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천비(世阡碑)
세천비는 선산입구, 선산근처에 세워 그 문중의 선산임을 나타내며 문중이나
문중 선조들의 치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기록을 남기는 비석을 말합니다.
세천비에는 선산의 내력, 가문의 내력 그리고 비를 세우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상세내용을 기록합니다.
세천이란 세대(30년)를 천개나 지난다는 뜻이 숨겨져 있으며, 여러대를 내려오며
선산에 조상의 산소를 모신다는 뜻으로 해석하시면 됩니다.
한자 해석으로만 본다면 여러대(세世)의 무덤길(천阡)이며, 선산(선영)의 묘소 안내표지로
세장지지(世葬之地 : 대대로 묘를 쓰고 있는 땅)를 가르키는 용어입니다.
지역을 여행하거나 방문하게 되면 세천비를 세워 놓은곳을 자주 볼 수있습니다.
안천에서 동향방면(신괴리 지사/후세골)으로 가다보면 우측에 세천비가 있습니다.
하양허씨간숙공파세천비
河陽許氏簡肅公派世阡牌
河陽許氏는 駕洛國首露王妃 許皇玉普州太后의 후손이요 貫祖는 고려조 戶部郞將 諱 康安이시다. 中始祖 十二世의 諱는 周로 조선조에 吏曹判書와 漢城府事를 지내시며 세종대왕을 보필한 명재상으로 領議政에 추증되고 簡肅公의 諡號를 받으셨다. 손자 兵曹正郞諱哲堅은 死六臣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義禍를 당하셨다. 증손 通訓大夫德水懸監雲谷諱方柱는 단종이 遜位되자 부형이 화를 당하니 一四五六년 丙子十월 配豊壞趙氏와 함께 용담에 정착하여 杜門自靖하셨다. 이로서 雲谷은 龍潭에 정착하시니 入鄕祖로 十五世祖라 자자손손오백사십여년이나 湖南의 巨族으로 三十대를 이어오면서 忠孝誠信과 守素明德하는 傑出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이곳이 山紫水明한 山中都方이요 德裕山의 발원의 錦江본류가 程子川顔子川朱子川과 합류하는 곳이다. 全羅北道鎭安郡顔川面三樂里를 중심으로 顔子洞에 著存齊가 있고 豊岩長登勝金에 集成村을 이룬 舟項八景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保閒 稷洞에 永慕齋가 있어 조상의 제례를 모시고 門中事를 논의하는 齊宮이다.
용담다목적댐 건설에 따른 一九九二년 이주 대책의 추진으로 崇祖愛族하며 살던 故鄕山川이 水沒되어 우리의 보금자리를 잃고 동서남북으로 헤어져야하니 越鳥도 남쪽가지에 둥지를 튼다는데 이를 어찌하랴. 우리의 아픈 가슴을 달래면 表迹을 남기고자 사무치는 望鄕의 정을 世阡碑에 새겨 祖上의 精氣어린 이땅에 세우다.
—九九九년 (己卵) 五월 二十二일
河陽許氏 簡肅公派 大宗會長 三十世孫 弘默 謹竪
法學博士 三十三世孫 永敏 謹撰
韓國書藝硏究會長權甲石 謹書
世阡碑建立推進委員會
■ 委員長 : 弘默 ■ 副委員長 : 在佑, 永卓
■ 總 務 : 玉烈 ■ 財 務 : 日星
■ 委 員 : 承默,翊柱,玉烈,光錫, 永敏,完圭, 宗五, 永暢,金奉, 垘仁
**자유 게시판
도시조(都始祖) ,원조(遠祖) 시조(始祖) 관조(貫祖) 파조(派祖의 다른 점
시조(始祖)와 관련 있는 용어에는 도시조(都始祖) ,원조(遠祖) 시조(始祖) 관조(貫祖) 파조(派祖) 등이 있으며 도시조는 여러 관향(貫鄕)을 총괄하는 조상님이시고 원조(遠祖)는 일세조(一世祖) 위에 조상님이 계신다고는 하나 계대를 못해 그 一世祖를 원조(遠祖) 라하며 시조는 관조(貫祖)를 주로 칭하고 관조의 뜻은 본관(本貫)의 本貫鄕의 일세조이며 파조(派祖)는 한 파의 일세조를 말한다.
참고로 예를 들면 林八及 忠節公은 시조(始祖)가 아니고 都始祖이고 나주 임씨 일세조 庇公은 원조(遠祖)라하며 兆陽林氏 林 世味公은 조양임씨 始祖이고 그 형님인 林堅味 公은 平原府院君派派祖라하고 두분의 아버지이신 林彦脩 公 忠貞公은 平澤林氏 忠貞公系 貫祖라 말한다. 전 족보연구분과 위원장 이학박사 八及公 35世孫 忠貞公 20世孫 平原府院君派 19世孫 林 行 鎭
하양허씨간숙공파세천비
하양허씨는 가락국수로왕비 허황옥보주태후의 후손이요. 관조(관조의 뜻은 본관(本貫)의 本貫鄕의 일세조이며 파조(派祖)는 한 파의 일세조를 말한다) 고려조 호부낭장 휘(돌아가신분을 높여 부르는말) 강안이시다. 중시조 십이세의 휘는 주로 조선조에 이조판서와 한성부사를 지내시며 세종대왕을 보필한 명재상으로 영의정에 추증되고 간숙공의 시호를 받으셨다. 손자 병조정낭 휘 철견은 사육신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의화를 당하셨다. 증손 통훈대부덕수현감 운곡 휘 방주는 단종이 손위(임금이 자리를 내어줌)되자 부형이 화를 당하니 일사오륙년 병자십월 배(배우자)풍양조씨와 함께 용담에 정착하여 두문자정(문을닫고 출입을 안함)하셨다. 이로서 운곡은 용담에 정착하시니 입향조(마을에 처음으로 정착한 각 성씨의 조상)로 십오세조라 자자손손 오백사십여년이나 호남의 거족으로 삼십대를 이어 오면서 충효성신과 수소명덕하는 걸출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이곳이 산자수명한 산중도방이요 덕유산의 발원의 금강본류가 정자천 안자천 주자천과 합류하는 곳이다. 전라북도 진안군 안천면 삼락리를 중심으로 안자동에 저존재 있고 풍암 장등 승금에 집성촌을 이룬 주항팔경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보한 직동에 영모재가 있어 조상의 제례를 모시고 문중사를 논의하는 재궁이다. 용담다목적댐 건설에 따른 일구구이년 이주 대책의 추진으로 숭조애족하며 살던 고향산천이 수몰되어 우리의 보금자리를 잃고 동서남북으로 헤어져야하니 월조도 남쪽가지에 둥지를 튼다는데 이를 어찌하랴. 우리의 아픈 가슴을 달래면 표적을 남기고자 사무치는 망향의 정을 세천비에 새겨 조상의 정기어린 이땅에 세우다.
일구구구년 (기유) 오월 이십이일
하양허씨 간숙공파 대종회장 삼십세손 홍묵 근수(세우다)
법학박사 삼십삼세손 영민 근찬(내용쓰다)
한국서예연구회장 권갑석 근서(글씨쓰다)
세천비건립추진위원회
■ 위원장 : 홍묵 ■ 부위원장 : 재우, 영탁
■ 총무 : 옥렬 ■ 재무 : 일성
■ 위원 : 승묵.익주.옥열.광석.영민.완규.종오.영창.금봉.복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