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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4장 3~26절 [사마리아의 여자에게 가신 이유]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정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 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 함이러라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16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17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 되도다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영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가르칠 때, 영으로 보고 영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육으로 받아들이고 육으로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육신의 정욕으로 세상의 것에 목적이 되도록 가르쳐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켜 육으로 전하여 사람을 미혹했던 존재가 누구입니까? 사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육으로 변질시킨 것을 받아들인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하와였습니다.
여러분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영으로 듣고, 영으로 받아들입니까, 아니면~
육으로 듣고, 육으로 받아들입니까?
⤷ 이 땅의 것에 목적을 두고, 이 땅의 것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가 하는 말입니다.
이런 모습은,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육으로 받아들인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 수도, 믿음이 자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영의 눈으로 바라보는 바른 습관부터 가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고
인간의 육신적인 생각으로 말씀의 의도와 전혀 다르게 전해지는 것을 들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참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본문의 말씀으로 우리가 접했던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천박한 창녀다, 남편이 다섯이나 바뀐 간음한 천박한 여자로 모욕을 합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 보기에 부끄러워 다른 사람들이 쉬는 가장 더운 시간에 물을 길으러 나왔는데
그때 예수님을 만나, 다섯 남편에게서는 얻지 못한 만족을
예수님을 만남으로, 참 만족과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성적으로 타락한 여자가 예수님을 만나 새 삶을 살게 되었다는 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수가라는 동네에 사는 이 사마리아 여인은~
⤷ 창녀도 아닐뿐더러, 남자를 통해서 만족을 얻어 보려고
남편을 다섯이나 둔 음란하고 천박한 여자라는, 모욕적인 말을 들을 그런 여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손가락질 받는 여자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해서 더운 한 낮에 물을 길으러 나온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기 보다는,
상식에도 맞지 않는 인간의 육신적인 생각과 육신에 맞춘, 흥미위주로 전해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병들게 하고 신앙의 길을 잘못 가게 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나, 그것을 듣고, 읽는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영적인 역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가 전하는 말들을 여과없이 받아들이는 무지한 성도가 되면 안되고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나 성도나 다 같은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성령님은 목회자나 성도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무조건 우리 목사님이 전하는 말씀은 다 옳아, 이런 자세는 바르지 않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이것이 천국을 침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찾으시는 자, 예수님이 찾아가시는 자가 누구인가,
예수님을 만나는 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예수님이 찾아가신 사마리아 여인의 신앙의 중심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신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 그것은 메시야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다리며, 참 된 예배에 목말라하던~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그 영혼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6절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태복음 15장 2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은 누구를 말합니까?
이스라엘 집에는 12형제, 12지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왕 다음에 왕이 된 르호보암 왕 때,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 외에 10지파가 따로 떨어져 나가
여로보암을 왕으로 세우는데 이들이 북이스라엘, 사마리아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마리아인들이 이때부터~
성전제사를 버리고 자기들 마음대로 제사장을 세우고 자기 마음대로 제사를 드리며, 우상숭배와 음란에 빠지게 되고,
결국 주변 국가인 앗수르에 위해 망하게 되어 신앙의 순수성과 혈통의 순수성이 더럽혀져 버렸습니다.(왕상12장 1~17절)
후에 이들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남 유다가 다시 성전을 짓는 것을 보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온전한 제사를 드리기를 원했지만 남 유다 사람들은 이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렇게 예수님이 초림하실 때까지 유대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로 여기며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것은, 이방 여인과의 결혼으로 신앙과 혈통의 순수성을 더럽히고
이방인에게 빌붙어 사는 개와 같은 자들, 성전으로 돌아올 수 없는 자들이 되어 버린 자들,
이 모든 것을 총칭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유대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면서도 메시야를 기다리며 진정한 예배를 사모했는데~
누가복음 15장 나오는 ‘돌아온 탕자로 비유된 둘째 아들’이 바로 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말합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의 품꾼의 하나가 되기를 생각하고 아버지 집을 그리워하며 돌아갔던 것은
다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메시야를 기다리며 온전한 제사를 드리고 싶은 중심,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가지 못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음을 말해주고 있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인들은 북이스라엘 초대 왕, 여로보암 왕때부터
예수님이 사역하실 때까지, 약 950년 동안 이스라엘 집에서 떨어져 나가~
예루살렘, 아버지 집에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힘을 잃어버린 사마리아 여자,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탕자로 말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뿐만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들이~
얼마나 메시야를 기다리며 참된 예배를 드리고자 한 그 마음이 요한복음 4장 42절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아는 것은 우리가 친히 들었기 때문이다.”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그렇게 유대 사람들과 오래 있었지만~ 이 참된 고백을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에 돌아오고 싶지만 돌아오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잃어 버린 양(자)‘를 찾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이방인은 잃어버린 양도, 돌아온 탕자가 아닙니다.
이방인은 처음부터 가인의 길로 나가버린 죄악의 종자요, 영적으로 죽은 자요, 사단에게 속아 사단에게 종노릇한 자요,
사단을 주인처럼 섬기면서 살았던 이스라엘 밖에 있었던 자들입니다.
신약의 성도는 하나님의 집에서 나갔다 돌아온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양이나, 탕자의 비유를 지금 우리에게 비유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고, 사람에게 맞춘 인본주의 누룩입니다.
우리 이방인은, 예수님이라는 나무에 접붙임 된 자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피 흘림의 은혜가 더 큰 것입니다.
오늘 분문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찿아가신 의도를 알기 위해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6절에 예수님이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신 시간이 여섯 시쯤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여섯 시‘는, 우리나라 시간으로 ’정오‘를 말합니다.
그런데 ’정오‘가 의미하는 것은 ‘가장 더운 시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 중에 가장 밝은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 바로, 이 어두운 세상에
‘밝은 빛, 광명한 빛으로 오신 예수님, 생명의 빛 되신 예수님이 인류 가운데 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정오’는~
사마리아 여자의 메시야에 대한, 그리고 예배에 대한 영적 목마름이 극에 달한 그 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주실 ‘예수님을 만나는 때’를 말합니다.
이런 영적인 의도를 생각하지 않으니 사마리아 여인이 창피해서 가장 더울 때 물 길으러 나왔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들이 믿음이 자라지 못하는 바리새인의 누룩과 같은 가르침입니다.
‘정오’라는 것은~ 결코 사마리아 여인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나온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이스라엘의 ‘계대 결혼법’입니다.
장자는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는데, 장차 하나님의 장자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입니다.
‘계대 결혼법’이란~ 형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의 아내를 취하여 아들을 낳게 해서후손을 잇게 하는 제도로,
그래서 사마리아 여자가 남편이 다섯인 것은 바로 이 ‘계대 결혼법’에 의한 것입니다.
창세기 38장 1~11절에도 ‘계대 결혼법’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1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2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3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의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4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오난이라 하고
5 그가 또 다시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십에 있었더라
6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데려오니 그의 이름은 다말이더라
7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8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9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10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11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
‘계대 결혼법’이 있었다는 것은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의 질문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28절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눅20:33, 막12:23)
그래서 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있었던 다섯 남편은~
율법으로 장자의 후손을 잇게 하는 ‘계대 결혼법’에 의한 남편인 것입니다.
만족을 얻기 위한 남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여인에게
16절에 “네 남편을 불러 오라.”하실 때
17절에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
18절에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 되도다.” 하신 것은~
⤷ 삶의 만족을 위해 남편을 다섯이나 바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을 통해 후사를 얻고자 하는 기쁨을 바랬지만 얻지 못했고, 지금 있는 자에게서도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 이것이 ‘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을~ 인간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흥미위주, 인간의 생각에 맞춘 음탕한 여자로,
잘못된 누룩으로 가르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메시야를 간절히 소망했던 사마리아 연인은~ 26절에, 예수님이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하실 때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메시야, 그리스도 라는 것’을 영으로 알았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의 신앙의 중심을 알 수 있는 말씀이 잠언 8장 17절 말씀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결론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음탕한 여인이 남편 다섯을 두었다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이 여인의 부끄러운 부분을 예수님이 알아서 이 여인이 놀랐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예수님이 찾아가셨다는 것을
그 중심에 영과 진리로 예배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 하나님이 언약하신 구원과 생명을 주셨다는 것을
그리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바 되었던 양들의 중심이 어떠했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 사마리아 사람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입니다.
예수님이 찾으시는 잃어버린 바 된 양, 집 나간 탕자는~
메시야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있는 자,
아버지 집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며 온전한 제사, 영과 진리로 예배 드리기를 갈망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찾아가셔서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신 것입니다.
찬양 중에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우물가에 여인처럼 난 구했네 헛되고 헛 된 것들을’
이미 말씀을 드렸듯이~
사마리아 여인은 다섯 남편을 통해 헛된 것을 구한 적이 없습니다.
사마리아 연인은 오로지 진정한 예배를 구했던 여인입니다.
이렇게 복음이 변질되어 왔습니다. 믿음이 자라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전하신 비유의 말씀들도 많은 부분 인간의 생각과 감정에 맞춘 것으로 변질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누가복음, 되짚어 보아야 할 말씀들 폴드에서 꼭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잃어버린 양, 탕자가 아닙니다. 잃어버린 양. 탕자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유대 사회에서 소외 된 자를 말합니다.)
여러분 복음의 내용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이방인 교회는, 잃어버렸던 적이 없습니다. 탕자였던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꼭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절대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예수님을 떠난 삶을 살지 않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을 떠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신약의 성도가 잃어버린 양이 되고 탕자가 됩니까?
그리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잃어버린 양이나 탕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어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잃어버린 양이고 탕자입니까?
그래서 교회에서
‘잃어버린 양 찾기 운동’이나, 교회를 떠난 성도를 ‘탕자’로 말하는 것은~ 전혀 복음적인 내용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교회 다니다가 교회를 떠난 사람들은 무엇입니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가 아니라, 지식적으로 감정적으로 세상 것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종교인입니다.
이런 종교인을 누가 만듭니까? 번영신학에 빠진 지도자들입니다. 정말 이러면 안됩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그 삶이 틀립니다. 육신이 것으로 결코 예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사도시대 때의 성도들을 보십시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절대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예수님을 떠난 삶을 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성도는 잃어버린 양도, 탕자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도 이 본문에서 얻어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사라미아 사람들은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갈망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인류가 심판받게 된 그 육, 그 세상의 것을 가지고, 다시 예수님 앞에 가지고 나갑니다. 그 세상 것을 더 얻으려고.
내 안에 다른 것, 세상의 것을 가지고 나가는 예배는 올바른 예배가 아닙니다.
이것은 스스로 자신이 예수님과 상관없는 자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머리로만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 세상의 것에 두고 있다면,
예수님이 오셨지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유대 사람들처럼,
예수님이 아무리 말씀하셔도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것을 더 가지려는 존재가 아니라
도리어 내 안에 있는 세상으로부터 온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십자가에 못 박는 모습이 날마다 드리는 올바른 예배의 모습입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사마리아 여인은 아버지 집을 그리워했지만,
교회가 된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 안에 신랑으로 오셨고,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세상과 구분된 정결한 삶을 살며 신부로 단장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인, 교회는 결코 세상 것을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읽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를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날마다 말씀을 깨닫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며, 그리고 아름다운 신부로 단장되어지는
한울타리 교회 성도님들이 다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