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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西手稿(乙)
南岡朴君行狀
南岡子旣歿之翌年胤子昌東甫抱家狀泣 且微文於不侫以不侫同閈知南岡子平生甚悉鳴呼蔣詡之逕荒矣 山陽之笛悲矣 不佞雖不嫺文 豈敢辭諸謹按 南岡子名海敏字大裕南岡號也 朴氏昇平望族中祖諱錫命佐命功臣 封平壤君謚忠肅 豊功偉烈著於國乘有諱去疏補社功臣封平原君有諱叔善僉知敦寧府事有諱而溫錄 靖國保社定難勳封昇平郡有不祧典 寔南國子之 十二世祖也 是生諱雲孫副司猛 是生諱大臨副護軍 是生諱文秀進士參奉 是生諱景茂參奉 是生諱元臣縣監 是生諱尙晦副司果 是生諱光三贈參議 是生諱重初贈參判 曾祖諱亮鎭號花隱 祖諱聖漢號存心 堂考諱生鉉妣全州李氏學生顯久女也 以純廟壬辰十一月二十日生 南岡子于柳洞之里第 天性淳厚敦樸甫四歲知內外之別 隨王父居宿於外廊天欲雨 雖半收拾杖屨置之簷內 王父甚奇愛之 不與群兒游戱常 隨長者周族焉察 長者之言談擧止一一入告于內 或値祖與父出外時 客至則應對無遺 客去必問姓名居地 客曰長者姓名何爲問之 對曰待吾祖還當詳告矣 客笑而道姓名 已亥時年八歲王父遘疾瀕危晝宵侍湯 無異成人 翌年庚子 當嚴君之病谹暫不離側 凡利於病者不憚遠近 不避氷雪 必力辦之 不受食飮 則泣而勸之 己亦不食者 屢日略無飢色 每夜虔禱于天至 辛丑竟遭外憂 拚號擗踊曰 我誠孝不足之罪也 三年執喪不違禮制 鄕隣稱嘆曰 雖童幼與老成 奚別 年十四怡飬 王父極其誠敬 子子孤立句幹 家事一有權衡 不失尺寸荊妻婢僕感其德化 咸輸誠款 庚戌七月 王考見背承重哭哀 繼以血淚 盖自童幼祖孫相依 托情冞篤也 送終之制 祭奠之具 少無餘憾 式遵古禮 辛亥荐遭王母喪 一如前喪 丁卯春重建不祧廟于 私第之東 財力躬自營辦 朔望薦芬苾 每當諱辰齊宿 三日不御酒肉 將事之際 戰戰兢兢以致如在之誠 甲戌三月母夫人違背呌叩靡逮 情文備至 平居終日端坐 不脫冠裳待人 接物常款洽 得其懽心 或有非理 來干者 必溫言諄辭 而和解之眞 所謂犯而不校者也 至於犬馬 有不順 底習以正理 曉喩之 人或嘲笑曰 微物安知耶 曰雖微物豈無孚及之理乎 修己以愼獨 二字爲檃括 不喜人之多會處 靜坐如偶 炎熱不披單襟 降寒不御熏爐 喜怒不形於色 雌黃不出於口 盖其德性然也 敎子弟必以義方 別搆亭室擇師 而訓之常以文詞不給 自謙曰 吾早孤子立全家之責 擔着一身 是以來得 專工於經史 悔之曷及 汝輩愼勿放過也 又曰 孝者百行之原 人而不學 則孝弟不立矣 性儉素子侄輩 或持玩好物 必嚴責 痛禁之 丙子大無 出財穀施 及于冷親窮交 及隣里之 貧乏者收 穀用古斗不隨俗 低昻 家居以紫陽夫子 家禮爲終身 要訣常置座隅 出入必帶之 一鄕士友遠近章友 或稱曰 恂恂君子人本 州高監役光國 言窮鄕 操飭之士 無如老兄 果不負前日所聞矣 長城金朴兩雅 歸語其鄕人曰 居喪執禮 吾見南岡子云 徐參判應淳鷺湖門人也 一見知其行操修飭 有薦剡之 意而未果以 今戊子正月十九日卒 壽五十七權厝于 村之後麓乙坐 原配羅州林氏學生魯洙女 參奉命夏曾孫女 淑坨有女士之風 治家以法生于 丁亥卒于 丙戌十月五日 墓板峙左麓子坐 育一男二女 男昌東 女長適士人鄭雲鳳 松江澈後 次適士人林鍾祐 滄溪泳後 皆早均無育側室 一男尙幼昌東娶 竹山安氏幼學命庸女 牛山邦俊後 生三男 皆幼噫 南岡子平生以淳厚之質 有謹飭之行 幼而穎悟 長而篤信 奉養尊祖盡其誠敬 有如此者早離嚴君執其禮制 有如此者零丁孤苦整理家事 有如此者重建不祧執本追遠 有如此者訓迪子弟提撕警覺 有如此者引接賓友傾倒款洽 有如此者待婢僕則寬而禦众也 賑窮乏則義而和財也 見俚俗則犯而不校也 處家道則畵一其規也 至於律己以正治 心以靜一部 紫陽家禮爲自家之單傳 密符則古 所謂一鄕之善士非耶 以若篤實謹厚之行 老於蓽圭湮沒無稱 悲夫撮其梗槪序次 如右以竢夫世之立言君子
季父梅塢公家狀
梅塢公先君之弟也 諱鶴圭字壽卿 生於純祖壬申 卒於哲宗辛酉四月十七日 享年五十 公天稟醇厚悃愊 平居無拂戾 色貌頎 而長窮居養拙 未嘗出門外 愛友隆重 一室同㸑 殆三十年 庭無間言 家貧少失學 然於通史淹貫 今古世之治亂 人之臧否 談論慱 該至於各氏譜 系一一如貫珠 雖老宿莫及不習 一張紙然筆翰甚精 盖天藝然也 擧一解不中 初葬東赤洞 改초於不動坊 勝基乾坐 原配 密陽朴氏 學生 女 生丙子 卒于今上庚寅二月十日 享年七十五 乾位雙封祔左 一子曰錫文 娶海州吳氏 皆早均 擧一男一女 男煥石 女適士人裵
매오공(梅塢公)은 돌아가신 아버님의 동생분이다. 이름은 학규(鶴圭)이고 자는 수경(壽卿)이다. 순조 임신년(1812년)에 태어나 철종 신유년(1861년) 4월 17일에 돌아가셨으며, 향년 오십 세였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순하고 후하며 지성스러웠다. 평소에는 어긋나지 않고 온당했으며, 생김새는 키가 크고 풍채가 당당하였다. 흉년이 길어지면 궁색하여 문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친구를 좋아하여 융숭하게 대접하고 한 방에서 한솥밥 먹기를 거의 삼십 년 동안 했어도 가정에서 이간질하는 말이 없었다. 집이 가난하여 어려서는 배우지 못했지만, 그렇더라도 역사책(通史)을 깊게 통찰하였다. 지금이나 예나 세상이 안정적인지 어지러운지, 사람이 착한지 나쁜지를 주제로 이야기하며 걱정했다. 그해에 각각의 족보를 구슬을 꿰듯 하나하나 이어 묶었다. 비록 나이가 많고 경험이 풍부하고 배우지 못하였지만, 종이 한 장에 써대는 붓놀림이 매우 정교하였으니, 아마도 글 쓰는 재주를 타고나지 않았나 싶었다. 과거 시험에 하나를 풀었지만, 정확히 맞히지는 못했다. 처음에 동적동(무등산 동적골)에 장사를 지내고 나중에 부동방(양림동, 봉선동 지역)에 있는 북서쪽 방향 경치가 빼어난 곳에 묘를 다시 고쳐 썼다. 배필은 밀양박씨 누구의 딸로 병자년(1816년)에 태어나 지금 임금(高宗) 때인 경인년(1890년)에 돌아가셨으며 향년 75세였다. 묘는 북서쪽 방향 왼쪽으로 나란히 쌍봉으로 썼다. 하나 있는 아들은 이름이 석문(錫文)이고 해주 오씨 여자를 아내로 맞았다. 모두 일찍 짝을 골라 일남일녀를 두었는데, 남자아이는 煥石(환석, 환채)이고 여자아이는 배씨 집으로 시집을 보냈다.
與趙靈光秉學書 丁巳春(1854)
昔恵勤游於歐陽子之門 及歐陽子歿 勤歸錢塘 見蘇長公而淚 歐陽子奚哉 盖惠勤受知於歐陽子 猶蘇公之於歐陽子故也 侯嘗游京師 客於柳汀金令公之硏 覃室杯酒 文史常樂如也 語及當世賢豪主人盛稱 閤下之文章司命壓倒 一世於是携功令文字十數篇 獲拜軒屛 自以爲閭巷之付 靑雲爲甚盛事 旣還鄕 主人遞仙於海西 客館千里落落 祗自翹首雪涕 無由得 前日之晤耳 仄聞閤下尹玆比邑有讀書松桂之趣 聊齎一紙 敢爲惠勤之淚 歐陽子於蘇長公之門 伏惟崇亮
옛날 혜근(惠勤) 스님이 구양수(歐陽脩)의 집에서 즐겁게 지냈습니다. 구양수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부지런히 전당(錢塘)으로 돌아와 소동파(蘇東坡)를 보고는 눈물을 흘리었습니다. 구양수에게 왜 그랬을까요? 생각컨대 혜근 스님이 구양수로부터 알아줌을 받았고, 소동파도 구양수로부터 알아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제후가 일찍이 서울에 가서 노닐다
이미 고향으로 돌아와 객사가 천 리 밖에 떨어져 있으니 다만 머리를 쳐들고 눈물을 씻어도 얻는 게 없다는 걸 전날 깨달았을 뿐입니다. 소문으로 우연히 들으니 정승들이 고을마다 소나무와 계수나무 밑에서 책 읽은 취미가 있으니 애오라지 종이 한 장을 가져와 감히 혜근 스님 소동파의 집에서 구양수에게 눈물을 보였던 것을 삼가 생각해 높으신 안목으로 이해합니다.
上蘆沙先生書 甲子冬(1864)
山齋冬寒恐難又淹伏 未知那間還次耶 章一會圍見屈 雖小亦數也伏歎 近於香爐峯下丹砂之洞 一名芝幕爲入山 計買三間屋 子將俟開歲入處而區區綿力 亦是大經營迄 未就緖伏悶 祠堂移安事係愼重 而祝文不載於家禮中 當臨時措語以告 或有曾經搆草者歟 按家禮 凡有主而祭皆先參後降 而至於朔參條 降神在參神前 抑何義耶 乞賜敎下
산속 서재가 추운 겨울이라 두렵고 힘들어 또다시 두문불출하고 있는데, 어제쯤 돌아오실지 모르겠습니다. 문장 하나로 회시(會試)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비록 작으나 또한 운수(運數)라서 탄식만 나옵니다. 향로봉(香爐峯) 밑에 있는 단사(丹砂)의 마을 일명 지막(芝幕) 마을 근처에서 산으로 들어가 세 칸짜리 집이나 살까 합니다. 저는 장차 기다리고 있다가 새로운 해에는 처소에 들어가려고 하나 구차하고 힘도 없고, 또한 이 큰 경영에 미치려고 하나 시작도 못 하고 있으니 몹시 괴롭습니다. 사당(祠堂)을 다른 데로 옮기는 것은 신중한 일인데, 축문이 가례(家禮) 속에 실려 있지 않으니, 마땅히 임시로 말의 뜻을 글자로 억지로 얽어서 고하려는데, 혹시라도 과거 경험상 초안을 잡아놓은 게 있으신지요. 가례를 보면 보통 신주를 제사 지낼 때 모두 먼저 참신(參神)하고 후에 강신(降神)하는데 삭참(朔參) 할 적에는 참신(參神) 전에 강신(降神)해 있는 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문하생이 구걸합니다.
附先生答
菟喪新營似有就緖之漸 亦入耳喜聞也 某來坐新屋 已旬有五日矣 風色連厲 不得開門 瞻望山色 正似入繭蠶可笑 移安措語以告足矣 豈有別樣祝規也 朔參先降似是已有晨謁在前故也 然而不能質言 更攷之如何
은거할 곳을 새로 마련하였으니 차츰 일을 새로 시작할 것이며 또한 기쁜 소식이 귀에 들어올 것이네. 아무 날 새집에 와서 눌러앉을 것이 벌써 열흘하고 오 일이 지났네. 바람의 움직임이 연일 사나워 문조차 열지 못하고 산의 경치만 아득히 바라보고 있으니 참으로 누에고치 속에 들어 있는 것 같아 웃음만 나오네. 사당(祠堂)을 다른 데로 옮기는 일로 말의 뜻을 글자로 억지로 얽어서 고해도 충분한데, 어째서 별도의 축문 규칙의 양식이 있어야 하는가. 삭참(朔參) 때는 강신(降神)을 먼저 하는데, 이는 새벽에 찾아뵙기 전에 이미 찾아와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네. 그러니 딱 들어맞는 말을 해줄 수 없으니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 어떠한가.
答小痴許鍊書 乙丑(1865)
頃便朶雲帶來仙橋 信息重之以瓊扁 敬誦一瓣香 且墨蕉一本得於華子岡 心法儘覺 妙諦眞詮 透到三昧也 古詩云 冷燭無煙綠蠟幹 芳心猶卷怯春寒 一緘書札藏何事 會被東風暗坼看 若得巧千本蓄之小蕉 別館起居 飮食於書香墨色之間 志願畢矣 措大无饜有如是耶 想發一哂也
지난번 편지에 낮게 드리운 구름 띠가 선교(仙橋)로 몰려왔다는데, 소중한 소식을 귀한 글로 공손히 알리시니 향기가 가득합니다. 또 묵자가 화자(華子)의 언덕에서 파초 한 그루로 얻어 마음 쓰는 법을 진실로 깨닫고, 묘한 진리를 진실로 깨달아 삼매경(三昧境)을 훤히 꿰뚫었다 하니, 옛사람의 시(未展芭蕉/錢珝)를 한 수 전합니다.
冷燭無煙綠蠟乾 차갑게 식은 촛불은 연기가 없고 푸른 밀랍은 바짝 마르고,
芳心猶卷怯春寒 차가운 봄이 두려워 속꽃잎 움켜쥐었네.
一緘書札藏何事 꽁꽁 봉한 편지 무슨 사연 담겼나.
會被東風暗坼看 동쪽에서 바람 불어오면 몰래 열어보리니.
만약 교묘하게 천 그루의 작은 파초를 간직하게 되면 별관에서 생활하고 책 향기와 먹물 빛깔 사이에서 식사하는 소원이 이뤄질 것인데, 아무리 청빈해도 이와 같은 걸 물리는 선비가 또 있을까 싶어,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옵니다.
上蘆沙先生書 丙寅九月十六日(1866)
卽接京報則今月初六日 洋夷直犯江都 全城失守 御眞播越 放火放炮 其鋒不可 當 姑未知 其間 賊勢何如 廟算何如 而勤王赴敵 卽今日事也 此邑物情 尙此寥寥 始也活然 終必潰散 而已國事至 此夫何言哉 伏想 未及入聞 故委送金生 玆以替達 餘忽急不備 伏白
방금 서울 소식지를 받아본즉슨 이번 달 육 일에 서양 오랑캐가 강화도를 직접 침범하여 모든 성이 함락해, 임금의 초상화가 궁궐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불을 놓고 포를 쏘아 그 기세를 당해내지 못한다 합니다. 그동안 적의 세력이 어떠하고 조정에서 세우는 계책은 어떠하고, 또한 임금에게 충성해 적에게 내달리는지는 아직 알지 못하는 게 오늘의 사태입니다. 이곳 고을의 물정(物情)은 오히려 이에 조용하기만 합니다. 처음부터 활발히 하면 끝에 가서는 반드시 흩어지게 마련인데, 나라에 이미 일이 벌어지고 말았으니 이 자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엎드려 생각하니 어르신 귀에 아직 들어가지 않은 듯하여, 김생에 맡기어 보냄으로써 이에 대신 전달합니다. 급작스럽다 보니 나머지는 예를 갖추지 못하여 엎드려 사죄합니다.
附先生答
意外得書如獲更對苐海報 今日始聞其的 而所示同時適到 今日則未嘗非 義士投袂之時 而光鄕若寥寥 則失望大矣 心撓 不宣謝 金生想有懷而來 忽忽 未暇細叩 可歎
뜻밖에 편지를 받으니 차례로 벽보를 얻어서 다시 대하는 것 같네. 오늘 그것을 처음 소문으로 듣고 동시에 도달하여 보여 주니, 금일은 아닌 게 아니라 뜻있는 자들이 떨쳐 일어나야 할 시기에 광주 고을에서는 조용하다고 하니 실망감이 커서 마음이 요동치네. 이만 줄이고 답장을 보내네.
김생을 생각하면 홀연히 밀려오는 애틋한 마음이 있어, 세세히 물을 겨를이 없다 보니 탄식만 나오네.
與朴世仲書
空山雪色塊坐 無聊雙玉之來示 以先美文狀擎讀 以還不覺寒後陽春也 思菴先生 當明宣 昌明之辰 講硏大道 扶植正義 卽天地之間氣 邦家之柱石 士林之宗匠 而玉屛靑山 晩節從容 今人有頫昂 景行之思至 若松筠水月之褒 一條淸氷之論 宋人物唐詩調之稱而備矣 今此秩文 今典出於彍代 未遑之餘 非但爲貴門盛擧 寔爲邦家之光 其在謏聞末學 安得不欣喜 而聳躍也 略此書呈以 寓百世下慕庸之忱
빈산에 쌓인 눈을 흙덩이처럼 앉아 보고 있으니, 지루하고 심심해 먼저 아름다운 문서를 공손히 읽고 옥 한 쌍을 가져와 보는 동안 추위 지나고 따뜻한 봄이 찾아온다는 걸 깨닫지 못했습니다. 사암(思菴) 선생은 바로 명종과 선조의 번성하던 시대에 큰 도를 검토하고 연구하여 올바른 도리를 뿌리박게 하였으니 곧 하늘과 땅 사이에 기가 가득 하였습니다. 나라에 중임을 맡은 사람이고, 선비들로부터 존경받은 사람이니, 푸른 산을 옥 병풍으로 삼고 만년에도 절의를 지키어 얼굴과 행동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지금 사람들도 훌륭한 행실을 생각하고 우러러보고, 선조께서는 지조는 소나무와 대나무 같고 정신은 물과 달과 같다고 포상하였습니다. 품성이 깨끗하여 한 조각 맑은 얼음이라 말하고, 송나라 인물에 당나라 시의 풍조라고 일컫는 조건을 모두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이 질서와 형식 그리고 지금의 문헌은 경황이 없던 가운데 시대를 끌어당기며 나왔으며, 비단 훌륭한 일을 해야 귀한 집안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나라에 빛이 될 것입니다. 명성이 부족한 말학(末學)조차 어찌 즐겁고 기쁘지 않을 수 있을 거이며, 반드시 높이 솟구쳐 뛰어오를 겁니다. 약소하지만 이 편지를 보냄으로써 댁이 백 세대 후에도 정성껏 사모하길 바랍니다.
上老石先生書 丁卯(1867)
月前文鰲山回 荐拜下覆 如獲欬謦善美二集 猥蒙校寫之喩 自顧蔑裂恐無以承 當然敎意鼎重不敢違越 謹此繕寫 幷前件還瓻 而雪谷年譜癸丑條都監事下添入 出墓誌三字 松谷年譜辛亥條 公字上依舊 加圈子以 別上下文 感悚錄下叚題與詠 漫漶無別 故每詩下 加一右字 以別之 至於遺詩中 醉樓之樓 鸞鳳之鳳 恐是誤字 神瀵之上似有闕字 係是原藁故 不敢擅改 其他訛誤之 十分無疑者 逐一釐正 若其无依據者付標紙以 呈覽后更攷之 若何然極知僭妄耳 謹次松谷賀醴泉二絶 又題卷尾一語或可鑒照否
달포 전에 문오산(文鰲山)을 돌다 전날 직책에 다시 천거되셨다는 답장을 받으니 좋고 아름다운 문집 두 권을 웃으며 손에 넣는 것 같았습니다. 외람되지만 베끼어 교정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돌아보니 계승하지 못하고 무너뜨릴 것 같아 두렵고, 가르침의 의도가 당연히 중대한데 어찌 감히 어기어 지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조심하여 잘못을 바로잡아 다시 고쳐 베끼고, 더불어 먼저 베낀 것은 되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설곡(雪谷) 선생의 연보에 도감(都監)의 일을 내린 계축년 조에는 出墓誌 석 자를 보태어 넣고, 송곡(松谷) 선생의 연보 신해(辛亥) 조에는 公 자 위의 글자가 옛것과 변함이 없어 어느 범위까지 더하여 문장의 앞과 뒤를 구별하였으며, 감송록(感悚錄) 하단을 쓰고 더불어 읊으려 해도 희미하여 구별할 수 없는 까닭에 매번 시를 써 내릴 적에 右자 하나를 더하여 구별하였습니다. 유작시 중에 따르면 醉樓의 樓와 鸞鳳의 鳳은 아마도 잘못된 글자로 보이며, 신분(神瀵)이 위로 솟았다는 문장에는 빠진 글자가 있지 아닐까 싶은데, 이것은 본래 초안과 관계가 있는 까닭에 감히 멋대로 고칠 수 없었습니다. 기타 그릇되고 잘못된 부분은 근거가 충분하여 조금도 의심할 바가 없게끔 하나하나 바로잡았으며, 만일 근거가 없는 데는 표지를 붙이니, 보내신 문서를 보신 후에 다시 생각해주시기 바라며, 왜 그러한지는 너무나 잘 알기에 분수에 넘치고 망령될 뿐입니다. 삼가 송곡의 하례천(賀醴泉)에 차운하여 절구 두 편을 짓고, 또 책 끝에 한마디 더 쓰는데, 혹시 밝게 비추지 못할까 싶습니다.
-이능섭(李能燮)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공리(公理), 호는 노석(老石)이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10대 종손(宗孫)인 군수(郡守) 이재정(李在政)의 차남이다. 1848년(헌종 14)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여 사간·대사성·이조참의·익릉참봉 등을 역임하였다. 1871년(고종 8) 6월 경주부윤으로 부임하여 조세를 감면해주고 인사를 공정하게 펼쳐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으며, 같은 해 9월 이조참판에 제수되었다.
與韓司馬 惟恆 書
袖來冊子披讀一繙過 斗覺 快活 賦疑策 不但以程文觀極該博 而敦本實至 若檄文一通堂堂 凜烈之氣 欲與秋色爭高 後有蘭臺秉筆者作 當續之 高苔槎 正氣錄矣 謹撰傳若序各一篇寫呈 或可崇亮否 自顧才短識淺 固無足以 發揮徽蹟 恐日後埋沒 故乃敢如是 然僭妄大矣 冊子還瓻耳
소매에 책자를 넣어와 펼쳐 읽었으며, 번역하여 읽기를 한 번 지나치니, 문뜩 깨달아 기분이 쾌활하여 의책(疑策)을 짓고, 그뿐만 아니라 과거 문장을 보듯이 자세히 보니 지극히 해박하여 근본을 도탑게 하고 진실에 이르게 합니다. 격문 한 통 한 통은 당당하고 살을 엘 듯한 추운 기운은 가을 경치와 함께 높이를 다투는 듯하였습니다. 나중에 조정의 사관들이 지은 것이 있어서 마땅히 이어서 하니, 고경명의 정기록(正氣錄)입니다. 삼가 전기를 지어서 차례로 각 한 권씩 베끼어 드리니, 혹 미쁘지 않더라도 소중히 여기어 주십시오. 스스로 돌아보니 재주가 짧고 지식이 미천해 아름다운 행적을 발휘하기에는 부족하여, 아마도 후일에 묻히지 않을까 싶어 감히 이처럼 하였으니, 그리하여 분수도 모르고 건방진 것이 크기에 책자를 돌려보낼 뿐입니다.
上老石先生書
秋序過半伏惟 服中道體太平萬旺 今年黃茂大熟八荒油油 大椀不飥有 大飽之望 生民喜幸 孰大於是 非但自賀爲天下賀也 向拜時 下托弄環堂記 自顧譾劣 宲非 其人耳 數年來 萬事悲凉 硯上之塵盈寸矣 然而先君嘗爲先生 著蕨硯銘 老石記等篇 先生亦爲先君述榮歸序若歌 小子安敢以不文辭 謹具一本繕寫以呈聳 蔡君謨爲歐陽公 書歸田錄序 歐公以銅緣筆 惠泉香餠一篋 爲潤筆資 君謨笑曰 太淸而无華也 今記凡五百七十七字 計一字十金 則約五千七百七十鏹 不下於皇甫湜三千匹絹也 以此將買田歸隱計 惟先生奤之 勿謂皇甫生之太饕 而效歐陽公之太淸也
가을철도 절반이 지나 삼가 생각해보니 상복을 입은 동안 어르신이 태평하고 평안한지 궁금합니다. 올해는 누렇고 무성하게 잘 익어 온 세상이 함치르르하니, 수제비 한 그릇 양껏 먹겠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어, 백성이 기뻐하고 다행스러워, 무엇이 이보다 크다 하겠습니까. 다만 스스로 축하한다고 천하 모두가 축하받을 일은 아닙니다. 절을 올릴 때 농환당(弄環堂) 기록을 부탁하셨는데, 스스로 돌아보니 학문이 얕고 보잘것없어서 진실로 적임자가 이 사람뿐만은 아닐 겁니다. 여러 해가 이어오는 동안 만사가 비참하고 처량하며, 하도 쓰지 않아 벼루 위에 먼지가 한 치 높이로 가득 쌓였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선생을 위하여 일찍이 궐연명(蕨硯銘) 노석기(老石記) 등을 지어서 책으로 내셨고, 선생 또한 돌아가신 아버님을 위하여 영광스러운 귀환(榮歸)의 서문을 노래하듯이 쓰셨는데, 소인이 감히 핑계를 대지 못하고 부족한 점을 고치고 베끼어 삼가 한 권을 마련하여 보냅니다. 채군모(蔡君謨)가 구양수(歐陽脩)를 위하여 귀전록(歸田錄) 서문을 썼는데, 구양수가 글을 써준 비용으로 동연(銅緣)의 붓과 혜천(惠泉)의 향기로운 떡 한 상자를 줬습니다. 채군모가 웃으며 “무척 청결하지만 화려하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오늘 거의 오백칠십칠 자를 썼으니까, 계산할 경우 한 글자당 십 금으로 치면 약 오천칠백칠십 금이 됩니다. 장차 밭을 사서 돌아가려고 몰래 계획을 세운 황보식(皇甫湜)의 비단 삼천 필보다는 적지 않습니다. 선생의 큰 얼굴을 생각하니 皇甫生의 커다란 욕심이라고는 말할 수 없고 구양수의 커다란 청렴을 본받았다 할 수 있을 겁니다.
-황보식(皇甫湜) : 당나라 목주(睦州) 신안(新安, 지금의 浙江省 淳安縣) 사람. 자는 지정(持正)이다. 헌종(憲宗) 원화(元和) 원년(806) 진사가 되었다. 일찍이 육혼위(陸渾尉)를 지냈고, 관직은 공부낭중(工部郞中)까지 올랐다. 원래 문집이 있었지만 없어졌다. 송나라 때 펴낸 『황보지정문집(皇甫持正文集)』이 현전하고 있다. 『전당시(全唐詩)』에 시 3수가 실려 있다. 일찍이 한유(韓愈)에게 고문(古文)을 배웠고, 이고(李翶), 장적(張籍)과 이름을 나란히 했다. 한문대제자(韓門大弟子)의 한 사람이다. 문장은 기벽험오(奇僻險奧)했다고 한다.
與左溟宋甸書 癸未(1883)
客冬南還也 爲槐淸安榮掃訪 取路由龍仁 未得歷造門屛 悵甚 每莊誦瑞石山人記 若拱弘壁 而聞景鍾 顧此譾劣何以得 此聲於湖海之間哉 況自出泥塗 好作花之句 想象 今日光景 而小蕉未佳以瑞石爲号 則必大捷云者 何其先見之知 燭照而數計也 節節欽誦謝不容已 榮歸之路 帶一奴芒鞋竹杖 行裝簡率及入境 門徒百餘人率樂 衛倡 迎候 二十里 風流太侈 觀下回岸 錄想發大噱也 左溟居士集序 謹此撰呈 烏足以 摹寫淸德之萬一也哉 大巫之前 敢此露醜 太涉唐突耳 伏詢新元 道體康旺太平 石下生 歸臥竹屋 依舊一布衣 而已餘無足煩云 統希崇照
지난겨울 남쪽으로 돌아오다가 괴산군(槐山) 청안에 있는 조상 묘소에 인사할 목적으로 방문하려고 용인에서 길을 확보해 걷다가, 찾아가 뵙지 못한 게 몹시 원망스러워 매일 서석(瑞石) 산인의 기록을 암송하였는데 넓은 벽을 껴안은 듯하고 큰 종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였습니다. 나를 돌아보니 재주가 얕고 보잘것없는데 무슨 까닭으로 얻었나 모르겠습니다. 이 소리는 세상에서 들릴 것인데, 하물며 진흙탕에서 나는 소리겠습니까. 꽃으로 시구 짓는 걸 좋아하여 오늘 벌어진 일을 생각하니, 작은 파초가 예쁘지 않아도 서석이라 불리기에 반드시 크게 이긴다고 말씀하셨는데, 얼마나 미리 알아보는 지혜인지 촛불에 훤히 비춰보고 일일이 헤아려본 듯합니다. 한마디 한마디를 기쁜 마음으로 외워서 사례하여도 그만둘 수 없습니다. 영광스러운 귀향의 길에 머슴 하나 데리고 짚신 신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행장을 간솔하게 꾸려서 고을 경계에 들어서니 제자 백여 명이 악대를 거느리고 광대를 꾸려서 이십 리를 마중 나와 풍류가 몹시 사치스러워, 내려다보니 회안록(回岸錄)이 떠올라 크게 웃었습니다. 좌명 거사의 시집의 서문을 삼가 이를 지어서 드리니 까마귀 발로 청렴하고 고결한 덕행을 만 분에 일이라도 흉내 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까. 큰 무당 앞에서 선무당이 감히 이를 드러내어 모욕하는 것이니 너무나 버릇없고 주제넘을 짓일 뿐입니다. 엎드려 정월 초하룻날 어르신 몸이 건강하고 태평하신지 묻습니다. 소생 석서는 대나무 집으로 돌아와 한가로이 지내며 변함없이 벼슬 없는 한갓 선비에 불과하니, 나머지는 번거로움이 없더라도 잘 살펴주길 간절히 바랍니다.
附左溟答書
左及華翰 光氣炳 兼鄭重甸 乃起拜曰 是不惟半千里 隔歲顔面如對也 想去年榜掛 天門名騰上舍足以 不負窮幾年積勤勞 而及還故山 門徒左右之 笙管前後之 當此時老成詞客 將與彼瑞石丂峯奇氣竝尊 雖在遠 人不覺 後於人一賀也 左溟記窃欲仰請 而得此大文字 可謂意愜 左溟云者 凡我人在浡澥 左者可以當其地方而甸 本意不過 欲不忘 其父母邦也 乃此大筆若於其活蕩汪濊 萬斛緇塵不敢混 其一隅壯哉 斯文也 然以薄質曼辭 過蒙獎勵 慚慚愧愧 待拙藁繕寫之日 以所賜弁之爲第一 是所預圖也 屬覩輪行公牒 國家將復選博學行修者 策試如往年 然則以高明才行被此選 赴此科因以 登龍門 附鳳翼必矣 幸復見過穩敍乎否 今門徒二司馬 以榮南歸 其行果蛻然矣 皆可卜 萬里前程 爲其師者得不 又大喜拔例也 竝區區攢攢賀
좌명에게 편지가 이르자 빛 기운이 무척 밝고, 아울러 정중전(鄭重甸) 이내 일어나 절을 하고는 말하길 “이는 오백 리도 안 되는데 해를 넘겨서야 얼굴을 대하는 것 같습니다.”라 했네. 지난해 과거 시험이 끝나고 방이 걸린 걸 생각하니, 형편이 어려웠던 몇 년 동안 힘들게 노력하여 쌓기를 저버리지 않았으니 대궐에 진사로 이름을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이 좌우로 서고 생황과 피리를 앞뒤에서 불기에 충분하네. 이제 사객(詞客)이 나이 들어 뜻을 이뤘으니 장차 저 서석산의 교묘한 봉우리의 기이한 기운과 아울러 존중받을 것이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 사람들이 알지 못하다가 나중에 알고 사람들이 하나같이 축하하네. 좌명 우러러 청하여 기억하기를 바라여, 이렇게 큰 문장을 얻었으니, 한마디로 말해 좌명이라고 말하는 것에 생각이 흡족하네. 무릇 나 자신이 발해에 있지만 좌명이라는 자는 그 지방에서는 당해낼 수 있을 것이네. 경기 지역은 본래 의도가 그 부모의 나라를 잊지 않기를 바라는 것에 불과하니, 이에 이 커다란 붓이 그 모든 걸 휩쓸어버릴 정도로 흐름이 세차고 넓고도 아득하니, 장하구나, 만 휘의 지저분한 티끌조차 그 한쪽 모퉁이를 감히 흐려드리지 못하는구나. 선비가 천박한 자질에 능숙한 말씨로 지나치게 장려하였으니 몹시 부끄럽고 부끄럽네. 졸렬한 원고를 고치어 베끼는 날을 기다렸다가 빨리 내려주는 것이 제일이므로 이를 미리 그려보는바, 수레를 끌고 가는 공첩(公牒) 보니 나라에서 지식이 많고 행실이 착한 자를 다시 뽑은 책시(策試)가 지난해와 같았던데, 그렇다면 고명재(高明才)가 이번에 선발되어 갔으면 이번 과거에서 봉황의 날개를 달고 반드시 등용문에 오르는 결과를 알려왔을 것인데, 다행히 평온하게 이야기 나누며 지나가는 걸 다시 보게 되지 않았는가. 이번에 제자 중에 두 명의 진사가 영광스럽게 남쪽으로 돌아오니, 그 행위는 허물을 벗는 결과로 이어져, 앞길이 구만리 같은 젊은 제자들이 그 스승이 못한 걸 해내리라고 모두가 점칠 수 있으며, 또 전례 없이 매우 기쁘고, 아울러 구구한 마음에 두 손 모아 축하하네.
與百愚小松兩司馬書 甲申(1884)
一經仙庄 便是烏石靈源 去人世不遠 和晷淵永 繙閱有趣想 採剝華宲 咀嚼膏味無有餘瀝 蕉生歸臥花山弊屋 可謂一佛出世二佛涅般 境界也 安能解脫結馽而 此身於川上樓 盡讀未見之書 而拾其遺棄 此坡老之夙願 而未得者也 幸日峯與我有素 他日過之 不爲生面客耳 謹次書樓前韻十二魚以寓 戀結之思 必發一哂也 花樹 詩卷小序 向者倉卒 有未穩處 略加增刪覽后 覆瓿焉 夢翠詞伯 近看何書 而采得幾斛瓊琚耶 堂記胡艸以呈 所謂 夢中說夢 何足掛眼 原韻忘未記得如有便 或可提醒 否寒暄例也 不敢贅
久友所獲 斯過半矣 今夏蓄銳竢時以發前頭嶺 可一蹴飛登是祝
일단 신선이 사는 집으로는 오석(烏石)과 영원(靈源)이 있으며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멀지 않으며 햇빛이 온화하고 깊고 영원하다고 합니다. 상상하는 취미가 있어서 되풀이하여 찾아보니, 꽃과 열매를 채취하고, 기름진 맛을 씹으며, 마시고 남긴 술이 있든 없든 파초가 자라면 꽃 핀 산속 집으로 돌아와 누운다 하니, 과연 죽다 살아난 경지인데, 어찌 해탈을 묶어 맬 수 있겠습니까. 이 몸이 시냇물 위 누각에서 아직 보지 못한 책을 다 읽고, 그곳에 버려진 것들을 주워서 보충하는 것, 이는 소동파 노인의 일찍이 바라던 것인데, 아직 이루지 못한 자입니다. 다행히 일봉(日峯)께서 나와 함께
아는 사이라서 다른 날 지나더라도 낯선 손님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전에 서루(書樓)에서 쓰신 시 十二魚에 차운하여 부치니,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생각에 반드시 한바탕 웃으실 겁니다. 시집 화수(花樹)의 짧은 서문이 접때에는 급작스럽게 쓰다 보니 온당하지 못한 곳이 있으니 대충 삭제하고 고친 부분만 보신 후에 장독대나 덮으십시오. 몽취(夢翠) 이국용 어르신께서 최근에 어느 책을 보시고 몇 휘의 패옥을 캐어 얻었다고 합니다. 댁의 기록을 어지러운 글씨로 드리니 그야말로 꿈속에서 꿈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무슨 말 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어 볼만한 게 무엇이 있을까 싶습니까. 본래 운을 까먹고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편리한 점이 있으나, 혹 다시 깨우치더라도 안부를 묻지 않는 게 보통 있는 일이라서 감히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옛 친구를 반 넘게 얻었으니, 올여름에는 날카롭고 굳센 기운이 모일 때를 기다렸다가 발휘하여 눈앞에 있는 산 정상에 한 번에 박차고 날아오를 수 있기를 빌겠습니다.
附小松答
共君一夜話 勝讀十年書 正曩也相逢峕氣象也 即於便風惠以十二魚 魚魚之樂 奚讓濠上觀也 然而子非魚而亦知魚使魚 而有知不近於杜陵之愁 鳥乎且羨且呵 花樹會序 若詩體裁 調格逼 到眞境 若非舞文之巨手 能如是乎 但奘許太過 是爲發騂 夢翠堂記以 夢不覺(說夢) 呌奇做夢奇事也 說夢奇文也 世有工畵者圖得 則可作三奇圖 而其於無工何
그대와 나눈 하룻밤 대화가 십 년 동안 읽은 책보다 낫습니다. 진실로 접때 서로 만났을 때 날씨가 순풍이 부는 덕분에 十二魚를 지을 수 있었는데, 물고기들의 즐거움이 어찌 호수(濠水)의 다리에서 바라보는 것만 못하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대는 물고기가 아니어도 물고기를 알고 물고기를 부릴 수 있으며, 두릉(杜陵)에서 가깝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니 시름겨워 새들이 또 부러워하고 또 껄껄 웃을 겁니다. 화수(花樹) 시 모임의 서문은 만약 시의 격식을 마름질하고 가락과 격식을 다그치면 참다운 경지에 이를 것인데, 만약 솜씨 좋은 자가 교묘하게 문장을 뜯어고치지 않고서야 이럴 수 있겠습니까. 다만 너무나 지나치게 크게 기대하다 보니 이것이 얼굴을 붉게 만들고,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몽취 어른의 댁을 기록하였는데, 비명을 지르며 꿈을 꾸는 건 기이한 일이라서, 꿈을 이야기한 기이한 글을 세상에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세 개의 기이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텐데, 거기에 화공이 없으니 어떻게 그리겠습니까.
答蒼史兪益卿書 名鎭贊
昨夜瑞石山雪梅道士入夢 必有故人好信息來 果然一椷朶雲落 自海天廼蒼史心畫也 傾倒欣瀉如更得碧浪館夜話時淸範 矧審震艮愉侍萬穆衙候泰平 鄕信承安者乎益驗 疇昔夜梅花喜神先爲之兆朕也 但滯祟似是緣詩苦癖 古人云 若索天應㦖 狂搜海 亦枯 萬斛瓊琚 貯在胸鬲間 未盡吐露作 此美疚也 詩法與煎丹栶似初以活火煎 次慢火緩緩煎 自然爛熟透到了 妙諦玄關 此是詩家養丹頭 法敬爲座右誦之 可謂一貼藥打疊 蒼史第試之如何 石西生竹屋呵寒 正似入繭蚕 日日所得惟飯一盂 睡一局 而己慢夜消遣 無物何不以梅下好句示及 此寂寞之濱 破却牢愁乎 奉呵呵 來初大擬握展以續前緣要 在臘梅未盡之前耳 餘非泓穎可旣不備
지난밤 서석산 설매(雪梅) 도사가 꿈에 들어와, 필시 벗한테서 좋은 소식이 올 것 같더니만, 과연 밀봉한 편지 한 통이 떨어지니, 바다 같은 하늘에서 옮겨온 창사의 마음의 그림이네. 기쁜 마음이 숨김없이 그대로 드러나 있으니 벽랑관(碧浪館)에서 밤에 이야기 나눌 당시의 맑고 깨끗한 본보기를 다시 갖는 것 같네. 더구나 안부를 물으니 기쁘게 모시고 모두가 화목하고, 관아 안부를 물으니 태평하다고 하고, 고향의 소식을 받으니 평안하게 여기는 것을 한층 더 확인하였네. 지난밤 매화는 기쁘게 신선이 먼저 조짐을 보인 것이네. 다만 소화가 잘 안 되는 것은 시를 괴롭게 읊는 버릇과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옛사람들이 말하네. 만약 하늘에서 찾더라도 불쌍히 여길 것이고 미친 듯이 바다에서 찾아도 또한 말라 없어질 것이니, 만 휘의 옥을 가슴 사이에 저장해두고 미진한 점을 죄다 드러내 지는데, 이것이 좋은 고질병이네. 시 지는 방법과 더불어 단인(丹栶) 달이는 것과 흡사하여 처음에는 센 불로 달이고 다음에는 약한 불로 느긋이 달이면 자연스레 충분히 성숙하여 잘 꿰뚫으니, 묘한 진리가 통하는 깊은 관문으로 이것이 바로 시인들이 다스리는 단두법(丹頭法)으로 가까이에 두고 외우며 정신을 집중시킨다 하니, 과연 한 첩의 약으로 병을 떨치고 일어날 것이므로, 창사가 시험해보는 것이 어떠한가. 석서는 대숲 속 집에서 추위에 손을 호호 불고 살고 있으니, 진실로 누에 번데기에 들어가 있는 것 같네. 날마다 소득이라고는 오직 밥 한 그릇뿐이고, 졸리면 한판 바둑을 두고 내가 게을러 밤을 보내도 없는 게 없으니, 어찌 매화나무 아래에서 좋은 시구를 볼 수 있겠는가. 이곳 한적하고 조용한 물가가 걱정거리를 산산이 깨부수어 사라지게 하네. 하하! 다음 달 초에는 크게 헤아려 움켜쥐었다가 펼침으로써 전생의 연을 잇는 게 필요한데, 섣달 매화가 다 피기 전에 있을 뿐이네. 나머지는 벼루와 붓으로는 다 말할 수 없으니 이만 줄이네.
答兪益卿書
裁緘未發 惠訊適到 可謂針芥相投也 備審衙體候患痁大損 雖屬過境 驚慮萬萬 省餘棣度 矧翔奏慶 仰荷且誦 綠陰緗簾 塤箎遞和 消受良方 孰大於是 賈碑棣棠韓家桐木 此佛氏所云 見在好因緣爲之健羨 惠箑及 此洪爐中病暍客 雖南海寶陀落迦山 救苦救難 大慈大悲觀世音 以琉璃甁中 楊柳枝灑下 幾点甘露水 亦何以加此也 七絶五首以寓感篆算 想發一哂也 石西生現相一如前書時 何必贅爲 但杇木之誠同印一版耳
겨우 봉투에 담고 발송하지 못하다가 그대의 편지가 마침맞게 도착하니, 그야말로 바늘을 던져 겨자씨를 맞췄다 할 만하네. 관아 동정을 살피고 그대가 학질을 앓았다 하니 커다란 손질이네. 비록 지난 일이기는 하나 놀랍고 걱정이 많네. 부모님을 모시어 살피는 형제들은 잘 있는가. 하물며 삼가 경사스러운 일을 아뢰고 푸른 나무 그늘과 비단 주렴 속에서 형제가 훈 나발과 저를 불며 화기애애하고 좋은 처방을 누리길 우러러 송축하니 어느 것이 이보다 크겠는가. 가비(賈碑)의 산앵두나무와 한가(韓家)의 오동나무 이는 부처가 전하는 바인데, 지금은 좋은 인연으로 부채를 베푸니 몹시 부러워하네. 이는 붉은 화로 속 소갈증 손님에게 비록 고난에 빠진 사람을 구한다는 인도 남쪽 해안가에 있는 보타가락산(寶陀落迦山)의 큰 자비의 관세음보살이 유리병 속에 담아서 버드나무 가지에 감로수(甘露水) 몇 점을 뿌리지만, 또 여기에 뭘 더하겠는가. 칠언절구 다섯 수로 마음에 篆字로 새겨 부치니 한바탕 웃었을 것으로 생각되네. 석서의 현재 형상은 전에 편지를 보냈을 때와 똑같이 살고 있으니 하필 군더더기가 되고 말았네. 다만 썩은 나무의 순수한 마음으로 똑같이 새겨진 하나의 판본일 뿐이네.
答益卿書 丁亥(1887) 九月 初三日
千里訊緘 甚風吹來 一猶感篆 況二之乎 渭北春樹江東暮雲 雖隔萬千重 靈犀所照 洞澈無碍 若尺地源源 信乎 吾人心事 不以山川而間之也 閏夏一候竟屬喬患 我思蒼史 不若蒼史之思我也 遠矣備審楓菊佳辰 省體萬護 春府大人 工議恩除 何等感祝 而緋玉歸田捨 劇就閒暯景頤養 孰大於是 仲氏丈 尙帶閣啣 淸望所歸眷毗隆重攢賀 愈久愈切 但美愼尙此彌留安得 藥王藥師五百梵天 嘗此娑婆界上 草木精華以琉璃甁貯甘露水一服 即己出 苦海登樂岸也 頂祝祝 若石漢者南歸以後 襄杇曰 甚頓無佳況 所從游皆野堅溪傖耳 煥侄稍充健與曩者 冠山時 若別樣入 甚幸幸 今年南土旱暵無異丙癸 惟幸 十五金繭栗肥大而如虎五十金 膏腴蕃茂 而獲秋 隣人目之以 富家翁 大呵大呵 搬移固所願 從而不得 荷此申複茅 當另圖矣
천 리에서 편지를 봉함에 바람이 몹시 불어오니, 그러한 변이 한 번만 있어도 마음에 새겨져 잊히지 않는데, 더구나 두 번이나 있지 뭔가. 위북(渭北)에는 봄날의 나무 싱그럽고 강동(江東)에는 저녁 구름 깔려있겠지. 비록 천만 겹이 막혀 있어도 영묘한 무소의 뿔이 비치는바 훤히 통하여 걸림이 없고, 얼마 안 되는 좁은 땅에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는 것이 우리네 마음의 일이라서 산천도 사이를 벌리지는 못하네. 윤달 여름 일후(一候)에 큰 병이 득에 달해, 내가 창사를 생각하는 것이 창사가 나를 생각하는 것만 못하지 싶네. 먼 데서 온 편지를 자세히 살피니 단풍이 들고 국화가 피는 좋은 날에 성체(省體) 만 가지 호위를 받아 아버님께서 공조참의(工曹參議)로 임금의 은혜로 벼슬을 받으니 얼마나 경사스럽고 축하할 일인가. 그리고 당상관 관복을 입고 시골집으로 돌아가 재빨리 한가함으로 나아가 마음을 가다듬어 고요히 마음을 수양하니 무엇이 이보다 더 클 수 있겠는가. 둘째 형님은 여전히 규장각 직함으로 높은 명망을 받으니 돌보고 도와주어 장중히 두 손 모아 축하할 일이 있기를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간절하네. 다만 병환이 오래되었다 하니 이 오랫동안 낫지 않는 병을 어찌하겠는가. 약사여래와 오 백의 범천께서 일찍이 이 인간의 세상에 초목을 정화하시어 유리병에 담은 감로수를 한 모금 마시니 곧 몸에서 빠져가 고통의 바다를 건너 즐거운 피안의 세계에 이르기를 이마를 땅에 대고 비네. 돌같이 둔한 자가 남쪽으로 돌아온 이후에 양오(襄杇)가 말했네. “좋은 일이 아예 없으니 따라가 노닐 곳이 모두 들판은 딱딱하고 시냇물은 어지러울 뿐이네.” 환진 조카는 접때 관산에 있을 때와 같이 특별히 다른 게 들어와 조금씩 충만하고 건강하니 참으로 다행이네. 올해 남쪽 땅이 가물어 병계와 다름이 없네. 다만 다행인 것은 십오 금의 갓 나은 송아지가 호랑이만큼 커져 오십 금이 되고, 기름지고 무성해져 늦가을에는 이웃 사람 눈에 부잣집 늙은이로 보여 크게 웃을 것이네. 살림살이를 옮기는 것이 진실로 바라는 바라서 계속해서 이를 거듭 띳집 이야기를 하였음에도 얻지 못하는 것은 마땅한 특별한 조치이네.
又 同月十參日
前緘失便未發菀菀欲生病 今日山居取畵梅幛雙幅揭之壁上 詩草帖一卷展之案頭 皆冠山時惠墨也 千吟百玩 未能定情 忽一函墜 手濯盥以讀 迺吾蒼史上舍 苐三度心畫也 湖海 鯫生何以得 此厚眷於千里之外 若交手相符 雖化雙翼迅捷 詎能及此 節節欽誦向來 此時一念根能及山野 累之句 可謂萬萬非情責也 若石西者 情誼俴薄 閏夏書竟歸浮 況初三書 又致濡滯 孤負實多 內顧發騂 謹審菊凉體度 勞撼餘萬相 春府大人 洛駕不至大損 仲氏丈 綾體隻直 無撓 伏荷叶禱所愼漸奏藥慶 何等欣釋 益加調護 函復天和 晝宵顒祝祝 屢試沒味 已屬過境 不必追提 而日次 即科第之終南 捷徑也 須大着力 大擔負 以圖大捷 申望望 官材李直赴之 今番大闡 何其壯也 何其勇也 可謂大者百餘戰 小者數十合 遠外承聞 猶不勝栢悅 況親妹至情間耶 石西生一如前書時 樣子扝汚散甚矣 侄兒 無恙做去 方議娶婦耳 搬移謹當另圖 而身老 路且遠 可奈何 置數間屋子於 黃石義林之間 與之源源朝夕 則志願畢矣 明春正念間 擬作西笑計 伊時在洛 欣握預切企祝耳
앞에 봉한 편지가 인편(人便)을 상실하여 아직 보내지 않아 무성하여 병에 들려고 하네. 오늘 산속에 살면서 포백(布帛)에다 두 폭의 매화를 그려 벽 위에 걸었네. 시 초첩(草帖) 한 권을 책상 가장자리에 펴놓으니 모두 관산에 있을 때 썼던 글이네. 시를 천 번이나 읊고 백 번이나 가지고 놀아도 애정을 쏟을 수 없는데, 갑자기 한 통의 편지가 떨어지니 손을 씻고 읽네. 이에 나와 창사 진사의 세 번째 마음의 그림이네. 호수와 바다를 변변찮은 내가 어찌 얻겠나. 천 리 밖으로부터 이렇게 두터운 보살핌을 받으니 양손을 마주 쥐듯이 꼭 맞네. 비록 양 날개로 변해 재빨리 가더라도 어찌 이곳에 닿을 수 있겠나. 한마디 한마디를 경건히 암송하고 돌아오니, 이때 하나의 생각이 산과 들판에 얽매이는 글귀에 능히 미치니 너무나도 정이 없음을 책할 만하네. 만약 석서라는 자가 서로 사귀어 친해진 정이 얇아서 윤달 여름에 쓴 편지가 끝내 떠돌다 돌아왔는데, 더욱이 처음에 세 번이나 편지를 보내고 또 오래 지체하는 것은 기대를 저버린 것이 실로 많아 머리를 돌려 되돌아보니 얼굴이 붉어지네. 삼가 살피니 국화가 피고 선선해지니 육체는 수고로운 나머지에도 평안하네. 아버님께서는 서울에 가셨는데 아직 이르지 않으셨다니 큰 손해이네. 둘째 형님은 협력해 기도에 힘입어 무사히 비단 옷을 조금도 기쁘고 후련하지 않으니, 더욱더 몸을 보살피고 보호하여 하늘과 화합하여 편지로 화답하길 낮이나 밤이나 엄숙히 기원하고 기원하네. 여러 차례 응시하는 것은 취미가 전혀 없고 이미 지나간 일이니 추가로 제기할 필요가 없으며, 날짜의 순서로는 곧 과거 시험이 종남(終南)에 이르는 지름길이니, 마땅히 크게 힘쓰고 크게 짊어지어 크게 이기기를 바라고 또 바라네. 관료의 재목인 이 직부(直赴)가 이번에 문과에 급제하니 어찌 그리도 대장부이고 어찌 그리 용감한가. 그야말로 많은 자는 백여 전투요 적은 자는 수십 번 전투를 겪었다 할 수 있으니, 먼 밖에서 소식을 들으니 오히려 기쁨을 이기지 못하겠네. 하물며 친누이는 아주 가까운 친척 사이가 아닌가. 석서의 삶은 전에 편지를 보냈을 때와 매한가지고, 얼굴 생김새는 흩어져 심해지고 있네. 조카 아이가 건강해지고 있으니 바야흐로 장가드는 걸 논의했을 뿐이네. 이사하는 것도 삼가 따로 계획해야 하고, 몸은 늙고 길은 또 멀기만 하니 어찌해야 하는가. 황석(黃石)과 의림(義林) 사이에 방 여러 칸짜리 집을 두어 아침저녁 끊이지 않고 만날 수만 있다면 원이 없겠네. 내년 춘정월 20일 전후에 서쪽을 웃게 할 계획을 거짓으로 꾸미어, 서울에 있는 그때 기쁘게 손을 잡고 미리 간절히 축하하는 뜻을 표할 뿐이네.
答兪直赴 益卿 書 戊子(1888) 四月 四日
前緘未發 即日拜承 去月二十六出 寵函皮面見 直赴二字 心目大開 始焉驚瞠 終焉靡亂 纔定神魂 使煥侄洗糊 坼開則 乃二十三 應製大科榜也 不勝欣聳 即欲蹲匸起舞 恨未得少甾 一月於吾身親見榜喜也 今日即放榜 左持白 右執紅 頭擔恩花 騶徒喝道曰 好好想見十字 街上鬪飣 幾匙飯 捉得幾級蟹 二十司馬 二十三屠龍 未知於古有此好風流耶 且況春府令監 自聞此報 必慶喜曰 第三即能辦 此大擧促駕 而已次洛矣 其爲供歡 孰大於是 健羨例語也 攢賀套句也 即欲舊飛 而無翼奈何匸 石西生一如前書時持 此好信誇張於樵牧耕釣之伴曰 吾蒼史司馬大詞伯 已大闡稱們愼勿輕我也 大呵大呵 友蘭方作洛行 玆付數字 替賀 餘非楮生所可旣 倲不備
전에 봉한 편지를 발송하지 못하다가 당일 보내네. 지난달 이십육 일 나가서 편지 겉면의 直赴 두 글자를 보니 눈과 마음이 크게 열리어 처음에는 놀라서 휘둥그레지고 마지막에는 어지러워 쓰러졌네. 겨우 정신을 차리고 환진 조카에게 시키어 뜯어서 열어보니 세 이내 이십삼 일 임시로 치른 과거에서 급제하니, 솟구치는 기쁨을 어찌하지 못하여 주저앉고 싶어도 일어나 춤을 추네. 아직 적은 재앙도 받지 못한 것이 한이어서, 일월부터 내가 친히 기쁘게 방문(榜文)을 보아왔네. 오늘 과거 합격증을 받았으니 왼쪽에는 하얀 깃발을 들고, 오른쪽에는 붉은 깃발을 잡고, 머리에는 어사화를 꽂고 말 몰이꾼이 비키라고 소리를 지르며 말하길 “열 자를 미루어 생각하니 너무나 좋구나.” 길거리 위에서 음식을 담으려고 다투어봐야 몇 숟가락을 먹고 몇 등급의 게를 잡을 수 있겠는가. 진사가 스무 명이고 세상에 쓰이지 않은 재주꾼 스물세 명이니, 예전에도 이런 좋은 풍류가 있었는지 모르겠네. 또 더구나 아버님 영감께서 이 소식을 듣고 반드시 경사스럽게 여기어 기뻐하고 말하길 “세 번째로 능히 마련하여 나아갔으니 이에 모두가 행차를 재촉하여 서울에 올라가 기쁨을 제공하는 것이 이보다 어찌 클 수 있겠나.” 했을 것이네. 의례적인 말이나 전하려니 매우 부끄럽고 두 손 모아 축하 인사말을 전하러 곧 떨치고 날아가고 싶으나 날개가 없으니 어찌 감추겠는가. 석서는 전에 편지를 보냈을 때와 똑같이 살고 있네. 이러한 좋은 조식에 함께 나무하고 소 키우고 밭 갈고 물고기 잡는 자가 과장하여 말하길 나와 창사 진사 대사백(大詞伯)이 이미 문과에 급제하였으니 우리가 진실로 나를 가벼이 할 수 없다 하여 크게 웃었네. 우란(友蘭)이 바야흐로 서울에 가려고 하니 이에 몇 자 보내어 축하를 대체하려 하네. 나머지는 종이가 이미 다하여 준비하지 못했네.
與李延豊 志容 書
百里恩除仰想感祝 鳳涯 士君子 讀書 林樊砲砲 窮年 未盡底蘊 今可以略試矣 況玆邑山水名鄕 優有松桂之趣 尤庸攢賀無巳 伏詢 霜令 篆體毖寧 美赴的在那間 斤運無甚貽惱 昻溸且祝 不容頂頂 石西生病與年深 又頹唐而大無 人情仳離相續 安得大慈大悲 蓮花寶筏普濟 此苦海衆生耶 友洞諸賢 示以壽筵 元韻搆 和以呈 荒拙甚矣 哂覽如何 夢翠 詞伯 近作何忕堂韻搆置 已久無便可付 幷此寫呈 惑可津致否
백 리나 떨어진 곳에서 임금의 명으로 벼슬을 받으니 우러러 감축드립니다. 봉애(鳳涯) 사대부께서 책을 읽으실 때 숲에서 대포 소리가 들리고 흉년이 들어 포부를 다하지 못하다가 이제야 대략 포부를 시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물며 이곳 고을은 산수가 유명한 향토로 소나무와 계수나무의 정취(情趣)가 넉넉히 있으니 더욱더 애써 두 손 모아 끝없이 축하드립니다. 엎드려 묻습니다. 서리 내리는 계절에 직무를 돌보시느라 몸은 삼가 안녕 하시는지요. 좋은 자리로 부임은 언제 하시는지요. 도끼를 휘둘러도 심하게 폐를 끼친 건 없습니다. 우러러 그리워하며 또 축하합니다. 정상에 오르지 못하는 석서는 병이 나고 더불어 나이가 많고 또 쇠퇴하여 무너져 무척이나 허무합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헤어져 흩어져 있어도 서로 이어져 있으니 끝없는 큰 자비를 어디에서 얻겠습니까. 불성(佛性)과 법성(法性)으로 보배로운 배를 타고 널리 구제하여야 하니, 이것이 고통의 바다에 빠진 중생이 아니겠습니까. 우동제현(友洞諸賢)들께서 생일잔치를 보시고 원운(元韻)을 지으시어 화답하여 시를 보내다 보니 거칠고 서툴기가 심하더라도 웃으며 봐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몽취(夢翠) 이국용(李國容) 어르신께서 최근에 하태당(何忕堂)에 차운하여 지어 놓으니 이미 오랫동안 부치지 못하다가 아울러 이것을 베껴서 드리니 혹시 바로 도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答兪記注 益卿 書
洛陽千里一書 猶難況 堤之於洛路 且左 殆三百里乎 昨自龍洲縣芝谷回有一華翰墜丌 忙手濯開 迺蒼史大人心畫 重之 以瓊律 滿心慰浣 不下於 披香閣中對榻聯衾也 信後月 政伏詢 臘暄 仕體陔 鬯覃衛曼 慶美崇良 復理咏有趣 仰溸 且禱頂頂 春府大人再蒙院啣 杞軒明公 重帶閣銜 何等感祝 石西生依劣 而以侄婚利成 婦節賢淑爲幸 但荒年不飥一飽未易 其奈統忠何 雅什和呈 亦不拘時律體 壽陵學步 不幾於 喪眞乎 近日所得若干篇 竝此寫呈覽 此足可驗石漢 漫興不以荒歉 而自退然不救飢 大呵呵
서울 천 리 길이라서 편지 한 통 받기가 서울 길에서 막히어 오히려 어려운 상황이고, 또 왼쪽으로도 거의 삼백 리이네. 어제 용주현(龍洲縣) 지곡마을에서 돌아오니 편지 한 통이 책상에 떨어져 있어 부지런히 손을 씻고 열어보았네. 이에 창사 대인의 마음의 그림을 옥 같은 시로써 너무나 소중히 담아, 가슴 가득한 위안되는 마음이 피향각에서 책상을 마주하고 이불을 나란히 했던 때보다 못하지 않네. 편지를 받은 다음 달에 정사를 엎드려 묻네. 섣달이 따듯하니 벼슬한 몸은
아름다운 일을 축하하고 어진 자를 존중하여 다시 수리하여 읊는 데 흥미가 있네. 우러러 그리워하고 또 높이 오르길 기도하네. 아버님께서는 성은을 거듭 입어 승정원 관함(官銜)을 받으시고 현명한 기헌(杞軒) 공은 규장각 관함(官銜)을 겸하여 차니 얼마나 감사하고 축하할 일인가. 석서는 보잘것없이 살고 있으며 조카의 결혼식을 마쳤는데 부녀자로서 절개가 있고 행실이 어질고 올발라 다행이네. 다만 흉년이라서 수제비 한 그릇 포식하기도 쉽지 않으니 어찌 충성을 다할 수 있겠는가. 고상하고 우아한 시문(詩文)을 화답하여 보내고, 또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시율의 문체는 수릉(壽陵)에서 걸음걸이를 배우는 것이니, 진실로 재주를 잃어버린 게 아니겠는가? 최근에 쓴 약간의 시를 겸하여 이것을 베끼어 보내니 보면 이것을 충분히 증험할 수 있기에 돌같이 무딘 사람도 흉년으로 부질없는 흥조차 일지 않고, 스스로 물러나면 자연스레 굶주림을 구하지 못하기에 크게 웃었네.
與奇參奉 會一 書
曩宿仙庄如入烏石靈源 恭詢 冬暄經體典華 棣萼湛和 仰漽且頌 石西記每淸晨展讀 或四三遍 或五六遍 萬丈光焰 與吾瑞石竝峙 但石漢猖癡 烏敢當强矯之誠耶 是愧愧 松沙妄有所記眞 所謂 刻畫無鹽 唐突西施 覽過揮棄 如何
접때 귀댁에서 묵으니 오석(烏石)과 영원(靈源)에 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공손히 묻습니다. 포근한 겨울에 경서를 공부하시는 이들은 법전을 빛내고 형제같이 화목함이 넘치기를 우러러 그리고 또 기립니다. 석서는 매일 맑은 새벽에 기록하고 책을 펼쳐서 읽는데, 간혹 서너 번이나 다섯 여섯 번을 읽으며, 광채가 만 길이나 되어 나와 서석산과 함께 나란히 우뚝 솟았습니다. 다만 돌같이 무딘 사람이라서 미쳐 날뛰고 어리석으니 어찌 감히 당연히 굳셈을 통해 바로잡음을 성실히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리도 부끄럽고 부끄러우니, 송사(松沙)께 망령되이 진실로 기억하는 바가 있어 이른바 추녀인 무염(無鹽)를 화장을 시켜 당돌한 서시와 비교하는 것이니. 보시고 허물은 버리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誠甲兒書
吾家世業 儒素淸苦 自修謹飾 自持即 靑氈心法也 不幸 中歲 荐樀 門戶之責 惟汝一人 早失孃爺 煢煢子立 與吾形影相依 今已弁 爭首迎 爭相夙宵 期望之心 倘何如哉 自汝僑居 相距雖三數里 如離乳之孩 纔出門外 未嘗頃刻而忘于懷也 夫士生斯世 耕讀不可廢一 東人詩曰 居鄕事業二其端 於讀於耕廢一難 放翁詩曰 人誰敢侮修身士 天不能窮力穡家 嘗於蘆沙丈席 以此兩句 有所講究者矣 盖修身在敬 力穡在勤 不敬曷修 不勤曷農 汝自幼未全學業 見今搬移之初 耕耔薪水擔着一身 無暇學問 雖然勤 作之餘 另取小學大學二書 頻頻撿誦以 知修身齊家之大本 敬勤二字以爲平生受用之關鍵 期必成立 昌大門戶 是老爺之苦心也 略書十件于下方 須常目銘佩也
一 聘母如親慈 待幼婦如大賓 不可有一毫 拂戾之色 褊隘之習 持心 必寬弘 處事 必安詳
一 里閈長老 待之如嚴父 姻婭友生 待之如親兄 以至旁近村 常常人接之 必溫恭 不可有戱嫚 驕矜之色
一 每晨早起 汛掃庭戶 整頓家事 擔樵擔糞 何所不可 隨其暇隙 常常誦讀 不忘於心
一 每夕照撿 門扃不忘出入 織屝索綯 何患無事 頻頻誦讀 理會文字 切不可戲言戱笑無事燃燈以犯 古人之戒
一 耕作之業 生民大本 不可一時放過 每日以芒玉斗 驗爲課 書曰 服田力穡 乃亦有秋 又曰 旣勤敷菑
一 紡績之工 專責內庭 然至若 去核 卷綿 緯塊等節 亦可自外分力
一 嚴內外之分 不可於內房 吸煙草 做閒談 非但妨績工 大損體貌
一 公錢公穀 必趁期完納每 或愆滯 至於私相與授 切勿漫漶模糊 古人云 財上分明是丈夫
一 俗所謂捧授一款 狼狽之本 非但狼狽相好之間 反成仇隙 余見人家 此患比比有之 若有己財 則相救相卹 是好道理
一 市井即坑塹 關非緊切 事切不可至 昔我王考碧圃公年七十 未嘗足躡 嘗於科時設紙墨于 此偶一覽焉 歸語人曰 市場是礫确難行處云 味此語 極有深意思
우리 집안의 대대로 내려온 가업은 청빈한 유학자로, 스스로 학문을 갈고닦아 몸가짐을 삼가며 스스로 가지니 즉 대대로 내려온 마음의 법인데, 불행하게도 중년의 나이에 대대로 내려온 가문을 책임질 사람은 오직 너 한 사람이구나. 이른 나이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고 외롭고 외롭게 자식을 세워야 하니, 나와 더불어 몸뚱이와 그림자같이 서로 의지해야 하는데, 이제 이미 갖추어졌으니 머리를 다투어 맞이하고, 서로 앞다투어 이른 아침과 늦은 밤에 기대하고 바라는 마음은 혹시 왜 그러는 것이냐? 네가 더부살이한 뒤로 서로 떨어져 있는 거리가 비록 삼여 리면 젖을 뗀 어린아이가 겨우 문밖으로 나간 거리만큼 가깝지만, 일찍이 잠시라도 마음에서 잊은 적이 없구나. 무릇 선비는 이 세상에 태어나 밭을 갈고 책 읽는 건 하나라도 그만둬서는 안 된다. 동인(東人)의 시에 이르길 [고향에 살면서 할 일이 두 가지 있으니, 책 읽고 밭 갈고 어느 것 하나 그만두기 어렵네.]라고 했고, 방옹(放翁) 시에 이르길 [누가 감히 수신(修身)한 선비를 업신여길 것이며, 하늘도 힘써 일하는 집은 궁하게 하지 못하네.]라고 하였다. 일찍이 노사(蘆沙) 선생께서도 이 두 구로써 연구한 바가 있었다. 대개 수신(修身)은 공경에 있고, 애써 농사짓는 것은 근면에 있으니 공경하지 않고 어찌 수신(修身)하고 근면하지 않고 어찌 농사지을 수 있겠는가. 너는 어려서부터 온전히 학업에 열중하지 못하였고, 지금은 살림살이를 이사한 초기이고 밭을 갈고 땔나무하고 물 긷는 일을 한 몸 부담하다 보니 학문을 배워 익힐 겨를이 없고, 비록 부지런히 일해야 하지만 여유를 만들어 따로 소학(小學)과 대학(大學) 두 책을 취하여 자주 단속하고 외워 수신(修身)과 제가(齊家)의 가장 크고 중요한 근본이라는 걸 알고, 공경하고 근면하는 두 글자를 평생 관건으로 받아써서 반드시 잘되어 성대한 가문으로 이룩하길 기약하마. 이것이 늙은 아비의 괴로운 마음이구나. 대략 열 가지를 써서 내려보내니 마땅히 항상 눈여겨보고 마음속 깊이 새기어 간직하도록 해라.
하나. 장모는 친부모처럼 사랑하고 앳된 부인은 귀한 손님처럼 대접하고, 사리에 어긋나고 온당하지 않은 모습과 편협하고 좁은 습성은 조금도 있어서는 안 되고, 마음가짐은 반드시 너그럽고 활달해야 하며 일 처리는 반드시 침착하고 조용해야 한다.
하나. 마을에 가장 나이 많은 노인은 엄한 아버지처럼 대하고, 동서와 친구는 친형제처럼 대해야 한다. 부근의 마을에서 항상 사람을 만나면 온유하고 공손해야 한다. 웃으며 깔보는 마음과 잘난 체하며 뽐내는 기색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하나. 매일 새벽에 일찍 일어나 뜨락에 물을 뿌리고 쓸고 집안일을 정돈하고 땔나무하고 똥 치우는 일을 담당하고 어디서는 그 겨를을 따라서는 안 되고 수시로 소리 내어 읽는 걸 마음속에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 매일 저녁 불을 밝히어 문빗장을 살피고 들고난 사람을 잊지 않고 짚신을 짜고 새끼를 꼬면 되는데 일이 없음을 어찌 걱정하겠느냐. 자주 소리 내어 읽고 문자를 마음속으로 이해하고, 장난으로 말하고 장난으로 웃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일없이 촛불을 켜두는 건 죄를 범하는 것으로 옛사람이 경계했다.
하나. 땅을 갈고 곡식을 기르는 것은 백성의 가장 크고 기본이 되는 일이다. 잠시라도 대충 지나쳐서는 안 되고 매일 빛나는 북두칠성을 점검하는 데 힘써야 한다. 서경에서 말하길 밭에서 일함에 힘써 거둬야만 가을이 있다 했다. 또 말하길 거친 땅을 먼저 개간하는 데 힘써야 한다 했다.
하나. 실을 뽑는 일은 부녀자들이 거처하는 곳의 전적인 책임이다. 그러면 씨를 제거하고 솜을 말고 덩어리를 묶는 등의 절차 또한 힘이 나누어지는 것으로부터 스스로 멀리할 수 있다.
하나. 안팎의 분별을 엄격히 하고 안방에 들어가 담배 피우고 한가하게 이야기 나누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 비단 길쌈하는 일에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체면에도 큰 손해다.
하나. 세금과 국고 쌀은 기한이 다다르면 반드시 매번 완전히 내야 한다. 혹시 어기고 꾸물거리면 서로 몰래 주고받는 결과에 이르고 만다. 흐릿하고 분명하지 않은 짓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 옛사람이 말하길 재물을 다룸에 있어 분명히 하는 것이 대장부라고 했다.
하나. 속된 일 소위 모든 것을 받들어 맡기는 것은 낭패의 근본이니, 오직 낭패만이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반대로 원수처럼 지내는 사이로 되는 것만은 아니다. 내가 사람 사는 집을 보니 이러한 재난은 어디에나 있다. 만약 자신에게 재물이 있으면 곧 서로 구하고 서로 가엾게 여겨야 한다. 이것이 좋은 도리다.
하나. 저잣거리 우물 즉 웅덩이는 아주 간절한 관계가 아니면 일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옛날 나의 할아버지 벽포(碧圃) 공께서 나이 열일곱까지 직접 발로 밟은 적이 없다가 일찍이 과거 시험을 볼 때 종이와 먹을 베푸는 광경을 우연히 한번 둘러보고는 돌아와 사람들에게 말하길 “시장은 자갈 때문에 행하기 어려운 곳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의 의미는 매우 깊은 뜻과 생각이 들어있다.
與奇參奉會一書 庚寅(1890) 正月
去小春晦 在芝谷 修候 仰想收覽矣 歲新月旣望 謹詢靖體 衛道曼福 覃疪勻慶仰賀且祝 尤倍平昔 石西生依劣 而八耋 舍叔母 氣息奄奄 若難保 蚤夕悶迫迫述懷 臘尾所搆 未得 便人今纔 仰呈 俯賜斤敎是望 曏者松沙記僭妄甚矣 其中有未安處 略加塗改 盖先生蘆沙二字非在沙 時號特追言耳 記中 若曰 及夫僑月松也 不改蘆沙字云 爭即似涉在沙 時已有此號矣 今改 雖僑寓月松下 改蘆沙字語意 些有別法眼 以爲如何 示破焉 靑蓂雖時晩 可驗江上春色 哂領否
음력 시월 말일이 지나고 지곡(芝谷) 마을에 있을 때 안부를 물었는데, 거두어 살펴보았을 것을 우러러 생각하오. 새해 새로운 달 열엿새에 삼가 물으오. 편안히 지내는 몸은 여전히 도를 지키시고 행복이 무궁하고 집안 식구들은 고루 경사스러운지요. 평소보다 더욱 갑절로 우러러 축하하고 또 기원하오. 석서(石西)는 보잘것없이 살고 있으며 여든 살의 작은 어머니께서 숨이 끊어지려고 하여 몸을 보전하기가 어려울 것 같소. 저녁 무렵에 고민하다가 매우 급하게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풀어내오. 섣달 그름에 얽으려 한 글을 쓰지 못하다가 인편에 이제야 겨우 지어서 우러러 올리니, 가르침을 몸을 굽혀 보내주시길 이렇게 바라오. 접때 송사(松沙)께 분수도 모르고 몹시도 건방지게 기록하였소. 그중에 미안한 데가 있어서 약간 고치었소. 아마도 선생께서 蘆沙 두 글자에 沙 자가 있지 않은데, 그때 특별히 추억해 부른 말일 뿐이지 싶소. 기록 중에 만약 월송(月松)에 이르러 임시로 기거했더라만 노사(蘆沙)라는 글자로 고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하오. 즉 涉과 비슷한 글자로 沙가 있어 그때 이미 이 호(號)가 있지 않았을까 싶소. 지금 고치어 비록 월송(月松) 밑에서 임시로 기거하고 있는데 개명한 蘆沙의 말뜻을 특별한 지혜의 눈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설파해 보여 주오. 푸른 냉이는 비록 시간이 한참 지났으나 강물 위의 봄의 빛깔을 확인할 수 있으니 웃느라 데려가지 못하오.
答兪主書 益卿 書
正初 惠復 句句 欽誦 愈久愈感 尙此逋謝 請看下回分解 荐拜 審麥天 仕體候安 塤和 覃衛 勻旺 洛族鄕駕 俱爲貞利 仰荷且頌 宲叶遠禱 石西生私門 不幸二月 遭八耋舍叔母喪禍 賤躬 亦以微疴淸健少日 窉月偶作和綾 寶福之行 念間歸棲 抵友蘭 則友蘭率二令妹 發行已一日矣 失此好因便 悵恨何及 第念四日 春府令監 壽筵也 賀賓幾員 賀酒幾巡 賀箋幾幅 仰想 綵舞供歡 和氣盈堂 恨未能舊飛 佩此身於筵末也 前書中惠寄 梅詩展讀
梅樹下牙顂襲馥
一簾鉤月漏黃昏
已覺蓓蕾氣味至
曉慵蒲眼猶舍睡
春恨凝心欲吐言之句 此眞半開花 無乃梅花喜神假 吾蒼史手發 此眞境界耶 可謂同梅而淸淸在梅前 同梅而馨馨在梅外也 詠歎不足 繼以擊節 南中士友 無不傳誦續和沓至 玆以拙搆與他什四五首錄呈 便是庸工刻花不得鳥 能免 泣邢之歎也耶 惠蓂 一回披玩 一回傷神 三百六十日無日 不怊悵者 宲獲我心也 楮墨付給阿侄渠 亦現相如右 今春進敍之計左矣 每聚首相對 娓娓 話舊不絶想 必耳癢也 南麥果大熟 老措大一飽 從此可卜也 金友善 過臺啣 尤賀
정초에 답장을 보내줘 한 구 한 구 기쁜 마음으로 글을 외우네.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더욱 감동적이나, 오히려 이렇게 사례가 미뤄져 아래 회 부분의 해석을 보기를 청하네. 전날의 직위에 다시 임명되었다는 소식에 보리 익는 계절에 살피니 벼슬하는 몸은 잘 있고 형제들과 화목하고 식솔들은 균등하게 왕성하는가. 서울의 가족이 고향으로 내려가니 모두가 진실로 순조롭기를 우러러 받아들이고 또 기리고 축하하며, 진실로 멀리서 기도하네. 석서는 내 집에서 살고 있고, 불행하게도 이월에 팔순의 작은 어머니가 상을 당하는 화를 입어 몸을 낮추고 또 약간의 병이 있으나 젊었을 때처럼 정신이 맑고 건강하네. 삼월에 寶福之行 시를 비단에 우연히 지었네. 생각하는 사이에 집에 돌아오니 우란(友蘭)한테서 편지가 당도해 있었는데, 우란이 두 여동생을 데리고 떠난 지 이미 하루가 지났네. 이 좋은 인편은 잃으니 원망하고 한스러워한들 어디에 미치겠는가. 다만 생각건대 사월에 아버님의 환갑잔치가 있어, 축하하는 손님이 몇 명이고, 축하 술을 돌린 건 몇 순배이고, 축하의 전문은 몇 폭이나 될지. 우러러 생각하니 채색 옷 입고 춤을 추고 함께 즐거워하고 화목한 기운이 집에 가득하네. 떨치고 일어나 이 몸을 차고 잔칫상 끝으로 날아갈 수 없는 것이 한스럽네. 전에 보낸 편지 중에 보내준 매화 시구를 펼쳐놓고 읽고 있네.
매화나무 아래 있으니 입으로 향기가 들어오고,
모든 주렴에 굽은 달이 보이고 붉은 놀이 스며드네.
이미 깨달으니 꽃봉오리 기분과 취미가 미치고,
새벽에 게으름 피우는 부들의 눈 집에서 자는 것 같네.
“봄의 정한이 마음에 엉기니 말을 하고 싶네”라는 시구, 이것은 진실로 반쯤 벌어진 꽃은 매화가 아니겠는가. 기쁨의 신이 이르러 나와 창사의 손에서 발하니 이것이 참된 경계이니, 그야말로 매화와 함께하니 맑고 맑음이 매화 앞에 있고, 매화와 함께하니 맑은 향기가 매화 너머에 있네. 읊고 노래하는 것으로 부족하면 박자를 맞춰 이어가고, 남쪽의 벗들이 소리 내어 읽고 이것이 곧 서투른 장인이 꽃무늬를 새기어 새를 얻지 못하고, 슬퍼서 눈물 흘리는 탄식을 능히 면할 수 있구나. 은혜로운 명협(蓂莢)을 한번은 책을 펼쳐서 감상하고 한번은 마음을 해치니, 삼백육십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슬퍼하지 않는 자 진실로 내 마음을 사로잡네. 공급하여준 종이와 먹을 조카가 올리어 또 나타난 형상(形相)이 오른쪽과 같고, 이번 봄에 차례로 승진하는 계획이 왼쪽과 같네. 매번 머리를 맞대고 흥미진진한 지난 일을 이야기 나누는 생각이 끊이지 않으니 반드시 귀가 가려울 것이네. 남쪽은 보리와 과실이 잘 익어가고 있으니 나이 많은 학자가 배불리 먹을 수 있음을 나아가 이를 점칠 수 있으며, 김우선(金友善)이 사헌부 직함을 취하여 더욱 축하하네.
答兪注書 益卿 書
昨登瑞石山 最高峰東望 萬疊芙蓉 出沒 隱現於煙雲香靄之間 所思在彼庶幾遇焉 安得雙飛翼 一擧千里 焂然而至 正作如是想依 岩松下惱着 忽胡蝶引余 遽遽然 栩栩然 向東而去 俄爭至一處 山川繆紆 雲樹蒼蔚 見水邊有新結屋 小小如舫 四壁皆梅花詩半開者也 一少年仙官 朗然如玉 隱囊素帽手執 唐人詩 一卷兀然靜坐 余進揖而熟視之 乃吾蒼史也 握手欣欣 話舊津津 謔浪笑敖 酣嬉淋漓如在披香閣中 旣而欠伸起 夕陽在山遂 忽忽歸捿 則惠函 入手圻開 詞意一如夢中所見 迺知 吾兩人神契 不以千里而有間 不然則旬月之內 安得此兩度書耶 石西以夢 蒼史以書 不知 石西之夢 蒼史之書 孰優而孰劣 夫夢幻境 書心畫 以此揆之夢 不如書也 書替朁對夢相接以是槪之書不如夢也 雖然神交也以心不以形本 自無間 蒼史之書卽石西之夢也 石西之夢亦蒼史之書也 可謂一而二 二而一者 何必論優劣於其間哉 寒暄已聞知 不須贅 爲近來消遣法惟一 瑞石行 足可向人誇者覽 此石西之無恙可想矣 惟祝省體爲國 加愛葆重 不備
어제 서석산 최고봉에 올라 동쪽을 바라보니 안개구름과 짙은 향기 사이로 겹겹이 쌓인 부용(芙蓉) 나타났다 없어졌다 보였다 안 보였다 하였네. 생각 같아서는 거의 만날 듯한데, 한 쌍의 날개를 어찌 얻어 단숨에 날아올라 천 리에 홀연히 이른단 말인가. 진실로 이같이 생각하고 바위와 소나무 아래에 괴롭게 다다르니 갑자기 나비가 나를 이끌어 갑작스레 펄럭펄럭 동쪽으로 향해 가다 한 곳에 잠시 다투듯 이르니 산과 냇물이 얽히고 굽이 돌아 구름에 가려진 나무들이 푸르게 우거져, 물가를 보니 새로 지은 집이 있어 작달막한 것이 뗏목 같았고, 사방이 모두 매화 시에 나오는 반쯤 벌어진 꽃들이었네. 맑고 우렁찬 것이 옥 같고, 수수한 모자를 쓰고 은낭(隱囊)에 앉은 선경 관원의 한 소년이 손으로 당나라 사람의 시 한 권을 집어 마음을 가다듬고 오뚝이 앉아 있어, 내가 두 손을 모으고 앞으로 나아가 자세히 눈여겨보니 나와 창사였네. 기쁘게 손을 맞잡고 재미나게 지난 일을 이야기하며 희롱하고 조롱하고 놀려대고 피향각 속에 있는 것처럼 술에 잔뜩 취하고 이윽고 하품하고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니 저녁 해가 산에 미치어 홀연히 집으로 돌아오니 편지가 있어 손을 넣어 가장자리를 여니 말의 의미가 꿈속에서 봤던 바와 하나같이 같았네. 이제 알겠네. 우리 두 사람이 신으로 맺어져 어찌 이처럼 두 차례 편지를 받을 수 있겠는가. 석서는 꿈으로 창사는 편지로는 알지 못하고 석서의 꿈과 창사의 편지 어느 게 뛰어나고 어느 게 떨어지는가. 대개 꿈은 몽환의 경계이고 서(書)는 마음의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이렇게 꿈을 헤아리는 것만으로는 글만 못 하며, 글이 꿈으로 대체하듯 서로 치밀하게 맞닿아있어 이렇듯 개괄적인 글만으로는 꿈만 못하니, 비록 정신적으로 사귄다 할지라도 마음이 육체일 수 없듯이 본래 틈이 없으니 창사의 편지가 곧 석서의 꿈이고, 석서의 꿈이 또한 창사의 편지이니, 그야말로 형식은 달라도 취지는 같은 것인데, 하필 그사이에 우열을 논해야 쓰겠는가. 서로의 문안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으니 군더더기를 달 필요는 없고, 근래 어떤 것에 마음을 붙여 세월을 보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서석산에 가서 사람을 향해 과시하는 자를 충분히 보는 것 이것이 석서가 근심을 없애 수 있다고 가히 짐작할 수 있네. 오직 축하할 일은 나라를 위해 몸을 잘 살피고 몸을 잘 돌보고 몸을 잘 유지하게.
上咸營書
韓判書章錫時爲北伯 辛卯(1891) 九月
南涯北角幾千里矣 翹首關雲 瞻昻曷極 謹伏問 肅辰旬宣 台體候 連享萬安 營務 不至大端惱神 遠伏溸 不任下忱 世下生 依舊諭劣而今月旬間入闉 積憊尙衆伏悶 間從李徹注書穩討 緖餘頓忘 旅瑣之苦耳 先人遺稿在巾衍中未脫藁者久矣 間加稡集裒爲冊子願獲大君子 弁卷之文以作 家藏水蒼 而遠莫之致 伏歎奈何 惟伏竢 還朝之日耳
남쪽 끝에서 북쪽 밖까지 거의 천 리나 되다 보니 머리를 들어 변방 함경도의 구름을 우러러 바라보고 싶은 마음 어찌 다하겠습니까. 삼가 엎드려 묻습니다. 엄숙하게 널리 사방을 다스려 왕의 명령을 두러 펼치시는 대감의 건강이 연이어 아주 편안하시고, 맡으신 일 때문에 이르지 못하여 대단히 정신이 어지럽고, 멀리서 그리워하는 저의 참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저는 옛날과 변함없이 깨우침이 떨어져 이달 열흘 사이에 궁궐 문 안으로 들어가도 쌓이는 근심이 그래도 많으니 괴롭습니다. 그 사이에 사촌 계철(季徹) 주서(注書)와 온당하게 토의하고 나머지는 갑자기 잊었으며 객지 살림이 괴로울 뿐입니다. 책을 넣어두는 상자 속에 선조의 유고가 탈고하지 않은 채로 놓인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틈틈이 책자를 만들기 위해 볏가리처럼 차곡차곡 모아서 크신 군자를 얻어 서문을 작성하길 바라는 바입니다. 수창옥(水蒼玉)을 집에 보관만 하고 너무 멀어서 보내줄 수가 없어 어찌할 것인지 삼가 탄식하는 바입니다. 생각건대, 삼가 기다리는 것은 조정으로 돌아오는 날뿐입니다.
與趙同福 性喜 書
洛舍不存感篆于中已五載矣 尙稽覿淸德 而承雅誨 其奈緣薄何 伏問烘炎比熇 篆體字民萬旺 頌仰仰靑山綠水 再作風月主人 此白傳所未能敬 爲福州大人拱賀無已生 一是諭劣 而塊蟄林蝸 困暑阻食 餘無足善述 近有人 傳誦屯洞瓊聯 因次其韻 述懷仰呈以訂 一段墨緣 蕪拙甚矣 辴覽揮却若何
서울 집에 없어서 감사함을 마음에 새기는 중에 이미 오 년이 지났습니다. 여전히 청렴하고 고결한 덕행을 찾아뵙지 못하고, 가르침을 이어받아야 하는데 인연이 얇으니 어찌하리오. 엎드려 묻습니다. 음력 불꽃에 비견되는 유월에 건강하시고 백성을 사랑하고 모두 평안하시길 우러러 칭송합니다. 청산녹수 우러러 재차 풍월주인을 지으니 이 백거이를 아직 능히 공경하지 못하는 것은 동복 대인에게 축하를 보내기 위함이며 끊임없이 생겨나기만 하니 모두 모자람을 깨닫게 하고 숲속의 달팽이처럼 움츠려 지내고 더위에 지쳐서 밥 먹기도 싫고 나머지를 좋게 풀어낼 것이 없습니다. 요즘 둔동(屯洞)의 옥 같은 연시를 입으로 전하여 외우는 사람이 있어, 인하여 차운하고 품은 생각을 보내고 약속하니 일단 먹으로 맺은 인연 거칠고 졸렬하기가 몹시 심해 웃으며 살펴보고 물리치어 돌아보지 않음이 어떠한가?
附趙同福答
阻閡頗久 詹誦恒功非想 承拜惠問 感荷不可言 矧審比熱候節萬寧 寶眷均慶 何等賀喜之至 記下俗吏身分 無一善狀況 又賤年到襄 恒苦病憂 公私耦悶而己 瓊章擎讀再三 已感寄意之殷 而況韻格逎老益壯 前格 仰認盛工到 老彌篤 欽艶望洋 瞠乎後矣 雖或和呈適有擾惱 心意不相湊 久廢之簧 猝難應節 今無以奉塵 有負勤綣 殊甚愧歎
꽤 오랫동안 통하지 못하게 막히어 우러러 그리워하고 항상 공로를 생각도 못 하다가 편지를 받고 은혜를 감사히 여김을 말로는 다 못할 것 같습니다. 하물며 더운 기후의 계절에 모두가 평안하시며 가족은 고루 경사스러우면 더없이 기쁘고 경사스러울 것이 전혀 없습니다. 저는 하급의 관리 신분이라서 한 가지도 좋은 상황이 없고 또 흉년이 닥치어 항상 병으로 근심하느라 괴롭고 공적일 일과 사적인 일이 모두 답답할 뿐입니다. 구슬 같은 아름다운 문장을 높이 들어 두세 번 읽으니 마음을 담아 보내주신 은근함을 이미 느끼고 하물며 시의 운율과 품격에 나이가 들수록 더욱 기력이 왕성하고, 전에 쓴 시의 품격은 왕성하게 시를 짓고 있다는 걸 우러러 알고 있고, 늙을수록 부지런하여 바다를 바라보듯 흠모하다가 눈만 휘둥그레 뜨고 뒤만 바라볼 뿐입니다. 비록 화답하여 드리러 가더라도 시끄럽고 괴롭힘이 있고, 마음과 뜻이 서로 모이지 않으니 오랫동안 생황을 그만둬 갑자기 계절에 맞추기가 어렵고 이제는 받들어야 할 유업(遺業)이 없으나 편지의 부담만 매우 심하게 있어 괴이하고 놀라 탄식합니다.
與兪校理 益卿 書 壬辰(1892)
正初惠緘 甚風吹來 重之 以二蓂 每信手披閱 一歲十二月 一日十二時 何莫非懷人 嚮逞之功也 但失便 稽敬 拖到于 今媿負負 無容爲辭 恭詢 至沍省餘 仕體膺裕万穆 覃度均孚 宿疴快祛 近帶何職 近看何書 幾時留洛 幾時不峽 仰溯 且誦願聞區區 石西生 昨冬自京歸路 過歲於鎭衙 今春 始棲病朽轉甚 無一佳況 且今月十八緬襄曾祖考妣 哀感如新第 曩書示一月之工 半部魯論 此好信息 好說話也 湖堂廢之久矣 近來 名士 罕聞讀書 迺今惟吾 蒼史大人眷眷 以看字爲本領 健羨無已 宋名臣趙普之言 以魯論半部 佐太宗 致太平 苟使大着跟 眞積力 其所受用 曷可量也 益可珍護佐致太平 熙鴻號於無窮 區區之望也
정초에 편지를 받으니 바람이 심하게 불어와 두 개의 명협으로 소중히 하네. 매번 익숙하게 손을 움직여 편지를 펴서 살피니 한 해에 12월이 있고 하루에 열두 시가 있는데 어찌하여 그리워하는 사람의 포부를 마음껏 펼치는 공로가 아닐 수 있겠는가. 다만 편의를 상실해 머리를 숙여 공경은 연장하네. 지금 부끄럽기가 몹시도 부끄러워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네. 삼가 여쭙던데, 동짓날 추위에 부모님을 모시고 벼슬하는 몸은 마음이 너그럽고 모두 평안하고 식구들은 두루 빛나고 오래 묵은 병은 완전히 없어졌는지. 근래 어떤 관직의 띠를 두르고 근래 어떤 책을 보고 언제 서울에 머무르고 언제 어긋남이 없을지. 그립고 또 시 외우는 소리를 의기양양 듣고 싶네. 석서는 작년 겨울에 서울에서 돌아와 진아(鎭衙)에서 설을 쇠며 살고 있네. 이번 봄에는 근본적으로 긷든 병과 노후(老朽)함이 갈수록 심해져 하나도 좋은 상황이 없네. 또 이번 달 십팔 일에 증조부모님의 묘를 이장하는데 새로 이사하는 것 같아 처량하고 슬픈 기분이 드네. 접때 글을 써서 보여 준 일 월달에 논어 반부(半部)를 공부한다는 이것은 좋은 소식이고 좋은 이야긴데, (나라에서) 독서당(讀書堂)을 없앤 지 오래되었지 않은가. 근래 이름께나 있는 선비들이 책 읽는다는 소리를 좀체 들을 수가 없어, 이에 지금 내가 창사가 쓴 권권(眷眷)이라는 글자를 보고 근본정신으로 삼는다 하니 부럽기가 끝이 없네. 송나라 유명한 신하 조보(趙普)의 말에 따르면 논어의 반부(半部)로서 태종을 도와 태평성대를 이뤘다 하였네. 만약 대인에게 근본을 세우라 한다면 진실로 힘을 쌓아 받아 쓸 그 날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나. 더욱 애지중지하고 도와 태평성대를 이루고 숭고하고 아름다운 이름이 끝없이 빛나 의기양양하길 바라네.
與朴參奉 世仲 書
洛舍 判襼已周矣 悵昻 際功謂外長久帶雪 叩荊 備探安信 更請臘寒乘宜 體度葆重 覃衛勻慶 二哥辭歸鷺廱 三哥入直虎賁 溸祝之至 繼以健羨 弟狀 歲暮窮山 跧蟄無聊 奈何 第聞 祝聖 洑刱役一款 即是 大經營 大力量 鄭白之渠 蘇白之堤 何獨專美於古也 上而獻 岡陵之祝 下而蒙 漑灌之澤 若使竣工 天下之能事畢矣 開歲始役日子示及 則另圖 振策以觀規度 籌劃之閎深 且大耳 祭告祝文 搆呈 使具眼者 更加潤色之如何
서울 집에서 헤어지고 벌써 한해가 지났습니다. 슬프고 그리우며 모두가 공력을 일컬어 바깥에 길고 오랫동안 쌓인 눈이라 하오. 사립문을 두들겨 안부편지를 준비해 찾으니, 다시 청하건대 섣달 추위에 좋은 기회를 타시고 건강 잘 챙기시고 식구들은 고루 경사스럽고, 둘째 형이 백로처럼 학교로 돌아왔다 말하고 셋째 형이 용맹한 군대에 들어가 묵으며 근무한다 하니 더할 수 없이 그립고 축원하며 이어서 몹시 부럽기만 하오. 저의 모습은 세밑에 깊은 산속에서 무료하게 웅크리고 칩거하고 있으니 어찌하겠소. 다만 듣건대, 축복하고 기도로써 거룩하게 할 보를 만드는 부역의 한 조항으로, 곧 경영을 크게 하고 역량을 크게 발휘한 정국(鄭國)과 백공(白公)의 도랑과 소동파(蘇東坡)와 백거이(白居易) 제방이 있으니, 어찌 옛날에만 혼자서 아름다운 명성을 독차지하였겠소. 위로는 헌신하여 신하들이 임금의 복을 산처럼 누림을 축하하고 아래로는 힘입어 저수지에 물을 대는 공사를 마치게 하려면 천하의 뛰어난 사람이 마무리해야 할 일이오. 새로 시작하는 해에 일을 시작하는 날짜를 알려와 곧 별로로 도모하여 지팡이 휘두르며 규범이 되는 정도를 자세히 보니 계획한 문장의 규모가 크고 뜻이 깊으며 또 대단할 뿐이오. 조상신께 알리는 축문을 지어서 올리니 안목을 갖춘 자에게 다시 더욱더 매끄럽게 손질하는 것이 어떻겠소.
與松沙奇參奉 會一 書 癸巳(1893) 三月
奉拜 已積年 事嚮風 馳想 無日不憧憧 謹問 春暮經體湛和 典安苐 丈席墓所 石役伊始聞 不勝欣聳 獲賴神明 斯速竣工 斯文之幸大矣 至祝 生一是病劣 而硯上之塵盈寸 自憐奈何 月松講會 南眠盛擧 而自顧朽散 未參筵末歎恨 族侄煥龍 年近弱冠 姿品冗愚 功欲 熏眞於高門 玆命送一言 俯敎之 深望
경의를 표한 지 이미 몇 년이 지났소. 풍채와 용모를 우러러 섬기는 생각에 치달아 하루도 그리워하지 않는 날이 없소. 삼가 묻소. 봄날이 저물어가는 날에 경전에 힘쓰는 몸 편안하고 온화하며 경전 편안하신지요. 스승의 묘소에 돌 놓는 일을 시작했다 들으니 솟구치는 기쁨을 금하지 못하고, 천지신명에 힘입어 신속히 준공하는 것이 유학자에게는 다행스러움이 크기에 지극히 축복하오. 삶의 모두 것이 병으로 쇠약하고 벼루 위에는 먼지만 한 치나 쌓이어 스스로 가엽게 여긴들 어찌하겠소. 월송(月松)에서 열리는 강의 모임은 남면에서는 매우 훌륭한 일인데, 나 자신을 돌아보니 몸뚱이가 썩고 정신이 흩어져 연회(宴會)의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니 탄식하여 한탄하오. 집안 조카 환용의 나이가 최근에 스무 살이 되었으며 모습이 쓸모없고 어리석으나 성공하길 바라니 높은 가문의 진리가 스며들었으면 하오. 이에 명하여 한 마디 보내니 몸을 굽혀 가르쳐주길 간절히 바라오.
附奇參奉答
年前 盖嘗屢承書存 而或闕 而失謝 或付覆 而未達 皆由勤慢不類 追惟爲咎 又承不校 惠札 賢宗帶來 備審養靜 茂祉 實慰 詹戀生 積病 經春 耳眼俱弊 槩皆衰證破器 豈有重完之日也 書面細字 仰認 精力無損 所養之淺深 推可知也 先墓堅石果因儒議經始 而自家聽命焉已矣 竊想 淸貧 自濟 常艱 而助惠之及 感 不徒 在物耳 賢宗人海 不能劇談 虛負 見存之意 客中無副手紙墨 赫蹏 仰覆欠敬 惟諒下
여러 해 전부터 아마도 일찍이 자주 편지를 받았지 싶은데, 거르기도 하고, 사례를 지나치기도 하고, 회답에 부쳐주기도 하고, 배달을 못 하기도 했습니다. 모두 부지런함과 게으름에 말미암은 건 아닌 듯하나 거슬러 생각하니 허물이 되고, 또 편지를 받고 답장을 안 하다가 편지와 함께 현명한 종친을 보내주시니 조용히 수양하고 복이 많음을 알게 되어 진실로 위로가 됩니다. 보아하니, 그리움이 생기고 병이 쌓이고 봄도 다 가고 귀와 눈동자가 함께 피폐해 대개 모두 깨어진 그릇으로 노쇠함을 증명하는데 어찌 신중하고 완전한 날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편지의 자잘하게 쓴 글씨로 우러러 인식하건대 심신의 원기에 손실이 없고 소양의 깊고 얕음을 미루어 알게끔 합니다. 선조의 묘소에 단단한 돌을 놓기로 한 결과와 원인은 유생들이 의논하여 시작하게 되었으며 스스로 집에서 명령을 들었을 뿐입니다. 즈윽이 생각하건데 청렴하고 욕심이 없고 스스로 구제하면 항상 어려운데 도움을 주는 은혜가 미치더라도 마음은 무리에 있지 않고 물건에 있을 뿐입니다. 수많은 현명한 종원과 쾌활하게 이야기 나누지도 못하고 헛되이 떠안았다는 게 지금의 뜻입니다. 객지에 있는 동안 손과 종이 벼루를 빌리지 못하여 한 조각 종이에 편지를 써서 보내니 하늘을 우러러 공경심이 부족하지만 깊이 생각하시어 헤아려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答孝洞詩函書
曩者 惠函甚風吹到 盥手折開 一重二重三重 迺筠史晩洲醉閒 諸大詞伯詩呇也 滿紙辭意 鄭重如拱琬琰 顧謂孫兒曰 此篇於汝 即華袞識之也 尙此稽謝 且看下回分解 甘澍未洽 仰頌 此時僉體典安 石西生困頓 阻食 長時呌藝 衰相也 奈何且孫也以河魚之祟爲苦 尙未快晴 悶悶見 此如把筆無暇 略此謝上晩洲兄以聞喜 次韻加味 尤感尤感
접때 편지가 도착한 날 바람이 심하게 불었습니다. 손을 씻고 가르니 한 겹 두 겹 세 겹 포개져 있었습니다. 이는 균사(筠史) 만주(晩洲) 취한(醉閒) 모든 대시인의 시가 솟아올랐습니다. 종이에 가득한 말의 뜻은 정중하기가 아름다운 옥을 껴안는 것 같아 손자 아이를 돌아보며 말하길 “이 시는 너에게 쓰는 글이니 곧 매우 존중한 포상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하고 말했습니다. 오히려 이에 머리 숙여 감사드리고 또 나중에 따로따로 나누어서 보니 단비가 흡족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러러 높이 칭송합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몸은 평안 하시는지요. 석서는 매우 잘 먹지도 못하고 오랫동안 재주를 울부짖고 쇠한 모습으로 고달프게 살고 있으니 어찌해야 할까요. 또 손자가 복통 증세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아직 맑고 산뜻하지 않아 맹맹하게 보이는데, 이는 붓을 집어 들 겨를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대충 이렇게 만주 형님께 감사의 편지를 드리고 문희연에 차운하여 시를 보태 넣어주니 더욱더 느낌이 옵니다.
答奇參奉 會一 書
暮春惠後久 猶感銘 未審肅辰 經體葆重 鳳山 石儀 經始已久 優有 就緖之漸 否頌 仰願 聞生病朽轉甚 崦嵫本色奈何 今春 自竹樹 孫兒率來 使之讀書 晩年興味 頗覺 津津 喜劇 搆拙 四韻一首 絶句四疊 遠近士友多倡和 玆錄呈 哂覽如何 鄙族侄 作講會之行 略此 不備
저물어가는 봄날에 편지를 받은 후 오래되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있으며 숙신(肅辰)을 살피지 못하였소, 경전을 공부하는 몸은 관리를 잘 하시는지요. 봉산(鳳山) 묘소의 석상은 만들기 시작한 지 이미 오래인데, 일이 점점 진척되기 시작하였다 하니 칭송할 수가 없소. 우러러 원하오. 병이 생기고 썩기가 더욱더 심해졌다 들었는데, 노년의 본래의 모습인 걸 어찌하겠소. 올해 봄에 스스로 대나무 숲에 손자 아이를 데리고 와서 책을 읽으라 시키니 늦은 나이에 흥미를 자못 깨달으니 깊고도 흐뭇하오. 웃을만한 일로 졸렬하게 사운(四韻)시 한 수와 네 층의 절구시를 짓자 멀고 가까운 선비와 벗들이 많이도 화답시를 지었소. 이렇게 기록하여 보내니 웃으며 보는 게 어떻겠소. 우리 가문의 조카가 [강연 모임에 가다] 라는 시를 지었소. 대략 여기서 그만 줄이겠소.
附奇參奉答
竹樹得孫 可謂古査生花 能知讀書 仰認 繼武有地曷勝 仰賀 匪意惠翰 遠墮 感深無遐 謹審秋高靜居 頤養崇謐 實慰 溯禱 生孱質多病 蒲柳早衰 固其理也 凰墓石儀始事有月而浩 大難於速就耳 來詩喜劇所湊 可謂得情性之正 當忘拙拚和 而此月忽擾 容竢後便以取斤正
대나무 숲에 손자를 얻으니 이를테면 오래된 그루터기에 꽃이 피어난 일이고, 능히 글을 읽을 줄 안다고 하니 우러러 인정하는 바이오. 일을 이어받을 처지에 있다고 하니 그리 없소. 우러러 축하하오. 뜻밖에 편지가 멀리서 떨어지니 감격스러워 멀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삼가 살피니 가을 하늘은 높고 한가히 지내시며 고요히 정신을 수양하길 삼가 숭상하니 진실로 위로가 되길 우러러 빕니다. 잔약한 체질로 태어나 병이 많아 갯버들이 일찍 쇠하는 건 당연한 이치입니다. 봉산의 묘소에 석상 세우는 일은 시작하는 달이 있을 듯한데 광대해서 신속히 이루기가 매우 어려울 뿐입니다. 보내준 시에 웃을만한 일이 몰려들어 그야말로 성정의 바름을 얻게 하는 것이기에, 마땅히 졸렬함을 잊고 함부로 화답시를 지어야 하나 이번 달은 갑자기 어지러워져, 조용히 후일을 기다렸다가 나중에 인편을 취하여 밝게 살피어 바로잡겠소.
答趙錫汝 書
今朝 始見臘雪 懷緖 與歲俱深 際拜審經候 毖寧 覃衛勻休 實愜溸禱 但硏田逢荒 吾儕 厄運 重爲之浩 歎病第一 是呌囈 長在帔窩中 腫症疊 仍今年臘日 似不得安過 良憐 侄兒搬移 出於不得己於渠 非良策於吾 爲一幸姑未知 墨突能黔否也 惠寄二什 奉讀以還 不覺紙毛 至若謝棊阮酒 可謂 善偸狐白裘手 情境 何其帖妥 健羨無已 只以一首蕪語 塞責 哂覽如何
오늘 아침 납일의 눈을 처음으로 보았소. 가슴속 실마리들이 가는 해와 함께 모두 다 깊어져 제때 경후(經候)를 살피니 삼가 평안하고 가족이 두루 잘 지내시고 실로 상쾌하길 우러러 기도하오. 다만 벼루에 먹을 갈아 먹고 사는 사람에게 흉년이 닥치니 우리 모두에게 액운이라 중대함이 크다 할 수 있는 것은 병을 앓는 것이 가장 먼저라서 이에 헛소리를 울부짖소. 손수건만 한 움집에 오랫동안 있는 와중에 종기까지 겹치니 그로 인하여 올해 섣달그믐은 아무 탈 없이 편안히 지낼 수 없을 듯하니 참으로 가련하오. 조카 아이가 이사하니 그 사람에게는 자기도 어쩔 수 없이 나온 것이나, 나에게는 좋은 생각이 못되어 잠시나마 알지 못한 것이 하나의 다행이라 삼을만하니, 그래서 이리저리 옮겨 다닌 묵자의 굴뚝은 능히 검어지지 않는 것이오. 편지 이십 건을 부쳐줘 반복해서 받들어 읽으니 종이에 털이 돋아나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였소. 지극함이 기완(棊阮)에게 술을 사례하는 것과 같으니, 그야말로 여우 하얀 겨드랑이 가죽으로 만든 가죽옷을 잘 훔친 솜씨라고 할 상황인데, 어떻게 그것이 편안하게 정착하였는지 몹시 부럽기가 그지없소. 다만 시 한 수의 거친 말로 책임을 면하려는 것이니 웃으며 보는 게 어떻겠소.
答心洲楊聖允書
蓼川 帶方之一衣帶耳 激射噴放 南馳遙遙三溪出 其側滙爲石門綠溪 而家園林相望 意必有隱君子乎 不佞於帶方 賢豪從遊甚多 若黃上舍源龍 丁上舍說相 金上舍𤪤 許斯文鍱 房上舍海圭 盧上舍極壽 相許氣義 數年來 或乘化歸盡 或坎壈不偶 今心洲詞伯聖允甫 其一耳 以詩什大鳴於世 完試同場 蓉齋同硏 盖嘗一造門屛 竟夕罄懽 去年春正 惠函入手擎讀 以還文瀾浩渺 如長江大河 過呂梁 衝砥柱汗汗 莫側信乎 蓼川之激射 噴放者發 而爲文章也 如錫愚者不覺 望洋瞠乎後矣 益恨 曩時以詩 知公之俴俴也 但詡奘太過 豈僇爲推許 益加警策也歟 第會圍在邇 計當俶裝以若負抱 蓄銃長驅 則前頭嶺何難 登岸是祝 今侄樂中居在近隣 其率 性醇 古行已 謹愼可知 芝根醴源所受 有自來矣 嘗以此遍告于 士友間 且謂樂中曰 君之子年今舞象 儀甚佳妙 必擇婚於帶方 而其成就 貴宗不得辭 其貴云爾
요천(蓼川)은 대방(帶方)의 한줄기 띠일 뿐이나, 세차게 뿜어내는 물줄기가 남쪽으로 아득히 달리어 세 개의 시냇물로 분출하고, 그것이 옆으로 돌아 석문(石門)의 푸른 개울을 이루고 집 정원의 숲과 서로 바라보니, 생각건대 반드시 숨은 군자가 있을 것이오. 대방의 재주도 없는 자가 슬기롭고 뛰어난 자를 쫓아 더불어 노니는 자가 매우 많으니, 진사 황원용(黃源龍)과 진사 정열상(丁說相)과 진사 김영(金𤪤)과 사문 허섭(許鍱)과 진사 방해규(房海圭) 진사 노극수(盧極壽)와 같은 이들로 서로 기개와 의리를 약속하여 수년 동안 지켜오다가 혹자는 승화하여 돌아가시고, 혹자는 일이 잘 안 풀려 무리를 이루지 못하게 되었소, 지금 심주(心洲) 성윤(聖允) 사백(詞伯)이 그 한 명일 뿐이며, 시로써 세상에 큰 울림을 주니, 같은 장소에서 시험을 완수하고 용재(蓉齋)에서 함께 공부하는 것은 아마도 일찍이 하나의 귀한 사람을 찾아뵙고 인사드리는 문병(門屛)을 만들어 밤새 극히 즐기었지 싶소. 작년 봄 정월에 편지를 받아 높이 받들어 읽으니, 돌아오는 문장이 물결치고 넓고 아득한 것이 장강의 큰 강물이 여량을 지나 주지산(砥柱山)과 충돌하는 광대한 물길과 같아 몸을 옆으로 기울이지 못하였소. 요천(蓼川)이 물줄기를 세차게 뿜어낸 것이 그 문장을 이루니, 석우(錫愚)라는 자는 알지 못하는 듯하여, 멀리 보이는 바다를 빤히 보면서 따라잡지 못한 것이 더욱 한스러웠소. 접때 시를 통해 공의 가지런함을 알았소. 다만 자랑의 크기가 너무나 지나쳐 어찌나 욕을 보이는지 높이 받들어 존경받으려 하기에 더욱 경책(警策)을 가해야 했소. 다음 차례의 회시(會試)가 가까이에 있어 당시를 계산해 이처럼 포부를 가지고 당장 채비하여 총을 모아 말을 타고 멀리까지 가니, 앞쪽 가장 높은 고개가 어찌나 험난한지 언덕에 올라 이를 기원하겠소. 지금 조카 낙중이 근처 이웃에 살고 있고 그 식솔의 천성이 순박하여 예전부터 행하던 것으로 마음과 몸을 조심함을 알 수 있으니 영지의 뿌리와 예천(醴泉) 근원을 시초로 하여 받는 바는 예전부터 내려오는 것이오. 일찍이 이에 선비와 벗들 사이에 두루 알리고 또 낙중을 일컬으며 말하길 “그대의 아들이 올해 나이가 열다섯이라 행동거지가 매우 아름답고 묘한 재주를 지녀, 반드시 대방(帶方)에서 결혼할 상대를 고를 것이고, 그것이 이뤄짐을 귀하의 종중이 사양하지 못할 것이니, 그것을 귀하게 여기라.” 하고 말했다 하오.
附楊聖允書
湖省之山 巍然 高且大者 無慮 百數 惟瑞石㝡著 盖嘗升高南望 游雲杳靄之外 蜿蟺扶餘 凌摩絳霄 如長德鉅公坐鎭浮燥 風彩偉然 光昌綾和淸淑之氣至是 而畜洩焉 其鍾於人者 道學若高峰先生 勳業若思庵相公 訥齋之淸直 錦南之智謀忠壯之英勇 柱石邦國折衝 疆圍赫赫乎 靑野之史乘 何其韙哉 自是以來 寥寥未之聞焉 豈山之靈 鍾得諸公已多耶 抑慳秘而有待耶 是未可知也 後三百有餘年有 石西公者出 始以文章鳴焉 兩世登庠 克趾其美 覃思六經 汎濫諸子 其爲詩文 如王濬樓船遇順風而入石頭 造父良駟駕輕車而就熟路 瓊什華聞 豢於口 雷於耳者雅矣 頃嘗枉叩弊廬 獲覩 光德眞文苑 名宿詞壇 老師始信 瑞石之靈 慳秘 而有待者 其在是歟 相一早歲 欲挈家入瑞石 與公結隣 而塗脩力綿 闕然未果 每月床雪几是心 未嘗不 往來于中也 有族侄 樂中其字 早失怙恃 育于秋城母家 道塗阻絶 不知下落 數年前 頑然 一男子 造門 敍其來歷 乃吾侄也 爾把袖 眼淚洗面問 今在何方 瑞石之下矣 與誰爲隣石西公矣 回悲作喜曰 汝之不死 一幸也 居於是隣於是一幸也 余所未果 而汝先之 又一幸也 有此三幸 幸莫大焉 余何憂哉 然而岱馬南來 淮橘北渡物理 人情今昔何異 公旣知 斯人爲相一之 侄則其視相一 毋惜齒牙餘論 俾免孤寓受侮 尤幸 受賜大矣 統希崇亮
호남의 산을 살피면 우뚝 솟아 높고 또 큰 것이 무려 백 개나 되는데, 생각건대 가장 최고는 서석산(瑞石山)입니다. 아마도 일찍이 높이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구름이 유유히 흘러가고 자욱한 안개 너머로는 상서로운 기운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며, 붉은 하늘을 우습게 알고 만지니, 덕이 많은 거공(鉅公)과 같이 앉아서 들뜬 분위기를 진압하고 풍채가 위대하여 빛처럼 창성하고 비단처럼 조화로우며 맑고 깨끗한 기운이 이곳에 이르러 모았다가 몰래 흘려보내니 거기에 모이는 사람으로는 도학(道學)으로는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같은 선생이 있고 나라에 큰 공을 세운 분으로는 사암(思庵) 박순(朴淳) 같은 정승이 있고, 청렴하고 곧은 눌재(訥齋) 박상(朴祥)과 슬기롭게 꾀를 부린 금남(錦南) 정충신(鄭忠信)과 영특하고 용맹한 충장(忠壯) 김덕령(金德齡)은 나라의 중요한 직책을 맡아 나라를 찌르는 적의 창을 꺾고 변경의 주변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초야에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책은 그것이 어찌나 바른지 그때부터 지금까지 극히 적어 듣지 못하였습니다. 산이 영험해서 모여드는 사람이 많은 것인지, 아니면 혹시 아끼어 숨겨두고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이것은 알 길이 없습니다. 삼백여 년이 있고 난 뒤에 석서공(石西公)이라는 자가 나와 처음으로 문장으로 명성을 날리고, 이 대에 걸쳐 성균관에 오르고 그 아름다움을 이어서 육경(六經)을 깊이 생각하고 제자들이 넘쳐나고 그 詩文은 왕준(王濬)의 누각의 배가 순풍을 만나 석두성(石頭城)으로 흘러들 듯이, 조보(造父)의 좋은 말로 가볍게 수레를 몰아 익숙한 길을 달리어, 그대의 화려한 시편을 들으니 입에는 좋은 음식이 들어오고 귀에 우레와 같은 소리가 들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접때 일찍이 누추한 집에 방문하여 광덕(光德)의 참된 문원(文苑)을 보게 되고, 학식이 뛰어난 사단(詞壇)의 나이든 스승이 처음부터 믿으시고, 서석산(瑞石山)의 신령이 아끼어 숨겨두고 모셔온 곳이 있으니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른 시일에 서로 하나가 되고자 가족을 모두 데리고 서석산(瑞石山)에 들어가 공과 함께 이웃을 맺고 싶으나, 길이 멀고 힘이 미약하여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니, 매달 책상의 눈만 쌓이고 안석에 기대고 있는 게 이러한 마음이오. 아닌 게 아니라 과연 왕래하고 지내는 집안 조카가 있으니 그 이름이 낙중(樂中)이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추성(秋城) 어머니 집에서 자라다 길이 험하고 끊기어 어디로 가서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다가 수년 전에 완고하게 생긴 한 남자가 문을 만들고 그 내력을 말하니 바로 내 조카였소. 그리하여 소매를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고 얼굴을 씻으며 물으니 “지금 어느 곳에 있느냐고 하니 서석산(瑞石山) 아래에 있고, 누구와 이웃이 되었느냐고 하니 바로 석서(石西) 공(公)입니다.”라고 했소. 슬퍼하다가 기뻐하면서 말하길 “그대가 죽지 않았으니 하나의 다행이고, 이렇게 이웃에서 사는 것이 하나의 다행이고, 내가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을 그대가 먼저 하니 또 하나의 다행이네. 이 세 가지 다행스러움이 있어 더없이 행복한데 내가 무엇을 걱정하겠나.”하고 했소. 그러한즉 대산(岱山)의 말이 남쪽으로 오고 회수(淮水)의 귤이 북쪽으로 건너는 것이 만물의 이치인데, 사람의 정이 어찌 예나 지금이나 다르겠습니까. 공은 이런 사람은 서로 하나가 되게끔 해야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니, 조카도 즉시 서로 하나가 되는 그것을 보게 되니, 치아 사이의 여론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혼자 살면서 당하는 수모를 면하게 해주니 더욱 다행스러우며 은혜받음이 매우 큽니다. 환히 살펴 잘 알아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婚書
尤庵先生答人曰 書式用儀節 固無不可然以執事文獻 而不用程朱四六之式 有嫌於泥
우암(尤庵) 선생이 사람들에게 답하여 말하길 “의절(儀節)의 서식을 쓸 때, 진실로 일을 맡아서 하는 문헌으로써 할 수 없는 것이 없으니,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사육문의 법규를 쓰지 않는 것은 진흙에 싫어하는 게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條風和鬯 花日綽約 伏請履玆 尊體泰穆 孫兒名某 年長靡室 冰人已告星使 申復許 以令愛俾作良匹 人倫始定 神嘏永錫 契托蘭金 誼結莩玉 旭鴈嗈 辰良日吉 納幣有儀 載遵前式 玆奉瓊函 伏惟鑑察 神嘏一作祚胤
봄바람이 불고 온화하게 풀들이 자라는 가냘프고 아리따운 꽃이 피는 날에 이를 밟아 엎드려 청하니 존귀한 몸 크게 화목하시오. 손자 아이 이름이 아무개인데, 나이가 많도록 가족이 없습니다. 중매쟁이가 사신의 별에게 이미 알리고, 신(申)에게 거듭 허락을 받아 댁의 따님으로 좋은 배필로 삼고 드디어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가 정해졌으니 신의 큰 복을 후손에게 영원히 내려주십시오. 일찍이 친구 사이를 맺어 변치 않는 부옥(莩玉)의 교분을 맺어주었소. 아침 기러기가 짝을 지어 우는 날씨가 좋고 길한 날에 예물을 보내는 풍속이 있어 전의 법규를 따라 수레에 실어서 보내오. 이에 편지를 올리니 엎드려 생각건대 부디 잘 살펴주십시오. 신의 큰 복으로 하나의 후손에게 길이 전하는 복을 만드시길.
又
誼結蘭金 契托莩玉 伏惟 小春尊體百福 僕侄煥國 年長未室 幸因氷議 優蒙金諾許 以淑姿 俾作良匹 旭鴈告期 𤨿鳳叶卜日吉辰嘉 祥和藹翕 百祿是宜 六禮旣洽 室家之壺 祚胤繁錫 古儀玆遵 函幣是式 伏願 尊慈俯賜監察
변치 않은 좋은 우정이 부옥(莩玉)의 교분을 맺어주었소. 엎드려 생각건대 음력 시월에 존귀한 몸 복 많이 받으시고, 저의 조카 환국(煥國)이 나이가 많은데 가정을 이루지 못하다가 다행히 중매쟁이와 논의하여 후하게 입은 김에게 허락을 받고 아름다운 자태로 좋은 배필로 삼으니 아침 기러기가 기일을 알리어 옥처럼 목소리 고운 봉황이 알맞게 점치니 날짜가 길하고 때가 아름다워 상서롭고 화목함을 무수히 거두시고, 백 가지 복을 마땅히 받으시고, 육례(六禮)가 이미 흡족하니 온 집안이 넓어지고 복을 자손에게 전하여 영원히 번성하십시오. 이에 옛 의식에 따라 이 법규대로 폐물을 담은 상자를 보내니 엎드려 원합니다. 존귀하고 자애로우신 분 몸을 굽혀 살펴주십시오.
양석모(楊錫謨)
1848년(헌종 14)∼1918년. 조선 말기 유학자. 자는 성윤(聖允)이고, 호는 심주(心洲) 또는 재시당(在是堂)이다. 본관은 남원(南原)이며, 전라북도 임실군(任實郡) 삼계면(三溪面) 아산리(阿山里) 출신이다.
증동몽교관(贈童蒙敎官) 취계(醉溪) 양집하(楊緝河)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건원릉참봉(建元陵參奉)인 양석원(楊錫源)의 아우이다. 부인은 김해김씨(金海金氏)로 1남 3녀를 두었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과 송병준(宋秉畯)의 문인으로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하였다. 1894년(고종 31) 동학(東學)이 일어나자 고종(高宗)에게 상소를 올려 동학을 비판하였다.
1910년(융희 4) 경술국치(庚戌國恥)가 되어 나라를 잃자, 초가를 짓고 천산재(天山齋)라 칭하고는 역사서를 엮어 『국로항추(菊露抗秋)』라고 이름하였고 그가 졸한 뒤에 손자 양문규(梁文圭)가 출간하였으며 후손 양병석이 추보(追補)하여 『조선사(朝鮮史)』라는 이름으로 개칭 발간하였다. 유집(遺集) 5권이 있다.
묘소는 전라북도 임실군 덕치면 사곡리 국수봉에 있다.
贈具有述書 甲午十月(1894)
環湖南 五十州 惟錦城堅守 與齊莒 唐睢 竝美 千古 何其壯哉 上爲 朝庭賀得賢守也 帳下文武同心協力以 濟其難 又何錦里多義士耶 下爲 州府賀得賢僚也 曩者 和梅蕪語照過否 夫梅之馨德 前賢之贊備矣 以今改之 雪中孤守不負 少梅之稱 甚盛甚盛 如愚也 病朽日甚 跧蟄弊蝸 耿耿一念 常懸京闕 每趐首北望 可謂痛哭無地 即欲被髮入山 而不得也 寒暄例也 何必覯縷 惟希益勵 貞操以佐戎 籌不蕆
호남의 오십 고을을 돌아보다, 금성(錦城)을 굳게 지키는 걸 생각하니, 제나라 거(莒)와 당나라 수양(睢陽)과 비교해 아름다움에 손색이 없고,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장엄한가. 위로는 조정(朝廷)에서 현명하게 잘 지킨다고 치하(致賀)하였고, 장막 아래에서는 문인과 무인이 한 마음으로 협력하여 그 어려움을 건지었고, 또 금성에 의인(義人)이 얼마나 많은가. 아래로는 고을 관아에서 현명한 관료에게 치하하여, 접때 매화가 서로 화합하여 변변찮은 말로 지나가는지 아닌지를 비추고 대개 매화의 향기로운 덕으로 앞의 어진 이가 이끌어 갖춰놓았네. 지금 고치어 눈 속에서 외로이 지키는 일을 저버리지 않아 적은 매화라고 칭하는 것은 매우 훌륭하고 너무나 훌륭하나 어리석은 것 같네. 병들고 썩어 문드러지기가 날마다 심하고 다 쓰러져가는 달팽이 집 같은 작은 집에서 움츠려 칩거하면서도 오직 한 가지 생각만 마음에서 잊히지 않아 항상 서울 궁궐과 동떨어져 있으니 매일 머리를 쳐들고 북쪽만 바라보고 있네. 그야말로 통곡하려고 해도 땅이 없으니, 곧장 머리를 풀어헤치고 산에 들어가고 싶으나 그러지 못하였네. 춥고 더운 것은 구태여 곡절을 밝힐 필요가 없겠지. 곧은 절개로 군대 일을 보좌하는 데에 더욱 힘써주길 바라며, 계책은 갖추지 못하였네.
與本州守城諸執事書
同年十一月崔景先入本州 稱以犯羅勒使起軍 衆論腦懼
事到極難處 以義理 斷之 則天下無難事矣 助順討賊 義理之正者也 助賊討順 義理之悖者也 今日之擧出於 助順乎 助賊乎 自東擾以後 惟錦城堅守 非但守土之官 效忠竭誠 其將佐僚屬 同心協力 以死守義 他邑則彼徒之來 音樂而導之 牛酒而餽之 閭里 疲於供頓道路 困於迎送件件支應 惟患不及 至於軍器之濫取 邑錢之橫索 稅布之擅奪 愈往愈甚 全境蕩殘 氣息奄奄 末乃驅入 於勒道運動 不得渠輩視之如心復 弄之如掌股 曰者 景先之人也 以犯羅爲名 勒使動兵 迫脅之地 莫何誰何鳴乎 吾鄕四十二坊 曾無一人義士乎 見今羅州帶 招討之命 非一邑 守城之役 乃一路專征之兵 羅可犯乎 犯羅者賊也 諸君平日 以氣義自負 今若㤼於威勢 未免景先之助傍 則其奈萬古之咥笑 何哉 且以利害死生言之 往古來今 依賊而全活 未之有也 冀靑徐兗赴 黃巾而就殲關隴 河洛投綠林而自戕 吾恐光邑之禍迫在朝夕也 鳴乎 吾鄕自屢百年來 忠義輩出有 若高忠烈 金忠壯 全龜城 鄭錦南 諸賢以風節 特著於一世 豈意 今日闔境 反墮於東徒之淵藪也哉 言念及此 不覺心寒骨冷 然而苐有一事可善 後者相機占 便奮發義聲 斬巨魁一二人頭 將功贖罪 則庶可有辭於後世 惟諸君圖之
일이 극히 어려운 처지에 놓여도 의리(義理)로 끊으면 세상에 어려운 일이 없을 것이오. 순한 것을 돕고 적을 없애면 의리가 바른 자요, 적을 돕고 순한 것을 없애면 의리를 어지럽히는 자요. 오늘 순한 것을 돕는다느니 적을 돕는다느니 하는 말을 들어서 내보내는 것은 동학으로 세상이 어지러워진 이후에 오직 나주를 굳게 지키는 거뿐만 아니라 다만 영토를 지키는 관원은 충성과 정성을 다 바쳤고, 그 장교와 하급관리가 한 마음으로 협력하여 죽음으로써 의리를 지키어 다른 지역은 무리가 오는 것을 즉각 피하여 음악으로 인도하고 소를 잡고 술을 빚어 보내니 마을에서는 도로에서 술을 내어 손님을 대접하느라 피곤하고, 관리를 맞이하고 보낼 때마다 응대하느라 곤란하니 오직 우환이 미치지 않았을 뿐이지 군대 무기를 멋대로 취하고 읍의 돈을 토색질하고 조세로 바친 베를 멋대로 빼앗아 갈수록 심해져 전 지역이 죄다 잔폐(殘廢)하여 숨이 끊어질 듯이 약해지자 끝내 미륵 도교의 운동에 몰아넣고 무리를 얻지 못하게 되자 심복처럼 쳐다보고 손바닥과 정강이처럼 가지고 논다고 말하는 자가 경선이라는 사람이오. 나주를 범한다는 명분으로 억지로 병사를 움직여 협박하는 처지인데 왜 아무도 울리지 않는단 말인가. 나의 고향 마흔두 개 고을에 일찍이 뜻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인가. 지금 나주 일대를 보니 초토사(招討使)에게 명하길 “한 개의 읍이 성을 지키는 일을 하지 못하면 일방적으로 멋대로 병사를 정벌하여 나주를 범할 수 있고, 나주를 범한 자는 적이오.”라고 했소. 여러분이 평소에 기절과 도의로 자부하고 있는데, 지금 만약 위세에 겁을 먹고 경선을 곁에서 돕는 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즉 그것이 어째서 오랜 세월 동안 웃음거리가 될 것이며 또 이익과 손해를 따져 죽고 사는 일을 말할 수 있겠는가. 예부터 지금까지 적에게 의지해 목숨을 살린 적은 있지 않았네. 기주(冀州) 청주(靑州) 서주(徐州) 연주(兗州)로 나아간 황건족은 관롱(關隴)에서 전멸하고 하락(河洛)은 푸른 숲에 던져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네. 내가 광주 읍에 재난이 닥치어 아침이나 밤이나 두려워하고 있으니, 오호통재라! 우리의 고장에서 수백 년 동안 배출한 충신과 의인이 있으니, 충렬공 고경명 구성공(龜城公) 전상의 금남공(錦南公) 정충신 같은 여러 현인이 풍채와 절기로 당대에 특별히 드러냈는데, 어찌 오늘 온 고을이 도리어 동학(東學) 무리가 모여드는 곳으로 떨어지리라 생각이나 했겠는가.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치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서늘하고 등골이 오싹하였소. 그러나 차제에 잘할 수 있는 일이 한 가지는 있을 것이니, 뒤에 사람들은 서로 절호의 기회를 점치어 곧장 의로운 소리를 외치며 마음과 힘을 다해 떨치고 일어나 우두머리 한두 사람 머리를 베는 공을 세워 죗값을 치러야 후세 사람들에게 할 말이 있게 될 것이니, 제군들이여 도모하라.
與楓岳金士誠書 乙未(1895) 春
滔滔者擧世 皆是惟頹波一柱 貴門爲然信乎 忠壯遺烈 有所薰襲者存也 醉歌亭 韻搆拙已 久亂離後 人事即一滄桑 今才送 呈覽後 斤敎如何聞 芝谷諸賢 皆安湊泊何幸如之 竊擬扶藜一普顧 此病朽抖擻 無日 姑未指摘的悵歎
넘쳐 흐르는 큰물처럼 도도히 흐르는 세상이 모두 거세게 흘러내려 가는 한 줄기 같다고 생각하는데 귀하의 집안에서도 그렇게 믿는지요. 충장공이 후세에 남긴 업적은 향기처럼 스며드는 것들이 있습니다. 취가정(醉歌亭)에서 지은 시는 졸렬할 뿐입니다. 지난 난리 후에 사람 일이 즉 하나의 상전벽해처럼 덧없게 되었습니다. 지금 수재자를 보내어 바친 글을 살펴본 후에 다듬고 가르쳐 주시는 게 어떠냐는 말을 듣고 지곡리의 여러 현인이 모두 편안히 한데 모이면 무엇이 이같이 행운이겠습니까. 가만히 지팡이에 의지해 한번 두루 돌아보니, 이쪽은 병들고 썩어 문드러져 기운을 차리는 날이 없고 아직은 언제라고 분명히 가리키지 못하니 슬퍼서 탄식만 나옵니다.
與松沙奇參奉書
天心 悔祲氛 惡廓淸 從此 生靈 庶可安息 謹問 暮春者 經體萬護 仰溸且頌 李氏回祿 雖屬過境驚 病生衰朽 日甚 奈何 向者匪徒之起 鄙門無一投染 良覺快活 五六村秀 爲其薰襲 使赴講會 倘無棄而卒敎之 幸孰大焉 族侄煥龍 重病餘勇赴 其學誠 可嘉 今望日 飮禮聞 極欣抃 另圖晋參 姑留不備
하늘의 뜻이 요망스러운 기운을 뉘우쳐 나쁜 것을 없애 깨끗해지니 이를 따르는 백성이 모두가 편안히 쉴 수 있을 것이오. 삼가 묻소. 늦은 봄에 경서를 공부하는 몸 잘 보호하시는지요. 그립고 또 칭송하오. 이씨가 화재를 입었다는데 비록 지나간 일지만 놀랍소. 병이 생겨 쇠약하고 썩어 문드러지기가 날마다 심하니 어찌해야겠소. 얼마 전에 비적의 무리가 들고일어났는데, 비루한 우리 가문에는 던져서 물든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시원하고 상쾌한 일임을 깨달았소. 대여섯 마을의 빼어난 인재에게 그 향기가 스며들도록 경론을 강의하는 집회에 들어가라고 시켰는데 차마 버리지 못하고 마침에 가르치니 다행스러움이 무엇이 크겠소. 우리 가문 조카 환용이 위중한 병의 여운이 있음에도 용감하게 들어가 그렇게 배움을 성실히 하니 칭찬할 만하오. 이번 보름에 음례(飮禮)가 있다는 말을 듣고 지극히 기뻐서 손뼉을 치오. 특별히 도모하여 가서 참석하겠소. 그럼 이만 줄이겠소.
附松沙答書
去年經歷因 來往士友 奉悉矣 一門潔淨淨 仰認指引有力 人樂有賢父兄 此之謂也 仰賀 匪意惠緘 貴隣 今族種種佳悅 因審體 上難老 實叶賤悰 世下宿祟 兼苦阿睹 良隣阿李失火果有之 方改搆已至竪柱 而孱力可悶 講會以今十五日 飮禮不可 重疊 設行 故權停少年未聞 其由 冒雨發涉良 若飮席惠枉 欣企
작년 겪은 일의 원인을 오가는 선비와 벗들이 받들어 잘 알았습니다. 맑고 깨끗한 청결한 한 가문이 방향을 가리키고 인도하는 힘이 있음을 우러러 알았는데, 사람들이 어진 아버지와 형을 갖기를 바란다는 말이 이를 이르는 것이겠지요. 우러러 치하합니다. 뜻하지 않게 귀하의 이웃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지금 가문이 여러 가지로 아름답고 기쁘게 합니다. 인하여 몸을 잘 살피어 간절히 바라건대 늙지 말고 정정했으면 하는 것이 진실로 저의 마음과 합당합니다. 대대로 내려온 묵은 병과 겸하여 눈동자가 고통스럽습니다. 어진 이웃집 이씨가 실수로 불을 낸 적이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개축할 시기가 이미 이르러 기둥을 세워야 하는데, 힘이 나약하니 고민스럽습니다. 강회(講會)로 열리는 이번 십오 일 음례(飮禮)는 베풀어 행하는 일이 거듭 겹치어 못할 것 같습니다. 예전에 권정례(權停例)는 나이가 어려서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빗발치는 비를 무릅쓰고라도 건너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약 술자리에 찾아와 주신다면 기쁜 마음으로 우러러보겠습니다.
上烏山判書 錫龍 書
泮邸薰德 已積年事 嶠湖落落 聲光阻閡 慕仰曷極 謹伏問 秋涼台體 動止候 運享 萬旺 伏溸區區不任 去年匪擾 即儒家九六 而仁州酷被 其祲 滄桑往劫 不必更提 湖南亦是同病追 惟神戄 就白 懸車辭紱 養德山林 頤神 有方古賢 所謂 歸來平地作神仙 不勝忻賀萬萬 宗下生病朽日甚殊 非曩時人貌樣 伏歎 苐伏聞 太師先祖碑誌復出 兆域重新 宗人二員來 此收錢 果有是事否 下示 伏望
성균관에서 향기로운 덕을 이미 여러 해 모시다 영남과 호남이 멀리 떨어져 성광(聲光)이 막히니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 어찌 다하겠습니까. 삼가 엎드려 묻습니다. 서늘한 가을에 높으신 몸 거동은 좋으시고 운수는 형통하고 편안하신지요. 엎드려 그리워하니 울적하여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작년 비적 무리가 떠들썩하게 들고일어나자 즉각 학자들이 음으로 양으로 도왔으며 인주(仁州)가 혹독한 피해를 봤습니다. 그런 이상한 기운으로 푸른 바다가 뽕나무밭이 되듯이 시간이 빠르게 흘러 다시 제기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호남 또한 이 같은 병에서 구하니 귀신도 놀라워합니다. 나아가 여쭙건대 벼슬을 그만두고 산림에서 덕을 기르신다는데 마음을 가다듬어 고요하게 정신을 수양하는 방법이 옛 현인에게 있었으니 소위 신선이 땅으로 돌아와 만들었다 할 만하니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고 무한정 경하드립니다. 저는 병들고 썩어 문드러져 날마다 죽을 만큼 심하여 접때 사람 모양이 아니라서 엎드려 탄식합니다. 제자가 삼가 듣자 오니 태사공(太師公) 선조의 비석에 새긴 글을 다시 새기고 묘역을 거듭 새로이 한다고 종친 사람 두 명이 와서 이리도 돈을 거두니, 과연 이런 일이 있는지 보여 주시기를 엎드려 간절히 바랍니다.
附烏山判書書
泮邸 霎晤 已多茹悵 即承耑函如對芝宇 謹審沍寒 靜裏起居 一護淸重 慰沃無已 宗人 桑楡晩景 收拾之工 披覽經籍 而苦無良友對討 奈何 昨秋 東擾 過去事 不必更提 而今者云云之說 即大命近止也 安有用夏 而變夷哉 悶歎悶歎 所謂 收錢有司 是挾雜浮浪之事也 太師公 設壇行祀 則豈有掘人塚禁止乎 初無是事 諒之如何
성균관에서 잠깐 만나고 이미 여러 해가 지나 아쉬웠는데, 곧장 편지를 받으니 그대의 얼굴을 대하는 것 같소. 아주 심한 추위에 몸은 삼가 잘 살피는지요. 고요한 속에서 생활하며 이 한 몸 맑고 중후하게 보호하니 위로가 쏟아짐이 끝이 없소. 종인께서 해 질 무렵 뽕나무와 느릅나무와 같은 늦은 나이에 사태를 수습하는 솜씨를 발휘하셨는데, 성현들의 책을 살펴봐도 마주 보고 토의할 좋은 벗이 없어 괴로우니 어쩌겠소. 작년 가을의 동학 난은 이미 지나간 일이니 다시 제기할 필요가 없다고 지금 운운하는 말들은 곧 나라의 운명도 다했다는 뜻이니, 중화의 문물제도를 써서 종전에 젖은 오랑캐 인습을 어찌 변화시키겠소. 민망스럽고 한탄스럽소. 소위 벼슬아치가 돈을 거두고 다니는 것은 협잡(挾雜)하고 부랑자들이나 하는 짓이오. 태사공(太師公)의 묘에 단을 설치하고 제사 지내는 건 본받을 만하나, 남의 무덤을 파내는 걸 금지하는 게 왜 있겠소. 처음부터 없었던 일로 생각하는 것이 어떻겠소.
與友人書
昔倪文正有言 人皆曰 捨苦取樂 若有意於取捨 則不見其樂 只見其苦 惟胸中無事者 隨處 是樂 不但以樂爲樂 亦能轉苦爲樂 近來山居 涔寂始信 此語 極有味也
옛날 어린 文正公이 남긴 말이 있네. “사람들은 다 괴로움을 버리고 즐거움을 취하라고 말하는데, 만약 취하고 버리는 데만 뜻이 있으면 그 즐거움은 보지 못하고 다만 그 괴로움만 보는 것이다. 가슴 속에 아무 일도 없는 자는 어디에 있으나 이처럼 즐겁다. 다만 즐거움 때문에 즐거워지는 건 아니고, 또 괴로움이 즐거움으로 바뀔 수도 있다.” 근래 산속에 살면서 음침하면서 고요하다는 말을 비로소 믿는데, 이 말에는 참으로 깊은 맛이 있네.
贈別諸生書
諸君 從余學盡 有年矣 藍絲不能添美處 皮徒自冒據 今將入峽 悵缺爲何如哉 苐念諸君課程 與上瑞石 相似已踰 將軍嶺 所未及者 立石瑞石耳 勇往直前 一蹴非難矣 先賢云 指引者 師之功 決意而往 難仰他人 只在自家 用力之如何耳 盖讀書正心爲本領 苟心不在焉 書自書 我自我 書與已 何于經子 每日嚴立課程 須讀百遍過 又連前所受 溫習不輟 自有生生無窮 底味 雖欲按住不得也 此在朱夫子 與魏應仲 書取 而讀之 有餘師矣
여러분이 나에게 와서 학업에 진력한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남사대(藍紗帶)를 차고 벼슬하여 좋은 자리를 더하지도 못하고 뻔뻔하고 아무런 실속도 없이 스스로 억지로 자리만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제 장차 골짜기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서운함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여러분과 밟아온 과정(課程)을 생각하니, 더불어 서석산에 올라 서로 비슷하게 장군령(將軍嶺)을 뛰어넘었고, 미처 뛰어넘지 못한 것은 입석대와 서석대 뿐입니다. 비난 따위는 단번에 차버리고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세요. 선현이 이르기를 “지도(指導)하고 인도(引導)하는 것은 스승의 공이고, 뜻을 결정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자신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므로)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기란 어렵다.”라고 했습니다. 다만 자신이 힘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독서는 마음을 바르게 하는 걸 근본정신으로 삼아야 하기에, 진실로 마음에 있지 않으면 글은 글대로 나는 나 대로 즉 글을 눈으로만 읽고 정신을 딴 데 쓰는 꼴입니다. 글을 이미 알려줬고 성인을 글(經書)과 현인의 글(子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매일 과정(課程)을 엄하게 세우고 모름지기 글 백 편을 두루 읽어야 하며 또 전에 받은 것을 이어서 다시 익혀 공부하고 멈추지 않으면 저절로 바닥에 깔린 의미가 생기고 생겨 끝없이 있을 겁니다. 비록 편안히 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으며, 여기에도 주희(朱熹)와 더불어 위응중(魏應仲)이 있으니, 책을 읽기만 한다면 스승은 많을 것이오.
上堤川別告 丁酉(1897) 四月
禮書之外 夫復何言 年齡隆邵 精力康旺 意謂克享期頣 豈料捐館遽 在今日 居諸水駛 襄奉已擧於花溪 即古賢人 迻葬于周之義 而佳城預占 仰想孝心 无憾矣 某義當匍匐 而道塗脩敻 衰病纏身 趍晋末由 撫念平昔眷愛之情 孤負實多 愧悚悚 伏願僉體節宣 自愛以副遠望 不備謹疏
예서(禮書) 이외에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나이가 많아도 심신의 활동력은 왕성하니 능히 백 세를 누릴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어찌 갑자기 살던 집을 버리고 저세상으로 가실 줄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지금에 있어서 세월이 물같이 빨리 지나갑니다. 장례를 화계(花溪)로 미리 거행한다는 것은 곧 옛날 현인들이 주나라로 이장한 뜻이기에, 무덤을 미리 점치어 보건대 효심을 우러러 생각하니 여한이 없습니다. 아마도 의당 자빠지고 넘어져 기어서라도 가야지, 길은 멀고 아득하며 늙고 병든 몸으로 뒤쫓아 가야 하느냐는 것은 하찮은 이유입니다. 예전부터 보살펴 사랑해준 정을 생각하니 기대를 저버린 것이 실로 많기에 부끄럽고 송구스럽습니다. 엎드려 바라니 여러분 모두 몸조리 잘하시고 건강하기를 멀리서 바라니 부응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이만 줄이고 삼가 올립니다.
與小雅趙茂朱 書 十月
且看 寒花晩節香 百載之下 但聞其語 未見其人 今爲小雅先生 敬誦之矣 伏問 雷腹靖體康旺 孤松五柳 去神仙不遠 柴桑風味 遡禱無已 向者惠覆 爲東籬秋色寫出一副畫本 豈花之神假手 而設自家風標也歟 可謂 同梅而淸淸在梅前 同梅 而馨馨在梅外 至如樗櫟朽散 百無近似 而推詡太過 仰認 大君子弘度 謙謙自牧 謬加奘喩 因以施警策也 不然 何以得此聲 於梁楚之間哉 慙愧 窮山雪中頹蟄 无聊如坯戶蟲 無一點生氣適者 西山一友有 木果之惠 以十絶補塞 出於一場墨戱 玆錄呈覽 此可悉鯫生之無大警耳 姑縮不備
늦은 계절에 더 향기로운 국화를 백 년이 지나 다시 본다고 합니다. 다만 그 말은 들고 그 사람은 보지 못했는데, 지금 소아(小雅) 선생을 위하여 삼가 말씀드립니다. 엎드려 묻습니다. 편안한 몸은 건강하고 기운은 왕성 하시는지요. 한 그루 소나무와 버드나무 다섯 그루가 있으니 신선이 사는 곳과 그리 멀지 않아 도연명이 살던 시상(柴桑)의 풍미가 느끼려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기도해도 끝이 없습니다. 접때 보내준 편지는 동쪽 울타리의 가을 빛깔을 한 벌의 화폭에 똑같이 베낀 거로 생각 들게 하는데, 어떻게 꽃의 신에게 손을 빌리어 자신의 모습을 설명하게 하였는지요. 과연 매화와 같은 맑고 맑은 게 매화 앞에 있고, 매화와 같은 향기롭고 향기로운 게 매화 너머에 있다 할 만합니다. 개가죽나무 같이 썩어 흩어져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사람이라서 사리에 들어맞는 것이 전혀 없고, 추켜올려 자랑하는 것은 너무나 지나친 행동입니다. 우러러 알고 있습니다. 큰 군자는 넓은 도량으로 겸손하고 겸손하여 몸을 낮추는 것으로 자신의 수양하고, 그릇되게 깨우치도록 장려하기 쉬워 이로 인하여 경책(警策)을 가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명성을 양나라와 초나라 사이에서 무슨 까닭으로 얻었겠습니까. 몹시 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 깊은 산에 눈 내리는 가운데 바람까지 세게 불어 틀어막혀 지내니 무료하기가 벌레가 구멍을 막아 활발할 기운이 한 점도 없다고 하는 게 딱 맞는 것 같습니다. 서쪽 산에 한 벗이 있어 과일의 은혜로 십절(十絶)을 보충하고 메워 묵의 놀이 크게 한판 벌이어 출판하였습니다. 이에 기록하여 보내니 봐주시기 바랍니다. 이는 모두 소인이 크게 깨달은 게 없기에 가능할 뿐입니다. 더는 준비하지 않아 이만 줄입니다.
附小雅書
石西老人 蕭寒勁貞 與寒花爭節 晩香疎影 經秋彌榮 不啻古人所云 花開重陽 但稱節物 無關風操者比矣 何其盛哉 何其盛哉 如賤者素無貞質 又兼多 故六十年 波浪風塵 備嘗浮沈 金粉桅蠟 變幻百端 居然霜降水落 歲不我與 今將爲草亡木卒 桃李之艶冶已 不得與 凌霜嘉卉幷驅抗衡 而猶其無言成蹊 或有可取 今此鹵劣 又不得與 桃李之數者聞 石西老人之風 安得不通身流汗 走而且僵 但當避之三舍 以待進退之命而已 先生誤知爲菊之同愛 而特下轉語 賤者自分無狀 急於自鳴 寒暄之問遂 在後段矣 書後有日 更惟辰下啓處靖穆 寢啗無損脤 人劣劣一依 倦睡飢飧 只是依舊 自在身分 其外 都不與知 雖家人子孫 往往不相見者 幾日 若此懶癈有何人理 慙愧向君子道也 雲藍 時日相見宋竗 近患兩瘧委頓 幾朔日前 躬往問病 而歸耳 杖銘 及三絶句 儘是合作 反讀史 尤是功 當賤者之見 亦偶與此相似 所謂愚者 千慮之得也 前示諸詩 亦另置座右 時取讀之 幷擬續貂耳
석서(石西) 노인께서는 바람 몰아치는 추위에도 굳세고 지조가 곧으며, 늦가을에 핀 국화꽃과 더불어 절개를 다투십니다. 늦은 계절의 향기와 드문드문 드리운 그림자 가을이 지나며 더욱 영화롭습니다. 옛사람이 이른 것처럼 ‘꽃 피는 중양절’ 만은 아니고, 다만 철 따라 나는 산물과는 무관하게 풍채와 지조에 비교해 말합니다. 얼마나 성대한가! 얼마나 성대한가! 천한 사람한테는 원래 곧은 자질이 없듯이 또 아울러 많습니다. 그렇기에 육십 년 동안 파도치고 바람에 먼지가 이는 어지러운 세상에 성하기와 쇠하기를 두루 겪고, 금가루를 발라 표면을 중시하고 실질을 가벼이 하고, 온갖 방법으로 종잡을 수 없이 빠르게 변하고, 남모르게 슬며시 서리가 내리고 물이 떨어지듯이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이제 장차 풀과 나무처럼 시들어 없어지려고 하고, 복숭아와 자두의 요염함은 이미 다하여 함께 할 수가 없지만, 서리를 능멸하고 아름다운 나무와 풀은 서로 달리어 지지 않으려고 맞섭니다. 그러나 오히려 복숭아와 자두는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길이 생기듯 혹시 취할 만한 자가 있는지요. 현재 저는 우둔하고 졸렬하여 또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 남이 천거한 좋은 인재 수 명이 석서(石西) 노인의 기풍을 듣고 어찌 온몸에 땀을 흘리며 달려가다가 또 넘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당연히 삼십 리를 떨어져 오라고 할지 가라고 할지 처분만 기다릴 뿐입니다. 선생께서 과분하게 저의 재주를 알아보시고 대접하여 주시어 저도 똑같이 국화를 사랑하게 되었으며, 특별히 미혹한 말을 깨달음으로 전향하도록 하는 말을 들려줬습니다. 천한 사람은 자신이 버릇이 없기에 스스로 소리를 내기에 급합니다. 안부를 묻고 마침은 뒤의 문단에 있었습니다. 편지를 보내주시고 며칠 지난 후에 보내주신 편지를 다시 생각건대 책상다리하고 편히 앉으시고 평안하고 화목하며 잠자리에서도 먹고 맥의 손실은 없는지요. 사람이 열악해지면 한 가지에 의지하는데 피곤하면 자고 배고프면 밥을 먹습니다. 다만 예와 변함이 없는 것은 자신에게 신분만 있다는 겁니다. 그 밖에 것은 모두 알지 못합니다. 비록 집안사람과 자제들이 이따금 가도 서로 보지 못한 지가 며칠인데, 만약 이같이 고질적으로 게으름을 피운다면 인간의 도리라는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군자의 도를 지향하는 사람이라는 게 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 운남(雲藍) 정봉현(鄭鳳鉉)이 송묘(宋竗)와 서로 만난 날에 최근에 두 사람 모두 학질로 힘이 떨어졌다 하여 근심하다 몇 달 전에 몸소 가서 병을 묻고 돌아왔을 뿐입니다. 지팡이에 새기고 더불어 절수 세 수를 모두가 힘을 합하여 짓고, 읽은 역사책을 돌이켜 더욱 공력을 다했습니다. 의당 천한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니 역시나 우연히 이것과 함께 서로 비슷하여 그야말로 어리석은 사람이 천 번을 생각해 얻은 것입니다. 앞서 보여 준 여러 시는 또 별도로 자리 오른쪽에 놔주고 수시로 집어 읽었습니다. 아울러 담비 꼬리에 개 꼬리를 다는 건 아닌지 헤아릴 뿐입니다.
又
十月始見菊坡老 所謂菊花開日 是重陽 即 今日準備 語也 此際詹誦 尤倍平品 伏惟 服體萬旺 閑居 頤養有趣 門下諸公 源源相從 討論經史 錯綜 今古至若 性命之源 理義之關 講之熟 而透到妙鍵矣 切欲躡後塵 趍下風 以聞緖餘 而此亦未得緣薄 奈何病生 一是譾劣 姑未解脫結縛 只恨 命宮有勞碌星而已 鄭雲藍 宋司馬今在座否 恒切 戀戀耳
시월에 처음 소동파 노인의 국화를 보았습니다. 그야말로 국화가 피어난 날이라고 할 만합니다. 이번 중양절(重陽節)은 곧 오늘을 미리 마련해둔 말입니다. 이번 기회에 우러르는 그리움이 평소보다 갑절이나 더합니다. 삼가 엎드려 생각건대 상중에 있는 몸 두루 평안하시고 한가하게 지내시는지요. 마음을 가다듬어 고요히 정신을 수양하는 데 흥미가 있으니 문하의 여러분은 끝없이 서로를 따르며 토론하고, 이리저리 뒤섞여 있는 경서와 사서를 한데 모으십시오. 예나 지금이나 지극히 성과 명의 근원과 의리의 관계 같은 걸 익숙하게 강의하고 잘 꿰뚫는 오묘한 열쇠입니다. 나중에 쌓인 먼지를 밟기를 간절히 원하고 선생을 뒤따라가 학문의 나머지 여론도 들었으면 하는데 이 또한 인연이 박해서 얻지 못하고 병이 생기나 어쩌겠습니까. 모두 재주와 학문이 얕고 보잘것없어서 아직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다만 수명을 점치는 별자리 운수에 악착같이 일해야 하는 별자리만 있는 걸 탓할 뿐이며, 운남(雲藍) 정봉현(鄭鳳鉉)과 송 진사가 지금 자리에 남아 있기를 거부하니 그립고 그리운 마음이 항상 간절할 뿐입니다.
答具有述書
河陽節度得 文武士於幕下 爲千古甚盛事 於今親見之幸 孰大焉 然則 謂湖府 芙蓉池 非過語也 但圭璧在邇 今儀莫接 可謂 屬壁深山 安得無懸懸也 即者惠訊 蒲紙琳琅 慰浣 如對備審窮沍 旅宦典華 署務 不至大費斤運 離闈情事 歲底彌 切爲之供念 病人衰朽 日甚 頹蟄無聊 頓無陽界 思想崦嵫本色 奈何 念間捲硏 入福州山中 與樵牧爲伍 歌呼迭宕 爾我相忘 未知果得計否也 惠蓂近來貴物 明年春色 以小梅之梅信 記得 花花葉葉感感謝謝 賤稿 盡入福 第巾衍中現存 只今年 所得 故略 爾篇謄送耳 菊狂老人 遽作泉下人 江陵風月從 此寥寂 人世泡幻 有如是耶
하양절도사(河陽節度使)가 예하에서 문무를 겸한 장사를 얻어 아주 오랜 세월 무척 장한 일을 이루었는데, 오늘 다행히 직접 보게 되니 무엇이 이보다 크겠는가. 그러한즉 호남 고을의 부용지(芙蓉池)라 일컬어도 지나친 말이 아니네. 다만 규벽(圭璧)이 가까이에 있는데도 오늘날 풍속을 접할 길이 없으니, 그야말로 둥근 옥에 붙은 깊은 산에서 어찌 마음에 걸리는 게 없을 수 있겠는가. 곧 아름다운 옥빛의 부들 종이에 쓴 그대의 편지가 위안이 되고 후련함이 극심한 추위를 살피어 대비하는 것 같네. 고향을 떠나 객지를 떠도는 벼슬아치는 단아하고 화려한 관청의 업무에 부모님 계시는 곳을 떠난 사사로운 감정에 도끼를 휘두르는 데 큰 힘을 소비해야 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아야 하기에 한 해의 끝 무렵에 더욱 절절히 우려스럽게 하네. 병으로 사람이 쇠하고 썩어 문드러져 날마다 심해지고, 무너져 가는 곳에 틀어박혀 사니 무료하고, 인간 사는 세상 아무리 상상해도 엄자산(崦嵫山) 본래의 색이 전혀 보이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스무날께 벼루를 둘둘 말아 동복 산속으로 들어가 나무하고 소 치는 아이와 함께 대오를 이뤄 너와 내가 서로를 잊고 서로 번갈아 가며 방탕하게 노래를 부르려고 하는데 결과가 계획대로 될는지는 모르겠네. 보내준 달력이 근래 귀한 물건인데, 내년 봄빛을 작은 매화로 매화 소식을 기억나게 하니 꽃잎마다 잎새마다 고맙고 감사하네. 미천한 원고는 모두 다 동복으로 가져가고, 집에 있는 책이 든 상자 속에 지금 들어있는 것만 올해 지은 것인 까닭에 간략히 이 시문을 베껴서 보낼 뿐이네. 국화에 미친 노인이 갑자기 죽은 사람이 되고 강가 무덤에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 뒤쫓네. 이리도 쓸쓸하고 적막하고,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환상적인 인간 세상 이와 같은 곳이 또 어디에 있겠나.
與松沙書
歲暮矣 詹望三山 雲色崢嶸 仰懷高風 耿結在中 謹問辰下 經體 葆重 尋數有味 第今侄婦鄭氏夫人 慘呄驚愕 何言 此實天之未定者 寬譬如何 病生 跧蟄窮山如入繭蛹 可笑可歎 日間 投福州山中 當與樵牧爲伍耳 先生大集重刊 斯文之幸 但事鉅力綿 那當竣工耶 舊帙中 答張錫愚改 以答張 而直其下分註錫愚二字 即凡例也 釐正是望
한 해가 저물어 구름 빛깔의 세 개의 산을 바라보니 산세가 높고 험준하오. 고상한 풍채를 우러러 생각하니 그리움이 가슴에 맺히오. 보내주신 편지를 받고 삼가 묻건대 경서를 공부하는 몸 잘 관리하시고 공부를 자주 하는 맛이 있는지요. 다만 지금 조카며느리 정씨 부인이 참혹하게 죽어 경악게 하니 무슨 말을 해야겠소. 이것은 진실로 하늘의 뜻에 정해진 것이 아니므로 관용을 베풀어 너그럽게 깨우침이 어떠하겠소. 병이 생기어 깊은 산에 들어가 누에고치처럼 바짝 구부려 숨어 지내니 웃다가 탄식하오. 며칠 내에 동복 산중으로 들어가 곧 나무하는 아이와 소 치는 아이와 함께 대오를 이룰까 할 뿐이오. 선생의 많은 문집을 거듭 펴낸다고 하니 유학자에게는 행운이오. 다만 일은 크고 힘은 미약하나 어떻게든 일을 마쳐야겠지요. 옛날 책 중에 答張錫愚는 答張으로 고치고 바로 그 밑을 나눠서 錫愚 두 글자를 달아놓는 것이 범례이니 정리하여 바로잡기를 바라오.
與小雅趙侯書 戊戌(1898) 四月
嶠駕利旋園 居頤養 優有繙閱之趣 拱溸且禱 第念華嚴雙溪 嶺湖間名藍 收拾煙霞以爲已有 況晋陽山水 忠義慷慨 不知魚腹之魂 尙無恙 而巖上之血 有斑斑者歟 吊古傷 今斗胆輪囷發於篇章 計不下數千百言 琳琅綺繢切 欲一寓目 而姑未能也 石東 生間 搆一小亭 於萬綠叢中 爲消夏計 每坐來依如羾寒濯淸 但淸凉太過 感冒爲祟有 何良藥可對投者歟 奉呵 以䕺碧爲扁乞賜 君謨之筆以侈 其顔如何 字樣如一草亭恐 好一絶寫呈哂覽焉
높은 산을 가마를 타고 동산으로 무사히 돌아와, 마음 가다듬고 고요히 정신 수양하며 살고 있소. 책을 반복해서 읽는 취미가 넉넉히 있기를 두 손 모아 그리워하고 또 기원하오. 다만 화엄사(華嚴寺)와 쌍계사(雙溪寺)를 생각하니 영남과 호남 사이에 가장 유명한 절로 자기를 위하여 안개와 노을을 거두어 가졌기 때문일 것이오. 하물며
진양(晉陽)의 산수는 충의롭고 강개하여, 물고기 뱃속의 혼을 알지 못하오. 오히려 아무런 병도 없고 바위 위의 피가 얼룩얼룩 남아 있는 것이오. 옛 상처를 생각하며 지금 대담하게 높은 곳에 올라 문장을 소리 내어 말하고 계획했던 수천백 말보다 덜하지 않았소. 옥빛 비단이 끊어지는 걸 한번 눈으로 보고 싶은데 잠시도 그럴 수가 없었소. 석동(石東)은 사는 동안 푸른 수풀 속에 한 개의 작은 정자를 지었는데 여름 더위를 잊게 하려는 계획으로 매일 자리에 와서 기대니 북극으로 날아가 맑은 바람을 쐬는 것 같소. 다만 청량함이 너무나 지나쳐 감기 기미가 있어 무슨 좋은 약을 적절히 투여할 수 있겠소. 하하! 총벽(䕺碧) 현판을 만들어 주기를 구걸하니, 군모(君謨) 채양(蔡襄)의 글씨로 사치스럽게 해주시니 얼굴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소. 글자 모양이 일초정(一草亭)과 같아 두렵소. 좋은 절구 한 수 베껴서 보내니 웃으며 봐주시오.
附小雅答
山游興狂 幾忘老宿 盛度不遺 賜書以問 侑詩以寵 此意 何可負也 向已聞有故 庄之駕 今又德寅來傳 從者 旋復下山 矍鑠蹈厲 何其盛哉 甚賀甚賀 何日還宅體力 無損於撼餘 草亭新搆 別是一世界 綠陰黃鳥 盡爲先生家物從 今華山一半 賤者 不敢不分呈矣 可呵 功服人 全春散浪 已是窮蟄者過分之事 近又有溪亭 山寺 載酒 聽歌之樂 以此卜之 或者 餘生 尙未全窮歟 枉詩語奇 而失擬 不敢當不敢當 走次以上哂覽也 詩曰 山在詩中詩在山 吟魂却 被俗牽還 新詩忽到 驚奇絶 復似頭流更一攀 後人之往 必以先生詩 爲壯觀 則決知 非空殼也 以爲如何 叢碧字 忘拙仰副 雖出於不 敢方命汚穢好江山 則愧甚甚
산에서 노니니 미친 듯이 흥겨워 늙고 오래된 몸을 거의 잊었습니다. 성대한 도량으로 버리지 않으시고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으시고 시를 권하여 총애를 베푸시니 이 뜻을 어찌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에 이미 특별한 사정이 있음을 들었는데, 별장(別莊)의 수레가 지금 또 덕인(德寅)이 와서 전해, 따르는 자가 돌아서 다시 산에서 내려오니 기력이 정정하여 몸놀림이 빨리해 떨쳐 일어나니 얼마나 성대합니까. 몹시 축하합니다. 며칠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체력은 손실이 없고 몸의 흔들림만 남아 있습니다. 초정(草亭)을 새로 지으시니, 어쩌면 온 세상의 짙은 녹음 속 꾀꼬리들이 모두 선생의 집안 물건을 좇으려고 할 겁니다. 지금 화산(華山) 반쪽을 미천한 자가 감히 나누지 못하여 드릴 수가 없으니 웃음이 나오려고 합니다. 상복(喪服)을 입고 있는 사람은 봄이 온전히 파도처럼 흩어져 버렸습니다. 이미 이것은 곤란하여 집안에 틀어 먹혀 사는 자에게는 분에 넘치는 일입니다. 근처에 또 개울 정자가 있어 산속 절에 술을 싣고 가 노래 듣는 즐거움을 이것으로 점쳐 봅니다. 혹자는 남은 생이 여전히 완전히 궁한 것은 아닙니다. 보내주신 시어가 기이하고 흉내 낼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즉시 앞서 말한 글에 차운하여 웃으며 봅니다. 시에서 말하는 ‘산에 시가 있으니 시에 산이 있네’라는 시구를 읊으니 혼이 달아나버려 세속에 물든 몸을 이끌고 돌아오니, 새로운 시가 갑자기 도착해 있어 기함하며 놀랐습니다. 거듭하여 두류산(頭流山)을 다시금 부여잡고 오르는 것과 같아, 후세 사람들이 찾아가서 반드시 선생의 시로 인하여 훌륭하여 볼 만한 광경이 될 것이니, 결단코 빈 껍데기가 아님을 잘 알 것입니다. 총벽(叢碧) 글자는 어떻게 할 것인지요. 졸렬함을 잊고 우러러 선생의 뜻에 부응합니다. 비록 부득이한 데서 나왔지만, 감히 명령을 어기고 좋아하는 강과 산을 더럽히니 비록 매우 부끄럽습니다.
又
日昨 自故山回 寵函墜 寸盥手 折開 乃小雅先生心畫也 第一重攀字惠和 第二重 叢碧 華扁 第三重 鵝山濃墨如拱弘璧 而捫空 靑顧此鄙劣 何以得此 況審嶠旆利旋 體力益旺 又有溪亭山寺 歌酒之樂 大人洪福 來來如海 何如是 無量耶 健羨攢賀 如石生者 蹩躄守堂而已 何幸 先生以華山一半 許分 垂厓綠陰 黃鳥 任意主管 與村秀 幾人優遊 自樂於小草亭上 大人之賜多矣 叢碧方謨鋟刊 鵝山已爲侈 壁攀字 留作案頭 珍無時 不省覽 良覺 山在詩中詩在山 透到三昧 幻境也 十絶 更呈 哂覽 後揮却如何
며칠 전 고향의 산에서 돌아오니 은혜로운 편지가 도착해 있어, 손을 씻고 갈라서 열어보니 이내 소아(小雅) 선생의 마음의 그림이었소. 가장 중요한 것은 攀 자의 온화한 은혜이고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총벽(叢碧)의 화려한 편액이며 세 번째로 중요한 것은 넓은 옥을 껴안은 것 같은 백아산(白鵝山)의 짙은 먹물이며, 허공을 문지르며 청춘을 돌아보니 이리도 비열한데, 무슨 까닭으로 이를 얻었소. 하물며 높은 산에 꽂힌 깃발을 살피고 아무 탈 없이 돌아왔는데도 체력은 더욱 왕성하고 또 개울가에는 정자가 산에는 절이 있어 노래하고 술 마시는 즐거움이 대인께 큰 복이 바다처럼 오고 또 오니, 왜 이리도 끝이 없는 거요. 매우 부럽고 두 손 모아 축하하오. 돌에서 태어난 자와 같이 절뚝거리며 집을 지킬 뿐인데, 무슨 행운으로 선생께서 화산(華山) 절반을 나눠주시어, 녹음이 드리운 물가는 꾀꼬리가 임의로 주관하고, 시골 수재들과 함께 하는 일 없이 한가로이 잘 지내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소. 작은 초정(草亭)에서 스스로 즐기니 대인께서 주신 것이 많소. 총벽(叢碧)의 글자는 바야흐로 목판에 새길 계획인데, 백아산(白鵝山)이 이미 사치스럽게 되었소. 책상머리에 벽반(壁攀)이라는 글자를 남기니 진기하여 아무 때나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도 진실로 깨닫소. ‘산에 시가 있으니 시에 산이 있네’라는 것은 삼매경을 꿰뚫어 도달한 몽환의 경지요. 절구 열 편을 다시 보내니 웃으며 봐주시고, 그 후에 버리어 돌아보지 않는 게 어떠한지요.
府小雅書二度 六月
德寅來 審問 以患利 遲和老人 此祟畢於年少 必見苦乃可 而復和 非同 强壯之 易爲之 慮仰不比尋常 古云 美人名將 衰老之 狀尤爲可憐 今之石西翁 文雅持世 如景星慶雲 不徒爲美人名將 而駸駸老至 殿屎牀褥 鄙人不爲石西翁憐 而爲世道憐者 惟望珍重 亟速報和 小雅能憊能健 日來草亭 微醺少酒 寓目殘書 頗自不負 老窮至於生 累相忘久矣 不亦快哉 今見宋泰會書 有次盛作韻者 錄呈耳
덕인(德寅)이 와서 자세히 따져 물으니 병환의 기운으로 노인의 화평함이 더디다고 합니다. 이러한 재앙은 나이가 어릴 때 마쳐야 반드시 괴로운 일을 당하더라고 이내 이겨내고 화평함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씩씩하고 튼튼해짐은 쉽게 이뤄지는 것과는 달라서 우러러 염려하니 여간해서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미인과 이름 있는 장수는 늙고 쇠약해지면 모양새가 더욱 가엽다 했습니다. 지금의 석서(石西) 노인께서는 시를 짓는 멋과 풍치로 세상을 지니어 빛나는 별과 경사로운 구름과 같으며, 다만 미인과 이름 있는 장수가 되어 차츰차츰 노년에 이르러 끙끙 앓으며 자리에 누운 비루한 사람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석서(石西) 노인께서 가련한 게 아니라 세상살이가 가련하게 된 것이니 오직 몸을 소중히 하여 신속히 화평함을 알려주기 바라며, 소아(小雅)도 병을 앓을 수도 있고 건강할 수도 있는데, 지난 며칠 동안 초정(草亭)에서 적은 술에 희미하게 취기가 남아 있고, 해진 책을 훑어보아도 자못 자부심을 느끼지 못하고, 늙고 곤궁함이 삶에 이르니 거듭 오랫동안 서로 잊고 지내는 것도 또 유쾌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송태회(宋泰會)의 편지를 보니 성대하게 지은 차운 시가 있어 기록하여 보낼 뿐입니다.
承惠 覆字筆墨飛動 光騰屋脊 固知 大君子 涵養工夫 老當益壯 不以久患 有所損 何賀 如沙坪 壽詩 又是蒼勁 圓蒲少 無俗氣矣 謹當津致之 九月
편지를 받으니 붓과 먹으로 검게 가려진 글자가 나는 듯 빠르게 움직이고 용마루가 빛처럼 휘날립니다. 진실로 대군자께서 학문을 배우고 익힘을 기르고 닦으시니 늙어갈수록 기운이 좋아지고, 오랜 병환으로 손해 보는 바가 있던 게 없어졌음을 알았으니 어떻게 축하해야 할까요. 사평(沙坪)에서 그랬던 것처럼 생일에 써준 축시는 또 이처럼 필력이 원숙하고 힘이 넘치고 둥근 부들이 적으니 세속의 기운이 사라집니다. 삼가 곧 전달받았습니다. 구월
答小雅趙侯書 十一月
日昨 下存 感篆于中 更請 文體典安 頌祝 第先集 旣賜弁券 復加親寫晦翁 所謂 空靑水碧 物外難得之寶者 何以加此 字字感戢 句句銘佩 謹當珍弆之 以爲傳世之 琬琰耳 生依劣 而近聞 洛下所傳 山村進士 晨鷄喂牛 房臥聽兒孫讀書聲 爲當 今無上八字 如愚字 其庶乎近之 可謂晩福奢侈 奉呵 惟祝 雪沍 體宇 益可珍重
며칠 보내준 편지에 감사함을 새긴 마음이 속에 들어있어서 다시 청하건대 글월과 몸 바르고 평안하기를 기리고 축원하오. 먼저 수집한 글에 이미 보내준 서문을 다시 어리석은 늙은이가 친히 베끼니, 그야말로 드높은 하늘과 푸른 물이 속세 밖에서는 얻기 어려운 보물이니 여기에 뭘 더하겠소. 글자마다 감격스럽기가 그지없고 구절마다 고마움이 마음속에 새겨 있으니, 삼가 당연히 소중히 보관함으로써 대대로 전해줘야 할 아름다운 옥일 뿐이오. 저는 보잘것없이 살고 있는데, 근래 서울에서 전해온 이야기를 들었소. 산촌의 진사는 날이 밝아옴을 알리는 닭 소리를 듣고 소 울음소리를 들으며 방에 누워 손자 책 읽는 소리를 들으니, 지금 더할 나위 없는 최상의 팔자가 愚 자와 같다고 하는 것이 거의 가까운 것 같소. 그야말로 늘그막에 누리는 복이 사치스러워 하하! 우습소. 오직 기원하는 것은 눈이 내리고 땅이 오는 계절에 몸을 더욱 소중히 하시라는 거요.
附小雅書三度矣更
德寅 帶安至 已過夜矣 更問寢寜 仰祝 生劣狀 則一印 近日與宋平叔 以文字爲戱 亦多可笑事也 先府君 集序 何等愼重 托非其人 經累時月 猶不能自安 向日 躬枉時付之 以遺集申之 以面詔益 又愧蹙 然竊念 先生之於此事 不以泛愛而命之 鄙人之於先生 亦不敢以皮膜相期 不獲已 下筆而喬山巨壁 有非小眼孔 評泊 以定論者 但以緣起 綴成文字 亦可以覽諒 而疵纇甚多 必一一摘示 如何 篇首正書雖有敎 而姑俟 釐撿更示耳
덕인(德寅)을 데리고 편안히 이르니 이미 밤이 지났습니다. 다시 묻건대 잠자리가 편안하다고 하니 우러러 축하합니다. 열악하고 안 좋은 상태로 살고 있는데, 마음에 뚜렷이 남는 장면 하나는 요사이 송평숙(宋平叔)과 함께 글로써 놀이로 삼으며 또 웃을 일이 많겠다는 겁니다. 선친의 문집 서문은 무엇이 중대하고 무엇을 삼가야 하며, 마땅하지 않은 사람에게 부탁하여 여러 시간이 지나도 오히려 스스로 편안하질 못하였습니다. 저번 때 몸소 오셨을 때 부쳐주시어, 남긴 문집으로 타일러 경계게 하고 문집과 마주케 함으로써 더욱 가르침을 주시어 또 부끄럽고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선생에게 있어서 이 일은 널리 사랑하지 않으시고 분부를 받들지 않으시면 선생은 천박한 사람이며, 또 감히 껍질 같은 얇은 막 때문에 서로 기약도 못 하고 부득이하게 붓을 내려놓고 교산(喬山)의 거대한 벽에 작은 눈구멍도 아닌 것이 정론(定論) 자로서 평하며 머무르고 있습니다. 다만 인연이 일어남으로써 문장을 완성하였습니다. 또 보시고 헤아려주실 수 있을 테지만, 결점이 너무나 많아 반드시 하나하나 지적하여 보여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시문의 첫머리는 진실로 글에 비록 가르쳐주는 바가 있지만, 잠시 기다렸다가 고치고 단속하여 다시 보여 주도록 하겠습니다.
德寅 至憑 安候 賀喜賀喜 生再昨送宋少年 無所事 無聊爲苦況耳 集序不鄙 正 書有敎 相知旣深 不復 自外 敢以大膽書于篇首矣 紙毛已久滯 筆不成字 可諒之原草亦幷上耳
덕인이 건너와서 편안한 소식을 전하니 축하하고 축하합니다. 그저께 소년 송을 보내고 할 일 없이 살아 무료하여 고생스러운 상황일 뿐입니다. 시집 서문이 비루하지 않고 진실로 글에 가르침이 있고, 서로를 알아주는 마음이 이미 깊어 다시는 반복하지 않고 스스로 멀리하여 감히 대담하게 시문의 첫머리를 썼습니다. 종이에서 떨어진 털 부스러기는 바닥에 쌓인 지 이미 오래인데 붓은 아직 글자를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원고 초안은 또한 아울려 올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山雪皎然 而不能乘興 王子猷 本非別人 亦輸此籌 況可做向上事乎 忽承珍函 宛是古人之作益 仰高風 恭審比日 體力康吉 尤賀尤賀 鷄晨牛火 臥聽書聲 果是佳境 山中人 淸福 賴有此矣 古今 天下有樂有憂 王天下失 天下皆不與焉 但可以意會者也 生爲三川 高友壽日之速往赴 尾三日 昨夜歸巢 與八九老人 痛飮方病酒 而臥矣 拙文與書 何足稱之 而尾屢數慰藉 尤可知爲先集所重 孝思錫類之盛 雖此頑鄙 可以興感 且又知愧 而已月來所得 古文近四十首 有稍純稍雅 或戱或雜 又有可笑者 而原草爲宋少年持去 且無以費寫呈覽 可恨可恨
柬小雅侯 十二月 在詩集中
산에 쌓인 눈이 아주 밝은데도 흥이 나지 않으니, 왕휘지(王徽之)와 같은 본디 별난 사람은 아니지 싶습니다. 또 이렇게 산가지나 나르고 있으니 하물며 수준을 향상케 하는 일을 해낼 수나 있겠습니까. 뜻하지 않게 받은 보배로운 편지에 모아놓은 옛사람의 작품까지 보태주시고, 고귀한 풍채를 우러러보며 날마다 몸과 힘씀 생각하니 건강하고 길하다니 더욱 축하합니다. 날이 밝음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 듣고 쇠죽 쑤는 불을 지피고 누워서 책 읽는 소리를 듣는다니 과연 아름다운 곳이며, 산에 사는 사람에게 청아하고 한가하게 사는 복이라서 눌러앉게 하는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천하에는 즐거움이 있고 걱정거리도 있으며, 왕은 천하를 잃으면 천하의 모든 것은 참여하지 않습니다. 다만 뜻을 깨달은 자만이 삼천(三川)에서 살 수 있습니다. 높으신 벗의 생일에 빨리 가서 삼일 말미인 어젯밤 여덟아홉 노인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셔 바야흐로 술병이 생기고 드러누웠습니다. 그다지 잘 짓도 못한 문장과 글로 어찌 칭찬받을 만하겠으며, 끝에 가서 여러 차례 위로하고 도와주니 더욱 선친의 시집을 소중히 여겨야 함을 알게 하고, 효도하는 마음이 대대로 이어져 성대해질 겁니다. 비록 여기가 완고하고 비루해도 감흥을 일으킬 만하고, 더구나 부끄러운 줄을 알아 이미 지난달부터 지금까지 얻은 옛글은 거의 사십 수로 조금은 온전하고 조금은 올바른 게 있어 혹은 기쁘기도 하고 혹은 복잡합니다. 또 우스운 것은 원고 초안을 송 소년이 가져가 버렸다는 겁니다. 또다시 베껴 써서 보내어 받아보게 할 수가 없으니 한스럽고 한스럽습니다.
附小雅答
承讀俯惠 長篇 遒健有不老之氣 溫雅有春和之音 何其盛哉 況其眷念 無似有踰涯分 始而感戢 繼又惶愧 歲行云 徂衰老之感 推可仰認 重爲之邑邑 不審 即日盛 體日康 爲祝 生孤露 窮獨之懷 臨年益難自抑 只以大慧禪師 所云 着衣喫飯 敎子弄孫 莫非佛事爲心 還覺無累也 詩篇 率爾和呈 佛頭着穢 深恐且愧也 來詩有通韻 奉奈貝太 四字 而拙性 從不喜通韻 自爲改補矣 古人 元不用一韻 酬和 後世 仍有步韻 依次者 彼此恐 亦無相妨矣 以爲如何
보내주신 편지를 받아 읽으니 긴 시문에 굳세고 강건해 늙지 않는 기운이 있고, 온화하고 우아하여 화창한 봄날의 소리가 있으니 얼마나 성대하오. 하물며 돌아보며 생각하니 불초한 자식에게 분수에 넘치어 비로소 감격스럽기가 그지없고 이어서 또 황송하고 부끄럽소. 세행(歲行)에 이르길 비로소 노쇠한 감정을 미루어 우러러 알 수 있으니 거듭 불안하게 하여, 의심스러운 것은 즉 날로 융성하고 기체 날로 건강하여 나라를 위해 기도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오. 외롭게 살면서 궁핍한 홀아비가 소회를 밝히니 늙은이가 되니 스스로 억제하기가 더욱 어렵고, 다만 대혜선사(大慧禪師)로서 말하는 바 “옷 입고 밥 먹고 자식 가르치고 손자와 장난치는 일을 아닌 게 아니라 부처의 일이라 마음먹으니 도리어 거리낄 게 없구나.” 시편을 편하고 경솔하게 불쑥 화운하여 보내니 부처의 머리에 똥칠할까 두렵고 또 부끄럽소. 가져온 시에 서로가 통하여 쓸 수 있는 운으로 奉奈貝太 네 글자가 있으며, 용렬한 성품에 따르려니 통운이 기쁘지 않아 스스로 다시 고쳐 보수했소. 옛사람이 원래 한 개의 운을 쓰지 않고 화운하여 후세에 주면 인하여 순서대로 원래의 운을 쓰니 피차가 두렵고 역시나 서로 거리낌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할까요.
答小雅趙侯書 同月念六
寅仲 回承拜寵 函惠 和長篇 濯盥以讀 蒼然之色 淵然之味 深得 古人體製 信乎大雅 佩玉之文有 非小巫搖鈴者 所可窺測也 古人不用一韻 酬和 誠如尊戒耳 衰老之感 窮獨之懷 可謂同病然 千古名達 所不免 謂之奈何 惠寄春時 尤荷不鄙 忘拙搆蕪 哂覽後覆瓿 母掛第二眼 如何
인중(寅仲) 돌아온 절을 올리고 편지에 화운한 긴 시문을 보내줘 대야에 손을 씻고 읽으니 푸른 빛과 못처럼 깊은 맛을 깊이 얻고, 옛사람의 격식과 모양이 진실로 무척 우아하고 옥을 찬 문장이 있어도 방울이나 흔드는 미숙한 무당은 엿보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옛사람이 한 운을 쓰지 않고 화답 시를 지어 주는 것은 참으로 존경하고 경계하기 때문일 뿐입니다. 노쇠한 감정과 궁핍한 홀아비의 소회는 그야말로 같은 병으로 그러하니 영원히 이름이 알려져도 면치 못하니 말한들 무엇하겠습니까. 봄의 시절에 편지를 보내주시고 인색하지 않게 더욱 돌봐주시어 졸렬함을 잊고 거친 글을 지었으니 웃으며 읽으신 후에 단지나 덮으시고, 두 번째 눈에 걸어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與小雅趙侯書 己亥(1899) 正月 三日
歲新矣 敢請小雅先生 體節之安 壽辰漸近 祥和蒲室 大人洪福 如川方至 仰賀 生新舊之感 與齒竝進 三盃 藍尾 輒後於人可笑 壽詩一篇 疊卦字 四十韻 步次呈上 哂覽 如何 命豚兒 替候耳
새해가 되었습니다. 감히 소아(小雅) 선생한테 여쭙건대 몸은 평안 하시는지요. 생신이 점점 가까워지니 부들 집이 상서롭고 화목하고 대인의 큰 복이 냇물이 사방에서 이르는 듯하니 우러러 축하하오. 옛 감정과 최근의 감정이 생겨나, 함께 치아처럼 나란히 앞으로 나아가도 석 잔의 남미주(藍尾酒)가 번번이 다른 사람보다 늦어 우습기만 하오. 생일 축시 한 편을 卦 자를 겹쳐서 사십 운을 따라 차운하여 보내어 드리니 웃으며 봐주시는 게 어떻겠소. 아들에게 명하여 대신 안후(安候)를 여쭐 뿐이오.
附小雅答
旣賜玉札 又屈瓊章 新年三日 獲寶已不貲 嗣此 通運推可知 莫非仁惠所及 且感 且喜 無以容喩 恭審元正 體力壽康 膝下納慶 賀喜賀喜 生逢新百感 掁觸無悰 但幸 小孫劇危之病 天爲祚宋 今始釋慮 而少瘳之戒 唯恐唯悶 詩篇 又果大放 厥聲前 已退舍 今忽摩壘賈勇 未敢攖鋒拒轍 甚盛甚盛 然詩中 俯屬諸意恐又失實 兵法所云 將欲取之 先爲與之者歟 自顧偏師 何能有爲從 今敻 不敢言詩 而除夕元朝 旣有所作故 又不能終秘 而錄呈耳 胤友命顧 尤益欣感
주옥같은 편지를 이미 주시고 또 구슬 같은 아름다운 문장에 허리를 굽힙니다. 새해 사흘 동안 얻은 보물이 이미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데, 이로부터 트여 터진 운수를 미루어 알 수 있으니, 아닌 게 아니라 어질고 은혜로운 편지가 이르는 바 또 감사고 또 기쁘니 무엇으로도 비유할 수가 없습니다. 공손히 정월 초하루의 체력을 살피니 수명이 강건하고 슬하의 자손에게 경사스러운 일을 받으니 축하하고 기쁘며 축하하고 기쁩니다. 새해를 맞아 여러 가지 감회가 생겨나 몸에 느낌이 닿아도 즐겁지가 않습니다. 다만 다행인 것은 손자의 심각하고 위급한 병이 하늘에서 나라에 복을 주시어 지금은 비로소 염려하는 마음을 풀어놓고 조금 병이 나아져 조심하고 있습니다. 오직 두렵고 오직 걱정스러운 것은 한 편의 시이고 또 과연 자유롭게 말하고 그 소리가 들리기 전에 이미 관사에서 나와 지금은 적의 진지까지 쳐들어가 용기를 북돋아 감히 예봉에 맞서지 못하고 수레를 막지 못하니 심히 극성하고 심히 극성합니다. 그러나 시 속을 허리를 구부리어 살피니 여러 가지 뜻이 모이어 두렵고 또 실제와 다릅니다. 병법에 말하기를 가지고 싶으면 먼저 주어야 한다고 한다는데, 스스로 돌아보니 일부의 군대가 어찌 능히 따라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아득하여 감히 시를 말씀드리지는 못하고 섣달그믐과 새해 첫날에 이미 지은 바가 있는 까닭에 또 끝까지 비밀로 할 수가 없어서 기록하여 보낼 뿐입니다. 아드님께 방문해보라고 명하시니 기쁘게 여기어 감동함이 더욱 더합니다.
又
兒豚帶覆函至 蒲紙瓊瑰 光騰篳戶 新年喜事 孰大於是 況審體力泰旺 憂快晴 尤賀尤賀 拙詩長篇不過 爲助旁 將推詡 太過深愧 且惶示惠二什已達專門赤幟 曷可違越 步次以呈 唯俟麾下進退之命而已 所望不禽二毛耳
손자가 회답 편지를 허리에 차고 이르렀습니다. 부들 종이에 쓴 아름다운 문장에 사립짝 문이 빛이 납니다. 새해에 기쁜 일이 무엇이 이보다 크겠습니까. 하물며 체력이 크게 왕성하고 근심 걱정이 사라져 맑고 산뜻함을 살폈으니 더욱 축하하고 더욱 축하합니다. 긴 시가 졸렬한 시에 지나지 않아 옆에서 조력을 받아야 합니다. 장차 추켜올려 자랑하려 함이 너무나 지나쳐 심히 부끄럽고 또 이십 통의 편지가 이미 도달하여 멋대로 붉은 깃발의 문을 볼까 두려운데 어찌 어기고 차운하여 보내겠습니까. 오직 예하의 처분만 기다릴 뿐, 반백의 늙은이는 사로잡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上藍溪申相公書 丁酉(1897)三月
當在上
竊伏 遐陬反聞 大相公 閤下聲 望德業久矣 齒躋期頤 躬親吐握 實國家之蓍龜 士林之標準也 域內章甫 莫不嚮風引領 以冀致 吾君於堯舜 邦基庶幾奠磐 流俗庶幾回棹 典禮庶幾復元 而竟未之施 豈天無意於斯世 使國之元老 處于荒野 卷而懷之歟 鳴乎 生民无福 一至於此 侍生 稟質 冗下 早習功令 汨汨於科臼 賤年今七十二矣 性命之原 義理之奧 未敢窺測 其萬一 而然 賦性愚直 隨俗浮沈 雖斃不爲也 一造 軒屛瞻德容 而聞謦欬 以悉 緖餘之論 此宿昔 區區之望也 間因申君 德雨槪探 年齡彌卲 精力彌旺 園林泉石 頤養有素 而亦豈非神明 扶持之力耶 因謂德雨曰 藍溪此去 六七日程 今春 幸得少閒 聯袂竝幷策 大擬晋謁 奈此誠力淺薄 世故疊 仍因未遂 素鯫生此恨倘復 如何哉 未謁而先上書 極涉悚惶 敢此忘猥呈眞 伏惟鑑察
삼가 생각건대 멀리 떨어진 곳에 대상공(大相公) 합하(閤下)께서 덕을 바라고 일을 꾸준히 한다는 소리가 돌이켜 들립니다. 나이 많은 백 세의 노인이 몸소 뛰어난 인물을 얻으려고 노력하시니 진실로 나라의 시초와 거북이 되시고, 유림의 표준이십니다. 지역 내에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가 인도하여 흠모하여 본받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임금이 요순에게 이르기를 바람으로써 국가의 기틀이 반석처럼 안치(安置)하길 바라고 흘러 내려온 풍습이 차츰 나아지기를 바라고 나라의 예식이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길 바라는데, 마침내 은혜를 베풀지 않으니 어찌 하늘이 이 세상에 뜻이 없겠습니까. 나라의 원로에게 황량한 들판에 머물게 하고, 자신의 재능을 말아서 품에 감추게 하니, 오호라! 백성이 복이 없어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시생(侍生)의 품성이 쓸데없는 곳에 허비하여 과거 시험에 쓰이는 시문을 일찍 익히고 과거 시험에 쓰이는 고정된 문체에 빠져 골골거리고, 미천한 나이가 올해 일흔둘이고 천성과 천명의 근원과 심오한 뜻과 이치를 감히 만 분의 하나도 엿보아 추측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천성이 우직하고 세상의 풍속에 따라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하니, 비록 쓰러져 죽어 그러지 못하더라도 한번 찾아가 어른의 가까운 곁에서 덕스러운 용모를 우러러보고, 모든 여분의 이론까지 말씀을 듣고자 하는 이것은 그리 멀리 않은 옛날의 구구한 바람입니다. 그사이 인하여 신군(申君)이 덕우(德雨)를 대강 살펴보니 나이가 더욱 높아질수록 정력이 더욱 왕성하고, 정원의 숲과 산수의 경치 속에서 평소 마음을 가다듬어 고요히 정신을 수양하니 또 어찌 하늘과 땅에 계신 신령의 부지하는 힘이 아니겠습니까. 인하여 덕우(德雨)가 일컬으며 말하길 “남계(藍溪) 선생이 이번에 떠나면 엿새나 이레 일정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올해 봄에는 다행히 약한 한가한 시간을 얻어 소매를 나란히 하고 함께 지팡이를 짚으며 찾아가 뵈려고 하는데 어찌 이리도 성실한 노력이 얕고 세상의 일이 겹치어, 이로 인하여 수행하지 못하니 평소 소인이 이러한 한스러운 일을 행여 다시 한다면 어째서 그렇습니까? 찾아가 뵙지 못하고 먼저 글을 올리니 대단히 황송합니다. 감히 외람됨을 잊고 진심으로 보내드립니다. 삼가 생각건대 보아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與松沙奇參奉書 己亥 十月
秋盡冬屆 詹詠冞切 謹問 小春 靜養震艮 衛道保重 山齋 棐梧 尋數有味 溸禱無已病生 自去年 重症以後 神精脫落 形殼苟在而已 惟以秋間 得丈夫孫 自慰耳 大集奉安 宿昔所願 而自春經紀 苦未入量 今纔 家豚替送 分秩之餘或有 餘派可及者歟 惟命是竢
가을 다 가고 겨울이 이르러 우러러 그리움이 더욱 간절하오. 삼가 묻소. 음력 시월 소춘(小春)에 몸과 마음을 안정해 휴양하고 일상생활에는 정도를 지키시고 몸조심하시오. 산에 지은 서재에서 오동나무 도움을 받아 심행수묵(尋行數墨) 즉 책 읽는 맛이 있소. 그리워하고 바라니 끝없이 병이 생기오. 지난해부터 병세가 위중해진 이후 정신이 벗겨져 떨어져 나가고 몸 껍데기만 구차하게 남아 있을 뿐이고, 오직 가을 동안에 대장부 손주를 얻음으로써 스스로 위안을 느낄 뿐이오. 많은 경전을 모아 받들어 편안히 두는 것이 오래전부터 바라고 원하던 일이고, 봄부터 일을 계획하고 처리하려고 해도 생각대로 들어오지 않아 괴롭다가, 이제 겨우 아들을 대신 보내니 책을 나누어 주고 남은 것이 혹 있는지요. 다른 종파에서도 할 수 있을 일이니 오직 기다리고 있다가 시키는 대로 따르겠소.
附松沙答
俄因崔君贊明 槪探震艮 未日 手札忽至 奇事奇事 福川 爲山水名鄕 賢人君子 嘉遯 可謂得地 而石西今爲石東 賢人 不滯一隅 此其一事也 因審難老康福 有 子抱孫 晩福 暃來曷任 仰賀 紙面細字不資 遮眼云 老當益壯矍鑠 可羨如生 則白晝看字 昏花生霧 良可悶憐 先集分帙 無餘 至於家 藏數帙 亦不得保守恨 不早聞命 而爲計也 奈何 以今見求勢 將年間重刊 果爾 則當不置忘域矣
얼마 있다가 최군 찬명(贊明)으로 인하여 일상생활을 대략 엿보았는데, 미일(未日)에 손수 쓴 편지가 갑자기 이르니 기이한 일이고 기이한 일입니다. 동복은 산수가 유명한 고장으로 현인과 군자가 은둔하기 아름다운 곳이 되어, 그야말로 땅을 얻었다고 할 수 있으며, 석서(石西) 지금은 석동(石東)이 된 현인에게 어느 한구석도 걸리적거릴 게 없으니 이것이 그 한 가지 일입니다. 인하여 늙어서 건강하고 행복하기가 어렵다는 걸 훤히 알아, 아들이 있어 손자를 품에 안는 것이 늘그막에 누리는 복이 오지 않으니 어찌 견디겠습니까. 우러러 축합합니다. 지면이 자잘한 글자를 써도 충분하지 않아 눈을 가리며 말하길 나이를 먹고 늙을수록 기운이 좋아지고 노인의 기력이 정정하여 재빠르니 살아 있는 것 같아 부러운데 한낮에 글자를 보아도 안개가 핀 듯이 눈이 침침하니 참으로 걱정스럽고 가련한 일입니다. 먼저 수집해 나눈 책은 남은 것이 없고, 집에 이르러 여러 질의 책을 보관하고 있으며 또 전통을 중히 여기어 유지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고, 일찍이 가르침을 듣지 못하여 계획을 세우려는데 어찌해야 할까요. 이번에 봄으로써 무리를 구해 장차 한 해 동안 거듭 책을 간행할 것이며 과연 그러하면 당연히 잊어버리고 생각하지 않지 않겠습니다.
韓司馬傳 丁卯(1867)
韓司馬 名基佑 其先 淸州人也 世居 光山 爲人愼敏簡重 自少有志節 好讀書於六經 諸子百家 靡不瀜解至 性理緊關處縷析 無遺爲文藻詞燁 然年三十 登戊申司馬生員試 第一 以詞賦 擢節製者二 又以三政對策 獲選 內賜朱子雅誦 及奎章全韻而寵之 歲丙寅秋 洋夷猖獗 江都失守 司馬 慨然奮發 與族人 進士 寅浩 同擧義 設壇於大洞之齋室 時兩親在堂 戎之曰 人之大倫 惟忠與孝 忠於君 即孝於親 須勿以老身爲念也 於是傳檄列邑 軍械衣糧 悉心摹畵 將以某日 促師趲程 未及行賊退 遂酌酒設宴 相與賦詩而罷時冬十月十八日也 噫 司馬之忠肝義膽進 足以折衝鏖陣 樹不世之勳 其未及行命也夫 然君子論人 以志 不以事功 孔子曰 三軍之帥 可奪 匹夫之志 難奪 其後 卜居 島城之瑞巖 課兒而讀書 蒔花種竹 以詩酒 放浪 山水間 余與司馬相識 甚悉 壯其志 高其節 爲之立傳 以竢夫太史氏辨焉
한 진사 이름은 기우(基佑)이고 그의 선조는 청주(淸州) 사람이다. 대대로 살았던 곳은 광산(光山) 행실을 삼가고 총명하고 말을 간략하고 신중히 했다. 어렸을 때부터 지조(志操)와 절개(節槪)가 있었고, 육경(六經)과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책 읽기를 좋아했고, 성리학과 긴밀하게 관계한 곳은 상세히 분석하여 깊고 폭넓게 이해함에 이르지 않음이 없었고, 일부러 멋 내고 빛나게 하는 문장은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 삼십에 진사가 무신년(戊申年1848) 생원 시험에 사부(詞賦)로써 일 등으로 급제했고, 오순절제(五巡節製) 때 과거 시험에 뽑힌 자가 두 명이었으며, 또 삼정(三政)에 관한 대책으로 선택받아 임금이 주자(朱子)의 아송(雅誦) 및 규장전운(奎章全韻)을 선물로 주고 총애하였다. 병인년(丙寅年1866) 가을 서양 오랑캐가 미친 듯이 날뛰어 강화도가 함락당하자 진사가 원통하고 분한 마음으로 떨쳐 일어나 같은 집안사람인 진사 인호(寅浩)와 더불어 같이 의병을 일으켜 대동(大洞) 재실에 제단을 설치하고, 이때 집에 계시던 양친께서 훈계하며 말하길 “인륜(人倫)의 대도(大道)는 오직 충(忠)과 효(孝)에 있으니 임금에게는 충성하고 곧 부모에게는 효도해야 하며 모름지기 늙은 몸은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했다. 이리하여 여러 고을에 격문(檄文)을 돌려 병기와 옷과 양식을 온 마음을 다해 계책을 세워 장차 모일(某日)에 군대를 재촉하고 길을 서둘렀으나 미처 적을 물러나게는 행하지 못하였다. 일을 마치고 술잔에 술을 따라 잔치를 열고 서로 함께 시를 짓고 마친 때가 겨울인 시월(十月) 십팔 일이었다. 아! 진사의 충성스러운 마음과 의로운 담력이라면 나아가 충분히 적의 창끝을 꺾어 막고 찔러서 진영(陣營)을 모조리 무찔러 세상에 드문 공을 세울 수 있었건만 명령을 수행함에는 미치지 못하였구나. 그러나 군자가 사람을 논할 때는 그 사람의 뜻을 가지고 하지 그 사람이 이룬 일과 공력(功力)으로는 하지 않는다. 공자께서 말하길 “삼군(三軍)을 이끄는 장수의 목은 빼앗을 수는 있어도 필부(匹夫)의 굳은 뜻은 결코 빼앗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 후에 강화도 성곽의 서암(瑞巖)에 거처를 정하여 아이에게 과제(課題)를 내주고 책을 읽고 꽃을 옮겨심고 대나무를 심었다. 이로써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산과 물 사이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나와 진사가 서로 잘 알아 매우 자세히 장엄한 그 뜻과 높은 그 절개를 위하여 전기를 써서 무릇 사관(史官)의 변론을 기다리는 바이다.
崔孝婦傳 戊子(1888)
崔孝婦 金陵 士族家也 父祖 以孝聞於世世 以崔山南家法擬之 年十六 嫁於同縣 金生之門 亦簪纓望族也 金生家甚貧 有老母鄭氏在堂 崔氏與生 傭賃以供之極 其誠敬 鄕里稱之 爲孝婦孝子 鄭氏 不幸 遘奇疾瀕危 金生 問於醫 醫云 以五百金 求熊膽鹿茸等 劑可以治之 不然 雖扁倉 莫爲也 金生 無以爲資 與崔氏 相對於浥 咨歎而已 當是時 縣之北 有古倉怪妖 作孼泩泩 陰風怒號 毒霧漲天 五穀不熟 六畜盡耗 民受其害 一境幾墟 每歲八月五日 縣人以千金購人而祭之 籩豆以陳 簫鼓以奏 納人於倉中 可以弭災 如河伯娶婦故事 是歲購人 無可得 縣人憂之 金生謂崔氏曰 若得千金而應募 則老慈 沈緜之疾可赦 家人 塡壑之命可活 一擧兩全 豈不大快 吾將以身許之 崔氏大驚曰 夫子之言 出於孝 雖豚魚 可感然 而聖人有言 不孝三千 無後爲大 今夫子 無育而欲以身死之 其奈香火何 妾奉巾櫛 已五年于玆 無絲毫 有補於君子 堂有尊姑 未致滫瀡之 養庭乏乳呱 未遂繼嗣之責 罪惡甚大 生且何爲 妾請 自當之 君當後有子焉 遂以身應縣人之募而受其金 金生爭之不得 明日 即八月五日也 縣人 大設酒饌 盛陳旗鼓 具壇席而將祭之 有大的漢五六 到金生門驅迫崔氏以去 崔氏沐浴 易新衣 將行上堂 告別於其姑 若以實告 慮有添病 以權辭陳之曰 小婦母家 有急病之報 敢請覲省而來 足頭無過三箇日矣 伏願 尊姑善攝 鄭氏曰 速來無遲留 爲老身憂也 崔氏曰 謹如敎矣 退而與金生相別 于斯時也 天地慘憺 日月無光 山川草木 亦爲悽愴 崔氏爲老姑在 不能放聲大哭 忍淚啣痛只 自鳴咽曰 賤妾 賦命淺薄 負辜深重 旣不能致養於尊姑 又不能終事於夫子而有今日之行 即天地間 一大罪人也 願夫子 自愛 善事慈幃 期復天和 幸勿以賤妾介懷也 但妾死之日 親自殮襲 歸葬於先壟之側死 亦榮矣 幸莫大焉 金生聽訖 臆塞 不能語 纔定神魂 雙淚交橫 乃作文辭而告別 其文曰 誼重結髮情深鼓瑟 五載食貧 不厭糠覈 三時服勞 可憐鶉結 東賃(貸)西乞 誠供甘旨 昏定晨省 謹守禮度 不幸老慈 嬰此沉痼 五百金財 藥料難辨 數三家口 調度何術 倉妖作孽 害我民畜 以人禱之 冀免災酷 夫人應募 身百誰贖 命落蛟涎 跡投虎穴 無情黃金 忍碎白玉 三生緣業 一朝離別 天何蒼蒼 地何邈邈 百年佳約 有誰證之 九泉孤魂 其誰慰之 氷雪芳姿 從此永訣 鐵石剛腸 可奈寸絶 嗟我一身 煢煢無依 風摧玉樹 霜撲桂枝 朝夕盤飱 誰手供也 寒暑衣服 誰手縫也 雪月寒窓 隻鴈鳴悲 落花空山 一鵑叫苦 泉臺歸路 如我相思 他生世世 願結佳期 寫未畢 大的漢 驅崔氏夫人 抵倉門外 推而納之 是夕 崔氏 入倉中 頹坦破壁 不蔽風雨 敗瓦殘甓 自成堆埠 厚塵盈尺 昏墨如漆 但聞四面 鬼語啾啾 如在黑刹羅界中 然崔氏 氣義堂堂 神色凜凜 忽倉門 有軋軋聲 崔氏暗想 得必是怪妖也 俄有一物團圓 如榻蹣跚而至夫人座側 非龜非鱉 這是 甚麽物 請看下回分解 却說 先是 崔氏于歸三日 入廚下 作羹湯 見一蟾蜍在傍 崔氏 以飯飼之 自此習而爲常 朝夕待哺如乳孫 漸次肥壯 其大尺餘 出入往來 必隨之 至是 入倉中 盤旋三周 止夫人裳下 崔氏 以手捫之曰 汝不忘 故誼來 此作永訣耶 言訖 咄咄嗟歎 是夜五更 冷風砭骨 凄霜撲面 忽於大樑上 有靑白氣 閃閃 自上而下 如垂虹狀 大蟾蜍 即躍出翹頭 開吻 仰吐黃赤氣 炎炎 若火自下而上 與靑白氣 相接交鬨 有頃 黃赤氣益大以熾 靑白氣稍稍短而縮 末乃銷磨了都盡 俄而一大物 自樑上墜地有 聲旣而寂寂 崔氏神色 愈不變 亢然端坐 及天明 縣人於倉門外 喧鬧不息 持藁席而待金生 亦帶殮殯之具 來到矣 趦趄 良久 開門 視之 則崔氏生在如故 傍有物 長可十尺 縮縮然不動 乃一大蜈蚣也 皮殼自如而肌肉已空矣 縣人 不覺 眼瞠口呿大 以爲神 即以竹兜子 檐崔氏夫人而送其家 設炭火於倉門外 取蜈蚣 投之火中 崔氏 歸家 拜其姑 鄭氏曰 新婦覲行 何其來速耶 大奇大奇 崔氏在倉中 大蟾蜍吐氣而殺蜈蚣 因不知所去 崔氏 大以爲怪 入廚索其故處 大蟾蜍 先到而已斃矣 崔氏大驚泣曰 方吐氣也 心殫力竭 反中其毒而致命也 具棺椁衣裳 埋之 龜山之足 立石表之曰 蟾蜍塚 設飮食 自製文 以哭之 其文曰 天生神物兮 銳頭膰(皤)腹 畵地成川兮 登天 入月玉京 吸露兮 下界流落 五載 廚下兮 不離于側 如哺乳孩兮 以飮以食云 何薄命兮 罹此運厄 命如湯鷄兮 身投蛟窟 黑夜三更兮 啾啾鬼哭 惟汝念我兮 蹣跚彳亍 入于裳下兮 告余求訣有甚怪妖兮 敢爾作孽 毒氣所射兮 草爛石泐 維此神明兮 口吐黃赤雲 膚一寸兮 虹 貫千尺 直擣虛空兮 惡氣剿滅 奸照犀燭兮 妖斃蛇笏 心殫力竭兮 反中其毒 烈烈昆岡兮 俱焚玉石 我自遘禍兮 爾反受酷 淚泣珠鮫兮 恩感環雀 犬馬微勞兮 盖帷報德 矧乎 靈異兮 死生同力 棺椁以藏兮 龜山之足 風凄月冷兮 我心傷衋 略具菲薄兮 爾其來格 鳴呼 哀哉
其後江南詞客 過金陵 蟾蜍塚有感 作詩三章 以吊詩曰
何宵騎月入瑤宮 飽吸三淸玉露濃 上帝特憐貞婦節 故敎神物到倉中
白氣消時赤氣長 千年蟲殼落空樑 蛇珠雀環緣何報 爲是深誠格彼蒼
龜山落葉雨紛紛 一尺荒碑碧蘚痕 微物猶知推食誼 殉身以報主人恩
최효부(崔孝婦)는 김해의 선비 가문 사람이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효로써 대대로 이름이 알려졌으며, 이로써 최씨(崔氏)네는 영남(嶺南)의 어떤 가법(家法)과도 견주었다. 나이 열여섯에 같은 고을 김생(金生)의 집안으로 시집을 갔는데, 또한 벼슬아치로 명망(名望)이 있는 가문이었다. 김생의 집은 몹시 가난하고, 늙은 어머니 정씨(鄭氏)가 살아 계시어, 최씨와 김생은 품을 팔아 극진히 공양(供養)하고, 그 정성과 공경을 고향 마을에서 칭찬하여 효부(孝婦) 효부(孝子)로 삼았다. 정씨(鄭氏)는 불행하게도 기이한 병에 걸려 죽음이 임박한 위태로운 상태였다. 김생이 의원에게 물으니, 의원이 말하길 “오백 금으로 곰 쓸개과 사슴 뿔 등을 구해 약을 지어서 다스려야지, 그러지 않으면 비록 편작(扁鵲)과 창공(倉公)이라도 고칠 수 없을 것이네.”라고 했다. 김생은 자금(資金)으로 삼을만한 것이 없어 최씨와 흐르는 눈물로 서로 마주하고 한숨 쉬며 한탄할 뿐이었다. 당시에 고을 북쪽에 괴상하고 요사스러운 오래된 곳집이 있었는데, 이따금 남의 일에 훼방을 놓고 음산한 바람이 세차게 불고 독한 안개가 하늘로 피어올라, 다섯 가지의 곡식이 익지 않고 여섯 가지의 가축들이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 백성이 그 해를 받아 고을 전체가 거의 황폐해지자, 매년 팔월 오 일에 고을 사람들이 천금으로 사람을 사서 제사를 지냈다. 제사 그릇에 과일과 음식을 담아 늘어놓고 퉁소와 북을 연주하고 곳집 속에 사람을 바치고 나서야 재앙을 막을 수 있었으니, 물의 신인 하백(河伯)이 신부를 맞는 옛날 일과 같았다. 그해에 사람을 사려고 해도 얻을 수가 없어 고을 사람들이 근심했다. 김생이 최씨를 일컬으며 말하길
“만약 천금을 받고 부름에 응하면 곧 늙은 어머니의 오랜 병이 없어질 것이고, 굶어 죽을 식구들 운명이 살 수가 있으니, 한 가지 일로 두 가지가 잘 되니 어찌 큰 기쁨이 아니겠소. 나는 장차 몸을 던지는 걸 받아들이려 하오.”라고 했다.
최씨가 깜짝 놀라 말하길 “서방님 말씀은 효심에서 나온 것이니 비록 돼지나 물고기라도 가히 감동할 것이며, 성인의 말씀에 불효에 삼천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후손을 두지 않는 것이 가장 크다고 했습니다. 지금 서방님은 자식이 없고 몸을 던져 죽으려고 하니, 조상님 제사에 향 피우는 일을 어찌할꼬. 소첩이 아내가 된 지 이미 오 년이 되었건만 서방님께 보탬을 드린 것이 조금도 없고, 집에는 어머님께서 계시고, 젖이 부족해 울었던 길러준 집에는 맛있는 음식을 지어 드리지도 못하였고, 아직 대를 잇는 책임을 해내지 못하여 죄악이 몹시 크니, 살아 있어 봐야 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소첩 청하건대 스스로 맡을 테니, 서방님은 마땅히 나중에 자식을 얻으세요.”라고 했다.
드디어 고을 사람들 부름에 응하여 몸을 던지기로 하고 금을 받았다. 김생이 말다툼을 벌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내일이 곧 팔월 오 일이었다. 고을 사람들이 술과 음식을 차려 크게 베풀고 깃발과 북을 성대하게 늘어놓고, 제단을 갖추고 장차 제사를 지내려 하니, 웃통을 벗은 사내 오육 명이 있었다. 김생의 문에 이르러 못 견디게 괴롭히고 최씨를 잡아가려고 하자, 최씨는 목욕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장차 집으로 올라가 그 시어머니에게 이별을 고하려고 했다. 만일 사실대로 고하면 병이 더욱 나빠질까 염려스러워 상황에 맞게 말을 늘어놓으며 말하길
“소첩의 친정에서 급작스럽게 병환을 알려와, 감히 청하건대 찾아뵈어 살피고 돌아와도 전체 사흘은 넘지 않을 것이니, 엎드려 원하오니 존귀한 어머님 아픈 몸 잘 지키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정씨가 말하길 “늙은이의 근심을 생각해서라도 늦게까지 머물지 말고 속히 와야 한다.”라고 했다. 최씨가 말하길 “삼가 가르침대로 하겠습니다.”라고 하고는 물러나 김생과 서로 이별을 하니, 이때야말로 천지가 비참하고 딱하고 해와 달이 빛을 잃고 산천의 풀과 나무 또한 구슬프고 애달파 했다. 최씨는 계시는 늙은 어머니를 생각해서 목놓아 크게 울지도 못하고 눈물을 참고 아픔을 악물 뿐이었다.
스스로 목메어 울며 말하기 “천첩(賤妾)이 부여받은 명이 얇고 박하여 지은 죄가 깊고 무거워, 이미 존귀한 어머니를 지극히 봉양하지도 못하고, 또 서방님을 죽을 때까지 모시지도 못하고, 오늘 떠나가고 있으니 곧 천지 사이에 하나의 큰 죄인이오. 서방님께 바라건대 자신을 아끼고 어머니를 잘 모시고, 하늘이 다시 응(應)하기를 기약(期約)하고, 아무쪼록 천첩의 일은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다만 천첩이 죽은 날에 친히 스스로 시신을 씻기고 상복을 입히어 고향으로 돌아와 조상님 무덤 옆에 묻어주신다면 또한 영화로울 것이며 행운이 이보다 큰 것은 없을 겁니다.”라고 했다.
김생은 듣기를 마치고 원통하고 가슴이 막히어 말을 잇지 못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두 줄기 눈물이 뒤섞이고 이내 글귀를 지어 이별을 고했다.
그 글귀에서 말하길 “정분(情分)이 두터워 머리를 묶어 부부가 되었고, 정이 깊어 함께 북치고 거문고 연주하고, 오 년 동안 가난에 굶주려도 겨와 싸라기라도 싫어하지 않았고, 봄 여름 가을 세 계절에 죽도록 일만 하고, 불쌍하게도 누더기 같은 옷 기워 입고 동쪽에 가서 구하고 서쪽에 가서 빌리어, 달콤한 음식 차리어 정성껏 공양(供養)하고, 밤에는 어머님 잠자리 보아 드리고 새벽에는 밤새 안부를 묻고, 예절과 법도를 조심하고 정성껏 지키고, 불행하게도 늙으신 어머니께서 이 같은 고질병에 깊게 걸리어, 오백 금 재물로 약재를 어렵게 구비(具備)하였고, 세 식구 형편을 알맞게 처리하니 무슨 재주던가. 곳집의 요괴가 몹쓸 짓을 저질러 우리 백성이 해를 입어, 이로써 사람을 바쳐 빌어 혹독한 재앙에서 벗어나길 바라고, 부인이 부름에 응하니 몸이 백 개라도 누가 바꾸겠는가. 목숨은 교연(蛟涎)인 이무기의 침 속으로 떨어지고 행적(行蹟)은 호랑이 굴 속에 내던져지고 말았구나. 누런 금에는 정이 없고 참고 견디어 하얀 옥 잘게 부수었건만, 전생(前生)과 현생(現生)과 내생(來生) 삼생(三生)의 인연과 업이 하루아침에 헤어지게 되었으니, 하늘은 어찌 저리도 푸르르고 땅은 어찌 저리도 아득히 멀기만 하는가. 백 년을 함께하기로 굳게 다짐한 아름다운 언약은 누가 있어 증명할 것이며, 구천(九泉)을 떠도는 외로운 영혼은 그 누가 위로할 것인가. 얼음과 눈 속에서도 여전히 꽃다운 그대의 자태와 이로써 영원히 이별하니, 쇳덩이와 돌덩이 같은 굳센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지더라도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가 없도다. 아! 내 이 한 몸 외롭고 걱정스러워도 의지할 곳이 없구나. 바람은 아름다운 나무를 꺾어버리고 서리는 계수나무 가지를 때려눕혀 놓았으니, 아침저녁 소반에 담을 반찬은 누구 손으로 올릴 것이며, 더울 때나 추울 때 입을 옷은 누구 손으로 꿰맬 것인가. 차가운 창가에 달빛 하얀 눈에 비치고 외로운 기러기 구슬피 울고, 텅 빈 산에는 잎사귀 떨어지고 한 마리 두견새는 괴로워서 울부짖고, 저승으로 가는 길에 혹 내가 그리울 것 같으면 다음 생에는 대대로 좋은 언약 맺어주길 바라시오.”라고 했다.
베끼기를 다 마치지 못하였는데 웃통을 벗은 사내들이 최씨 부인을 몰아내어 곳집 문밖에 이르러 밀어 넣었다. 이날 밤 최씨가 곳집으로 들어가니 담장을 무너지고 바람벽은 갈라져 바람과 비를 가리지 못하였고, 기와는 깨지고 벽돌은 허물어져 스스로 둔덕을 쌓고, 두껍게 쌓인 먼지가 한 자 남짓 되고 밤에는 먹물을 칠한 것처럼 어두웠다. 다만 네 개 면에서 귀신들이 조잘거리는 말이 들리니 흑찰나계(黑刹羅界) 속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최씨는 씩씩한 기상(氣像)과 굳건한 마음으로 의젓한 모습을 보이고, 얼굴빛은 늠름했다. 홀연히 곳집 문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최씨는 반드시 괴상한 요괴를 만날 거라고 곰곰이 생각했다. 갑자기 둥그렇게 생긴 한 물체가 나타나니 걸상이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것 같고, 부인이 자리한 곳 옆에 이르니 거북도 아니고 자라도 아니었다. 이것이 어떤 물건인가는 다음 회의 해설을 보라.
각설하고 먼저 최씨가 혼례를 치르고 삼 일만에 시댁으로 와서 부엌에 들어가 국을 끓이니 두꺼비 한 마리가 나타나 곁에 있어 최씨가 밥을 먹였다. 이로부터 익숙해져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기다렸다가 먹으니 젖먹이 손자 같았다. 점차 살이 붙고 건장하여 그 크기가 한 자가 더 되었고, 들어오고 나가고 오고 갈 때마다 반드시 따랐다. 이날 곳집으로 들어가니 주변을 세 번이나 빙빙 돌아 부인 치마 밑에 이르렀다. 최씨가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하길 “너는 잊지 않고 일부러 찾아왔으나, 이것으로 영원히 헤어지는구나.”라고 했다. 말을 마치고 뜻밖의 일에 놀라며 탄식하고 한탄했다. 이날 밤 서너 시 경에 차가운 바람이 불어 뼈를 에는 듯하고 싸늘한 서리가 얼굴에 스치었다. 홀연히 큰 대들보에서 푸르고 하얀 기운이 생기어 번득이며 위에서 내려오니 무지개 형태가 드리운 것 같았다. 큰 두꺼비가 즉각 힘차게 뛰어올라 머리를 쳐들고 입을 벌려 누렇고 붉은 기운을 위로 뿜어내니 이글거려 불꽃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 같았다. 더불어 푸르고 하얀 기운과 서로 붙어서 싸우니, 이윽고 누렇고 붉은 기운이 더욱 커져서 훨훨 불타오르고, 푸르고 하얀 기운이 점점 짧아지고 쪼그라들어 끝내 쇠하여 모두 다 없어졌다. 갑자기 커다란 한 물체가 대들보 위에서 땅으로 떨어져 나타나니 소리가 끝나고 고요했다. 최씨의 얼굴은 더욱 변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고 단정히 앉아 있었다. 하늘이 밝아와 고을 사람들이 곳집 문밖에서 쉬지 않고 왁자지껄 떠들며 볏짚으로 만든 멍석을 지키고 김생을 기다렸다. 또 근처에 시신을 닦고 상복을 입히어 넣을 관을 갖추어 와서 이르러, 머뭇거리며 한참 있다가 문을 열고 보니 곧 최씨가 전과 같이 살아 있고, 곁에는 크기가 열 척에 달하는 물체가 잔뜩 웅크린 채로 움직이지 않고 있는데, 한 마리 거대한 지네였다. 겉껍질은 자기 멋대로고 근육은 이미 텅 비었다. 고을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은 크게 벌리어 신기하게 여기다, 곧장 대나무로 엮은 가마로 최씨 부인을 짊어지고 그 집으로 보내고, 곳집 문밖에 숯불을 늘어놓고 지네를 붙잡아 불 속에 던졌다. 최씨가 집으로 돌아와 그 시어머니에게 절을 올리자 정씨가 말하길 “새아가야, 친정 부모를 뵈러 간다더니만 어찌하여 빨리 왔느냐. 대단히 기이하고 대단히 기이하구나.”라고 했다. 최씨는 곳집에 있던 큰 두꺼비가 누렇고 붉은 기운을 뿜어내 지네를 죽이고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했다. 최씨가 몹시 괴이하게 여기고 부엌으로 들어가 전에 있던 곳을 찾았다. 큰 두꺼비가 먼저 도착해 이미 쓰러져 죽어 있었다. 최씨가 깜짝 놀라 울면서 말하길 “누렇고 붉은 기운을 뿜어내는 데에 마음과 힘을 다 기울여 도리어 독한 기운을 맞아 죽을 지경에 이르렀구나.”라고 했다. 관과 상복을 갖추어 귀산(龜山) 기슭에 묻고 상석을 세워 밝히며 말하길 “두꺼비 무덤에 음식을 베푼다.”라고 하고, 스스로 글월을 짓고 통곡했다. 그 글에서 말했다.
하늘이 신묘한 물건을 낳았도다. 머리는 뾰족하고 배는 불룩하고 땅을 긋기만 해도 냇물이 흐르고, 하늘로 올라가 달에 있는 옥황상제(玉皇上帝) 서울로 들어가 이슬을 들이마시고, 인간 세상으로 물 흐르듯 떨어져 오 년을 주방에서 보내고, 곁에서 떠나지 않으니 젖을 빠는 아이 같고, 나누어 물을 마시고 나누어 밥을 먹는다 하니, 얼마나 박한 운명인가. 이러한 운수와 재앙을 당하니 목숨이 푹 끓인 닭과 같구나. 아주 캄캄한 삼경(三更)에 교룡(蛟龍)의 굴에 몸 던지니, 훌쩍훌쩍 우는 귀신들 울음소리 들려도 너는 오직 나만 생각하고, 비틀비틀 천천히 걸으며 치마 아래로 들어가고, 나에게 헤어짐을 알리니 몹시 괴이하고 요사스러움이 있도다. 감히 너에게 악한 짓을 저지르니 독한 기운을 뿌리어, 풀은 문드러지고 돌은 갈라지니 오직 이것이 신명(神明)이구나. 입에서는 누렇고 붉은 얼마 안 되는 구름을 토해내고, 무지개는 천 척(尺)을 꿰뚫고 곧바로 허공에 닿고, 악한 기운을 무찔러 없애고 물소 뿔을 태우고 촛불을 비추니, 죽은 뱀의 홀이 요사스럽고 마음을 다하고 힘이 다 떨어졌네. 도리어 그 독을 맞아 곤강산(崑岡山)이 뜨거워져 옥과 돌이 함께 타버리고 나 홀로 화를 당했구나. 너는 도리어 고통을 받아 교룡(蛟龍)의 구슬 같은 눈물 흘리며 울었다. 은혜에 감동하여 참새는 반지 물어와 갚고 개와 말은 조금이나마 힘을 썼노라. 살아 있을 때나 죽을 때나 힘을 함께하고 관곽(棺槨)으로써 묻어 감추도다. 귀산(龜山) 산기슭 바람은 차고 달은 썰렁하니, 내 마음이 너무나 아파 간략하게 변변찮은 제수를 갖추노라. 너의 그 왕림(枉臨)함이 오호라! 슬프도다!
그 후에 호남(湖南)의 시객이 김해를 지나다 두꺼비 무덤에 느끼는 바가 있어 세 개 문장의 시를 지었다.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시에서 말했다.
何宵騎月入瑤宮 어느 밤에 달 타고 하늘 궁전 들어가
飽吸三淸玉露濃 신선의 맑은 세 궁전에서 진한 옥빛 이슬 가득히 들이마시네.
上帝特憐貞婦節 하느님 올곧게 정절 지킨 부인 특별히 불쌍히 여기어
故敎神物到倉中 일부러 신령스러운 물건 곳집 속에 빈틈없이 꽉꽉 채우네.
白氣消時赤氣長 하얀 기운 사라질 때 붉은 기운 자라고
千年蟲殼落空樑 천년 묵은 벌레 껍데기 빈 들보에서 떨어지네.
蛇珠雀環緣何報 뱀의 구슬 참새의 가락지 무슨 인연으로 갚았던가.
爲是深誠格彼蒼 깊은 정성 저 푸른 하늘에 다다랐음이로다.
龜山落葉雨紛紛 귀산(龜山)에 어지러이 비 내리니 잎사귀 떨어지고
一尺荒碑碧蘚痕 한 척 높이 황량한 비석에 푸른 이끼 자국 남았네.
微物猶知推食誼 보잘것없는 무리가 오히려 밥 나눠주는 정분을 알고
殉身以報主人恩 몸 바치어 주인에게 은혜를 갚네.
金陵人傳 以爲大蟾蜍 更幻生 入月宮云
김해 사람이 전하기를 큰 두꺼비가 되었다가 다시 환생(幻生)하여 달 속 궁전으로 들어갔다고 이른다.
却說 金生 取購金千緡 以五百金 求藥材 進其親親 疾乃瘳 鄭氏享年九十 尙康健 無恙 五百金 置家産 家産稍稍富饒 甲於金陵 鄭氏以天年將終 執手而語崔氏曰 老身 無以報 新婦恩 願新婦有子有孫 世世如新婦孝敬 則金氏之門 安得 不昌大乎 其後 金氏子姓甚盛 冠冕爀爀 位至鄕相者 三人 方伯 守令者 二十二人 新進及第 登翰林學士者 八人 皆以孝 世其家云
각설(却說)하고 김생(金生)이 천 꾸러미 금을 구하여 오백 금(金)으로 약재를 찾아 힘쓰니 어머니의 병도 이내 나았다. 정씨(鄭氏)가 한평생을 산 나이가 아흔인데도 더욱이 건강하고 병이 없었다. 오백 금을 한 집안의 재산인 가산(家産)으로 남겨두니 가산(家産)이 점점 풍요로워져 김해에서 갑부(甲富)가 되었다. 정씨(鄭氏)가 타고난 수명을 다하고 장차 마치려고 할 때, 손을 잡고 최씨(崔氏)에게 말하길 “늙은 몸이라서 새아가의 은혜에 보답할 길이 없으니, 바라건대 새아가에게 자식이 있고 손자가 있을 것이며, 대대로 새아가의 효도와 공경함을 따를 것 같으면 김씨(金氏) 가문이 어찌 창대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그 후에 김씨(金氏) 자손들이 매우 번성하여 벼슬자리에 올라 가문을 빛내니, 재상(宰相)의 자리에 이른 자가 세 명이고 관찰사과 수령이 스물두 명이고, 과거에 급제하여 새로 나아가 한림원(翰林院) 학사(學士)에 오른 자가 여덟 명으로 모두 효로써 가문의 대를 이었다고 전한다.
外史氏 贊曰 孝感之極 金石可透 天鑑孔昭 神物徠護 崔氏子姓 宜其昌熾 詩不云乎 永錫爾類
외사씨(外史氏)가 칭찬하여 말하길 “효성의 감사함이 지극하여 쇠와 돌도 가히 뚫을 수 있고, 하늘에서 내려다봄이 매우 밝고 신령이 와서 보호하니 최씨(崔氏)의 자손들이 크게 일어나 번성하여 나감이 마땅하다. 시경에서 이르지 않았는가. 너에게 영원히 복을 주리라고.”
碧英傳
碧英 字英英 良家女也 有才貌 精於針組 古詞長篇一聞 輒誦 年十七 小香山 白子俊卜 其姓而畜之 旣歸奉老 闈甚謹衣服 甘旨務 皆順適 無敢少懈 一門見稱 遠近士友家 以女師 待之事其嫡 盡誠款 或有難言 景色輒退避 緘默以冀恬靜 如是十年 未嘗一日 安其身 終不出怨苦語 其天性然也 眞知 寔命不猶者歟 初小香子 豪於財 英英在閨門珠翠中 小香子 性懶坦 濶於事情 凡一切世務 無所經心 惟以詩律自娛 放浪山水間 及其僦柳洞也 懸磬蕭然 於是 英英 縫賃爲資 汲樵以給 寒暑風雨 不憚勞悴 夫子之服食 常鮮潔而適宜 小香子 有詩曰 老年寄食碧英婆 恰似村氓計活過 纖手輕輕能摘粟 盂羹簞食自隣家 嘗甁罍告罄 小香子曰 明日事 在於明日 但無負梧桐上明月也 英英 頗解詩家語 相對欣然 一日 採樵曝庭 忽急雨 小香子 看書不撤 英英 從外至 則薪已漂矣 婉辭以告曰 昔聞漂麥 今見漂薪 夫子之迂疎 如此人 孰堪當 有一英英而已 湏勿以寡合於世 爲恨也 因復驩笑 琅琅自自言 前生業冤 獲戾實多 現在厄運 所是報應 何湏歉歎 來頭修福 必有因果之報矣 當丙丁大無 人不能自保 閭里 夫婦去帷相望 時小香子 從遊士友 間或累月不返 英英 刻苦自守 廚甑生塵 不以倜飢爲意 常澣濯以待 恨其夫子之棲遑也 有一女 名小鷰云
벽영(碧英)의 자는 영영(英英)이며 양갓집 여자로 뛰어난 재주와 용모를 가졌으며, 바느질과 베 짜는 일에 정통했다. 긴 옛노래도 한 번 들으면 바로 외우고, 나이는 열일곱이고 소향산(小香山) 백준복(白俊卜)이라는 남자의 그 성씨로 길러졌다. 이미 늙은이를 받들어 모시러 돌아와 문을 나섬에 의복을 몹시 삼가고 맛있는 음식을 올리는 데 힘써 모두 순조롭게 진행되고 조금도 감히 게을리함이 없었다. 가깝고 먼 곳의 선비와 벗들 집안에 한 가문으로 이름이 나고, 유모(乳母)로서 그 본처를 대접하는 일에 정성스러운 마음을 다했다. 혹 비난하며 말하는 이가 있어도 모습을 갑자기 물러나 피하여 입을 다물어 버림으로써 평안하고 고요하기를 바랐다. 이같이 십 년 동안 일찍이 단 하루도 그 몸이 편안한 날이 없었으며, 끝까지 원망하고 괴로워하는 말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천성이 그러하니 팔자가 유별난 사람이라는 것을 참으로 알았다. 처음에 소향자(小香子)는 재물에 호화롭고 사치스러웠으며, 영영(英英)은 진주와 비취 속 같은 안방에 있었다. 소향자(小香子)는 천성이 게으르고 평탄(平坦)하며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런 것에는 거리가 멀었다. 무릇 일체의 세상의 온갖 잡다한 일에는 마음을 두는 바가 없고 오로지 시율(詩律)로써 스스로 즐기고, 산천(山川) 산수 사이를 정처 없이 떠돌다 결국에는 유동(柳洞)에 모이니 집이 쇠락하여 경쇠를 매달아 놓은 절간처럼 텅 비어 쓸쓸했다. 이리하여 영영(英英)은 바느질을 해주고 품삯을 받아 생활비로 쓰고, 물을 긷고 땔나무를 해서 넉넉하게 하고, 춥고 덥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힘들고 수척해져도 꺼리지 않았다. 남편의 옷과 밥은 항상 깨끗하고 적당히 담았다. 소향자(小香子)가 시를 지어 말했다.
老年寄食碧英婆 늙어서 벽영(碧英) 할매에게 밥 얻어먹으니
恰似村氓計活過 흡사 꾀했던 삶 그르친 시골 사람 같네.
纖手輕輕能摘粟 가느다란 손으로 가벼이 능숙하게 낱알 거두니
盂羹簞食自隣家 이웃집에서 사발에 국 담아 대바구니에 밥 담아 가져오네.
일찍이 물병과 술독을 남김없이 다 없어져 버렸고, 소향자(小香子)가 말하길 “내일 해야 할 일은 내일에 있고, 다만 오동나무 위에 뜬 저 밝은 달만은 나를 저버리지 않는구나.”라고 했다. 영영(英英)이 시인의 말을 제법 알아들어 서로 마주하니 기쁘고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하루는 땔나무를 거두어 뜰에 널어 말리는데, 돌연히 갑작스럽게 비가 내렸다. 소향자(小香子)는 책 보기를 거두지 않았다. 영영(英英)이 밖으로부터 이르니 땔나무가 이미 떠내려가 버렸다. 완곡한 말로 고하며 말하길 “예전에 고봉(高鳳)이라는 사람이 책을 읽느라 폭우에 보리가 떠내려가는 것도 몰랐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지금 땔나무가 떠내려가는 걸 보니 남편이 세상 물정에 어둡고 하는 일이 재빠르지 못하고 더디다. 이 같은 사람을 누가 능히 견디어 이겨내겠는가. 영영(英英) 한 사람만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모름지기 세상과 좀처럼 뜻이 맞지 않는다 하여 한스러워하지 말아야 했다. 인하여 다시 기뻐서 웃으며 낭랑한 목소리로 꾸밈없이 말하기를 “전생에 지은 죄로 이승에서 받는 괴로움이니 지은 죄가 실로 크다. 지금의 사나운 운수는 온통 응보(應報)이니 어찌 마땅히 부끄럽고 안타까워해야 하겠는가. 앞으로 다가올 날에 복을 닦으면 반드시 인과응보(因果應報)가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경자년(庚子年 1876)과 정축년(丁丑年 1877)에 큰 흉년을 당하여 사람들이 스스로 지킬 수가 없었고, 마을에서는 대체로 아낙네들이 집을 버리고 나가기를 서로 바랐다. 때로 소향자(小香子)는 선비와 벗을 찾아다니며 어울려 놀고 이따금 여러 달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영영(英英)은 온갖 고초를 견디며 자신을 지키고 주방 시루에 먼지가 쌓여도 굶주림을 대범하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항상 옷을 깨끗이 빨아놓고 기다렸다. 한스러운 것은 그 남편이 분주히 돌아다니는 것이며 딸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이 소연(小鷰)이라고 했다.
小史氏曰 夫士之讀書 不以寒飢到骨 喪其所守者 亦鮮矣 況女妾乎 若碧英者 可謂 氷雪筠心 其視買臣妻 果何如哉
소사(小史) 씨가 말하길 “무릇 선비의 책 읽기는 추위와 굶주림이 뼈까지 스며들어 그 책 읽기를 지켜내는 바를 잃지 않은 자 또한 드물다. 하물며 여첩(女妾)이야! 만약 벽영(碧英)이라는 자의 이른바 얼음과 눈 속에서도 푸르름을 굳게 지키는 대나무 같은 마음을 주매신(朱買臣) 아내와 비교하면 과연 어떠할 것인가.”라고 했다. (참고로 주매신의 처는 남편이 집안이 가난하여, 장작을 팔아 생활하고, 걸으면서 책을 외었기 때문에 창피하여 떠나버렸다. 나중에 회계(会稽)의 태수로 고향을 지나갔을 때 전처가 이것을 보고 부끄러워하여 목을 매고 죽었다고 한다.)
馴狙公說 壬戌(1872)
狙之 爲物小而性黠 善候伺 楊子謂之 狙詐 盖難馴也 李君 慶瑞 築室于瑞石之圭峰 居久之 有一狙 來石臺上 眶䀗睳 口嗛呥 翹兩臂而兎蹲 小俟則輒走 主人故爲不聞 戒兒勿驚搖 居數日 稍益近 廚吃 瓦鐺餘瀝 主人曰 試可馴致之 乃以一團飯 置之石床 狙初疑之 不敢近 旋去旋來 竟吃之 又以飯逼 置窓戶間 狙愈疑之 逡巡囁唲 欲進不進耳 竦鬚竪 若嗔若訴 如是者 約半日 主人 不動端跽對策 旣而 吃之盡 又數日引而入之房中 狙狃狎之 手飼而輒受 於是 硯席几案 無難周遍至 緣衣巾而下上 習以爲常 昔郭休 隱居東山 畜一猴 號曰 尾君子 主人殆近之矣 噫 人能淸心寡慾 靜而待之 無物不應 雖麋鹿鳥雀 皆可馴致 況於人乎哉 金剛圓通菴近 有化門 和尙 入定 三十年 不出山門 時有鳥鳶捿于雲房云 適與李君事同 故竝記之
원숭이는 생긴 것이 작고 본성이 교활하고 염탐하고 엿보기를 잘한다. 양자(楊子)가 이르기를 “교활하고 속이려 들어 대개 길들이기가 어렵다.”라고 했다. 이군(李君) 경서(慶瑞)가 서석산(瑞石山) 규봉(圭峰)에 집을 짓고, 얼마 뒤에 원숭이 한 마리가 서석대 위로 와서 있었는데, 우묵한 눈은 힐금힐금 노려보고 입에 넣어 씹고, 두 팔을 높이 들었다가 토끼처럼 웅크리고는 조금 기다렸다가 곧 갑자기 달려갔다. 주인이 놀라고 떨지 말라고 아이들에게 알리는 소리를 일부러 못 들은 척했다. 며칠 뒤 조금 더 가까워져 부엌에서 음식을 먹고 질솥에는 거른 술이 남아 있었다. 주인이 말하길 “길들일 수 있는지 시험해보려고 한 덩어리의 밥을 석상 위에 두니 원숭이가 처음에는 의심하고 감히 가까이 오지 않고 잽싸게 갔다가 잽싸게 왔다가 하더니 끝내는 밥을 먹었소. 또 밥을 가까이하면서 창문 사이에 두니 원숭이가 더욱 의심해 조금씩 뒤로 물러나 소곤거리며 응석 부리듯 소리치며 나아가고 싶은데 나아가지 못할 뿐이었소. 수염과 더벅머리를 세우고 성내는 듯 호소하는 듯 이와 같은 것을 약 반나절 동안 했소.” 주인이 움직이지 않고 단정히 꿇어앉아 대책을 세우니 얼마 안 있어 밥을 다 먹었다. 또 여러 날을 이끌고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원숭이와 익숙해져 손으로 먹이자 순식간에 채갔다. 이로써 원숭이가 글방과 안방까지 어려움이 없이 두루 이르렀고, 연의(緣衣)와 갓을 아래와 위에 갖춰 입는 것이 습관이 들어 보통으로 여겼다. 옛날 곽휴(郭休)가 동산(東山)에서 숨어 지낼 때 기르던 원숭이 한 마리에게 호(號)를 붙여 부르기를 꼬리 달린 군자라는 뜻으로 “미군자(尾君子)”라고 했으며 주인과 거의 가까웠다. 아! 사람이 능히 마음을 깨끗이 하여 욕심을 줄이고 조용히 기다리면 응하지 않을 물체는 없다. 비록 큰 사슴이나 참새라도 모두 길들일 수 있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금강산 원통암 근처에 화문(化門)이 있으며 승려들이 선정(禪定)에 들어가 삼십 년 동안 산문(山門)을 나오지 않았다. 때로는 승려들 방에 새와 솔개가 깃들어 있다고 말했다. 마침 이군과 더불어 일이 같이하였기에 아울러 기록한다.
失蒼鷹說
鷹之出於海東者 爲天下最焉 其精明竦俊(峻) 勁而撗(橫)絶 一瞬千里 好事者得而馴之 長繩縶其足 翠羽飾其尾 置之安格上 常臂之狃狎而近人 以不離手 爲貴 夜必攪醒 不使之寐 寐則忘其所習也 飼肉 太瘦則無力 太肥則易逸 取鳥鼠 肉沈冷水 以與之 又用綿團子 法(去)拭 出腸脂 使肌淨而調平 方且獵也 發其機 適其性 中其慾 無小咈戾 然後 隨人指 使百無一漏 盖御之之方 在乎 人之能否也 龍山主人 不閒 獵事 山居得 蒼鷹一隻 頂若平削 立若植釘 尾摺疊如扇架陳 一歲 心和性熟 即鷹之良者也 與數人 試獵于東岡之麓 未半餉而獲三 旣而復縱之 迫雉越阜陵 入叢薄間 食肉殆盡飽訖移坐老樹枝 搖鈴焉從者 遍山覓之 臂之而歸 再翼日 將大獵 主人 韝鷹於絶頂 使諸人 從山足而擿發之 鷹見雉飛 忽奮翼 主人不即解韝 再奮翼而始放之 勢已不及矣 雉入叢竹田 鷹坐高樹上 左右凝睇 以察雉之所在 人徑往 妄以腐鼠 從下誘之 鷹不動 人乃攀樹 逼已招之 鷹爲咈其性 即騫飛 彷徨乎竹田上凡數十回 猶望人之 擿發雉處也 諸人 相視玩愒 鷹遂從風 向南而去 不知所止 余聞之 歎曰 此獵者之過也 夫鷹鳥之智巧者也 方其見雉奮翼也 發其機而縱之 則初無不獲之慮 坐樹凝睇也 適其性而安之 則亦無騫飛之患 彷徨竹田也 中其慾而擿發之 則終無颺去之 嘆 失此三策 其不爲主人用也宜哉 噫 武夫良將之 爲用於國家 禮法而維之爵祿以華之 平日御之之方 在乎人主之如何耳 及夫臨大陣遇勁敵也 發揚蹈厲 以應其機 調和順適 以安其性 發縱指示 以中其慾 則封狼居勒燕然 即轉移間事也 若使動輒咈戾 無所施措 其不爲國家用 亦宜哉 成律而拘之 以致唐將之潰師 逼已而招之 以致望諸之犇趙 玩揭而視之 以致章邯之投楚 可不懼歟 或曰 飽則颺去 若然則 之去也不在 昨日 已飽之後 歹在 今日 未飽之前耶 故余不信也
매는 우리나라에서 나온 것을 천하에서 최고로 삼는데, 그것은 총명하고 험준한 곳을 날아오르며 힘이 세고 자유자재로 날아 삽시간에 천 리를 간다. 일을 벌이길 좋아하는 사람은 매를 붙잡아 길들이는데, 긴 줄을 발에 매고 꼬리를 물총새 날개로 꾸미고 시렁 위에 편안하게 두고 항상 팔뚝이 익숙하게 하고 사람과 친근하게 하고 이로써 손에서 떼어놓지 않고 귀하게 여겼다. 밤에는 반드시 흔들어서 깨워 잠들지 못하게 하는데, 잠들면 곧 익힌 것을 잊어버렸다. 고기를 먹일 때는 너무 야위면 힘이 없고 너무 비대하면 달아나기 쉬우니 새나 쥐를 잡아 고기를 차가운 물에 담갔다가 줬다. 또 솜뭉치로 닦아 내고 내장의 기름을 빼내 몸을 깨끗하게 하고, 주변 환경과 잘 어울리고 조용히 잘 있으면 바야흐로 잠깐 사냥에 나섰다. 그 낌새가 드러나면 그 본성에 적절하게 하여 그 욕심을 채우며 작은 어긋남도 없어야 한다. 그러한 뒤에 사람의 지시에 따르데, 백 번 중 한 번이라도 빠짐이 없게끔 하여야 한다. 어쩌면 억제하는 방법은 사람의 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지 싶다. 용산(龍山) 주인이 사냥하는 일로 한가하지가 못하는데, 산에 살면서 참매 한 마리를 얻었다. 정수리는 평평하게 깎은 것 같고 서 있는 모습은 못이 박혀 있는 같고 꼬리는 겹겹이 접혀 부챗살을 펼쳐놓은 것 같고, 한 살 때 마음이 온화하고 본성이 무르익으면 곧 좋은 매였다. 몇 사람과 함께 동쪽 산등성이 기슭에서 시험 삼아 사냥에 나섰다. 잠깐도 지나지 않아 세 마리를 잡고 얼마 안 있어 다시 놓아주니 매우 급하게 꿩이 언덕을 넘어 수풀 사이로 들어갔다. 고기를 거의 다 먹고 배가 부르자 마치고, 늙은 나무의 가지로 옮겨 앉았다. 방울을 흔들자 이에 따라온 사람이 두루 산을 찾아보고 팔짱을 끼고 돌아왔다. 재차 다음 날 장차 대규모 사냥을 벌이려고 주인이 산 맨 꼭대기에서 깍지 위에 매를 앉히고 사람들에게 산기슭으로 나아가 들춰내라고 시켰다. 매가 날아가는 꿩을 보고 갑자기 날개를 펼치었다. 주인이 즉각 깍지를 풀지 않자 재차 날개를 펼치었고, 비로소 풀어놓자 기세를 이미 쫓을 수가 없었다. 꿩이 대밭 숲으로 들어가자 매가 높은 나무 위에 앉아 좌우를 응시하며 꿩이 있는 곳을 살폈다. 사람이 지름길로 가서 썩은 쥐로 속이려고 아래로 나아가 유인해도 매가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이 이내 나무를 붙잡고 올라 가까이 다가가 멈추고 불렀다. 매는 본능을 어기게 되는 거라서 곧 어지럽게 날아가서 대밭 위를 무릇 수십 번 돌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다. 오히려 사람을 바라보며 꿩 있는 곳을 들추어냈다. 모든 사람이 서로 마주 보고 흐늘거리며 놀다가 매가 마침내 바람 따라 남쪽으로 날아가 버려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듣고 탄식하며 말하길 “이것은 사냥하는 사람의 잘못이오. 무릇 매라는 새는 지혜롭고 교묘한 놈이오. 방금 꿩이 날개를 활짝 펼치는 걸 보았잖소. 그 낌새가 드러나 좇은즉 처음에는 붙잡지 못할 걸 걱정하지 않았고, 앉아 있는 나무를 응시할 때는 그들의 본성에 맞추고 편안케 하는즉 또한 어지럽게 날아가 버릴 걸 근심하지 않았고, 대나무밭을 돌아다니다 도중에 그 욕심을 들추어 드러내는즉 끝내 날아가고 없소.” 아! 이 세 가지 계책을 잃었으니 매가 주인의 쓰임이 되지 못함이 마땅하다. 아! 군사와 훌륭한 장수가 공을 세워 나라에 쓰이게 되고, 예를 본받고 벼슬과 녹봉을 유지함으로써 조정에서 꽃을 피우고, 평상시에 영접하는 방도는 임금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을 뿐이며, 및 무릇 큰 군대가 전투에 임함에 더욱 강한 적을 만날 것이니, 일어나 제자리걸음 함으로써 그 낌새에 반응하고, 서로 잘 어울리려 순조롭게 나아감으로써 그 본성을 편안하게 하고, 사냥개를 풀어 짐승이 있는 곳을 가리키며 잡게 함으로써 그들의 욕심을 채우게 하니, 곧 낭거서산(狼居胥山)에 올라 제사를 지내고 연연산(燕然山)에 공로를 새기는 것으로, 즉 자리를 옮기는 사이에 벌어진 이뤄진 일이다. 만약 무언가를 하려고만 하면 서로 어그러지게 하여 조치를 취할 수가 없게 하므로 그것은 나라에 쓰임이 되지 못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다. 계율을 만들어 구속함으로써 당나라 장수는 병사들이 패함에 이르고, 자신을 나무라고 속박함으로써 망제군(望諸君) 악의(樂毅)가 조나라로 달아남에 이르고, 흐늘거리며 노는 꼴을 보여 줌으로써 장한(章邯)이 초나라에 몸을 던짐에 이르렀으니 두렵지 않았겠는가. 누군가가 말하길 “배가 부르면 날아가는데, 만약 그러하다면 날아가고 없을 것이오. 어제는 이미 배불리 먹은 뒤라서 살을 바른 뼈가 남아 있었고, 오늘은 아직 배불리 먹기 전이잖소. 그러므로 나는 믿지 못하오.”라고 했다.
哭猪說
隣有嫠婦 家貧子弱 以縫賃爲資 一日失畜猪而哭之甚哀 已而猪歸乃止 人詰之曰 猪賤畜也 其得失甚些 何哭爲 婦曰 今春 糶官租也 隣人 多出錢而防之 吾以貧故 受之爲償 租(言+卞) 買雌猪之小 小者 昕夕 喂飼之 惟勤 稍長而孶孕之 秋租時 猪必乳矣 持此足 免悍吏之墮隳突 雖累日不炊 吾心安焉 俄忽 見逸追求而不得目 今租期不遠 鞭朴立至矣 吾是以哭之 及其入苙也 喜不自勝 嘖嘖 猶咎其歸之晩也 余聞而憐之曰 甚矣 賦租之病人也 隍鹿臧 羊要 不過一笑之資而婦於是哭之 其哭也 爲租 非爲猪也 故爲之說 以備爲人 蒭牧者來之
이웃에 남편을 잃은 아낙네가 사는데, 집이 가난하고 자식들이 약하여 바느질하고 받은 품삯이 밑천이 되었다. 하루는 기르던 돼지를 잃고 통곡하며 몹시 슬퍼하였다. 그 후 돼지가 돌아와 이내 울음을 그치었다. 다른 사람이 따지며 말하길 “돼지는 미천한 짐승이오. 그것을 얻고 잃는 것은 아주 작은 것인데 어찌하여 통곡하는 거요?”라고 했다. 아낙네가 말하길 “올봄에 쌀을 팔아 관청에 세금을 내야 하오. 이웃 사람은 돈을 많이 내고 막으나, 우리는 가난하기 때문에 받으면 갚아야 하기에 암컷 돼지 작은놈을 사고, 작은놈을 아침저녁 불러서 먹이고 오직 부지런해야 점점 자라서 새끼를 배고 가을 세금 낼 시기에 돼지가 반드시 젖이 나오고, 이렇게 발을 붙잡아야 포악한 관리가 마구 들이닥쳐 부수도 다니는 것을 면하오. 비록 여러 날을 밥을 짓지 않았어도 우리 마음은 편안하오.”라고 했다. 갑자기 멋대로 쫓아가 찾고 두 눈으로는 보지 못했다. 지금 세금을 걷는 시기가 멀지 않아, 회초리로 때리니 돼지가 바로 이르렀다. 우리가 이로써 곡소리를 내자 급기야 우리 안으로 들어가, 모두가 어찌할 줄을 모를 만큼 기뻐서 시끄럽게 소리를 질렀다. 오히려 근심거리는 그 사람의 늦은 귀가였다. 내가 듣고 불쌍히 여기며 말하길 “심하다! 세금을 매기어 사람을 병들게 했구나.”라고 했다. 해자 속에 사슴을 감추고 양을 내놓으라 하니 한 번 웃고 넘어갈 거리에 지나지 않으며, 아녀자가 이것 때문에 울었다. 그 울음은 세금 때문이지 돼지 때문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지어 이로써 다른 사람이 대비토록 한다. 꼴을 베러 간 짐승을 기르는 사람이 돌아왔다.
放兒鳥說
維夏之日 與友人 登山穿松而行正 見兒鳥墮巢 氋氃不能飛 余戱拾之 行數十武 母鳥啞隨之 忽念鳥 是孝鳥 昔人比之 曾某以其能反哺也 然則 此雖黃鷇 亦可敬也 彼背恩蔑義 不顧父母之養者 曾鳥之不若 抑獨何心 語云 非孝子無親 況傷孝子耶 遂全而置之故處 仍祝曰 兒鳥 善養爾母 勿失孝子之義 善護爾身 勿毁孝子之仁 又祝曰 世世生子 式穀似之 勿替孝子之名
초여름 날에 벗이랑 함께 산에 올라 소나무를 뚫고 똑바로 가다가 둥지에서 떨어진 새끼 새를 보니 털이 헝클어져 날지 못했다. 내가 재미로 주워서 수십 걸음을 가니 어미 새가 악악! 소리를 지르며 따라왔다. 문득 새가 한 마리 머릿속에 떠오르니 효조(孝鳥)라 불리는 까마귀로, 옛사람이 일찍이 아무개를 능히 새끼 새가 자라서 어미 새를 먹여 살리는 반포(反哺)로써 비유하였다. 그러한즉 이것은 비록 누런 새끼 새이지만 또한 공경할만했다. 저 은혜를 저버리고 의리를 하찮게 여기고 부모 봉양을 돌아보지 않는 자는 이미 새보다 못한 것이니 또한 유독 무슨 마음인가. 옛말에 이르길 효도를 하지 않는 자는 부모를 무시하는 것이라 했거늘 하물며 효도하지 못해 마음에 상처를 입은 자는 어떠하겠는가. 마침내 새끼를 온전히 예전에 살던 곳에 두고, 인하여 기원하며 말하길 “새끼 새야 너의 어미를 잘 길러 효자의 뜻을 잊지 말며 너의 몸을 잘 지키어 효자의 어짊을 해치지 마라.”라고 했다. 또 기원하며 말하길 “대대로 자식을 낳아 좋은 방향으로 잘 닮도록 하고 효자의 명성을 버리지 마라.”라고 했다.
每夏秋之交 深山之中 見群鳥 反哺者 母鳥 鼓翼開嘴 向于子鳥 如子鳥索哺狀 盖子鳥漸長 能知自食 則反哺而報之 皆不越當年 不待母老而然 理固然也 吳君聖恒 爲余言之
매년 여름과 가을 사이에 깊은 산속에서 무리의 새들을 본다. 반포(反哺)라는 것은 어미 새가 새끼 새에게 향하여 날개를 퍼덕이고 부리를 벌리어, 마치 새끼 새가 어미 새에게 먹이를 달라고 하는 것과 같은 모양이다. 아마도 새끼 새가 점차 자라서 능히 혼자서 살아갈 줄을 알아 곧 어미 새에게 먹이를 먹이며 보답하는 것이다. 모두 그 해를 넘기지 않고, 어미가 늙기를 기다리지 않고 그러하니 이치가 확고하기 때문이다. 오성항(吳聖恒) 군이 나에게 말해주었다.
蘭說
余謂 東國有蕙而無蘭 黃魯直 脩水記曰 蘭似君子 蕙似士大夫 大槪 山林 十蕙而一蘭 其一幹一花而香有餘者 蘭也 一幹五七花而香不足者 蕙也 今吾東國 所謂蘭 一幹累花擧 乏薌澤 匪蘭伊蕙也 明矣 昔夫子 見幽谷中 徛蘭與衆草 爲伍 喟然發嘆 今乃以近似者亂 其名蘭之眞 吾未得見焉 況於人乎 況於君子乎 故著其說 以示同志
내가 말하는데 우리나라에는 혜초(蕙草)가 있고 난초가 없다. 송나라의 황노직(黃魯直)이 지은 수수기(修水記)에서 말하길 “난초는 군자를 닮았고 혜초(蕙草)는 사대부를 닮았다.”라고 했다. 대개 산과 숲에 열 개는 혜초이고 한 개가 난초인데, 한 줄기에서 한 송이 꽃이 피어 향기가 넘치는 것이 난초이고, 한 줄기에서 다섯 일곱 송이 꽃이 피어 향기가 적은 것이 혜초(蕙草)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이른바 난초라는 것이 한 줄기에서 여러 꽃이 피어나고 아늑한 향기가 모자라니 난초가 아니고 그 혜초(蕙草)인 것이 분명하다. 옛날 공자께서 깊은 산골짜기 속에서 기이한 난초와 여러 풀을 보고 동반자로 삼았는데, 휴! 아! 지금은 이에 가깝거나 거의 비슷한 것 때문에 문란하다. 그 이름있는 난초의 참모습을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랴, 하물며 군자에게 있어서랴. 그러므로 그 이야기를 지어서 동지들에게 보여 준다.
海棠說
古人云 海棠無香 今之評海棠者 以其有香 謂非眞海棠 余獨爲不然 按群芳譜 海棠 有四種耕 餘錄曰 嘉定州昌州 海棠獨有香 號海棠香國 劉淵材至 以昌州獨香爲佳郡 由此觀之 今俗之論 盖未深究耳 余家 種海棠一本 其花 五出 初則極紅如臙脂 及開漸成纈暈至落 若宿粧淡粉而色香俱佳 然則 我東所産 意其昌州之一種歟 記之以俟知者
옛사람이 말하길 “해당화는 향기가 없다”라고 했다. 지금 해당화를 평가하는 사람들은 향기가 있으므로 해당화의 참모습이 아니라고 말하며, 나는 유독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명나라 왕상진이 지은 군방보[群芳譜]를 펼쳐보면 갈고 심는 것이 네 가지가 있는데, 정식 기록에서 빠진 기록에서 말하길 “가정주(嘉定州)와 창주(昌州)의 해당화만 오직 향기가 있어 해당향국(海棠香國)이라고 부른다. 송나라 문인 유연재(劉淵材)에 이르러 창주(昌州)의 해당화만 오직 향기가 있어 아름다운 고을로 삼는다.”라고 했다. 이러한 사정을 드러내며 지금도 세속에서 서로 주장하며 다툼을 벌이는데, 어쩌면 아직 깊이 연구하지 않았을 뿐인 듯하다. 내 집에 해당화를 한 그루 심었는데, 거기서 꽃이 다섯 송이 나왔다. 처음에는 지극히 붉어서 입술에 바르는 연지(臙脂) 같다가, 꽃잎이 점차 벌어져 홀치기로 물들인 것처럼 테두리에 둥글게 띠를 이루고는 떨어지는데, 자고 난 뒤의 화장한 얼굴처럼 꽃가루가 엷고 색깔과 향기가 모두 아름답다. 그러한즉 동쪽의 우리나라에서 생겨나는 것은 생각건대 창주(昌州)의 한 종류가 아닐까 싶다. 기록하고 이로써 아는 사람을 기다린다.
草書說
夫草書 一曰氣 二曰格 三曰法 法可能也 格與氣 不可能也 龍山主人 崔子雲
得秋史筆帖而學焉方 其始習也 點點焉 想像之 畫畫 摹倣之 每一字一顧 惟恐 其或爽 若畵葫芦者之依樣 旣而 稍習之 費幾番紙 自以爲己能 遂屛去原本 揭腕驕騫 盛氣堂堂 戈波撇畵 初不營度 徑情直遂 輒稱曰 秋史眞榘 然視其草 則愈去而愈左矣 夫如是 不惟不得 其格 竝與其法 而失之 況所謂氣也哉 鳴呼 今之學文者 亦然 纔讀幾卷書 便謂有所得 操觚弄墨 旁若無人 日趨浮薄而元氣蕭喪 如美臠大羹 不能嚌其胾而識其味 鳥足以爲文哉 余亦不幸而同其病 故作草書說以贈之 因而自警云
무릇 초서체는 첫째가 氣요 둘째가 格이요 셋째가 法이니 法을 알아야 쓸 수가 있다. 용산(龍山) 주인인 최자운(崔子雲)이 추사(秋史)의 필첩(筆帖)을 얻어 방법을 배우고 그것을 처음 익혔다. 점 하나하나를 상상(想像)하여 찍고 그림을 그리듯 모방하고 매번 한 글자를 쓰고 다시 돌아보며 생각하였다. 다만 혹시라도 조롱박에 그린 것 같이 독창성이 없이 잘못 쓰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이후 차츰 배워 익숙해졌는데, 종이를 몇 번이나 허비했던가. 스스로 능히 자신이 쓸 수 있게 되자 마침내 원본(原本)을 물리쳐 없애고, 팔을 걷어붙이고 교만하고 건방지고 왕성한 기운이 당당했다. 과법(戈法)과 파법(波法)과 삐침 획을 처음에 계획을 세우지 않고도 뜻대로 아무 탈 없이 이루었다. 문득 칭찬하여 말하길 “추사의 참된 법도요. 그러나 그 초서를 보니 갈수록 어긋났소. 무릇 이같이 하면 格이 법과 함께 아우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法을 잃을 것이오. 하물며 이른바 (초서체의 첫째가 되는) 氣는 어떠하겠소.”라고 했다. 아! 지금 글을 배우는 자들 또한 그러하니 겨우 책 몇 권을 읽고 곧 얻은 바가 있다고 말하고, 붓을 들고 묵을 희롱하며 근처에 사람이 없는 듯이 방자하여 나날이 마음이 들뜨고 경박하고, 본디 타고난 왕성한 기운을 쓸쓸히 잃어 아름답게 여민 고기로 끓인 밋밋한 고깃국 같아서, 큰 고깃덩어리를 맛봐도 그 맛을 알 수가 없으니, 새의 발로도 글월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나 또한 불행하게도 그 병을 함께하므로 초서 이야기를 지어서 보내니, 따라서 스스로 경계하길 이른다.
種麥說
麥秋種夏熟 受四時之全氣 故於五穀 最益人 且凶荒救活 莫先於麥 先君子 嘗曰 人言十口之家 貯麥十斛 凶年 不能務 每一斗 幷皮作粉 則得粉 約一斗三四升 滾菜作粥 十口三日糧 是以 荒歲 麥直 高於租包 去戊子 大無 隣人 以大牛一隻 易大麥一碩 其爲農 甚容易 無耘耔漑灌之勞 但耕播菑田而已 眞儒者之農也 余窮居 荐經大侵 欲得山田 磽确者一頃 捨他農 全用力於種麥 故爲之說 遍告于同志者
보리는 가을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여무니 네 계절의 모든 기운을 받는다. 그러므로 다섯 곡식에서 가장 사람에게 이롭다. 또 흉년에 목숨을 구하는 것은 보리보다 뛰어난 것이 없다.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길 “사람들이 열 식구의 집에 보리를 열 휘의 보리를 쌓아두면 흉년에 능히 힘쓰지 않아도 매번 한 말로 껍질과 함께 가루를 내면 곧 보릿가루를 약 한 말 하고 서너 되를 얻으며 파곤채(滾菜)로 죽을 쑤면 열 식구가 사흘 동안 먹을 양식이니, 이 때문에 흉년에 보리값이 벼를 담은 포대보다 높았다고 말했다.”라고 했다. 지난 무자년(1888) 큰 흉년에 이웃 사람이 큰 소 한 마리로 쌀보리 한 말과 바꾸어 그걸로 농사를 지으니 김을 매고 북돋우고 물을 대는 수고로움이 없어 어렵지 않고 매우 편리했다. 다만 묵은 밭을 갈고 씨를 뿌릴 뿐이니 참다운 선비의 농사다. 내가 없이 살고 거듭 큰 흉년을 경험하여 산에 밭을 일구고자 하는데 자갈이 많은 메마른 땅이 한 경(頃)이라서 다른 농사는 버리고 보리를 심는 데에 온 힘을 쏟아부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지어 뜻이 같은 이들에게 두루 알린다.
種秫說
物之利 或二三倍 或五四倍 至於十倍 則已多矣 況百倍者 其利 果何如哉 己丑春 大侵 穀種 至貴 以十葉銅 買秫子一合種之 秋大熟 得一斗强 以一合 得一斗强 匪百倍而何 駔儈之食利 工匠之食伎 雖多利 乃末利 由此觀之 天下利 莫種穀若也 彼駔儈工匠 役役於末利 抑獨何心 或曰 幸今年豊 種穀 多利 然如 旱澇何 曰 極無爲災 則駔儈工匠 可保生乎哉 先王之制 每豐歲 稍存嬴餘 以備凶荒 故三年耕 餘一年之食云
물건의 이득이 혹은 두세 배 혹은 네다섯 배에서 열 배에 이르는즉 이미 아주 많다. 하물며 백 배라는 것은 그 이득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기축년(1889) 봄 큰 흉년이 들어 곡식을 심는 일이 지극히 귀했다. 이로써 십 엽동(葉銅)으로 기장 종자 한 홉을 사서 뿌리고 가을에 잘 여물면 한 두강(斗强)을 얻었다. 이로써 한 홉으로 한 두강을 얻으니 백 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말 거간꾼은 흥정을 붙여 얻은 이익으로 먹고살고 장인은 기술로 먹고사는데, 비록 이득이 많아도 이내 당장 눈앞의 작은 이득이다. 따라서 이로 볼 때 천하의 이득은 곡식을 심는 것만 한 게 없는데, 저 말 거간꾼과 장인들은 당장 눈앞의 작은 이득에만 힘을 쓰니 또한 유독 무슨 심보란 말인가. 혹자가 말하길 “다행히 올해는 풍년이 들어 곡식을 심어 이득이 많은데, 그러나 가뭄과 장마 같은 경우에는 어떠합니까?”라고 물었다. 말하기를 “한 가지만 지극히 없어도 재해가 되거늘 말 거간꾼과 장인들이 가히 삶을 보전하겠는가?”라고 했다. 선대의 임금이 제정하여 매번 풍년 든 해에 조금씩 여유를 채워두어 이로써 흉년에 대비했다. 그러므로 삼 년 농사지으면 일 년 식량이 남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讀書在心說 贈斗璣二從
讀書 以在心爲本 苟使心不在 書自書我自我 書與我何干 昔陳烈先生 苦無記 性於孟子 求放心章 得在心之法 自後 學問大道 爲世通儒 吾從斗璣 二少年 有向學之志 其志極 可尙然 而爲學在己 何患無師友 只病 吾志 未篤耳 須求一間精舍取 大學一部 正心以讀 嚴立課程 以千讀 爲定筭 一日百遍 久久潛玩 則孔曾 吾師也 先儒 所謂 開卷 對聖者 非耶 夫大學 聖門傳授心法 而程夫子於戴記中 表章之 爲千萬世 道學之源 格致誠正 修齊治平之道備矣 世之初學入德者 舍是 奚以哉 臨別 有眷眷不捨之意 無以相贈 故作此說 以在心二字 申告之
책을 읽는 것은 마음에 두는 것을 근본으로 삼으니, 진실로 마음도 두지 않으면 글은 글대로 나는 나대로 책을 읽되 정신을 딴 데 두게 될 것이니, 글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옛날 북송(北宋)의 진열(陳烈) 선생이 맹자 구망심장(求放心章)의 선악 어디에서 속하지 않는 성질(無記性)의 괴로움에서 마음에 두는 법을 얻어 이후로 배우고 묻는 큰길에 세상에 두루 통달한 유학자가 되었다. 나를 따르는 두문(斗文)과 기문(璣文) 두 소년에게 배움에 향한 뜻이 있다. 그 뜻이 지극하여 가히 숭상할 만하고, 배움이 자기한테 있거늘 어찌 스승과 벗이 없음을 걱정하겠는가. 다만 병으로 내 뜻이 아직 돈독하지 못할 뿐이다. 마땅히 한 칸짜리 글방을 취하여 대학(大學) 일부를 마음을 바르게 하여 읽고, 엄격하게 수업 일정을 세워 천 번을 읽는 것을 정한 계획으로 삼아, 하루에 백번을 읽고 오래오래 몰두하면 곧 공자와 증자가 나의 스승이다. 옛 선비들이 이른바 책을 펼치고 성인과 대화한 것이 아니겠는가. 무릇 대학(大學)은 성인의 문하(門下)에서 전해준 마음의 법이고, 대기(戴記, 예기) 속에 들어있는 걸 정부자(程夫子)가 세상에 드러내어 밝히어 천년만년 세대의 성리학의 근원이 되었다. 격물치지(格物致知) 즉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완전히 하여야 하고 성의정심(誠意正心) 즉 뜻을 정성스럽게 품고 마음을 바르게 가져야 하며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도를 갖춰야 한다. 세상에 처음 학문을 익혀 성인의 덕에 들어가려는 자가 이것을 버리고 어찌하겠는가. 막상 헤어지려고 하니 미련을 못 버리고 자꾸 돌아보고 있으려니 서로 주고받은 게 없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를 지어서 재심(在心) 두 글자로써 거듭 알린다.
抱外孫說 壬午(1882)
女適 爲柳氏婦者 以去年 陽復月念九日 得一丈夫子 余聞之喜 不能寐 思欲見之 氷程雪壑 計無以致身 今年正月旣望 以會試 赴京不中 三月晦 自京發還 四月 赴完山初試 五月又發會行 六月十一日 至華城 聞軍卒之亂 留三日 因以回程 七月旬間 抵家 足頭 六七個月 奔走道路 雖欲見外孫 暇乎哉 八月八日 天氣 澄鮮 乃杖竹履葛 始入福州龍巖 柳氏之外堂 主人翁 抱一乳孫 髮漆黑 額角淸秀 眉眼如畵 能匍匐起坐 扶戶而立直 所謂 翠竹碧梧 鸞鵠停峙 余叩之 乃外孫兒也 輒驚喜抱 在膝前 初若生踈 便欲退去 久久習之 握鬚摩面 孩笑 如常余心 祝曰 旣壽 且貴福厚心寬 以昌大 柳氏門戶 噫余行年五十有七 內外孫 惟此一孫 中心嘉悅 倘復如何昔 紫陽夫子 以獅子畵一幅遺 輅孫曰 須如此獸 奮迅咆哮 余故作說記 其梗槪云 歲壬午 外祖蕉山病夫 書龍巖雨中
여자는 시집가면 류씨(柳氏) 며느리가 되며, 이로써 작년 십일월 이십구 일 몸이 건장한 사내아이를 얻었다. 나는 이야기를 듣고 기뻐서 당장 보고 싶은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길은 빙판이고 골짜기는 눈으로 뒤덮여 아무리 헤아려봐도 그런 곳에 몸을 맡길 수가 없었다. 올해 정월 십육 일에 과거 시험이 있어 서울에 갔다가 낙방하고 삼월 그믐에 서울에서 출발해 돌아왔다. 사월에 완산(完山)에 가서 초시(初試)를 보고 오월에 또 과거 시험이 거행하여 출발했다. 유월 십일 일 화성(華城)에 이르러 군사들이 난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를 듣고 삼 일을 머물렀다. 이러한 까닭에 발길을 돌려 칠월 십 일 사이에 집에 이르렀다. 발과 머리가 육칠 개월 길 위에서 바쁘게 왔다 갔다 했다. 이러니 비록 외손자를 보고 싶으나 겨를이 나겠는가. 팔월 팔 일은 날씨가 맑고 신선하여 이내 대나무 지팡이와 칡신을 신고 비로소 동복 용암(龍巖)의 류씨(柳氏)의 사랑채로 들어가니 주인 노인이 젖먹이 손자 하나를 안았다. 머리카락은 옻칠한 것처럼 검고 윤택이 나며 이마는 맑고 빼어나며 눈썹과 눈동자는 그림 같고, 능히 기어 다니고 일어나 앉으며 문을 붙들고 곧게 서는데, 이른 바 푸른 대나무와 푸른 오동나무에 난새와 고니가 우뚝 멈춰서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물으니 곧 외손자 아이였다. 문뜩 놀랍고 기뻐서 안아서 무릎 앞에 두니 처음에는 낯선 듯하여 곧 뒤로 물러나려고 하다가 오래오래 계속하니 습관이 들어 수염을 잡고 얼굴을 문질러 어린아이 같은 웃음이 나왔다. 여느 때와 같이 내가 마음으로 축하하며 “목숨이 다하도록 오래오래 살고 또 귀하고 복을 두텁게 받고 마음을 너그럽게 하여, 이로써 류씨(柳氏) 가문을 번창하고 성대하게 하여라.”라고 말했다. 아! 나의 나이가 오십 하고 일곱인데 친손자 외손자가 오로지 이 손자 하나라서 충심으로 좋아하고 기뻐하노니, 행여 다시 어떻게 지난날로 돌아갈 것 같으면 남송의 자양(紫陽) 선생 주희(朱熹)께서 사자 그림 한 폭을 남기고서 손자를 맞이하며 “반드시 이 짐승처럼 맹렬한 힘으로 분기(憤氣)하고 큰 소리를 내어 외치거라.”라고 말했을 것이다. 나는 그래서 이야기를 지어 그 간추린 대강의 줄거리를 기록하며 말하노라. 임오년 파초가 자라는 산에 병든 사내 외할아버지가 비 내리는 동복(同福) 용암(龍巖)에서 쓰다.
龜牌說
世之閒居者 以骨爲戱 占事之吉凶 其法 先以五隻 置第一位 如是者五位(次以五隻置第二位) 合二十五隻 又以四隻 附四隅象四足 又以二隻 附兩腰旁 又以一隻 置最上頭 爲其首 其狀如龜 故號龜牌 先發上頭一隻 假如白六 則涎指端 拈取第三位 居中者 得其耦 白六以謂得格 其占爲吉歲 己丑 中春之花朝 余客琴嘯館 閒無事 春坡金斯文 爲此戱 余從旁 諦視之 初得白三 擿取中位 果白三也 一發便中 大快大奇 余生平 不識雜戲 謂春坡曰 吾試爲之 亦必中第觀之 乃置位如上法 先發眞亞 綴而擿取 則亦果眞亞 春坡大噱 以爲神 戱之曰 眞亞陰耦而重坤象 今年必得佳耦云 噫事或有 偶發偶中 非智力所使 與龜牌相似 今之取科第者亦然 或曰 非偶也 乃數也 此語言 未知信否
세상에 한가로이 사는 사람은 뼈로써 재미 삼아 일의 길흉을 점쳤다. 그 방법은 먼저 다섯 개의 외짝으로 으뜸이 되는 자리에 두고 이와 같은 것이 다섯 자리면(다음은 다섯 외짝으로 두 번째 자리에 둔다) 합이 이십오 외짝이고, 또 네 개의 외짝으로 네 모서리에 네 개의 발 모양을 붙이고, 또 두 개의 외짝으로 양쪽 옆구리에 붙이고, 또 한 개의 외짝으로 가장 위쪽에 두면 그 머리가 되며, 그 모양이 거북과 같다. 그러므로 귀패(龜牌)라고 부른다. 먼저 가장 위쪽 한 외짝을 들어서 만일 白六(눈이 한 개와 여섯 개인 패)이면 손가락 끝에 침을 묻혀 세 번째 자리를 취하여 집어 비틀고, 가운데 있는 것은 그 짝을 얻어 白六으로 자리를 얻었음을 알리니, 그 점은 길한 해로 삼았다. 기축년(己丑年) 꽃이 한창 피어나는 봄날 아침에 나와 객들이 화순 금소관(琴嘯館)에서 한가로이 하는 일도 없이 보내는데, 유학자인 춘파(春坡) 김사문(金斯文)이 이 놀이를 하여 나도 곁에서 유심히 보았다. 처음에 白三(눈이 한 개와 세 개인 패)을 얻어, 가운데 자리를 취하여 들추니 과연 白三이었다. 한 번 들어서 바로 맞추니 매우 상쾌하고 매우 기이했다. 내가 평생 여러 가지 잡스러운 놀이를 알지 못하여 춘파(春坡)를 일컬으며 말하길 “내가 시험 삼아 할 테니 또한 반드시 적중하는 차례를 볼 것이오.”라고 했다. 이내 위의 방법과 같이 자리에 두어(총 서른두 개의 패) 먼저 眞亞(눈이 두 개 두 개인 패) 패를 들고 이어서 들추니 바로 역시나 결과가 眞亞 패였다. 춘파(春坡)가 크게 웃고 귀신이라 여기며 장난으로 말하길 “眞亞 패는 음으로 짝수이고 중곤괘(重坤卦)의 상이라서, 올해는 반드시 아름다운 짝을 얻을 거네.”라고 했다. 아! 일에는 간혹 우연히 일어나거나 우연히 들어맞을 때가 있는데, 지혜의 힘으로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 바가 아닌 것은 귀패(龜牌) 더불어 서로 닮았다. 요즘도 과거에 합격한 사람을 골라 뽑을 때 또한 그렇게 하는데, 누군가 “우연이 아니다. 운수(運數)다.”라고 말했다. 이 말이 정말로 그런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오륙(五六, 2쪽)·퉁소(通踈, 2쪽]·쥐코[鼻, 1쪽]·진아(眞兒, 2쪽)·백사(白四, 1쪽)·백오(白五, 2쪽)·백륙(白六, 2쪽)·직흥(直興, 2쪽)·사오(四五, 1쪽)·사륙(四六, 2쪽)·주륙(主六, 2쪽)·소삼(小三, 2쪽)이다. 또,아삼(兒三, 1쪽)·장삼(長三, 2쪽)·삼사(三四, 1쪽)·삼오(三五, 1쪽)·삼륙(三六, 1쪽)·준오(準五, 2쪽)·어사(御四, 2쪽)·관이(冠二, 1쪽)·아륙(兒六, 1쪽)이다.
주사위의‘눈1’은 백(白), ‘눈2’는 아(亞), ‘눈3’은 삼(三), ‘눈4’는 사(四), ‘눈5’는 오(五), ‘눈6은’육(六)이라고 부르는데, 예를 들어 주사위 두 개를 던져 나온 눈이 순서쌍(1, 2), (5, 6)이면 각각 백아(白亞), 오육(五六)이라고 한다. 만약 같은 눈이 나오면 중(重)을 사용하여 중일(重一), 중아(重亞), 중오(重五), 중육(重六)라고 한다.
소소(1·1,..짝패), 쥐코(1·2,..홀패), 소삼(1·3,..짝패),
백사(1·4,..홀패), 백오(1·5,..짝패), 백륙(1·6,..짝패),
진아(2·2,..짝패), 아삼(2·3,..홀패), 어사(2·4,..홀패),
관이(2·5,..홀패), 아륙(2·6,..홀패), 장삼(3·3,..짝패),
삼사(3·4,..홀패), 삼오(3·5,..홀패), 삼륙(3·6,..홀패),
직흥(4·4,..짝패), 사오(4·5,..홀패), 사륙(4·6,..짝패),
준오(5·5,..짝패), 오륙(5·6,..짝패), 주륙(6·6,..짝패).
槲橡說
松沙奇寢 卽會一爲我 言荒年救活 莫如槲橡多取之 乾曝舂搗 去皮膚取肉 浸水 五六日 祛黃濁滓汴 以淨爲度 作飯 味平淡 無毒 久食充健 可敵五穀 去歲 大侵 閭井 無煙火色 以服橡 遍告隣人 隣人不信 乃使家奴 取之 作飯 如法啖 隣比隣比 自此信之 賴以全活 一村所收槲橡 多至五十斛云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잠자리에 누웠다. 곧 회일(會一)이 나를 위해 풍년에 사람들 목숨을 구하는 데는 떡갈나무와 상수리를 많이 줍는 것만 한 게 없다고 말했다. 많이 주워서 햇볕에 말리고 빻아서 겉껍질을 없애고 속살을 취해 물에 오륙일 담가 누렇고 흐릿한 찌꺼기 물을 떠서 없애고 이로써 정도껏 맑아지면 밥을 지어 먹으면 맛이 평온하고 담백하며 독이 없어 오래 두고 먹기에도 충분하고 건강해 가히 오곡과 대등했다. 작년에 흉년이 들어 마을에 불을 때는 연기가 없어 이로써 상수리를 먹으라고 이웃 사람들에게 두루 알리니 이웃 사람들이 믿지 않아 이내 집안 일꾼들에게 줍도록 하여 밥을 지어 본보기로 먹으니 이웃과 이웃이 이때부터 믿었으며 이에 힘입어 모두 살게 되었다. 온 마을이 떡갈나무와 상수리를 수확하는 바 많게는 오십 곡에 이른다고 말했다.
字說 壬辰(1892)
瓊璣 在器之天也 天道斡旋玉衡測之 以察日月五星之運 其爲器顧 不重於大呂九鼎耶 吾張玉山人也 先世珪組燀爀 世以連城璧比之 一自流落南土 門戶零朁便同珷玞 自光而又落於昇平 則一片荊璞 埋於泥沙 瓦礫同歸 良可嘅也 族弟有璣文者 年今十八 讀了曾思傳 其爲人 謹厚敦朴 即奇貨也 然而 人之宅心卑淺 則淪於下流 立志高明 則出乎上等 可不懼歟 記曰 玉不琢 不成器 學問以琢其質 華藻以琱其文 懷瑾握瑜 光氣炳烺 匪但爲席上之珍 必將爲國家之琛寶 則則 余所期望 倘何如哉 其名 璣文 以舜玉字之祝曰 玉乎玉乎 毋爲埋土之珍 必爲連城之寶 舜庭有璣 觀天之道 藏器於身 厥施斯好
아름다운 옥과 구슬은 그릇 안에 담긴 하늘이다. 천체가 운행하는 길을 선기옥형(璇璣玉衡) 도움을 받아 관측하고, 이로써 해와 달 별들의 운행을 관찰하였으니, 그 그릇됨을 돌아보니 아홉 개의 솥단지인 구정(九鼎)과 커다란 종인 대여(大呂)보다 중하지 못하겠는가. 우리 장가는 옥산(玉山) 사람이다. 조상님들이 규옥(珪玉)과 인조(印組)인 관직의 자리에서 밝게 빛내어 세상에 진귀한 보물인 화씨벽(和氏璧)에 견줬는데, 남쪽 땅에서 살면서부터 가문이 보잘것없는 처지가 되어 곧 옥과 비슷한 돌인 무부(珷玞)가 되었다. 광주에서 또다시 순천으로 떨어져, 아름다운 한 조각 형산(荊山)의 옥돌이 진흙과 모래에 묻히고, 쓸모가 없는 깨진 기와 조각과 자갈이 함께 돌아오니 진실로 개탄할 만하다. 문중 아우 중에 기문(璣文)이라는 자가 있는데, 나이가 올해 열여덟이며 증자(曾子)와 자사(子思)의 책 읽기를 마쳤으니, 그 사람 됨됨이가 조심스럽고 중후(重厚)하며 돈후(敦厚)하고 소박하니 곧 진귀한 재물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속마음이 낮고 얕으면 곧 하류에서 잠기고, 뜻을 높고 밝게 세우면 곧 높은 등급으로 세상에 나오니 가히 두렵지 않겠는가. 예기(禮記)에서 말하길 옥은 다듬지 않으면 그릇이 되지 않는다 하였으니, 배우고 물어서 익힘은 그 자질을 다듬음으로써 하고, 화려한 문체는 그 문장을 아로새김으로써 하여, 아름다운 옥을 품고 쥐어 빛의 기운을 밝게 빛내라. 다만 위 자리의 진귀한 보물이 되어 반드시 장차 국가의 보배가 되어야 한다. 아아! 내가 기대하고 바라는 바가 혹시라도 어떻게 되려나. 그 이름 기문(璣文)은 순(舜)임금의 옥의 글자로써 축하하며 말하길 “옥아! 옥아! 땅속에 묻힌 보물이 되지 말고, 반드시 여러 성을 이어놓은 것 같은 보물이 되어라. 순(舜)임금은 궁궐 뜰에 혼천의(渾天儀)가 있어 하늘의 도를 관찰하였고, 기량(器量)과 실력을 몸 안에 감추어 그 베풀어짐이 이처럼 좋았다.”라고 했다.
贈外孫說
外孫 曰興基 年今十二 其次三歲也 毛骨不凡 眉眼淸炯 余行年 六十有七 內外孫 惟此兩個 愛重 何如也 雖然玉不珠不成器 人不學不知道 童稚之學病 在懈怠 放心 去此病根方 可責效 夫小學 一書 是做人樣子 每早晨盥櫛 不留點垢敬對方策 一日百遍讀 爲課式夜 則合誦前所受 文義必精熟 句讀必詳明 音響必徐暢功 勿放過胡走 每日 所讀精寫一通 字字畵畵 必楷正功 勿放意胡寫 如是 則久久成熟 習與性成 其進取 不可量也 噫 福州山水 余所願 遊者 若置數間 精舍 於赤壁滄浪之間 栽花植竹 以終吾餘年 而見汝成立 幸孰大焉
외손자를 흥기(興基)라 부르며 나이가 올해 열두 살이고 그다음이 세 살이다. 몸이 범상치가 않고 눈썹과 눈동자가 맑고 빛이 난다. 내가 현재 나이가 육십하고 일곱이며 친손자와 외손자가 오직 이 두 놈이라서 애지중지함이 어떠하겠는가. 비록 옥이라도 구슬이 되지 못하고 그릇이 되지 못하듯이, 사람도 배우지 못하고 도를 알지 못할 수 있다. 어린아이의 배움의 병은 게으르고 방심하는 데 있으니 이 병의 뿌리를 없애는 방책이며 공들이 보람을 책임 지울 수 있는 것으로는 대개 소학 한 권이다. 이것은 사람을 만드는 모범이다. 매일 이른 새벽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어 한 점의 때도 머물지 못하게 하고, 서적은 경건한 마음으로 마주하여 하루에 백 번을 읽고, 일과(日課)가 있는 밤에는 즉각 전에 가르침 받은 것을 함께 모여 소리 내어 외우고, 글의 뜻은 반드시 사물에 정통(精通)하여 능숙하게 하고, 구절을 읽을 때는 반드시 상세하고 분명하게 하고, 목소리와 울림은 반드시 천천히 막힘없이 내뱉고, 대수롭지 않게 대충 보아 넘기거나 무턱대고 떠돌아다니지 말아야 한다. 매일 읽은 바를 정성껏 베끼어 한 번에 통달하고 글자의 획마다 반드시 해서체로 바르게 쓰는 데 공을 들이고 제멋대로 마구 갈겨쓰지 말아야 하며, 이와 같은즉 오래오래 습관이 되어 익숙하게 되면 습관이 천성이 될 것이니, 그 적극적으로 나아가 일을 이뤄낼지 가히 헤아릴 수가 없다. 오! 동복의 산과 물이여! 내가 바라는 바는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것인데, 만약 수십 칸의 서재를 창랑(滄浪)한 적벽(赤壁) 사이에 둔다면 꽃을 심고 대나무를 심으며 나의 남은 생을 마치려 하고, 네가 일을 이루어 내는 걸 본다면 다행스러움이 이보다 클 수 있겠느냐.
倫以理尺說
倫以理 一名 物抱 理生於叢薄間 長不過 尋尺材 不中繩墨 盖植物之小小者 而俗稱曰 倫以理 取其音相似 莫知其命名之義也 今官府學官 用爲鞭扑 複楚之具居多焉 歲甲申閏夏 過帶方之津山 朴君洪彦 新庄 朴君 余少友也 話間出 倫以理尺 記一篇 示之曰 家君性嚴峻 客於京師 殆二十稔 家有五子 雖一事一物 片言隻字 敎之 必以義方 每諸子 歸覲京第 慮其識趣汚下 學業不篤 嚴辭峻責 或對案不食 諸子 惶恐俯伏 固請罪 然後 乃止一日 溷圊上 有一去穢 木一枝 乃俗所云 倫以理也 因以倫以理三字 反覆推究 有至理存焉 父子天倫也 父盡爲父之道 子盡爲子之道 不可苛責 遽諫 反至於傷恩 兄弟亦一體天倫也 兄雖不友弟 當自盡其道 弟雖不悌兄 當自盡其道而已 然則父父子子兄兄弟弟 莫非倫以理而天倫之理立矣 於是取倫以理 木斷其染穢處 計其餘 洽爲十二寸 因以栽尺 自是之後 凡兒曺有過 不用苛責以此尺 自撾自撻 庶不失責躬 全恩之義 常置座右 以自警者 謂次子洪奎曰 汝歸家 取他倫以理摹 此造尺 擧家 責勵以 全父子兄弟之恩 勿失 乃爺之苦心也 余聞之歎賞曰 一箇 倫以理尺 大學 格致 修齊治平之道 咸備矣 夫天地間 事事物物 至微細者 各自有理 草木有草木之理 禽蟲有禽蟲之理 士君子 格致之工窮盡 事物引而伸之 無往不然 況父子兄弟 天倫之至而人所同得者乎 以是 尺度之則 上下四旁 無不均一 以之修身而身修 以之齊家而家齊 以之治國而國治 以之平天下而天下平矣 余故曰 大學 格致 修齊平治之道 於一箇 倫以理尺 盡之
윤이리(倫以理) 일명 사물을 안으면 우거진 수풀 사이로 이치가 생겨난다. 길이는 쓸모없는 짧은 목재에 불과하여 먹줄을 먹일 수 없다. 요컨대 심어진 물건이 작으면 작은 것이고, 세속에서 일컬으며 말하길 윤이리(倫以理)는 그 음이 서로 같은 것을 취하여 그 이름이 지어진 뜻은 알지 못한다 하였다. 지금은 관아와 향교 같은 곳에서 채찍질하려고 거듭 매질하는 도구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갑신년(甲申年 1884) 윤달 여름에 황해도 진산(津山)의 박군(朴君)과 홍언(洪彦)의 새 별장을 지났다. 박군은 나의 어릴 적 벗인데, 이야기 나누는 사이에 윤이리척(倫以理尺)이 나와 시 한 편을 적고 보이며 말하기 “아버님 성정이 엄하여 서울에서 오는 손님이 거의 이십 년이나 되오. 집에는 다섯 아들이 있는데, 비록 한 가지 일과 한 개의 사물, 한마디 말과 몇 글자의 글을 가르치더라도 반드시 집안의 가르침으로 하오. 매번 아들들이 부모님을 찾아뵈려고 서울 집으로 돌아오면 그 식견이 낮아지고 학업에 신실하지 않을 것을 염려해 엄한 말로 매우 엄하게 꾸짖소. 혹 밥상을 대하고 드시지 않으면 자식들이 황공(惶恐)하여 고개 숙여 엎드리고 죄를 확고히 여쭙고, 그러한 후에 이내 하루 만에 그만두시고 뒷간 위에 계시오.” 더러운 나무 한 개의 가지를 한 번에 없애니 마침내 세속에서 윤이리(倫以理) 즉 인륜(人倫)으로써 이치라고 이르는 바이다. 인하여 윤이리(倫以理) 세 글자로 거듭 미루어 생각하고 밝혀내면 지극한 이치가 그 속에 들어있다. 아버지와 자식은 하나같은 몸으로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인 천륜(天倫)이다. 아비는 아비의 도리에 다하게 되고 자식은 자식의 도리에 다하게 되며, 심하게 꾸짖어서는 안 되고 갑자기 잘못을 고치게 하면 도리어 은혜에 상처를 입는다. 형제 또한 천륜(天倫)이니, 형은 비록 아우와 우애하지 못하더라도 마땅히 스스로 그 도리를 다해야 하며, 아우는 비록 형을 공경하지 못하더라도 그 도리를 다해야 할 뿐이다. 그러한즉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답고 형은 형답고 아우는 아우다워져 인륜으로써 이치가 아닌 것이 없으며 천륜(天倫)의 이치를 확립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인륜으로써 이치를 취하여 나무를 쪼개듯 그 더러운 곳을 없애고 그 나머지를 계산하니 넉넉히 십이 척은 되었다. 인하여 이것으로써 어린나무들의 척도로 삼았다. 그 이후 무릇 아이들이 잘못을 저질러도 이 척도로 심하게 나무라는 데 쓰지 않았으며, 은혜를 온전히 하는 뜻에서 스스로 때리고 스스로 매질하여 몸소 꾸짖음을 잊지 않고 자신을 경계하는 것으로써 항상 오른쪽 자리에 뒀다. 작은아들 홍규(洪奎)를 말했다. “네가 집으로 돌아와 다른 인륜으로써 이치를 베껴서 취하고 이렇게 지은 척도로 온 집안이 나무라고 독려함으로써 아버지와 아들 형과 아우의 은혜를 온전히 잊지 말아야 하며 이는 아비의 고뇌다.” 내가 듣고는 감탄하고 칭찬하며 “인륜(人倫)으로써 이치(理致)와 척도(尺度) 한 개에 대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도가 모두 갖춰져 있다.”라고 말했다. 무릇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일과 모든 사물은 미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각각 자기만의 이치가 있어서 초목은 초목의 이치가 있고 날짐승과 벌레는 날짐승과 벌레의 이치가 있으니, 덕행이 높은 선비는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공부에 극진히 다해야 한다. 사물(事物)을 끌어당기고 펼침은 어디를 가도 그렇지 않은 곳이 없으며, 하물며 아버지와 자식 형과 아우는 천륜(天倫)에 이름은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얻은 것이지 않은가. 이로써 척도의 규칙이 위아래 사방에 균일하지 않은 곳이 없으니, 몸을 닦음으로써 몸을 닦고, 집안을 바로 잡음으로써 집안을 바로 잡으며, 나라를 다스림으로써 나라를 다스리며, 천하가 평안히 함으로써 천하를 평안히 해야 한다. 나는 그러한 까닭에 “인륜으로써 이치(理致)와 척도(尺度) 한 개로 대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도를 다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贈斗從說 壬辰(1892)
人亦有言 凡事在我而已 雖然亦在乎勢 勢之所迫 在我者 不得自由 此志士之歎也 吾從斗文 有志於學 其人品 不下 可以有爲 今春 見余於柳東 余作說而勉之 桂月之上旬 匹驢短策 抵昇平 話間 斗文慨然曰 上有九耋王父 六旬偏慈 家訏瓠落 無以自資 雖欲整坐讀書 其勢末由 余曰 向所謂 勢之所迫 在我者 不得自由者非耶 然而人之爲學 在篤之一字志 苟篤何患無成 盍思篤齋 命名之義乎 季路之負米 邵南之耕樵 皆爲親勤勞而不廢爲學 志不篤而果如是乎 今君重者 臨年之下 養親爲大 雖執鞭之役 有所不辭 以暇日 着力於文字 晝則服事 夜則讀書 今日 明日 勿爲虛度寸陰 分陰務在當惜 孜孜勤勤勉勉 不捨 然則 養在學中 學在養中 養與學 初非二事也 漢書曰 古之學者 耕且養 三年而通一藝 此古人所以成立卓越 今人則不然 養與學 分爲兩件 問其養之不至 則曰吾爲學而廢養 問其學之不至 則曰吾爲養而廢學 如蝙蝠之避役 因循度日 役役終身 夫如是則 非但廢養 竝與學而失之 良可慨也 厥病安在 其必曰 志不篤之故也歟 故以篤一字 申複焉
사람들 하는 말에 “무릇 일이란 나에게 달려 있을 뿐이다.”라는 말이 있다. 비록 또한 기세가 있더라도 기세에 압박을 받는바 나에게 달려 있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이것에 선비들이 탄식했다. 나를 따르는 두문(斗文)에게 배우려는 뜻이 있는데, 그 사람 됨됨이가 무언가를 가히 할 수 있음에 모자람이 없다. 올봄에 유동에서 나를 보러와 나에게 이야기하고 노력했다. 음력 팔월 상순(上旬)에 나귀 한 마리와 짧은 지팡이를 짚고 순천에 다다라 말하는 사이에 두문(斗文)이 개탄하며 말했다. “위로는 구순의 할아버지와 육순의 홀어머니가 있고, 집만 컸지 겉보기에만 크고 소용이 없는지라 스스로 자원을 마련하지 못해, 비록 가지런히 앉아서 책을 읽고 싶으나 그 기세를 펼 데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내가 말했다. “바로 앞에서 말했듯이 기세에 압박을 받는바 나에게 달려 있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사람이 배우려고 하는 것은 도타울 독(篤)이라는 한 글자의 뜻에 있으니, 진실로 돈독(敦篤)하다면 어찌 이루지 못함을 근심하겠으며, 어찌 독재(篤齋)라고 이름 지어진 뜻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계로(季路)는 쌀을 짊어져 나르고 동소남(董邵南)이 밭을 갈고 나무를 하는 것은 모두 부모님을 위하여 부지런히 일하고서 배움을 폐하지 않은 것인데, 뜻이 돈독하지 못했다면 과연 이같이 했겠는가. 지금 그대에서 중요한 것은 노년에 이른 뒤에도 부모님을 봉양하는 게 가장 큰 일이 되어야 한다. 비록 채찍을 잡은 역할을 사양하지 않은 바가 있더라도, 한가한 날을 이용하여 문자에 힘을 기울여 낮에는 부모님을 모시고 밤에는 책을 읽어야 한다. 오늘도 내일도 짧은 시간이라도 헛되이 보내지 말아야 하며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마땅히 아끼는 데 힘써야 하며, 힘쓰고 힘쓰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애써 노력함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 그러한즉 봉양은 배움 속에 있고 배움은 봉양 속에 있으니 봉양과 배움은 애초에 두 가지 일이 아니다. 한서(漢書)에서 말하길 옛날의 학자는 농사를 지으면서 배우기를 삼 년에 걸쳐 하나의 예(藝)를 통달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옛날 사람들이 일이 이룸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지금 사람들은 그들과 달라서 봉양과 배움을 두 가지로 나누었다. 그들에게 봉양이 부족한 까닭을 묻자 즉각 말하길 우리가 배우려고 봉양을 폐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배움이 부족한 까닭을 묻자 즉각 말하길 우리가 봉양하려고 배움을 폐하기 때문이다. 박쥐가 온갖 핑계를 대며 역할을 피하고 꾸물대며 날을 보내는 것과 같다. 평생을 힘써 일해야 함에 무릇 이같이 하더라도 비단 봉양을 폐할 뿐만 아니라 아울러 배움까지 잃어 참으로 개탄할 일이니, 그 병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면 반드시 말할 것이니, 뜻이 도탑지 못한 까닭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도타울 독(篤) 한 글자로써 반복하여 자세히 말하는 것이다.
猿猴說
東國 無猿猴之屬 嘗聞先考 幼少時 有人負猴 而過皆聚觀云 歲辛卯 余旅遊漢陽 一日 與諸益 抵泥峴之 倭人住處 器巧玩好 眩人眸子 至若傀儡閻羅之戱 皆淫媟 余不欲觀 至一處 名曰 猴館 觀者騈闐 人持十葉錢 方許入 其狀 類犬之中者 毛黃黲色 面亦無毛 耳眼鼻口 如尖瘦人 尾短尾 底兩旁 亦無毛而赤 故俗諺 以醉人面譏之 四足指尖如人十指 是以善攀緣執持 或四足行 或兩足行 跂立則 前二足 用之如手 以綠襦紅裳與之 輒受被之 如小兒狀 鐵繩係其頸 以防胡走 隨人指使 或慢不從 鞭捶之 即聽於是 倭以竹圈子 二左右持之 猴跳過其中無難 東西訖設索戱 猴跨兩索 如倡優步 捷利過之 或坐臥 或倒懸 或起舞 倭擊小鼓 節之 以栗 從下擲之 輒受而旋去 皮膜嚼之矣 今年秋 有以木樻置 猴至 邑之折楊樓下 聚觀坌集 授以一小杖 猴執之而疾行 或荷之而徐行如老人狀 立一大竿懸果 其上猴升之如飛 其臂有力 上樹撓枝 雖連抱之木 根本皆動 翫者爭投以錢 則向其人輒排 少咈其意 必爪膚而裂衣 曾聞 猿善啼嘯 而惟作魄魄聲 其非猿而伊猴歟 盖猴猻猿猱之屬類同而名異 今不可詳也所至 雖窮巷僻村士 女童幼爲其刱見 不惜錢財 大抵 其性巧黠 善伺人意 嗜貨無饜 以啗其主 亦一尤物也 嗚呼 余觀今世人面人衣 費淫巧 黷貨財滔滔 皆是與獮猴奚間焉
우리나라 동국(東國)에는 원숭이의 족속이 없다. 일찍이 돌아가신 아버지한테 어렸을 때 원숭이를 짊어진 사람이 있어 모두 모여 보았다는 말을 들었다. 신묘년(辛卯年, 1891년)에 내가 한양을 돌아다니며 두루두루 구경보다가, 하루는 여러 친구와 함께 진고개인 이현(泥峴)에 왜인들이 자리 잡고 사는 곳에 다다르니, 그릇이 교묘하고 진귀한 노리갯감이 사람의 눈동자를 어지럽게 하였다. 꼭두각시인 염라의 연극에 이르러서는 모두 음란하고 외설스러워 내가 보고 싶지 않아 한 곳에 이르니 이름이 원숭이 여관(猴舘)이며 구경꾼이 길게 늘어섰다. 사람이 열 개의 엽전을 가져야 바야흐로 들어가는 걸 허락했다. 그 모양은 개 따위의 속에 들어가는 것이며 털은 누렇고 검푸르죽죽한 색이고 얼굴 또한 털이 없고 귀와 눈 코 입은 삐쩍 마른 사람 같고, 꼬리는 짧은 꼬리이고 엉덩이 양쪽은 또한 털이 없고 붉었다. 그러므로 속담에 취한 사람 얼굴을 나무랄 때 썼다. 네 발의 발가락 끝은 사람의 열 손가락 같아, 이로써 줄을 잡고 오르고 붙잡아 버티기를 잘했다. 네 발로 가고 혹은 두 발로 가고 발돋움하여 설 때는 앞쪽 두 발을 손같이 썼다. 녹색의 저고리와 붉은 치마를 주자 갑자기 받아 입으니 작은 아이 모습 같았다. 쇠사슬로 그 목에 걸어 멋대로 돌아다니는 걸 막았으며, 사람이 시키는 대로 따르고 혹은 게으름 피우며 따르지 않아 채찍으로 때리니 소리가 이곳에 들렸다. 왜인이 대나무로 울타리를 치고 둘이서 왼쪽과 오른쪽에서 붙잡자, 원숭이가 그 속에서 어려움 없이 뛰어넘었다. 동서로 줄타기 설치를 마치자 원숭이가 두 줄에 올라타 광대처럼 민첩하고 날쌔게 걸어 지나가고, 혹은 앉고 눕고 혹은 거꾸로 매달리고 혹은 서서 춤을 추었다. 원숭이가 왜인이 작은 북을 쳐서 매듭을 짓고, 밤을 들고 나아가 밑으로 던지자 갑자기 받아들고 돌아가 껍데기를 씹었다. 올가을에 나무로 궤를 설치하여 원숭이가 이르자 읍의 절양루(折楊樓) 밑에 사람들이 무더기로 모여들어 함께 구경한 일이 있었다. 한 작은 지팡이를 던져주자 원숭이가 집어 빨리 걷거나 혹은 머리에 이고 느릿느릿 걸으니 노인의 모습 같았다. 한 개의 커다란 장대를 세우고 과일을 매달자 그 위로 원숭이가 날 듯이 올랐다. 그 팔에 힘이 있어서 나무에 오르니 가지가 휘어지고 비록 아름드리 큰 나무일지라도 뿌리가 모두 움직였다. 구경꾼들이 돈을 다투듯 던지는즉 그 사람을 향해 갑자기 밀치고 조금만 그들의 비위에 거슬려도 반드시 손톱으로 살갗을 긁고 옷을 찢었다. 일찍이 들으니 유인원 원숭이는 휘파람 소리를 잘 내고, 오직 타닥타닥 두드리는 소리를 내는 것은 그 유인원 원숭이가 아니고 이 보통의 원숭이다. 후손원노(猴猻猿猱)가 속한 무리는 같고 이름만 달라, 지금은 무엇을 이르는지는 자세히 말할 수가 없다. 비록 궁벽한 시골 마을 선비지만 여자아이에게 어려서 처음으로 보게 하는 데에 돈과 재물을 아끼지 않았다. 대체로 그 성미가 교활하여 사람 말을 잘 알아듣고 재물을 좋아함에 질림이 없고 주인마저 마음을 흔들어놓으니 또한 하나의 가장 좋은 물건이었다. 오호라! 내가 지금 세상의 사람들 얼굴과 사람들 옷을 보니 음탕한 기교를 부리고 돈과 재물이 철철 넘쳐나니 써서 더럽히니, 모두 이는 더불어 원숭이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二十南游說贈德陽李君 永煥 字士進 居高陽弓洞
吾東之 南游必於湖 湖於東國 中國之江淮也 走家 湖之南行 年七十有二 南湖 山水足跡 猶未之遍及 況域內 山川乎 況天下名山大川乎 可謂 蹩躠守堂 其不文宜矣 一日 德陽 李君來訪 叩其年 弱冠 叩其行 南游 以二十南游請 說於余 余衰且病謝 閣筆硏 已久 何異 問瞽者以丹靑 索聾者以音律耶 苐念子長 方十世 誦古文 日數千萬 言天下之名山大川 固已 杰列於方寸間 其爲氣充塞 無欠 但未廣耳 及其二十南游 以助之不過 因吾固有者 推廣動盪之也 曩使子長 胸中 無墳典邱索 九流百家之文 惟游覽 是尙 則所見山川 特虛殼 子烏得其眞骨力哉 故曰 欲學子長之游 先學 其誦古文可也 不爾則 三山五岳九河四瀆 即一畵餠中物於吾 不相干 雖日行千萬里江山 吾見章亥之足蹶 而夸父之力渴矣 何益之有 李君 胸中所有 縱未及 叩果能如子長十歲 誦乎否乎 吾願 李君 益取古人書 以蓄其有 涵泓演迤 使天下名山大川 灌注乎中 然後 南游 恐未晩也
내가 동쪽으로 가서 호남의 남쪽을 반드시 유람하니 우리나라 동국(東國)의 호남은 중국의 장강(長江)과 회수(淮水) 지역이다. 집을 떠나 호남으로 가서 나이 일흔둘에 호남의 산수에 발자취를 남기려 하였으나 오히려 두루 미치지 못하였으니, 하물며 지경(地境)의 산천이야! 하물며 천하의 명산과 대천이야! 과연 같은 곳만 빙빙 돌아다니고 집만 지킨 꼴이니 그 글월을 남기지 않음이 마땅하다. 하루는 덕양(德陽)에 사는 이군(李君)이 찾아와 그의 나이를 물으니 약관(弱冠)이고, 그의 가는 곳을 물으니 남쪽 유람이었다. 남쪽을 유람할 스무 곳을 여쭙고 나에게 이야기하니, 내가 쇠약하고 병이 있어 사양했다. 붓과 벼루를 놓은 지 이미 오래라서, 앞을 못 보는 장님에게 단청(丹靑)을 묻고 귀머거리에게 소리와 가락을 가려달라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다만 생각하니 사마천(司馬遷) 자장(子長)이 이제 막 열 살 때 옛 글월을 외우고, 천만의 날의 수와 천하의 명산과 큰 강을 말하고 진실로 이미 걸인(傑人) 열전(列傳)이 마음과 마음 사이에 막힐 정도로 가득 차 모자람이 없게 되었다. 무릇 호남지역이 넓지 않을 뿐이고 및 그 이십유람(二十遊覽)은 돕는 것에 불과하여, 인하여 나의 고유한 것이어서 움직임을 넓히었다. 저번에 자장(子長)의 가슴속에 삼황의 무덤에서 나온 서적 삼분(三墳)과 오제(五帝)가 남긴 글 오전(五典)과 고서인 팔색(八索)과 구구(九丘)가 있지 않아 구류백가(九流百家)의 글월만 오로지 유람하여 이리도 그를 숭상하게 하였으니, 산천을 보는바 빈 껍데기에 불과하여 자오(子烏)가 그 참된 필력을 얻었도다. 고로 자장(子長)의 유람을 배우고 싶거든 먼저 배워서 옛 문장을 외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세 개의 산과 다섯 개의 큰 산과 아홉 개의 하천과 네 개의 강이 곧 나에게는 하나의 그림 속에 든 떡인 물건이라서 아무 상관이 없게 된다. 비록 날마다 천만리 강산을 가더라도 내가 걸음을 잘 걸었던 대장(大章)과 수해(豎亥)의 발 움직임과 거인 과보(夸父)의 힘과 갈증을 본들 무슨 이로움이 있겠는가. 이군(李君)이 마음속에 품은 것보다는 비록 미치지 못하지만, 묻건대 과연 능히 열 살의 자장(子長)처럼 외우는가 그렇지 못하는가. 내가 바라는 건 이군(李君)이 더욱 옛사람의 글월을 취하여 그의 실력을 쌓아나가 넓고 깊은 물 넘쳐 흘러가듯이 나아가고, 천하의 명산과 큰 하천을 마음속에 들이부어 그러한 후에 남쪽 유람에 나서도 늦지 않을 것이다.
㠇㶏說 丁酉
全斯文 汝興 弱冠時 夢 一仙官 持烏玉杖以 國月二字 贈之 後三年 汝興 宿瑞石山中 夢一員如曩時所見 謂曰 國月 姑置之 更以㠇㶏二字 與之 其識之也 汝興曰 㠇字 何義 曰 山高 海日 初照處也 㶏字 何義 曰 水極淸 可濯處也 按玉篇 㠇嶺名 㶏溵同 穎川水名 余解之曰 㠇字 從山 從就 㶏字 從水 從隱 豈非山水就隱之義而嶺高則日先照 若泰山之日觀峰是也 水淸莫如穎 而若巢父之淸泠灘是已 汝興 癖於山水 甚於和嶠之錢 元凱之春秋 凡東南山水 足跡殆遍 往年 入方丈 周歲 不迨入 扶風之小蓬萊 四朔 迺還 盖其煙霞之宿痞 泉石痼肓 雖扁倉 莫醫也 必將履草 杖藤就 日觀峰隱 淸泠灘明矣 疇昔之夢 兆朕於此而爲先路也夫
유학자 전여흥(全汝興)은 약관(弱冠)의 나이에 꿈을 꾸었는데 한 선경(仙境)의 관원(官員)이 검은 옥 지팡이를 짚고서 국월(國月) 두 글자를 선물로 주었다. 삼 년 후 여흥(汝興)이 서석산 속에서 하룻밤 묵으며 꿈을 꾸었는데 한 사람이 접때 본 바와 같았다. 내가 일컬으며 말하길 “국월(國月)은 잠시 놓아두고 다시 추은(㠇㶏) 두 글자를 줄 테니 알아둬라.”라고 했다. 여흥(汝興)이 말하길 “㠇 자는 무슨 뜻입니까?”라고 하자, 내가 말하길 “산이 높고 바다에 해가 처음 비치는 곳이다.”라고 했다. “㶏 자는 무슨 뜻입니까?”라고 하자 내가 말하길 “물이 지극히 맑아 가히 씻을 수 있는 곳이다.”라고 했다. 옥편을 살펴보면 㠇는 고개 이름이고 㶏은 溵과 같은 영천수(穎川水)의 이름이다. 내가 해석하여 말하길 “㠇 자는 산을 좇고 나아가는 것이고 㶏 자는 물을 좇아 숨어드는 것이니, 어찌 산수에 나아가 숨으려는 뜻이 아니겠으며, 고개가 높은즉 해가 가장 먼저 비치니 태산(泰山)의 일관봉(日觀峰)이 이와 같은 곳이다.”라고 했다. 물의 맑기는 영천(穎川)의 물만 한 것이 없으니 가령 소보(巢父)의 맑고 시원한 여울과 같은 것이다. 여흥(汝興)의 산수를 즐기는 병은 돈을 좋아한 화교(和嶠)보다 심하고 춘추좌전(春秋左傳)을 좋아한 원개(元凱)보다 심하여 무릇 동남(東南)의 산수에 발자취를 두루 남겼다. 옛날에 방장산(方丈山)에 들어가 일 년을 보내고 부풍(扶風)의 소봉래(小蓬萊)에 잠겨 들지 못하고 넉 달이 지나 이내 돌아왔다. 그 안개와 노을을 즐기려는 묵은 체증과 산수를 즐기려는 고질병은 비록 편작(扁鵲)과 창의(倉公)조차 치료를 못 하지만, 반드시 장차 풀을 밟고 등나무 지팡이 짚으며 나아가 일관봉(日觀峰)에 숨어들면 맑고 시원한 여울이 밝을 것이었다. 지난날의 꿈이 여기에서 조짐하고 길잡이가 되었다.
得斧說
昔 我族 從叔 國賢氏 家貧 少失學 性方直 苟非義一毫不取也 嘗因事抵防石市少憩 有一衰麻人 對坐 旋去 忽見 五緡銅 墮地 慮拾取 非其主 因藉而守之 及半旬 其人還 求得之 余以爲誠一奇事 今年夏 家兒 率家丁 斬木 治完稻隴 家丁 置斧 大道傍 歸饁 俄而急 往覓之 無有矣 居數日 鄰村 一友有言 日昨 自 某處還 某處見 道傍 一斧遺在 四顧無人焉 行數百步 因念此物 必爲後人所得 還至斧處 擲置 稻泥中 其柄見 褰踏之 沒其痕而歸云 家兒 往尋果 得斧 余聞而異之曰 此與上所云 防市事 如印一板 昔呂滎公聞 京兆人讓金 云 世人喜言 無好人三字 自賊者也 人皆可以爲堯舜 觀於此而知矣 信然乎哉 擲斧者 藥水 金都事某之子寶汝也
옛날 나의 친족인 당숙 국현(國賢) 씨가 집이 가난하여 어려서 배울 기회를 잃고 성품이 바르고 곧아서 진실로 의롭지 않으면 한 개의 털도 취하지 않았다. 일찍이 돌 시장을 방비하는 일을 하다가 잠시 쉬는데 한 상복을 입은 사람이 있어 마주하고 앉아 있다가 되돌아가 갑자기 보니 동전 다섯 꿰미가 땅에 떨어져 있어, 주워 가지려고 생각하니 주인이 아니라서 인하여 깔고 앉아 지키니 오 일째에 미치어 그 사람이 돌아와 구하여 얻었다. 나에게는 진실로 하나의 기이한 일로 여겨졌다. 올여름 집 아이가 일꾼을 거느리고 나무를 베고 벼논을 완전히 고치었다. 일꾼이 큰길가에 도끼를 두고 들밥을 먹으러 돌아왔다가 갑자기 급하게 가서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며칠을 머무르니 인근 마을의 한 친구가 말을 남겼다. “자신이 며칠 전 어떠한 곳에서 돌아와 어떠한 곳을 보니 길가에 한 개의 도끼가 떨어져 있어 사방을 둘러보니 사람이 없어 수백 걸음을 걸었다. 인하여 생각하니 이 물건은 반드시 나중 사람이 얻는 바가 될 것이라서 도끼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 던져두었다. 벼와 진흙 속에 그 자루가 보이자 옷을 걷어붙이고 밟으니 그 흔적이 사라져 돌아왔다.”라고 말했다. 집 아이가 찾아 나선 결과 도끼를 얻었다. 내가 듣고 이상하여 말하길 “이것은 위에서 이른 바와 같이 방금 시장을 방비할 때 벌어진 일과 한 개의 판에서 찍어내듯이 조금도 다름이 없다.”라고 했다. 옛날 여형공(呂滎公)이 경조(京兆) 사람이 금덩어리를 사양하자 “세상에 좋은 사람은 없다(無好人)고 세 글자를 즐겨 말하는 사람은 자신을 해치는 자이다. 모두 요순과 같은 성인이 될 수 있음을 여기에서 보고 알 수 있다.”라고 말했으니 믿을 만할 것이다. 도끼를 던진 자는 약수(藥水) 도사(都事) 김모(金某)로 자는 보여(寶汝)다.
書說 當在上
四可子 嗜酒 每數十盃 兀然 不醉一日 忽斷飮 屛去世務 一以書畫爲事 近索小痴 山水圖 臨摹之惟勤 余曰 畫家 經營 貴其活法 昔吳僧善 畵客有求之者 輒云 錢塘湖 八月湖 雷峯 雪後 群巒極 天下偉觀 安用粉本也哉 夫小痴 山水信工矣 特一影中影耳 以影求影 不亦難乎 瑞石名山也 淑氣所湊 扶輿磅礡 其煙雲之興 蔚卉樹之蒨葱 奇巖疊嶂之斗起斗絶 無非畫家境界 子試一登覽 晴嵐遠景 經營在心 歸而振筆直遂 奮袂如風 則透到 畫師三昧矣
사가(四可) 이규보(李奎報)가 술을 좋아해 매번 수십 잔을 마셨으며, 혼자 우뚝하니 단 하루도 취하지 않은 날이 없다가, 갑자기 술을 끊고 세상의 잡다한 일 물리치고 글씨와 그림 한 가지만 일삼았다. 최근에 소치(小痴)의 산수도(山水圖)를 찾아 베껴 그리는 데 힘쓰며 내가 말하길 “화가의 그림 구도에 그 활용하는 방법이 귀하구나.”라고 했다. 옛날 오나라 승려로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객을 구하는 자가 있어 문득 이르기를 “전당(錢塘) 팔월호(八月湖)의 뢰봉(雷峯)은 눈 내린 후에 뭇 봉우리들이 극에 달하는데 천하의 장엄한 광경을 어찌 밑그림으로 쓸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무릇 소치는 산수에 믿음이 가는 화공이다. 특히 한 가지는 그림자 속의 그림자뿐인데, 그림자로써 그림자를 구하기가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서석산은 유명한 산이다. 화창하고 맑은 기운이 스며드는 바 상서로운 기운 충만하고 그 안개와 구름이 일어나고 우거진 풀과 나무가 무성하고 조밀하며 기암괴석으로 된 첩첩 산봉우리에는 험악하게 삐죽삐죽 솟고 벼랑처럼 험난하니 화가의 경지가 아닌 것이 없다. 소치가 한번 올라 화창한 날에 아지랑이가 아른거리는 먼 경치를 바라보니 그림의 구도가 마음에 들어와, 돌아가 붓을 휘둘러 바람과 같이 소매를 떨치어 바로 그리기를 마치니 곧 화가의 삼매경에 막힘없이 훤히 깨달아 이르렀다.
救荒說 當在上
宋子答申曼倩 書曰 朝不食 夕不食 不勝想念 然不死則幸矣 只祝 捨置他事 力於穡田以 爲收穀前頭之責 如何 以力田自給 爲養浩氣之一事 誠以不能力田則 救死之際 不能無 苟且之心 故也 況今左右之事 不止於苟且耶 云云 愚以爲 力田之中 種麥尤佳 夫種麥有四妙 初無耘耔之勞 一妙也 又無漑灌之功 二妙也 久儲而不敗 三妙也 常喫而善消 四妙也 且凶歲則幷皮作粉 約一斗麥 可得粉一斗零 作粥其功 倍於眞米 丙丁以後 至今年 大無以 此賴活居多 自昨冬 見村人 採根刈葉 以羹以粥以飯 其效可敵 數百萬斛至 今正二三月 亦然 四月以來 一石麥直爲四十四緡矣 雜羹則艾葉爲上 艾性溫中故 久食有益無損
송시열이 신만천(申曼倩) 답장한 편지에 이르길 “아침도 먹지 못하고 저녁도 먹지 못하여 상념에 젖을 수도 없다. 그러나 죽지 않는 것이 곧 행운이다. 다른 일은 제쳐두고 밭에서 수확하는 데 힘씀으로써 곡식 거둠을 앞으로의 책무로 삼는 것이 어떻겠는가. 회옹(晦翁) 주희(朱熹)가 부지런히 농사지어 살아감으로써 호연지기를 기르는 한 가지 일로 삼았는데, 정성을 다해서 농사일에 힘쓸 수가 없는 것은 즉 구제하느냐 죽이느냐 사이에서 구차한 마음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지금의 왼쪽 오른쪽 일은 구차함에 그치지 않는다.” 고 운운했다. 어리석은 내 생각에 힘들여 농사를 짓는 것 중에 보리를 심는 것이 더욱 좋았다. 무릇 보리를 심으면 세 가지의 훌륭한 점이 있는데, 처음에 김을 매고 북돋우는 수고로움이 업는 게 첫 번째 훌륭한 점이고 또 물을 대는 공력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게 두 번째 훌륭한 점이고 오래 쌓아둬도 상하지 않는 게 세 번째 훌륭한 점이고 항상 먹고도 잘 소화되는 게 네 번째 훌륭한 점이었다. 또 흉년에는 껍질째 가루를 내어, 약 한 두의 보리로 한 두 남짓 가루를 얻을 수 있으며 죽을 끓이면 그 공력이 찹쌀보다 배가 들었다. 병신년(丙申年) (丁酉年) 올해까지 흉년을 당함으로써 이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많았다. 작년 겨울부터 촌사람을 보니 뿌리를 캐고 잎사귀를 베어서 국도 끓이고 죽도 쒀서 밥을 먹었으며 그 수효에 맞서려면 수가 백만 곡에 이를 것이었다. 지금이 바로 두세 달이 역시나 그러하기에 사월 이래로 한 말의 보리가 곧바로 삼십사 꿰미가 될 것이다. 잡탕으로는 쑥잎이 최상으로 꼽히는데, 쑥의 성질이 속을 따뜻하게 하는 까닭에 오래 먹으면 이익이 있고 손해는 없다.
狗哺猪說 己亥十月
朴雲三 福州人也 家藍山 養親極甘旨 鄕里稱之 家有猪乳 未幾日 母猪爲猛獸所攫 猪兒 索乳悲呼 適其家狗乳 群猪就乳 狗哺之如其子 得以全活 其家 予狗飯 倍常數噫 猪狗殊類 可謂 風馬牛不相及 然而相感 有如此者 何也 玆非和氣致然歟 昔 韓愈氏 作董生行 以鷄哺狗 爲天降之瑞 則今狗猪相哺 亦謂之天祥也 宜矣 或曰 偶然此語 吾不信也
박운삼(朴雲三)은 동복 사람이다. 가람산(家藍山)에서 달콤한 음식으로 부모를 극진히 봉양하여 향리에서 칭송했다. 집에 젖먹이 돼지가 있었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어미돼지가 맹수에게 잡혀가고 말았다. 새끼돼지는 젖을 찾아 슬피 울부짖자 마침맞게 그 집 젖먹이 개가 여러 돼지에게 젖을 물렸다. 개가 그 자식처럼 젖을 먹여 모두 살 수 있게 되었다. 그 집에서는 개에게 밥을 평소보다 양을 배로 줘야 해 탄식이 나왔다. 돼지와 개는 다른 종류인데, 그야말로 놓아먹이는 소와 말이라도 결코 만날 수 없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이인데, 그러나 서로 감응하면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왜 그러한가. 이는 온화한 기운이 다해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 옛날 한유(韓愈)가 닭이 개를 먹이는 것을 보고 동생행(董生行)을 지었는데 하늘에서 경사스러움이 내려온즉 지금 개와 돼지가 서로 젖을 먹이게 되었으며 또 하늘의 상서로움이라고 이르는 것이 마땅하다. 혹자가 말하길 “우연히라도 이 말을 내 믿지 못하겠다.”라고 했다.
江都死節辨 丁卯(1867)
沁都之變 判書李公是遠 與弟郡守知遠 詣先墓下 飮藥而死 朝廷嘉之 贈上相亞銓 幷施槕楔之典 近聞北來人言 有曰 李公之死 無疆圉守禦之責 其死何爲哉 噫爲此說者 皆全軀保妻子之人也 方洋賊之攔入 守土之臣 束手 避鋒 都下波奔至 使聖上有城內 空虛之歎 于斯時也 忠義之風 蔑如矣 李公 以璿潢之派 世居 此土不忍見 宗社之危亂 妖孽之猖獗 明白就死直 千古快活事也 況無疆圉之責 而立辦大節乎 余故曰 海變以來 爲國殉難 惟李公二人而己彼 滔滔者 平居 冒位竊祿極 其華膴世亂則 挈妻子走山林 惟恐或後及其事 平㤼膽 纔定 始扼腕 而談之曰 李公 誠孟浪死 鳴呼 人之無恥 可哀也 己或有 以未擧義 爲李公惜者 公之居 距府城 想不甚相遠 墮在賊藪中 擧義於只尺之地勢 固不行 且公時年七十 有八方病痢在床 雖欲擧義得乎 昔仙源金公 以上相 當丙子亂 自焚於南門 亦將以未擧兵疑 金公耶 夫忠義 天之經 地之紀 萬世 民彛之撑亘 宇宙者也 公臨命 詩曰 一死勝於百萬兵 萊城倭慴宋公名 余爲沁都之賊 不刃而退 李公死節之力爲多也
강화도 변란 때 판서(判書) 이시원(李是遠) 공이 동생인 군수 이지원(李知源)과 함께 선산 아래에서 약을 마시고 죽었다. 조정에서 훌륭하게 여겨 우의정과 이조판서를 증정하여 정려(旌閭)의 은전(恩典)을 동시에 베풀었다. 근래 북쪽에서 온 사람 말을 들으니 어떤 이가 이시원(李是遠) 공의 죽음을 말하길 “변방에서는 쳐들어오는 적을 막아 성을 지켜야 하는 책임이 없는데, 그 죽음은 어찌 된 것인가.”라고 했다. 아! 이렇게 말하게 된 것은 모두 자기 몸만 온전히 하고 처자를 보호하려는 사람이다. 바야흐로 서양의 적들이 난입함에 지방을 지키는 신하들은 손이 묶이고, 칼날을 피해 서울 도성으로 달려오고, 임금은 성 내에 있게 하여 공허하게 탄식한 게 이때이며 충성과 절의의 풍조를 멸시했다. 이시원(李是遠) 공의 보배로운 자손들이 퍼져 대대로 살아오면서 현세에 차마 볼 수가 없는 종묘사직이 위태롭고 어지러우며 괴이하고 불길한 것이 창궐하매 명백히 올곧게 죽는 것이 오랜 세월 동안 경쾌한 일인데, 하물며 변방에서는 쳐들어오는 적을 막아 성을 지켜야 하는 책임과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쳐 지키는 절개를 힘써 세움이 없어서 되겠는가. 그래서 내가 말하길 “세상이 상전벽해로 변해온 이래 나라를 위해 국난(國難)에 의로이 죽는 이가 오직 이공(李公) 두 사람이고 나와 그대 같은 말을 거침없이 잘하는 자들이 평소 자리를 탐하고 국록을 도둑질함이 극에 달한 그 화무(華膴)들이 세상이 어려워진즉 처자를 거느리고 산속으로 도주하니, 혹 후에 그러한 일이 닥칠까 두렵소.” 평소 겁냄과 담력을 겨우 정해 처음에 팔뚝을 잡고 이야기하며 말하길 “이공(李公)이 참으로 맹랑하게 죽으니, 오호라! 사람이 염치가 없어 가련하구나.” 했다. 이미 혹 아직 의병을 일으키지 못하여 이공(李公)이 애석함이 되었으며, 공의 거처가 부성(府城)과 떨어져 있어 생각이 그다지 다르지 않으나 수풀 같은 적들 속에 떨어져 있어 지척의 지세에서 의병을 일으킴은 진실로 시행하지는 못하였다. 또 이시원(李是遠) 공이 이때 나이가 일흔으로 사방에 이질 병이 퍼져 침상에 있었으나 의병을 일으킬 마음은 있었다. 옛날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공이 우의정으로서 병자(丙子) 난을 당하자 스스로 남문에서 분신하고 또 장차 군사를 일으키지 않음으로써 김상용(金尙容) 공이 의심받았다. 무릇 충성과 절의는 하늘의 불변한 기준이오, 땅의 규율이며 오랜 세월 백성의 떳떳함을 탱탱하게 받쳐온 우주였다. 공의 죽음에 다다라 시를 지어 말하길 [한 사람의 죽음이 백만 병사보다 나으니, 동래성에선 왜적들이 송상현(宋象賢) 공의 이름을 두려워하였네.]라고 하였다. 내가 심도(沁都)의 적들을 칼을 쓰지 않고 물러나게 하니, 이시원(李是遠) 공의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힘이 많다.
靴辨 辛巳(1881)
日余入城闉 誤穿 靴各一隻 客有嘲之者曰 子之足 右着泥靴而素 左着乾而黑 豈菽麥不辨 羸黃不分者歟 余解之曰 我無心者也 無心之極 形骸可遺 足吾所有 而以達者 觀之 是亦外物 靴是外物之外物 心旣忘足 足自忘靴 尙何乾泥白黑之足卞哉 客曰 無心亦病耳 曾子曰 視而不見 聽而不聞 子學道五十年 猶未免曠 蕩病 將何 以一貼藥 打疊 余曰 無心雖病 不猶愈於有心者之病乎 夫無心出於澹澹之極 萬乘脫屣 有心出於濃濃之極 萬人竊屨 然則 天下之患 莫大乎有心 目今 殊類跳踉 冠屨便倒 群盜竊發 步武相接 其他 躡楚履 跕趙屣 鬪巧逞奇 種種 痼瘼 指不勝摟 由此觀之 有心者之害 殆甚於滔天也 若夫無心之極 混混浩浩 物我無間 大朴未散 萬和同春 堯天耕鑿 魚忘江湖 非所謂 王者之民 皥皥 而不知爲之者歟 夫天地一踉 萬物一靴 請以吾無心 醫天下有心者之病
하루는 내가 성문을 들어서니 신발 한 짝을 각각 잘못 신어 어느 객이 조롱하면 말하기를 “당신의 발이 오른쪽에 신은 진흙 신발은 흰색이고 왼쪽에 신은 마른 신발은 검은색인데, 어찌 콩인지 보리인지 분간하지 못하고 야윈 것인지 누런 병인지도 구분 못 하는 사람이오.” 내가 화해하며 말하길 “나는 아무 감정이 없는 사람입니다. 감정이 없음이 극에 달하면 몸뚱이도 잊어버릴 수가 있소. 발은 우리가 소유한 것이지만 통달한 사람으로서 바라보면 이 또한 마음 밖의 사물이오. 신발이야말로 마음 밖 사물의 마음 밖 사물이오. 마음은 이미 발을 잊고 발은 스스로 신발을 잊었는데, 어찌 마른 신발인지 진흙 신발인지 흰색인지 검은색인지 발이 분별하겠소.” 객이 말하길 “아무 감정이 없는 것도 또한 병일 뿐이오. 증자(曾子)가 말하길 마음이 다른 곳에 있으니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 하였소. 그대가 도를 배운 지 오십 년인데 아직 드넓은 병을 면치 못하였으니 장차 한 첩의 약으로 병을 깨끗이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소?” 내가 말했다. “아무 감정도 없는 것이 비록 병이나 감정이 있는 사람의 병보다는 더 낫지 않겠소?” 무릇 아무 감정도 없는 무심(無心)이라는 것은 마음이 고요하고 욕심이 없음이 극에 달했을 때 나와 천자의 자리도 신발을 벗듯이 버릴 수 있고 감정이 있는 유심(有心)은 먹물을 끼얹듯 시커멈이 극에 달했을 때 나와 만인이 신발을 훔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즉 천하의 근심은 감정이 있는 유심(有心)보다 큰 것이 없다. 눈앞에 닥친 지금 다른 종류의 것이 날뛰어 갓과 신발이 벌렁 뒤집히고 떼도둑이 일어나 연달아 씩씩하게 걸어 나오고, 그 밖에 초의 신발을 신고 조의 신발을 신으며 기이하고 묘한 기교를 다투고, 여러 가지 뿌리 깊은 폐단을 가리키자면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로 말미암아 바라보니 유심자(有心者)의 피해가 엄청나 하늘까지 가득 채우는 것보다 더 심하다. 만약 아무 감정도 없는 무심(無心)이 극에 달해 끝없이 넓으면 사물과 나 사이에 아무런 간격도 없이 하나가 되고 한 덩이의 원기가 흩어지지 않는다. 천지 만물이 화합하여 똑같이 봄을 맞이하고 요천순일(堯天舜日) 같은 태평성대에 새벽녘에 일어나 발을 갈고 샘을 파고 물고기는 강호를 잊으니 이른바 왕이라는 자의 백성은 마음이 너그럽고 여유로워 그 되는 바를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무릇 하늘과 땅이 한결같이 걷고 만물이 하나의 신발이듯 청컨대 우리의 아무 감정도 없는 무심(無心)으로써 천하의 감정이 있는 유심자(有心者)의 병을 고쳐야 한다.
砭惰示諸生 丙申(1896)
惰一字 百病之源 萬事之廢也 農而惰農不爲農 工而惰工不爲工 商而惰商不爲商 況爲士學問者乎 夫天之生物 斡旋運行 無一息之停 地之成物 包荒翕受 無一毫之間 然則 天地之工 不旣勞乎 人於其間 得氣之粹 耳目吾忽明 手足吾運動 心志吾發達 彼飽暖逸居 無所猷爲 荒蔽其耳目 安肆其手足 放逸其心志 專事昏惰者 天地間 一棄物 不可齒於人 余觀世人 同不 以勤而成功 以惰而廢業 大可懼也 諸君從余學有年 未免有此病 今有一副良藥 可以對投者 其惟自强乎 河南夫子 嘗愛表記 莊敬日强 安肆日渝之語 曰 莊敬則日就 規矩必使 此心常 常激昻 勉勉不己 則庶乎其免矣 易曰 天行健君子以自疆不息
惰 한 글자는 온갖 병의 근원이고 온갖 일의 폐단이오. 농사꾼이 농사일을 게을리하면 농사를 짓지 못하고, 장인이 장인 일을 게을리하면 물건을 만들지 못하고, 장사꾼이 장사 일을 게을리하면 장사를 못 하니, 하물며 선비와 학자에게 물어서 되겠는가. 무릇 하늘이 사물을 내어 알선과 운행을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땅은 사물을 생성하여 거친 것을 포용하고 모아서 받기를 터럭 하나의 간격도 두지 않는다 하오. 그러한즉 하늘과 땅의 일이 너무 수고롭지 않겠는가. 사람이 그 사이에서 순수한 기를 얻으니, 귀와 눈이 나를 홀연히 밝게 하고 손발이 나를 움직여 돌아다니게 하고 마음과 뜻이 나를 성장하고 성숙하게 하는데,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고 편안하게 살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귀과 눈이 황량하고 황폐해지고 손발이 편안하여 방자해지고 마음과 뜻이 거리낌 없이 멋대로 놀게 될 것이니, 오로지 어리석고 게으른 것만 일삼는 자는 하늘과 땅 사이에 버려진 하나의 물건이 되어 사람 사이에 낄 수가 없소. 내가 세상 사람들을 보니 부지런하면 성공하고 게으르면 일을 그만두니 가히 크게 두렵소. 여러분은 나를 따라 배운지 몇 해인데 이 병을 아직 면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니 지금 좋은 약이 하나 있어 대책으로 가능할 것이나 오로지 스스로 강해져야 하오. 하남성(河南城)의 두 부자(夫子)가 일찍이 예기(禮記)의 표기(表記)를 군자가 엄숙하고 공경하면 날로 강해지고 안일하고 방자하면 날로 구차해진다는 말을 애용하였는데, 말하기를 “엄숙하고 공경하면 날마다 성취하고, 그림쇠와 직각자는 반드시 이 마음이 항상 격하게 일어나게 하고 근면하고 근면함을 그치지 않으면 비로소 그것을 면하리라.” 하였소. 역에서 말하길 하늘의 운행은 강건하여 군자가 이를 본받아 스스로 강하여 쉬지 않는다 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