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죽지 말고 삽시다
2002년 2월 17일 / 대예배 / 시편 42:1-11
서두에 “고라 자손의 마스길, 영장으로 한 노래”라고 했는데, 고라 자손은 레위 지파에 속한 한 집안이며 마스길이란 교훈이란 뜻입니다. 즉 고라 자손의 교훈시로 성가대 지휘자를 따라 부른 노래라는 뜻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 하나님의 성전에서 수종드는 사람들이 극심한 영적인 침체와 환경과 처지에서 오는 낙심과 절망의 늪에서 탄식을 합니다. 그러나 그는 곧 영적침체와 절망에서 치유받은 체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5절에서 말한 것처럼 그의 영혼은 심히 낙망하며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인생을 걸어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낙심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도 영적인 낙망과 우울한 절망감이 닥칠 때가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주님께 수종드는 직분자들도 낙망과 심각한 영적침체에 빠지게 됩니다.
기독교 역사를 읽어보면 위대한 신앙인들도 항상 신앙의 극치감 속에서 산 것이 아니라 때로는 영적으로 심한 낙심과 침체에 빠져 있었던 것을 읽게 됩니다. 설교의 왕자라고 불리는 영국의 찰스 스펄젼 목사는 주기적으로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그는 런던의 일기가 침울하고 어둡기에 일년 중 1-2달은 날씨 좋은 프랑스 남쪽 해안지대인 리비에라에 가서 요양을 했는데, 그가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완전히 부서진 질그릇처럼 느껴집니다. 많은 밤을 잠자지 못하며, 낮에도 눈물을 흘리며 지내고 있습니다.”라고 호소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때때로 신앙적으로 낙망하며 낙심하여 심한 침체에 빠지고는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나의 사정과 형편을 알고 계신가? 그렇다면 왜 내가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도 하나님은 나의 사정을 외면하시며, 왜 도우시지 않는가?”라고 생각하며 낙심의 수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시편 42편의 저자는 왜 영적으로 낙심하게 되었습니까?
1. 그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최북방지역인 헐몬산 지역에 억류되어 부자유한 몸으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자 그는 영적으로 심한 갈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였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듯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시편 42편의 저자는 유대인들이 포로로 끌려가던 시대의 사람으로, 유다 지역의 최북단인 헐몬산 부근에 거류민으로 억류되어 살고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시편의 저자는 예루살렘 성전을 그리워하며 하나님을 목말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목말라 합니다. 그래서 1절 이하에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헐몬산은 2,743m나 되는 높은 산으로 일년 내내 산정에는 눈이 쌓여 있습니다. 그 산에서 흘러 내리는 물을 목마른 사슴이 달려와 자유롭게 마음껏 마시는데, 지금 이 시인은 성전에 올라가 예배하고자 원하나 그렇지 못하는 영적갈증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의 간절한 마음을 2절에 표현했는데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봐올꼬.”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6절과 7절에서 다음과 같이 탄식합니다. 현대인의 성경으로 번역된 말씀을 보면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하므로 요단강이 흐르고 헐몬산과 미살산이 우뚝 선 이곳에서, 내가 주를 기억합니다.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습하고 슬픔의 홍수가 폭포같이 나에게 쏟아집니다.”라고 했습니다. 성전에 올라가 예배를 드리지 못할 때 영적인 침체와 영적낙심에 빠지게 됨을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마음놓고 하나님의 성전에 나와서 예배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성령에 감동된 예배, 기쁨과 감사로 드리는 예배는 우리의 영성에 강건함을 줍니다. 그러나 예배를 게을리하거나,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하면 조그만 어려운 일에 직면해도 낙심하게 되며, 신경이 대단히 날카로워져서 작은 일에도 상처를 입게 되며, 깊은 영적침체에 빠지게 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게 됩니다. 어떤 목회 상담학자가 말하기를 8주, 두 달 동안 교회 안나오고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그 영혼은 사막 같아지고 불신자와 같은 상태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예배를 통하여 새 힘을 얻고 영역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2. 시인으로 하여금 낙심케 한 것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 낙망케 했습니다.
3절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고대국가에는 나라마다 섬기는 신들이 달랐습니다. 에집트 사람들은 태양을 신으로 섬겼고, 바벨론 사람들은 달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국가마다 그들의 수호신들이 있었습니다. 강대국이 약소국가를 점령하면 강대국의 신이 약소국의 신보다 더 강하기 때문에 강대국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컨대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을 때 바벨론 사람들은 너희 이스라엘이 섬기는 하나님보다 자기들이 섬기는 달신인 ‘마덕’보다 약한 신이라 너희를 보호하지 못했으므로 너희가 패배한 것이라고 합니다.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할 때 하나님을 경배하는 이들로서는 이방인들로부터 당하는 조롱으로 더욱 가슴이 쓰리며, 근심하고, 낙망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세상 사람들로부터 “너는 그렇게 열심히 믿는데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면 네가 믿는 하나님은 무능하여 너를 돕지 못하거나 하나님은 존재하지 아니한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걸핏하면 교회를 비난하고 성도들을 조롱합니다. 10절에 보면 시인은 “그 조롱소리가 나의 뼈를 찌르는구나”라고 마음 아파했습니다.
영적인 침체와 영적인 낙심과 우울증으로부터 시인은 어떻게 자유함을 얻고 있습니까?
1.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오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시인이 낙심된 원인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시인은 ‘나’를 14번, ‘나를’을 16번, ‘나의’를 21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데 너무 바빴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보면서 반성하고 회개하는 일은 좋지만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지나치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므로 큰 실망이나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아브라함이나 사라도 점점 늙어가는 자신들의 모습을 바라보았을 때 하나님을 믿고 지금까지 견디어 온 것이 너무 허무해 보였습니다. 마치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처럼 말입니다. 욥도 무서운 고난 중에 처해 있는 자신을 돌아보면 깊은 신음과 더불어 깊은 탄식을 하였습니다.
구약의 엘리야 선지자는 갈멜 산상에서 우상숭배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진멸시키는 크나큰 승리를 거두고 난 뒤 온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부흥의 역사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승리의 개선가는커녕 오히려 엘리야는 그를 죽이려는 악독한 이사벨 왕후의 추격을 받아 광야로 피신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바라볼 때에 너무 허무했던 것입니다. 죽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대선지자인 엘리야의 탄식이었습니다.
(왕상 19:1-4)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2)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3)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두려워 떨며 목숨을 구하여 급히 도망쳤다)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4)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싸리나무 덤불)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다 끝났습니다,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선조들보다 나을 것 없는 못난 놈입니다)
▶ 우리는 어려운 때를 당하면, 주로 자기 자신의 처지와 형편을 생각하여 낙심하거나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일수록,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억울한 일을 당하고, 낙심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최후의 승리를 주실 뿐 아니라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고 한밤중에도 찬양을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귀신들린 사람을 낫게 한 일로 많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었지만 그들은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바라보지 않고 자기네들을 이곳까지 보내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밤중에 하나님께 찬송과 기도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의 삶에는 나를 낙심시키며 나를 절망케 하고 나의 모든 희망을 빼앗아 가는 일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신세를 한탄하거나 불평하거나 의기소침하여 낙심하기보다는 나를 영원히 사랑하시며 나의 삶을 책임져 주시는 선한 목자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믿음의 권면을 합시다. (5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또 (11절)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자기 영혼에게 믿음의 말, 소망의 말을 함으로 낙심으로부터 치유함을 얻었습니다.
▶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우리는 항상 자기 자신에게 말하며 살고 있는데,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평균 1분당 150개에서 200개의 단어를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 자신과 대화할 때에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인 1분에 1,300개의 단어를 말할 수 있다고 합니다. 나 자신과의 대화를 심리학자들은 ‘Self-Talk’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처럼 빠른 속도로 자신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혹시 어려운 처지에 놓인 나 자신에게 믿음과 소망의 권면보다 부정적이고 저속하고 패배적인 대화를 하는 것은 아닙니까? 영적침체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불신앙적인 대화나 부정적인 대화로 자꾸 자신을 더 낙심케 하며, 더 깊은 우울증에 빠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침체에서 자유롭게 되려면 자기 자신과의 대화에서 세상말로는 긍정적, 신앙적인 말로는 믿음의 말과 덕스럽고 용기있는 권면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온 권면을 말씀을 되새김질해야 합니다.
� 세계적인 강해설교가인 영국의 로이드 존스 목사는 영국 왕실의 주치의인 의사였다가 목사가 된 사람입니다. 그는 시편 42편을 강해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말을 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설교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영혼에게 말해야 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느냐? 무엇 때문에 불안해하느냐?‘ 여러분은 자신을 책망하도 하고, 권면하고 그리고 자신을 타일러야 합니다. 지금 침체된 상황에서 불평 대신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말해야 합니다.”
2. 과거를 보지 말고 미래를 보아야 합니다.
(4절)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지난날의 좋았던 추억들을 자꾸 되새기면서, “아, 그때가 좋았는데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 하며 과거를 회상하면서 우울해하고, 실망하고, 좌절해 하지말고 믿음과 소망이 있는 시편 기자처럼 다시 한번 자기 자신에 대해 정상적으로 회복할 수 있는 한마디를 고백합시다. (5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6절)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주를 기억하나이다’는 말은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서 어느 도피처에서 주님을 기억하고 낙심을 극복해가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수없는 낙심과 좌절이 휘몰아오지만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기억하고 낙심하는 것이 있고 기억하고 낙심을 극복하는 것이 있습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언제나 주신 말씀은 ‘너 애굽의 종 되었던 때를 기억하라’ 즉 “네 하나님께서 큰 손과 편 팔로 너를 인도했던 때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과거 잘되었던 때를 기억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너를 환난 중에 구해주시고, 너를 돌보시고, 너를 살려주신 때를 기억하라. 그때 너희들이 종으로서 채찍에 맞고 시련을 겪었으나 하나님께서 큰 손과 편 팔로 너희를 인도해서 광야로 이끌어내지 않았느냐 행하신 것을 잘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 합니다. 과거에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나를 의의 길, 형통의 길로 인도하심을 믿으십시다. 예수님의 말씀을 빌어봅니다.
(마 6:31-34)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32)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
3.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매사에 승리했던 비결이기도 하였습니다. 잘 아시는 말씀이지만 다시 한번 봅니다.
(삼상 17:32-37)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저 자 때문에 사기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임금님의 종인 제가 나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겠습니다.” 33) 그러나 사울은 다윗을 말렸다. “그만 두어라. 네가 어떻게 저 자와 싸운단 말이냐? 저 자는 평생 군대에서 뼈가 굵은 자이지만, 너는 아직 어린 소년이 아니냐?” 34) 그러나 다윗은 굽히지 않고 사울에게 말하였다. “임금님의 종인 저는 아버지의 양 떼를 지켜 왔습니다. 사자나 곰이 양 떼에 달려들어 한 마리라도 잡아가면, 35) 저는 곧바로 뒤쫓아가서 그 놈을 쳐죽이고, 그 입에서 양을 꺼내어 살려내곤 하였습니다. 그 짐승이 저에게 덤벼들면, 그 턱수염을 붙잡고 때려 죽였습니다. 36) 제가 이렇게 사자도 죽이고 곰도 죽였으니, 저 할례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도 그 꼴로 만들어 놓겠습니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자를 어찌 그대로 두겠습니까?” 37) 다윗이 말을 계속하였다. “사자의 발톱이나 곰의 발톱에서 저를 살려 주신 주께서, 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틀림없이 저를 살려 주실 것입니다.” 그제야 사울이 다윗에게 허락하였다.
(삼상 17:41-50)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다> 그 블레셋 사람도 방패 든 사람을 앞세우고 다윗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42) 그 블레셋 사람은 다윗을 쳐다보고 나서, 그가 다만 잘생긴 홍안 소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그를 우습게 여겼다. 43) 그 블레셋 사람은, 다윗에게 “막대기를 들고 나에게로 나아오다니, 네가 나를 개로 여기는 것이냐?” 하고 묻고는, 자기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였다. 44) 그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어서 내 앞으로 오너라. 내가 너의 살점을 공중의 새와 들짐승의 밥으로 만들어 주마.” 45) 그러자 다윗이 그 블레셋 사람에게 말하였다. “너는 칼을 차고 창을 메고 투창을 들고 나에게로 나왔으나, 나는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곧 만군의 주의 이름을 의지하고 너에게로 나왔다. 46) 주께서 너를 나의 손에 넘겨주실 터이니, 내가 오늘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사람의 주검을 모조리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밥으로 주어서, 온 세상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게 하겠다. 47) 또 주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를 쓰셔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기에 모인 이 온 무리가 알게 하겠다.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주께 달린 것이다. 주께서 너희를 모조리 우리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48) 드디어 그 블레셋 사람이 몸을 움직여 다윗에게로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다윗은 재빠르게 그 블레셋 사람이 서 있는 대열 쪽으로 달려가면서, 49)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돌을 하나 꺼낸 다음, 그 돌을 무릿매로 던져서, 그 불레셋 사람의 아마를 맞추었다. 골리앗이 이마에 돌을 맞고 땅바닥에 쓰러졌다. 50) 이렇게 다윗은 무릿매와 돌 하나로 그 블레셋 사람을 이겼다. 그는 칼도 들고 가지 않고 그 블레셋 사람을 죽였다.
� 종교개혁이 한창이던 어느 날 마르틴 루터는 궁지에 몰려 몹시 상심하고 낙심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루터의 아내는 상복을 입고 루터에게 나타났습니다. 루터는 “누가 죽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예, 하나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이요. 하나님이 돌아가시다니?” 지혜로운 그의 아내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당신이 그토록 기가 죽어 있을 수 있단 말이오. 당신이 낙심하고 무기력한 것을 보니 하나님이 돌아가신 것이 틀림없소.” 그때 루터가 ‘아, 그렇다. 하나님께서 생존하시는데 내가 왜 기가 죽었단 말인가?’ 무릎을 꿇고 “오 주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해 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오니 나를 살려주소서. 나에게 힘을 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드디어 그는 하나님이 주시는 생기를 받아 종교개혁을 완성해 갑니다. 하나님은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누구를 도와주십니까? 도와주심을 바라는 자를 도우십니다.
“눈을 들어 산을 보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나를 도우실 분은 그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뿐입니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8절) 우리에게 언제나 희망을 주는 것은 기도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앞뒤가 막히고 세상 살기가 힘들어 낙심이 되어 기가 죽어 있을 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는 말씀을 묵상하십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