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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 드리는 기도
2022년 1월 2일 / 시 95:1-11
시 95:1-11 / 오라, 우리 여호와를 노래하자. 우리를 지켜 주시는 하나님께 기쁜 노래 부르자. 2) 고마운 마음으로 그분께 나아가자. 찬양 노래 즐거이 함께 부르자. 3) 여호와 주께서는 위대하신 하나님, 신이란 신 모두 다스리시는 임금이시라. 위대한 임금이시라. 4) 깊디깊은 땅도 주님의 손안에 높디높은 산도 주님의 것이라. 5) 바다도 지어내셨으니 주님의 것 땅도 주님이 손수 빚으셨어라. 6) 오라, 엎드리어 주께 예배하자.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7) 주님은 우리 하나님 우리는 주님 백성, 주께서 기르시는 백성이라 그분의 양떼라. 오늘 주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 보아라. 8) “므리바에서 너희 선조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고집을 부리지 말아라. 너희 선조가 맛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고집을 부리지 말아라. 9) 너희 선조는 거기서 내가 어쩌나 보려고 시험하였다. 저희 위해 내가 한 일을 똑똑히 보았는데도 나를 한번 떠보려 하였다. 10) 사십 년 동안 그 백성들에게 나는 넌더리가 나서 ‘어쩌면 저리도 마음이 떠나 있을까. 저들은 내 도를 들어 보려고도 하지 않는구나.’ 하고 말하였다. 11) 나 무척 화가 나 맹세하였다. ‘그 땅에, 편히 쉬라고 너희에게 허락한 그 땅에 너희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95편부터 100편까지는 동일한 사상을 골자로 하는 한 묶음으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주제로 한 신정시(theocratic psalm) 성격을 가지고 있다. 본 편의 저자는 다윗으로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70인역(LXX)에서도 다윗의 작품으로 표기하고 있고 히브리서 기자도 본 편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다윗의 글이라고 했다(7-8절; 히 4:7).
95편의 내용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만물을 유지하시는 전능자이기 때문이며, 이스라엘을 택하신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용 구조는 하나님에 대한 경배 요청(1-2절),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찬양(3-5절), 언약의 주인되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6-7上), 하나님 심판에 대한 성찰(7下-11절)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새해를 맞이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제목을 몇 가지 정하여 간구하였으면 한다.
1. 인간의 뜻과 생각인 고집을 버리게 주옵소서
▶ 맛사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려고 불평을 했던 이스라엘 / 출 17:1-7 / 이스라엘 온 공동체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신 광야를 떠나 이곳저곳으로 진지를 옮겨 가며 앞으로 나아갔다. 르비딤에 이르러 진을 쳤으나 그곳에는 먹을 물이 없었다. 2) 그러자 백성들이 모세에게 대들었다. “우리에게 마실 물을 주시오.” 모세가 대답하였다. “너희가 어찌하여 내게 대드느냐? 너희가 정말 그렇게 여호와를 시험해도 되는 것이냐?” 3) 그러자 백성들은 갈증이 너무 심하여 모세에게 심한 말까지 해가면서 불평을 터뜨렸다. “우리가 언제 당신더러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라 하였소? 왜 우리를 이곳까지 끌고 와 우리 자식들과 가축들까지 함께 목말라 죽게 하는 거요?” 4) 모세가 여호와께 살려 달라고 부르짖었다 “주님, 이 무리에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조금만 더 있으면 이들이 저에게 돌을 던질 기세입니다.”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이 무리에 앞서 가거라. 손에는 나일강물을 내리치던 네 지팡이를 들고 가야 한다. 6) 내가 호렙산 바위 위에서 너에게 나타나리라. 너는 그 바위를 내리쳐라. 그러면 거기에서 물이 솟아나와 무리가 그 물을 마실 수 있으리라.” 모세는 이스라엘 장로들이 보는 앞에서 여호와의 말씀대로 하였다. 7) 그곳 이름을 맛사라고도 하며 또는 므리바라고도 부르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거기에서 다투었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들 가운데 정말 계시는지 그분을 시험해 보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 므리바에서 해서는 안 될 불평에서 나오는 고집 / 민 20:1-13 / 그해 정월 이스라엘 온 공동체는 신 광야로 옮겨 오랫동안 가데스에 머물렀다. 거기에서 미리암이 세상을 떠나 그곳에 묻혔다. 2) 그들이 진을 친 곳에는 물이 없었다. 그러자 무리가 모세와 아론에게 몰려와 대들면서 3) 이렇게 항의하였다. `우리 이스라엘 형제들이 여호와의 성막 앞에서 죽을 때 차라리 우리도 함께 죽었으면 좋을 뻔하였소! 4) 당신들은 어째서 여호와를 모시고 사는 이 무리를 광야로 이끌어 내어 우리뿐 아니라 우리가 돌보던 가축까지 모조리 죽게 하는거요? 5) 어쩌자고 우리를 애굽에서 이렇게 험악한 광야까지 끌고 나왔단 말이오? 이 거친 광야에서는 농사지을 곳도 없고, 무화과 포도도 석류도 자라지 못하오. 더구나 마실 물마저 없지 않소!' 6) 모세와 아론이 무리를 떠나 만남의 장막문 앞에 이르러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자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 앞에 찬란하게 빛났다. 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8) “계약궤 앞에 둔 지팡이를 들고 네 형 아론과 함께 온 백성을 불러 모아라. 그런 다음 그들이 보고 있는 데에서 바위를 향하여 물이 터지라고 명령하여라. 그러면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올 것이다. 그 물을 너희 온 무리와 가축까지도 마시도록 하여라.” 9)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세가 가서 지팡이를 가져왔다. 10) 모세와 아론은 바위 앞에 온 공동체를 모아 놓았다. 모세가 입을 열었다. “이 반항하는 무리들아! 내 말을 들어라. 내가 이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해주랴?” 11) 그가 지팡이를 든 손을 쳐들어 바위를 두 번 내리치자 물이 콸콸 솟구쳐 나왔다. 온 무리와 가축들이 바위에서 솟아나오는 물을 마셨다. 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나를 굳건히 믿지 아니하여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나의 거룩한 힘을 드러내지 못하였구나. 그러므로 너희는 이 무리를 내가 주겠다고 약속한 그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지 못하리라.” 13) 이곳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께 불평을 하였기 때문에 ‘불평하다’라는 뜻으로 므리바라고 불렀지만 여호와께서는 물이 터져 나오게 함으로써 당신이 거룩하시고 힘이 있으신 분임을 드러내신 곳이기도 하다(모세는 분노를 폭발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참으사 인자하심을 나타내셨다).
▶ 히브리서 저자까지 이 사건을 크게 다루고 있다.
히 3:7-11 /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뛰어난 분이기에 성령께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주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 보아라. 므리바에서 너희 선조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고집을 부리지 말아라. 너의 선조가 맛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고집을 부리지 말아라. 9) 너희 선조는 거기서 내가 어쩌나 보려고 시험하였다. 저희 위해 내가 한 일을 똑똑히 보았는데도 한번 떠보려 하였다. 사십 년 동안 10) 나는 그 백성들에게 넌더리가 나서 어쩌면 저리도 마음이 떠나 있을까. 저들은 내 도를 들어 보려고도 하지 않는구나 하고 말하였다. 11) 나, 무척 화가 나 맹세하였다. 그 땅에, 편히 쉬라고 너희에게 허락한 그 땅에 너희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므리바 사건은 더 이상 발생하지 말아야 할 사건이기에 과거의 과거뿐 아니라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조심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히 3:12-19 /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은 늘 자신을 살펴 악에 물들거나 불신앙에 빠져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13) 아직 시간이 있는 동안 날마다 서로 일깨워 주어 아무도 죄의 유혹에 넘어가서 하나님을 향해 마음의 문을 닫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14) 만일 우리가 처음에 믿기 시작했을 때처럼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끝까지 충성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모든 복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15) 그러므로 지금 이 시기가 중요합니다. 다음 경고를 잠시도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므리바에서 너희 선조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고집을 부리지 말아라. 너희 선조가 맛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고집을 부리지 말아라.” 16)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이 누구였습니까? 자기들의 지도자 모세의 인도를 따라 애굽을 빠져 나온 사람들이 아니었습니까? 17) 그리고 40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진노를 산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죄를 짓고 광야에서 죽어 시체가 된 바로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까? 18)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결코 들여보내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말씀하신 것은 누구를 향해 하신 말씀입니까?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은 바로 그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었습니까? 19) 왜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히 4:2-3 /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리라는 놀라운 소식은 모세 당시의 사람들에게도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소식도 그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그 소식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 그러나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는 우리는 그 안식처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 사도 바울도 에베소 교인들에게 권면하고 있다.
엡 4:17-24 / 이제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더 이상 구원받지 못할 자들이 사는 방식대로 살지 마십시오. 그들은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닫고 깜깜한 어둠에 갇혀 지냅니다.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닫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길을 깨닫지 못합니다. 19) 그들은 선과 악도 구별하지 못하고 자신을 불결한 생활 속에 내맡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악한 생각과 무분별한 욕망에 이끌려 그런 생활을 멈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2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에게 그렇게 살라고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다. 21) 만일 여러분이 참으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배우고자 한다면 22) 여러분의 그 낡고 악한 옛 사람을 뽑아 던지십시오. 22) 여러분의 그 낡고 악한 옛 사람이야 말로 육욕과 속임수로 가득 차서 속속들이 다 썩어 버린 지난날 여러분의 자화상입니다. 23) 이제 여러분은 태도와 생각을 새롭게 바꾸어야 합니다. 24) 여러분은 전혀 다른 새 사람, 거룩하고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새사람이 되십시오.
고집 = 완악 / 자기의 의견을 바꾸거나 고치지 않고 굳게 버팀. 그렇게 버티는 성미 즉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과 뜻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철저히 방어하는 것이다. 성질이 억세게 고집스럽고 사납다.
▶ 이에 대하여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눅 8:11-15 / 이 비유의 뜻은 이러하다. 씨는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12) 씨가 길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으나 그 마음이 길바닥같이 굳어져 있어 곧 마귀가 와서 말씀을 빼앗아가기 때문에 믿지도 못하고 구원받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13) 씨가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은 기쁘게 듣지만 믿음이 뿌리를 박고 자라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은 말씀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잠시 동안 믿기는 하지만 시험을 받을 때에 떨어져 나간다. 14) 씨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으나 생활에 대한 염려와 모아놓은 재물과 여러 가지 책임이나 세상 쾌락들에 휘말려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이르는 말이다. 15) 그러나 씨가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정직하고 선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기쁨으로 지켜 나갈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전함으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 배우려는 자세가 준비되지 않다 / 그 유명한 앗시시의 성자 프랜시스에게 어느 날, 제자 후보생이 두 사람 찾아왔다. “선생님의 제자가 되어 신앙의 훈련을 받고 싶습니다.” 이들에게 프랜시스는 이런 요청을 했다. “저 밭에 나가면 배추들이 많이 있는데, 그 배추를 가져다가 뿌리를 하늘로 하고 그 배추를 심으시오.” 한 사람은 말없이 그 배추를 들고 들로 나갔다. 한 사람은 ‘하! 하! 이 성자가 여기서 오랫동안 도를 닦더니만 정말 돌았구먼.’하고 비웃었다. 그러나 프랜시스가 이런 무리한 요구를 한 이유가 어디 있었을까? ‘이 사람에게 순종이라고 하는 자질이 있는가? 어떤 명령을 주어도 그 명령을 받아 순종할 수 있는 순종의 자질이 이 사람의 마음과 삶 속에 있는가?’ 이러한 것을 프랜시스는 보기 원하였던 것이다.
그렇다. 길고도 험난한 순례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마음은 인도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다. 자기 판단대로 길을 잡고, 자기가 바라는 대로 방향을 잡으면 그 순례 여정은 천성을 향해 나아갈 수가 없다. 성령을 통해 주어지는 말씀의 안내를 순종하며 따를 때만 천성에 도달할 수 있다. 그곳에서 예비된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다.
2. 불순종한 마음을 자복하오니 순종하는 마음을 주옵소서
신년을 맞아 이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못 믿게 하여 불순종하게 하는 악한 것들을 물리쳐야 한다. 그러나 순종하는 마음은 성령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이상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마음이다.
▶ 사도 바울의 고백은 우리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롬 7:15-25 / 나는 나를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속으로는 올바른 일을 해야지 하면서도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내가 원하지 않는 짓, 내가 미워하는 짓만 저지르고 있습니다. 16) 나는 내 행실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내가 어기고 있는 율법이 선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17) 그러면서도 이러는 나를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나를 이미 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게 이런 악한 일을 시키는 것은 내 속에 들어 있는 나보다 더 힘이 센 죄입니다. 18) 나는 내 육신 안에 올바른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나는 나에게 올바른 일을 하게 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어도 되지가 않습니다. 19) 선한 일을 하고 싶어도 되지 않고 악한 일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되지 않습니다. 20) 이제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문제는 분명해집니다. 죄가 아직도 나를 사로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21) 나 스스로는 늘 올바른 일을 원하나 어쩔 수 없이 잘못된 일을 해버리는 이것이 인생의 현실인 것 같습니다. 22) 속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고 싶어하면서도 23-25) 내 속 깊은 곳에 어떤 다른 것이 있어서 그것이 내 마음에 분란을 일으켜 나를 누르고 아직도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의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나는 마음으로는 늘 기쁨으로 하나님 섬기는 종이 되기를 원하면서도 실제로는 여전히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자신을 봅니다. 이제 여러분은 내 형편이 어떻다는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아, 나는 얼마나 비참한 처지에 놓인 인간입니까! 누가 이 죽을 수밖에 없는 노예 상태에서 나를 해방시켜 줄 것입니까?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분이 나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자기의 고집과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늘 순종하는 마음 갖기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리하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마 7:7-11 / 구하라, 받게 될 것이다. 찾으라, 얻을 것이다.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8) 누구든지 구하면 받을 것이고, 찾으면 얻을 것이고,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9) 아들이 아버지에게 떡을 달라고 하는데 그 아버지가 떡 대신에 돌을 주겠느냐? 10) 또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그 아버지가 뱀을 주겠느냐? 11) 악한 사람일지라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애쓰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더욱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눅 11:13 / 너희가 비록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녀들이 원하는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 위의 구절과 연관되는 말씀이면서 떡과 생선에 대한 설명을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본다.
겔 11:18-20 / 그들은 고향 땅으로 되돌아와 모든 우상숭배를 몰아내고 이 땅을 깨끗하게 할 것이다. 19)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변화된 새 마음을 주고, 또 새 정신을 불어넣어 주겠다. 내가 그들의 가슴속에서 돌처럼 단단해진 마음을 드러내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겠다. 20) 그러면 그들이 내 지시에 따라 살고 내가 준 명령들을 존중하며 지켜 갈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는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겔 36:24-31 / 이제 나는 너희를 세계 만민 속에서 데리고 나오겠다. 모든 나라에서 너희를 모아다가 다시 옛 고향으로 데리고 들어가겠다. 25) 그런 다음에 너희 몸에 정한 물을 뿌려 그동안 온갖 우상을 섬기면서 더러워진 오물을 깨끗이 씻어 주고 26) 너희 속에 새 마음과 새 정신을 넣어 주겠다. 너희 가슴속에서 돌처럼 굳어진 마음을 드러내고 나의 마음에 공감할 줄 아는 마음을 넣어 주겠다. 27) 내가 이렇게 내 영으로 너희를 가득 채워 놓아 너희가 내 뜻에 따라 생활하고 내가 준 모든 계명을 지키며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게 만들겠다. 28) 그렇게 되면 내가 옛날에 너희 조상들에게 주었던 땅에서 다시는 쫓겨나는 일 없이 너희는 영원히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29) 내가 이렇게 깨끗이 씻어 주면 너희가 다시는 과거의 더러운 행실 때문에 고난을 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너희가 다시 깨끗해지는 그날에는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흉년이나 굶주림을 보내지 않겠다. 30) 너희 논밭에서 풍성한 곡식이 자라게 하고 과수원마다 많은 열매가 맺히게 하여 세계 만민이 다시는 너희를 거지 떼처럼 무시하거나 조롱하지 못하게 하겠다. 31) 그날이 오면 너희도 지난날에 저질렀던 수치스러운 행실들을 돌이켜 보고 그 행실이 너무나 비열하고 더러운데 놀라 자신이 밉고 부끄러워질 것이다.
■ 일찍 세계 제2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 대영제국의 왕실은 당시의 존경받던 영국 성공회의 대주교 윌리엄 템플에게 대 국민 방송설교를 요청하였다. 당시의 영국은 나치 독일의 기세에 대항할만한 객관적 전력을 보유하지 못했고 따라서 영국 국민들은 싸움을 하기도 전에 패배의식에 사로잡힌 채로 두려워하고 있었을 때였다. 사람들은 도대체 이런 상황에서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이 무슨 말을 할 것인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 그의 설교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대영 제국의 국민 여러분!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전능자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볼 수 있다면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내일 이 땅의 모든 교회는 종을 울려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역사의 주장자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고 그분을 경배하며 그 동안의 우리의 죄, 민족의 죄를 회개하고 이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십시다.”
실제로 그들은 그렇게 했고 전쟁 가운데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가 있었다.
■ 1905년 11월 17일은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가장 비극적인 역사의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소위 을사보호조약으로 우리의 국권이 사실상 일본에게 넘어가는 날이다. 비통에 젖은 민영환은 조국이 사라진 이상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어졌다고 판단하여 몇 개의 유서를 쓰고 주머니칼로 목숨을 끊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살아남아 조국의 수치를 보기보다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많은 뜻있는 애국지사들이 그 뒤를 이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제1대 총독으로 취임했고, 국민들은 깊은 절망 속에 1906년을 맞는다. 그런데 1906년 봄부터 이 땅에는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선교사 하디(Robert Hardie)라는 분이 봄 학기 시작을 위한 부흥회를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에서 열었는데, 거기에 부흥이 임한 것이다, 학생들이 놀라운 흡인력으로 말씀을 받아드리게 되었고 학생들 사이에 죄를 자복하는 회개운동이 일어났다. 이 부흥운동은 제물포로 이어졌고, 이어서 다시 서울지역에 연동 교회, 상동교회, 정동교회, 자교교회 등에서 각 교회 부흥회로 이어졌다. 이 때 부흥회의 공통현상은 죄에 대한 강력한 회개와 자복현상이었다.
3. 범사에 아니 평생토록 감사와 찬양을 그치지 않게 하옵소서
시편 95편을 통해 하나님께 경배하러 나아오는 이들이 왜 경배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경배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1절에서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고 말씀하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을 찬양해야 한다. 여기에 ‘구원의 반석’이란 말씀은 ‘피난처’라는 뜻으로 하나님은 인생들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라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는 구원’이란 뜻으로 하나님은 구원의 보증이 되신다는 말이다.
또한 여기의 ‘즐거이 부르자’라는 말씀은 ‘소리로 귀가 먹게 하다, 놀라거나 기뻐서 소리치다, 나팔 소리를 내다’라는 뜻으로 고대의 왕들이 대관식(戴冠式)을 거행할 때, 찬양대와 악대가 큰 소리로 노래할 때에 사용된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께 찬양하되 아주 웅장하고 거룩하게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구원의 은혜가 있는 성도는 찬송할 때에 목소리를 높여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하나님을 찬양하되 가식이 없는 진실한 마음을 표현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사랑하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마음을 열고 우리가 왜 그토록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양하는 삶을 살려고 몸부림치는지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참고 : 행 11:26 / 사울을 만나 그와 함께 안디옥으로 되돌아 왔다. 그리고 두 사람은 거의 1년 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새로 신도가 된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다. 신도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곳도 안디옥이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은 ‘작은 그리스도’라는 의미이다. 제자들의 말과 행함이 그들이 증거하는 ‘그리스도’와 꼭 닮았다는 것이다. 말과 행동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기에 ‘작은 그리스도’ 즉 ‘작은 예수’,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제자는 바로 ‘작은 예수’와 같은 사람들이다.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가?
1-2절과 6절에 나오는 기쁨, 노래, 감사, 경배. 이것은 예배의 중요 요소들이다. 우리는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노래하고 감사하기도 하지만,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엎드려 경배하기도 해야 한다. 경배는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두려워하는 경외의 표현이다. 경배가 없을 때 예배는 경박(輕薄)하다. 경배가 없을 때 감사는 바람에 날릴 정도로 가볍다. 기쁨과 노래와 경배는 감사의 사촌이다. 기쁨은 감사의 원천이다. 찬양은 감사의 분출이다. 경배는 감사의 두레박이다.
본문 2절에서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라고 한 것처럼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나아가자. 하나님을 찬양하되 즐겁게 찬양하며 나아가야 한다. 정말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아는 성도라면 감사의 찬양이 넘쳐야 한다. 찬양을 하되 즐겁고 기쁨으로 찬양해야 한다.
느헤미야 8:10에서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고 하는 것처럼 찬양할 때에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기쁨을 공급받을 수 있다. 환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공급받는다. 때로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기도 한다. <예 :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찬송하고 기도할 때에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처럼 그런 기적이 일어나기도 한다.> 다윗이 사울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사울에게 악신(惡神)이 물러갔던 것처럼 찬양은 정말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 내는 힘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크신 분이시고, 왕 중에 왕이시기 때문이다.
본문 3절에서 ‘대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 위에 크신 왕이시로다’라고 하는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시고 왕 중에 왕이시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을 다른 신과 비교하는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다른 신의 존재와 대조하라는 말씀도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위에는 다른 신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사람들이 영적으로 어두워져서 사람도 신격화시키고, 금수도 우상화하고, 심지어는 버러지 형상도 신으로 섬긴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드리며 예수님께 경배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을 크신 분으로 인정하지 못할 때가 많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되 하나님은 크신 분이시고, 모든 왕 중의 왕이 되심을 온전히 인정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인간의 언어로 심지어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저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 철학적, 문학적 심지어 신학적으로 접근해도 하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경배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장 크신 분이시고, 모든 왕 중에 왕이 되심을 믿고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권리와 지배권은 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의 운명 또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요 발등상이다. 조금만 주의해 관찰한다면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발자취를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올바른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주장에 어떤 반론도 제기할 수 없다.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냉철한 이성으로 추론해 본다할지라도 마찬가지이다.
우연히 세상이 만들어지고 내가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꼭 기억할 것은 크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나를 만드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거민들 가운데서 나를 거룩하고 특별한 소유 곧 보물로 선택해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구원의 언약을 맺어주셨다. 주님이 우리에게 속하신 것같이, 우리도 주님께 속하게 하셨다. 그래서 아가서 2:16 하반 절에서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다’라고 말씀하심과 같이 우리를 하나님에게 속한 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세상을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시지만, 나를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께 경배해야 한다. 그래서 본문 6절에서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마땅히 허리를 굽혀 하나님을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만드신 다음에 가만히 계신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시고 역사하시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만물과 인간을 지금도 섭리하시며 통치하신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감사와 찬양뿐이다.
4. 하나님은 나를 만드신 분이시며 목자가 되시매 평생토록 따르게 하소서.
6절 / 오라 우리가 굽혀 여호와를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여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여호와 오세누(oseenu)이다. 4-5절에서는 ‘그가 땅을 만드시고 산들을 만드신 분이시며, 바다도 육지도 그가 만드셨다’고 말씀하신다. 이어서 이 아름다운 땅과 신묘한 산들을 만드신 분, 저 푸르고 푸른 망망한 바다와 펼쳐진 저 육지를 만드신 바로 그분이 또한 우리를 만드신 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다시 7절에서는 그는 그가 지으신 것들 가운데서도 인생들을 특별한 관심으로 양육하며 책임지시겠다고 약속까지 하셨다.
7절 /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오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고 하시면서 ‘너희는 오늘 그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가 우리를 책임지시고 양육하시겠다면 우리가 할일은 어린양처럼 그분을 바라보고 그의 음성에 순종하면 그 뿐 아니겠는가? 우리가 그의 양이라면 그분은 우리의 목자이시다. 양의 모든 문제는 목자만 곁에 있어주신다면 완벽하게 해결된다. 목자는 양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사 먹게 하시고 쉬게 하신다. 목자는 양들이 어두운 골짜기를 통과하며 방황할 때 가야 할 방향을 보여 주신다. 두려워하는 양들 곁에 계셔서 지팡이와 막대기로 보호하신다.
그렇다면 무엇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문제는 그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에게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위기가 닥칠 때 그럴수록 우리는 우리의 창조자이신 여호와 앞에 나아가 엎드려야 한다. 그를 경배해야 한다. 그리고 그가 들려주시는 음성에 순종하여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도 실패한 이유가 무엇인가? 분명히 광야의 시련 중에도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셨고 그들을 인도하셨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다.
■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옛날 어떤 곳에 성자가 한 분 있었다. 그의 생활은 깨끗하고 덕이 되어서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래서 천사들까지 이 성자의 생활에 감동을 받아서 땅으로 그를 찾아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의 생활을 잘 살펴보니 과연 성자이다. 그래서 천사들은 그에게 은혜를 더 주려고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잘 하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그대가 기도하기만 하면 무슨 병이나 다 낫고 죽은 자라도 살릴 수 있는 권세를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자 성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감사합니다마는 저는 그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인간의 병을 다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셔야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저는 그 은혜를 사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그대가 말만 하면 어떤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게 하는 권세를 드리려는 데 이것은 어떻습니까?” 성자는 똑 같은 대답을 했다. “저는 그 은혜도 받을 수 없습니다.”, “왜 그러시오?”, “그것은 성령의 역사이니 성령께서 하셔야 할 일이지 어찌 제가 그 일을 하겠습니까?” 천사들은 “그렇다면 그대는 무슨 은혜를 원하시오?”라고 물었다. 성자의 대답은 이러했다. “예, 한 가지 은혜가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어떻든지 죄를 짓지 않고 선을 행하되, 그 선을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고 행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천사들은 의논 끝에 그 성자에게 그의 그림자 뒤로 비칠 때 그 그림자에 들어가는 모든 병자와 죄인들이 고침을 받고 새 사람이 되게 하는 은혜를 주었다고 한다.
■ 얼마 전에 유튜브에서 감동적인 영상(https://youtu.be/Fe-6SRwMdWs)을 보았다. 2018년에 제작한 이 영상에 고양이 한 마리가 한 남자의 어깨 위에 올라가 얼굴에 몸을 비비며 애교를 부리고 있고, 이 남자는 고양이의 행동에 흐뭇한 미소를 짓는 모습이 나온다. 이 남자는 미국 캘리포니아 페어뷰 밸리(Fairview Valley) 소방서에서 근무하는 라이언 콜먼(Ryan Coleman)이라는 사람이다. 콜먼은 2018년에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 진화 현장에 투입되었다. 이 화재로 80명이 숨졌고, 건물, 가옥 1만1천여 채가 피해를 입었다. 이 산불 진화를 위해 현장에 투입된 콜먼은 우연히 불길에 갇혀 있는 고양이 한 마리를 구출하게 된다. 그런데 이 고양이는 자신을 구해준 콜먼 곁을 떠나지 않고 그의 목에 올라타서 온몸으로 고마움을 표현했다고 한다. 화재 현장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이 고양이는 줄곧 콜먼을 따라다녔다고 한다. 콜먼은 이 동영상을 찍어 자기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무려 170만 번 이상의 조회 수를 기록했고, 약 33,000명이 이 동영상을 공유했다고 합니다. 자기 생명을 구해 준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이 고양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것이다.
사 1:2-3 / 하늘아, 들어라 땅아, 귀 기울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키우고 정성껏 돌보았던 자식들인데 바로 그것들이 나에게 반항하고 떠나 버렸다. 3) 나귀나 소 같은 짐승도 제 주인을 알아보는데, 자기를 보살피는 주인에게 고마워하는데, 이스라엘은 그것도 모르는구나. 내가 무슨 일을 해주어도 내 백성은 아랑곳없구나.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지으셨고, 지금도 나의 삶을 돌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삶의 목적이 분명해진다. 그 목적은 나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런 삶을 통해서 삶의 의미(意味)를 발견한다.
다윗의 시편 23:6로 ‘새해에 드리는 기도’ 설교를 마감하려고 한다.
시 23:6 /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 거하기로 굳건히 결심했다. 그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여러 번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체험하고서 이렇게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런 결심을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여러 가지 은혜를 헤아려 보았다. 그분은 푸른 초장에서 그를 먹이셨고, 하나님의 말씀의 물을 먹이셨다. 여호와는 그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고, 그를 새롭게 하셨다. 또한 위험한 지경에 처해서는 힘을 주셨고, 죽음의 위험을 당해서도 그를 지키셨다. 그에게 원수들이 많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많은 축복을 내려주셨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이 많은 자비로움을 체험했기에,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시편 23편 6절에서 다윗은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라 고백하고 있다. ‘따르리니’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라다프’라는 동사는 ‘쫓아오다 추격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다윗은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사울로부터 쫓기는 인생을 살았다. 그래서 다윗은 항상 뒤를 돌아보아야 했다. 자기를 쫓는 사울과 그 추격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망자는 마음 편히 잠을 잘 수 없다. 뒤에서 누가 덮치지 않을까 항상 불안하다.
그런데 시편 23편의 다윗의 고백은 자기를 따라오고 추격했던 것은 원수가 아니라 바로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었다고 고백한 것이다. 자기를 뒤따르던 것은 적이 아니라 은혜였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선하심이 무엇인가? 이것은 하나님의 선한 성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 대하여 선하게 대하시는 하나님의 태도를 말한다. 선하심은 히브리어로 ‘토브’인데 ‘가장 좋은 것을 주심,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심, 보시기에 좋게 하심’의 뜻으로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만드신다. 로마서 8장 28절의 고백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좋은 일만 있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에게 좋지 않은 일도 있고, 실수할 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실수와 잘못과 역경들을 합하여 결국이 좋게 되도록 만드신다.
이것이 다윗이 고백한 여호와의 선하심이다. 다윗은 자신이 사울에게 쫓긴다고 생각하여 불안한 인생이요 곤고한 인생이라 여겼는데 나중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이를 통해서 자기를 높이셨고 자기가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만드셨다. 다윗의 뒤를 쫓은 것은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 선하심이었다. 우리에게 늘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좋은 일이 되도록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이다. 다윗은 이 여호와의 선하심을 경험하였던 것이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무엇인가?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실수도 많이 하고 잘못도 많이 한다. 또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해를 받을 때도 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실패했다는 판단을 내릴 때도 있다. 밖에서 들리는 이런 소리들도 우리를 힘들게 하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 내면의 소리라면 더욱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가끔 우리는 쫓기는 꿈을 꿀 때가 있다. 문제에 시달리고 일이 진척이 되지 않을 때, 나만 뒤쳐져 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이런 쫓기는 꿈들을 꾼다.
그런데 다윗은 자기를 따라 왔던 것은 여호와의 인자하심이라 고백하였다. ‘인자하심’은 헤세드라는 단어이다. 무한한 자비하심, 용서하심, 이해하심으로 번역할 수 있다. 시편 103:8-11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시 103:8-11)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얼마나 큰지 땅에서 저 높은 하늘을 가득 채울 만큼 그 인자하심이 크고 무궁함을 노래하고 있다.
선(善)은 히브리어 ‘토브’로 창세기 1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할 때 쓰인 단어이다. 그것은 곧 모든 만물이 조금의 아쉬움도 없이 하나님이 본래 마음에 품고 있던 계획대로 이루어졌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있는 계획대로 우리 인생의 집이 지어져 갈 때, 그리고 그 계획대로 활용될 때 그것이 선한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이스라엘 백성의 영원한 찬송 제목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송할 수 있었던 사람은 하나님의 그의 삶에 가지고 있는 목적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의 원하심(계획)에 맞게 살아갈 때 그것이 선한 것이고, 그렇게 살아갈 때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인생이며, 그 자리에 있을 때 가장 탁월한 삶을 살 수 있다.
인자(仁慈)하심의 히브리어는 ‘헤세드’이며 희랍어로는 ‘아가페’이다. 이것은 조건이 없는 사랑이며, 대상에 대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사랑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불순종하며 살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를 부르신다.
다윗은 늘 평탄한 길만 걸어온 것도 아니고, 늘 하나님의 칭찬만 받으며 살아온 것도 아니었다. 그는 긴 시간 영혼의 어두움 가운데 고통하며 살기도 하였지만, 그 속에서 자기와 같이 쓸모없는 죄인을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아가페를 깨닫고 거기에서 깊이 뉘우치게 되었다.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우리는 알 수 없고, 단지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살아갈 뿐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 우리가 미래에 대한 확신 가운데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은 우리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따를 것을 믿고, 하나님의 계획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뿐이다.
하나님! 나도 다윗과 같이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는 고백을 하면서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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