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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성 참정권 역사 전체 내용 요약
=> https://youtu.be/38lNr55ReJ4 - 여성 참정권, 100년의 투쟁(12:05)
2. 세계 각국의 여성 참정권 획득 연도
3. 여성 참정권 운동의 길을 연 프랑스 - 올랭프 드 구즈(1748~1793)
올랭프 드 구즈는 1748년 5월 7일 남프랑스의 몽토방 태어났다. 18세 때 구즈는 결혼을 하고 아들을 출산하였다. 하지만 이듬해 구즈는 남편의 사망으로 과부가 되었다. 남편과 사별한 후 구즈는 고향을 떠나 파리로 가기로 결심했다. 그때 그는 자신의 이름을 선택하기로 마음 먹는다. 어머니의 이름인 '올랭프'와 '구즈'라는 성을 택해 '마리 올랭프 드 구즈'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아버지와 남편의 이름(family name, 성)을 따르던 서양의 가부장적인 법률이 여성에게 부과하던 지위를 거부한 것이었다. 파리로 이동 후 그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와 마주하게 되었다. 구즈는 재혼을 하지는 않았지만 해군 고위 관료 출신과의 동거 및 지원으로 부르주아적 삶을 지속한다. 구즈는 몽토방의 넉넉한 집안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기에 살롱을 출입하고 여러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집필에 몰두하여 극작가로서 성공하였다.
처음에 구즈가 관심을 가진 인권의 문제는 ‘노예제’ 문제였다. 식민지 농장에서 착취당하는 흑인 노예의 처지에 충격을 받은 구즈는 흑인 노예제 지지자들의 로비에도 불구하고 노예제를 비판하는 희곡을 많이 썼다. <흑인에 대한 성찰〉(1788), 〈흑인노예시장〉(1790)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구즈는 이 작품들에서 유럽인들, 그리고 '공화국 프랑스'의 사람들이 노예제 폐지에 대해 성찰할 것을 주장했다. 구즈는 흑인문제 뿐만 아니라 사채를 갚지 못한 사람들의 비참한 삶이나 빈민 문제도 다뤘다. 전국적인 실업자들을 위한 국영 작업장과 집 없는 이들을 위한 쉼터를 건설하자고 제안했다. 구즈의 연극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성황리에 공연이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와 논의가 힘이 되어 프랑스 공화국은 1794년 2월 4일 유럽에서 최초로 흑인 노예제를 폐지하게 된다. 생도맹그의 흑인 노예들은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여 아이티 공화국을 건설하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여성들은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 주요 봉기 때마다 거리를 점령하는 데 앞장섰다. 루이 16세와 그의 부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오스트리아로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도망가다 발각되었을 때도, 왕과 왕비를 파리로 끌고 오는 행렬 앞에는 여성들이 앞장섰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뒤에도 남성들은 여성을 뜨개질이나 하는 소유물'로 여겼다. 당대의 프랑스 여성들은 혁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도 그 결실을 나눠 갖지 못했다. 여성이 정치적 발언을 하면 거리에서 옷을 벗겨 볼기를 치는 만행이 벌어지기도 했다.
1789년 8월, 프랑스 대혁명 와중에 발표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하 '인권 선언'으로 줄임)은 보편적 인권과 국민주권을 중시한 최초의 선언이었다. 하지만 이 선언 속에 '여성'은 없었다. 각종 권리에서 여성은 배제되고 남성만이 권리의 주체로 상정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의 인권 선언은“모든 인간이 자유롭게 태어났다”고 적었지만, 여성은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서양의 언어에서 인간(Human)은 곧 남자(Man)와 같은 단어이며 남자를 뜻했다.
구즈는 이러한 혁명의 모순에 크게 분노했다. 그 분노를 차근 차근 글로 적어 나갔다. 그 결과물이 바로 1791년에 출간된 <여성의 인권과 시민권 선언>(이하 '여성 시민 권리 선언'으로 줄임)이었다.〈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과 대응해 “인간Man"이라는 단어를 “여성과 남성”으로 바꾸어 썼던 것이다.
그는 기존의 권리 선언이 여성을 배제하고 있으며, “남성” 홀로 인간성을 대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가장 유명한 문구인 “여성은 단두대에 올라갈 권리를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여성은 연단에 올라갈 권리를 가져야만 한다.”라는 그의 주장은 프랑스 여성들의 심금을 울린 말로 유명했다. 구즈는 이 글을 통해 시민권 및 참정권에서의 양성 평등을 주장하면서 여성이 사회적, 정치적 토론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혼의 제도화를 처음으로 주도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종교 결혼을 철폐하고 결혼 당사자가 서명하는 시민 결혼제도를 제안했으며 자유롭게 부권(아버지 성)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하며 혼외 출생한 아이들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793년 루이 16세가 처형되고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국민공회가 권력을 잡아 공포 정치가 시작되었다. 프랑스 혁명을 좌절시키려는 외국의 침략도 이어졌다. 구즈는 로베스 피에르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혁명에 반대하는 자'로 몰리면 처형하는 당시의 분위기에서 구즈는 용기 있게 목소리를 낸 것이다. 단두대에 올라간 구즈는 마지막 순간에도 외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국의 아이들이여! 너희들이 나의 죽음을 복수해 주리라!". 울부짖음에 가까운 그의 외침에 구즈를 지지하는 관중들은 “공화국 만세" 라고 외치며 화답했다. 45세의 나이였다.
올랭프 드 구즈가 단두대에서 이슬로 사라진 1793년으로부터 150여 년이나 지난 1944년 프랑스에서 여성의 참정권이 허용되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그 시작점이 구즈와 같은 여성들의 요구에서 출발한 것은 분명하다.
'구주를 팡테옹으로!' 라고 외치는 구호는 구즈에 대한 오늘날의 관점을 잘 말해준다. 팡테옹은 프랑스의 유명한 위인들이 묻힌 국립묘지인데, 여성 인권의 대표인 구주를 거기에 이장하자는 주장이다. 2007년 프랑스의 대통령 후보였던 정치인 세골린 루아얄은 '내가 만약 대통령이 되면 구즈를 팡테옹으로 보낼 것이다. 구즈는 마리 퀴리와 만나게 될 것이다'고 당당히 선언했다. 그는 프랑스 최초의 대통령 후보이기도 했다. 역사 속의 잠든 구즈는 이 모습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참고 : https://youtu.be/4RvibXITCQE
4. 세계 최초의 여성 참정권 인정 국가 뉴질랜드 - 케이트 셰퍼드(1847~1934)
케이트 셰퍼드는 영국 태어나 스무 살 무렵 결혼해 처음엔 호주로 이주했다가 나중에 뉴질랜드로 이사한 여인이다. 뉴질랜드에 정착한 이후 ‘기독교여성절제회’ 활동을 하며 뉴질랜드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고, 인종, 계급, 성별에 대한 차별 철폐를 주장하면서 여성 참정권 운동에 매진하며 뉴질랜드 의회에 여성참정권 탄원서를 제출했다.
1888년과 91년, 92년, 93년 잇달아 청원서를 의회에 제출했는데, 두 번째 탄원서부터는 서명자 명부를 첨부했다. 이 중에서 1893년 제출한 3만 2천명(당시 성인 여성 인구의 약 1/4)의 여성이 참여한 청원서(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가 의회에서 20대 18로 법안을 통과하게 되었고, 그 결과 1893년 뉴질랜드는 세계 최초로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한 국가가 되었다. 그는 지금 뉴질랜드 화폐에서 볼 수 있으며 뉴질랜드 국회 의사당 주변에는 그의 모습이 등장하는 신호등이 있다.
참고 : https://youtu.be/cUjgCZYFnuw
5. 여성 참정권 운동의 대표 국가 영국
가. 에멀린 팽크허스트(1858~1928)와 실비아 팽크허스트(1882~1960)
19세기 동안 영국의 민주주의는 돈 있는 남성들의 것이었다. 정부는 점차 남성들에게 참정권을 확대했지만, 여성의 참정권은 계속해서 무시하였다. 에멀린 팽크허스트(1858~1928)는 법적으로 남성의 소유물이던 여성의 처지를 바꾸기 위해 1903년‘여성사회정치동맹'을 만들었다. 그들은 집회, 선전, 단식, 무력시위 등 여성 참정권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에멀린은 1913년에 12차례의 단식투쟁을 하며 여성 참정권을 요구했지만, 정부는 들어주지 않았다. 남성 정치인들은 여성이 참정권을 가지면 가족제도가 위태로워지며 남성의 권위를 위협할 것이라고 두려워했고,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을 강하게 탄압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다. 에멀린은 전쟁이 끝난 후 여성 참정권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정부의 약속을 받아 운동을 중단했다. 그녀는 전쟁에 참여한 정부를 지지하였으며, 전쟁으로 부족한 일손을 여성의 노동으로 보충할 수 있도록 선전 활동을 하였다.
1918년 전쟁이 끝나자 정부는 '만 30세 이상 여성' 에게 참정권을 허용하였다(남성은 만 21세 이상). 에멀린은 개정법이 시행되기 한 달 전에 사망하였다. 영국은 그녀의 운동을 영국 민주주의 발전의 중요한 역사로 인정하였고, 웨스트민스터 의사당 옆에 그녀의 동상을 세워주었다.
실비아 팽크허스트는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머니와 언니를 따라 '여성사회정치동맹'을 결성했지만, 그녀들과는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 에멀린은 중산층 여성을 운동의 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에, 노동자 여성들이 외치는 노동조건 개선을 부담스러워했다. 언니 크리스타벨은 아직 힘이 약한 노동당보다 보수당 후보들을 지지해야 여성 참정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둘과 달리 실비아는 모든 사람의 정치적 권리 실현이 여성 참정권 운동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녀는 아직 참정권을 얻지 못한 남성들을 포함해 노동자들과 연대하여 새로운 여성운동을 펼쳐나갔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다. 실비아는 전쟁에 참여한 정부를 비판하고,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운동을 벌였다. 1935년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하자 그녀는 기금을 모아 에티오피아를 도왔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그녀는 반파시즘 반식민주의 운동에 앞장섰다. 그녀가 사망한 후 에티오피아에서 성대한 국가장례식이 치러졌고,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에티오피아 수도 애국자 묘역에 그녀의 묘가 만들어졌다. 참고: https://youtu.be/_pWYwDb3VoU
나. 에밀리 데이비슨(1872~1913)
1913년 6월 4일, 그날은 당시 영국에서 인기 종목이었던 경마 경기가 시작한 날로 많은 사람의 이목이 쏠렸다. 경기가 시작되고 말들이 숨 가쁘게 달리는 사이 갑자기 한 여성이 경마장으로 뛰어들었다. 그녀는 영국의‘여성사회정치연합’소속으로 여성 참정권을 적극적으로 요구하였던 에밀리 데이비슨이었다. 그녀는 국왕의 말 앞으로 뛰어들며 “여성에게 투표권을!”이라고 외쳤다. 달리는 말에 치인 그녀는 병원에 실려 갔으나 끝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 일로 그녀는 사망했지만, 언론은 왕의 말이 다쳤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에 분노한 그녀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여성이 참여하였고, 장례식 행렬은 여성 참정권을 요구하는 시위의 현장이 되었다. 이후 여성 참정권자들은 의회를 공격하거나 단식 등을 통해 정부에 저항하였다. 이러한 참정권 운동 결과 영국에서는 1928년부터 모든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참정권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참고: https://youtu.be/aPnsrcKGu0U
※ 영국 여성 참정권 운동 영화 「서프러제트」
영국 영화 「서프러제트」는 20세기 초 영국에서 여성의 참정권 확보를 위해 노력한 '서프러제트' 집단을 다루고 있다. 이들은 언론 이용, 선전, 시위, 단식 농성 등을 벌이며 여성 참정권을 요구하였다. 영화의 주인공인 '모드 와츠'라는 여성은 우연히 무력 시위를 하는 서프러제트 집단을 보고 사건에 휘말리는데, 이후 일자리와 가정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에 맞서 여성 참정권 운동에 적극 참여한다.
영화에서 서프러제트의 지도자로 나오는 팽크허스트는 실제로 여성 참정권 운동을 주도하였던 인물이다. 팽크허스트(영국, 1858~1928)는 여성 참정권을 의회에 청원하고 이를 위한 연설 활동을 하였다. 각종 집회를 주도하고 무력 시위를 하여 정부로부터 탄압받기도 하였다. 서프러제트의 활동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중단되었는데, 당시 팽크허스트는 여성들에게 전쟁에 협력할 것을 당부하였고 자신도 후방에서 영국군을 지원하였다. 이러한 활동에 힘입어 영국 정부와의 대립이 점차 완화되었다.
참고: https://youtu.be/K4Wy_fGK900
6. 한국 여성권리의 현주소
도쿄 올림픽 양궁 3관왕인 안산을 둘러싸고 빚어진 논쟁과 관련해 영국 BBC 방송이 최근 한국에서 일고 있는‘남혐 · 여혐’ 이슈를 집중 조명했다. BBC는 안산을 둘러싼 '숏컷 논란' 등을 소개하며 한국에서 종종‘페미니스트'라는 지칭과 함께 여성들이 남성 혐오자로 매도되는 현상을 주목했다. BBC는 이런 논란 대부분이 한국 젊은 남성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촉발된다며 동기가 여성에 대한 피해 의식이라고 보도했다. 또 방송은 젊은 한국 여성들이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서로 연대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런 남성들의 단적인 사례로 BBC는 한 누리꾼이 올린 글을 소개하기도 했다. 게시물에는 “금메달을 따서 좋지만, 머리가 짧아 페미니스트 같다. 페미니스트가 맞다면 지지를 철회한다. 모든 페미니스트는 죽어 마땅하다”라는 내용이 담겼다. ……BBC는 숏컷의 상징은 젊은 여성들이 긴 머리를 자르고 화장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전통적인 미의 기준에 도전했던 2018년 탈코르셋 운동과 연관이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 미투 운동과 관련한 책을 쓰고 있는 정하원 작가는 "탈코르셋 운동 때부터 젊은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선 짧은 머리가 일종의 정치적 선언 같은 것이 됐다"면서“이런 여성권적 자각이 이들이 선을 넘었다고 생각하던 일부 남성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끌어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BBC는 논쟁에 가세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젊은 남성이지만, 나이 든 남성과 일부 여성도 포함돼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여성의 성공이 남성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뤄졌다는 신조를 지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현상의 원인은 한국 사회에서 좋은 대학과 직장을 둘러싼 경쟁이 치열하다는 점에서 찾았다. 그러면서 일부 남성이 그과정에서 여성들 때문에 불공정하게 피해를 봤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 BBC는 남성의 군복무, 여대가 10여곳 있지만 남대는 없다는 사실 등을 들어 일부 남성들이 수시로 꺼내는 남성권 증진 주장도 소개했다. 그러면서도 한국 여성들의 임금이 남성의 63%에 불과하고 한국은 선진국 중 남녀 임금 격차가 가장 크다는 게 현실이라고 다른 목소리를 냈다. -『헤럴드 경제> (홍승희, 2021.08.10.) 기사 편집 발췌
참고 자료
『삶을 위한 역사 수업 - 여성참정권 운동 수업 활동지』(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국역사교사모임,2022 가을호)
유튜브 영상 및 위키피디아
[구술평가 문제]
1. 세계 각국의 여성 참정권 획득 연도와 그 특징은?
2. 프랑스의 여성 참정권 획득에 있어 올랭프 드 구즈의 역할은?
3. 세계 최초의 여성 참정권 인정 국가인 뉴질랜드의 여성 참정권 획득 과정은?
4.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에서 팽크허스트 집안과 에밀리 데이비슨의 역할은?
5. 현재 한국 사회에서 여성권리 문제에 대한 생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