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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신부 약전종합. 1
1. 성, 김대건 신부 약전
▲ 김대건 신부 활동지도
김대건(1821~1846). 최초의 한국인 신부. 순교자. 성인(聖人).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안드레아. 아명(兒名)은 재복(再福), 보명(譜名)은 지식(芝植), 대건은 관명(冠名)인 듯. 본관은 김해(金海).
생애 : 김대건은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현 忠南 唐津郡 牛江面 松山理)에서 천주교 신자 김제준(金濟俊)과 고 우르술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집안은 부유하고 지체 높은 양반 집안이었으나 천주교로 말미암아 전락하였다. 그러나 모범적 신앙생활과 순교자들을 배출함으로써 한국 교회사에서 유명한 집안이 되었다.
이 집안과 천주교와의 관계는 김대건의 증조부인 김진후(金震厚)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한국 천주교가 탄생한 지 얼마 안 되어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이래 그는 1791년의 박해 때부터 체포되어 관가에서 신앙을 고백했고, 1801년에는 유배되었으며 1805년 해미(海美)에서 다시 잡혀 10년 동안의 감옥살이 끝에 1814년 옥사 순교하였다.
끊임없는 박해로 말미암아 자연 이 집안은 많은 가족이 한데 모여 살기가 어렵게 된 것 같고 그래서 김진후의 셋째 아들 김종한(金宗漢)은 어느새 솔뫼 고향을 버리고 안동(安東)으로 피신해 살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1815년 을해박해(乙亥迫害) 때 잡혀 대구(大邱) 감영으로 이송되어 거기서 이듬해 참수(斬首) 순교하였다.
그 후 김진후의 둘째 아들, 즉 김대건의 조부, 김택현(金澤鉉)도 박해 때문에 솔뫼를 떠나게 되었는데, 그 때가 1827년의 정해박해(丁亥迫害)였던 것 같다. 김택현은 서울의 청파(靑坡)를 거쳐 용인(龍仁) 땅 골배마실[寒德洞]에 정착하였다. 그 때 김대건의 나이 7세였는데, 그는 여기서 그의 나이와 그의 신분에 적합한 한문 공부를 했을 것이 틀림없다.
김대건의 부친 김제준은 1836년 초에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가 입국하자 곧 서울의 정하상(丁夏祥) 집에 거처하던 모방 신부를 방문하고 그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모방 신부는 서울에서 부활절(4월 5일)을 지내고는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 공소순방에 나섰는데, 그는 먼저 용인지방의 골배마실에 이웃한 ‘은이’ 공소에 들러 아주 열심하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소년 김대건을 보고 총명한 그를 대견스럽게 여겨 신학생으로 간택하였다. 이 때 김대건이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김대건은 곧(7월 11일) 서울로 올라와 이미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던 같은 또래의 최양업(崔良業), 최방제(崔方濟)와 함께 한문과 라틴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박해 때문에 이들은 국내에서 성직자로 교육시킬 수 없다고 판단한 모방 신부는 연말의 동지사편을 이용하여 우선 그들을 마카오의 파리 외방전교회 경리부로 보내기로 하였다. 그런데 세 소년 중 김대건만은 수련기간이 짧아 처음에 같이 보내기를 주저했으나 다시 그런 기회가 없을 것 같아 결국 함께 보내게 되었다.
세 소년은 출발에 앞서 모방 신부 앞에서 성경에 손을 얹고 장차 조선 포교지의 장상과 신학교 교장에게 절대 순종할 것을 엄숙히 선서한 다음 이튿날, 즉 12월 3일 예정대로 서울을 떠났다.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 정하상(丁夏祥), 조신철(趙信喆) 등 약 10명이 동행하게 되었는데, 유 신부는 조선 포교가 어렵게 되어 중국으로 돌아가는 길이었고, 정하상 등은 세 소년을 국경까지 인도하는 동시에 새 선교사를 영입(迎入)하게 되어 있었다.
일행은 12월 28일 변문(邊門)에 도착해 대기 중인 조선 선교사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신부를 만났다. 세 소년은 샤스탕 신부를 조선 국경까지 안내한 중국인 안내원들을 따라 요동(遼東)과 만주를 거쳐 중국대륙을 횡단한 끝에 1837년 6월 7일 목적지인 마카오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마카오 주재 파리 외방전교회 경리부장 르그레즈와(Legregois) 신부는 당시 페낭 신학교[파리 외방전교회 경영의 동양인 성직자양성소]의 중국인 학생들의 정신이 좋지 못해 조선인 신학생들을 거기로 보내지 않기로 하는 한편 새로 임명된 조선교구장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그들을 경리부에서 맡아 교육하기로 하였다.
처음에 칼르리(Callery)[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어 입국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부가 조선 신학생들의 교육을 담당했으나 곧 르그레즈와 신부가 대신하게 되었다. 그는 신학교장인 동시에 교사, 사감, 의사 등의 역할까지 하였다. 칼르리 신부는 조선 신학생들에게 성가를 통해 발성법까지, 르그레즈와 신부는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이들이 교리와 라틴어에서 보인 성적은 매우 만족스러운 것이어서 그들에게 많은 희망을 갖게 하였다.
칼르리 신부는 한때 만주에 조선신학교를 세울 계획도 가졌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김대건 등은 마카오에 도착한지 2개월 만인 8월에 마카오에서 일어난 민란(民亂) 때문에 잠시 마닐라로 피신해야만 하였다. 또 1년 후(1838. 11. 27)에는 최방제와 사별(死別)해야 하였다.
칼르리와 르그레즈와 신부만이 아니라 경리부 차장 리브와(Libois) 신부, 데플레시(Desfleches) 신부 등도 조선 신학생의 교육을 도왔다. 데플레시 신부는 중국 사천교구(四川敎區) 선교사로서 마카오에서 입국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그 후 사천주교).
1839년 아편 거래로 인해 광동(廣東)과 마카오에 다시 민란이 일어나 4월 초 김대건과 최양업은 또 마닐라로 피신해야 하였다. 칼르리, 데플레슈 신부들이 그들을 동행하였다. 그들은 4월 한 달을 마닐라의 도미니코회 수도원에서 지내고 5월초부터는 마닐라에서 30리 떨어진 롤롬베이(Lolombey)의 수도원 농장으로 가서 그 해 11월 마닐라로 돌아올 때까지 그 곳에 머물렀다.
이곳은 경치도 아름답고 거처도 넓고 편하였다. 데플레슈 신부로부터 매일 강의를 들었고 또 자주 외출하면서 식견을 넓혔다. 8월에는 뜻밖에 고국으로부터 소식도 받았다. 모두가 건강했으나 김대건만은 복통, 두통, 신장병 등을 앓았다.
11월 마카오의 상태가 좀 진정되자 그들은 마카오로 돌아왔다. 데플레슈 신부가 곧 임지로 떠났으나 1840년부터 메스트르(Maistre)와 베르뇌(Berneux) 신부가 김대건과 최양업의 교육을 도왔다. 이들은 이해 9월에 마카오에 도착했는데, 메스트르 신부는 임지의 결정을 기다리면서 경리부의 일과 조선 신학생의 교육을 도왔고, 베르뇌 신부는 임지인 통킹으로 떠날 기회를 기다리면서 약 100일 동안 김대건과 최양업에게 철학을 가르쳤다.
그러는 동안 1842년을 맞았다. 이 해에 김대건과 최양업은 뜻밖에 신학공부를 중단하고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때는 아편전쟁이 끝날 무렵이었다. 차제에 프랑스 정부는 중국에서 이권(利權)을 얻어 보려는 목적에서 중국에 외교사절을 파견하는 동시에 2척의 군함으로 하여금 중국 해안에서 시위하게 했는데, 하나는 세실(Cecille)이 지휘하는 에리곤(Erigone)호였고, 하나는 파즈(Page)가 지휘하는 파보리트(Favorite)호였다. 세실 함장은 차제에 조선과 통상 조약을 추진시킬 계획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마카오 경리부 책임자 리브와 신부를(그 동안 르그레즈와 신부는 파리로 전임되었다) 방문하고 그의 조선원정을 위해 조선 신학생 한 명을 통역으로 동행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리브와 신부는 세실의 계획이 평화적일 뿐더러 이것이 몇 년째 두절된 조선 교회와의 연락을 재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판단하고 세실의 청을 기꺼이 받아들일 뿐더러 조선인 신학생과 세실 함장 사이의 통역을 돕기 위해 메스트르 신부까지 동행하게 하였다.
메스트르 신부는 김대건을 택하였다. 그는 군함에서의 생활조건이 병약한 김대건의 건강 회복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김대건은 자주 앓았고 군함에 탑승할 당시도 독감을 앓고 있었다.
김대건은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2월 15일 마카오를 출항하였다. 에리곤호는 마닐라, 대만을 거쳐 주산(舟山)에서 2개월쯤 체류한 후 다시 북상, 6월 27일 오송구(吳淞口)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조선으로 떠나기를 기대했으나 상황의 변화로 그 희망은 사라졌다. 남경의 함락과 더불어 청국이 영국 측에 강화를 제의함에 따라 남경에서 강화조약이 체결되기에 이르렀다.
세실은 남경으로 가려했으므로 김대건은 통역관의 자격으로 그를 동행하였다. 8월 29일 남경조약에 참석하고 오송구로 돌아오니 최양업과 만주교구 선교사 브뤼니에르(de Bruniere) 신부가 탑승한 파브리트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김대건은 최양업을 만나게 되니 무척 기뻤다. 그러나 그의 기쁨은 곧 슬픔으로 변하였다. 왜냐하면 조선으로 가는 일이 더욱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최양업 일행은 하선했으나 김대건 일행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에리곤호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세실은 환자가 많고 또 조선으로 갈 시간의 여유가 없다고 하며 마닐라로 돌아갈 것을 선언하였다. 그래서 김대건 일행도 9월 11일 에리곤호를 하직하고 강남교구장 베지(Besi) 주교관으로 가서 최양업 일행과 합류하였다. 베지 주교의 알선으로 이제 그들은 중국배를 타고 다시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김대건 일행은 10월 2일 상해를 떠났다. 도중 역풍을 만나 곤욕을 겪기는 했으나 10월 22일 태장하(太莊河) 부근 요동땅에 이르렀다. 최양업이 먼저 내렸고 김대건은 선교사들과 같이 밤에 상륙할 계획이었으나 대낮에 상륙하게 되었다.
이 때 세관에서 30명 가량의 사람들이 몰려와 신부들을 포위하고 여러 가지로 질문하였다. 김대건은 재치와 열변으로써 그들을 쫓아버렸다. 일행은 우선 두(杜) 회장 집에 유숙하였다.
그러나 그 지방 교우들이 신부들을 유숙시키기를 거절하므로 최양업 일행은 양관(陽關)으로 가고,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는 백가점(白家店)에 머무르면서 입국을 시도하게 되었다. 김대건은 입국의 기회를 기다리면서 메일 메스트르 신부로부터 신학 강의를 들었다.
11월 7일 변문을 다녀온 중국인 보행꾼이 조선에 박해가 있었을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는 입국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만주교구장 베롤(Verrolles) 주교는 그들의 결심이 무모하고 위험하다고 하여 반대하였다. 이에 메스트르 신부는 김대건의 위험을 덜어 주고자 입국을 단념하였다. 그러나 김대건은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성모의 도우심에 절대적 신뢰심을 갖고 입국의 모험을 감행하기로 하였다.
김대건은 가난한 나무꾼으로 변장하고 12월 23일 변문으로 떠났다. 변문에 이르러 다행히 북경으로 들어가는 사신 일행 중에서 김 방지거를 만날 수 있었고 그로부터 비로소 조선 교회에 대한 확실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기해년(1839년)의 박해로 선교사들이 모두 순교했을 뿐더러 김대건의 부친과 최양업의 부모를 위시하여 200여명의 교우들이 순교했다는 것이다. 김대건은 김 방지거와 작별하고 단독으로 입국을 시도하였다. 그는 국경선을 넘어 의주를 통과할 수 있었으나 위험을 느끼고 발길을 돌렸다. 도중에 눈 위에 쓰러져 동사할 뻔했으나 기적처럼 살아남아 백가점으로 돌아왔다(1843. 1. 6).
김대건은 1843년 음력 3월에 다시 변문으로 가서 북경에서 돌아오는 김 방지거를 만나고 팔가자(八家子)로 갔다. 음력 9월에 김대건은 세 번째로 변문으로 가서 김 방지거를 만나고 동북국경쪽 입국방법을 의논하고 팔가자로 돌아왔다.
이어 12월 31일 양관으로 가서 페레올(Ferreol, 高) 주교의 성성식에 참석하고 주교와 같이 봉천(奉天)으로 가서 이듬해 1월 24일 김 방지거를 만났다.
김 방지거는 당장은 선교사의 입국이 어렵고 1845년 초에나 가능할지 모른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으로 하여금 동북국경을 통한 입국방법을 시도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김대건은 2월 4일 팔가자를 출발, 3월 8일 훈춘(琿春)에 도착, 두만강을 건너 개시(開市) 기간을 이용하여 경원(慶源)에서 조선 교회의 밀사들과 만났다. 그러나 동북국경을 통한 입국이 의주길보다 더 어렵다고 판단하고 팔가자로 돌아왔다(4월).
약 2개월 동안 그는 2,000리 길을 걸었다. 육지와 바다에서 겪은 그의 여행은 병약하던 그의 체질을 발달시키는 동시에 그의 기력과 타고난 대담성을 더욱 원숙하게 해주었다. 팔가자로 돌아온 김대건은 최양업과 같이 이 해에 소정의 신학과정을 끝내고 연말에 삭발례로부터 부제품까지 받았다(12. 15 이전) 연령 미달(법정 연령 만 24세)로 사제품까지는 받지 못하였다.
12월 말 김대건은 주교와 같이 김 방지거를 만나기 위해 팔가자를 출발, 이듬해 1월 1일 변문에서 김 방지거를 위시한 조선 교회의 밀사들과 접촉하였다. 그러나 선교사의 입국은 불가능하다고 하므로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부제만을 입국시키기로 하고 김 부제에게 해로로 상해에 오도록 지시한 후 자신은 마카오로 가서 김 부제의 소식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한편 김 부제는 타고난 기지와 대담성으로 온갖 위험을 극복하고 국경선을 넘는 데 성공,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데다 중병까지 앓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학생을 뽑아 교육하고, 조선지도를 작성하고, 순교자에 관한 자료를 수집했고, 무엇보다도 상해길을 준비하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하였다.
마침내 준비를 완료한 김대건 부제는 4월 30일 11명의 사공과 같이 작은 배, 즉 라파엘호에 탑승, 상해를 향해 제물포를 떠났다. 두 번의 풍파와 해적을 만나는 등 1개월여의 모험 끝에 오송구를 거쳐 6월 4일 상해에 도착하는 데 성공하였다. 김 부제는 곧 그의 도착을 페레올 주교에게 알렸고 이어 페레올 주교는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와 함께 상해로 왔다.
페레올 주교는 출발에 앞서 8월 17일 상해 부근 김가항(金家巷)에서 김대건 부제에게 사제서품을 주었다.
이로써 김대건은 한국인 최초의 사제가 되었다. 일주일 후 김 신부는 만당(萬堂) 신학교 성당에서 다블뤼 신부의 보좌를 받으며 첫 미사를 올렸다.
신품성사의 은총과 미사성제의 봉헌으로 더욱 큰 힘과 용기를 얻게 된 김 신부는 그의 라파엘호에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를 태우고 8월 31일 상해를 출항함으로써 귀국길에 올랐다.
이번에도 제주도에 표착하는 등 큰 위험이 없지 않았으나 40여일 동안의 모험 끝에 10월 12일 강경(江景) 부근 황산포(黃山浦)에 상륙할 수 있었다.
김 신부는 곧 서울로 올라와 서울과 그 인근, 특히 용인지방을 중심으로 교우들을 방문하고 성사를 집전하였다. 그의 깊은 신앙과 신심, 놀라울 만치 유창한 말씨는 단번에 신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얻었다.
이 때 김 신부는 10년 만에 처음으로 어머니를 만났고 또 어머니 곁에서 부활절(4. 12)을 지내고 다음날 서울로 올라왔다.
이어 김 신부는 주교의 지시로 선교사 영입을 위한 새 통로의 개척에 나서게 되었다. 그는 중국어선과 연락을 취하고자 5월 14일 7명의 사공을 거느리고 마포를 출범하였다. 연평도를 거쳐 백령도에 이르러 청국어선과 접촉, 편지와 지도를 탁송(託送)하고 순위도(巡威島)로 돌아왔을 때 뜻밖에 6월 5일 그 곳 관헌에게 체포되었다.
등산진영(登山鎭營)에서의 취조에 이어 5일 후 해주 감영으로 이송되어 4차의 문초를 받았다. 중국어선에 탁송했던 편지와 지도의 압수와 더불어 사건이 심각해짐에 따라 김 신부는 서울로 압송되어 포청에 갇히게 되었다(6. 21).
그 다음날부터 그는 좌우포청에서 7월 19일까지 무려 40차의 신문을 받았다. 7월 20일 김 신부는 르그레즈와와 리브와 등 선생신부들에게 하직 편지를 썼다.
김 신부는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정부의 요청으로 세계지도 2매를 영어에서 번역 작성했고 또 지리개설서를 편술하였다. 그러는 동안 세실이 기해년에 3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살해한 책임을 조선정부에 묻기 위해 서해안에 나타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8. 20).
정부는 김 신부를 전권대사로 파견하기로 결정했었고 그래서인지 김 신부 자신도 미구에 석방되리라는 일루의 희망을 가졌었다.
뿐더러 일부 정부의 고관들도 김 신부의 박학한 지식과 고결한 인격에 감동되어 그의 구명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세실이 프랑스 선교사를 학살한 책임을 묻는 서한을 조정에 보내고 또 서해안에서 물러감에 따라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김 신부의 사형이 앞당겨지게 되었다.
김 신부도 순교를 각오하고 페레올 주교와(8. 29) 교우들에게 하직편지를 썼다. 9월 15일 연석(筵席)에서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은 김대건이 외국인과 교섭했다는 죄목으로 그에게 역률(逆律)을 적용할 것을 주장하였고 다른 대신들도 이에 동조함에 따라 김대건에게 군문효수의 형이 내렸다.
이에 따라 김 신부는 그날로 또는 그 다음날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김 신부의 시체는 40일 후 새남터에서 미리내로 안장되었고, 1901년 용산신학교로 이장되었으며, 1951년 혜화동 대신학교 성당으로 이장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1857년에 가경자, 1925년에 복자가 되었고, 1984년 한국 교회 창설 200주년을 계기로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다른 한국 순교자 102명과 함께 시성됨으로써 성인위에 올랐다.
또한 김 신부는 한국 교회의 모든 성직자의 주보이다(1949년 이래).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애국선열동상건립위원회’에 의해 1972년 5월 14일 절두산 성당광장에 건립되었다.
자료 참조: [가톨릭대사전]
2. 충청도 출신의 세 신학생
신망 있는 평신도 지도자들 자제 세 명을 조선 교회 사제로 키웁시다!
[신 김대건 · 최양업 전]
- 신유박해 이후 재건된 신앙공동체 가운데 중심 역할을 했던 교우촌에서 평신도 지도자로 활동하던 김제준·최경환·최한지의 맏아들이 신학생 후보로 선발됐다. 사진은 1820년대에 형성된 은이 교우촌.
조선 신학생 3명
최양업 신부 가족은 서울 도성 밖 공덕리 일대에서 3년여 살다가 박해를 피해 1827년에서 1830년 사이 신자 300여 명이 교우촌을 일구어 살던 강원도 김성(현 김화읍)으로 이주해 얼마간 산다. 이후 최양업 신부는 홍주 다락골에서 서울로 이사했을 때처럼 더 나은 교리 공부와 신앙생활을 위해 경기도 부평에 정착한다. 이때가 1832년에서 1836년께이다.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교회 사학계에선 “최양업이 만 11세 되던 1832년경 과천 수리산 뒤뜸이에 거주하게 돼 이곳에서 1836년 초에 신학생으로 추천됐다”는 것이 정설이었다.(한국교회사연구소, 「교회사 연구」 제14집, 24쪽, 1999년 참조) 하지만 학자들의 최근 연구 견해는 1838년에 최양업 신부 가족이 수리산으로 이주했다는 게 일반적이다. 그 근거는 최경환 성인의 둘째 아들 곧 최양업 신부의 첫째 동생으로 추정되는 최 베드로(최의정 야고보)가 “자신은 정해년(1827년)생으로 1886년 증언 당시 60세이며, 자기 나이 12세에 수리산으로 들어갔다”고 밝힌 증언록이다.(「기해ㆍ병오 순교자 시복 재판록」 101회차, 최베드로 증언 참조) 이에 최양업 신부는 ‘부평 접푸리(전퍼리)’에서 살 때 신학생 후보로 선발됐다는 게 최근 학계 동향이다.
김대건 신부는 앞서(1회) 밝힌 것처럼 용인 굴암 또는 양지 은이에서 신학생 후보로 선발됐다. 아울러 최방제는 경기도 남양에서 신학생 후보로 뽑혔다. 최방제에 관해 좀더 살펴보자. 모방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장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36년 12월 3일 자 편지에서 자신이 선발한 3명의 신학생 후보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최(방제) 프란치스코 경기도 남양 출신이며 최 야고보와 황 안나의 아들, 최(양업) 토마스 충청도 홍주 다락골 출신, 김(대건) 안드레아 충청도 면천 솔뫼 출신.”
하지만 마카오의 조선신학교 교장 칼르리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 장 앙투완 뒤브와(Jean Antoine Dubois, 1766~1848)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최방제의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 “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중국의 강천(도광제) 연초(1821년)에 조선 왕국 충청도의 작은 도시 홍주에서 태어났다”고 밝힌다. 조선에 한 번도 온 적이 없는 칼르리 신부가 “충청도의 작은 도시 홍주”라고 한 것을 보면, 최방제의 출생지가 경기도 남양이 아니라 ‘홍주’임을 확인할 수 있다. 김대건 신부 역시 문초 과정에서 “홍주 최한지의 아들 방제”라고 밝히고 있다.(「일성록」 김대건 신부의 6번째 문초 기록 참조)
칼르리 신부는 최방제에 관해 “그의 가족은 양반이고 또 지낸 벼슬로 인해 유명했었으나 천주교에 입교함으로써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맹수들이 서식하는 높은 산들을 넘어 영원한 구원을 찾아야 했습니다. 거기서 어린 하비에르는 나쁜 표양의 소문은커녕 나이가 들며 지혜가 자랐습니다. 이 순진한 영혼은 완전히 성령의 감도하심을 따라 미구에 기도와 덕행에 대해 완전한 맛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우들은 하비에르를 조선의 성직자 양성을 위해 주님께서 마련하신 귀중한 존재로 모방 신부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모방 신부는 그를 그의 곁에 불렀습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파리외방전교회 「전교회지」 11호, 1838~1839. 359~362쪽 참조)
이러한 기록과 증언을 종합하면 최방제, 최양업, 김대건은 모두 충청도 출신으로 경기도에서 살다 신학생 후보로 선발됐음을 알 수 있다.
왜 경기도인가
3명의 신학생 후보는 왜 경기도에 거주했을까? 1801년 신유박해로 초기 신앙공동체는 거의 무너졌다. 박해를 피해 목숨을 보전한 신자들은 고향을 떠나 이곳저곳으로 흩어졌고, 1830년대까지 서울을 중심으로 새롭게 신자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 시기 새로운 신앙공동체의 중심지가 된 대표적인 교우촌이 바로 과천 수리산, 고양 용머리(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경기 남부 내륙의 광주 구산, 용인 굴암(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묵리), 양지, 이천, 죽산, 인천 함박이 등이다.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 지역 산골에 신자들이 이주했던 이유는 무엇보다 교회의 중심지인 서울과 교류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서울은 연고가 없어도 신자들이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살아갈 수 있는 거처와 일자리를 마련하기 쉬웠기에 지방의 신자들이 서울로 많이 이주했다. 특히 부양자가 없어 생계가 막막한 여교우들이 서울로 올라와 날품팔이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반대로 비신자들 속에서 숨어 지내야 하는 서울보다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이 가능한 지방 산골로 이주하는 사례도 있었다.
“서울에서는 신자들이 서로 알지 못한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그들은 박해 중에 밀고되는 것을 피하려고 할 수 있는 대로 숨어 삽니다. 그래서 헌신적인 2~3명의 중개로만 서로 연락할 뿐입니다.”(다블뤼 신부의 1840년대 말 편지 중에서)
“교우들이 사는 산골에서 판공을 할 때는 교우들에게는 어려움이 덜하고 선교사에게는 피로가 적습니다. 왜냐하면, 교우들이 비신자들과 완전히 떨어져 있어서 도시에서처럼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몹시 거추장스러운 일들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에서는 거의 자유롭게 있을 수 있습니다.”(베르뇌 주교가 앙리 드 라 부이으리 남작에게 보낸 1815년 9월 15일 자 편지 중에서)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 최경환 성인이 회장으로 활동하던 수리산 교우촌은 선교사들이 서울을 떠나 지방 사목 방문을 할 때 우선적으로 방문하는 교우촌이었다. 모방 신부는 여러 번 수리산 교우촌를 방문해 성사를 집전했다.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도 1838년 말,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지방 사목 방문에서 첫 번째로 수리산 교우촌을 방문했다.
서울을 중심으로 중남부 산골에 위치한 용인ㆍ안성ㆍ양지ㆍ이천 지역 교우촌은 1820년대 이전에는 거의 확인되지 않던 신앙공동체이다. 이들 중 가장 이른 시기에 교우촌을 형성했던 곳이 양지 ‘은이’(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와 용인 ‘굴암’이다. 특히 은이에 교우촌을 이룬 시기는 1820년대 이전으로 올라간다. 다블뤼 주교의 「순교자 약전」에 따르면 “충청 덕산 출신으로 은이 회장이었던 한이형 라우렌시오(1799년께 출생)가 21세 때(1819년께) 신자와 결혼해 산으로 이주해 살았는데 외진 곳이었는데도 찾아오는 사람들로 늘 붐볐다”고 한다. 한이형은 1838년 12월에서 1839년 1월 사이 은이를 방문한 앵베르 주교로부터 회장으로 임명됐다.
용인 굴암 역시 은이 못지 않은 유서 깊은 교우촌이다. 「치명일기」와 「박순집 증언록」에 따르면 1866년 리델 신부와 함께 중국으로 탈출했다가 1867년 귀국한 최인서(요한) 서울 애오개 회장이 1868년 4월 체포돼 7월에 강화도 진무영에서 순교했다. 최인서는 굴암 태생으로 7~8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교리를 배웠다고 한다. 이로 볼 때 최인서 가족은 1810~1820년대에 걸쳐 굴암에 교우촌이 형성돼 있었음을 알려준다. 모방 신부는 1836년 4월 4일 자 편지에서 “굴암에는 130~140명의 신자가 있으며 구교우와 신자, 예비신자가 비신자와 섞여 살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를 종합하면 신유박해 이후 재건된 신앙공동체 가운데 중심 역할을 했던 교우촌에서 평신도 지도자로 활동하던 김제준, 최경환, 최한지의 맏아들이 신학생 후보로 선발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4월 25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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