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앙의 수호자 사도 산티아고의 무덤과 까미노의 탄생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까미노는 사도 성 야고보(산티아고)를 찾아가는 순례길입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까미노의 목적지인 것은 단 하나의 이유, 곧 성 야고보 사도의 유해가 거기에 모셔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도의 무덤이 기적적으로 발견되기까지 800년 동안 이베리아 반도에는 질풍노도의소용돌이가 휘몰아쳤습니다. 사도 산티아고(야고보)는 스페인의 역사적 혼란기를 그리스도인들과 영적으로 함께 겪으면서 자신의 유해가 발견되기를 고대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의 사도는 ‘인내와 기다림의 사람’이었습니다.
기원 후 44년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사도 야고보의 유해는 두 제자 아타나시오와 테오도로의 손으로 ‘땅 끝’(Finis Terrae) 스페인의 ‘갈리시아’에 모셔와 지금의 산티아고 대성당이 세워진 곳에 안장됩니다.
두 제자도 스승 성 야고보처럼 주님을 위해 순교의 잔을 마셨습니다. 갈리시아 신자들은 두 제자의 유해를 야고보 사도 양옆에 묻습니다. 그 후 300년에 걸친 로마 제국의 박해와 게르만족의 침탈 등 혼란한 시기를 거치면서 사도의 무덤 위치는 사람들 기억 속에서 잊혀졌습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5세기 초 이베리아 반도에는 게르만족 가운데 하나인 고트족이 들어와 ‘서 고트 왕국’(Reino visigodo)을 세웁니다. 이들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가톨릭 왕국이 됩니다.
몇 세기 동안 평화의 시기를 보내다가 이베리아 반도에는 711년 무서운 폭풍이 몰아치게 됩니다. 이슬람교도인 무어인들이 북아프리카에서 바다를 건너 이베리아 반도를 침공한 것입니다.
내분 중이었던 서 고트 왕국은 곧 멸망하고 맙니다. 서 고트 왕국의 귀족들과 시민들은 스페인 북쪽 끝 험준한 산악지대인 ‘아스투리아스’(Asturias)로 피신합니다. 절대 절명의 위기 순간이었습니다.
718년 혹은 722년 아스투리아스 지방의 귀족 ‘펠라요’(Pelayo)를 중심으로 뭉친 그리스도인들이 아스투리아스 산악 지역인 ‘코바돈가’(Covadonga)에서 이슬람 군대에 처음으로 승리했습니다. 이슬람 세력은 스페인 북부 아스투리아스를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지배하는 거대한 왕국을 세웁니다. 이처럼 스페인 교회는 이슬람교의 칼 앞에 풍전등화의 신세였습니다.
이러한 위기의 순간에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를 통해 새로운 역사의 전환이 시작됩니다.
815년에서 825년 사이 갈리시아 지방 북쪽 끝에 살던 ‘펠라히오’(Pelagio) 또는 ‘파이오’(Paio)라는 이름의 은수자가 꿈에서 천사의 계시를 받고 밤하늘에서 빛나는 별들의 무리를 봅니다.
은수자는 별의 인도를 받아 ‘몬테 리브레돈’(Monte Libredon)이라는 작은 언덕에 다다릅니다. 그 별빛이 가시넝쿨이 우거진 땅을 비춥니다. 그곳을 조금 파내려가니석실이 있고 석관 3개가 발견됩니다.
바로 사도 산티아고(야고보)와 두 제자의 무덤인 것이었습니다. 그 지역 ‘이리아 플라비아’(Iria Flavia)의 주교 ‘테오도미로’(Teodomiro)에게 이 소식을 알렸습니다.
나중에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임금 ‘알폰소 2세’(Alfonso II)가 사도의 무덤 위에 소박한 경당을 봉헌했습니다. 산티아고의 무덤이 발견된 곳을 그때부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지명의 기원에 관한 다양한 가설이 있지만, ‘콤포스텔라’라는 단어가 라틴어 ‘Campus Satellae’(별들의 들판)에서 유래했다고 본다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라는 지명은 우리말로 번역하면 ‘별들이 쏟아지는 들판의 성 야고보’라는 뜻입니다. 별의 인도를 통해 사도의 유해가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 무덤이 사도 야고보의 것임을 확증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경계였던 지금의 ‘팜플로나’ 근처 ‘클라비호’에서 일어난 전투에서였습니다(La Batalla de Clavijo).
사실, 군대 규모나 장비 등 모든 면에서 볼 때 가톨릭 군대는 이슬람을 절대 이길 수 없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지면 스페인 전체가 이슬람의 지배에 들어가게 됩니다.
844년 5월 22일, 승산 없는 싸움을 앞두고 두려움에 떨고 있던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라미로 1세’(Ramiro I) 왕과 군대 앞에 사도 산티아고(야고보)가 백마를 타고 빛나는 칼을 든 기사의 모습으로 발현합니다. 이 발현을 체험하고 영적인 힘과 용기를 얻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다음 날 전투에서 기적적으로 승리합니다. 이슬람교는 더 이상 북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게 됩니다.
움츠리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은 이 승리 이후 ‘이슬람으로부터 잃어버린 땅을 다시 찾겠다’는 영적인 자각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국토회복운동’(Reconquista)이 시작되었습니다. 7세기 동안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했던 이슬람 세력은 결국 1492년에 마지막 남은 영토인 스페인 남쪽 그라나다를 내어주고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납니다.
국토회복운동 중 중요한 전투에서 여러 번 야고보 사도는 백마를 탄 기사의 모습으로 그리스도인 군대 앞에 발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스페인 사람들은 사도를 ‘무어인들을 죽이는 성 야고보’라는 의미로 ‘마타모로스 산티아고’(Matamoros Santiago)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마타모로스 산티아고’라는 새로운 호칭을 영적으로 해석하면 ‘신앙의 수호자 성 야고보’입니다.
‘신앙의 수호자 산티아고’의 발현 이후 승리가 얼마 전 발견된 무덤이 바로 사도의 무덤이며 사도가 지켜주고 있다는 확신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집니다. 또한 산티아고의 유해에서 치유, 구마, 회개 등 수많은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 소식이 점차 전 유럽으로 퍼집니다. 9세기 중엽부터 전 유럽에서 신자들이 사도의 무덤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산티아고 순례의 탄생’인 것입니다.
까미노는 사람들이 어떤 목적을 갖고 인위적으로 만든 길이 아닙니다. 신앙의 힘과 열정과순수함으로, 다시 말해서 성령의 힘을 통해 만들어진 길입니다. 모든 것이 사도 산티아고의 유해에서 기원합니다. 사도의 유해가 산티아고 대성당에 없으면 이 길이 생길 이유도, 그 옛날부터 지금까지 천년이 넘도록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올 이유도, 또 까미노 위에서의 놀라운 체험도 없을 것입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9년 가을(Vol. 47),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