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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복음을 알기 위해서는 십자가 사건의 중요성을 마음속으로 깨달아야합니다 : 조용기 목사님
4차원의 영적 세계에 대해 배우기 전에 먼저 십자가 사건의 의미
를 알아야 합니다. '은혜'란 아무런 대가 없이 일방적으로 받는 축복을 의미합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가장 큰 원동력으로 삼고 있는 말씀이 요한삼서 1장 2절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혼이 잘됨과 범사가 잘됨과 강건함' 이 세 가지의 축복을 누리는 것이 바로 십자가 보혈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의 삶입니다. 그러나 이 축복은 우리의 노력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루어질 수 없듯이 축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축복은 십자가를 통해 주어집니다. 십자가의 은혜 없이는 구원도 축복도 없습니다.
강단에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라.' 라는 이 구절을 기초로 말씀을 선포하면 어떤 이들은 제가 무조건 복만 바라는 기복적인 신앙을 가르친다며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또 십자가가 없는 신앙이라고 수군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십자가에서 비롯되지 않은 축복을 선포했다면 지금까지 제가 목회를 하면서 만난 모든 성도는 헛된 것을 믿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희생하심으로써 얻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아무리 선한 일을 한다 해도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 인간을 위해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구원의 대가를 치르기에는 그 값이 너무 엄청나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하나님이공짜로 베푸신 구원의 역사가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우리는 이은혜를 통해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간혹 이런 귀한 축복을 '내가 정의롭고 좋은 일을 많이 해서 받은 당연한 대가'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정의롭고 선하다 해도 심판대 앞에서 무죄로 판명될 사람은 없습니다. 한번 지은 죄는 인간 스스로 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능력이 닿지 않는 영역에서 풀어야 할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 죄를 속량하여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며, 그분의 용서를 통해 우리는 죄 씻음을 받고 구원 받을 자격을 얻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에 대한 깊은 이해와 깨달음이 없이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당연히 그 사건을 통해 받게 되는 영과 혼과 육의 축복 역시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이처럼 십자가를 통해 얻은 귀한 축복인 구원은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전적인 은혜에 의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으니 이것은 결코 그 누구도 스스로의 능력이라고자랑할 수 없는 일입니다.
혹자는 똑같이 구원 받고 축복 받았다면서 왜 어떤 이는 일평생 부자로 형통하게 살고, 어떤 이는 일생을 가난과 질병으로 고생하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사실 그렇긴 합니다. 이런 경우는 주위에서 흔히볼 수 있는 일입니다. 같은 교회에서 같은 시간에 예배를 드리고 같이 봉사하는 사람이더라도 다 똑같은 삶을 살진 않습니다. 누군가는더 넓은 평수에 살고, 어떤 사람은 더 머리가 똑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해 잘 살고 못 살고의 문제로 이야기하기 전에 저는 묻고 싶습니다. 구원의 은혜라는 값비싼 선물을 받고도 여전히 자신의 삶이 누군가보다 부족하고 환경이 열악하다며 하나님께 불평하고 있진 않습니까? 십자가 사건에 대한 감사함과 기쁨을 아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러한 환경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공평하게 얻은 그 구원만으로도 우리는 하나님께 평생을 감사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누구는 은혜를 더 많이 입었다며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에 바쁩니다.
오로지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은 우리 모두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4차원의 영적 세계에 대한 이해는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임을 믿고 시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외치셨습니다. 우리는 그때 이미 예수님 안에서 피조물로 완성되었습니다. 새삼스럽게 지금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옛날 과거에 주님이 다 이루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 되어 함께 죽고 장사 지낸 바 되어 함께 부활해서 새것이 되었습니다. 미래에 될것이 아니요, 지금 되어 가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 안에서 다이루어진 것입니다.
당신의 옛사람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지나가 버렸습니다. 당신은 용서 받은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결한 사람이되었습니다. 치료 받고 건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부활과 영생을 얻은 천국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다 이루어 놓으신것입니다. 우리 신앙이란 주님이 다 이루어 놓은 것을 깨닫고 받아들여서 바라보고 믿고 입으로 시인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소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노력이나 수단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믿음으로 말미암아 붙잡는 것입니다. 오직 믿기만 하면 그리스도의성령이 오셔서 우리 가운데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일을 깨닫고, 그것을 바라보고 믿고 기도하고 시인하고 감사히 여기면 새로운 피조물의 역사가 우리의 생애 속에 넘쳐나게 됩니다.
요한삼서 1장 2철에서 말하는 삼중 축복은 영혼과 환경과 육체의 축복을 뜻합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자주 접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보면 아담은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 열매를 따 먹습니다. 이 불순종의 결과로 아담과 하와는 죄인이 되어 형벌을 받게 립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고 말씀하실 때 분명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세기 2:17).”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어기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죽음의 형벌에 처해집니다.
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육체의 죽음이 아닌 영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즉 이전에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자유롭게 거닐며 대화할 수 있었던 것은 영이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존재로 살기 때문에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영이 죽음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제사를 드려야 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 형벌은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창세기 3:18, 19)."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땅의 소산을 얻기 위해서는 힘겹게 땀을 흘려 노력해야만 하는환경의 저주입니다. 세 번째 형벌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세기 3:19).”라는 말씀대로 육신의 질병과 사망의 저주를 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리신 저주는 크게 세 가지로'삼중 저주'라고 합니다. 이 저주 안에 갇힌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삼중 저주를 삼중 축복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인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을 만나려면 동물의피로 제사를 드려야만 그 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성소의 휘장을찢으셨고, 그 후에는 누구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즉 죽었던 인간의 영을 부활시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자격을 주신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우리와 하나님을 연결하는 통로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말을 넣어 그분을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지성소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 모두 삼중 저주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죽었던 영이 살아났으며, 환경의 저주가 풀리고 형통해지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또한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심으로써 질병으로부터 자유하여 강건함을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삼중 저주가 삼중 축복으로 바뀌게되는 십자가 사건의 은혜입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로마서 1장 16절 |
삼중 축복은 죽음을 피할 수 없었던 인간에게는 매우 기쁜 소식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는 그 축복을 누릴 자격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결코 그 축복만을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얻은 축복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만약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힘든 제사를 드려야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자신이 죽을 것을 아셨지만 이 좋은 소식을 알리는 기쁨이 더 크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면서 예비하셨던 삼중 축복의 소식은 당신 스스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성취되었습니다.
결국 우리가 말하는 복음은 바로 이 축복들입니다. 복음은 구원을 받는다는 한 가지 의미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삼중 축복을 포함하여 예수님의 모든 사역에서 나타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오충 복음으로 정리하여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리하여 이 복된 소식, 즉 복음을 성도들이 마음에 새기고 자신이 그 복음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을 믿게 했습니다.
중생의 복음
크리스천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복음의 의미는 구원입니다. 이처럼 구원은 복음의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입니다. 죄에서 구원 받은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다시 태어나는 것, 즉 거듭나는 것입니다. 비록 눈으로 볼 때는 같은 환경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믿음을 통해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자아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공짜로 얻었기에 때로는 당연하다거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도 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쉽게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겪으신 십자가 사건을 기억한다면 아마도 기도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육신이 가장 감당하기 힘든 십자가형벌을 참으셔야 했습니다. 양손과 양발에 대못이 박히고 머리에는가시로 된 면류관이 씌워졌습니다. 바늘에 살짝 찔리기만 해도 고통을 느끼는 것이 인간의 육신인 법인데, 예수님은 그 가시로 된 면류관을 우리를 대신하여 쓰셨습니다. 또한 십자가에 매달려 조롱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내려올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있었지만 자신이 감당할 사명을 위해 참으셨습니다. 자신을 비웃는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모든 형벌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하나님이시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하며 고통의 극점에서 괴로워하면서도 끝까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 한 분의 희생을 통해 얻은 것이 바로 구원이며, 그로 인해 우리가 거듭난 인생을 살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구원 받아 새롭게 태어난 삶은 이전과 확연히 다릅니다. 거듭난사람은 과거의 모든 죄악과 허물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에 어둠이었던 인생이 이제는 빛의 인생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진리를 믿고 시인하는 사람만이 복음의 혜택을 입는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령 충만의 복음
복음은 단지 구원을 받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승천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누가복음 24:49)"
여기서 약속하신 것은 '성령'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육신의 몸으로 너희와 함께할 순 없지만 성령을 보내어 너희와 함께하겠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신 후 현재 2천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삶 곳곳에서 예수님의 임재하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바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성령 충만을 통해 예수님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삶은 능력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 17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라고 말했습니다. 성령이부어지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생깁니다. 이전에는 볼 수 없던 것들을 볼 수 있으며,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 떠오르게 됩니다.
베드로도 성령 충만을 통해 능력을 입었습니다. 본래 어부였던 베드로는 학문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을 가르치거나 연설하는 재능도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성령 충만의 은혜를 입고는 3천 명 앞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으며 그 모든 사람이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런 능력이 나타나는 성령 충만의 근거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지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누구나 다 그 은혜와 능력을 제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 다니며 그분의놀라운 능력을 눈으로 보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안에 성령이충만하지 않았기에 정작 예수님이 잡혀가실 때는 아무도 그 곁에 남아 있지 않고 도망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후에도 모두들 다시 어부의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나듯이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이 임한 제자들은 그 후 전인격적인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파하러 사마리아와 온 유대와 땅끝까지 가는 용기와 능력이 생겨난 것입니다. 제자의 삶에서 사도의 삶으로 변화한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성령 충만' 이었습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사도행전 2:4)."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구원과 성령 충만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구원 받는다고 해서 그 즉시 성령 충만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만나 강한 빛으로 인해 눈이 멀어 3일간 식음을 전폐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런 사울에게 아나니아가 찾아와 안수를 하자 성령 충만을 받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후 사울은 바울이 되고 사도로서 능력 있는 사역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처럼 구원을 받는 것과 성령 충만을 입는 것은 별개의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구원 받은 후에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성령 충만을 입어야 합니다. 이것은 수련회나 부흥회 등에서 뜨거운 성령 세례의 증거로 방언을 말하고 환상을 보는 일시적인 현상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이란 성령의 임재가 계속되는 삶을 말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매일 성령님의 임재를 구하며환영하고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때 온전히 성령이 충만한 복음의능력을 입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신유의 복음
예수님은 질병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인간을 위해 공생애 기간의 3분의 2 이상을 치유 사역에 할애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고, 나병 환자를 낫게 하시며, 눈먼 자를 보게하시는 모습을 통해 천국에 대한 증거를 목격하게 됩니다. 이것은그들에게 믿음을 심어 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의 신유의 역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병든 자들이 치유 받는 역사를 통해 믿지 않고 의심 많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치료를 천국의 증거로만 보여 주신 것이 아닙니다.지금 우리 시대에 나타나는 신유의 역사도 단순히 안 믿는 자들을믿게 하기 위한 징표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몸이 찢기며, 피 흘림을 통해 우리의 질병을 대신 지고 가셨기 때문에 치유의 은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베드로전서 2:24)” 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육신의 질고를 지셨기 때문에 우리가 질병에서 나음을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면서 우리의 영만 살리신 것이 아니라 육신도살리셨습니다.
이사야 53장 4절에서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라고 말하듯이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시는 고난은 우리에게 전할 신유의 복음을 준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치유의 역사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 성령의 능력으로 지금까지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1980년에 대만으로 교역자 부흥 수련회를 갔을 때의 일입니다.당시에 주영화 목사의 교회를 섬기던 두 명의 장로가 우리 일행을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저에게 성회 중 성령과 기적과 신유에 대해설교하지 말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들뿐 아니라 대만에 파송된 다른 선교사들도 제게 같은 말을 했습니다. 대만 사람들은 의심이 많아서 병이 나았다 해도 단상으로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들은 제가 창피를 당할까 염려스러워 귀띔을 해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유는 성령님이 베푸시는 것이며, 믿는 모든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이기 때문에 제 의지와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말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저는 말씀 선포 후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바로 신유 기도를 올렸습니다. 기도 후 병이 나은 사람은 손을 들어 보라고 했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두 번째로 다시 기도하고 손을 들라고 했지만 역시 아무도 없었습니다. 세 번째 기도를 마치자 한 사람이 지팡이를 들고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습니다. 그 사람을 본 단상에 있던 목사들이 눈이 휘둥그레지며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다리가 불편하여 지팡이를 짚고 다녔는데 이제는 더 이상 필요 없다며 단상에 그 지팡이를 두고 내려갔습니다. 단상 뒤에 앉아 있던 목사들이 계속 수군거렸지만 저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단지 '의심이 많다던 대만 사람들 중에 용기있게 치료 받았음을 고백하는 이가 나오자 놀랐나 보다.' 라고만 여겼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대만 신학교의 이사장이자 목사였습니다. 그는 원래 저를 이상한 목사로 알고 싫어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학생들을 성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그 날짜에 맞춰 시험을 치렀을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저를 비방했다고 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어쩔 수 없이 참석한 저의 집회에서 어릴 적부터 아팠던 다리를 치료 받고 단상 앞으로 나왔으니 목사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날 밤 주영화 목사가 숙소로 저를 찾아왔습니다. 주 목사는 그 신학교 이사장이 자신을 찾아와 크게 회개하면서 내일부터는 신학생 전원을 성회에 참석시키기로 약속했다.고 전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치유의 역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치유의 역사는 어쩌다 하루에 잠깐 일어나는 일회적인 기적이나 사건이 아닌 일상적인 일입니다. 때문에 치유 받을 것을 의심하지 않고, 확실히 믿고 기도하는 사람은 누구나 질병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죄 사함과 치유는 주님이 베풀어 주시는 똑같은 은혜입니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시편 103:3” 라는 말씀을 통해 그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요즘 사람들은 치료하시는 능력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도 않고 모셔 들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학적인 그리스도와 철학적인 그리스도, 그리고 역사적인 그리스도만 전파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능력을 행하신 예수님을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은 교법사와 바리새인의 태도와 닮아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신유에 대해 비난하고 공격하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말씀에 나와 있듯이 치료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경은 그 누구도 반박하게나 바꿀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따라 질병에서해방되는 신유의 은혜를 덧입기 바랍니다.
축복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영과 육에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활과 환경 속에 있는 수많은 저주를 물리치고 축복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 축복이 자기 것인지 모른 채 살아갑니다. 저주로 인해 생긴 고된 삶을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로 여기며 사는 모습을 볼 때면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생활 가운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가난입니다. 전 세계를 보더라도 기아와 굶주림은 삶을 파괴하는 무서운 재앙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난과 굶주림은 주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이러한 환경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속량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가지신 부요한 분이지만 가장 낮은 모습으로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통해 우리가 겪어야 할 가난의 저주를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환경의 저주도 함께 못 박은 것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에 대해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라디아서 3:13)”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3:14)."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예수님을 믿는 자녀는 아브라함의 복을 누리는 신분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확실히 믿고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복을 그냥 적당히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후서 9:8).”
우리가 받은 축복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질 수 있도록 넘치게 주셨습니다. 넘치게 부어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그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환경의 축복을 누리는 비법 중에 하나가 바로 '순종' 입니다. 아브라함은 순종을 통해 그 환경의 축복을 누렸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본토 친척인 아비 집을 떠나라고 했을 때, 어딘지도 모르는그곳을 향해 순종함으로 나아갔습니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고대 시대는 부족이 함께 모여 사는 것이 당연하면서도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었습니다. 가족의 개념이 단지 함께 사는 공동체가 아닌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목적지도 모른 채 자신의 생명을 지켜 주는 울타리인 그 가족 공동체를 떠났습니다.
또한 당시 아브라함이 살았던 '우르' 라는 지역은 당대 최고의 도시로 부의 중심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즉시 순종한 것입니다. 게다가 100세에 얻은 자기 목숨보다 귀한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을 때도 역시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이는 결코 쉽지 않은 크나큰 결단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결정적인 순종들을 통해 아브라함은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후손들까지도 거부가 되는 귀한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의 아들 이삭은 가는 곳마다 부의 원천이 되는 우물을 발견하는 축복을 누렸고, 야곱은 그가 하는 모든 일에서 엄청난 재산을 모으는 축복을 얻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재산의 축복뿐 아니라 자손의 축복도 얻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명칭은 아브라함을 통해 예수님이 탄생할 것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 역시 대부분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현재 크리스천들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수세기가 지난 지금도 믿음의 아버지, 믿음의 조상으로 귀한 축복은 없을 것입니다.
불리는 것만큼 이 축복은 과거에 아브라함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말씀에 따라 순종한다면 누구나 받을 수 있습니다. 1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가능해졌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말씀은 우리에게 복을 주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구원 받은 것에 만족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전하고자 하신 축복의 복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신뢰함으로 나아가면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차고 넘치게 축복을 부어 주십니다.
천국과 재림의 복음
우리가 형통의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그때에 비로소 우리에게 천국과 재림의 복이 주어집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영원한 세계에서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음 이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이 시작됩니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주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영원히 새로운 곳입니다. 이러한 곳에 거룩한 성, 즉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데 이 새예루살렘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수도입니다. 새 예루살렘이 얼마나아름다운지 신부가 남편을 위해 단장한 것 같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바로 그 곳에 들어가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곳은밤이 없고 저주와 사망, 고통이 없는 참으로 좋은 곳이며 영원히 새로운 세계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요한계시록 21:1, 2)."
성경에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유일한 부분은 바로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곧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말 신앙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오늘이나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시한부인생을 살게 된다면 누구나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이제 하루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라는 말을 듣는다면 아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호흡을 멈추는 그날까지 예수님을 전할 수 있길 바랍니다. 목숨 바쳐 주님을 사랑하길 원합니다. 있는 힘을 다해주님을 섬기길 기도합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시작입니다. 영원한 시작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의 죽음을 복된 죽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재림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매일의 삶을 내일 예수님이 오시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크리스천들을 보면 마치 예수님이 오시지 않을 것이라 여기는 듯 살아갑니다. 뿐만 아니라 육신의 죽음 후 심판대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에 대해서도 전혀 신경쓰지 않고 세상에 이끌려 다닙니다.
이제부터라도 내일 예수님이 오신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기도와 예배에 목숨을 걸어 모든 순간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러면진짜 재림의 복음이 전해지는 순간, 그 복음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명심해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우리는 삼중 축복과오중 복음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그 축복의 주인공임을 모른 채 살고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며 매 주일 경건하게 예배를드리면서도 주일을 제외한 6일 동안은 마치 예수님이 이 세상에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런 태도는 결코 우리를 삶의 굴레에서 해방시킬 수 없습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예수님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저주를 속량해주셨고, 이제 우리는 그분의 그늘 아래서 평안함과 축복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이전에 가졌던 질병, 가난, 영적 억눌림 등 모든 저주를 그대로 안고 살아갑니다. 저 역시도 성령의 계시를 통해 4차원의 영적 세계를 깨닫기 전까지는 가난하고 병든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4차원의 영적 세계에 대한 비밀을 깨닫는다면 십자가의 구원을 통해 얻은 축복을 누릴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4차원의 영성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사상적 토대를 이루며, 삼중축복과 오중 복음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인정하고 시인하여 삼중 축복과 오중 복음을 누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에게는 4차원의 영성을 통해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 권리가 있습니다. 이제 당신을 4차원의 영적 세계로 초대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놀라운 축복의 비밀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