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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사도행전 28:23-31]
23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24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29 (없음)
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말씀나눔]
저는 영화나 연극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요즘은 코로나 19 때문에 극장에 가는 것이 부담스러워 아침에 인간극장을 보는 것이 저의 취미라면 취미가 되었습니다.
이번 주 인간극장에는 트로트가수 신세령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나오고 있는데, 신세령씨는 정신지체 장애 3급인 오빠와 조카랑 함께 살고 있습니다. 오빠는 틈나는 대로 고물을 주워 용돈벌이는 하는데, 문제는 방안이 주어온 물건으로 쓰레기장을 방물케 한다는 것입니다. 신세령씨의 눈에는 다 쓰레기로 보이는데 오빠의 눈에는 보물로 보입니다.
한번은 오빠가 밖에 나간 틈에 몰래 방청소를 하면서 신문 조각이랑 여러 쓰레기들을 버렸는데 오빠가 돌아와서 난리가 났습니다. 그 방에 구리랑 신문이랑 보물들이 가득한데 모르고 버렸다는 것이죠.....
똑같은 물건들이지만 신세령씨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부서지고 고장 난 선풍기와 쓰레기로 보이지만 오빠의 눈에는 귀한 보물로 보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저마다 사물을 바라보는 가치 판단하는 기준도 다릅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에게는 생명을 구원하는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한 것이지만, 또 누구에게는 세상 가치 없는 소음에 불과할 뿐입니다.
기독교 인식에 대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지하철에서 가장 보기 싫고 듣기 싫은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1위는 술취한 사람의 주정이었고, 2위는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고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전철 안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 구걸을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보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 듣기 싫은 소음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다 이지경이 되었는지 안타까운 부분이 있습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복음을 전하는 방법도 전략적으로 변화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사람이 외치는 복음이라 할지라도듣는 사람에 따라서 평가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살피고 보완하는 기회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신약 성서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가장 많이 헌신하고 공헌한 사람, 한 사람을 뽑으라면 망설임 없이 사도바울을 꼽을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열악한 상황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환경이 가장 열악하고, 복음을 전하는데 걸림돌이 많았던 때는 언제였을까요?
바로 감옥에 갇혀 있을 때가 아니었을까요?
다른 상황에서도 물론 어렵고 죽을 고비도 여러번 넘길 정도로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감옥은 마음대로 다닐 수 없는 행동제약이 있어서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을 찾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입장에서는 매우 어려운 상황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상황에서 기록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로 압송된 후에 가택연금 상태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구금된 가택에서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명에 심각한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하나님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풀어주셨습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들고 나가지 못하니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사도바울이 갇혀있는 가택으로 오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이 복음을 끊이지 않고 전할 수 있도록 수많은 사람들을 사도바울이 구금되어 있는 집으로 보내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어느 도시에서나 사도바울을 대적하고 핍박했던 유대인들이 복음을 듣는 대상으로 등장합니다.
23절에 보면, 많은 유대인들이 사도바울의 집에 와서 사도바울이 전하는복음을 들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을 인용하여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런데 같은 장소에서 같은 복음을 사도바울에게 들었는데 반응은 서로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사도바울의 증언을 믿었지만, 어떤 사람은믿지 않았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와 같은 현상은 동일합니다.
분명히 같은 복음을 전하지만 사람마다 반응이 다릅니다.
주일을 맞이하여 교회에 왔다고 다 성도가 아닙니다.
같은 공간에서 말씀을 들어도 누구는 믿지만 누구는 아무런 변화 없이 그저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가 갑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러한 경우를 두고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사1:12).
왜 같은 말씀을 들어도 반응은 다를까요?
오늘 사도바울은 이사야서 6:9-10을 인용하여 진단을 내립니다.
26-27절 말씀을 다시 한 번 함께 읽겠습니다.
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27절에 보면 사도바울의 진단은 보다, 듣다, 깨닫다, 돌아오다 이 4개의단어로 표현됩니다.
사도바울의 진단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시각과 청각에 대한 것으로 그 원인은 마음이 우둔하여졌기 때문이라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쓰인 우둔하다는 단어는 ‘무감각하다, 둔해지다’라는 의미로 영적불감증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제 책상에는 매일 눈을 뜨면 바라보는 꽃이 있었습니다.
생화가 아니고 조화이지만 졸업할 때 받은 꽃이다 보니 의미있는 꽃이었습니다. 그런데 매일 보다보니 그 꽃에 대한 감흥도 없어지고 시간이 흐르고 어느 날 그 꽃이 그 자리에 없어져도 모를 정도가 되었습니다.
영적인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으로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관심을 가지고 보지도 듣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눈은 떠있지만 영적인 눈은 소경이라 그들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9에 보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다말씀하십니다.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죄 사함을 받아야 되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롬1:28-32 / 요1서 1:8-10)
뿐만 아니라 귀를 막고 그들에게 선포되는 복음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흘려보내고 도무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으면 구약 성경에 이스라엘아 들으라는 말이 23번이나 반복됩니다.
듣고 보지 않으니 깨달을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24장 24-26에 보면,
벨릭스 총독은 날마다 청하여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을 영접하지도 못했습니다.
벨릭스 총독의 관심은 사도바울이 전하는 말씀이 아니라 혹시라도 사도바울이 자신에게 돈을 줄까 하는 마음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벨릭스 총독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참 빛으로 오셨지만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요 1:10-11 참조).
빛으로 자신들의 죄를 조명하지 않으니 죄를 자각 할 수 없고, 회개는요원한 것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주님을 영접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사하시고, 의롭다 여겨지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요1:12, 사55:7).
그러나 사람들은 이 귀한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를 고수합니다.
돌이켜 회개한다는 것은 잘못을 깨닫고 반성하는 것에 머물러서 있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삶의 자리가 바뀌어야 합니다. 회개하면 삶이 뒤집어집니다.
한동안 '신박한 정리'라는 프로를 애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버리지 못하고 이고지고 살아가는 집에 찾아가서 깔끔하게 정리해 주는 프로그램입니다.
출연자 집을 정리 전과 정리 후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져서 전혀 다른 집과 같이 바뀌고 없던 공간도 만들어지는 기적과 같은 정리의 기술을 보여주었는데요, 깔끔하게 정리하는 비결은 비우는 것이었습니다.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옛 사람을 완전히 비워내야 새 사람이 들어올 공간이 생깁니다.
내 속에 죄가 가득하면 예수님이 들어오실 틈이 없습니다.
시인과 촌장이 1988년 발표한 가시나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대중가요의 가사를 보면,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람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이런 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작사를 맞은 하덕규씨 스스로가 젊은 날의 방황을 지나 구원 받은 성도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읊조린 노래로 성경에서 예수님의 머리에 씌워진 가시나무에 힌트를 얻어 작사를 했다고 합니다.
이 가사를 쓰는데 4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이기심, 욕심, 시기 그리고 허무감이라는 아픈 가시나무들 때문에 내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이 상처를 받는 것이 아닌가하는 깨달음 때문에 쉽게 쓸 수 있었다고 합니다.
즉, 자신의 내면의 상태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은 외부의 자극이 있어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완고한 진을 깨뜨려 주는 것입니다.
하덕규씨처럼 자신을 바라볼 수 있도록 자극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복음을 전하려 한다면 주님은 길을 열어 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바울이 어떤 환경에서도 복음을 전하려 하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저기 다니는 수고를 덜어주시고, 가택 연금 상태에 있는 바울에게 수많은 사람들을 보내 주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보고 듣고 깨달아야 주님 앞으로 돌아와야 고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까?
보고, 듣고, 깨닫고, 돌이키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보게 해야 됩니까?
우리의 삶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즉, 우리들이 성도의 삶이 어떤 것인지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가장 효과적인 교육 방법은 보고 배우게 하는 것입니다.
목장에 초대하여서 영적 가족이 어떤 모습인지 보게 하십시요.
그렇게 하려면 우리 목장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요?
VIP가 목장에 방문하는 것은 VIP를 살리는 것뿐만 아니라 기존 목장에 속한 목원들의 활기도 되찾아 줍니다.
그러면, 무엇을 듣게 해야 합니까? 복음 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모세 오경과 선지자의 글에서 증거하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소개하고 증거 하였던 것처럼, 예수님을 알아가는 신앙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교회와 목장에서는 삶 공부를 지원합니다.
그리고 깨닫도록 도와야 합니다
물심양면으로 도우며 그를 위해서 중보해야 합니다.
VIP명단을 놓고 기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초원 모임에서 각 목장의 VIP를 도울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
고민하고 또 지혜를 모으며 중보하는 이유는 기도의 힘이 어머어마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온 교회의 관심을 집중하고 교회의 제한된 유․무형의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모든 성도들이 역할을 분담하고 예수 영접 모임과 생명의 삶을 담임목사가 힘을 다해 지원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결단 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우리가 주일에 연합예배에 참여할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주일 연합예배는 헌신을 결단하는 자리입니다.
주일 연합예배에 집중적으로 임재하시는 주님을 만나고 경험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주일 연합예배를 마음을 다해 힘을 다해 정성껏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환경은 어떻습니까?
너무나 많은 제한 사항들이 있지요?
해가 갈수록 무교의 비중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교가 아무런 종교가 없는 사람이라고 오해해서는 않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무교라 할 수 없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이 세상에 무교는 없습니다.
무교라고 하는 것은 신이 앉을 자리에 내가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신념이 자신에게 종교를 만들어 줍니다.
교회를 떠난다는 것은 주님을 떠나 또 다른 종교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믿는 종교를 선택한 것입니다.
요즘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 중의 하나는 샤머니즘에 대한 것입니다.
국가적인 중요한 결정을 점치는 것에 맡길 수 있는가?라는 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들도 자신이 우상을 섬기고 있음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31절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담대하게 거침이 없이 가르친다는 말은 장애물이 아무것도 없어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담대하다에 해당되는 원어는 이 담대함이 인간으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라 절대자가 주시는 것으로 사용됩니다.
뒤집어서 생각하면 절대자가 주시는 능력이 없으면 이를 수 없는 상태 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 없이 인간의 힘으로 이겨낼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장애물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장애물이 있다고 하더라도 뚫고 나아갔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걸릴돌이 있었고 분명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권력자들과 유대인들 앞에 서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이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환경을 정리해 주셨습니다.
마치 언약궤를 매고 범람 직전에 있는 요단강물을 건너갈 때 언약궤를맨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강 물에 담기고서야 요단강 물이 갈라져 마른땅을 걷듯이 건널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신 것과 같이 우리 앞을 가로 막고 있는 장애물들은 우리가 한 발자국 걸어 나가면 극복될 걸림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주변 환경을 탓하지 마시고 담대하게 거침없이 복음을전하십시오.
다만 우리에게는 보다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목장마다 VIP를 선정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긴밀하게 유지하면서 목장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을 우리는 관계 전도라고 말합니다. 많은 인원을 전도하기 어려운 방법이지만, 이보다 더 확실한 방법도 없습니다.
우리가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우리 또한 보고, 듣고, 깨닫고, 돌이키는 일에 민감해야 합니다.
우리를 보고 배울 영혼들을 생각하면 우리의 하루를 허투루 보낼 수 없습니다.
우리부터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아야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우리부터 보고, 듣고, 깨닫고, 돌이키는 일에 민감하지 않으면,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보고, 듣고, 깨닫고, 돌이키는 일을 제대로 가르칠 수 없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은 꼭 세상살이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사명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영혼 구원에 대한 열망이 있다면 감금상태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반드시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이후 우리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영혼 구원에 대한 경종에 대해 불감증 환자가 되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하루하루가 성령님의 인도와 역사하심의 장이 되어,
담대하게 거침없이 복음을 전하여 VIP들이 보고, 듣고, 깨닫고, 돌이키게 하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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