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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교회 바른 교회
1. 교회에 대한 정의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성도들의 공동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교회를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 곧 성도들의 모임으로 정의했다. 루터의 이 정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개신교 교회론의 기둥을 형성하고 있다. 오늘의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교회는 성도들의 공동체이다. 교회를 성도들의 공동체라고 정의하는 것은 우선 일차적으로 교회는 눈에 보이는 건물이나 제도 혹은 조직체와 직접적으로 일치시켜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눈에 보이는 건물로서의 교회는 신자들의 모임을 위한 장소 또는 예배당의 의미를 지닐 뿐이다. 또한 교회는 교황 혹은 총회장을 정점으로 하는 제도로서의 교회와 일치하지 않는다. 교회를 제도와 일치시키는 경향은 가톨릭교회론 속에서 매우 깊은 전통을 가지고 있다. 가톨릭 신학자 로버트 벨라르민(R. Bellarmin)은 교회를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가톨릭교회와 일치시켰다. 그는 교황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규정했고 바로 이 교황에 의해 통치되고 성례전이 집행되는 곳에서만 교회가 있음을 역설했다. 교회론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전통은 오랫동안 가시적이고 제도적인 가톨릭교회를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몸으로 규정했고 이것을 성육이론(成肉理論)의 교회론적 확장이라고 불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교회는 제도적인 가톨릭교회 밖에는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제도적인 가톨릭교회 밖에는 구원도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톨릭의 제도적인 교회관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를 통해 자체적으로 수정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 정신의 일대 변혁이 일어나는 획기적인 사건인데 교회론과 구원론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교회 밖에서의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했고 교회에 대한 개념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의했다. 물론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가톨릭교회의 제도적 중요성을 여전히 강조하고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교회에 대한 기본적인 정의는 이미 개신교의 정의와 많은 점에서 유사성을 띠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 곧 성도들의 공동체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종교개혁자 루터 시절에는 없었던 새로운 문제 앞에서 교회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검증해야 한다. 이 새로운 문제는 특별히 20세기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곧 20세기 교회론 속에 강하게 나타난 ‘익명의 교회’라는 개념이다. 이 익명의 교회 개념은 가톨릭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신학자 칼 라너(K. Rahner)의 ‘익명의 그리스도인’ 개념과 맥을 같이하는 개념으로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선한 사람들의 모임을 규정하는 새로운 신학 개념이다. 죌레(D. Sëlle)에 의하면 가난한 형제들이 영접함을 받고 형제간에 사랑이 있고 선한 일을 행하는 곳에서는 비록 그들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지만, 익명의 교회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녀에 의하면 명시적인 교회 밖에 익명의 교회가 있다. 또 그녀는 이 익명의 교회가 명시적 교회보다 더 그리스도의 뜻에 충실한 참 교회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이 익명의 교회 개념은 교회에 대한 정당한 정의인가? 만일 익명의 교회 개념이 정당성을 지니면 교회에 대한 정의는 매우 광범위하게 확대되어야 한다. 어쩌면 가난한 노동자들을 위해 투쟁하는 노동조합도 익명의 교회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더 이상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의 공동체로 규정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밖에 존재하는 많은 선한 모임에 대해 귀하게 생각하고 신학적인 새로운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그 모임들이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 귀한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임들이 귀하다고 해서 그 모임을 교회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 신약성서가 교회에 대해 언급할 때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공동체를 생각했지 그리스도를 모르는 교회란 존재하지 않았다. 노동조합은 노동조합이지 그것이 결코 교회일 수 없다. 교회 개념을 무분별하게, 광범위하게 확대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의 공동체이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받들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2.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
한국 장로교회가 신조로 사용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5조에는 교회론에 관한 매우 중요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교회는 불가견적이다. 이 교회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모이는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로 구성된다.”
이 고백 속에는 불가견적인 교회 즉 보이지 않는 교회가 언급되어 있다. 보이지 않는 교회란 무엇인가? 이 고백에 의하면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참 교회는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만이 아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택함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의 구별은 종교개혁과 더불어 본격화되었다. 그 이유는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교회는 더 이상 하나의 교회가 되지 못하고 다수의 교회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까지 교회는 하나밖에 없었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그 단 하나의 교회였고, 누구나 인정하는 참 교회였다. 그러나 종교개혁 시대에 가톨릭의 부패로 가톨릭은 참된 교회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고 있었고 새로 등장한 개신교회도 하나의 참 교회가 되지 못하고 수많은 종파로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느 교회가 참 교회인가 하는 것은 당시에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 정신을 이어받은 개신교 속에도 수많은 배교자들이 생겨나고 있었고 도무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사람이 현실적으로 많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종교개혁자들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칼빈파 교회 혹은 루터파 교회를 참 교회라고 감히 언급할 수 없었다. 로마 가톨릭교회도 참 교회가 아니고 칼빈파 교회도 루터파 교회도 참 교회가 아니라면 어디에 참 교회가 있는가?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종교개혁자들은 옛날 초대교회 신앙의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 속에 존재하고 있었던 보이지 않는 교회 개념을 발전시켜 보이는 현실적 교회와 구별되는 참 교회로서의 보이지 않는 교회 개념을 확립시키고 신학화 하였다. 즉 참 교회는 보이는 기관이나 조직체로서의 형식적 교회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모범인데, 지상의 인간으로서는 확실히 알 수 없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지상과 천상에 존재하는 모든 선택된 무리라는 것이다. 보이는 교회 속에는 참된 신자(알곡)와 거짓 신자(쭉정이)가 혼재하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참 교회에는 거짓 신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보이는 교회는 때로는 사탄의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보이지 않는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따르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받고 영광도 받는다. 그러므로 현실적으로 보이는 교회가 부패했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참 교회가 부패한 것은 아니다. 이상과 같은 것이 루터, 칼빈, 츠빙글리 등 종교개혁자들이 가르쳤던 보이지 않는 교회의 개념이다.
그러면 이러한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의 구별은 올바른 구별인가? 이 구별은 최근의 교회론에서 매우 심각하게 비판받고 있는 구별이다.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라는 사상은 오늘날 한국교회 내에서 세례 문답을 위한 교리교육 때마다 가르쳐지는 매우 중요한 교리이지만, 사실 이 구별은 매우 심각하게 재고되어야 할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러나 우선 이 구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고치기 이전에 이 구별이 갖고 있는 장점을 먼저 언급하면 첫째, 이 구별은 제도적 교회의 활동을 신성화시키는 것을 방지하는 기능을 한다. 즉 제도적 교회의 활동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활동과 구별됨으로 말미암아 제도적 교회의 활동이 끊임없이 비판받고 검증되는 장점이 있다. 둘째, 이 구별은 제도적 교회의 부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에 용기를 갖고 계속하도록 도움을 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참으로 따르는 그곳에 참 교회가 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시작되어 루터, 칼빈, 츠빙글리 등의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확립된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의 구별은 이미 종교개혁 시대 때부터 심각한 비판에 봉착하고 있었다. 멜랑히톤(Melanchton)은 이 구별을 비판하면서 “우리가 교회를 생각할 때는 언제나 보이는 교회인 부름받은 자의 모임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바로 이 보이는 모임 이외에 다른 어떤 곳에 선택된 자들이 있으리라는 어떠한 꿈도 꾸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와 같은 멜랑히톤의 말은 교회론을 저술하는 대다수의 현대 신학자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다.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의 구별을 반대하는 현대신학자들의 관점을 정리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의 구별은 성서적이라기보다는 플라톤적이다. 즉 보이지 않는 것이 본질적이고 순결하며 영원하고, 보이는 것은 비본질적이고 부패하여 있다는 관념에 지배받고 있다.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라는 관념의 배후에는 보이는 현상계와 보이지 않는 이데아의 세계를 구별한 그리스의 철학이 존재하고 있다.
둘째, 신약성서 속의 교회는 어떤 추상적인 이념이나 추상적인 모임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보이는 역사적 실체였다. 사도들은 구체적으로 보이는 역사적 실체로서의 에베소, 빌립보, 고린도 교회를 교회라고 칭했다. 신약성서 속에는 보이지 않는 교회란 없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교회 개념은 성서를 전혀 모르는 그리스 철학의 세계관에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일 뿐이다.
셋째, 보이지 않는 교회란 세상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교회란 실체 없는 허구이고 추상적인 개념일 뿐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이 개념을 사용할 때는 제도적 교회 밖에 있을 수 있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모임을 생각하면서 사용했다. 그러나 이 제도적 교회 밖에 존재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모임 역시 보이는 가견적 실체이다. 이 구별에서 추상하고 있는 천상의 교회라는 것 역시 허구적 개념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천상에는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곳은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이며 교회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기 이전에 지상에 존재하는 잠정적 역사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를 생각할 때 언제나 구체적으로 보이는 역사적 실체를 생각해야 한다. 슐라터(A. Schlatter)는 인간들이 교회인데 이 인간들의 모임은 가견적이라고 언급했다. 본회퍼(D. Bonhoeffer)는 교회의 가견성을 특별히 강조하면서 불가견의 교회가 되려는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를 따르는 교회가 아니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평지 속에 우뚝 드러난 산이나 암흑 속의 빛처럼 가견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가견적 교회가 제도적 교회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본회퍼 시절의 독일 고백교회는 분명 제도적 교회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고백교회의 운동은 암흑 속에 빛나는 교회의 운동이었다. 비록 그것이 지하교회라 할지라도 참 교회는 암흑 속에 빛나는 구체적이고 가견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로호만(J. M. Lochman)은 영적이고 보이지 않는 교회가 참 교회라는 플라톤적 사상 때문에 교회의 세상적, 사회 윤리적, 사회 정치적 실존이 하찮은 것과 비본질적인 것으로 취급됐다고 탄식했다.
그러므로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의 구별은 세상 속에 보이지 않는 교회가 있다는 관점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그 이유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임과 활동은 가견적이기 때문이다.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의 구별은 두 개의 교회라기보다는 동일한 하나의 교회의 두 양태로 이해해야 한다. 즉 보이는 교회는 현존하는 구체적 교회를 의미하나 보이지 않는 교회는 교회의 이상적 모습 혹은 완성된 교회의 모습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럴 때 보이지 않는 교회라는 개념은 보이는 구체적 교회의 개혁의 동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보이지 않는 교회라는 개념 속에 투영된 참 교회라는 개념은 부패한 현실과 교회에 안주할 수 없다는 강한 개혁 의지가 그 핵심이기 때문이다.
3. 교회는 사건인가 제도인가?
교회의 본질은 제도나 건물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건물 속에 참 교회가 있지 않다. 세상적 조직체로서의 교회가 참 교회인 것은 아니다. 세상적 조직체로서의 교회가 부패하여 사탄의 도구가 된 적도 얼마든지 많이 있다. 하나님의 교회라기보다는 사탄의 공회당이라고 하는 것이 훨씬 더 합당한 교회도 많이 있다.
20세기 개신교 신학의 교부라고 알려진 칼 바르트(K. Barth)는 교회의 본질은 제도나 조직이 아니고 말씀의 사건이라고 정의하였다. 이 말의 뜻은 교회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인간이 그 말씀을 듣는 곳에 참 교회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말씀의 사건이란 말씀 하시는 하나님과 그 말씀을 듣는 인간이 만나는 사건을 뜻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이 응답하는 그곳에 참 교회가 있다는 것이다. 칼 바르트에 의하면 이 말씀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면 제도적 교회는 우상숭배의 단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20세기의 개신교 교회론에 매우 중요한 공헌을 남긴 에밀 브룬너(E. Brunner)는 『교회에 대한 오해』라는 저서에서 교회는 본질적으로 제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1,800여 년 동안 제도와 일치시켰다고 비판하면서 교회는 수직적으로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요 수평적으로는 그리스도를 통한 형제간의 인격적인 만남 곧 형제간의 사랑의 사귐이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바르트와 브룬너의 사건으로서의 교회 개념은 교회를 조직체로 생각하고 교권에 눈이 먼 많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참 교회가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는 좋은 공헌을 남겼다. 교회의 생명력은 교회가 갖고 있는 제도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사건과 사랑의 사건이 일어나는 것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으로서의 교회 개념은 그 개념 자체의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간과할 수 없는 후유증을 남겼다. 즉 이 개념은 무교회주의가 신학적으로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길을 터주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무교회주의란 교회가 필요 없다는 사상이라기보다는 제도적 교회가 필요 없다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본질이 말씀의 사건이라면 비록 그것이 제도적 교회 안이 아니라 할지라도 말씀의 사건이 일어나는 곳이 참 교회이므로 제도적 교회는 그 의미를 매우 많이 상실하게 된다. 더구나 제도적 교회가 불의한 정부의 앞잡이가 되거나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권 싸움으로 여념이 없을 때 무교회주의는 철저하게 정당성을 입증받게 된다.
사건으로서의 교회 개념은 교회론에 관한 유명한 책 『흩어지는 교회』를 쓴 호켄다이크(J. C. Hoekendijk)에 와서는 더욱 급진적으로 발전하여 교회는 고정된 장소가 없고 나그네로 존재한다는 유명한 말이 등장하게 되었다. 호켄다이크는 교회를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행위로 규정하면서 이 하나님의 행위는 일정한 장소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세상 도처에 떠돌아다닌다고 본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교회의 제도성은 거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참 교회는 어디 있는가? 잔디밭 위에 몇 사람이 모여 예배드리는 곳에 참 교회가 있는가? 바닷가에도 참 교회가 있는가? 교회의 제도성은 무의미하고 무교회주의가 정당한 것인가? 사건으로서의 교회 개념은 교회를 제도로 생각하는 잘못된 개념을 수정하는 데 크게 공헌했지만 매우 급진적인 새로운 신학적 문제를 일으켰다.
사건으로서의 교회 개념의 심각한 문제점을 인식한 유럽의 신학자들은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교회론의 새로운 신학적 개념을 발전시켰다. 이 교회론의 새로운 신학적 개념이 사건과 제도로서의 교회 개념이다. 이 개념은 무교회주의로까지 나갈 수 있는 교회론의 급진성을 방어하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개념이다. 그러면 이 사건과 제도로서의 교회 개념은 무엇일까?
교회의 본질은 말씀의 사건이고 사랑의 사건이다. 이것을 최근에는 성령의 사건이라고 부르고 있다. 교회는 제도가 아니고 성령에 의해 만들어지는 성령의 피조물이다(H. Küng). 그러면 교회의 제도성은 무가치한가? 무교회주의가 신학적 정당성을 갖게 되는가?
그렇지 않다. 교회의 제도성이 갖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교회의 본질은 분명 성령의 사건이다. 초대교회도 성령의 사건으로 탄생했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이 없었다면 초대교회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성령의 사건으로 탄생한 교회는 신약성서 시대 때부터 이미 제도성을 지니고 있었다.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20:28). 위의 성서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감독이라는 교회의 매우 중요한 직제가 성령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 성서 속에서 우리는 교회의 제도성에 속하는 감독, 목사, 장로, 교사 등과 같은 직제들을 살펴볼 수 있다. 그렇다면 교회의 제도성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교회의 본질은 성령의 사건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형제애를 나누고 성령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그곳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있다. 그러나 이 성령의 사건으로서의 교회는 신약성서 시대 때부터 제도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 교회의 제도성은 성령의 사건을 구현화 해 나가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즉 교회의 제도성은 성령의 사건으로서의 교회를 도와주는 구체적인 도구라는 뜻이다.
성령이 교회를 위해 감독을 세울 때는 교회를 이단으로부터 방어하고 교회를 양육하기 위함이었다. 교회의 직제는 교회가 참 교회가 되도록 도와주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이런 관점 때문에 종교개혁자 칼빈은 교회를 모든 경건한 자의 어머니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목사와 교사를 임명하여 그들의 입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가르치고 교회의 거룩성과 교회의 질서를 유지하신다고 언급하였다. 즉 목사와 교사라는 교회의 직제는 성도를 양육하고 신앙을 강화하는 데 매우 필요한 보조 수단이라는 것이다. 물론 성령께서 직접 교회를 양육하고 인도하시지만, 목사와 교사라는 인간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양육하시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제도적인 교회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말할 수 있다.
묄러(Möhler)에 의하면 우리는 2개의 극단적인 교회를 피해야 한다. 그중 첫째는 극단적인 중앙집권적인 교회관이다. 이 교회관은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가시적인 제도 속에 교회의 모든 것을 가두어 버리는 교회관이다. 이 교회관에 의하면 성령이 교회의 제도 속에 갇히게 되고 교회의 제도가 신성화되고 절대화되는 문제점이 발생한다. 둘째는 교회의 제도성을 완전히 부정하고 무교회주의로 나가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적 교회관이다. 이 교회관은 위에서 언급한 교회의 제도성이 갖는 중요한 의미를 망각하는 심각한 문제점을 초래한다.
교회의 직제와 제도는 필요하다. 그러나 교회의 직제와 제도는 언제나 성령의 활동에 봉사하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에 의하면 목사는 다만 말씀에 봉사하는 자이다. 교회의 직제나 제도가 말씀에 봉사하는 한 그것은 성령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교회는 성령의 사건이지만 동시에 제도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교회의 제도성은 한번 만들어진 것이 영원히 계속되어야 하는 그런 의미의 제도성은 아니다. 성령의 필요에 따라 있던 제도가 폐기되고 새로운 제도가 만들어질 수 있다. 교회의 제도성은 교회를 양육하고 인도하기 위한 성령의 필요에 따라 변천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성령의 사건인 동시에 제도이다.
4. 교회의 과제와 목적
마태복음 22장 34~40절에는 교회의 사명을 이해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예수의 말씀이 들어 있다. 이 예수의 말씀은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큽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성서의 정신을 요약하면 수직적 차원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 사랑과 수평적 차원이라 할 수 있는 이웃 사랑으로 요약된다. 모든 인간은 위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동시에 이웃에 대한 사랑의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이 정신은 십계명 속에도 잘 나타나 있다. 십계명 중 제1계명에서 제4계명까지는 하나님 사랑을 명하고 있고 제5계명에서 제10계명까지는 이웃 사랑을 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명백히 두 가지이다. 첫째는 수직적인 차원 곧 하나님 사랑과 관련된 교회의 과제가 있다. 교회는 하나님이 계심을 알려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을 가르쳐야 하며 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려야 한다. 이 수직적 차원과 관련된 교회의 과제로는 전도, 예배, 교육, 감사, 하나님 영광 등을 언급할 수 있다. 주일성수나 헌금 등과 관련된 성서 말씀의 핵심적 정신은 율법적인 계명 준수가 아니고 하나님 사랑이다.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는 동시에 이웃 사랑의 정신을 실천해야 한다. 이 이웃 사랑의 정신은 이웃에 대한 책임성, 역사에 대한 책임성과 직결되어 있는데 현대 교회론에서는 이 정신을 인간에 대한 교회의 책임, 정의에 대한 교회의 책임, 평화에 대한 교회의 책임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 사랑과 연관된 교회의 책임이 영적이고 종교적인 특징이 있는 반면에 이웃 사랑과 연관된 교회의 책임은 세상적이고 정치적인 현실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면 오늘의 한국교회는 교회의 과제를 무엇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먼저 언급하면 오늘의 대다수 한국교회는 수직적인 차원의 책임과 수평적인 차원의 책임을 잘 조화시키지 못하고 편향적으로 기울어져 있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일부 보수적인 교회는 교회의 세상 속에서의 빛과 소금의 책임을 간과하고 수직적 차원의 활동에만 주력하고 있다. 사회가 어떻게 변화하든지 별로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수직적인 면에만 치중하다 보니 교회의 역사적 책임에는 무능한 면을 보인다. 이런 가운데 가난한 자에 대한 책임이 영적으로 가난한 자에 대한 책임으로 설교 되어 가난한 자에 대한 사회적 경제적 책임은 탈락하고 오직 영혼 구원에 집중하는 편향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상당수의 진보적 교회는 데모를 위한 교회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정치적 현실 일면으로만 치닫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런 교회는 복음에 대한 열정, 전도에 대한 열망이 매우 약했다. 이들에게 있어서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것은 거의 의미가 없다. 오직 정치적 해방과 사회적 개혁 및 이를 위한 투쟁이 큰 의미를 지닌다.
교회는 영혼의 구원과 이웃 사랑의 정신을 동시에 구현해 나가야 할 책임이 있다. 이 두 가지 책임을 한 가지 책임으로 줄이거나 협소화 시켜서는 안 된다. 교회는 영혼의 구원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이웃 사랑의 실천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현대 교회론은 가난한 이웃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매우 중요한 교회의 과제로 부각시키고 있다. 현대 교회론이 가난한 이웃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중요하게 부각시키는 이유는 성서의 정신이 가난한 이웃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구약의 율법을 살펴보자. 가톨릭 신학자 서인석은 구약의 율법은 가난한 자를 위한 권리라고 규정했다. 이 규정은 옳다. 구약의 율법은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꾸어주면 이자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출22:24). 겉옷을 담보로 잡았을 때는 반드시 해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겉옷이 그에게는 밤의 추위를 막을 유일한 덮을 것이기 때문이다(출22:25, 26). 이상에서 구약의 율법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구약의 율법 속에서 우리는 가난한 자를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읽을 수 있다. 노예에 관한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히브리인 노예는 7년이 되면 반드시 풀어주어야 한다(출21:2~4). 함무라비 법전에는 노예는 절대로 자유의 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구약의 율법은 자유를 줄 것을 명하고 있다. 구약의 율법은 가난한 자, 권리를 잃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그 핵심적인 정신이다.
구약의 예언서 정신도 마찬가지이다. 이사야 58장 6~7절에 의하면 여호와께서 참으로 기뻐하는 금식은 주린 자에게 식물을 나눠주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는 것이었다. 가난한 자를 짓밟고 제사드리는 것은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이다.
교회는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고 그들과 연대해야 한다. 교회에는 영혼 구원의 책임과 마찬가지로 가난한 이웃을 사랑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런데 이 교회의 가난한 이웃에 대한 책임은 단순히 자선의 차원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가난한 이웃에 대한 교회의 책임은 사회 정의의 구현이라는 중요한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사회 속에 정의가 존재하지 않으면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의 한이 하늘에 사무치게 되기 때문이다.
구약의 예언서는 특별히 가난한 이웃에 대한 책임과 정의와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아모스 4장 1~2절은 정의가 사라졌을 때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고 있다. “사마리아의 산에 있는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힘 없는 자를 학대하며 가난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이를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 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도 그리하리라”
교회는 사회 속에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해야(암5:24) 할 책임이 있다. 교회가 사회 속에 정의의 구현을 위해 힘쓰는 것은 일차적으로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보호하는 책임을 감당하는 것이지만, 종국적으로 민족의 역사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망하는 것을 방지하는 교회의 역사적 책임의 중요한 일면이다.
가톨릭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일대 획기적인 방향 전환을 했는데 이때 바뀐 가톨릭의 방향이 가난한 자와 함께 하는 교회, 정의를 위한 교회라는 정신이다. 이 정신은 오랫동안 지배자와 연합되어 있던 가톨릭의 일대 전환을 의미하는 정신으로 가톨릭이 사회 속에 빛이 되는데 큰 공헌을 한 정신이다. 교회가 가난한 이웃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고 정의를 위해 일할 때 교회는 참으로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