虛應堂 普雨大師(허응당 보우대사 ; 1506? - 1565)
카페에 한시방을 열면서 우선 조선 중기의 승려이자 시인인 허응당 보우대사의 글을 먼저
올리고자 합니다.
보우의 속명과 본관은 미상이며 몇 가지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 1506년(중종 1)~1509년(중종 4) 사이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하고 1565년 입적하였다. 호는 허응당(虛應堂)·나암(懶菴)이다.
보우는 15세 무렵 출가하여 금강산에서 6년간 수도하고 하산하였으나 중종대 억불 상황에 직면하여 다시 입산하였고, 안변 석왕사(釋王寺) 부근의 은심암(隱心庵), 함흥 백운산(白雲山) 등을 유력하였다. 1548년(명종 3) 호남으로 내려가던 중 병이 나 천보산(天寶山) 회암사(檜巖寺) 차안당(遮眼堂)에 머물렀는데, 당시 성종(成宗)의 능사(陵寺)인 봉은사 주지 명곡대사(明谷大師)가 은퇴하면서 보우를 그 자리에 추천하였다. 12월 15일 문정 왕후의 요청으로 봉은사 주지로 부임하였고, 1550년(명종 5) 문정 왕후(文定王后)에 의해 선교 양종(禪敎 兩宗)이 재건되면서 문정 왕후의 후원을 입어 선종판사(禪宗判事)로 임명되어 선종본사(禪宗本寺)로 지정된 봉은사의 주지직과 겸임하였다.
보우는 문정 왕후의 절대적인 지원에 힘입어 불교계를 연산군(燕山君) 이전으로 되돌려 놓고자 하였다. 1550년 11월 도첩제(度牒制)를 부활시켰고, 1552년(명종 7) 선교 양종을 대상으로 승과(僧科)를 실시했으며, 퇴락하고 황폐한 전국의 사찰을 새롭게 부흥시키면서 전국 사찰에 잡인의 출입을 금하는 방을 붙이기도 하였다. 한때 춘천 청평사(淸平寺)에 주석하기도 했으나 1559년(명종 14) 다시 봉은사로 돌아와 주석하였다.
문정 왕후와 보우의 불교 중흥은 유생들의 강력한 반발을 초래하였다. 1565년(명종 20) 문정 왕후가 세상을 뜨자 유생들의 강력한 반발과 배불상소로 인해 양종이 다시 혁파되었고, 불교계를 대표하던 보우는 양종 복립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565년 유배 중 제주 목사 변협(邊協)에게 주살당했다고 전해진다.
사상과 저술
보우는 조계종(曹溪宗)을 표방한 선종 승려였으나 『기신론(起信論)』, 『화엄경(華嚴經)』 등 교학에도 밝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그는 실천적 화엄관법을 주장하는 등 화엄 교학을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저술로는 『허응당집(虛應堂集)』, 『나암잡저(懶菴雜著)』, 『권념요록(勸念要錄)』, 『수월도량공화불사여환빈주몽중문답(水月道場空花佛事如幻賓主夢中問答)』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