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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1강
장자 탄생배경과 장주
1.시대 상황
은나라 멸망⇨주나라 건국⇨서융의 침략⇨수도함락, 왕 피살
⇨낙읍으로 수도 옮김⇨동주시대⇨춘추시대
⇨전국시대⇨제후가 득세, 혼란의 시기
장자가 살았다(기원전 370~기원전 280)
*기원전 293 진나라가 한,위 연합군 격파(24만 명 참수)
기원전 260 조나라 사람 40만 명 생매장
시체가 산, 피가 강
인육을 먹고(자식 바꿔먹기) 징집으로 농사불가
철기시대⇨ 대량생산⇨ 토지와 인력확보를 위해 전쟁⇨사유,철학의 시작
장자는 시대문제 바로 보고 능동적인 삶을 산 자유인이다.
관자<실용> 한비자 <법가식 통치>
사고의 지평이 확장되려면 사고의 그릇이 커야 한다. 큰 지혜는 작은 지혜가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출발점 자체가 달라야 얻을 수 있다는 통렬한 성찰이다 . 뱁새와 대붕
장자의 붕은 상식과 통념의 굴레를 박차고 다수가 진리라고 외치는 우상을 파괴하며, 자유로운 정신으로 나아가는 상징이다. 고정관념의 족쇄를 끊고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자유로운 정신은 고독과 고통을 동반한다.
자유는 안전과 편안함속에는 자취를 감춘다. 붕의 자유는 위험과 함께 비상한다.
김수영의 <푸른 하늘을>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약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사람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
1.경쟁(벌,뱀,해충,동물공격 2.이용(활용하여 필요한 것 충족, 약초,나물,낚시,새잡이 등)
3.보호(자연,환경보호) 4.감상(인간관계 염증으로 휴식) 相看兩不厭 只有敬亭山
<도덕경> 백성의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윗사람이 삶에 집착하기 때문,
도덕률 주입, 개인생명<나라 구하는 충성과 용기 필요
<소학> 삶의 근원을 마련해 준 사람에게 목숨 바치고(왕) 나에게 보탬을 준 사람(스승,부모)에게 힘으로 보답
<유가의 도덕률> 일상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에 집착, 국가위해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감정
하늘의 도와 자연의 원리 존중하지만 인간중심의 논리
<플라톤(서구)방식> 인간만 주체, 이성적 능력 지닌 존재 우월하고 자연은 관찰,개조대상,열등한 존재,
물질일 뿐이며 생산을 위한 원료, 기계부품처럼 이용대상
괴테<파우스트>
근대적 인간상을 향한 선언.
주인공 파우스트가 내적인 욕구충족을 못한데 절망, 악마 메티스토텔레스와 영혼을 건 계약
1부 <생명연장과욕망 체험> 2부4막 향락은 사람을 천하게 만든다(회의감) 하늘나라+명성 얻음 이 세상을 위해 큰 사업, 인간 재배와 소유욕
유가vs도가 차이
유가 | 도가 |
修己安人 知其不可而爲之者 대학지도 재명명덕 신민 지어지선 『큰 배움의 길은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으며, 백성을 친하게 하는 데 있으며, 지극한 선(善)으로 나아가는 데 있다.』 즉, 큰 사람이 되려는 학문의 길과 교육의 목표가 3강령이라면 8조목은 그 공부 방법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적시한 것 사명의식(사회적 책임감) 隱居求志, 子貢曰 有美玉於斯 韞匵而藏諸 求善賈而沽諸 子曰 沽之哉 沽之哉 我待賈者也 聖人之學不傳 道不行 天下有道而誰易之 | 개인적 순응 知其不可奈何而安之若命 德之至也 어찌할 수 없음을 알아 마음을 편안히 하고 천명을 따르니 덕의 지극함이다(인간세) 천무사복 지무사재 구기위지자이부득야 父母豈欲吾貧哉 天無私覆 地無私載 天地豈私貧我哉 求其爲之者而不得也 然而至此極者 命也夫 부모님인들 어찌 내가 가난하기를 바라셨겠으며, 하늘은 사사로이 덮어 줌이 없고, 땅은 사사로이 실어 줌이 없으니, 하늘과 땅인들 어찌 사사로이 나만 가난하게 할 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나를 이렇게 만든 존재를 찾아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그러니 내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운명일 것이다.”<대종사> |
*순응-위빈녹사, 농삿일 즐거움으로 승화
장자가 적합한 부류:①年高經多事(집착내려놓아라) 放下着
②懷才不遇(사회부적응, 자기 중심세계로 들어감)
③聰明人 가여공학 여립
적도(유가, 원리원칙, 몸가짐 검속)
여권(자유, 구속 없음) 야생마와 백락 <마제편>
吾意善治天下者不然 彼民有常性 織而衣 耕而食 是謂同德 一而不黨 命曰天放
내 생각에는 천하를 잘 다스리는 사람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저 백성들에게는 떳떳한 성질이 있는 것이다. 베 짜서 옷을 해 입고 밭 갈아서 밥을 먹는다. 이것을 동덕이라 하고 오직 순일해서 치우치지 않으니 이것을 천방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노자와 장자의 차이
노자 | 장자 |
致虛極 守靜篤 내용의 추상성,범칭,직서법 - 道大,天大,地大,人亦大 | 形如枯木 心如死灰 문체의 구체성,사상의 초월성, 眞人,眞知(참사람,참지식)의 등장 至人無己, 大變而化, 超越上昇 |
고통으로 신음하는 민중의 삶을 해방시킬 정신으로서의 “자유,평등,소통과 연대”를 사유했다.
욕망경쟁에서 탈피하여 내것 아닌 것을 내려 놓는 일. 心齋
인간이 순수한 본성을 잃은 것은
성인의 잘못 탓이다
마제(馬蹄)편 마제란 말발굽이란 의미인데, 마제편이 “말(馬)은 발굽(蹄)이 있어…”로 시작하기에 이를 편명으로 삼았다. 야생에서 태어난 말은 제 수명대로 살 수 있는데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수단으로 말을 사육하면서부터 불행한 처지에 놓였다. 마찬가지로 천하도 성인(聖人)1)이란 사람들이 인의(仁義)와 예락(禮樂)으로 다스리면서부터 백성들이 불행해졌다. 성인이 자연 상태의 규율인 도덕(道德)을 깨트린 탓이다. 이에 장자는 유가의 주장처럼 천하를 인의와 예락으로 다스리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보고, 도덕으로 돌아가 인간의 순수한 본성에 입각해서 다스림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순수한 본성이란 무엇인가? 말은 말굽이 있어 서리나 눈을 밟으며 걸어 다닐 수 있고, 털이 있어 추위를 막을 수 있다. 또 마음대로 풀을 뜯고 물을 마시며 깡충깡충 뛰어다닐 수 있다. 이것이 말의 참된 본성(眞性)이다. 그야말로 소박하기 짝이 없다. 그러니 높은 누각과 큰 침실로 장식된 훌륭한 마구간은 말의 소박한 본성과는 분명히 어긋난다.
그런데 백락(伯樂)이란 자가 나타나 자기가 말을 잘 다룬다며 말에 낙인을 찍고, 털을 깎고, 말굽을 다듬고, 굴레를 씌우고, 재갈과 띠를 맨 뒤 구유가 딸린 마구간에 말을 집어넣은 뒤 사육했다. 그러자 살지 못하고 죽는 말이 열에 두셋이나 되었다. 게다가 먹이와 물도 주지 않은 채 달음박질을 시키면서 명령대로 잘 움직이게끔 말을 길들이기까지 했다. 앞에선 재갈과 가슴걸이로 속박하고, 뒤에선 가죽 채찍으로 위협했음은 물론이다. 그러자 살지 못하고 죽는 말이 반을 넘어서고 말았다.
도공은 흙 만지는 솜씨(治埴)가 뛰어난 사람이다. 그가 도자기를 만들 때는 둥근 부분은 그림쇠(規)로 재단하고, 네모진 부분은 곱자(矩)로 재단한다. 또 목수는 나무 다루는 솜씨(治木)가 뛰어난 사람이다. 그가 재목을 다룰 때는 굽은 데는 그림쇠(鉤)로 재단하고, 곧은 데는 먹줄(繩)로 재단한다. 그렇지만 도자기 원료인 흙과 나무의 본성은 규(規)·거(矩)·구(鉤)·승(繩) 따위의 재단으로 딱 들어맞을 수 없다. 설령 들어맞더라도 그것은 자연의 본성까지 감안한 재단이 아니라 기계적인 재단일 뿐이다.
그럼에도 세상 사람들은 백락이란 자를 말을 잘 다루는 대표적인 인물로, 또 도공(陶者)이나 목수(匠人)를 흙과 나무를 잘 다루는 대표적인 사람으로 알고 있다. 세상 사람들의 이런 인식은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들의 잘못 탓이라고 장자는 본다. 왜냐하면 천하를 잘 다스리는 사람은 규(規)·거(矩)·구(鉤)·승(繩) 같은 도구, 즉 인의와 예락과 같은 도구로 천하를 다스리지 않고, 자연 그대로인 도덕으로 천하를 꾸려가기 때문이다.
야생에 사는 말에게 본성이 있는 것처럼 백성들에게도 본성이라는 게 있다. 옷감을 짜서 옷을 해 입고, 땅을 갈아서 곡식을 만드는 이것이 동덕(同德)이란 본성이다. 또 백성들은 각기 떨어져 살며 무리를 짓지 않는다. 즉 나라를 만들지 않고 사는데, 이것이 하늘이 준 자유 즉 천방(天放)이란 본성이다. 최고의 덕(至德)이 지배하던 시대에는 백성들의 본성이 중요했다. 그래서 사람들의 거동은 유유자적하고, 눈매는 밝고 환했다. 또 산에는 지름길이 없고, 못에는 배나 다리가 없었다. 게다가 만물은 함께 살면서 각자 사는 곳의 경계를 두지 않았다. 그래서 새와 짐승은 떼 지어 살며 초목은 마음껏 자랄 수 있었다. 인간은 새와 짐승을 줄에 매달고 함께 노닐 수 있었고, 새 둥지에 올라가서 새끼를 품은 어미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이처럼 최고의 덕이 지배하던 시대에는 사람과 동물이 함께 살며, 만물과도 나란히 짝을 이루었으니 군자, 소인 따위의 구별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사람들은 지모조차 필요로 하지 않았기에 자연이 준 덕성(德性)에서 떠날 수 없었으며, 욕심조차 낼 필요가 없었기에 소박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백성의 본성(民性)은 온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성인이 등장하여 애써 어짊(仁)을 위하고, 힘써 의로움(義)을 행하자 온 천하가 의혹을 품기 시작했다. 또 제멋대로 음악을 연주하고, 번잡하게 예의를 만들어 천하에 구별이 생겨나게 되었다.
자연 그대로의 통나무를 손상시키지 않고 술 단지를 만든다면 그것은 최고의 장인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또 흰 옥돌을 깨뜨리지 않고 옥기를 만든다면 그것도 최고의 장인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최고의 장인들은 오로지 도덕에 입각해서 백성을 다스릴 수 있다. 허나 이런 도덕이 무너지지 않고 있는데 어찌 인의(仁義)를 주장할 수 있는가? 본성(性)과 감정(情)이 분리되지 않는데 어찌 예악(禮樂)을 쓸 필요가 있는가? 오색(五色)이 문란해지지 않는데 어느 누가 문채(文采)를 만들 수 있는가? 오성(五聲)이 어지러워지지 않는데 어느 누가 육률(六律)을 맞추는가? 통나무를 손상시켜 그릇을 만드는 것은 장인의 죄이지만, 도덕을 무너뜨려 인의를 내세운 것은 성인의 과오이다.
따라서 최고의 덕(至德)이 지배하던 시대에 말의 지모란 그저 풀을 뜯고 물을 마시며, 기쁘면 목을 맞붙인 채 비비고 성나면 서로 등을 돌려댄 채 발길질 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 말에게 멍에를 달고 월예로 조정을 한다면 말은 월예를 꺾고 멍에를 부수며 수레의 포장을 치받고 재갈을 망가뜨리며 고삐를 물어뜯는다. 이런 반항은 구속에서 풀려 나오기 위해 말이 지모를 쓴 결과이다. 이런 지모는 점점 발달해서 도둑의 지모에까지 이를 수 있다. 그렇다면 순수하고 소박했던 말의 본성이 이런 지모에까지 이른다면 그것은 야생마를 조련한 백락의 죄라 아니 할 수 없다.
이런 백락과 같은 인물은 인간세상의 지도자에게서도 발견된다. 성인으로 떠받드는 요(堯)·순(順) 임금이 바로 백락과 같은 존재이다. 아득한 혁서씨(赫胥氏) 복희씨의 탄생설화에 따르면 극락세계에 살던 복희씨 어머니 화서씨가 하루는 뇌택이라는 호숫가로 놀러가서는 뇌신(雷神)과 감응하여 복희씨를 낳는다. 복희씨는 음양변화의 이치에 근거하여 팔괘를 만들고, 그물을 창조하여 백성들에게 물고기 잡이와 목축을 가르쳤다. 복희씨의 제위를 여와씨가 계승한 이후로는 공공씨, 태정씨, 백황씨, 중앙씨, 역륙씨, 여련씨, 혁서씨, 존로씨, 혼돈씨, 호영씨, 주양씨, 갈천씨, 음강씨, 무회씨가 차례로 대를 이었다고 전해진다.
그 시대에는 백성들이 평상시에 해야 할 일도, 또 갈 곳도 몰랐다. 먹을 것을 입에 넣고는 즐거워했으며, 그러면서 배를 두드리며 놀았다. 당시 백성들은 이 정도의 일에 만족해했다. 그런데 성인이 출현하여 예의나 음악에 따라 몸을 굽히도록 함으로써 천하의 겉모습을 바로잡으려 했다. 또 인의를 내걸어 천하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려 했다. 그 결과 백성들은 애써 지모에 몰두하고, 또 다투어 이득을 좇는데 이제는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은 성인의 잘못이 아니고서 무엇인가?
진나라 여불위<여씨춘추>
백성의 이익에 대한 태도: 날아오는 화살의 빗발도 거슬러 가고, 번뜩이는 칼날 위도 밟고 가며, 사람의 피를 흘리고 간을 빼어서라도 이익을 찾는다
<사기 춘신군 열전>
국토는 황폐되고 사직은 파괴당하고 종묘는 파손당했다.
사람들은 배가 갈리고 창자가 파헤쳐지고, 목이 잘리고,
얼굴이 뭉개지고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고 몸은 풀밭에 흩어지고,
머리는 땅에 나동그라진 채 서로 국경에서 바라보고 있다.
부모, 자식, 늙은이, 젊은이의 손과 목이 묶어 줄줄이
연결한 포로무리들이 길 위에 끊일 날이 없다.
죽은 사람의 영혼은 홀로 슬퍼할 뿐, 제사를 지낼 유족마저 없다.
백성은 삶을 영위 할 수 없고 가족과 뿔뿔이 흩어져 여기저기 떠돌다가
노예나 첩이 된 사람이 가득 찼다.
옛날에 요임금이 총지와 서오를 공격하고 우왕이 유호를 쳤는데 이 나라들은 황무지가 되고
임금들은 모두 형벌을 받아 죽었다. 끝없이 군대를 동원하고 실리를 탐내다가 그렇게 된 것이다. 모두 명예와 실리를 쫓았다. 명예와 실리의 추구는 성인도 물리칠 수 없는데
네가 어찌~
=전주대 박완식 교수2강,
=사마천은 장주 사후 200년 노장신한열전에 기록, 蒙은 송나라 현(하남성 귀덕부, 현 商丘縣의 이름이다. 양나라 혜왕과 제나라 선왕과 동시대 살았다. 맹자와도 같이, 그의 학문은 無所不窺,박학했다. 학문의 요체는 老子之言, 송나라는 어리석음의 대명사, 송양지인,제나라 變詐,노나라 禮儀, 알묘조장, 수주대토,우공이산, 송나라와 장자의 관계 四戰之地, 四方受戰之國,전국시대 七國爭雄, 날마다 전쟁, 힘든 세상에 장주는 힘이 없는 서생, 할 수 있는 것은 정신적 승화, =불교의 생노병사⇨ 人生皆苦 ⇨四大 皆空
亂世 止水火風(己) 無
*至人無己, 난세에는 고통 받는 몸을 버려야 悠悠自適,可
초탈적 사상으로 맞춤(출호육합지외) ⇨ 철학
解脫 ⇨ 종교(서방정토세계)
실존적 뭐가 있다.
그러나 장자는 出乎六合之外에서 노닒(육합은 상하사방,우주),우주 밖을 벗어나 上與造物者遊,
與寥天爲一(고요한 하늘, 자연 그 자체) 천당, 극락 염두에 두지 않고 자연과 하나. 만약 장자가 옥황상제가 사는 어디? 라는 지명을 넣는 순간 종교가 된다. 종교와 철학의 분기점(서방정도가 있다/없다)이후 한나라 때 도교에서 장자를 끌어다 씀.
장자의 생사관 安時處順(때時가 되어서 나왔다. 불교 업보, 기독교 원죄)
(順종 때가 되어서 죽는다.순리대로 처한다.)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 하늘과 하나 된다. 죽음이나 삶이 좋고 싫고 아님
*도교 導引法 장자의 생각이 아님. 목숨연장 옳지 않다. 대자연속에 순응해야.
安命주의⇨物化⇨樂道의 세계⇨與遊유유자적, 조물자와 함께 나 자신이 하늘(대자연)과 함께 회귀 신의 존재에 기도도 복종도 없다. 무신도 숭배도 아니다. 죽어서 어디로 간다는 것도 없다. 붕처럼, 조물자와 함께. 氣의 離合集散에 불과.
인간의 위대함, 잠재능력의 무한성을 피력하고 있다. 인격신-자유로운 사고 , 인간위주, 인본주의 최고경지의 철학자. 힘든 세상 편안히 너그러운 가슴으로 얽매이지 말고 초탈적 사고로 살아야 한다.
장자의 처방?
재난 없는 안전지대는 없을까?
心齊
쓸모없는 나무+울지 않는 거위의 중간 쯤
지리소이야기
*등장하는 인물군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중인衆人과 서인庶人들은 일상적인 세속의 유한한 물질계에 경도된 사람들이다. 반면에 성인聖人과 지인至人, 신인神人 같은 사람들은 무한한 정신계를 추구하는 인간이다. 그런데 장자는 후자에 속하는 이들은 모두 ‘3무’ 곧 “자기無己와 공無功, 이름無名‘이 없는 축들로 ”해와 달을 곁에 두고 우주를 끼고“ 살아간다 석명했다. 그들은 ”구름에 올라 해와 달을 타고“, ”저 아득히 높이 나는 새를 타고 이 세상 밖으로 나아가,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노니는데 대표적으로 세 친구 자상호子桑戶와 맹자반孟子反, 자금장子琴張을 거론했다.(『장자』제 6편「대종사」) 묶어보면 천제의 속박 그 매닮의 끈에서 벗어나 ’遁天之刑‘의 벌을 피해, ’帝之懸解‘의 자유를 누리는 인간들
2.인물 장자
=장자는 몽 지방 사람으로 이름은 주(周)이다.
주는 일찍이 몽 지방의 칠원(漆園)이라는 고을에서 관리를 지냈는데,
양 혜왕(梁 惠王), 제나라 선왕(齊宣王)과 같은 시대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박학하여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그의 학문은 노자의 학설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10여만 자나 되는 그의 저서는 대체로 우언(寓言)으로 되어 있다.
어부(漁父), 도척(盜跖), 거협(胠篋) 편 등을 지어 공자의 무리들을 비방하고 노자의 학설을 천명하였다. 외루허(畏累虛)라는 산 이름과 항상자(亢桑子)라는 인명 등은 모두 사실이 아닌 허구이다 그러나 장자는 문장력이 뛰어나고 세상 인정을 합당하게 잘 비유를 들어 유가와 묵가를 공격하였으니 비록 당대의 대학자라고 하더라도 그의 공격을 피할 길이 없었다.
그의 언사는 거센 물결과 같이 자유분방하고 자기 마음대로였으므로, 왕공이나 대인들로부터는 훌륭한 인재로 평가받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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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梁 惠王(양 혜왕) : 위 혜왕(魏 惠王, 기원전 400년 ~ 기원전 334년)은 중국 전국 시대 위나라의 제3대 군주(재위: 기원전 370년 ~ 기원전 334년)이다. 혜성왕(惠成王)으로 불리기도 한다. 맹자에서는 양 혜왕(梁 惠王)으로 기록되었고, 장자에는 문혜군(文惠君)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은 희(姬). 씨는 위(魏). 휘는 앵(罃)이다.
○ 齊宣王(제선왕, ? ~ 기원전 301년) : 중국 전국시대의 제나라(전제,齊,田齊)의 제5대 국왕(재위: 기원전 319년 ~ 기원전 301년)이다. 성은 규(嬀), 씨는 전(田), 휘는 벽강(辟彊)이다.
가난한 장자<외물편>
莊周家貧하여 故往貸粟於監河侯하다.
장주가빈하여 고왕대속어감하후하다.
장주가 집안이 가난하여 감하의 관리에게 쌀을 빌러 갔다.
*학철지어涸轍之魚 물이 말라가는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속의 붕어, 몹시 다급한 상황
3.장자의 사상
가.끝없는 변화로 절대적 자유의 경지에 노닐다(소요유)
화이위조化而爲鳥 바람에도 의지 하지 않고 절대 자유(지인무기, 신인무공, 성인무명)
끝없는 변화 | 절대자유 |
어제,작년, 과거가 아닌 내 모습 집착을 버려라, 존재의 실상은 변화다. | 신체건강; 의지대로 움직이는 자유 돈 때문에 하기 싫은 것 하지 않는 자유 정신적 자유(마음대로 생각,말, 표현) |
나.무차별적 동등의 세계를 외치다(제물론)
4.장자라는 책의 구성
가.내편7(장자 본인의 목소리)
1)극단적 생존경쟁에서 인간성은 상실되고 가치관은 왜곡되고 지친 마음 달래며
치유의 숲을 찾아 나선 장자. 초탈과 힐리에 심리적 안정과 정신적 해탈.
2)물질문명의 발달과 정신세계의 회피
나.계승자의 목소리
다.황로학자의 목소리(노자사상을 정치술로 발전시키고자 했던 사람)
라.무정부주의자의 목소리(반체제 사상 전개)
<사기>10만여 자. 한나라초기 52편, 위진시대 곽상이 33편 편집(6.5만여 자)
내편 1.3만여 자 (장자본인의 주장)소요유,제물론이 핵심
외편 장자사상의 계승자
잡편 장자사상과 직접관련 없다.
5.책의 표현방식
가.우언: 전달하고자 하는 뜻 곧바로 제시하지 않고 비유나 가공으로 간접적, 상징적으로 표현(대붕)
나.중언: 권위자의 입을 빌어 자신의 생각을 전달(공자/안회)
다.치언: 편견없이 무심히 흘러 보내는 듯한 어법
*卮 술 잔으로 가득차면 기울고 비워지면 똑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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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죽음’
도아都雅와 야비野鄙는 글자 자체에서 주는 어감이 다르다. 도아가 꾸밈이라면 야비는 원시적 생활모습을 연상케 한다. 하여, 도시에서 우아하게 살면 ‘도아하다’고 하고 시골에서 멋대로 행동하면 ‘야비하다’고 한다. 하지만 느낌과 실체는 차이가 있다.
‘야생의 야만인’과 ‘문명의 문화인’도 같은 맥락이다. 야생은 순수와 자연이다. 야만이 인위가 작동한 야비한 인간의 모습이라면, 문화는 자연 그대로의 원시적 생활에서 발전되고 세련된 삶의 모습을 말한다. 흔히 문화를 정신적(지적)인 발전으로, 문명을 물질적(기술적)인 발전으로 구별하기도 한다. 야생이 야만으로 보이는 부족사회에서도 고도의 이성이 존재한다. 이성의 작동은 문명의 문화인과 다르지 않다. 야생이나 문화를 동일선상에서 두고 본다면 차이를 차별로 볼 이유는 하나도 없다. 한 인간 집단이 나무뿌리, 벌레, 유충을 먹고 산다. 개고기를 먹고 쥐를 먹고 달팽이를 먹는다고 좋은 사회, 나쁜 사회, 열등한 사회집단이라 단정 지을 수 없다. 서구를 문명사회로 원시민을 야생사회 구분 짓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그림
발명과 개발, 생산성을 중시하는 서구사회가 물질문명을 앞세워 자신들이 만든 기준을 다른 세계에 일방적으로 적용하려 한다. 그 반대편에는 개인이 소비하는 에너지량을 늘리지 않고 위계질서를 유지하여 인간파괴가 존재하지 않는 원시사회가 있다. 그런데 서구문명은 개발과 혁신, 개혁과 문명의 전래라는 이름하에 밀어붙이는 행위가 자행하고 있다. 이는 폭력과 별반 차이가 없다. 어설픈 계몽은 상대를 죽음의 계곡으로 몰아넣는 행위다.
<장자> 대종사 편의 ‘혼돈의 죽음’을 소개한다.
남해의 제왕을 숙이라 하고, 북해의 제왕을 홀이라고 하고, 중앙의 제왕을 혼돈이라 한다. 숙과 홀이 어느 때, 혼돈의 땅에서 만나게 되었다. 혼돈이 이를 잘 대접하여 숙과 홀은 혼돈의 은덕을 갚을 방법을 의논하여 말했다. “ 사람들은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을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 쉬고 하는데 혼돈만은 이것을 가지고 있지 않소. 그에게도 구멍을 뚫어 줍시다.” 그리고는 혼돈의 몸에 하루에 한 구멍씩 뚫어 나갔는데 칠 일 만에 혼돈이 죽었다.
숙과 홀이 혼돈에게 대접을 받았다. 궁리 끝에 보답할 것을 생각했다. 보답은 숙과 홀의 입장이 아닌 혼돈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의논의 과정이 생략되고 일방적이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 왜? 당사자가 빠진 그 둘이 내린 결론은 그럴싸하다. 사람들에게는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 구멍이 일곱 개가 있는데 혼돈에게는 없다. 구멍을 뚫어 주자고 뜻을 모으고 실행에 옮겼는데 칠일이 되자 혼돈이 죽었다. 귀, 눈, 입, 코를 가져 지각할 수 있게 된 혼돈은 더 이상 혼돈일 수 없다.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었던 자신들의 생각이 결국은 상대방의 고유성을 잃게 하고 죽음으로 몬 것이다.
태양이 세상을 비추는 것은 무슨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다. 만물 또한 빛에게 보답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다른 존재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이 쉽지 않다. 깊은 이해와 따뜻한 배려만이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다. 이웃을 끌어안으려는 우리의 이해가 실은 타자성의 상실을 강요하는 폭력일 수 있다. 그런데 이를 동일시하고 획일화하면 고통과 좌절을 넘어 파멸이 오는 것이다.
숙과 홀은 유의요, 작위인 인간 문명을 상징한다. 혼돈은 문명의 혜택이 아닌 원시적이고 무위이며, 자연그대로의 상징이다.
나의 의도는 그게 아닌데 나의 속내는 순수했는데 결과는 실패나 좌절을 넘어 죽음이다. 혼돈의 비극을 보면서 나와 다른 삶에 대한 존재를 이해하고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 쉽지 않다. 혼돈에게 구멍이 필요 없는 것처럼 외부의 도움이나 개선, 개발, 혁신이라는 것이 부질없는 짓일 수 있다. 지구상에는 다양한 삶이 존재한다. 서구물질문명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아마존의 원시민 같이 그들의 질서로 살아가는 집단도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주변에도 다양한 삶이 존재한다. 얼마 전, 이웃에 얼마의 돈을 지원했다. 내 생각에는 양식糧食을 구입하는데 쓸 것이라고 믿었는데 애완용 고양이 사료를 샀다고 한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면 숙과 홀처럼 혼돈에게 구멍을 뚫어주는 일은 계속 될 것이고 비극은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다. 어떠한 경우도 선의로 포장된 폭력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혼돈의 죽음’은 타자를 배려하고 이해하자는 교훈인 셈이다.<응제왕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