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대 명화: 모나리자는 다 알고 있지만, 나머지 두 점은 대부분 들어본 적이 없다.
세계 명화라고 하면 바로 다빈치 모나리자를 떠올릴 텐데 이 그림의 인지도는 얼마나 될까.
소스:EK 이페어케이 플러스
동양의 진시황, 서양의 알렉산더 대왕을 뛰어넘어 동서양을 막론하고 잘 알려진 명화라는 설명이다.
앞서 우리는 예술사의 천재인 다빈치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일찍이 메디치 가문의 지원을 받아 젊은 나이에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서 유명세를 탔고, 이후 르네상스의 가장 중요한 예술가가 되어 르네상스의 3대 걸 중 하나로 불렸습니다.
서양 예술사에서 다빈치는 거인의 몸 위에 서 있는 거인이다.
모나리자라고 하면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다빈치의 그림을 누가 그릴 수 있을지 궁금해했다.
어떤 사람은 다빈치의 애인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피렌체의 유명한 유명한 기생이라고 하며, 물론 이것이 다빈치의 자화상이라는 추측이 더욱 퍼졌다.
하지만 결국 모두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밝혀졌고, 이 그림의 원형은 리사 그라디니라는 이탈리아 귀부인이었다.
물론 결국 다빈치는 의뢰인에게 이 그림을 넘기지 않고 당시 프랑스 왕에게 팔았고, 현재 40만 달러에 해당하는 4000 에구에 낙찰됐다.
현재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서 세계 4대 박물관 중 하나로 꼽히는 모나리자는 루브르 박물관의 진관(鎭館)이다.
루브르 박물관이 이 그림을 잘 보존하고 베르사유 궁전처럼 안타까운 화재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결국 집을 다시 수리할 수 있고, 예술품이 없으면 정말 없어집니다, 다빈치가 땅속에서 일어나 다시 그림을 그릴 수는 없습니다.
물론 '모나리자' 외에도 세계 3대 명화로 꼽히는 그림 두 점이 더 있다.
17세기 스페인의 가장 위대한 화가였던 '궁아'의 저자는 대부분 후대에 영향을 받은 벨라스케즈다.
따라서 벨라스케스도 스스로를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교사 중 한 명으로 자처하고 있는데, 이는 벨라스케스 스스로 허풍을 떨지 않는다는 것은 후대의 화가들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궁아'는 어떤 장면을 그린 것일까.17세기 스페인 궁정에서의 일상을 그렸다.
어린 공주 마거릿은 엄숙하면서도 감출 수 없는 앳된 모습으로 그려져 화면의 중심에 자리한다.
한 궁녀가 그에게 무릎을 꿇고 물잔을 바치는데 화면 왼쪽은 그림을 그리던 화가 자신이다.
벨라스케스는 이 극적인 줄거리에 자신을 배치해 그림 전체에 삶의 숨결과 정서가 짙게 배어 있다.
이 그림은 완성 직후 스페인 국왕 필리프 4세에 의해 서재에 보관돼 아무도 훔쳐볼 수 없게 됐고, 벨라스케스가 사망한 뒤 필리프 4세가 벨라스케스의 가슴에 붉은색 신성십자가를 그려 넣은 뒤 그림이 공개돼 신작이 됐다.
이 그림에 대해서는 첫눈에 보면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섬뜩하고 화가의 시야에 강제로 들어간 그림을 보면 이상한 시각이 더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푸코는 일찍이 《사와 사물》에서 《궁아》를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화가의 '캔버스' 자체는 '보이는 것'의 상징이지만, 캔버스가 우리를 등지고 있어 화가가 무엇을 그렸는지 보이지 않을 때 '보이는 것'의 은유가 되지만 캔버스의 등장은 그 자체로 보이는 재현이 되기 때문에 상징과 표현은 분리된다.
또 다른 명화 '야경'은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 하르만손 반 라인이 1642년 그린 천으로 된 유화 작품으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야경'에 등장하는 인물은 순찰 중인 네덜란드 도시 민병대다. 그들은 당연히 자기 도시를 지키는 직책이 있지만, 평상시에는 오늘날의 성관이나 합동방위대원과 더 유사하다. 일련의 군사 개혁 후에,모리스가 이끄는 네덜란드 육군은,스페인 대방진에 대한 일련의 승리를 거두었다.
'야경'은 그림을 완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고용주인 슈터팀 대원들이 들고 갔고, 그림이 너무 커서 현관에 걸 수 없게 되자 대원들이 스스로 주변을 잘라내면서 그림 전체의 균형을 잃었다.
또 이 그림이 걸려 있는 홀은 토탄을 피워 불을 밝히며 난방을 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연탄재가 그림 위에 두껍게 떨어져 그림 전체의 색깔이 어두워져 18세기에는 낮이었던 장면을 밤으로 착각해 야경(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후 네덜란드 왕실에 소장돼 있다가 19세기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이 설립된 뒤 소장 진품으로 보관돼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