한 청동 부조상에는 열 명의 순교자와 한복 차림의 예수님이 있고, 성지 둘레에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제2편 : 신학생 선발과 유학 로
1. 최초의 신학 유학생(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조선조 헌종 2년(1836년) 섣달,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는 열 명 가량의 조선인들이 있었는데, 그 일행 가운데는 15세 전후의 세 소년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그때 조선엔 잡입하여 활동하던 프랑스인 모방(Maubant) 신부한테 뽑혀 머나먼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는 중이었으니, 그들 세 명이 바로 김대건(안드레아), 최양업(토마스), 최방제(프란치스코)였습니다.당시 조선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었음으로 모방 신부 자신이 숨어다녀야 하는 처지였고, 따라서 어떠한 교육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마카오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의 신부들과 상의한 끝에 어린 소년들을 그곳에 보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한국 천주교회에서 파견한 밀사들의 안내로 입국한 모방 신부는 최양업 소년을 한국의 첫 신학생으로 선발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15살이었으며,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양업은 1836년 2월 6일 서울의 모방 신부 댁에 도착하여 라틴어 수업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어 모방 신부가 신학생으로 간택한 최방제 프란치스코가 3월 14일에, 김대건 안드레아가 (1836.4월 경기도 용인의 '은이 공소'에서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뒤 신학 생 후보로 선발)
7월 11일에 각각 도착하여 함께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는 한국이 낳은 최초의 성직자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삶은 25년이란 짧은 기간이었고, 더욱이 사제로서 생활한 시간은 겨우 1년 남짓하였으므로 그의 생애는 오히려 최초의 신학 유학생으로서, 그리고 쇄국조선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입국로를 찾는 고난의 여행자로서 설명되어야 할 것입니다.한편, 최양업은 1836년 12월 3일, 동료 신학생들과 함께 성서에 손을 얹고 순명을 서약하고 마카오 유학길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중국 대륙을 남하하여 다음해 6월 7일에는 마카오에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도착하였으며, 이때부터 그곳에 임시로 설립된 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이 처음 여행한 조선의 한양에서 중국의 남단 마카오까지는 9천리 남짓, 북경을 왕래하는 사신들만이 국경 통과가 허용되던 조선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먼 여행이었으나 조선을 떠난 소년 김대건은 동료들과 함께 중국인 신자들의 인도로 1837년 6월 7일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마카오에서의 유학 생활은 1842년까지 계속되었는데, 1837년 11월에는 동료인 최방제가 열병으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고, 1839년에는 마카오의 소요로 인해 필리핀의 마닐라로 장소를 옮겨 수업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같은 해 말에는 마카오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생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게다가 조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조차 좋지 않았으니, 1839년에는 기해박해가 일어나 교회 지도자들과 많은 신자들이 죽었고, 모방신부도 새남터(현 용산 전철역 부근)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게 된 것입니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아직 공부가 끝나기도 전인 1842년 4월에 마카오를 떠나게 됩니다. 한국과의 통상 조약을 원하는 프랑스 함대에서 통역자를 필요로 했기 때문으로. 이때 극동 대표부의 장상인 리브와(Libois) 나폴레옹 신부는 박해로 끊어진 한국 천주교회와의 연락을 기대하고 최양업과 김대건을 각각 다른 프랑스 함대에 승선토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가 남경에 도착한 후 더 이상의 북진을 원하지 않게 되자 최양업과 김대건은 프랑스 함대에서 내려 요동으로 가게 되었는데, 한국으로의 입국 로 탐색을 위해서였습니다.
이후 최양업은 만주의 소팔가자로 거처를 옮겨 조선 대목구의 부주교인 페레올(Ferreol) 요한 주교로부터 계속 수업을 받았고, 1843년에는 리브와 신부를 통해 프랑스 파리의 무염성모성심회에 가입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조국에서 일어난 박해와 순교자들의 소식을 듣게 되는데, 이때 그는 프랑스로 귀국해 있던 스승 르그레즈와(Legregeois) 베드로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저는 우리 부모들과 형제들을 따라갈 공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저의 신세가 참으로 딱합니다. 그리스도의 용사들의 그처럼 장열한 전쟁에 저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말입니다. 정말 저는 부끄럽습니다! 이렇듯이 훌륭한 내 동포들이며, 이렇듯이 용감한 내 겨레인데, 저는 아직도 너무나 연약하고 미숙함 속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 당신 종들의 피가 호소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당신의 넘치는 자비와 당신 팔의 전능을 보이소서. 언제쯤이나 저도 신부님들의 그다지도 엄청난 노고와 저의 형제들의 고난에 참여하기에 합당한 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수난에 부족한 것을 채워, 구원 사업을 완성할 수 있을까요? 신학 수업을 계속하던 최양업은 1844년 12월 10일경, 동료 김대건과 함께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김대건 부제가 사제 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 성 다블뤼(Daveluy) 안토니오 신부와 함께 한국에 입국한 뒤에도 소팔가자에 남아 있으면서 매스트르(Maistre) 요셉 신부와 함께 귀국 로를 찾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경향잡지, 1996년 7월호, 차기진 루카(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자료실]
2. 최양업 신부의 유학로를 새로 밝히다.
조선 신학생 최양업(토마스),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김대건(안드레아) 3명이 중국 남부의 마카오를 목적지로 삼고 서울을 떠난 것은 1836년 12월 3일. 그들은 이로부터 6개월 동안 1만 리가 넘는 길을 걸어서 1837년 6월 7일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도착하게 된다. 실로 머나먼 타국 땅. 생전에 겪어보지 못한 더위, 습한 해풍과 싸워가면서 16세의 어린 신학생들은 사제의 길을 닦기 시작했다.
그러면 조선 신학생들이 마카오로 갈 때까지의 여정, 즉 유학 길로 선택한 경로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최양업, 김대건 신학생이 겪은 대부분의 여정은 거의 명확하게 밝혀졌지만, 유학로만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물론 유학로 중에서도 초기 여정은 ‘서울-평양-의주-구련성-봉황성 변문(책문)-심양’으로 이어졌을 것이고, 이러한 여정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는 것 같다. 북경을 왕래하는 연행사의 행로와 유사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문제는 ‘심양에서 마카오까지’의 여정이다. 여기에는 어린 신학생들이 하느님의 종으로 성장하기 위해 걸어야만 했던 희망과 고통의 급류가 함께 흘렀을 것이다. 그네들이 품었던 미래에 대한 막연함, 고향에 대한 향수도 남겨졌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길을 밝혀 보려고 한다. 지금까지 막연하게 설명되어 왔던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하고, 정확한 유학로를 찾아 그 길을 가보려고 한다. 그것은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진 또 하나의 숙제를 푸는 길이기 때문이다.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등 세 명의 신학생을 마카오로 보내면서 모방 신부는 마카오 대표부의 르그레즈와(P.L. Legregeois) 대표 신부에게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다. “샤스탕 신부가 조선 신학생들을 변문(즉 책문, 현 중국 요녕성 단동시 변문진)에서 마카오까지 어떻게 배려했는지에 대해 신부님께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샤스탕 신부의 서한 어디에서도 신학생들의 유학로에 대해 설명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변문에서 조선 신학생들을 만난 직후인 1836년 12월 30일자 서한과 조선 입국 이후인 1837년 9월 15일자 서한에는 신학생들에 대한 언급조차 없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더라도 ‘샤스탕 신부가 신학생들의 유학로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었다’거나 ‘신학생들의 유학로는 샤스탕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경로와 전혀 달랐다'고 결론지을 수밖에는 없다.
샤스탕 신부는 ‘산동 지방→북경 인근→심양→변문’을 거쳐 조선에 입국한 것으로 나타난다.
샤스탕 신부
당시 샤스탕 신부는 조선에 입국하기 전까지 산동 지역에서 사목하였고, 주로 산동 안내자들의 도움을 받아 조선 입국로를 탐색했었다. 그러나 그곳 안내자들은 중국 북부 지역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지만, 중국 남부 지역 특히 마카오로 가는 길은 잘 알지 못했다. 이에 샤스탕 신부는 서만자(현 중국 하북성 숭례현 서만자진)에 있던 ‘왕
요셉’ 신학생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왕 요셉 신학생. 그는 말레이시아 서쪽에 있는 작은 섬에 위치한 페낭 신학교 출신으로, 샤스탕 신부의 제자였다. 그는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B. Bruguière, 소 바르톨로메오) 주교의 안내자로 임명되어 오랫동안 중국대륙을 남에서 북으로 종단한 경험이 있었다. 또 브뤼기에르 주교가 서만자까지 오는 데 첨병 역할을 했었고, 1836년 1월 13일 조선에 입국한 최초의 프랑스 선교사 성 모방(P. Maubant, 나 베드로) 신부를 변문까지 인도한 경험도 있었다.
샤스탕 신부가 왕 요셉 신학생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은 1836년 9월 혹은 10월경이었다. 모방 신부의 서한을 통해 ‘조선 신학생들을 마카오로 보낼 계획’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에 왕 요셉은 2명의 서만자 안내자들을 데리고 샤스탕 신부와 약속한 북경 인근 지역으로 갔다. 당시 왕 요셉은 서만자 안내자들을 샤스탕 신부에게 소개하고, 그의 허락을 얻어 조선 신학생들을 마카오까지 데려가도록 할 예정이었다.
서만자 안내자들의 이름은 Touan 마리아노와 Tchen 요아킴. 그들은 이미 1835년에 브뤼기에르 주교와 모방 신부를 안내한 적이 있었고, 이후에도 조선교구(정확히 말하면 조선대목구)를 위해 일하면서 왕 요셉과는 깊은 교분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훗날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L. Imbert, 范 라우렌시오) 주교도 1837년 10월 말경 서만자에 도착한 뒤 그들을 만나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4개월 전에 조선 신학생들을 마카오로 인도한 사실을 알고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서한에 기록하였다.
1837년 (6월 7일) 마카오로 갔을 때 그 서만자 안내자들이 3명의 조선 신학생들을 데리고 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카오로 갈 때 288냥을 써버리고, 돌아올 때 188냥 5돈 6푼을 쓴 데다가 은으로 바꾼 결과 120냥의 손실을 입었습니다(앵베르 주교의 1838년 12월 3일자 서한).
이처럼 Touan 마리아노와 Tchen 요아킴은 조선 신학생들을 마카오까지 인도한 공로는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문제점도 지니고 있었다.
안내를 생업으로 삼고 있었던 까닭에 헌신적이지 않았고, 게다가 가난한 조선교구의 전교비를 헤프게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샤스탕 신부와 왕 요셉은 앵베르 주교가 지적한 것처럼 서만자 안내자들의 단점을 확인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 여정과 조선 신학생들의 유학로
1836년 12월 28일 변문(책문)에서 조선 교회의 밀사와 신학생 일행을 만난 샤스탕 신부는 조선 신학생들의 안내를 왕 요셉과 서만자 안내자들에게 맡겼다. 그런 다음 자신은 정하상(바오로), 조신철(가롤로), 이광렬(요한), 유진길(아우구스티노) 등 조선 밀사들의 안내를 받아 12월 31일(음력 11월 24일) 조선 땅을 밟게 된다.
이후 조선 신학생들은 조선의 밀사들과 헤어져 서만자 안내자들과 함께 엄동설한의 만주 벌판을 가로질러야만 했으니, 당시 최양업 신학생의 나이는 열다섯에서 열여섯 살로 넘어가고 있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이들. 게다가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낯선 이국의 풍경…… 남으로 향한 샤스탕 신부나 북으로 향하는 신학생들 모두에게 애달픈 상황이었다.
1836년 12월 28일 변문(책문)을 출발한 조선 신학생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은 중국 안내자들을 따라 북쪽에 있는 심양으로 향했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의 옛 수도인 성경(盛京, 만주어로는 묵덴)이 바로 이곳으로, 병자호란 때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8년 동안이나 억류 생활을 하던 조선관도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불안함이 앞섰을 신학생들의 눈과 귀에 무엇이 들어오겠는가?
변문에서 심양까지는 통원보→연산관→낭자산→요양을 지나는 4백여 리 길이다. 신학생 일행은 이곳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1천여 리에 있다는 목적지로 향했다.
심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또 다른 책문을 지나자 몽고계 유목민들이 넓게 거주하는 서부 타타르(Tartarie, 韃靼) 지역이다.
산야는 점점 거칠어지고, 마실 물도 구하기 어려운 척박한 곳이었다. 모든 것이 혹독한 추위에 갇혀버렸고, 어쩌다 마주치는 강물도 모두 얼어붙어 도로로 이용되고 있었다. 중간 중간에 나타나는 너른 초원 지대와 가축들. 유르트라고도 하고 파오라고도 하고 몽고어로는 게르(ger)라고 하는 이동식 천막집에서 환대를 받기도 하였다.
놀라운 것은 그 너른 땅에서 우연히 만난 것처럼 보이는 그네들 중에도 천주교 신자 가정이 있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진리를 따라 교리를 실천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얼마나 기묘한 섭리란 말인가? 그럴 때면 신학생 일행은 오랜만에 함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면서 감회에 젖곤 하였다. 타타르의 별을 보면서 걸을 때마다 생각나는 고국의 밤하늘. 휑하니 스치는 바람결에 가족들의 얼굴이 보이고, 모방 신부님도 보였다. 샤스탕 신부님은 무사히 서울에 도착하셨는지……
심양을 떠난 지 6백여 리를 지나 도착한 곳은 조양(朝陽)이라는 도시. 연락처로 이용되는 도시 외곽의 한 신자 가정에 도착하자 ‘서쪽 지역에서 박해가 일어났으니 조심하라’고 했던 것처럼 보인다. 왕 요셉 신학생과 중국인 안내자들은 ‘외국인이라는 것이 발각되지 않도록 유의하라’고 거듭 거듭 당부하는 눈치다. 그러나 명민한 신학생들은 벌써 중국인들 사이의 대화를 알아듣고는 눈치를 주기도 전에 머리를 끄덕인다.
유목민들은 참 부지런했다.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 하루를 준비했다. 중국인 안내자들도 게으름을 피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조선 신학생들은 더욱 부지런했다. 어린 나이에 고된 여정을 계속하면서도 새벽 기도를 빠트린 적이 없었다. 언제부턴가 풍토병으로 고생을 하게 된 최방제이건만 최양업과 김대건 신학생과의 기도에는 빠진 적이 없었다. 타고난 하느님의 종들.
아침 일찍 꽁꽁 얼어붙은 대릉하(大凌河)를 건넌 신학생 일행은 북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며칠을 더 걸어서 말라붙은 초원 지대를 통과했다. 지평선 위로 몽고인들의 촌락이 아스라이 보였다가 이내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만난 곳이 노하(老河) 또는 노합하(老哈河)라고 하는 강의 지류. 안내자 마리아노가 일행들에게 “이 노합하가 동쪽으로 흘러 서요하(西遼河)를 이룬다”고 설명한다.
유학로
이내 몽고인들이 ‘울란하드’(붉은 산이라는 뜻)라고 부른다는 도시 적봉(赤峰)을 멀리 우회한 뒤 사흘을 더 걸어서야 목적지로 정한 마을에 도착했다.
비록 타타르 지역의 오지에 위치해 있었지만 제법 큰 마을이었다. 노인들은 이 마을을 ‘삐엘리꾸’라고 불렀다. 한자로는 별납구(別拉溝) 혹은 별용구(別龍溝)라고 쓴단다. 마을 앞을 흐르는 시내의 이름이 바로 삐엘리꾸였다. 또 최근에 와서는 마찌아즈(馬架子, 현 내몽구자치구 적봉시 송산구 동산향)라 부르기도 한단다. 40여 년 전 라자로회 선교사들이 처음 복음을 전한 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천주교에 입교한 교우촌이었다.
왕 요셉 신학생은 어른들에게 인사를 마치자마자 조선 신학생들을 마을 뒤편으로 데리고 갔다. 공동 묘지인 듯 싶었다. 바로 그 묘역 중앙에 있는 비교적 잘 단장된 무덤. 무덤의 주인공을 알려주는 묘비도 있었다.
‘수탁(首鐸) 소공지묘(蘇公之墓). 도광(道光) 15년 8월 29일 입(立)’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1835년 10월 20일(양력) 세우다’
<아래 사진> : 2006년 1월에 다시 발견되어 5월 14일 원 묘소 앞에 안치 축복된 마가자(동산)의 브뤼기에르 주교 묘비(1835년 10월 모방 성인 신부 안치)
▲ 마가자 브뤼기에르(소 주교님) 묘비
마가자까지 오면서 왕 요셉이 내내 설명해 주었던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B. Bruguière) 즉 소(蘇) 바르톨로메오 주교의 무덤인 것이다. “주교님께서 1835년 10월 20일 마가자 교우촌에서 선종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모방 신부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세운 그 묘비였다. 위령 기도를 바치는 동안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신학생 모두의 마음은 한결같았다. 조선의 양떼들을 만나기 위해 끊임없이 고통과 고뇌의 강물을 건너던 브뤼기에르 주교를 닮으려 하고 있었다.
북경대목구의 사목 관할 구역 중에서도 요하(遼河) 서쪽 지역은 대부분 라자로회 선교사들의 사목 지역이었다. 그중에서도 마가자 교우촌은 선교사들이 북경이나 심양으로 가는 길에 위치하고 있는 중요한 경유지였다. 실로 오랜만에 조선 신학생과 안내자들도 마음놓고 피로에 지친 몸을 달랠 수 있었다.
조선 신학생 일행은 신자들의 배웅 속에 브뤼기에르 주교의 무덤과 마가자 교우촌을 뒤로하고 남쪽을 향해 다시 발길을 재촉하였다. 이제 걷는 일이 이력이 날 법도 하건만, 여전히 안내자들의 발걸음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왕 요셉 신학생은 길을 가면서도, 쉬는 동안에도 브뤼기에르 주교님의 열정과 조선 사랑에 대해, 페낭 신학교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대해, 그리고 모방 신부님의 순명과 용기에 대해 이야기해 주곤 하였다.
여전히 척박한 타타르의 구릉과 끝없이 너른 목초 지대. 서부 타타르 지역은 동부 지역보다 더 거친 듯이 보였다. 그 가운데는 몽고인들만이 아니라 만주인들이 사는 촌락도 더러 나타나곤 하였다. 안내자들의 말을 들으니, 만주인들의 말 중에는 알아듣지 못하는 내용이 많다고 한다. 또 그들은 자신들의 글자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의 집은 이동식 천막 게르가 아니라 황토 벽돌로 지어져 있었다. 청나라 황실에서는 같은 종족인 만주족들이 한족이나 몽고인들의 거주 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을 장려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흘을 걸어 도착한 곳은 라마묘(喇嘛廟, Lamamiao)라고 하는, 인근에서는 제법 큰 읍이었다. 읍 한쪽에 교우들의 집이 모여 있어 그리 위험하지는 않았다. 이곳에서 남서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다시 나흘을 걸은 끝에 작은 마을인 오호(五號, Ou Hao)에 도착하였다. 여기서는 또 하나의 중간 목적지인 서만자(西灣子)가 하루 길도 안 된다고 한다. 바로 그곳에는 소신학교가 있고, 프랑스 라자로회 선교사들도 계시며, 작은 성당도 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면서 조선 신학생들의 마음은 설레기 시작하였다.
서만자 교우촌. 장씨(張氏) 집안 사람들이 일구어 온 비교적 큰 읍이었다. 노인들은 이 마을을 ‘시방’(Sivang)이라고 불렀다. 황토 구릉지대에 위치한 곳으로, 먹을 것도 마실 것도 부족한 듯이 보였지만, 사람들의 얼굴에는 그런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서만자 사람들 모두가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앙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들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이미 100년이 넘었다고 한다.
왕 요셉 신학생은 우선 조선 신학생들을 라자로회 장상인 물리(J.M. Mouly, 孟振生) 신부에게 데리고 가서 인사를 시켰다. 그러고 나서 신학생들을 성당으로 안내해 설명해 주고, 소신학생들과의 만남도 주선해 주었다. 조선 신학생들과 비슷한 또래 학생들도 있고, 더 나이 많은 학생들도 있었다.이곳에서 공부를 마친 소신학생들은 마카오의 대신학교로 간다고 한다. 교우들의 집은 성당과 소신학교 주변에도 있었지만, 뒤편 언덕에 더 많았다. 언덕 중간 중간에 토굴을 파서 집을 지은 것이다.왕 요셉 신학생이 어느 한 토굴집을 가리키면서 브뤼기에르 주교님께서 박해가 있을 때마다 피신해 계시던 집이라고 덧붙인다.
이곳 저곳을 둘러보는 내내 조선 신학생들의 마음은 들떠 있었다. 특히 난생 처음으로 성당에 들어가 기도를 바칠 때는 자신들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말로만 듣던 하느님의 집. 신기한 성화는 왜 그리 많은지. 토굴집을 둘러보고 다시 신학교로 내려올 때는 이미 산그늘이 길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최양업 신부의 유학로를 새로 밝히다 –종착역-
조선 신학생들이 서만자의 소신학교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지나온 길보다 가야할 길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왕 요셉은 그곳 소신학생들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조선 신학생들의 마음을 알았는지 여유를 주지 않았다. 물리 신부님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도록 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서만자를 빠져나갔다.
다음 목적지는 서만자의 남서쪽에 위치한 만리장성 관문인 장가구(張家口, Zhanjiakou). 타타르인들은 물론 몽골인, 러시아인들이 북경으로 가기 위해 통과해야만 하는 국경 도시가 장성 관문의 남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2년 4개월 전인 1834년 10월 7일,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도 이 관문를 지나 100여 리 떨어진 서만자로 향하면서 이렇게 기록했었다.
“우리는 드디어 만리장성에 도착했습니다. 이 성벽은 길이가 5천 리가 넘는다는 것 외에는 특이한 점이 없습니다. 장성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뻗어 있습니다. 산서성의 북쪽에서는 서남서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산 위의 성벽에는 보초를 서는 사람도 없고, 여행객들의 편의와 세금 징수를 위해 군데군데 출입문들이 있을 뿐입니다.
이 성벽은 중국의 산서 지방과 타타르 지역을 물리적으로 갈라놓고 있습니다. 남쪽에 있는 산비탈은 산서성에 속하며, 북쪽은 타타르에 속합니다. 나는 장자커우(張家口)라고 불리는 관문으로 이 성벽을 통과했는데, 아무도 나를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러시아인들이 북경으로 갈 때 바로 이곳을 통과합니다.”(브뤼기에르 주교의 여행기 중에서)
신학생 일행은 장가구를 빠져나와 또 다른 목적지인 태원부(太原府, Taiyuanfu)로 향했다. 대동(大同, Tatong)을 거쳐 끝없이 남으로 향하는 길. 1천 리가 훨씬 넘는 어려운 행로에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발걸음은 무뎌졌지만, 좀더 마카오에 가까워져 간다는 생각과 설렘 안에서 길을 재촉하곤 하였다.
태원부에는 프란치스코회 선교사인 산서대목구장 살베티(Salvetti, 요아킴) 주교가 거처하는 주교관이 있었고, 그들이 세운 아름다운 성당도 있었다.
태원은 서울에서 마카오까지의 여정 중에서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곳. 앞으로도 5천 리의 여정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는 또 한번의 이별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신학생 일행과 함께해 온 왕 요셉 신학생의 최종 목적지가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재로서는 조선 신학생들의 유학 여정을 더 이상 알 길이 없다. 마카오 조선교구 신학교의 칼르리(M. Callery) 교장 신부의 기록을 통해 “1837년 6월 7일, 우리의 이 용감한 소년들은 안내자들과 함께 8개월 동안 요동과 타타르와 중국 대륙을 걸어서 종단한 끝에 마카오에 도착했습니다”라는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끝없는 아쉬움……
지금까지의 여정을 통해 최양업․김대건․최방제 신학생이 뛰어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고통과 고뇌의 강물, 그리고 희망과 은총을 느끼고 본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만 같다. 바로 이 자리가 이 글의 종착역이다. <마침>
|교회사와의 대화(차기진)
서울에서 마카오까지 유학 경로
가. 유학 길 일정
-.1836.4 경기도 용인의 '은이 공소'에서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뒤 신학
생 후보로 선발.
-.1836.12.3 앞서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양업(토마), 최방제(프란치스코)와 함께
정하상(바오로), 조신철(가를로) 등의 인도를 받아 변문으로 출발.
-.12.28 조선입국을 위해 요동에 머루르고 있던 샤스탕(Chast ant,鄭)신부 댁에
도착.
-.1837.6.7 중국 대륙을 남하하여 마카오에 도착. 이후 파리 외방 전교회 극동
대표부(대표;Libois신부)에서 칼레리(M.C allery)신부 등에게서 수학.
* 11월 27일 : 동료 신학생 최방제(프란치스코)가 열병으로 사망.
* 1838년 8월 14일 : 페레올(Ferreol, 高)신부가 계승권을 가진 조선대목구의 부주교로 임명됨(1843년초에 가서야 교황의 칙서를 전달받음).
-. 1839년 4월 6일 | 마카오의 민란으로 인해 칼레리, 데플레슈 신부 등과 함께 다시 마닐라로 피신한 뒤, 도미니코수도회의 원장 초청으로 롤롬베이(Lolombey) 농장에서 수학.
-.1837.8 마카오 민란으로 인해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1838년 겨울 귀환)
-.1841.11. 마카오 민란으로 인해 다시 마닐라로 피신(11월에 귀환)
-.1841.11. 최양업과 함께 철학 과정 이수, 신학 과정 입문.
3. 유학길 관련 관련 성지 해설
가. 봉황성. 변문. 책문 (봉황성(鳳凰城) 변문(邊門), 책문(柵門),
고려문(高麗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모방 신부에 의해 선발된 세 신학생,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는 1836년 12월 3일 귀국길에 오른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정하상(바오로), 조신철(가를로), 이광렬(요한) 등 교우 안내원들을 따라 의주 변문으로 향했다.
그해 12월 28일 중국쪽 국경인 봉황성 변문에 도착한 세 신학생은 조선 안내원들과 작별한 후 이제는 중국 안내원들을 따라 중국 대륙을 남하하기 시작, 6개월이 넘는 대장정을 거쳐 1837년 6월 7일 목적지인 마카오에 도착했다.
서울을 떠난 지 7개월 4일 만이었다. 오늘날 발달된 육로를 이용한다 하더라도 5000㎞가 훨씬 넘는 길이었다. 지금은 그 흔적도 남아있지 않지만 구련성,봉황성은 이들이 중국으로 빠져나온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1) 변문
변문(邊門)은 조선의 국경도시 평북 의주로부터 48㎞ 떨어진 지점 구련성(九連城)과 봉황성(鳳凰城)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한국인이 중국에 들어가는 관문이자 별정소(別定所)가 있어 의주 관리들이 파견돼 상주하던 곳이었다. 옛 사신들이 압록강을 건너 명이나 청나라로 들어가기 위해 처음 만나는 관문이다. 목책을 둘러쳐서 경계를 삼았다고 해서 책문(柵門)이라고도 하고, 변경에 있는 문이라 해서 변문(邊門)이라고 부른다. 병자호란 때 잡혀간 고려인들이 살았다고해서 고려문(高麗門)으로 부르기도 한다.
2)책문(柵門)
책문(柵門)의 ‘책(柵)’이란 한길 반 쯤 되는 나무를 세우고 그 사이사이에 나무를 엮어서 사람이나 말이 드나들 수 없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일찍이 명나라는 흙과 돌, 나무로 울타리를 친 변장(邊牆)을 설치했으며, 그 뒤 청나라가 1660년대 허물어진 변장 근처에 버드나무를 잇대어 심고 그 바깥에 참호를 판 유조변을 구축한 책성(柵城)을 만들었다. 이 책성은 발해만 해변에서 시작해 내륙으로 2000리 뻗었으며 군데군데 사람이나 마차가 다닐 수 있게끔 책문을 설치했는데 그 수가 무려 70여개. 그 중 하나가 바로 변문이다.
이곳에서 1794년 12월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한복으로 갈아입고 조선으로 잠입했다. 그리고 1836년 모방 신부, 1837년 1월 샤스탕 신부, 그리고 그해 12월 엥베르 주교가 방갓 차림으로 변장한 뒤 조선을 향했던 곳이다. 브뤼기에르 주교도 중국을 3년여 헤매면서 이 마을에 들어와 변장한 뒤 조선으로 향하는 꿈을 늘 가슴에 간직했던 곳이기도 하다. 김대건, 최방제, 최양업 세 소년도 바로 여길 통해 중국으로 빠져나온 주요 루트이기도 하다. 몇 년 후인 1842년부터는 마카오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한국 입국을 시도하기 위해 이곳과 두만강 등을 수없이 헤메이기도 하였다. 기록에 보면 1842년 말 김대건 신학생은 이곳에서 김 프란치스코라는 조선 밀사를 만나 1839년의 기해박해로 자신의 스승이었던 모방, 샤스탕 신부와 엥베르 주교, 심지어 자신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동료였던 최양업 부모의 순교 소식까지 들었다. 김대건 신학생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조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김 프란치스코는 북경에 갔다 오는 사신 일행의 일원이었으며 당시 사정이 좋지 않다고 말렸으나 “그럼 나 혼자 가겠다.”고 길을 나서 혼자 변문을 지나 일단 조선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조선 옷을 구하지 못한 채 중국 옷을 조선 옷 비슷하게 흉내를 내었는데 이게 곧 사람들의 의심을 사기 시작해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다시 변문을 통해 중국으로 빠져나왔다고 한다. 그곳이 바로 이 변문 마을이다. 1844년 12월 김대건이 부제품을 받은 직후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 부제는 소팔가자를 떠나 봉황성 변문으로 향했다. 12월 말 변문에 도착한 그들은 1845년 1월 1일 이곳에 이미 와 있던 조선 신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페레올 주교는 포교지 조선에 들어간다는 기대를 가졌지만 조선 국경인 의주 변문 쪽 경비가 삼엄해 입국이 불가능해 할 수 없이 김대건 부제를 먼저 조선에 입국 시키 기로 했다.
신자들을 따라 의주 변문 근처에 온 김대건 부제는 어렵사리 국경을 통과한 후 다시 신자들을 만나 평양을 거쳐 1월 15일 한양 돌우물골(石井洞)에 신자들이 마련해 놓은 집에 도착했다. 한양을 떠난 지 9년 만이었다. 15살 소년은 24살 청년으로 장성했고, 부제품을 받은 어엿한 성직자 신분이 됐다.
조선을 향해 마카오를 출발한지 3년이 지났다. 그동안 네 번이나 입국 로 탐사를 시도했고 두 번은 조선 땅 의주까지 들어왔으나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다섯 번째 시도에서 김대건은 마침내 한양 땅을 밟았다. 변문 마을은 지금도 국경 요충지인데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주요 시설인 무기고가 있다고 하여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압록강을 건너 다시 120리를 들어가야 중국의 국경선인 책문(柵門)이다. 압록강으로부터 책문까지는 사람이 살지 않는 이른바 완충지대였던 것이다.
단동 역에서 옛 책문 터인 일면산(一面山)역까진 기찻길로 45km. 우리는 책문이라 부르는 것을 중국 사람은 변문(邊門)· 가자문(架子門)· 고려문(高麗門) 등으로 불렀다.
지금은 행정구역으로 변문진(邊門鎭)에 속하며 단동으로부터 봉황성시(鳳凰城市)로 가는 국도 304번 그 연도에서 ‘변문진’의 표적을 볼 수 있다.책문을 통과함으로써 본격적인 중국 땅에 들어서게 된다. 옛 책문이 있었다는 곳은 현재로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수백 년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고, 특히 지난세기의 중국 문화대혁명은 과거와의 단절로 상징되듯, 우리 역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유적들도 모두 파괴했다. 또한 당시까지만 해도 이곳이 조선 땅이었음을 확인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옛 고려문은 1966년 홍위병들이 철폐시켰고 1995년 5월에 설치된 변문진(邊門鎭)이란 비석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변문진 북쪽을 고려마을이라 부른 것으로 보아 우리 민족이 그곳에서 상업과 농업을 하면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병현, 북한토지연구소)
나. 마가자 성당
중국 교우촌인 마가자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입국을 눈앞에 두고 1835년 10월 20일에 병사한 곳으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조선 입국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했던 선교 거점이었다.
이곳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3년여 중국 대륙을 횡단한 끝에 마침내 조선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기착지로 생각했던 곳이다. 12월말 압록강이 얼어붙으면 변문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가기로 이미 조선 교우들과 약속까지 했으나 서만자에서 마가자까지 그 먼 길을 병약한 몸으로 달려와서 도착한 그 다음날 저녁 선종하였다.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인 브뤼기에르 주교는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로부터 1831년 조선교구 설정과 함께 초대 교구장 주교로 임명된 후 중국 내륙을 거쳐 조선 땅으로 부임하던 중 1835년 병사했다. 조선 땅을 눈앞에 두고 마가자(馬架子, 지금의 적봉시 송산구 ‘동산’), 즉 펠리구(Pie-li-keou)라고 불리는 서부 달단(지금의 중국 내몽고 지역)의 한 교우촌에서 눈을 감고 만다.
브뤼기에르 주교로부터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모방(1803~1839, 성인) 신부가 장례미사 후 고인의 유해를 마가자 현지에 안장했고, 묘소 앞에 묘비를 세웠다. 이후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는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서울 용산 성직자 묘역에 이장됐다. 묘비는 마가자 현지에 그대로 방치돼 있다가 1960년대 후반 중국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이 서양과 관련된 것들을 파괴하는 와중에 사라진 것으로만 알려졌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묘비는 마가자 천주당 정문을 나와 오른쪽으로 성당을 감싸고 돌아가면 5분 거리에 바로 성직자 묘지에 있다. 묘지를 둘러싼 벽돌담도 인상적이었는데 개포동 본당 염 신부님이 지원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기적적으로 제 자리에 돌아온 묘지석은 문화혁명 때 파괴되어 누군가의 섬돌이 되어 짓밟혔던 것을 고인이 숨을 거둔 중국 내몽골자치구에서 170년만에 발견됐다.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세 소년이 조선을 빠져나와 마카오로 어떻게 갔을 지 관심을 가졌는데 결국은 브뤼기에르 주교님이 조선으로 가셨던 길의 역방향의 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방 신부가 뽑아 보냈던 세 소년에게 마가자에서 조선을 그리워하며 돌아가신 브뤼기에르 주교님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모방 신부님은 주교님이 돌아가시자마자 마가자로 오셔서 장례미사를 집전했고 바로 그 묘지에 주교님을 장례 지내셨던 바로 그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세 소년은 결국 마가자로 왔을 것이고 주교님 무덤 앞에 무릎 꿇어 결국은 조선교우를 위한 순교를 다짐했을 것이다. 마가자는 브뤼기에르 주교님의 죽음으로 인해 모방신부- 김대건·최양업으로 이어지는 주춧돌을 놓은 그야말로 위대한 성지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곳에 묻혔던 소 주교 유해는 1931년에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서울 용산 성직자 묘역으로 이장됐다.
다. 서만자 성당(원어명 [Sivang] 한자 [西灣子]
중국 내몽고(內蒙古)에 있는 마을. 북경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 고을에는 일찍이 프랑스 계통의 라자리스트(Lazaristae)회가 진출하여 전교함으로써 주민의 거의 다수가 가톨릭이었다.
그러므로 조선에 입국하고자 하는 선교사와 조선 교우와의 연락이 이곳에서 많이 이루어졌다.
조선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가 조선 입국을 시도하기에 앞서
1834년 10월 이 곳에서 모방(Maubant, 羅) 신부를 만난 후 조선으로 향하던 중 펠리쿠(哵唎溝, Pie-li-Koou)에서 선종하였고,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도 조선 입국에 앞서 1837년에 이곳에 들러 조선 교우와의 연락을 취한 뒤 조선에 입국하였으며,
페레올(Ferreol, 高) 신부도 1840년에 여러 차례 이곳에 들러, 앞서 이 곳을 경유하여 조선에 입국한 앵베르 주교의 서신을 받은 바 있으며,
1842년에야 조선 교우들과의 연락이 이루어져 기해(己亥) 대박해의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이어 1843년 제3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그는 1845년 드디어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이와 같이 서만자는 조선교구의 초대 교구장에서 3대 교구장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성직자가 이곳에서 조선교회와의 연락을 가져, 그 곳으로부터 출발하여 조선에 입국한 초기 조선교회와는 매우 인연이 깊은 곳이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
라. 만리장성(장가구-북경 관문)
장가구(張家口, Zhanjiakou)와 북경을 통하는 만리장성 관문은 . 타타르인들은 물론 몽골인, 러시아인들이 북경으로 가기 위해 통과해야만 하는 국경 관문이다.
“우리는 드디어 만리장성에 도착했습니다. 이 성벽은 길이가 5천 리가 넘는다는 것 외에는 특이한 점이 없습니다. 장성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뻗어 있습니다. 산서성의 북쪽에서는 서남서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산 위의 성벽에는 보초를 서는 사람도 없고, 여행객들의 편의와 세금 징수를 위해 군데군데 출입문들이 있을 뿐입니다.
이 성벽은 중국의 산서 지방과 타타르 지역을 물리적으로 갈라놓고 있습니다. 남쪽에 있는 산비탈은 산서성에 속하며, 북쪽은 타타르에 속합니다. 나는 장자커우(張家口)라고 불리는 관문으로 이 성벽을 통과했는데, 아무도 나를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러시아인들이 북경으로 갈 때 바로 이곳을 통과합니다.”(브뤼기에르 주교의 여행기 중에서)
마. 마카오 신학교 터
▲ 옛 파리외방 전교회 극동대표부 터(신학교 터)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터.
옛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 자리에 임시 조선교구 신학교가 대표부 안에 있었다. 이 신학교는 조선 신학생들이 이곳에 도착한1837년 6월 7일부터 최양업 신학생이 이곳을 떠나는 1842년 7월 17일까지 5년여 동안 운영되었다.
또 1847년 초 대표부가 홍콩으로 이전된 뒤에는 애덕의 딸 카노사 수녀회에서 대표부 건물을 매입하여 한층을 더 증축한 뒤 고아원으로 사용하였다. 지금은 옛 건물이 없어지고, 1980년대에 건립된 5층짜리 주상 복합 건물이 들어서 있다.
임시 조선교구 신학교가 바로 이 대표부 안에 있었다. 이 신학교는 조선 신학생들이 이곳에 도착한1837년 6월 7일부터 최양업 신학생이 이곳을 떠나는 1842년 7월 17일까지 5년여 동안 운영되었다. 또 1847년 초 대표부가 홍콩으로 이전된 뒤에는 애덕의 딸 카노사 수녀회에서 대표부 건물을 매입하여 한층을 더 증축한 뒤 고아원으로 사용하였다. 지금은 옛 건물이 없어지고, 1980년대에 건립된 5층짜리 주상 복합 건물이 들어서 있다.
파리외방전교회 모방 신부는 박해 때문에 국내에서는 조선인 성직자 양성 교육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신학생들을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가 있는 마카오에 보내기로 했다. 세 신학생들은 12월 2일 서울을 떠나기 전, 앞으로 공부하게 될 신학교 교장에게 순명할 것과 교구 신부가 되어 열심히 봉사할 것을 서약하였다.
그리고 12월 3일 중국으로 귀환하는 유방제(劉方濟) 신부와 정하상(丁夏祥), 조신철(趙信喆) 등 신자들의 인도를 받으며 변문으로 떠났다. 이때 조선인 신자들은 변문에서 새로 입국하는 샤스탕(Chastan, 鄭) 신부를 맞아들여 귀경하였고, 세 신학생들은 샤스탕 신부를 안내한 중국인 안내원들을 따라 중국 대륙을 가로질러 남하하여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조차지(租借地)로서. 서양인들이 극동 진출의 근거지로 삼은 곳이며, 동양 전교 활동의 거점이었다. 출발할 당시에는 세 신학생들이 공부할 장소가 결정되지 않았었다. 이들은 파리 외방전교회가 운영하는 동양인 성직자 양성소인 페낭 신학교에 갈 수도 있었지만, 당시 이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중국인 신학생들이 소요를 일으킨 일이 있어서 면학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은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 대표부에 조선인 신학교를 세워 교육을 맡았다.
바. 카모에스공원 내, 성 김대건 동상
카모에스(賈梅士) 공원. 16세기 포르투갈의 국민 시인이자 모험가요 군인이었던 카모에스(까몽스, Luis Vaz de Camoes)를 기리기 위한 공원으로, 본래는 포르투갈 거상의 저택이었다고 한다. 그 저택이 비둘기 둥지를 닮았다고 해서 한자로는 흰비둘기둥지(白合鳥巢) 공원으로 명명되었다.
한국 교우라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의 동상이 그곳에 안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1984년 한국 103위 순교 복자의 시성식이 있은 이듬해 1985년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10월 4일에 건립된 동상으로, 이후이방인에 의해 훼손된 것을 1997년6월 29일 마카오와 홍콩의 교포 신자들이 보수하여 다시 안치하였다.
그 동상을 바라보노라면, 공원의 숲 사이를 거닐며 기도 안에서 향수를 달래고, 서로를 위로하고 권면하였을 조선 신학생들의 모습이 자연스레 그려진다.
[양업순례단 교회사와의대화 차기진]
사. 바오로 성당 터
- 1637년 타이파와 나무로 지어진 성바오로성당은 1835년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는 건물 정면 벽과 계단, 일부 지하실만 남아 있다.
마카오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유산 성바오로성당. 정면 부분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성당이지만 마카오를 찾는 관광객이라면 꼭 들르는 명소 중의 명소이다.이 성당은 1602년 이탈리아 예수회 수도사 카를로 스피놀라가 설계하고 종교 박해를 피해 나가사키에서 피난해 온 일본인과 현지 장인들의 도움으로 1637년에 완성됐다. 타이파와 나무로 만들어져 안타깝게도 1835년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는 건물 정면 벽과 계단, 일부 지하실만 남아 있었다.이 성당의 앞 벽만으로는 많은 역사의 유적을 볼 수는 없지만, 여기에 새겨진 글과 그림을 통해 창세기에서 묵시록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교리를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 바오로성당의 건축은 유럽 문예부흥시대의 건축양식과 동양의 건축양식이 혼합된 것으로 오랜 기간 중국과 외국의 건축, 문물, 예술가들도 중시해 왔다. 성당의 안쪽으로 들어서면 당시 성당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는 양쪽의 기둥이 서 있던 자리와 당시 묘지로 사용했음을 보여 주는 묘지터가 있다.
지하에는 작은 종교박물관과 납골당이 있는데, 이전 천주교에서 사용하던 성물들과 일본과 베트남에서 순교한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원관구 소속 하윤섭 수녀(중국 마카오교구 성지순례안내센터장)는 “성 김대건 신부께서 학생으로 배움을 위해 마카오에 머무는 동안 이 성당을 자주 들러 간절한 기도를 했고, 당시 사제들만 통과할 수 있는 성당 정문의 돌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면서 반드시 사제가 되어 이 문을 통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며 “170여 년 전 이곳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며 간절히 기도하셨던 김대건 신부를 마음속으로 그려보며 신앙에 대한 다짐을 굳건히 해 달라”고 당부했다.
[자료: 양업 순례단]
아. 성 안토니오 성당과 김대건 성인 경당
성안토니오성당은 1558년부터 1560년에 걸쳐 대나무와 나무로 지어진 성당으로 마카오에서 가장 오래된 3대 성당 중 하나로 1874년 화재로 불타 없어져 1930년대에 재건했다고 하지만 잘 보존되고 아름다워, 마카오 식민지 시절 포르투갈인들의 결혼식이 많이 열렸다고 한다.
성당 옆에 김대건 성인 경당이 있다.
성당 안에는 한인 교포 신자가 봉헌한 김대건 신부의 목각상과 유해가 모셔져 있으며,
길 하나 건너에 카모 에스 공원(김대건신부 동상)이 있고,
한국사제가 상주하는 성당이다.
자. 필리핀 마닐라, 도미니코 수도회 터.
마닐라로 피난 온 김대건 일행은 다행히 성 도미니꼬 수도회 원장 초청으로 마닐라 인근의 롤롬보이(Lolomboy)에 있는 성 도미니꼬 수도원 별장에서 11월 마카오로 귀환할 때까지 약 6개월간 피난살이를 했다.
당시 마닐라 시내에 도미니꼬 수도회가 있었다 한다.
이곳에서 최양업과 김대건은 잠시 머물렀다가 롤롬보이 농장으로 옮겼다.이곳은 마닐라 대성당 옆 건물로 지금은 성 아우구스티노 성당 보조 건물로 필리핀 가톨릭 유물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차. 필리핀 롤롬보이 성, 김대건 성지
홍콩에서 남동쪽으로 약1천1백㎞ 떨어진 필리핀 루손 섬의 마닐라.필리핀 수도이자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인 마닐라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국제항구로 유명한 곳이다.
마닐라는 16세기부터 18세기 말 서양 열강들이 중국과 직접 교역하기 이전까지 중국과 유럽 무역의 중심지로 이용됐다.
마닐라는 소년 김대건과 그의 동기 최양업에게는 그리 좋은 추억으로 기억하고픈 곳이 아니었다.마닐라는 김대건과 그의 동기들에게는「망향의 피난처」였으며, 바빌론 유배시절 산산이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이국땅에서 그리운 조국을 꿈꾸며 정을 삭혀야만 했던「디아스포라」(Diaspora)였다.김대건과 함께 최양업, 최방제가 마닐라에 간 것은「운명의 장난」과도 같은 것이었다.1836년 12월3일 서울을 떠난 지 6개월여 간의 고생 끝에 1837년 6월7일 마카오에 당도한 김대건 일행은 긴장이 채 풀리기도 전에 파리외방전교 회원들과 함께 마카오를 떠나야만 했다. 포르투갈 식민정치에 불만을 품은 청국인들이 8월에 민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김대건 일행이 처음 입학한 페낭신학교에서조차 중국인 신학생들이 소요를 일으켜 파리외방전교회가 대표부내에「조선인 신학교」를 따로 세워 이들을 가르쳐야 할 만큼 심각했으니 당시 민란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김대건 일행이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 함께 오른 피난길의 기착지가 바로 마닐라였다.
당시 마닐라는 마카오보다 훨씬 규모가 큰 국제 무역도시였고 포르투갈인이 아닌 스페인 선교사 즉 예수회원들이 진출해 있던 곳이다.김대건 일행의 마닐라 피난길은 두 차례나 이어진다. 마닐라까지 1천여㎞가 넘는 뱃길은 김대건 일행에게는 바로「죽음」을 뜻하는 십자가의 길이었다.이제 갓 16살이 된 어린 세 소년들에게 이 피난길은 처음으로 경험하는 항해였다. 뱃전에 부딪히는 파도처럼 끊일 새 없이 밀려오는 뱃멀미보다 더 큰 고통인「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 공포는 신부가 되어 돌아오겠다고 부모의 품을 떠날 때와는, 국경을 넘을 때와는, 중국을 종단할 때 가졌던 그 두려움과는 사뭇 달랐다.아마 세 소년은 마닐라로 가는 이 피난길에서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 그것도 아주 절실하게 생각했을 것이다.김대건 일행의 마닐라 피난길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그러나 마닐라에 도착했어도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았는지 세 소년은 잔병으로 고생을 해야만 했고 김대건은 늘 복통과 두통, 위장병에 시달렸다는 이야기만 전해지고 있다.
다행히 1837년의 마카오 민란은 그래 겨울이 진압돼 마카오로 귀환하게 됐으나 11월 26~27일 밤 사이에 김대건 일행의 맏형이던 최방제가 열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처럼 두려워하던 죽음이 드디어 들이닥치고 만 것이다.이 장면을 김대건 신부 첫 전기인「성웅 김대건 전」에서 저자 김구정은『저무는 타향 하늘에 별이 삼형제/반짝 반짝 정답게 비치더니/웬일인지 별 하나 보이지 않고/남은 별이 둘이서 눈물 흘린다』라는 시로 그리고 있다.동기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채 아물기 전인 다음해 1839년 4월6일 마카오 민중이 재봉기하자 김대건과 최양업은 칼레리, 데플레슈 신부 등과 함께 다시 마닐라로 피난길에 올랐다.마닐라로 피난 온 김대건 일행은 다행히 성 도미니꼬 수도회 원장 초청으로 마닐라 인근의 롤롬보이(Lolomboy)에 있는 성 도미니꼬 수도원 별장에서 11월 마카오로 귀환할 때까지 약 6개월간 피난살이를 했다.마닐라에서 자동차로 약 1시간 거리인 롤롬보이 옛 도미니꼬 수도원 별장 자리에는 현재 김대건 신부 사적지가 단장돼 있다.번잡한 마닐라를 벗어나 고속도로로 필리핀의 전형적인 농촌마을들을 자동차로 약 1시간 가량 지나치다 보면 작은 소도시인 롤롬보이가 나타난다.롤롬보이에 들어서면 필리핀 대중 교통수단인 지푸니 공장이 즐비하게 들어서 방문객을 맞았다.필리핀 한인 천주교회 신자들이 세워둔「김대건 신부 성지」한글 표지판을 따라 골목길로 가다보면 옛 도미니꼬 수도원 별장 자리가 나온다.롤롬보이 623번지, 지주 멘도사(Mendosa)가문의 사유지이다.김대건 신부 시성을 기념해 멘도사 여사가 옛 수도원 터 일부를 1986년에 한국 천주교회에 기증해 이곳에 김대건 신부 사적지를 꾸밀 수 있게 됐다.멘도사 여사는 1994년 10월에 백수를 채 못 채우고 99세의 나이로 작고했고 지금은 그의 장남 멘도사 내외가 한국의 순례객들을 반갑게 맞고 있다.이곳은 지난 1986년 5월22일 김수환 추기경과 필리핀 마롤로스 교구장 알마리오 주교가 참석해 제막식을 가진 김대건 신부 동상과 김 신부 경당이 세워져 있다. 김대건 신부 동상은 고 오기선(요셉)신부와 마닐라 한인 천주교회 신자들과 한국의 신자들이 뜻을 모아 만든 것으로 마카오 카모에스 공원에 서있는 김대건 신부상과 똑같은 것이다.
▲ 김대건사제 동상
▲최양업사제 동상
이곳 사적지에는 김대건과 최양업의 피난생활을 회상시키는「망향의 망고나무」가 아직도 있다. 몇 해 전 태풍이 불 때 나무가 부러질 것에 대비해 윗 둥치를 잘라버려 그 자태를 찾아볼 수 없지만 고목의 고고한 자태는 아직도 남아 있다.망향의 망고나무는 이곳에 피난 와 있던 김대건이 그해 여름(1839년 8월) 아버지 김제준으로부터 뜻하지 않은 편지를 받아보게 돼 고향을 그리는 김대건의 마음을 생각해 붙여진 이름이다.
▲ 망향의 망고나무 기념 비
중국으로 가는 동지사 일행 속에 숨어들었던 한 신자가 북경까지 그 편지를 갖고 와 뭍으로 바다로 해서 몇 만 리를 지나 김대건의 손에 닿은 부친의 편지였다.아버지 김제준이 쓴 편지의 발신일자는 1837년 가을, 롤롬보이에 있는 김대건의 손에 닿기까지 무려 네해가 걸렸다. 편지 내용은 희소식밖에 없었다. 집안도 무사하며 앵베르 범 주교, 모방, 샤스탕 신부 모두가 안녕하다는 소식이었다.김대건과 최양업은 이 편지에 뜨거운 눈물을 적시며 망고나무 그늘 아래서 읽고 또 읽고 한 자도 빠짐없이 외울 정도로 거듭 거듭 읽었다.그러나 김대건이 편지를 받고 감격해 할 무렵 조선에선 기해박해가 터져 그의 아버지 김제준과 최양업의 부친 최경환은 옥고를 치르고 9월 장엄히 순교했다.김대건이 받은 부친의 편지는 이역만리 떨어진 아들에게 희망과 위안, 기쁨을 주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 김대건 경당
김대건 신부의 사적지에서 약 3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는 성 김대건 신부를 주보로 모시고 있는「성 십자가와 성인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성당」이 있다. 이 성당에서 롤롬보이 주민들 모두가 매주일 주보인 김대건 신부를 현양하며 그의 영성을 본받고 있다.성당 제대 오른편 벽면에 모셔져 있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을 보면서 자랑스런 순교자의 후손임에 자부심을 느꼈다.
제3편 : 선교사 입국로 개척
1. 선교사 입국로 개척과 탐색 일정
-.1842.2.15. 메스트를 신부와 함께 프랑스 함대 세실 함장의 에리곤호에 탑승하여
마카오를 출발. (김대건.치양업)
-.1842년 7월 17일 | 만주 선교사 브뤼니에르(de la Bruniere) 신부와 함께 프랑스
군함 파보리트(laFavorite) 호에 탑승하여 마카오를 출발. (최양업)
-.1842년 8월 27일 | 양자강(楊子江) 인근의 오송(吳淞) 항에 도착. 8월 31일경에 동
료 김대건과 상봉.
-.1842년 9월 10일 | 브뤼니에르 신부와 함께 파보리트 호에서 하선하여 중국인 신
자 범(范) 요한의 안내로 황세흥(黃世興)의집에서 유숙.
-.1842년 9월 11일 | 범 요한의 안내로 영국 배를 이용하여 상해의 강남 대목구장
베시(Besi) 주교와 만남.
* 9월 17일 : 매스트로 신부와 김대건이 상해 도착.
-. 1842년 10월 2일 | 베시 주교의 주선으로 브뤼니에르 신부, 매스트르 신부, 동료
김대건, 범 요한 등과 함께 창가루섬으로 출발. (최양업)
-.1842년 10월 12일 | 창가루 섬을 출항(첫 번째 탐색 여행). 최양업
-.1842년 10월 22일 | 요동(遼東) 반도의 남단인 태장하(太莊河) 해안에 도착. 이튿날
범 요한이 하선하여 보낸 그지방의 회장 두(杜) 요셉과 함께 하선하여 세관으로 감
(최양업)
-.1842년 10월 25일 | 백가점(白家店) 교우촌의 두 요셉 회장 집에서 유숙.(최양업)
* 백가점 : 태장하 인근, 즉 훗날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 거점이 된 차쿠 이웃에 있던
교우촌.
-.1842년 11월 3일 | 매스트르 신부, 김대건 등과 이별, 브뤼니에르 신부와 함께 요
동 반도 북단에 있는 개주(蓋州) 부근의 양관(陽關) 교우촌으로 감. (최양업)
-.1842년 11월 | 페레올 주교가 있는 소팔가자(小八家子) 교우촌으로 가서 신학 공부
를 계속.(최양업)
* 소팔가자 : 길림성(吉林省)의 장춘(長春) 서북쪽 사평(四平) 인근에 있던 교우촌.
* 1843년 초 : 페레올 주교가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칙서를 받고 비로소 제3대 조
선 대목구장에 임명된 사실을알게 됨.
* 3월 : 조선 입국로를 탐색하던 김대건이 백가점에서 소팔가자로 거처를 이전.
-.1843년 12월 31일 | 개주의 양관에서 있는 제3대 조선 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의 성
성식(만주 대목구장 Verrolles 주교 집전)에 참석. (최양업)
-.1844년 1월 14일 |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소팔가자로 귀환하여 신학 공부를 계속.
(최양업)
* 1월 말 : 페레올 주교가 소팔가자로 귀환.
* 4월 : 조선의 동북쪽 입국로 탐색에 실패한 김대건이 소팔가자로 귀환.
-.10.26 요동의 백가점(白家店)도착. 최양업,메스트로 신부와 함께
소팔가자(小八家子)로 감. 12.27 조선교회의 밀사 김 프란치스코 상봉. (김대건)
-.12.29 변문 출발. 의주를 통해 조선에 귀국(1차 귀국) 12,31 압록강을 다시
건너 중국측 변문으로 감.(김대건)
-.1843.3. 변문으로 나가 조선교우와 접촉한 뒤 백가점으로 귀환 (2차 탐색)
-. 소팔가자로 거처를 옮겨 최양업과 같이 신학 공부.(김대건)
-.1844.2.4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북방 입국로 탐색을 우해 훈춘 으로 출발
(4차 탐색) 김대건
-. 3,8 훈춘을 거쳐 조선에 귀국(2차 입국), 경원에서 조선 교우 상봉. (김대건)
-.1845.1.1 조선교우와 상봉하여 조선에 귀국(3차 입국) 1.15 서울 도착.
돌우물골(석정동)에 유숙. (김대건)
-, 1845.4.30 선교사 영입을 위해 현석문(가를로)등 11명의 조선인 교우들과 함께
제물포 출발(6,4 상해 도착) (김대건)
-.1844년 5월 19일 | 소팔가자에서 르그레즈와 스승 신부에게 서한 발송(두 번째 서
한). 최양업
-.1844년 4월~12월 | 신학 공부를 계속하면서 삭발례로부터 제 1~5품까지 받음.
(최양업)
-.1844년 12월 10경 | 김대건과 함께 부제로 서품됨.(최양업)
* 6월 4일 : 김대건 부제, 서울에서 제물포를 거쳐 상해로 건너 감.
-.1846년 1월 말 |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조선 입국을 위해 훈춘(琿春)으로 감(두번째
탐색 여행). 최양업)
-.1846년 2월 중순 | 두만강 국경 마을에서 개시(開市)를 기다리던 중, 만주 관헌에
체포되었으나 이틀만에 석방됨.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소팔가자로 귀환하여 신학생
들을 지도함.(최양업)
-.1846년 12월 말 |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변문을 통해 입국하려다 박해 소식을 듣게
됨. 조선 교회에서 보낸 밀사들의만류로 입국을 포기하고,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
표부로 출발(세 번째 탐색 여행). (최양업)
-.1847년 초 |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가 이전된 홍콩에 도착. 1839년과 1846년
의 박해로 순교한 순교자들의행적을 라틴어로 번역. (최양업)
-.1847년 7월 28일 |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라피에르(Lapierre) 함장이 이끄는 군함
글로와르(la Gloire) 호와 빅토리외즈(la Victorieuse) 호를 타고 홍콩을 출발(네 번
째 탐색 여행). (최양업)
-.1847년 8월 10일 | 조선 고군산도(古群山島) 부근에서 난파하여 섬에 상륙, 조선에
남고자 하였으나 라피에르 함장이이를 거절함. 최양업
-.1847년 8월 26일 | 다시 상해 도착.
2. 선교사 입국로 개척 관련 자료
가. 남경
라파엘호를 타고 조국을 향해 서해를 항해하던 중 김대건 신부는 문득 마카오에서 세실 함장이 이끄는 프랑스 동양함대 에리곤호를 타고 조선을 향하던 일이 떠올랐다.1842년 2월15일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에리곤호에 승선하면서부터 김대건 신부의 기나긴 귀국여정이 시작됐다.김대건 신부가 프랑스 함선에 승선하게 된 이유는 조선과 통상조약을 희망했던 프랑스 정부가 그들의 의사를 전달해 줄 통역자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당시 조선교구의 사목을 책임지고 있던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경리부도 조선과 프랑스의 통상을 강력히 희망했다.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사목적으로 볼 때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먼저 박해로 선교사들이 모두 치명해 모든 연락이 두절된 조선 교회의 현재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보장받기 위해서였다.다음으로는 1832년 2월 26일 구슬랍 목사를 태운 영국 상선 한 척이 마카오를 출발해 같은 해 7월17일 조선에 도착, 왕에게 헌상품을 바치려 했으나 실패하고, 감자 수백 개를 조선 연안에 심어 놓고 떠난 사건이 발생, 조선에 유럽 상인들과 개신교 목사가 들어가기 전에 먼저 천주교 선교사를 입국시켜야 한다는 초조감이 작용했다.어쨌든 당시 신학생이던 김대건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경리부의 명에 따라 프랑스 함대에 승선, 조선을 향해 떠났다.또한 동기인 최양업도 다섯 달 후 1842년 7월17일 브뤼기에르 신부와 함께 빠쥬 선장이 이끄는 프랑스 군함 파보리트호를 타고 마카오를 출발했다.
조선을 향하던 세실 함장은 중국 상해에 도착해 에리곤호를 정박시키고 인근 남경(南京)에서 있을 영국과 중국의 「남경조약」조인식을 참관하고자 남경으로 떠났다. 물론 김대건도 동행했다.아편전쟁에 패배한 중국이 치욕적인 강화조약을 맺는 자리에 김대건 신부는 유일한 조선인 목격자로 역사의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중국은 남경조약에서 홍콩섬의 소유권과 전쟁 비용으로 2천1백만 량의 배상과 5개 항구를 개방하고 체류권을 영국에 주었다.제국주의 국가가 휘두르는 힘의 논리 앞에 무참히 짓밟히는 거대한 중국을 보면서 김대건 신부의 심정은 착잡했을 것이다. 김 신부는 또 조인식을 보면서 열강들의 패권주의와 제국주의 앞에 조국인 조선이 주권국가로 살아남기 위해선 개화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그의 이러한 확신이 관군에 의해 체포된 후 무지한 조선 정치인들을 일깨우기 위해 옥중에서 「세계 지도」를 작성하고 「지리 개설서」를 저술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남경(南京)은 청년 김대건에게 개화사상을 싹 틔우게 한 교훈의 현장이었다고 해도 큰 이견은 없을 것이다. 김대건 신부는 당시 착잡한 심정을 달래기 위해서인지 몰라도 남경시내의 많은 곳을 관광했다.상해에서 2백76㎞떨어져 있는 남경(南京). 인구 2백50만에 유동인구만 50만 명으로 남경 군부가 자리잡고 있는 군사도시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남경은 한 때 중국 대륙의 수도(首都)로 천하의 중심이 됐던 옛 명성의 흔적들을 군데군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문화혁명으로 대부분의 유적들이 파괴돼 남경을 처음으로 찾는 방문자에게 역사의 무상함을 느끼게 했다.1842년 8월 29일 남경 양자 강변에 정박 중이던 영국 군함에서 남경조약 조인식이 체결되기 전 회담이 있었던 영보사(靈寶寺)를 찾았다. 남경공항에서 약 12㎞떨어져 있는 이 절에는 1928년 손문이 이끄는 국민당 정부가 「신해혁명」때 전사한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무량전(無梁展)과 1백10개의 비석과 3만3천2백24명의 전사가 명단이 새겨진 비문, 순국기념탑이 있다.이곳 영보사에서 회담을 가진 영국과 청나라 대표들은 오늘날 남경 중산부도에서 강화 조약을 체결했다.손문의 유해를 가져오기 위해 새로 만들었다 해서 「중산부도」로 이름 지어진 이곳은 현재 해군기지가 들어서 있어 외부인들에게는 일체 개방돼 있지 않고 여객을 위한 항구 일부만을 개방하고 있다.김대건 서한에 기록돼 있는 남경 보인사를 찾기 위해 아무리 노력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혁명사만을 배운 오늘날 중국인들은 과거 중국역사에 대해 제대로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스님들마저 남경에 어떤 절이 있었는지 모를 만큼 철저하게 과거사와 단절돼 있었다.남경에 오기 전 북경대학 도서관장으로부터 자문을 구한 것을 토대로 유추해 본 결과 「보인사」는 아마 남경 중화문 밖 고장간리(古長干里)에 위치한 영락 10년 1412년 창건한 「대보은사」(大報恩寺)가 아닌가 짐작됐다.이 절에는 유리벽돌로 짓고 2천 냥 황금으로 탑 꼭대기를 세운 9층8각 탑인 「대보은사탑」이 있었다고 하는데 김대건 신부의 서한에 장문에 걸쳐 설명한 탑과 흡사하다.
18세기 유럽 문헌에 세계 기적의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히고 있는 이 탑은 1856년 모두 파괴되고 현재 그 탑의 위치를 알려주는 좌우 비석 2개만 남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계명사 7층8각 탑이 이 탑과 거의 흡사한 모습이라고 한다.오늘날 남경조약 조인식 현장에 있었던 김대건 신부에 대해 일부 사학자들은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하지만 이들의 견해는 진정한 역사적 사실과 선교사들의 근본정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라고 반박하고 싶다.왜냐하면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는 단 한가지의 목적으로 자기 생명을 온전히 희생할 만큼 조선을 사랑했고 조선의 장래를 축복했기 때문이다.1866년 순교한 성인 베르뇌 장 주교의 편지 내용으로 그 증거를 대신하고자 한다. 『나는 우리 조선을 서양인이 간섭하는 것을 싫어한다. 나는 프랑스 군함도 싫고, 프랑스 군인도 싫고, 프랑스 외교관도 싫다. 비록 그들에게 의지하지 않고서는 종교의 자유를 얻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 괴로움을 달게 여기며 이 가다꼼바 안에 남아 있겠노라. 우리의 피는 흐르리라. 우리 신입 교우들의 피도 계속해서 흐르리라. 치명자의 피는 교우들의 사도니라』남경조약 조인식 현장에 있었던 김대건 신부도 베르뇌 주교의 심정과 똑같았을 것이다.
발행일1996-06-16 [제2007호, 18면] 평화신문
나. 최양업 김대건 소팔가자
1842년 그들은 아직 수학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왜냐하면 세실(Cecille) 함장이 마카오의 경리부를 찾아와 조선원정계획을 알리면서 조선인 신학생 1명을 통역으로 동행시켜줄 것을 요청했고, 경리부장 리브와 신부는(그간 르그레즈와 신부는 파리본부로 전임되었다) 벌써 몇 년째 조선교회와 소식이 끊겨져 있었으므로 세실의 요청을 하느님의 섭리처럼 생각하고 쾌락했기 때문이다.
아편전쟁의 종말이 가까워지자 프랑스 정부는 중국에서 어떤 이득을 얻어 보려는 심산에서 군함 2척, 즉 에리곤호와 파보리트호를 파견했었는데 세실은 에리곤호의 함장이었다. 리브와 신부는 건강이 약한 김대건을 메스트르 신부와 같이 먼저 에리곤호에 태워 보냈다(2월 15일).
한편 최양업은 파보리트호로 떠나게 되어 있었는데 입항(入港)이 늦어져 7월 17일에야 요동(遼東)교구 선교사 브뤼니에르(Bruniere) 신부와 같이 마카오를 출항하였다.
8월 23일 오송(吳淞)에 이르러 최양업은 먼저 떠난 김대건과 만났다. 그런데 세실은 남경조약이 체결되자(8월 29일) 더 이상 북상(北上)하기를 포기했으므로 두 신학생은 프랑스 군함에서 하선하고 다른 방법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다행히 강남(江南)교구장의 주선으로 중국배 한 척을 얻어 우선 요동을 떠날 수 있었다. 그들은 이 배로 10월 2일 상해(上海)를 떠나 10월 23일 요동에 도착하였다. 김대건은 그 곳에 남아 입국을 시도하였고, 최양업은 몽고땅 팔가자(八家子)로 가서 페레올(Ferreol, 高) 신부와 합류하였다.
최양업은 소팔자가(小八家子) 교우촌에서 신학공부를 계속하였다. 한편 김대건은 입국에 실패했으나 그간의 조선교회 소식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1839년 기해박해로 3명의 선교사를 위시하여 그의 부친 최양업의 부모 등이 순교한 소식에 접하게 되었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최양업은 오히려 그들의 순교에 동참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그러는 동안 페레올 신부가 제3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었고, 1843년 12월 31일 개주(蓋州)에서 주교성성식을 갖게 되었다. 성성식에 참석한 후 최양업은 메스트르 신부와 같이 소팔가자로 돌아왔고, 얼마 뒤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도 소팔가자로 돌아왔다. 그간 김대건은 다시 한 번 훈춘을 통해 입국을 시도했었다.
1844년 최양업과 김대건은 소정의 신학과정을 끝내고 연말에(늦어도 12월 15일 이전)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까지 받았으나 교회법이 요구하는(만 24세) 연령 미달로 사제품까지 받지는 못하였다. 최양업 부제는 계속 소팔가자에 남아 있었다. 한편 김대건 부제는 페레올 주교와 같이 입국을 시도한 끝에 성공하지만 주교를 대동하지는 못하였다.
최양업은 1845년 한 해를 기다림 가운데 허송한 뒤 1846년초에 메스트르 신부와 같이 두만강 쪽을 통해 처음으로 입국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최양업은 요동교구의 베르뇌 신부의 사목활동을 도우며 1846년을 보냈다. 1846년 말 변문을 통해 두 번째 입국을 시도했으나 또 실패하였다.
이 때 그는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소식을 들었다. 이제 최양업은 육로(陸路)로의 입국을 단념하고 해로(海路)로의 입국을 시도하고자 홍콩의 경리부로 갔다(그간 경리부는 마카오에서 홍콩으로 이전되어 있었다).
1847년 초에 홍콩에 도착한 최양업은 입국의 기회를 기다리는 동안 페레올 주교가 보내온 한국순교자전기를 프랑스어에서 라틴어로 옮겼다. 드디어 입국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
라피에르(Lapierre) 함장이 조선정부로부터 회답을 받기 위해 조선해안으로 떠난다는 것이었다. 1년 전 세실은 조선 서해안에 나타나 1839년 3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살해한 책임을 묻는 서한을 조선정부에 보내면서 1년 후 그 회답을 받으러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왔었다.
라피에르 함장은 메스트르 신부, 최양업 등과 같이 군함 2척을 이끌고 1847년 7월 28일 마카오를 떠났다. 그러나 두 군함은 고군산도(古群山島)에 이르러 완전히 난파하였다. 상해로부터 구조선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최양업은 육지로 잠입하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부득이 구조선을 타고 상해로 돌아와야 하였다.
난파된 군함의 잔해(殘骸)를 거두러 갈 것이 거의 확실시 되었으므로 그 기회를 기다렸으나 그것도 프랑스의 국내 사정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는 동안 1848년도 지나가 버렸다.
1849년 최양업은 백령도를 통해 입국을 네 번째로 시도했으나 또 실패하였다. 상해로 돌아온 그는 4월 15일 강남교구장 마레스카(Maresca) 주교로부터 숙원인 사제품을 받고 동료 김대건에 이어 두 번째 한국인 신부가 되었다. 최 신부는 다시 육로 입국을 시도하고자 5월 요동으로 떠났다. 연말을 기다리며 7개월 동안 베르뇌 부주교를 도우며 사목경험을 쌓았다.
12월 변문으로 떠났고, 이번에는 입국에 성공했다. 그러나 메스트르 신부와 같이 입국하지는 못했다. 실로 입국길에 오른 지 7년 6개월, 입국의 시도를 거듭하기 다섯 번만의 성공이었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
다. 성 김대건 신부의 삶과 순교
■ 입국로를 찾는 고난의 여행자김대건의 신학교 생활을 5년만에 끝을 맞게 됩니다. 1842년 2월 아편전쟁이 끝나갈 무렵 프랑스는 세실 함장이 이끄는 함선 두 척을 중국에 파견하였는데, 여기에 김대건과 최양업이 통역으로 승선하게 된 때문입니다.
프랑스 신부들은 이것이 조선에 입국할 좋은 기회라 생각하였으나 프랑스 함대를 이용한 조선 입국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김대건이 탄 에리곤호가 마닐라와 대만을 거쳐 넉 달 뒤 중국 오송구(吳松口)에 도착했지만, 전쟁이 끝나면서 세실 함장이 북상을 포기한 결과입니다.조선 입국을 바라던 김대건 일행은 그들과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럼에도 그들은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김대건 일행은 스스로 입국로를 찾기로 결정하고, 잠시 머무르던 상해를 떠나 요동으로 향해 나아가, 이때부터 김대건의 모험은 시작됩니다.
조선 입국때까지 2년 3개월여에 걸쳐 이루어진 이 모험으로 그는 건강을 되찾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타고난 의지와 대담성이 더욱 강해졌으나, 뱃길 1만리, 육로 7천리의 길은 끝없는 고행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요동 당 백가점(百家店)에 머물던 김대건은 가난한 나무꾼으로 변장하고 조선 국경을 향해 나아갑니다. 만주교구장이던 배롤 주교조차 조선 입국의 위험성을 설명하며 이 모험을 말렸지만, 억압받는 조선 신자들을 구제해야 하겠다는 일념을 단념시킬 수는 없었습니다.김대건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자비와 성모 마리아의 도움에 맡기고 있었으니, 이후 김대건은 1842년 말과 이듬해 3월 과 9월, 세차례에 걸쳐 의주 변문(邊門)을 탐색하였고, 여기에서 그는 김 프란치스코라는 조선 교회의 밀사를 만날 수 있었으며, 한때 조선 땅을 밟기도 하였습니다.
또 1844년부터는 동북쭉 국경을 통한 입국로를 찾기 시작하였는데, 두만강을 넘는 길이 변문 쪽보다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는 만주의 소팔가자(小八家子)로 되돌아가야만 하였습니다. 이때 그는 페레올(Fereol)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 여행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면 마음대로 조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다음과 같이 한탄합니다."저는 사람이 이 세상에 영원히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며칠을 지내는 길손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리를 얼마나 잘 깨달았는지 모릅니다. 제가 조국 땅을 밟는 것은 잠깐 동안, 그것도 중국 사람 즉 외국인의 자격으로밖에 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인류라는 공통체가 형제 같은 입맞춤을 하며 하느님과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 속에서 포옹할 날이 언제 오게 될지."1844년 12월, 소팔가자로 돌아온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한데 장래가 촉망되는 신학생으로 인정을 받아 최양업과 함께 부제품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김대건은 서둘러 페레올 주교와 함께 조선에 들어가고자 했으며, 조선의 신자들에 따르면 12월말이 조선 입국에 가장 적당한 시기였고, 또 김 프란치스코라는 신자가 그들을 맞이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해박해 이후 더욱 엄중해진 변문의 경계로 인해 서양 사람인 페레올 주교는 조선에 들어갈 수 없었고, 김대건 부제만이 조선 교회의 밀사들을 따라 변문을 통과하였습니다.페레올 주교와 함께 입국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김대건 부제는 1845년 1월 15일 다시 한양 땅을 밟을 수 있었으니, 지난 8년동안 그리던 귀국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조국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감시와 박해의 위험뿐이었습니다.한양에 도착한 즉시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의 지시대로 앞으로 전교활동을 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으며, 신학생 선발, 조선 지도의 작성,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 수집, 안전한 가옥 매입등이 짧은 기간에 그가 해낸 일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조선과 상해를 잇는 해로를 찾아내는 일은 더욱 어려웠지만 이러한 일들은 비밀리에 이루어졌고, 마침내 귀국하고 석 달쯤 되어 상해로 출발하는 배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경향잡지, 1996년 7월호, 차기진 루카(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 김대건 신부 활동 지도
다. 최양업 신부1~5차 귀국 여행
유학 6년 만에 귀국길에 오르지만 실패를 거듭하는데…
최양업 신부는 1849년 12월 말 조선으로 귀국했다. 마카오로 유학을 떠난 지 13년 만이다. 최 신부는 조선 입국을 위해 1842년 7월부터 총 6차례 귀국 여행길에 오른다.
제1차 귀국 여행 (최양업)
최양업은 1842년 7월 17일 마카오에서 프랑스 함선 파보리트호에 승선해 귀국 길에 올랐다. 제1차 귀국 여행이다. 최양업은 파쥬 대위 지휘로 조선에 가서 프랑스와의 통상 조약을 요청하기 위해 떠나는 이 배에 통역사로 승선했다. 이 여행에 만주대목구 선교사 브뤼니에르 신부와 쟝시니 프랑스 외교사절이 함께했다. 만약 프랑스 함선이 조선으로 가지 못할 경우 쟝시니 외교사절이 북경으로 가서 조선의 남쪽 해안까지 둘러보고 올 계획이었다.
귀국 길에 오르는 날을 고대하면서 최양업은 마카오에서 그 설렘을 스승에게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하루하루 그 군함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의 동포들이 마침내 시온성으로 회두하여 우리의 창조주이시요 구세주이신 하느님을 찬송할 날이 언제쯤 올 것인가요”(1842년 4월 26일 마카오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쓴 편지에서).
7월 17일 마카오를 떠난 코르벳함 파보리트호는 8월 23일 상해 인근 오송(吳淞)에 닻을 내렸다. 오송에 올 때 하구 모래 위에 좌초돼 닻 4개를 분실하고 죽을 뻔한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최양업의 제1차 귀국 여행은 곧 실패로 끝나고 만다. 영국과 청나라가 아편전쟁을 끝내고 남경조약을 체결하면서 동아시아의 정세가 급변하자 프랑스 함대가 조선 원정을 포기하고 변화 추이를 지켜보기 위해 상해에 머물기로 했기 때문이다.
파보리트호에서 하선한 최양업 일행은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와 합류한 후 강남대목구장베시 주교의 도움으로 1842년 10월 12일 중국 배를 타고 상해에서 출발해 23일 요동 태장하(太長河)에 도착했다.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는 거지로 변장하고 조선 입국로 개척을 위해 압록강 변문쪽으로 갔고, 최양업은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가 머물고 있는 소팔가자(小八家子, 현 길림성 장춘시 합륭진 소팔가자촌)로 떠나 11월 그곳에 도착했다.
제2차 귀국 여행(최양업)
최양업은 소팔가자에 머물면서 신학 공부를 계속했다. “그는 대단히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가 한 살만 더 많았다면 아마 그를 올해에 사제품을 하는 일이 옳을 것입니다”(페레올 주교가 1843년 2월 20일 소팔가자에서 그르레즈와 신부에게 쓴 편지에서).
1843년 3월 김대건이 변문에서 조선 밀사 김 프란치스코를 만난 후 소팔가자로 왔다. 김대건은 1839년 기해박해로 앵베르 주교와 모방·샤스탕 신부뿐 아니라 최양업의 부모인 최경환(프란치스코)과 이성례(마리아) 등 많은 신자가 순교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 소식을 들은 최양업은 “언젠가 좋으신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저의 동포들을 만날 행운이 저에게 다가오기를 하루하루 바라면서 머물러 있습니다.…저의 부모와 형제들을 따라갈 공훈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저의 신세가 참으로 딱합니다. 그리스도 용사들의 그처럼 장렬한 전쟁에 저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말입니다. 정말 저는 부끄럽습니다”(1844년 5월 19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라고 한탄했다.
최양업과 김대건은 1844년 12월 10일께 페레올 주교에게 부제품을 받았다. 페레올 주교와 김 부제는 조선 입국을 위해 변문으로 떠났고, 최양업 부제는 교구장의 지시로 메스트르 신부와 소팔가자에서 1846년 1월 말 제2차 귀국 여행을 떠날 때까지 머무른다.
“페레올 주교가 (최양업) 토마스에게 반감을 품었습니다. 이것은 주교와 얼마 동안 같이 지내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아주 쉽게 일어나는 일입니다.…저는 벌써 이 문제에 대해 그에게 몇 번 지적하였습니다. 그가 이것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랍니다.…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진정될 것입니다”(메스트르 신부가 1845년 5월 25일 소팔가자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1846년 1월 소팔가자에서 훈춘으로 떠났다. 두만강 국경에 접한 조선 마을 경원(慶源)에서 밀사와 만나 조선으로 입국하기 위해서였다. 제2차 귀국 여행이다.
최양업과 메스트르 신부는 17일 동안 산과 골짜기를 지나 두만강 얼음을 타고 만주의 황야를 걸은 후 훈춘에 도착했다. 설맞이를 위해 열흘간 두 나라 사이의 교역을 위해 경원에서 장이 열리는 데, 둘은 이 개시(開市)의 혼잡함을 이용해 입국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장이 열리기 전날 많은 포졸을 거느린 만주 장교 4명에게 체포된 후 3일 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석방돼 소팔가자로 되돌아갔다. 제2차 귀국 여행도 이렇게 실패로 돌아갔다.
제3차 귀국 여행(최양업)
소팔가자로 돌아온 최양업은 신학생들을 지도하던 중 1846년 12월 말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압록강 귀국로 탐사차 여행길에 오른다. 변문(邊門)을 통한 귀국을 시도하기 위해서였다.
“지금까지도 저는 우리 포교지 밖에서 떠돌고 있으니 저도 매우 답답하고, 신부님의 마음도 괴로우실 것입니다. 저는 이제야 겨우 저의 동포들한테로 가는 도중입니다.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저로 하여금 저의 신부님들과 형제들을 반가이 만나 포옹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기를 빕니다”(1846년 12월 22일 심양에서 르그르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라고 여행 도중 스승에게 편지를 보냈다.
최 부제는 이번 3차 여행이 꼭 성공할 수 있기를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이제 발걸음은 가볍게 뛰어 달리고 있으나, 얼굴은 무겁게 푹 수그러지고 있습니다. 죄악의 막중한 무게에 짓눌리고 극도의 빈곤과 허약으로 시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풍요한 자비심에 희망을 갖고, 하느님 아버지의 섭리에 저를 온전히 맡깁니다.… 매일 두렵고 겁이 납니다만, 하느님께 바라는 희망으로 굳세어져서 방황하지 않으렵니다. 바라건대 지극히 강력하신 저 십자가의 능력이 저에게 힘을 응결시켜 주시어, 제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게 하시기를 빕니다”(1846년 12월 22일 심양에서 르그르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압록강 변문에 도착한 최양업과 메스트르 신부는 1846년 기해박해로 국경 감시가 너무 엄중해 또다시 귀국에 실패하고 만다.
[평화신문, 2016년 8월 21일, 리길재 기자]
4차 귀국 여행 (상) 최양업
고군산도까지 갔으나 고국 땅은 밟지도 못하고
최양업 부제는 1846년 12월 말 제3차 변문을 통한 귀국 여행을 실패한 후 이듬해 홍콩으로 가서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서 생활했다. 그는 이곳에서 페레올 주교가 프랑스 글로 작성해 보내온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라틴어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 이 라틴어 번역본은 파리외방전교회 르그레즈와 신부의 교정을 거쳐 로마 교황청으로 보내져 시복 자료로 활용됐다.
“지금은 지루하고 긴 여행을 한 후 메스트르 신부님과 함께 홍콩으로 돌아와서, 여기서 하루하루 프랑스 함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함선을 타고 존경하올 페레올 주교님께서 명하신 대로 조선에 상륙하는 길을 다시 찾아보려 합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이번만은 다행히 성공하여 지극히 가난한 우리 포교지에 도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홍콩에서 1847년 4월 20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쓴 편지에서).
편지에서처럼 최 부제가 기다리던 프랑스 함선은 라 피에르 대령이 함장인 라 글로와르 호와 리고 드 즈누이 소령이 지휘하는 라 빅토리외즈 호였다. 두 함선은 중국ㆍ인도 주재 프랑스 함대 사령관 세실 제독의 명령에 따라 코친차이나(지금의 베트남) 감옥에 억류된 가톨릭 선교사들을 구출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그해 4월 15일 다낭에서 전투를 벌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두 함선은 중국 광동성 광주에서 정비를 마친 후 세실 함장이 1846년 6월 1일 자로 1838년 기해박해 때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 등 3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참수한 것에 대해 조선 조정에 보낸 항의 서한에 대한 답을 받아내려고 조선 원정길에 오를 계획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함대의 조선 원정 본 목적은 코친차이나 침공과 마찬가지로 통상 조약을 체결해 경제적 외교적 이득을 취하는 데 있었다.
최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는 1847년 7월 30일 이 함대에 승선해 귀국 길에 올랐다. 라 글로와르 호에는 장교 21명, 수병 406명이, 라 빅토리외즈 호에는 장교 8명, 수병 125명이 승선했다. 수병 대다수가 전투 경험이 있는 정예 함대였다. 최 부제는 1차 귀국 여행 때와 마찬가지로 통역사 역할을 했다.
- 1858년 새로 건조한 프랑스 함선 라 글로와르 호. 아마도 신치도에 좌초된 라 글로와르 호도 이와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둘을 태운 프랑스 함대는 중국 광동성 광주 황포(黃浦)를 출발해 주강(珠江) 입구인 호문을 지나 조선 근해까지 순조롭게 항해했다. 8월 9일 제주도 해상을 지나 다음 날 아침 일찍, 서양인 가운데 그 누구도 탐사한 적이 없는 고군산도 인근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때 두 함선은 바다에서 육지로 들어가는 포구에서 심한 돌풍을 만나 파도에 휩쓸려 모래톱에 좌초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음날까지 바닷물이 거의 빠지지 않자 좌초된 두 함선은 곧 파선하고 말았다.
라 글로와르 호 함장인 라 피에르 대령은 8월 12일 아침, 모든 수병에게 하선해 ‘북쪽 또는북서쪽 2마일(약 3.2㎞) 지점에 있는 섬’으로 철수할 것을 명했다. 철수 과정은 조직적으로진행됐다. 하역 중대가 구성돼 가장 먼저 대포를 비롯한 무기류와 탄약 그리고 환자와 어린 수병들이 섬으로 옮겨졌다. 초병들이 수량이 많은 물줄기를 찾아내자 다음으로 식량과 남은 인원들 모두가 상륙했다. 철수 과정에서 승선자 562명 중 최 부제를 비롯한 560명은 무사했으나 수병 2명은 거친 파도에 휩쓸려 익사하고 말았다. 이 과정을 조선 수병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고군산진 요망감관((瞭望監官-관측병) 윤승규는 프랑스 함대의 좌초 사실을 유진장(留陣將) 조경순에게 즉각 보고했고, 조경순은 다시 전라감사 홍희석에게 알렸다. 그런 후 즉각 군사를 이끌고 함께 배를 타고 좌초된 함선을 조사했다. 그리고 프랑스 해군의 야영지를 주시했다.
전라감사 홍희석은 바로 헌종에게 장계를 올렸으나 프랑스 함대가 좌초된 지 9일이 지난 8월 18일에서야 처음으로 이 사실이 조정에 보고됐다. 홍희석의 장계에는 “부안 화도(현 부안군 계화리) 뒷바다의 만경현 신치도 무영구미 풀두렁(개펄의 해초 언덕)에 프랑스 함대가 표착했고, 두 함선이 좌초한 신치 풀두렁에서 10리쯤 되는 신치산 아래 남쪽 기슭에 혹은 신치산 아래 모래사장에 프랑스 해군이 상륙해 야영하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 라 빅토리외즈 호 함장 리고 드 즈누이 소령. 훗날 제독이 되어 코친차이나를 점령해 베트남을 프랑스 식민지로 만든 인물이다.
라 피에르 함장은 8월 13일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는 조선 수군에게 서한을 통해 ‘1846년 세실이 조선 조정에 보낸 서한의 답을 받기 바란다’는 뜻을 전달하고, 식량과 배를 제공해 달라고 부탁했다. 전라감사는 이 요청을 다시 조정에 보고한 후 물과 식량, 배 등 필요한 물품을 프랑스 야영지에 공급했다. 또 만경현령, 부안 겸 고부군수, 위도첨사, 여산부사, 익산군수 등을 차사원(差使員, 관찰사가 중요한 임무를 지어 파견하는 관원)과 문정관(問情官, 외국 배가 들어오면 그 사정을 알아보는 임시 관리)으로 임명해 동정을 살피도록 하고, 우수사와 연해 각 읍과 진에 관문을 보내 경계토록 했다.
조정은 라 피에르 함장에게 ‘프랑스 선교사를 살해한 것은 그들이 표류인이 아니라 잠입자였기 때문에 정당하다. 우리는 그들이 프랑스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으나 설사 그들이 프랑스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처벌했을 것’이라는 내용의 회문(回文)을 보냈다. 조선 조정이 서양 함선과 처음으로 주고받은 외교 문서였다. 최양업 부제는 이 역사적인 사건에 직접 관여했을 것이다. 통역사였던 최 부제는 라 피에르 함장이 조선 조정에 보낸 한문 서한을 직접 작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안타깝게도 라 피에르 함장은 조선 조정의 답을 전달받지 못했다. 조정의 회문이 신치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프랑스 군인들은 철수하고 없었다.
차기진(양업교회사연구소장) 박사는 최양업 신부 편지, 라 피에르 함장 보고서와 홍희석의 장계, 일성록, 헌종실록 등을 근거로 프랑스 함대의 좌초 지점과 야영지를 처음으로 확인했다. 차 박사는 2013년 11월 전주교구가 주관한 학술 심포지엄에서 프랑스 함선 좌초 지점은 북위 35도 79분, 동경 126도 50분 인근(현 신시도 33센터 배수갑문 안쪽 인근)이며 야영지는 북위 35도 81분, 동경 126도 48분 인근(신시전망대 광장 일원)이라고 밝혔다. [평화신문, 2016년 9월 25일, 리길재 기자]
4차 귀국 여행(하) 최양업
신치도에서 눈물을 삼키며 다시 발길을 돌려야 했으니…
- 최양업 부제와 프랑스 해군 560명이 한달간 표착생활을 했던 신치산 아래 남쪽 기슭 모래사장터. 전주교구에서 세운 최양업 부제 일행 난파 체류지 팻말이 있다.
라 피에르 함장은 함대의 고군산도 좌초 사실을 알리고 영국이나 미국 함선에 구조 요청을 위해 8월 25일 오늘날 구명정에 해당하는 종선(從船)을 상해로 급파했다. 이 종선은 중국 광동성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영국 함대에 구조를 요청했다.
영국의 수해(Suhae) 함장은 주함인 다이달로스(Dadalus)호와 에스피에글(Espiegle)호, 칠더스(Childers)호를 함대로 편성해 8월 31일 중국 광주 주강을 출발, 9월 5일 고군산도 신치도 앞바다에 도착한 뒤, 12일 프랑스 해군을 모두 태우고 그곳을 떠났다.
라 피에르 함장을 비롯한 300명의 글로와르호 대원들은 다이달로스호를 타고 9월 23일 홍콩에 도착했다. 즈누이 함장과 257명의 빅토리외즈호 수병은 나머지 두 배에 나눠 타고 상해로 갔다.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도 빅토리외즈호 해군들과 함께했다.
신치산 아래서 한달간 머물러
프랑스 해군은 1847년 8월 10일 신치도 무영구미 풀두렁에 좌초된 다음 배를 버리고 12일 신치산 아래 남쪽 모래사장에 상륙해 영국 함대에 구조될 때까지 꼬박 한 달간 이곳에서 머물렀다. 최양업 부제도 1847년 8월 12일 프랑스 해군과 함께 조선 땅을 밟았다. 조선을 떠난 지 무려 11년 만의 일이었다. 최양업은 신치도에 한 달간 머물면서 프랑스 해군 장교와 조선 관리들 사이의 통역을 맡아 육지로 들어갈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했다.
“저는 혹시나 신자들에 대해 무슨 소식이라도 좀 알아내고 싶어서 날마다 수소문하며 기웃거렸습니다. 저의 동포들을 보기도 하고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니 크게 위로가 됐습니다. …저녁이 되면 혹시 신자의 거룻배가 우리에게로 오지 않을까 해서 사방을 두루 살피면서 기대도 하고 기도도 하느라고 애가 바짝바짝 탔습니다”(상해에서 1847년 9월 20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최양업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통역할 때 조선말을 하지 않고 한자만을 사용하는 신중함을 보였다. 그리고 협상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함께 배를 탄 조선인에게 손바닥에 한자를 써가며 천주교에 대해 조심스럽게 묻곤 했다. 그들 중 한 명이 그토록 찾던 신자였다. 바로 1847년 9월 9일이었다.
“한 사람이 제게 가까이 와서 ‘예수님과 마리아를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알고 말고요. 나는 잘 압니다. 당신도 압니까? 당신은 그들을 공경합니까?’하고 제가 그에게 대답하는 동시에 조급하게 물었습니다. 그는 그렇다고 시인했습니다.…그는 자기 온 집안이 모두 다 신자이고, 대공소(오늘날 전북 부안군 변산면 석포리 대소 공소)에 살고 있는데 그곳은 우리가 있는 고군산도에서 백 리가량 떨어져 있다고 대답했습니다”(같은 편지에서).
최양업은 그에게서 9월 11일 “신자 배가 신치도로 올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하지만 구조선인 영국 함대는 이미 신치도 앞바다에 정박해 있었고, 조난자들을 모두 승선시켜 12일 떠나기로 돼 있었다. 최양업은 드디어 입국한다는 희망과 함께 신자 배를 꼭 타야 한다는 조바심으로 꼬박 이틀 밤낮을 견뎌야만 했다. 하지만 최양업은 약속한 11일에 신자 배를 만나지 못했다. 조선 수병들의 경계가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를 태운 프랑스 함대가 좌초한 고군산도 만경현 신치도 무영구미 풀두렁 자리로 지금은 방조제 간척사업으로 새만금 33센터가 들어서 있다.
신자 배가 오길 기다리고 기다리고
“끝끝내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밤에는 조선 거룻배들이 사방에 횃불을 켜고 경비했으며, 낮에는 아무도 우리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금지돼 있었습니다”(같은 편지에서).
이날 신자 배를 만나지 못한 최양업은 신자들이 자신을 태우러 올 때까지 신치도에 남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라 피에르 함장을 찾아가 “혼자만이라도 신치도에 남겠다”고 간절하게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만다.
“저는 고군산도에 남아 있기를 원하여 함장에게 여러 번 청하였으나 함장은 저의 뜻에 결코 동의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서원까지 하면서 간절히 소망해 마지않았고, 또 천신만고 끝에 가까스로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손안에까지 들어온 우리 포교지를 어이없이 다시 버리고 부득이 상해로 되돌아오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므로 저도 모르게 눈물을 줄줄 흘렸습니다”(같은 편지에서).
신치도에 혼자라도 남겠다는 최양업의 판단은 맞았다. 실제로 최양업의 이종사촌 형이 페레올 주교의 명에 따라 거룻배를 가지고 고군산도에 와서 그해 여름 내내 기다렸었다. 훗날 이 사실을 알게 된 최양업은 크게 가슴 아파했다.
최양업은 1847년 9월 12일 참담한 심정으로 영국 함선에 올랐다. 눈앞에서 조금씩 작아졌다 끝내 사라지고만 고군산도를 보면서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희망을 잃지 않고 낙담하지 않으며, 여전히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고, 전능하시고 지극히 선하신 섭리에 온전히 의지하고 있습니다. 저도 하느님 안에서 항상 영원히 희망을 가질 것이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려고 저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의 손에 맡겼으니 그분을 언제나 믿을 것입니다”(같은 편지에서).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며 기도
최양업은 스승에게 보낸 이 편지 내용처럼 스스로 낙담하여 무너지지 않으려고 더더욱 하느님께 의지했다. 라 피에르 함장이 신치도를 떠나면서 “올해 안으로 다시 프랑스 함선이 조선으로 올 것”이라고 자신에게 밝힌 다짐을 되뇌면서 최양업은 조국을 위해 기도했다.
“주님, 보소서. 저희의 비탄을 보시고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소서. 저희의 죄악에서 얼굴을 돌리시고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성심에 눈길을 돌리시어, 당신을 향해 부르짖는 성인들의 기도를 들어주소서”(같은 편지에서).
고군산도로 다시 올 것이라는 최양업의 기대와 희망은 프랑스 해군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탓에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이로써 최양업의 제4차 조선 입국 여행도 실패로 끝나고 만다.
[평화신문, 2016년 10월 2일, 글 · 사진=리길재 기자]
- 페레올 주교가 조선 입국을 위해 머물던 소팔가자는 최양업, 김대건 신부가 부제품을 받고 조선 입국로 개척의 중심 거점 역할을 한 교우촌이다.
제5차 귀국 여행, 백령도(최양업)
거센 파도 뚫고 갔으나 잘못된 지도로 꼬여버린 귀국길
▲최양업의 귀국 여행
제1차 : 마카오 - 상해 - 태장하 - 소팔가자
제2차 : 소팔가자 - 훈춘 - 소팔가자
제3차 : 소팔가자 - 변문
제4차 : 변문 - 홍콩 - 고군산도(신치도) - 상해
제5차 : 상해 - 교도(백령도) - 상해
최양업 신부는 1849년 4월 15일 상해에서 강남교구장 마레스카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은 후 5월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백령도로 떠났다. 제5차 귀국 여행이었다. 두 사제가 백령도로 향한 이유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에 의해서다.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의 보고에 따라 백령도 인근에 중국 산동 어선들이 자주 나타나기에 접선이 쉬울 것으로 판단했다.
- 최양업은 백령도에서 신자들을 만나 배로 입국하려 했으나 만나지 못해 입국에 실패하고 만다. 사진은 백령도에서 본 서해. 「순교의 맥을 찾아서」 저자 오영환 교수 제공.
최양업과 메스트르 신부는 포구에 도착한 후 「조선전도」를 입수하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영국 해도에 표시된 ‘교도’(Kiaotao-황해도 초도가 아니었을까 추정해 봄)였다. 최 신부 일행은 배를 정박시킨 후 주민들에게 섬의 이름과 위치를 물어보았는데 해도에 표기된 지명과 전혀 다른 곳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두 신부는 다시 배를 돌려 해도에 ‘백령도’라고 적혀 있는 다른 섬으로 가봤으나 중국 배나 조선 배 그 어떤 배도 보지 못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보고에 의하면, 이 섬에는 많은 산동 어부들이 떼를 지어 모이므로 그곳에 가면 어김없이 큰 선단을 만나게 돼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던 것입니다”(같은 편지에서).
궁지에 빠졌다. 최 신부 일행이 도착한 곳은 전혀 알 수 없는 생소한 곳이요 지극히 위험한 곳이었다. 닻을 내릴 수도 없고 안내자를 부를 수도 없었다. 어떤 조선 사람이라도 외국인에게 심부름하기 위해 접촉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돼 있었기 때문이다. 두 신부를 태운 배는 사제들이 경황없이 허둥대는 동안 섬에서 멀리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뱃머리를 상해로 돌려 항해를 했다.
김대건 신부가 만든 지도 요청
메스트르 신부는 백령도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파리외방전교회 홍콩 극동대표부 경리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김대건 신부가 만든 ‘조선전도’를 복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조선전도’가 지리학적으로는 정확하지 않지만, 백령도 인근 섬과 해안들을 인지하는 데는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판단해서다. 하지만 ‘조선전도’는 떠나는 날까지 도착하지 않았다.
최양업 신부와 메스트르 신부는 1849년 5월 마카오에서 온 배(최양업 신부 서한에는 프랑스 함선, 사식휘의 「강남전교사」에는 모래선이라고 적혀 있다)를 타고 상해에서 출발해 백령도로 항해했다. 둘은 이번 여행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 기대했다. 조선에 있는 페레올 주교와 미리 약속했기 때문에 지정된 장소에서 자신들을 태울 조선 신자들의 배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선장은 영국인이 작성한 해도를 따라 백령도로 배를 몰았다. 아마도 1816년 영국 군함 알세스트호의 맥스웰 함장과 리라호의 홀 함장 일행이 작성한 해도였을 것이다. 5월의 서해는 그리 녹록지 않다. 이 시기 서해는 중국 산동과 요동 반도에 자주 형성되는 저기압과 막바지 겨울 북서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돌풍을 동반한 너울을 만들기도 한다. 두 신부를 태운 배도 이 시기 변덕스러운 서해 날씨를 비켜갈 수 없었다.
“계절이 꽤 나쁜 때였으므로 위험과 노고가 없을 수 없었습니다. 사슬이 끊어지고, 닻은 잃어버렸으며, 선장은 함선 전체를 파선 당하게 할까 봐 조바심을 냈습니다. 무진장 애를 쓴 끝에 우리가 그토록 찾고 바라던 포구에 도착했습니다”(최양업 신부가 상해에서 1849년 5월 12일 자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 김대건 신부가 작성한 ‘조선전도’.
“우리 선장은 라 피에르 함장이 당했던 것과 같은 운명을 당할까 봐 시시각각으로 조바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대책도 없었습니다. 인간의 도움은 더 이상 전혀 기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마음으로 전능하신 하느님과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모든 성인 성녀께 구원을 청했습니다. 우리 모두를 온전히 하느님의 자애로우신 섭리에 맡길 따름이었습니다”(같은 편지에서).
페레올 주교도 만나기로 한 장소에 두 신부가 나타나지 않은 것에 대해 몹시 안타까워했다. “제가 정했던 백령도 근처의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곳으로 보낸 배가 중국에서 온 배들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제대로 왔더라면 매우 좋은 기회였을 텐데요. 약속 장소로 오지 못한 이유를 모르겠습니다”(페레올 주교가 1849년 11월 28일 한양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상해에 돌아와서야 받은 지도
메스트르 신부는 백령도 여행에 실패하고 상해로 돌아가는 선상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편지를 썼다.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할까요? 솔직히 말해서 난처한 일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그의 마지막 편지에서 말한 산동 배들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 어선들에 관한 정보를 산동에서 두 번 물어보게 했는데, 그때마다 조선 해안으로 가는 배들을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그리로 가는 배들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 길은 제게 매우 어려워 보입니다”(메스트르 신부가 상해에서 1849년 5월 15일 자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상해에 도착한 두 신부는 그제야 여행 전 그토록 원했던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를 받을 수 있었다. 만약, 두 신부가 백령도 여행 전 이 지도를 갖고 떠났다면 가정이지만 성공할 확률이 아주 높았을 것이다. 서로 다른 지도를 가지고 만나기로 한 것 자체가 순진한 발상이었다. [평화신문, 2016년 10월 16일, 리길재 기자]
라. 최양업 신부 첫 사목지 차쿠성당
최양업 신부의 첫 사목지 차구성당은 조선교구 선교사들의 주요 거점이었다.
1849년 5월 백령도 귀국 여행에 실패하고 상해로 돌아온 최양업 신부는 다시 함선을 타고 중국 요동 차구(溝)로 갔다. 최양업 신부는 이곳 ‘눈의 성모 성당’에서 7개월간 머물면서 만주교구장 직무대행인 베르뇌 신부(제4대 조선교구장 주교)의 지시에 따라 병자들을 방문하고, 주일과 축일 미사 때 강론을 했다.
또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대축일에는 고해성사를 집전하고 성체를 분배하는 성무를 수행했다. 사실상 보좌 신부로서 사목한 것이다. 이는 조선인 사제가 중국 땅에서 중국 신자들을 사목한 첫 번째 사례다.
최양업 신부는 1849년 6월 21일 베르뇌 신부 앞에서 중국 의례에 관한 클레멘스 11세 교황 헌장 「그날부터」(「Ex illa die」, 1715년 3월 19일 반포)와 베네딕토 14세 교황 칙서 「그 특별한」(「Ex quo singulari」, 1742년 7월 11일 반포)의 내용을 준수하겠다는 선서문을 작성하고 선서한 후 사목을 시작했다.
이러한 최양업 신부의 행동은 당시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공자 숭배나 조상 제사와 같은 중국 의례에 관한 교황청의 금지령을 얼마나 충실히 따랐는지를 확인시켜 준다.
조선 귀국 때까지 정식 보좌로 활동
최양업 신부는 차구에서 1849년 5월부터 7개월간 사목했다고 밝히고 있다(1850년 10월 1일, 도앙골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참조). 이에 대해 양업교회사연구소장 차기진 박사는 “1849년 6월 21일 자 최양업 신부의 자필 선서문을 근거로 5월부터 6월 20일까지 약 한 달여간 사목 실습 형태로 활동한 후 선서한 날로부터 같은 해 12월 말 조선 귀국 때까지 정식 보좌 신부로 활동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설명했다.
차 박사는 아울러 “지금까지 최양업 신부가 베르뇌 신부의 보좌로 첫 사목을 시작한 장소는 요동의 ‘양관’ 혹은 ‘차구’라고 설명됐는데 최양업 신부의 이 자필 선서문으로 그의 첫 사목 중심지가 정확히 ‘차구 본당’임이 확인된다”고 명확히 했다.
- 베르뇌 주교.
베르뇌 신부는 1844년 3월부터 1848년까지 요동 개주시(蓋州市) 라가점(羅家店) 양관(陽關)과 사령(沙嶺)에서 사목했다. 베르뇌 신부는 1841년 1월 16일 마카오를 거쳐 지금의 북베트남인 통킹에 부임했으나 곧 체포돼 옥살이하다가 1843년 3월 석방된 후 만주 선교사로 임명됐다.
그는 1845년 7월 15일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에 의해 조선교구 부주교로 지명됐다. 페레올 주교는 마카오에서 이날 작성한 자신의 유언장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받은 권한에 따라, 저는 요동 소속 교황 파견 선교사인 베르뇌 신부를 조선의 부주교로 지명합니다. 임명은 제가 다른 사람을 지명하기 전에 죽는 경우에만 해야 할 것입니다.”
베르뇌 신부가 1849년 양관에서 차구로 선교 사목지를 옮긴 이유는 1848년 3월 4일 자신과 만주교구장 베롤 주교가 양관본당 사제관에서 주민들에게 습격당해 목숨을 잃을 뻔했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인들 사이에는 ‘서양 선교사들이 죽은 이들과 어린아이들의 눈을 뽑아가고, 죽기 직전인 아이를 소금에 절여뒀다가 아편을 만든다’는 유언비어가 퍼져 있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베롤 주교와 베르뇌 신부는 상해까지 피신했다. 베롤 주교는 1849년 4월 상해 주재 몽티니 프랑스 총영사에게 양관 주민들이 1844년 황포조약을 위반하고 성당을 공격한 데 대해 중국 당국에 항의하면서 피해 보상과 재발 방지를 조처해 달라고 요청하고, 베르뇌 신부를 양관이 아닌 차구에서 사목하도록 했다.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는 최양업 신부를 신학생 시절뿐 아니라 첫 보좌 시절 때부터 선종할 때까지 지켜보고 함께한 분이다. 신학교 교수로, 동료 사목자로 평생을 함께했던 베르뇌 주교는 최양업 신부에 대해 “굳건한 신심과 영혼의 구원을 위한 불같은 열심, 그리고 무한히 소중한 일로는 훌륭한 자질로 우리에게 그렇게도 귀중한 존재가 됐던 유일한 조선인 사제”라고 칭송했다(베르뇌 주교가 1861년 9월 4일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늘날 요녕성 장하시(莊河市) 용화산진(蓉花山鎭)에 자리한 차구의 눈의 성모 성당은 북쪽으로는 영광의 산, 남쪽으로는 작은 시내에서 몇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계관산 사이에 있었다(제6대 조선교구장 리델 주교가 1880년 6월 7일 자로 형수 레오니아에게 보낸 편지에서).
차구, 조선 선교의 교두보 역할
차구 성당은 지리적으로 조선과 가까웠기에 파리외방전교회의 조선 선교 교두보 역할을 톡톡히 했다. 1866년 병인박해로 조선에 입국하지 못한 블랑(훗날 제7대 조선교구장이 됨)ㆍ리샤르ㆍ마르티노 신부가 차구본당에 머물면서 박해가 잦아지길 기다렸다. 칼래ㆍ리델 신부도 박해를 피해 조선에서 차구로 피신해 조선 재입국을 모색했다.
또 제2차 조선교구 성직자회의(시노드)가 1868년 12월 차구성당에서 열렸다. 당시 조선교구 장상이었던 리델 신부는 1869년 1월 말(또는 2월 초) 베롤 주교와 협의해 차구본당의 사목 관할권(재치권)을 만주교구에서 조선교구로 이관했다. 차구본당을 조선 입국의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조선 선교사들이 차구본당을 사목했고, 리델 주교는 차구에 조선교구 대표부와 신학교를 설립했다.
[평화신문, 2016년 10월 23일, 리길재 기자]
3. 선교사 입국로 개척 관련 성지
가. 차쿠(차구) 성당
요동반도 남쪽 장하 시에서 북쪽 70리 거리에 위치한 차쿠는 한국 천주교회의 중국 요동 지역 사적지이다. 차쿠는 마을 이름으로 지금은 용화산이라 부르고 있다. 두 번째 사제이신 최양업 신부님의 첫 사목 지 중 한 곳이며 조선 입국의 거점으로 이용되었다.
차쿠 성당은 1867년 이래 조선에 파견 된 선교사들이 박해로 입국하지 못한 채 이 성당에 거주함으로 한국 천주교회와 깊은 관련을 맺게 되었다.
1840년대 베롤 주교는 양관 성당을 건립한 뒤, 차쿠에도 아름답고 높은 첨탑을 가진 성당을 건립하고 그 주보를 로마에 있는 '눈의 성모 성당'(聖母雪之殿)과 같은 이름으로 정하였다.
최근에 차쿠 성당에서 사목 중인 청주교구 이태종 사도요한 신부의 증언으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성모 설지전 성당은 현, 차쿠 성당에서 직선거리로 약 200~300미터 정도 떨어진 장소에 있었다한다.
또한 백가점 교우촌 역시 현 차쿠성당에서 직선거리로 700~800미터 거리 용화산 아래에 위치한 곳으로 한 부락 안에 차쿠 성당, 성모 설지전 성당, 백가점 교우촌이 있었음이 확인 되었다.
차쿠 성당은 이후 또 하나의 중요한 사목 거점이 되었으며, 베르뇌 신부와 최양업 신부도 이 곳에서 잠시 활동한 적이 있었다.
차쿠 성당(지금의 용화산 성당)은 1860년대에 와서 다시 한국 천주교회와 깊은 관련을 맺게 되었다. 왜냐하면 요동 지역 안에서도 차쿠 성당이 조선과 가장 가까웠고, 이로써 1867년 이래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이 곳에 거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어 중국으로 건너온 파리 외방 전교회의 리샤르, 마르티노, 그리고 훗날 제7대 조선교구장에 임명되는 블랑 신부는 1866년의 병인박해 때문에 조선으로 가지 못하고 이 곳 차쿠에서 생활하였다. 이어 조선을 탈출한 칼래 신부와 리델 신부도 차쿠로 와서 조선 입국을 모색하게 되었다.
1869년 베롤 주교에게 요동 사목의 재치권을 부여받은 리델 신부는 조선 교회의 장상으로서, 또 1870년 이후에는 교구장으로서 모든 활동을 이끌어 나갔다. 당시 조선 선교사들이 사목 중심지로 삼은 곳은 '차쿠'(차溝)라는 교우촌이었다.
우선 그는 조선교구의 대표부를 차쿠에 두고 그 안에 조선 신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리샤르 신부를 차쿠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하여 대표부 일과 경리를 맡아보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1876년부터 하나 둘씩 선교사들을 조선에 입국시키기 시작하였다. 한국 천주교회가 신앙의 자유에 접근하는 순간이었다.
나. 백가점(중국 요동반도 남단)
그곳은 말 그대로 白씨가 사는 집성촌이었다.
백가점[白家店]은 한국교회의 해외사적지의 관점에서 볼 때, 역사적 의미는 깊은 곳이다. 그곳은 최초의 조선교구 선교본부가 있던 곳이기 때문이다.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과도 관련된 사적지다.
최양업 신부님이 무려 7개월에 거처 사목활동을 한 곳이기도 하다.
지척(개울건너)에 현 차쿠성당(당시 설지전 성당)이 있다.
다. 태장하(중국요동반도 남단)
▲ 태장하(太莊河)
1841년 11월 김대건과 최양업 신학생은 1842년 2월 15일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마카오를 출발하여 상해를 거쳐 1842년 10월 22일 요동(遼東) 반도의 남단인 태장하(太莊河) 해안에 도착. 10월 25일 백가점(白家店)(현 요녕성 장하시 용화산진 차쿠성당 인근) 교우촌으로 갔다.
백가점은 태장하 인근, 즉 훗날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 거점이 된 차쿠 인근에 있던 교우촌이다. 브뤼니에르 신부와 최양업은 다시 거처를 개주(蓋州) 양관(陽關) 교우촌으로 옮겨갔으나 김대건은 백가점(차쿠인근)에 머물면서 매스트르 신부에게 신학을 계속 배우며 조선으로 입국할 기회를 기다리기로 했다.
이곳 백가점에서 김대건은 다시 조선교회 소식을 전해 들었다. 기해박해로 선교사들과 신자들이 순교했다는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매스트르 신부와 김대건은 조선 입국을 시도하려고 했다. 결행 날짜는 1842년 12월 20일로 잡았다. 그러나 연락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 만주대목구장이었던 베롤 주교조차도 무모하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계획을 수정했다. 먼저 김대건이 조선 변문으로 가서 사정을 알아보기로 한 것이다.
1842년 12월 23일 김대건은 중국 쪽 국경인 봉황성 변문을 출발, 4일 후 의주 변문 부근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대건은 청나라로 가는 사신 일행에 끼어 있던 밀사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조선교회 사정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자신을 신학교에 보낸 모방 신부를 비롯한 선교사 3명이 모두 순교했고, 동료 최양업의 아버지와 자신의 아버지도 순교했으며 어머니는 의지할 곳 없이 떠돌아다닌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매스트르 신부의 입국 가능성 여부를 타진했으나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듣고는 이튿날 자신이 직접 조선에 입국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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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 변문은 기지를 발휘해서 통과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다음이 더 문제였다. 서울까지 가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는 백가점으로 돌아왔다. 1843년 1월 6일이었다. 그리고 그해 2월 하순 김대건은 제3대 조선교구장인 페레올 주교가 거처하던 만주 소팔가자(小八家자) 교우촌으로 옮겨 먼저 그곳에 와 있던 최양업과 함께 신학 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면서 3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매스트르 신부의 명을 따라 변문으로 가서 조선에서 온 소식을 전해 받았다.
라. 양관 성당 (중국요동반도 남단)
양관성당이 한국 천주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1843년 12월31일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주교서품식이 이 곳에서 거행되면서부터다.
이후 최양업ㆍ김대건 신학생과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조선 입국로 개척을 위해 만주를 여행할 때 자주 이곳에 머물렀다.
또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가 1854년 주교품을 받고 조선에 입국하기 전까지 약 10년간 양관성당에서 만주 선교사로서 활동했다. 아울러 최양업 신부도 1949년 4월 상해 서가회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후 그 해 5월부터 12월3일 조선으로 귀국하기 전까지 약 7개월간 베르뇌 주교의 보좌 신부로 양관성당에서 사목했다.
양관은 요녕성 교구청이 있는 심양에서 요동 북단의 개주를 지나 남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나가점 이라 불렀다.
양관성당은 1838년 요동대목구 설정과 동시에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베롤 주교가 1840년 건립했다. 이때부터 양관성당은 만주의 남쪽 선교의 중심지가 됐다.
양관성당은 1960~70년대에 걸쳐 진행된 중국 문화혁명때 홍의병에 의해 전파됐다. 홍의병들은 대포를 쏴 성당을 허물고 벽돌 잔해로 그 자리에 인민학교 교사를 세웠으나 얼마 못 가 폐교되고 말았다. 이후 양관성당터는 폐허로 변한 채 주민들의 축사로 사용돼 왔다.
1970년대 후반 종교의 자유가 부분적으로 허용되면서 옛 성당부지 회복 운동을 펼쳐온 김페헌 주교는 1990년 후반 양관성당터만 되찾아 폐교사의 지붕만 수리한 후 공소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성당 부지는 자금 부족으로 아직까지 되찾지 못하고 있다.
권순기 본부장은 김페헌 주교뿐 아니라 양관을 관할하고 있는 개주본당 주임 하학봉 신부도 양관성당 개발을 간절히 희망하고 있고 요녕성 인민정부도 상당히 협조적 이라며 인민들로부터 존경받고 정치적으로도 영향력이 있는 김 주교가 올해 공식적으로 은퇴하기 전 가시적 작업이 있어야 양관성당터 회복이 가능할 것 이라고 강조했다.
권 본부장은 또 현재 대만교회를 방문 중인 김 주교가 귀국하면 개주본당 하 신부를 통해 한국교회에 양관성당 개발에 대해 공식적으로 도움을 청하는 서한을 전달할 것 이라며 최양업 신부 첫 사목지인 양관 땅 회복에 한국교회가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여줬으면 한다 고 희망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기사원문 보기] [평화신문 2006.01.15 등록]
마. 의주-압록강-변문
▲ 압록강 중국 쪽 표지석 양관쇄강
▲ 건너편, 의주 땅(북한지역)
압록강 중국 쪽에 세워진 국경 표지석(양관쇄강)이다.
소설 “차쿠의 아침”에 최양업 신부님이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야음을 틈타, 국경을 넘어 조선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묘사된다. 그 장면을 그린 지점이 바로 이 지점이라는 사실을, 함께 동행 하신 “차쿠의 아침” 작가 이태종(사도요한) 신부님 말씀이 감동을 더 한다.
강 건너편이 북한 땅, 한국에 천주교가 들어올 당시 수많은 밀사들과 선교사들이 넘나들던 의주 땅이다. 당시 최양업, 김대건, 최방제 신학생이 마카오로 유학 갈 때도 이곳을 거쳐 구련성, 봉황성 변문을 지나 심양, 마가자, 서만자, 태원을거쳐 5000리길을 지나서야 마카오에 도착 할 수 있었다는 기록이 뒷받침 한다.
1836년 초,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서울 후동(后洞)의 모방 신부 댁에서 라틴어를 배우던 최양업과 김대건, 그리고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그해 12월 3일(음력 10월 25일)에 모방 신부 앞에서 성서에 손을 얹고 신학생으로서 선서를 하였다.
조선 신학생들은 이어 중국으로 돌아가는 유방제(劉方濟) 신부와 함께 조선 밀사(정하상(바오로), 조신철(가를로), 이광렬(요한) 등)들에게 안내를 받아 중국의 국경 관문인 봉황성의 책문(柵門)으로 떠났다.
이에 앞서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샤스탕 신부는 약속대로 12월 25일에 이미 책문에 도착하여 그들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의 신학생 일행이 압록강을 건너 책문에 도착한 것은 12월 28일이었다. 이후 그들은 샤스탕 신부가 정해 준 2명의 중국 밀사들과 함께 대륙을 횡단하여 1837년 6월 7일(음력 5월 5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바. 소팔가자 성당(중국요동반도)
소팔가자(小八家子)는 길림성(吉林省)의 장춘(長春) 서북쪽 70리 지점에 위치한 사평(四平) 인근에 있던 교우 촌이다. 천주교 신자가 중국 장춘 지역을 갈 때 맨 처음 들르는 곳으로
소팔가자(小八家子)란 여덟 가구가 모여서 한 마을을 이루었다는 데서 유래가 되었다.
소팔가자는 1796년 천주교우촌이 형성되었고, 1838년에는 요동 대목구가 북경교구로부터 분리되면서부터 파리 외방전교회가 사목을 담당하게 되었다.
'소팔가자' 교우촌은 본래 만주의 한 작은 교우 촌일 뿐이었는데, 파리 외방전교회 회원으로 만주교구의 초대 교구장에 임명된 베롤르(Verolles, 方) 주교가 1841년에 이 일대의 광대한 토지를 매입한 뒤 성당을 건립하고 나서부터 만주 전교의 거점으로 삼은 곳이다. 조선 선교사 페레올 주교와 매스트르 신부, 그리고 최양업과 김대건이 이곳에 거처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곳 성당은 훗날 폐허가 되었다가 유명한 의화단 사건을 겪은 뒤인 1908년에 재건되었다. 성당 뒷마당에는 김대건 동상이 세워져 있다.
팔가자 마을 포장도로 입구에는 '김대건로'라는 표지판이 있다.
김대건로는 허룽진과 소팔가자(小八家子) 성당을 잇는 9.7㎞ 구간으로 김대건 성인이 1844년 12월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 서품을 받았던 장소에 김대건로가 준공됨으로써 소팔가자 성당을 찾는 신자들의 순례 길도 훨씬 수월해졌으며 이 지역 발전과 한-중간 천주교 교류에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곳이다.
소팔가자는 우리 한국인들과 매우 친근한 역사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1844년 12월 김대건, 양업 두 신학생이 페레올(제3대 조선교구장)주교로부터 부제로 서품된 곳이다. 김대건 부제가 소팔가자에서 1년 반 가량 머문 데 비해 최양업 부제는 4년 동안 신학공부를 계속하면서 조선 입국 로를 탐색했다.
1844년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의 명에 따라서 소팔가자를 떠나서 한 달 여 동안 도보로 훈춘이란 곳에 도착, 두만강을 건너 개시(開市)기간을 이용하여 경원에서 조선교회의 밀사(방지거외,교우)들과 만났다. 그러나 동북국경을 통한 입국이 의주길보다 더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다시 소팔가자로 돌아왔다. 소팔가자로 돌아온 김대건은 최양업과 함께 소정의 신학과정을 마치고 그해 12월 초에 부제품을 받았다. 그의 나이 24세였다.
그런 다음 1845년 1월에는 책문에서 조선의 밀사를 만나 귀국하게 되었다.
돌우물골에서 약 3개월을 지낸 그는 4월 30일에 마포를 떠나 상해로 가서 페레올 주교를 만난 뒤, 8월 17일에는 그곳 '금가항'(金家港) 성당에서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와 조선 신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런 다음 그곳에서 약 30리 떨어진 '횡당'(橫堂) 성당에서 첫미사를 집전하였다.
사. 고군산도(신시도)
최양업(토마스)신부 신시도 체류지
이곳은 한국 천주교 두 번째 신부이며 땀의 증거자(현재, 가경자)인 최양업(토마스)이
1844년 중국에서 부제품을 받고 1847년 프랑스 함대에 승선하여 귀국 로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고군 산 부근(현재의 신시도 배수갑문 안쪽)에서 배가 좌초되어, 마카오 신학교 유학과 부제품 수품 후, 처음으로 조국 땅을 밟았던 곳이다.
프랑스 정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조선 왕실에서 세 명의 선교사를 참수한 것에 대한 항의 서한을 보낸 바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신을 받기위해 자국의 함대를 파견 하였다. 이때 최양업은 프랑스 함대에 한국어 통역관으로서 파리외방 전교회 선교사 메스트로 신부와 함께 그 배를 탓던 것이다.
최양업은 1847년 8월12일부터 9월12일 까지 한 달 동안 이곳 신시 도에 체류하며 프랑스 해군과 조선 관리들 사이의 통역으로 활동 했으며 현지인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부안 대 공소 신자를 만나기도 했으나, 관원의 감시로 더는 만나지 못하고 중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성지순례후원회]
제4편 : 사제 서품과 귀국 길
1. 사제서품과 귀국 여정(김대건.최양업)
- 8.17 상해 금가항 성당에서 사제 서품.(김대건)
- 8.24 상해에서 약 30리 되는 만당(횡당) 성당에서 첫 미사.(김대건)
-8.31 페레올 주교,다블뤼 신부와 함께 라파엘(Raphael)호를 타고 상해 출발.
-. 10.12 충남 강경 부근의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 (김대건)
- 1849년 4월 15일 | 사백 주일에 예수회 회원이자 강남 대목구장인 마레스카
(Maresca) 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됨. (최양업)
***하지만 조박사는 논문에서 “최양업 신부의 서품식 장소는 (서가회 신학원 내 성당
이 아닌) 장가루(張家樓, Tsang-ka-leu) 성당으로 추정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이러한 의견을 뒷받침하는 근거로는
▲마레스카 주교 자신이 예수회원이 아니었던 만큼 마레스카 주교의 주교좌성당에서 거행됐을 가능성
▲최양업에게 사제서품을 주었던 마레스카 주교가 같은 해 9월 11일 이탈리아 프란치스코 회원이었던 스펠타(Luigi Celestino Spelta, 1817~1862) 주교를 성성할 때 장가루 성당에서 성성식을 거행했다는 점 등이 있다.
- 1849년 5월 | 매스트로 신부와 함께 중국 배를 타고 백령도(白翎島)를 통한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상해로 귀환(다섯 번째 탐색 여행).
- 1849년 5월 | 상해를 출발하여 요동으로 감. 만주의 부주교인 베르뇌(Berneux,
張敬一) 신부 아래서성직 수행. (최양업)
- 1849년 11월 3일 | 요동으로 온 매스트르 신부를 만남. (최양업)
- 1849년 12월 3일 |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조선 입국을
시도. 매스트르 신부와 헤어져 단신으로입국에 성공(여섯 번째 탐색 여행. 13년 만
에 귀국).
- 서울에서 하루를 유숙한 뒤 다블뤼 신부에게 가서 병자 성사를주고, 충청도로 가서
페레올 주교를 만남. (최양업)
2. 사제 서품과 귀국 길 관련 성지
가. 상해 김가항 성당.
한국 첫 사제 탄생지 김가황 성당
김가항성당은 상해공항에서 황포강이 흐르는 남포대교(南浦大橋)를 건너 자동차로 양자로를 약 1시간여 달려야 닿을 만큼 상해 동남쪽 끝단에 위치해 있다.1백50여 년 전 1845년 8월 17일 바로 이곳에서 김대건 신부가 한국인 첫 사제로 탄생됐다.이날은 한국 천주교회사 뿐 아니라 세계 교회사 안에서 영원히 기억될 영광되고 감격적인 축복의 날이었다.사제가 되겠다는 일념 하나로 15살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온지 만 9년 만에 꽃피운 결실이었다.조선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가 주례한 김대건 신부의 사제서품식에는 다블뤼 안 신부를 비롯한 서양 신부 4명과 중국 신부 1명이 미사를 공동 집전했고, 성당을 가득 메우고도 남을 만큼 많은 축하객들이 참석했다.한국 천주교회사를 저술한 샤를르 달레는 이 때의 광경을 『서품식에 참여하려는 신자들이 떼를 지어 몰려왔다』고 묘사할 정도로 대단했다.김대건 신부의 사제서품을 축하하기 위해 수없이 몰려든 신자들의 무리 중에는 조선인 신자 11명도 있었다.한국인 출신 사제가 배출돼 명실상부한 조선교회의 탄생을 목격하고 김대건 신부의 숭고한 피흘림으로 세상 종말까지 이어질 한국교회의 사제 성소를 증거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특별히 안배해주신 목격자들이었다.
이들 조선인 신자 11명 중에는 「기해일기」를 편찬한 성 현석문 가롤로와 한국인 첫 영세자 이승훈의 손자이며 조선 제2대 교구장 앵베르 범주교의 복사였던 순교자 이재의(李在宜) 토마스, 임치화(任致化), 노원익(盧元益), 임성실(林聖實), 김인원(金仁元) 등이 있었다.한국인 첫 영세자의 혈육으로 하여금 한국인 첫 사제의 탄생을 목격케 한 하느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통해 하느님께서 얼마나 한국교회를 사랑하고 계신가를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화려하게 꾸며진 제대, 엄청난 신자들, 장중하게 울려 퍼지는 창미사곡과 그레고리안 성가가 흐르는 가운데 진행된 사제서품식에 처음 참례한 11명의 조선인 신자들은 『천상 행복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하고 느꼈을 것이다.사제서품식 전 김대건 신부와 함께 김 신부의 통역으로 고뜰랑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본 11명의 조선인 신자들은 이날 서품식에서 새사제 김 신부가 직접 축성한 성체와 성혈을 영하면서 목이 잠기는 기쁨을 맛보았을 것이다.또 성당을 가득 메운 중국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새사제 김 신부로부터 안수와 장엄강복을 받은 11명의 조선인은 『더이상의 은총은 없다』며 감격한 것이 분명하다.성인 호칭기도가 울려 퍼지는 동안 제대 바닥에 엎드려 있던 김대건 신부도 복받쳐 오르는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순교한 아버지 김제준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자신을 축하하러 함께 상해에 온 조선 신자들의 얼굴에서 미쳐서 거리를 헤매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비쳤기 때문이었다. 가슴속에 가라앉아 있던 회한의 앙금들을 다 쓸어내기 위해 간간이 터져나오는 억눌린 신음소리와 함께 새 제의에 그 많은 눈물을 적셨는지 모르겠다.김대건 신부의 사제서품식은 이렇게 해서 다 끝났다.
소팔가자에 있는 동기 최양업과 함께 사제서품을 받지 못해 서운한 것이 마음 한편에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누구보다 열렬한 조선 신자들의 축하 속에 정말 오랜만에 목청껏 웃어보았을 것이다.지금도 상해 김가항성당에 가면 김대건 신부 유해가 1백50여 년 전 사제서품을 받던 그때 세월과 감격을 그대로 간직한 채 한국에서 온 순례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지금도 또 다른 현석문과 이재의, 노원익을 이곳 금가항성당으로 불러들이고 있다.역사의 현장인 김가항성당은 비록 1949년 국민당이 불태워 소실됐고, 또 문화혁명 때는 헐려 창고로 쓰였지만 이 곳에 살아 숨쉬는 김대건 신부와 조선 신자들의 신앙 혼을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10여 년 전 성당이 새로 단장되면서부터 베네딕도회 김상진 신부를 필두로 하나 둘씩 한국인 신자들이 이곳을 순례하기 시작했고, 1991년 8월29일 원주교구장 김지석 주교 동창 사제 24명이 김대건 신부 유해 중 척추뼈를 이 곳에 봉안함으로써 역사를 원점으로 되돌려 놓았다.또 1990년 11월4일 정주성 신부를 대표로 한 성지연구원 순례단이 김대건 신부 석고상을 이곳에 기증해 김 신부 유해 및 영정과 함께 성당옆 김대건 경당에 지금도 잘 모셔져 있다.김가항성당의 한 신자가 89년부터 지금까지 한국 순례단이 적고 간 방명록을 기자에게 보여주었다. 고(故) 오기선 신부의 필체가 들어있었고, 김대건 신부 전기 자료집 발간을 염원에 담은 고려대 조광 교수의 글도 있었다.또 얼굴 모를 수많은 한국인 순례자들이 김대건 신부 앞에 토해낸 회개의 글들과 지난해 김 신부 사제서품 1백50주년 기념일에 이곳에서 미사를 봉헌한 한국 교회사 연구소 역사탐방팀의 수많은 글들도 담겨 있었다.
낡은 공책 한장 한장 마다 눈물에 얼룩지고 퍼져있는 방명록의 글들을 보며 금가항성당은 민족복음화를 위해 일성(一聲)을 외쳤던 김대건 신부가 우리에게 남긴 「통회의 처소-통곡의 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금가항성당을 지키고 있는 진빠이샹(金伯祥ㆍ요셉)옹은 기자에게 듣기 좋아라고 하는 소린지 몰라도 『김대건 신부 사제서품 이후 금가항성당은 성소의 온상이 되었다』고 귀뜸했다.그는 『이곳 출신 신부, 수도자들이 많을 뿐 아니라 상해교구 김노현 주교도 금가항 출신』이라고 자랑했다. 또 그는 『일제시대 금가항 출신 김 신부가 수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곳에서 일본군에게 맞아 죽은 일도 있다』고 말했다.넓은 정원과 잘 단장된 조경이 첫 방문객에게조차 낯설지 않게 아늑함을 주는 금가항성당.지금은 비록 공소로 전락해 한달에 두번만 미사가 봉헌되고 있지만 금가항성당은 한국 신자들 가슴속에 사제 성소의 못자리로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그 증거로 이 곳에서 수확한 첫 열매가 썩어 1백50년이 지난 지금 2천1백89명이란 한국인 신부를 배출했기 때문이다. 금가항성당에서 사제로 태어난 김대건 신부의 보혈(寶血)은 2천2백배의 열매를 맺어 성서 말씀을 그대로 증거한 것이다.금가항성당을 나오면서 기자는 김대건 신부 사제서품식을 지켜보던 11명의 조선 신자들이 느꼈던 그 자부심과 행복감을 나눠가지는 은총을 입었다.
리길재 기자
나. 만당(횡당) 성당
김대건 신부님은 사제품을 받고 상해 횡당 성당에서 1845년 8월 24일 안 다블뤼 주교님의 복사를 받으며 첫미사를 봉헌하셨습니다.
횡당성당은 1966년부터 시작된 중국 문화대혁명 동안 심하게 훼손되었다가
1980년 상해교구로 반환되었습니다.
상해 횡당성당에 성 김대건 신부 동상 세워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첫 미사를 봉헌했던 중국 상해 횡당성당에서'성 김대건 신부 동상과 한국 성모자상' 제막 및 축복식을 가졌다.
이날 축복식은 안병선(김가항성당 복원기념사업위 총무)· 김병수(상해 한인공동체 주임, 한국외방선교회) 신부가 공동 집전했고, 한국 대표단 30여 명과 횡당본당 중국인 신자 500여 명이 참석, 성 김대건 신부 동상과 한국 성모자상 제막을 축하했다.
이날 제막한 성 김대건 신부상은 김진용(마티아, 인천 부평 2동 본당)씨가, 한국 성모자상은 서울 여의도본당 김석태(안토니오)·임문순(데레사) 부부가 기증했고, 횡당성당 제대 양쪽에 나란히 안치됐다.
김병수 신부는 미사 강론 중에 "김대건 신부님의 첫 미사가 봉헌된 성당에 김 신부님을 현양하는 동상이 세워져 뜻깊다"며 "김 신부님의 순교정신을 본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빛과 소금이 되자"고 강조했다.
평화신문 2003.10.05발행 [742호]
다. 서가회 성당.
서가회(徐家匯) 성당은 상해 최대의 성당이고 중국에서 처음으로 서구의 건축양식으로 축조한 성당건물이다. 호화롭게 장식된 건물 내부는 좁고 길며 높고 곧은 공간이 강한 시각적 효과를 안겨 준다.
서가회 성당은 웅장한 건물 외관과 화려한 내부 장식으로 신비로운 천국의 분위기를 형성하고 몇 천명의 신도들이 동시에 미사를 볼 수 있어서 상해의 바티칸으로 불린다.
17세기초 서구의 전도사들이 상해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18세기부터 성당들이 들어 섰다. 청(淸)나라 때인 1896년 서가회 성당의 돌 기둥이 조각을 시작했고 1904년에 성당 건물공사를 시작해서 1910년에 준공되었다.
1979년 성당 건물의 보수공사를 했고 1982년 13톤에 달하는 쇠로 만든 십자가를 첨탑에 다시 올렸다. 서가회 성당은 2013년에 중국 전국 중점문화재 보호업체에 선정되고 2016년 9월에 "제1진 20세기 중국의 건물 유산"에 등재되었다.
한국의 두 번째 사제 최양업이 사제품을 받기 전 서가회성당 예수회 신학원에서 공부를 했다. 일부 학자들은 서가회 성당이 최양업 신부 사제서품 장소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라. 한국 교회 두 번째 사제 탄생 장가루 성당.
▲최양업 부제는 우여곡절 끝에 1849년 상해 장가루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최양업 부제는 한 달간 고군산도 신치도에서의 표류 생활을 마치고 영국 함선을 타고 프랑스 해군과 함께 상해에 도착했다. 메스트르 신부가 요동으로 가기보다 조선의 소식을 듣고 조선에서 오는 지시를 따르기에 제일 적절한 장소라고 판단해 상해에 머물기로 했다. 최양업은 당시 상해 생활을 ‘귀양살이’라고 표현하면서 이렇게 고백했다.
“저는 천상의 도움을 애원하는 데 너무나 소홀했고, 인간적인 희망에 너무 의존했으며 또한 무수한 죄를 범했습니다.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제가 우리에게 오는 하느님 자비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듯합니다”(1849년 5월 12일 자 상해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최양업은 좌절했다. 기다리던 신자 배만 탔으면 곧바로 조국의 내륙으로 들어가 조선 선교사들과 그리운 가족들, 신자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손에 잡힐 듯한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사목활동을 하고 있던 페레올 주교도 프랑스 함대가 고군산도에 좌초한 사실을 알았다.
그는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가 함께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배를 마련해 최양업의 이종사촌 형을 고군산도로 보냈으나 만날 수 없었다.
이에 페레올 주교는 1847년 11월 25일 자로 홍콩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경리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편지를 썼다. 페레올 주교는 이 편지에서 김대건 신부의 순교 사실과 함께 자신과 다블뤼 신부가 병에 걸려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음을 알리고 “최양업 부제 외에 두 명의 선교사(아마도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베르뇌ㆍ메스트르 신부일 듯)가 꼭 필요하다”고 밝혔다.
최양업은 상해 서가회성당 예수회 신학원에서 신학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메스트르 신부는 매사에 최양업을 우선으로 고려했다. 조선대목구장인 페레올 주교의 허락 없이는 최양업에게 사제품을 줄 수 없었기에 그는 노심초사했다. 메스트르 신부는 페레올 주교가 최양업 부제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최양업의 사제품을 건의하는 게 적절한지 고민했다.
“그(최양업)는 상부로부터 오는 허락 없이는 서품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청하는 것이 적절할까요? 모르겠습니다. 페레올 주교가 이 젊은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신부님도 저와 같이 잘 이해하실 것입니다”(메스트르 신부가 1847년 11월 16일 자로 상해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에 큰 희망이 될 것이다’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은 덕행과 재능으로 봤을 때 최양업이 조선에 큰 희망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리브와 신부가 1843년 6월 마카오에서 데쥬네트 신부에게 보낸 편지 참조). 페레올 주교도 소팔가자에서 최양업을 지켜보면서 “대단히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만일 한 살만 더 많았다면 올해 사제품을 받는 게 옳을 것”이라고 칭찬했다(페레올 주교 1843년 2월 20일 자 편지 참조). 그런데 페레올 주교는 그의 조선 입국 동반자로 김대건 부제를 선발했고, 1845년 8월 17일 상해 김가항(金家港)성당에서 김대건 부제의 사제서품식을 주례했다.
페레올 주교와 최양업 부제 사이가 왜 틀어졌을까? 아니, ‘무엇 때문에 페레올 주교는 최양업을 탐탁지 않게 여겼을까?’ 라고 표현하는 게 옳을 것이다. 함께 조선 입국로를 개척하던 메스트르 신부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이 의문에 관한 해답을 유추할 수 있다.
“김대건 안드레아의 원정을 매우 염려합니다. 왜냐하면, 신부님께서도 아시다시피 그는 행동이 주의 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페레올 주교는 최양업 토마스에게 반감을 품었습니다. 이것은 주교와 얼마 동안 같이 지내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아주 쉽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가 지금까지 겪은 많은 모순이 그의 성격을 매우 까다롭게 만들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진정될 것입니다”(메스트르 신부가 소팔가자에서 1845년 5월 25일 자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여곡절 끝에 장가루 성당에서 서품식
우여곡절 끝에 최양업 부제는 1849년 4월 15일 부활 제2주일에 상해 장가루(長家樓)성당에서 강남교구장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마레스카(Francois X. Maresca,1806~1855)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일부 학자들은 최 신부의 사제서품 장소를 상해 서가회성당 또는 김가항성당이라고 주장한다). 한국인 두 번째 사제가 탄생하는 은총의 자리였다. 최양업은 부제품을 받은 후 5년 만에 만 28세 나이로 사제가 됐다.
이 감격스러운 순간을 메스트르 신부는 마치 전보를 치듯 단 두 문장의 짧은 편지를 리브와 신부에게 보냈다. “마침내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지난 주일에 사제로 수품했습니다. 그는 곧 신부님께 편지를 보낼 것입니다”(메스트르 신부가 상해에서 1849년 4월 17일 자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아직 정확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메스트르 신부가 1848년 9월부터 최양업 부제와 함께 페레올 주교가 정한 백령도로 갈 여행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지시가 담긴 편지에 페레올 주교가 최양업의 사제 서품을 허락하는 내용이 들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백령도 여행을 떠나기 보름쯤 전 최양업에게 사제품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사백주일(부활 제2주일)에 지극히 공경하올 마레스카 주교님으로부터 저는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제가 그토록 고귀한 품위에 언제나 합당한 자로 처신하게 되길 바랍니다. 저의 미천함과 연약함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크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지극히 너그러우신 하느님의 자비로 그 짐은 아주 감미롭고 고무적인 것인 만큼, 지극히 무능하고 가난한 제가 날마다 지극히 존엄하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미사성제를 드리고, 온 세상의 이루 다 평가할 수 없는 값진 대가를 날마다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는 권능을 받았음은 큰 위로입니다"(1849년 5월 12일 자 상해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평화신문, 2016년 10월 9일, 리길재 기자]
마. 제주 표착지(용수성지). (김대건)
용수포구
부제 때 일시 귀국했던 김대건은 선박을 구입하여 ‘라파엘호’라 명명하고 1845년 4월 30일 신자 11명과 함께 제물포항(현 인천항)을 떠나 상해로 갔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17일 금가항(金家港) 성당에서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Ferreol)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8월 31일 조선 입국을 위해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Daveluy) 신부를 모시고 함께 갔던 신자들과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상해 항을 떠났다.
출항한 지 3일 만에 서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된다.
긴 항해에 갑판 한쪽은 무너져 나갔고 돛대는 잘라야 했으며, 타는 갈증을 견디며 해류에 몸을 맡긴이들은 뭍을 보고 환호했으나 그곳은 목적지에서 천리나 엇나간 제주도였다.
9월 28일, 출항한지 한 달 여 만에 드디어 제주 용수포구에 표착하게 된다.
여기서 2∼3일 정도 배를 수리하고 음식 등을 준비하여 10월 1일 포구를 떠난 김대건 신부 일행은 10월 12일 금강 하류의 나바위에 무사히 도착했다.
항해를 마친 라파엘호는 인근의 신창 성당 마당으로 옮겨 보존되다가 2006년 11월 1일 김대건 신부 일행의 제주도 표착과 제주도에서 한국인 첫 사제의 첫 미사가 거행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성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기념관’ 앞 잔디광장으로 옮겨 전시되고 있다. 라파엘호 옆에는 원죄 없이 잉태하신 성모 마리아상을 세웠다.
바. 황산벌, 나바위 성지.
제주에서 겨우 북쪽을 향해 뱃머리를 돌려 도착한 곳이 금강 하류 강경 인근 황산포구이다.당시 상황을 페레올 주교는 외방전교회 신학교장 바랑(Barran)신부에게 10월29일자로 보낸 장문의 서한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우리는 할 수 있는대로 비밀리에 배에서 내려야 했습니다. 그들은 나를 상복 차림으로 배에서 내리게 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판단하였으므로 굵은 베로 만든 겉옷을 걸쳐주고 머리에는 짚으로 만든 커다란 모자를 씌웠습니다. 발에는 미투리가 신겨졌습니다. 내 차림은 몹시 우스꽝스러웠습니다. 내 취임은 그리 찬란한 것이 못되었습니다』서한에서 페레올 주교는 상해에서 떠날 때부터 풍랑을 만나고 해류에 밀려 제주도로 표류하기까지, 그리고 황산포에 도착한 후 들은 조선의 상황까지를 길게 이야기해주고 있다.행정구역상으로 전라북도 익산군 망성명 화산리. 호남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논산 인터체인지에서 내려서 연무를 거쳐 강경, 거기에서 10분 정도 달리면 길가에 나바위 성당의 뾰족한 꼭대기가 보인다. 올라 앉아 있는 언덕이 그리 높지는 않지만 주위가 워낙 드물게 넓은 평야라서 눈에 쉽게 들어온다.
산이 너무 아름답다고 해서 우암 송시열이 「화산(華山)」이라 부른 이 산의 줄기가 끝나는 곳에는 광장 같이 너른 바위가 있고 바위 위에 서면 저 아래 황산포 나루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화산 위에 자리잡고 있는 나바위 성당은 바로 이 너른 바위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다.원래 이곳에는 조선시대에 국가의 긴급한 소식을 전하던 봉화대가 산 위에 있었고 정부미를 실어 나르던 창고가 있어서 나암창이라고도 불렸다. 인근에 있는 강경은 조선시대 3대 어장의 하나로 번성했던 곳이기도 하다.지금은 뭍으로 변해 길이 나고 논과 밭으로 변했지만 동네 어르신들은 지금도 길 한 켠으로 배들을 잡아매던 흔적이 있다고 일러 준다. 원래 바다를 거슬러온 물줄기가 금강 하류와 함께 뒤섞여 화산 위의 너른 바위 밑에까지 넘실거렸는데 일제시대때 위쪽에 댐을 쌓으면서 물이 줄어들었고 지금처럼 마른 땅이 됐다고 한다. 언덕을 올려다보면서 골목길을 조금 올라가면 자줏빛 벽돌로 벽을 쌓고 기와를 얹은 데다가 고딕식 벽돌조 종각을 앞에 세워 둔 성당이 나온다. 사제관과 함께 지방문화재(사적318호)로 지정돼 있는 성당이 세워진 것은 1897년이다.
1906년 완공된 성당의 설계는 명동성당의 포아넬 박 신부가 도왔고 벽돌공과 목공일은 중국인들이 맡았다. 원래는 한국 문화의 특성에 맞게 한옥 목조건물로 지어졌었는데 1916년 목조벽을 벽돌조로 바꾼 것이다. 이 성당은 정면 5칸, 측면 13칸이었는데 내부 열주(列柱)사이에는 남녀석을 구분하기 위해 칸막이를 했었다.성당 뒤편으로 언덕을 마저 올라가면 돌로 조각된 십사처가 구비구비 길따라 세워져있고 그 끝에 너른 바위가 나온다. 바위 위에는 망금정이라는 현판이 붙은 정자가 세워져 있는데 이곳은 대구교구 드망즈 주교가 매년 연례피정을 하던 곳이다. 정자 앞에는 김 신부 일행이 타고 왔던 라파엘호를 본따서 만든 김대건 순교비가 세워져 있다.1백년의 역사를 지닌 나바위 성당은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의 서북지방에 있는 공소를 관할했다. 1929년 당시에는 전국에서 가장 큰 본당으로 신자수가 3천2백여 명에 이르렀고 안대동본당(현 함열본당), 군산(현 둔율동본당), 이리(현 창인동본당)본당 등을 설립, 분리시켰다.
일제시대와 6ㆍ25 등을 거치면서 민족과 애환을 같이 한 나바위 본당은 1907년 계명학교를 세워 문맹퇴치에 앞장섰고 이는 1947년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일제에 의해 1937년 폐교를 경험한 바 있다. 1941년 여름에는 김영호 본당신부가 신사참배를 거부해 수감되기도 했다.1949년부터는 간이진료소라 할 수 있는 시약소를 설립해 1987년 폐쇄될 때까지 가난한 농민들을 보살폈다. 특히 6ㆍ25당시에는 죽음을 각오하고 성당을 지킴으로써 단 며칠을 빼고는 매일 미사가 계속 봉헌됐다.내년이면 설립 1백주년을 맞는 나바위 성당은 1989년 「화산」과 「나바위」로 함께 불리던 본당 명칭을 본당 설립 초기의 「나바위」로 확정하고 「나바위 성당 1백주년 기념사업 준비위원회」를 조직해 1991년 10월 피정의 집을 완공하는 한편 1백주년 기념집을 준비하고 있다.김 신부는 이곳 나바위에 도착한 후 11월과 12월 서울과 경기도 용인의 은이공소 등을 방문한다. 은이공소에는 그의 동생 난식(蘭植)과 어머니가 살고 있었다. 이 두 달이 그가 조선에서 행한 사목활동의 전부였다.
1836년 가족과 고향을 떠난 지 9년만에 그는 사제로 돌아왔다. 화려한 금의환향이어야 할 귀로는 오히려 남의 눈을 피해야 하는 은밀한 길이었다. 아니 그동안의 고초를 능가하는 더 혹독한 시련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성인은 이미 그것이 하느님이 안배하신 영광의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박영호 기자
제5편 : 사제 활동
1. 사제 활동 관련자료
- 1850년 초~6월 | 용인 한덕골(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묵리)에서 아우들을 만난 뒤
순회 전교 활동(5개 도 5천리). 신자 3,815명 방문, 2,401명 고해성사, 1,764명 영
성체, 어른 181명과 어린이 94명 영세, 316명 보례, 278명의 예비 신자, 어린이
455명 임종 대세, 간월(경남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 교우촌 방문. (최양업)
- 1850년 10월 1일 | 도앙골(충남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에서 르그레즈와 스승 신부
에게 서한 발송(일곱 번째 서한). 최양업)
- 1850년 10월~1851년 | 6월 순회 전교 활동.(최양업)
- 1851년 초 | 매스트르 신부의 입국을 도우려 신자들을 보냈으나 실패함.(최양업)
- 1851년 10월 15일 | 절골(충북 진천군 백곡면 용덕리)에서 르그레즈와 스승 신부에
게 서한 발송(여덟 번째 서한).(최양업)
* 1852년 8월 : 매스트르 신부, 고군산도를 거쳐 입국에 성공.(최양업)
* 1853년 2월 3일 : 페레올 주교 선종 후 미리내에 안장됨.(최양업)
* 1854년 3월 : 쟝수(Jansou, 楊) 신부 입국. 6월 18일에 둠벙이(충남 공주군 신하면
조평리)에서 사망.
- 1854년 3월 | 쟝수 신부가 타고 온 배편으로 페낭(Pinnang) 신학교로 가는 신학생
3명을 태워 보냄. (최양업)
- 1854년 9월 | 서한 작성(아홉 번째 서한. 분실됨). (최양업)
- 1854년 11월 4일 | 동골(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혹은 진천읍 문봉리)에서 리브
와 스승 신부에게 서한 발송(열번째 서한).(최양업)
* 1854년 8월 5일 : 만주교구의 베르뇌 부주교가 제4대 조선대목구장에 임명됨
* 12월 27일 : 베르뇌 주교, 만주 대목구장 베롤 주교 집전으로 주교 성성식.
- 1855년 10월 8일 | 배론(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 신학교에서 르그레즈와 스승
신부에게 서한 발송(열한 번째서한).(최양업)
* 1856년 3월 27일 : 베르뇌 주교,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신부, 푸르티에
(Pourthie, 申) 신부 등이 함께 조선 입국에 성공.
- 1856년 9월 13일 | 소리웃(경기도 교우촌)에서 르그레즈와 스승 신부에게 서한
발송 (열두 번째 서한). (최양업)
- 1857년 3월 25일 | 서울에서 있는 다블뤼 신부의 보좌 주교 성성식 참가.(최양업)
- 1857년 3월 26일 | 한국 최초의 교구 성직자 회의에 참석.(최양업)
* 3월 29일 : 페롱(Feron, 權) 신부가 서울에 도착.
- 1857년 9월 14일 | 불무골(풀무골, 충북 진천군 백곡면 갈월리)에서 르그레즈와 스
승 신부에게 서한 발송(열세 번째서한).(최양업)
- 1857년 9월 15일 | 불무골에서 리브와 스승 신부에게 서한 발송(열네 번째 서한). (최양업)
- 1858년 10월 3일 | 오두재(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혹은 경북 상주군 모동면
수봉2리)에서 르그레즈와 스승 신부에게서한 발송(열다섯 번째 서한). (최양업)
- 1858년 10월 4일 | 오두재에서 리브와 스승 신부에게 서한 발송(열여섯 번째 서
한). (최양업)
- 1859년 10월 11일 | 안곡(경북 선산군 무을면 안곡리)에서 르그레즈와 스승 신부에
게 서한 발송(열일곱 번째 서한). (최양업)
- 1859년 10월 12일 | 안곡에서 리브와 스승 신부에게 서한 발송(열여덟 번째 서한).
공과(功課) 번역 작업 완료. (최양업)
- 1860년 | 죽림 (경남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의 죽밭) 교우촌에서 경신박해(庚申迫害)
를 당해 숨어 지냄. (최양업)
- 1860년 9월 3일 | 죽림에서 르그레즈와, 리브와 스승신부께 서한 발송(열아홉 번째
서한).(최양업)
* 1861년 3월 21일 : 랑드르(Landre, 洪) 신부, 죠안노(Joanno, 吳)신부, 리델(Ridel,
李福明) 신부, 칼래(Calais, 姜) 신부 입국.
2. 사제 활동 관련 성지
가. 배티성지(최양업 선교 중심지)
교회사의 기록에 진천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난 것은 1813년 경입니다. 이때 충남의 홍주 덕머리 출신인 원(元) 베드로 형제가 박해를 피해 진천 '질마로'로 피신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따라서 배티에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그 후 1830년 무렵으로 추정될 수 있습니다.
배티 일대의 교우촌은 기해박해(1839년)와 병오박해(1846년)가 거듭되면서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신자들의 은신처가 되어 골짜기마다 교우촌이 늘어갔습니다.
배티 교우촌
1866년 병인박해 전 배티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우촌은 삼박골, 정삼이골, 절골, 용진골, 발래기, 통점, 동골, 새울, 은골, 불무골, 모니, 소골, 지구머리, 지장골, 굴티 등 10여 군데가 넘습니다. 이곳에 모여든 신자들은 주로 충청도 지역교회의 중심지가 된 내포지방 출신 신자들이었고 일부는 경기도와 충주 출신이었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 때에 배티 일대의 교우촌은 순교자 55여명(교회역사에 기록된 진천 출신 순교자 29명과 배티 일대에 산재해 있는 무명 순교자 묘 26기)을 탄생시키고 일시적으로 와해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박해가 그친 1870년 무렵부터 다시 이곳에 모여 복음의 새 터전을 닦아 나갔습니다.
배티 일대의 교우촌은 한국의 까따꼼바이며, 스스로 찾아온 복음의 진리를 온몸으로 살아간 신앙의 현장이며, 수많은 혈색 순교자와 백색 순교자를 배출한 순교의 땅입니다.
최양업 신부와 배티 교우촌
최양업(1821-1861) 신부는 한국인으로서 두번째 사제입니다. 그는 1836년 모방 나 신부에 의해 한국 최초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 유학을 떠나 서구사상을 처음으로 배운 한국 최초의 유학생입니다.
그는 1849년 상해에서 강남교구 마레스카 주교님께 신품성사를 받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후 고국을 떠난 지 13년만인 1849년 12월 천신만고 끝에 무사히 입국한 최 신부는 용인 학덕골과 진천 동골에 살던 동생들을 찾아본 후 즉시 신자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나. 도앙골 성지 (최양업)
홍산(鴻山) 도앙골은 옛 교우촌이 있었던 유서 깊은 순교 사적지로 이존창(루도비코)의 전교활동에 의해 교우촌을 이룬 곳이며, 1850년 최양업 도마 신부가 첫 사목보고서 를 썼던 곳이다. 1866년 병인박해 때는 김사범, 김 루카, 김 바오로, 오 요한, 오 시몬 등 다섯 분이 공주감영으로 잡혀가 순교한 교우촌이다. 현재 이곳에는 최양업 신부의 시성을 바라는 기념비가 마련되어 있으며, 기도의 집인 “우애의 집”이 있다.
현재의 행정 명칭으로 ‘충남 부여군 내산면 금지리’의 깊은 계곡을 ‘도앙골’이라고 오래전부터 일컬어왔다. ‘금지리(金池里)’라는 동리 명칭은 그 계곡이 흘러내린 월명산 정상부(上端部) 아래에 금지사(金池寺)라는 고찰이 소재한데서 연유한다. 금지사 본전(本堂)의 뒤편 바위 밑에서 솟는 샘물은 특이한 약수로 알려져 있는데, 그 샘으로부터 흘러내리는 계곡물가의 좌우로는 산복사(일명 개복숭아)나무가 많이 자란다. 봄철에는 그 계곡 따라 붉은 복사꽃이 굽이쳐 피고 산골 가득 그 향기가 채워진다하여 ‘도원곡(桃園谷 혹 桃花谷)’이라 일컫던 산골 이름을 ‘도왕골’ 또는 ‘도앙골’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홍산(鴻山)이라는 고을 명칭이 한국 천주교회 초기사 및 박해시대와 그 후대의 문헌들 가운데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 초기사에 관련하여 ‘홍산’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내포(內浦)의 사도라 일컬어지는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 1752-1801)의 이름과 더불어 나타나고 있다.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는 이존창이 신해박해(1791) 때 체포되어 충청 감영(공주)에서 풀려나온 후 고향 여사울을 떠나 피신한 곳이 홍산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러한 이존창의 전교활동에 의하여 신앙의 터전이 된 ‘홍산 지방’의 신자들이 교우촌을 이룬 곳으로 도앙골이 지목되고 있다. 도앙골에서 잡혀간 순교자들과 출신 신자들과 관련하여 그 교우촌 형성의 정황으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도앙골 출신 순교자들을 다수 찾아낼 수 있고, 갈매못에서 병인년에 순교한 분들의 유해를 거두어 모신 사람들 가운데 ‘홍산 도앙골’의 신자가 아주 적극적이었으며, 황석두(루카) 성인의 유해를 우선 모신 장소가 도앙골 고개 넘어 ‘삽티’라는 곳인 걸 보면 이 도앙골은 일찍이 교우촌을 이룬 곳임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이 도앙골은 우리의 두 번째 방인 사제인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가 귀국하여 첫 번째의 편지를 쓰신 곳이기도 하다. 최양업 신부가 천신만고 끝에 귀국하여 서울에 도착한 것은 1850년 1월(혹 1849년말)이다. 최 신부는 당시 중병을 앓고 있던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만난 다음 곧바로 전라도를 시작으로 공소 순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6개월간 5개도를 두루 돌았는데, 그해 가을에 자기 은사인 르그레즈와(P.L.Legrégeois)신부에게 그간의 활동보고를 올리는 편지를 썼다. 그의 ‘귀국 후 첫 번째 서한’인 이 편지는 1850년 10월 1일자로 작성되었으며, 그 발신지를 ‘도앙골’이라 명기하고 있다.
최양업 신부님께서 귀국하여 선종하기까지 12년 동안의 사목활동 중에 그분의 은사인 르그레즈와 신부와 리부아 신부에게 보낸 편지 중에 도앙골에서 쓴 첫 편지가 가장 긴 문건이다. 그 편지에서 자신의 순방활동 중 발각될지도 모를 위험한 상황을 늘 직면하고 있다고 피력하고 있다. 어떤 마을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이장에게 달려가서 수상한 사람이(혹 서양 사람이) 잠입했다고 알리는 바람에 이장이 마을 사람들을 소집하여 잡아 죽이자고 의논을 하는 중에 밤을 지새워 기도했다는 이야기도 쓰고 있다.
‘도앙골’에서는 지난 2011년 12월 22일 충남 부여군 내산면 금지리 249 현지에서 전임 대전교구장 경갑룡 주교 주례로 ‘탁덕 최양업 시성 기원비’ 제막식을 열었다. 해미성지 주임 백성수 신부의 글씨로 ‘鐸德 崔良業 諡聖祈願碑(탁덕 최양업 시성기원비)’ 라고 한자로 새겨진 기원비는 높이 약 7.5m(비석 머리 포함)로 비신(碑身, 비석 몸체), 비석 머리, 비석 받침 등을 모두 가공하지 않은 자연석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기도의 집은 2011년 9월 29일 대전교구장 유흥식 라자로 주교님의 주례로 축복식을 봉헌했다.
다. 죽림굴(대재공소)성지 (최양업)
죽림굴, 곧 대재 공소(1840-1868년)는 현재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의 간월산 정상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인근 간월산 일대의 옛 신자촌인 간월 공소에서 왕방재라는 고개를 넘어 왕래한 박해 시대의 피난처이다. 이 석굴 공소는 대나무로 덮여 있어서 ‘죽림굴’이라고 불렸다. 폭 7m, 높이 1.2m 규모지만 입구가 낮아 눈에 잘 띄지 않아 은신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기해박해(1839년)로 충청도 일원과 영남 각처에서 피난 온 교우들과 간월 공소의 교우들이 보다 안전한 곳을 찾다가 발견하여 공소를 이룬 곳으로, 신자들이 모여 움막을 짓고 토기와 목기를 만들거나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했던 곳이다.
재 넘어 간월 쪽에서 포졸들의 움직임이 보이면 100여 명의 신자들은 한꺼번에 넓은 굴속에 숨어 위기를 모면하곤 했다. 대나무와 풀로 덮인 낮은 입구 덕분에 동굴에 숨으면 쉽사리 눈에 띄지 않아 박해 시대 교우들의 피난처로는 안성맞춤인 한국판 카타콤바(Catacombae)였다.
1840년부터 1860년 사이에는 다블뤼 신부와 최양업 신부가 사목을 담당했다. 특히 김대건 신부와 함께 한국 최초의 방인사제였던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경신박해(1860년) 때 이곳에서 약 3개월간 은신하며 교우들과 함께 생쌀을 먹으며 박해를 피했고, 미사를 집전하며 스승에게 보낸 그의 마지막 서한(1860년 9월 3일자)을 썼던 곳이기도 하다.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 울산 병영 장대에서 순교하고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된 대재 공소 회장 이양등 베드로와 허인백 야고보 그리고 김종륜 루카도 한때 이곳에서 생활했다고 전해진다.
1860년 경신박해 때 이 지방에서 교우 20여 명이 체포되었고, 뒤이은 병인박해(1866년)의 여파로 1868년에 교우들이 대거 체포되면서 100여 명이 넘었던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대재 공소는 폐쇄되고 말았다.
죽림굴로 가는 길은 두 가지이다. 언양에서 간월행 버스를 타고 호류 폭포에서 내려 왕방재로 등산해 간월산 정상에서 배내 쪽으로 2km 정도 내려가는 길은 왕복 3시간이 걸린다. 혹은 언양에서 밀양으로 연결된 24번 국도로 석남사를 지난 뒤, 이천행 비포장 도로를 따라 이천(배내) 본 동네 입구에 이르기 전 안내판 표시가 있는 곳에서 좌측으로 닦여진 산길은 3.6km 정도의 거리이다.
죽림굴과 관련된 순교자 중에는 24세의 나이로 순교한 김 아가타가 있다. 그녀는 부산 지방의 첫 신자로 기록되고 있는 김교희 프란치스코(일명 재권, 1775-1834년)의 손녀이자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당해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장하치명’(杖下致命)한 김영제 베드로의 누이동생이기도 하다.
경신박해 때 아버지 김상은 야고보와 오빠 김영제가 체포되자 그 뒤를 따르고자 김 아가타는 17세, 18세의 다른 두 처녀와 함께 자진해서 잡혀가기를 청했다. 압송되다가 이들을 농락하려는 포졸들을 피해 간신히 도망친 김 아가타는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것을 알고 방황하다가 마침내 최양업 신부가 숨어 있던 동굴, 즉 죽림굴로 찾아 들었다.
극심한 고생으로 인해 탈진한 그녀는 죽림굴에 도착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병석에 누웠다. 그녀는 3개월간 이곳에 머물며 전교에 여념이 없던 최양업 신부를 도왔고, 양식이 떨어지면 최 토마스 신부가 손수 삼은 짚신을 언양 등지에 나가 팔아 식량을 마련하기도 했다. 때로는 등억, 화천 등 가까운 동리에 나가 구걸도 하면서 외부와 연락을 주고받는 일도 했다고 한다. 후세에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그녀가 밖에 나갔다가 굴로 돌아올 때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운데 산기슭 입구에서부터 등불이 나타나 험한 길을 인도한 기이한 일도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결국 병석에 누워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둔 김 아가타의 유해는 간월 공소 뒷산에 모셔졌다. 간월 공소는 1860년 경신박해와 1866년 병인박해의 와중에서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동정녀 김 아가타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기에 순례자들은 여인의 몸으로 천주를 고백하고 자진해 붙잡혀 가려 했던 그녀의 용감하고도 숭고한 정신만은 이어받을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3월 4일 부산교구는 간월에 있던 김 아가타의 묘를 살티에 있는 오빠 김영제 베드로의 묘 옆으로 이장했다.
1986년 10월 29일, 당시 언양 성당의 김영곤 신부와 평신도 11명이 죽림굴을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했고, 그 해 11월 9일 평신도 4명이 재시도하여 대나무와 풀로 뒤덮인 굴을 발견하였다. 당시 굴 안에서 구유조각과 나무지팡이 등이 발견되었고, 지금은 언양 성당 신앙유물 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 1996년 2월에는 죽림굴 주변을 정리하면서 안내석을 새로 세우고 입구에 계단도 만들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4년 8월 28일)]
라. 손골성지(최양업 귀국 후 첫 성사)
수원시 북쪽에 솟아 있는 광교산 동쪽 깊은 골짜기 안에 위치한 손골 성지는 옛부터 향기로운 풀이 많고 난초가 무성했던 곳으로 '향기로운 골짜기'라는 뜻을 지닌 손곡(蓀谷)의 형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여 있어 1839년 기해박해를 피해 숨어든 신자들이 이룩한 교우촌으로 병인박해(1866) 때에는 10여호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손골은 주민들 사이에서 신자들의 부락 '성교촌'이라 불리어 오는데 특히 이요한, 그의 아들 베드로, 손자 프란치스코 삼대가 손골에서 살던 중 병인박해시 피신하여 신미년(1871년 3월 16일)에 순교하였다 한다(치명일기).
손골은 프랑스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전교 유적지로서 특별히 성 도리 헨리꼬 신부님께서 조선에 입국하여(1865) 선교하시다가 포졸들에게 직접 체포되신(1866) 곳이다. 이곳은 1857년 페롱 신부,1861년 조안노 칼레 신부, 1863년 오 오매트로 신부 등이 입국하여 활동하던 곳이고, 조선 제4대 교구장인 장 베르뇌 시므온 주교도 방문(1861, 1863)했던 곳으로 신앙의 전통이 계속 이어져 내려오는 유서 깊은 성지이다.
손골 성지는 파티마의성모 프란치스코 수녀회가 관리하고 있다. 이 수녀회는 1969년 3월21일(예수 수난 주일) 이우철 시몬 신부가 창설한 방인 수녀회이다.
최양업 신부 첫 성사 집전한 곳은 손골로 추정
최양업 신부가 다블뤼 신부를 찾아가 조선 교회에서 처음으로 성사를 집전한 곳은 어디일까? 페레올 주교가 ‘매우 외진 곳’이라 표현했던 이곳에 대해 누구도 명확한 답을 주는 이는 없다. 다만 교회사학자들은 이곳이 ‘손골’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한다. 당시 다블뤼 신부의 주요 사목 활동지가 경기 용인 교우촌 ‘손골’이었기 때문이다.
건강이 좋지 않던 다블뤼 신부는 페레올 주교의 배려로 1849년 후반부터 소신학생 양성 일을 맡아 했다. 다블뤼 신부는 그의 거처에서 마흔 살가량의 젊은이 황석두(루카)와 이 바울리노 등을 개인적으로 선발해 라틴어를 가르쳤다.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다블뤼 신부는 1850년 10월 배티에 방 두 개짜리 집 한 채를 매입했다.
그는 이때부터 1854년 배론으로 옮기기 전까지 매해 10월부터 다음 해 4월까지는 배티에서, 5월부터 9월까지는 배티에서 약 200리 떨어진 곳에서 신학교를 운영했다. 학자들은 다블뤼 신부가 말한 배티에서 200리 떨어진 여름 신학교 터를 ‘손골’일 것으로 추정한다.
이에 손골성지 담당 윤민구 신부는 “손골에서 1850년부터 이러한 교육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적어도 1850년에 다블뤼 신부가 병중에도 어린 소년들을 가르칠 장소, 더 나아가서는 신학교를 세울 장소를 찾아다닐 때 손골 교우촌을 방문했던 것은 틀림없다”고 말했다.
손골은 1839년 기해박해 전후로 형성된 교우촌으로 서울뿐 아니라 지방과도 연락이 원활하며 비교적 안정된 곳이어서 조선에 입국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이곳에서 우리 말과 풍습을 익히는 등 중요한 선교 거점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평화신문, 2016년 11월 13일, 리길재 기자]
마). 은이 성지(김대건)
은이 마을은 한국 교회 최초의 방인사제였던 성 김대건 신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간직한 곳이다. 김대건 신부가 소년 시절을 보낸 골배마실에서 불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은이 마을은 소년 김대건이 모방 나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간택되어 마카오로 파견된 곳이다.
또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한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지가 바로 은이 공소로서, "용인 천주교회사"(오기선 신부 감수, 조성희 지음)는 이에 대해 "은이 공소는 조선 교회 사상 최초의 본당"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은이 공소와 관련된 또 한 명의 성인은 바로 모방 나 신부이다. 그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로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이었던 브뤼기에르 주교가 1835년 조선 입국을 목전에 두고 병사하자 그 뒤를 이어 부주교로서 조선교구를 맡게 되었다.
당시 몽고에서 한문 공부를 하며 브뤼기에르 주교로부터 이미 모든 사목 권한을 위임받은 모방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준비했던 길을 따라 조선 입국을 서둘러 국경에서 조선 교우들을 만나고 1836년 초 마침내 조선 땅을 밟음으로써 파리 외방전교회원으로서는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가 되었다.
은이(隱里)라는 말 그대로 ‘숨겨진 동네’, 또는 ‘숨어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김대건 신부는 은이를 중심으로 경기 이천, 용인, 안성지방을 두루 다니며 사목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바로 이 은이성지는 이미 유학길에 오르기 전, 1836년 나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 성사와 첫 영성체, 그리고 신학생으로 선발된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6개월간의 사목 활동을 하시던 중 고(高) 페레올 주교의 명령이 새롭게 주어진다. 그 명은 중국에 체류하고 있는 선교사들과의 연락, 또 곧이어 조선에 입국해야 할 매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토마스 부제의 입국로를 알아보기 위한 임무였다. 따라서 김대건 신부는 또다시 어머니와 생이별을 하게 되는데, 이때의 이별이 모든 교우들이 예상했듯이 마지막 이별이 되었다.
성지 표지석.1846년 4월 13일 김대건 신부는 은이 공소에서 교우들과 마지막 미사를 봉헌한 후 조선 교회의 숙원 사업인 성직자 영입이라는 중요한 임무를 띠고 길을 떠나게 된다. 은이를 떠나시기 전에 김대건 신부는 교우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다.
“험난한 때에 우리는 천주님의 인자하심을 믿어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거룩한 이름을 증거 할 용맹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구합시다. 지금 우리의 주위에는 검은 마귀의 손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내일의 삶을 모르는 위급한 처지에 처해 있는 우리들입니다. 내 마음과 몸을 온전히 천주님의 안배하심에 맡기고 주 성모님께 기구하기를 잊지 맙시다. 다행히 우리가 살아 있게 된다면 또 다시 반가이 만날 날이 있을 것이오. 그렇지 못하면 천국에서 즐거운 재회(再會)를 합시다. 끝으로 내 홀로 남으신 불쌍한 어머님을 여러 교우 분들이 잘 돌보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이 말씀을 은이 공소와 용인 지방 교우들에게 유언(遺言)으로 남기시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셨다. 교우들은 떠나시는 신부님의 모습을 은이성지에서 1Km 정도 떨어진 ‘중담’ 모퉁이까지 나와 눈물로 전송했다.
상해 금가항 성당(서품당시성당), 은이 성지에 복원
상해 김가항 성당은 1845년 8월17일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신부가 이곳에서 제3대 조선 교구장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은 곳이다.
그러나 금가항 성당은 상해 시 개발 계획으로 철거되면서 본래의 성당건축 구조물을 한국에 가져와 보관 하다가 지난해 은이 성지에 복원 공사를 시작하여
금년 9월 15일 입당 식을 가졌다.
제6편 : 순교 과정과 그 후(유해 안장)
1. 순교와 유해 안장 길 관련 자료
- 1846.5.14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자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주교의 지시를
받고 교우들과 함께 마포를 출발.(김대건)
- 6.5 체포됨. (김대건)
- 6.9 해주 감영으로 압송.(김대건)
- 6,21 서울 포도청으로 이송. (김대건)
- 8,29 조선 교우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회유문 작성. (김대건)
- 9.15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음.(김대건)
- 9,16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김대건)
- 10.26 이민식(빈첸시오)에 의해 미리내에 안장됨. (김대건)
- 1857.9.23 가경자로 선포됨.(김대건)
- 1901.5.18 유해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성당으로 이장.(김대건)
- 1925.7.5 시복됨. (김대건)
- 1949.11.15 한국 성직자들의 대주보로 결정.(김대건)
- 로마 교황청에서 7 월 5일을 김대건 신부 축일로 정함.(김대건)
- 1960. 7. 5 시복됨. (김대건)
- 1984. 5. 6 시성됨. (김대건)
- 1861년 6월 15일 | 베르뇌 주교에게 보고차 상경하던 중 문경 혹은 진천 배티에서
장티푸스와 과로로 인해 푸르티에신부로부터 종부성사를 받고 선종. 최양업
- 1861년 11월 초 | 가매장 되어 있던 시신이 배론으로 옮겨져 안장됨. 최양업
2. 성 김대건 유해 안장 경로
1) 미리내 성지의 진토
경기도 지역에서 유명한 교우촌으로는 미리내(안성군 양성면 미산리)가 있다. 그 지명은 순수한 우리말로 '은하수'를 뜻하는데, 은이 공소에서 큰 산을 넘으면 닿게 된다.
성 김대건 신부의 시신이 안장되었던 성지로 잘 알려져 있는 미리내는 본래 박해 시대에 형성된 교우촌으로, 100여 년 전인 1896년 5월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신부의 부임으로 본당이 설립되었다. 뿐만 아니라 병인박해의 순교자 이윤일(요한) 성인과 다른 무명 순교자들의 시신도 이곳에 안장되었으며, 김 신부의 모친 고 우루술라도 이곳에 묻혔다. 또 1853년 제 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Ferreol, 高) 주교가 선종한 뒤 교회에서는 "거룩한 순교자의 곁에 있고 싶다."는 그의 유언에 따라 김 신부 곁에 그의 무덤을 조성하였다.
현재 이곳 성지 입구 왼편에는 103위 시성 기념 성당이 건립되어 순례자들을 기다리고 있으며, 1975년 10월 6일에 창립된 성모 성심 수녀회가 자리잡고 있다. 이처럼 103위 성인 중에서 두 분의 유해가 있던 곳인 만큼 기념 성당이 건립될 만한 곳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많은 신자들이 이곳을 순례하면서 가장 뒤편에 있는 김대건 신부의 기념 경당, 입구 오른쪽 위에 있는 이윤일 성인의 무덤 자리와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 그리고 작고 초라하지만 선조들의 신앙이 담겨 있는 미리내 성당을 둘러보지 않고 되돌아가는 신자들이 많다는 점이다.
미리내의 김대건 신부 무덤은 이곳 교우촌 신자들에 의해 가꾸어져 오다가 1901년 5월 21일에 그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로 이장되었다. 그리고 6.25 전쟁 때는 다시 경남의 밀양 성당으로 옮겨져 안치되었고, 1951년 서울 수복 후에는 다시 혜화동 소신학교 성당으로 옮겨졌다. 한편 미리내에는 김 신부의 유해 중 하악골(아래턱뼈)만이 보존되어 오다가 시성 운동이 전개되면서 종아리뼈도 이곳으로 돌아와 함께 기념 성당 안에 안치되었다.
이윤일(요한) 성인은 특이하게 미리내 성지와 관련을 맺게 되었다. 본래 충청도 홍주 출신인 그는 박해의 위협을 피해 경상도 상주 골짜기에 은거해 살던 중에 체포되어 1866년 12월 26일 대구 관덕정(대구시 중구 계산동 2가)에서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이후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져 날뫼(대구시 비산동)에 안장되었으며, 훗날먹방이 교우촌(용인군 이동면 묵리)으로, 1976년 미리내로, 1986년 대구로 이장되었다. 이중 먹방이 무덤은 '거꾸로 된 무덤'으로 알려져 왔는데, 그 이유는 성인의 가족들이 훗날 그 시신을 알아볼 수 있도록 거꾸로 묻었기 때문이다.
이제 미리내에는 김대건과 이윤일 성인의 유해가 안장되었던 자리가 빈 무덤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빈 무덤이 아니라 성인들의 피와 살이 그들의 신앙과 함께 스며 있는 진토(塵土)이다. 그러므로 이곳을 순례할 때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며, 그들의 순교 신심을 바탕으로 내일의 신앙을 다져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형제 (최양업) 토마스, 잘 있게
천당에서 다시 만나세
나의 어머니 우루술라를 특별히 돌보아 주도록 부탁하네.
저는 그리스도의 힘을 믿습니다. 그분의 이름 때문에 묶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형벌을 끝까지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하느님, 우리의 환난을 굽어보소서. 주께서 만일 우리의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여, 누가 감히 당할 수 있으리이까?
(김대건 신부가 스승 신부에게 보낸 1846년의 옥중 서한)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5월호]
2) 김대건 성인 유해 이장 경로
가. 이민식 빈첸시오의 기록
김대건 신부의 유체 이장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기록이 있으나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미리내 북쪽 거문정이에 살았던 이민식 빈첸시오와 관련된 기록이다. 김 신부가 은이 마을에서 전교 활동을 할 때 열심한 신자로서 사제직을 꿈꾸던 이민식은 김 신부의 치명 소식을 듣고 유체를 수습하기로 마음먹고 새남터로 달려갔으나 40일간이나 모래밭에 가매장된 유체는 국사범인 관계로 군졸들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머리는 안고, 동체는 결방하여 짊어지고 기회를 엿보던 이민식은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유체를 옮기게 된다. 수의에 곱게 싼 머리는 가슴에 안고 동체는 걸방하여 짊어지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검은 돌(黑石洞)을 지나 동작리(鋼雀洞) 뒷산을 타고 남태령을 넘어 청계산 골짜기에 이르니 날이 밝기 시작하였다.
어두워질 때까지 유체를 다래 덩쿨에 숨겼다가 다시 길을 재촉하여 하우 고개[鶴峴]를 돌아 묘론이 고개, 너덜이(板橋)를 거쳐 태재(泰峴)에 이르니 용인 땅과 가까운 능골 앞산이었다. 끊임없이 묵주 기도를 바치며 밤을 틈타 유체를 옮기던 이민식은 용인 땅에 들어서서야 한숨을 돌렸다고 한다.
되도록 위험한 큰길을 버리고 참바대 고개를 넘어 태화산 기슭의 퉁점(銅店),드렝이 고개를 거쳐 마침내 은이 마을에 도착하였다. 은이 마을에서 미리내까지는 신덕, 망덕, 애덕이라 불리우는 험한 고개 셋이 있는데 마지막 애덕 고개에서 날이 새는 바람에 유체를 콩밭에 숨겨 놓고 밤이 되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해가 중천에 뜨자 농부들이 가을걷이를 하느라 콩밭으로 오는 게 보였고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 앉은 그는 마음 졸이며 천주님과 성모님께 제발 무사히 넘기기를 빌었다. 그런데 갑자기 맑았던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농부들이 돌아가 유체를 무사히 보호할 수 있었으며 10월 26일에 김 신부의 유체를 미리내에 있는 그의 선산에 모실 수가 있었다고 한다.
나. 그 외 여러 가지 증언
이 밖에도 《순교자 증언록》에 의하면 다섯 사람의 증언이 있는데 그 내용이 서로 다르다. 김 프란치스코라는 시람에 의하면 상여에 실어 양성에 있는 미리내에 묻었다고 했고(《기해병오 순교자 증언록》 282쪽), 박 베드로라는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임시로 문배부리(지금의 용산구청 자리)라는 곳에 묻었다가 양성 미리내로 옮겼다고 했고(위 증언록 285쪽), 서 야고보라는 사람은 새남터에서 조금 떨어진 왜재에 매장했다가 다음 날 왜고개(현 국군 중앙 성당 자리)로 옮겨 매장하고 장례를 치뤘다고 했다(위 증언록 289쪽).
또 김대건 신부 유해 발굴과 이장 기록 보고서에 의하면 1846년 9월 30일 교우 14명이 미리내로 옮기고 그해 10월 26일에야 미리내에 유체를 안장했다고 한다. 이민식의 증손자 이순교 씨의 증언에 의하면 이민식을 비롯 세 사람이 옮겼다고 한다. 각종 문헌과 자료를 토대로 30여 차례에 걸친 현지 답사와 8,90대 노인들의 증언들을 종합 분석하여 지도상에 그 경로를 재현해 본결과 한강 도강 과정 누락, 유체 단독 이장 등 과장 부분을 제외하면 용인천주교회사에 수록되어 있는 이장 경로가 당시 실제 상황과 부합되는 측면이 크다고 여겨진다.
[자료 참고 : 한국순교자현양회]
가. 새남터 성지(김대건)
서울 용산구 이촌동 199의 1번지. 1호선 전철을 타고 용산역을 지나다 보면 말끔하게 단장된 커다란 한옥 기와집이 눈에 들어온다. 한국 천주교회 창립 2백주년 기념의 해인 1984년 공사를 시작해 3년 만에 완공한 이 집이 순교 성지 새남터 기념 성당이다.
이제는 교우들뿐만 아니라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이곳이 순교 터임을 금방 알 수 있다. 하지만 높다란 아파트 숲을 배경으로 산뜻한 풍모의 건물이 자리 잡은 이 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피가 흘러내렸는지를 안다면 그렇게 무심하게 지나쳐 갈 수는 없을 것이다.
한양성 밖 남쪽 한강변에 있던 새남터는 본래 노들 혹은 한자로 음역(音譯)해서 사남기(沙南基)라고 불리었다. 이 자리는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의 연무장으로 사용됐고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곳은 1456년(세조 2년)에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던 사육신(死六臣)이 충절의 피를 뿌린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4세기를 건너뛴 1801년부터 1866년까지 무려 10명의 외국인 사제를 포함한 11명의 목자가 이곳에서 거룩한 순교의 피를 흘린다. 서소문 밖 네거리를 ‘평신도들의 순교지’라고 한다면 이곳은 ‘사제들의 순교지’라고 말할 수 있다.
새남터를 순교의 성혈로 물들이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치명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부터이다. 목자 없이 스스로 교회를 세운 조선의 교우들을 위해 북경 교구는 교회 창립(1784년) 11년 뒤인 1795년에 주 신부를 조선 땅에 파견한다.
이 땅에서 맞이한 첫 사제인 주문모 신부는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한양에 입성, 최인길의 집에 여장을 푼 이래 6개월 만에 한 배교자의 밀고에 의해 쫓기는 몸이 된다. 가까스로 몸을 피해 여교우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하지만 그의 영입에 주역을 담당했던 윤유일, 지황은 각각 36세, 29세의 나이에 곤장을 받아 치명하고 거처를 제공했던 최인길 역시 장살(杖殺)로 순교한다.
박해의 와중에서도 6천여 명의 신자가 새로 탄생하는 등 조선 교회의 교세는 크게 신장됐다. 하지만 주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지 6년 만인 1801년 신유박해는 또다시 수많은 교우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명도회 회장인 정약종을 비롯해 선구적인 이 땅의 지식인들은 칼 앞에서도 주 신부의 소재를 대지 않았고 그 때문에 더 많은 희생자가 생겨났다. 주 신부는 자신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 받는 것을 보고 중국으로 되돌아가려고 북행길을 나섰다. 하지만 자기 양 떼들과 생사를 함께 하고자 하는 각오로 도중에 발길을 돌려 자진해서 의금부로 나섰고 새남터에서 칼을 받고 장렬하게 순교한다. 그의 시체는 닷새 동안 형리들이 지켰다는데 그 후 어떻게 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주 신부를 잃은 지 30년 만인 1831년에 조선 교구가 설정돼 북경 교구로부터 독립을 얻은 데 이어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인 모방,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가 입국한다. 그 후 1년 만에 조선 교회는 신자가 9천 명으로 늘어났고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세 소년을 마카오로 유학 보내는 한편 정하상 등 네 명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1839년 기해박해는 이들 세 명의 외국인 사제를 38년 전 주 신부가 그랬던 것처럼 새남터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다. 교우들은 포졸들의 엄중한 감시를 뚫고 이들의 시체를 거두어 노고산에 매장했다가 4년 후 삼성산에 안장했다.
그로부터 7년 뒤인 병오년(1846년)에는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와 그 동안의 순교를 "기해 일기"로 남긴 현석문이 이곳에서 참수된다.
그리고 다시 20년 후, 전국적으로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 간 병인박해의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새남터에서는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 등 6명의 프랑스 사제들과 우세영, 정의배 두 평신도들이 순교의 피를 뿌린다.
이렇듯 서소문 밖 네거리, 당고개와 함께 한국 천주교회사상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새남터는 1950년 순교 기념지로 지정됐고, 1956년에는 여기에 '가톨릭 순교 성지'라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1981년에는 한강 본당에서 새남터 본당이 분리 · 독립했고 1987년에는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서 현재의 기념성당을 건립해 봉헌했다. 2006년 9월 3일에는 성당 지하 주차장을 개조해 '새남터 기념관'을 새로 만들어 축복식을 거행하고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1년 11월 7일)]
나. 왜고개 성지(김대건)
현재 군종교구청과 주교좌인 국군 중앙 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이곳 왜고개는 한자로 와현(瓦峴) 또는 와서현(瓦署峴)으로 불리던 곳으로, 원래 옛날부터 기와와 벽돌을 구워 공급하던 와서가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 서울 명동 성당과 중림동약현 성당을 지을 때 사용했던 벽돌도 이곳에서 공급해 주었다고 전해진다.한국 교회가 처음으로 맞이한 사제인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1752-1801년) 신부가 1801년 신유박해로 장렬하게 순교한 후 조선 교회는 또다시 목자 없는 양떼 신세가 되었다. 그 후 30년 만인 1831년 조선 교구는 중국 북경 교구로부터 독립해 명실 공히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이와 함께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인 모방(Manbant, 1803-1839년) · 샤스탕(Chastan, 1803-1839년) 신부와 앵베르(Imbert,1796-1839년) 주교가 입국한다. 이들 성직자들은 외인과 포졸들의 눈을 피해 상복 차림으로 변장하고 먹을 것도 여의치 못한 채 험한 산길을 걸어 다니며 전국 각지의 신자들을 찾아 다녔다.제한적인 활동을 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복음 전파에 힘쓴 결과 이들은 입국한 후 불과 1년 만에 신자가 9천여 명으로 늘어나는 성과를 얻었다. 방인 사제 양성을 위해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김대건 안드레아 등 세 소년을 뽑아 마카오로 유학을 보내는 한편 정하상 바오로 등 네 명의 열심한 신자들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쳐 신부로 키우고자 했던 것도 모두 이때의 일이다.
앵베르 주교는 지방을 돌아다니던 중 외국 선교사들의 입국이 알려져 교우들에 대한 탄압이 가열되자 수원에서 가까운 어느 교우 집에 몸을 숨겼고, 여기서 그는 다른 두 신부에게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당부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단념하고 몸조심을 당부하고 임지로 돌려보냈다.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로 인해 이들의 거처가 알려지고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앵베르 주교는 화가 여러 교우들에게 미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잡힌 몸이 되는 동시에 동료 신부들에게도 스스로 자수해 순교할 것을 권했다.이리하여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면서 세 명의 외국인 사제는 새남터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이들이 곤장을 맞고 팔을 뒤로 결박당한 채 형장으로 끌려오는 모습은 참으로 참담한 모습이었다.희광이들은 이들의 옷을 벗기고 겨드랑이 밑에 몽둥이를 끼워 처형 장소에 이르러서는 머리채를 모두 기둥에 매고 나서 목을 쳤다. 이 때 앵베르 주교의 나이 43세,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5세로 동갑이었다.사흘 동안 한강변 모래톱에 버려져 있던 이들의 유해는 감시의 눈이 소홀해진 틈을 타 몇몇 교우들에 의해 스무 날 가량이 지나서야 겨우 수습되었다.
세 성직자의 유해를 거둔 교우들은 시체를 큰 궤에 넣어 일단 노고산(老姑山, 현 서강대학교 뒷산)에 암매장하였다.그리고 4년 후, 당시 몰래 유해를 거둔 교우 중 하나인 박 바오로는 복잡한 서울 근교에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신 것이 불안해 자신의 선산인 삼성산(三聖山, 현 관악구 삼성동)으로 세 성직자들의 시체를 옮겨 안장하고 이 사실을 아들 박순집 베드로에게 알려 주었다.박순집 또한 부친의 뜻을 이어가기로 결심하고 박순지 요한 등 몇몇 신자들과 함께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베르뇌 주교와 브르트니에르 · 볼리외 · 도리 · 프티니콜라 · 푸르티에 신부, 우세영 알렉시오의 시신을 찾아 새남터 부근에 임시 매장한 후 다시 왜고개로 안장하였다. 그리고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남종삼 요한과 최형 베드로의 시신 또한 찾아내어 이곳에 모셨다.박해가 끝난 후 제7대 조선 교구장 블랑(Blanc, 1844-1890년) 주교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하였고, 박순집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과 순교자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곳 그리고 자기 집안의 순교자들의 행적을 교회법정에서 증언하였다.
이 증언록이 “박순집 증언록”으로 총 3권에 153명의 순교자 행적이 기록되어 현재 절두산 순교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박순집의 도움으로 1899년 10월 30일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하여 왜고개에 묻혀있던 7명의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잠시 모셨다가 명동 성당 지하묘지에 안장하였다. 삼성산에 모셨던 세 성직자의 유해 또한 시복 수속이 진행되던 1901년 10월 21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겼다가 같은 해 11월 2일 명동 성당 지하묘지로 모셨다. 1909년 5월 28일는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과 최형의 유해가 발굴되어 역시 명동 성당 지하묘지에 안장되었다.시복을 앞둔 1924년 명동 성당 지하묘지가 개봉되어 유해 일부가 로마와 파리 외방전교회 등으로 분배되었고, 1967년 절두산에 순교 기념성당이 건립되면서 명동 성당에 안장되었던 순교 복자들의 유해 대부분이 기념성당 지하 성해실로 옮겨졌다. 현재 절두산 순교성지 성해실에는 총 27위의 성인 유해와 성명 미상의 순교자 유해 1위가 모셔져 있다.
103위 순교 성인 중에서 현재까지 유해가 전해지는 분은 27위뿐이다.이렇듯 왜고개는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7위의 순교자가 33년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2위의 순교자가 43년간 매장되었던 유서 깊은 교회의 사적지이다. 또한 왜고개는 1846년 9월 16일 병오박해 때 순교한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시신이 잠시 모셔졌다가 박해가 진정된 후 미리내로 이장된 역사도 지니고 있다.이런 역사를 통해 왜고개는 모두 10위의 순교자가 묻혔던 곳으로, 그 중 8위가 1984년 5월 6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시성식을 갖고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따라서 왜고개는 순교성인들이 쉬어간 자리이면서 동시에 그들의 삶과 정신을 느끼기에 충분한 곳이다.
군종교구는 2013년 12월 15일 교회사적 의미를 살리고 순례자들이 좀 더 편안하게 순례하며 기도할 수 있도록 성지를 확장하여 새로 단장하고 축복식을 가졌다. 새로 단장된 성지에는 순교자 현양비와 대형 십자가상, 십자가의 길과 기도처 등이 마련되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5년 2월 12일)]
다. 미리내 성지 (김대건)
미리내 성지는 본래 경기도 광주, 시흥, 용인, 양평, 화성, 안성 일대 등 초기 천주교 선교지역을 이루던 곳의 하나로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의 묘소와 그의 어머니 고 우르슬라, 김 신부에게 사제품을 준 조선 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 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이곳에 안장했던 이민식 빈첸시오 외에도 이름 없는 16명의 천주교 순교자들이 모셔져 있는 곳이다.
산이 높고 골이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이곳은 신유박해(1801년)와 기해박해(1839년) 에 천주교 신자들이 모진 종교탄압 속에서도 신앙심을 지키기 위해 이곳으로 모여 들어 교우촌을 형성하면서 주로 밭을 일구고 그릇을 구워 팔며 살았던 곳이다. 이 성지에 미리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는 천주교 신자들이 피운 불빛이 깊은 밤중에 보면 은하수처럼 보인다는 것 때문이었다.
미리내는 1883년 공소가 설치됐다가 3년 뒤인 1886년 본당으로 승격됐다. 하지만 본격적인 성역화 작업은 지난 1972년부터 시작됐다. 성모 성심 수도회와 천주 성삼 성직 수도회가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을 비롯해 주차장 시설, 김대건 신부 동상, 피정의 집등이 완공됐다.
1980년 들어서는 경당 옆에 3만 평 규모로 광장을 확장하고 미리내 성당에서 경당까지 길 옆에 14처 조각을 세웠고 1987년부터 1989년까지 2년에 걸친 공사 끝에 103위 성인 기념 대성전의 웅장한 모습이 드러났다. 경당에는 현재 모두 여섯 분의 묘소와 함께 김 신부의 하악골(아래턱뼈)을 모셨다.
다른 유해는 가톨릭 대학교 신학 대학(성신 교정) 성당 안에 안치돼 있다. 김 신부의 묘 역에는 한국 천주교의 3대 주교인 페레올 주교님과 미리내의 첫 주임신부인 강도구 신부, 3대 박말구 신부 등의 유해가 석관 속에 안치되어 있다.
연중 순례객이 끊임없이 줄을 잇고 있으며 천주교 신자 는 물론 비신자들도 많이 참배하여 기도를 올려서 마음의 평화와 영혼의 위안을 받고 돌아가는 곳이다. 103위 시성기념성당이 1991년에 완공되었는데, 제대에는 김대건신부님의 비골(종아리뼈)이 모셔져 있고, 2층에는 박해당시의 성구형틀이 전시되어 있다.
라. 진안리 성지(최양업신부 선종지)
진안리 성지는 영남의 관문인 새재와 이화령 고개 갈림길에 위치해 있으며 사목보고차 서울로 올라가다가 갑자기 병을 얻어 선종한 최양업 신부를 기리기 위해 조성된 성지이다.
문경시 문경읍 진안리 (최양업 신부가 선종한 곳)/하초리(새재 관문이 있는 곳의 지명으로 최양업신부, 강깔레 신부뿐만 아니라 선교사들과 교우들의 통로)소백산맥 중 문경지방과 충정도 경계지역에 있는 주흘산(1109m), 조령산(1107m), 백화산(1063.5m), 대미산(1,115m)등은 이 지방에서 최고봉에 속하는 산들로서 조령(634m), 이화령(548m), 하늘재 등은 옛날부터 경상도에서 서울로 가는 이름난 통로로서 숱한 전설과 애환이 서려 있다.
특히 일명 "새재" 라고 하는 조령(鳥嶺)은 옛날 영남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통로이며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요새이다. 그러므로 조선조 숙종 34년(1708년)에 영남의 현관인 이곳에 관문과 성벽을 축조하였다. 제1관문인 주흘관, 제2관문인 조곡관, 제3관인 조령관이 서 있는데 각각 약3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이렇게 이 지방이 충북과 경계를 이루는 영남의 관문이기에 과거는 물론, 최양업신부와 깔레 강신부등 선교사들과 교우들이 몰래 관문 옆 수구문을 통해서 충청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며 선교 활동과 피난길로 이용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특히 관문과 이화령 고개 갈림길에 위치한 진안리는 최양업신부가 사목보고차 서울로 가다가 갑자기 병을 얻어 선종한 곳이다.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 신부는 증조부때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구교우 집안에 태어 났으며 부친 최경환과 모친 이성례는 1839년 기해박해때 순교했다.
한편 그는 1836년 모방 신부에 의해서 최방재(사베리오) 김대건 안드레아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 마카오로 가서 신학공부를 한 뒤 한국교회에서는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 번째로 1849년 4월 15일에 중국의 강남 교구장 마레스카 주교에세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해(1849년) 12월 변문을 떠나 입국에 성공하였다. 실로 입국을 시도한지 다섯 번째인 7년 6개월만에 입국에 성공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 후 12년 동안 매년 5,000리-7,000리를 걸어 다니면서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의 교우촌과 외교인들이 살고 있는 반촌과 빈촌을 사도 바오로 처럼 온갖 고통을 겪으면서도 찾아 다녔고 그렇게 열심히 포교 활동을 하다가 1859년 말부터 1860년 경신박해를 맞아 경남 언양의 간월산 동굴에서 3개월간 피신을 하였고 마침내 1860년 8월 박해가 끝난 후에 매일 80리-100리를 걸으면서 밀린 교구방문과 사목활동을 하고서 그 이듬해인 1861년 6월에 서울에 계시는 베르뇌 주교에게 사목보고를 하러 서울로 가다가 문경새재와 이화령 고개의 넓은 갈림길인 문경시 진안리의 오리터 주막집에서 약주 몇잔과 황육(소고기)을 잡수시고 크게 취하시어 말 위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되자 모시고 있던 복사가 ‘너무나 불편하신 모양이니 이 문경 읍내의 평창 이씨라는 교우 한 집이 괘약(약국)을 하고 있사오니 그 집으로 갑시다’하고 간곡히 권고하여 그 집에서 치료를 받으셨으나 원체 과로로 몸이 쇠약한데다 장티푸스의 합병증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6월 15일 40세의 나이로 선종하셨다.
선종하시기 8-9시간 전에 여기서 170-180리 떨어진 배론 신학교의 뿌르띠에 신부가 달려와서 병자성사를 주었고 그때 최신부님은 의식은 있었으나 말은 못하고 다만 아주 열성적으로 예수 마리아의 두 이름을 되풀이 하며 부르다가 선종하셨다. 그리하여 뿌르띠에 신부의 지도로 상여를 꾸며 배론으로 운구하여 베르뇌 주교의 집전으로 뒷산에 안장을 했다.
바. 배론성지(최양업 신부 안장지)
배론성지는 1801년 황사영 순교자가 머물며 백서를 썼고, 1855년에는 사제양성을 위한 성 요셉신학교가 세워져 1866까지 신학교육이이루어졌습니다.1861년에 선종하신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님의 무덤이 있는 곳이며, 또한 장주기 성인을 비롯한 여러 명의 순교자들이 살던 거룩한 땅입니다.순례자들과 방문자들의 편의를 위해 몇해전에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운영하여 왔으나 지금까지는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그 점에 늘 아쉬워 하던 중 이번에 많은 분들의 도움과 협력으로 새로이 모든 자료를 입력하고 보완하여 면모를 일신하여 더욱 알차고 새로운 홈페이지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앞으로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활용을 기대하며,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을 닮아 가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또한 이 곳을 찾는 모든 분들께 하느님의 축복이 있으시길 기도합니다.
● 최양업신부 기념성당(대성당, 소성당)의 의미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성덕을 기리며 시복시성을 기원하기 위해 건립된 이 성당은 배 모양으로 설계 시공되었다. 성당의 의미는 첫째, 배론이라는 지명을 조형화한 것인데, 이 곳은 골짜기의 모양이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고 하여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둘째, 노아의 방주가 그러했듯이 교부들은 초기부터 교회를 구원의 배로 이해하고 표현 하였다. 사나운 세상의 풍랑 속에서 안전하게 하느님 나라를 향해 항해하는 배를 지음으로서 2000년기의 세기말적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안정과 평화를 주고자 하는 뜻과 2000년 대희년은 물론 제삼천년기를 향한 희망의 뜻을 담았다.셋째, 최양업신부가 입국하기 위해 몇 차례 승선했던 그 배를 상기하여 그분이 지니셨던 불굴의 선교의지를 본받고자 하였다.
자료편집: 성지순례 후원회
성지순례후원회 ❙ http://cafe.daum.net/holyplac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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