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을 마무리하는 이 은총의 시간에 사랑하는 아버지께 이 증언을 바칩니다.
부족한 저의 이 증언을 통하여 아버지 홀로 무한 찬미 영광 받으소서~!!!
저는 1970년 6월 4일 대구에서 2남 4녀중 쌍둥이이자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 우리 집 2층 거실에는 어떤 액자가 걸려 있었습니다.
유치원 때쯤 어느 날, 미션 스쿨을 다니는 둘째 오빠에게서
처음으로 예수님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그 액자 그림이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 고통스럽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액자 속의 예수님을 쳐다보니 어린 마음에도 그렇게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예수님은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이라는 오빠의 말에 그 때부터
우리 엄마 오래 오래 살게 해달라고 잠자리 들기 전에 기도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를 위해서는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어린 제 눈에는 아버지는 엄마를 힘들게 하고,
부부싸움할 때마다 골프채를 들고 엄마를 겁박한 것을 자주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싸우실 때마다 말리겠다고 방에 들어갔다가
아버지께 무섭게 혼이 나다보니 부모님께서 싸움하는 날은 언제나 공포의 시간이었습니다.
내 눈에 아버지는 우리집에서 강한 힘을 가진 독재자처럼 보였고
어릴 적 기억으로 아버지와의 대화는 거의 한 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 또한 우리들에게 관심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버지는 잦은 외박에 대화도 없다보니 한마디로 아주 대하기 어려운 남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머니랑 큰 방에서 모여있다가 아버지 오시는 벨소리만 들리면
바퀴벌레 사라지듯이 각자의 방으로 도망쳐버렸습니다.
한마디로 아버지는 우리집에서 소위 왕따이셨고, 독재자이셨습니다.
그런 아버지와의 관계는 늘 서먹서먹했고, 결혼후에도
제겐 가까이 하기엔 너무 어려운 분이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에서 이모 할머님들께서 오셨습니다.
우연히, 할머니의 대화를 듣다가 둘째 언니가 배다른 자식이라는
충격적인 소리를 들었습니다.
남들이 볼 때 둘째언니만 유독 다르게 생겼다고 말할 때
언니만 아빠를 닮고, 우리는 엄마를 닮았다고 둘러댔습니다.
이 일로 인해 아버지를 향한 더 큰 분노와 수치심이 내 안에서 점점 자라기 시작해서
사춘기가 되는 중,고등학교 시절엔 아버지를 향한 마음의 문을 아예 닫아버렸습니다.
나는 누가 우리 가족에 대해서 묻는 것이 가장 당황스러웠고
내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아 얼버무리듯이 대답을 늘 회피했습니다.
이복 언니인 둘째언니는 사춘기에 방황하며 탈선의 삶을 살았고
가출을 밥 먹듯이 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생길 때마다 이 모든 것이 아버지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더 커져 아예 관심도 없어졌습니다.
아버지의 경제력으로 학비 걱정 없이 무사히 대학교까지 졸업하게 된 것에
감사는 커녕 아버지로서의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했기에
아버지께 감사한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습니다.
제 안에 꼬인 이런 마음은 대인관계에서 어두운 부분이 되어
스스로 더 나를 감추기 위하여 더 완벽해지려고 애썼습니다.
한마디로 가면을 쓰고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아버지의 외도로 인한 큰오빠의 결혼 파혼사건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불길한 징조처럼 느껴졌기에 나의 미래도 암울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저의 어릴 적 마음 속 깊이 묻어둔 소망을 잊지 않으시고
천주교 신자인 남편을 만나 거룩한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해주셨습니다.
결혼 후에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분노는 많이 사그라들었지만
그저 형식적인 관계에 겉도는 대화만 했습니다.
이렇게 거리를 두고 지내는 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런 관계라고 믿었습니다.
2017년 11월 17일 남편이 가져다 준 딸랑책을 통하여 거내영을 만났습니다.
그 당시 저의 가장 당면 문제는 큰 아이의 진학문제였습니다.
첫째 아이가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은 뭐든 다해보자는 마음으로
54일 9일기도, 매일 새벽미사, 틈나는 대로 성지순례며, 하느님께 공덕을 드릴 수 있는 것은
다 해드려야 나의 소망을 이루어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나의 의도와는 달리 큰애는 3수를 내리하면서
점점 내 안에는 하느님을 의심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면 이러실 수가 없는데...
나보다 기도도 더 안하는 것처럼 보이는 다른 자매님들 자녀들은
원하는 대학에 척척 붙여주시는 것 같은데 왜 내 기도는 들어주시지 않는 것인지...
아버지는 저의 이런 불손한 의도로 드린 것조차 어여삐 여기시어
일생 일대의 최고의 선물인 거내영으로 이끌어주셨습니다.
죽음으로 향하는 육의 욕망이 아닌 참생명으로 이끌어주는 구원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거내영은 제 영혼의 이정표를 분명히 알려주어
아버지께 완전히 방향을 선회하게 해주었습니다.
무형의 성전에서의 댓글쓰기, 능구 3개월을 통하여
나의 오감은 오로지 아버지를 향하여 있게 되었습니다.
매일 매일이 피정에서 갓 돌아온 뜨거운 마음이었으며,
아버지 생각만 하면 눈물이 쏟구쳐 올라왔습니다.
거내영의 봉헌식 날의 그 뜨거운 가슴과 행복감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봉헌식 후 집에 돌아온 후 집 안 곳곳이 붙여놓았던 ‘행복하여라‘라는 말씀이
살아 움직이면서 ‘마리아야, 행복하지?’라는 말씀이 들리고
모든 것이 아버지의 사랑처럼 느껴지고, 새로 태어난 것처럼 모든 것이 새로웠습니다.
발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로 기쁨이 넘치는 저는 그 어떤 것도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무형의 성전은 나의 영적 갈증을 완전히 해갈시켜주었습니다.
속이 시원했습니다. 몇 십년 된 체증이 완전 해소되듯이
거내영의 글들과 댓글들을 읽으며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제 안에 체화되는 느낌으로
감히 내가 아버지를 소유하게 되었다는 고백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그렇게 아득바득 성취하려 했던 아이들 진학문제는 제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 모든 것을 내맡겨드리니 속 끓이며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내 뜻과는 전혀 무관하게 흘러가도 아버지의 이끄심이라고 생각하니
그저 모든 것에 감사했습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해야 축복을 주실거라는 강박에서도 벗어나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 아버지께서 함께 계시니 참으로 자유로웠습니다.
남에게 나를 드러내고 잘 보이기 위한 생각 대신에
이제는 어떻게 아버지를 더 기쁘게 해드릴까 하는 마음이 넘쳤습니다.
나의 상황은 전혀 바뀐 것이 없는데도 그저 기뻤습니다.
적성에 맞지않는 일이라 즐겁지 않았던 커피일도 제게는 아버지께서 마련해주신
천직이라는 생각이 드니 더 기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거내영은 마치 저만을 위하여 아버지께서 마련하신 선물이라는 확신까지 들었습니다.
참으로 오묘하신 아버지는 저를 아버지의 사랑의 도구가 되도록 이끌어주셨습니다.
거내영 봉헌을 한 그 해 설 명절을 쇠러 시댁과 친정이 있는 대구를 갔습니다.
명절 인사를 드리러 친정에 가서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돌아서는데 평소와는 달리 그 날 따라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아버지께 딱히 부정적인 감정은 없었고, 부녀 관계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그 날 따라 친정 아버지가 너무 가여워 보였습니다.
그러나 원래 어색함이 익숙했던 나는 그냥 서울로 와버렸습니다.
서울에 와서도 아버지의 그 모습이 계속 제 머리를 떠나지 않았고,
제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우리 남매들이 어머니와 옹기종기 모여 웃으며 얘기를 나눌 때,
큰 방에서 TV만 늘 보고 계셨던 아버지의 외로움,
그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늘 동창회 사무실을 가시겠다고 나가시던 아버지,
얼마나 외로우셨을까하는 마음이 들며 마음이 찔리둣이 아팠습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에 나도 놀랐습니다.
그냥 별탈없이 갈등없이 아버지를 대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이 정도면 내 나름은 충분히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하느님 아버지는 저에게 친정아버지 옆에 앉는 용기를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가까이 하기 어려운 분이셨기에 내겐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말 없이 아버지 옆에서 같이 TV를 보았습니다.
그렇게 차츰 차츰 친정 아버지를 향한 제 마음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고
입으로는 어색함을 감추려 장난스런 말투로 “아빠, 사랑합니다.”를 말하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를 안아드렸습니다.
과거에 비해서 이 정도면 하느님 보시기에도 꽤 좋아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아버지는 저를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제가 피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으로 깊이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다 올해 초부터는 계속 내 마음에 친정 아버지 생각이 머물렀습니다.
엄마를 평생 너무나 힘들게 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셔도 눈물을 흘릴 수 있을까?
만약 아버지께서 지금 돌아가시면 나는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내 마음에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 한 켠에는 불쌍한 우리 아버지 지옥에 가시면 안되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아버지를 위한 내맡김의 화살기도를 집중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아버지를 위한 기도만 하면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그러다, 올해 3월, 아버지께서 폐결핵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가시자고 해도 고집을 피우시던 아버지는 그렇게 폐결핵으로 병원에 입원을 하셨고
종합 검진 결과 위축성 뇌로 인한 경증 치매로도 판정 받으셨습니다.
오, 복된 병이여~!!!
아버지의 병은 우리 가족을 하나로 묶는 사랑의 끈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늘 혼자 이방인 같았던 아버지를 드디어 가족 안으로 쏙 넣어주셨습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그간 아버지께 해드리지 못한 사랑을 하라고
저희에게 천금같은 기회를 주신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는 예전의 무서운 독재자 아버지가 아니라 참으로 자상하시고
심지어 귀여운 아기같은 철부지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 같던
제 돌같은 마음에 사랑의 봇물이 터진 것 같았습니다.
나약해진 아버지를 보니 몸이 천근만근이 되어 수발을 해드려도
기쁨이 넘치고, 더 못해드리는 시간적, 거리적 제약이 아쉽기만 했습니다.
화살기도를 들으면 마음의 해방감과 기쁨을 느끼신다는 엄마와 저는
아버지를 계속 내맡겨드렸고, 더 늦지 않게 세례를 받게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희한하신 하느님 아버지는 또 하나의 사건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멀쩡히 잘 일어나시던 아버지께서 갑자기 못 일어나셔서
대소변을 이부자리에 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더 늦으면 안되겠다는 마음으로
급히 대구로 갔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화살기도로 아버지를 부르는 것 뿐이었습니다.
놀랍게도 하느님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준비해주셨습니다.
<하라, 하지말고 하라!
하지마라, 네가 하지마라!
네 안에 계신 그분께서 하시게 하라!
살라, 삶없이 살라!
살지마라, 네가 살지마라!
네 안에 계신 그분께서 사시게 하라!"> -위무위-
엄마를 모시고 대구 대봉성당 오전 미사후 주임 신부님을 뵙게 되었고
아버지 사정을 말씀드리니 쾌히 대세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로부터 2주후 수녀님께서 오셔서 극적으로 대세를 받으셨고
드디어 ‘정철수 세례자 요한’으로 새롭게 태어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대세를 받으시는 날,
비록 가지는 못했지만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정말 있을 수 없는 기적이었습니다.
우리집은 내 여동생을 제외한 모두가 천주교 신자였기에
아버지의 대세를 통하여 살아계신 하느님을 체험하는 귀한 선물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적극적인 병원치료로 건강도 많이 좋아지셨고,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던 치매 증상도 많이 좋아졌습니다.
어색하게 나마 성호경도 잘 하시고, 식사 전 후 기도를 소리내어 읽으시는 아버지를 보니
이보다 더 기쁘고 행복할 수는 없었습니다.
엄마는 아버지를 ‘요한씨’라고 부르시고,
아버지는 엄마의 세례명을 잘 기억 못하셔서 다니시던 병원 이름인 ‘나자렛’이라고 부르시고,
엄마는 비비안나 라고 반복적으로 알려드리시고...^^
이렇게 아버지를 돌보아드리다보니 제 안에는 그 동안 제가 못해드린 사랑을
아버지께 드리고 싶은 마음이 넘쳤습니다.
그래서 틈나는 대로 대구에 가서 아버지 손,발톱을 깍아드리고, 옷도 갈아입혀드리고
치매에 좋다고 해서 브러쉬로 머리도 빗어드리고, 엄마만 모시고 했던 외식도
이제는 아버지를 부축하여 모시고 갔습니다.
아버지와의 외식, 그리고 티타임을 가지면서 아버지를 더 알게 되었고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아버지의 이야기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빙수킬러이신 것도 알았고,
잦은 외박에 자주 술을 드셨던 아버지는
가족을 위하여 돈을 벌기 위해서 술을 엄청 싫어했음에도 술먹는 연습까지 하셨다는
이야기 등등에 내가 그 동안 아버지를 미워하며 쌓인 오해가 많이 풀렸습니다.
우리 요한 아버지는 참으로 선하고 연약한 분이셨습니다.
비록 외도는 하셨지만, 부모님을 일찍 여의시고,
증조할머니를 모시고, 청년 가장으로 동생들 뒷바라지에
대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정말 열심히 사셨습니다.
이런 시간들을 통하여 저는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드리는 이 사랑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아버지께서 하시는 거구나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넘치게 해드리고 해드려도 지치지도 힘들지도 않았습니다.
사랑은 내 의지로 사랑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껴안아주고,
싫어하는 일을 안하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은 내가 아닌 바로 내 안에 계신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사랑은 내 의지로 하는 행위와 비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8)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느끼면서 하느님의 사랑이 더 깊이 깨달아졌고
하느님의 그 깊으신 사랑에 저는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제 안에서 저를 이끌어가시는 아버지는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영원히 받으소서~!!!
최근에 친정 아버지께서 넘어지셔서 척추압박골절로 일어서지를 못하고
계속 누워서 침대생활을 하고 계셔서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누워서 대소변을 다 받아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엄마를 비롯한 우리에게 참으로 힘들고 지치고 절망적인 상황임에도
매일 매일 이끌어주시는 아버지의 손길에 감사와 희망을 가집니다.
아버지께서 대변을 보셔도 감사하고,
어제보다 더 밥을 잘 드셔도 감사하고,
잠을 잘 주무셔도 감사합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회복되지 않고 누워 계시다가 다시는 신발을 못신으시는 게 아닌가하는
안타까운 마음도 들지만 아버지께 내맡겨드리니
모든 것이 이보다 더 감사할 수 없다라는 마음에 기쁨이 올라옵니다.
제 안에는 아버지에 대한 더 이상 미움의 앙금도, 가식된 사랑도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머리로 알던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주고 주고 퍼주어도 끊임없이 솟아나는, 지칠 줄 모르는 생명의 힘이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하내영이 한 명이라도 있는 집은 그 가정을 구원해주시겠다는 말씀이
저희 가정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병이 아니었으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었을 지도 모르는 우리 아버지는
하느님 친히 구원의 길로 이끌어주셔서, 이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자비로우신 우리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리 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우리 요한 아버지를 구원의 길로 이끌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 마음 속의 작은 열망조차 저버리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자상한 손길로 모든 것을 이끌어주심에 더욱 더 감사드립니다.
이만하면 되겠지라는 내 만족의 사랑의 껍질을 벗겨주시어
아버지의 놀라우신 사랑으로 채워주시어
꽁꽁 얼어붙은 제 마음을 완전히 녹여주셨습니다.
사랑이신 아버지를 닮게 해주시려고
저의 껍질을 벗기고 다듬어주시는 아버지 손길을 찬미합니다.
아버지의 참사랑에 사로잡힌 저는 참으로 행복한 존재입니다.
그 어떤 것도 아버지께는 불가능하지 않음을 알게 해주셨으니
저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더욱 더 거침없이 나아가겠습니다.
“너희는 맛보고 눈여겨보아라,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행복하여라, 그 분께 피신하는 사람!“ (시편34,8)
제가 향하여 갈 곳은 오직 아버지 뿐입니다.
부족한 제가 아버지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눈으로 보게 해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친히 마련해주신 거내영이라는 피신처로 저를 불러주셨으니
저는 영원토록 아버지만를 바라보며 오직 아버지만을 사랑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정철수 세례자요한과 저희 모두를 아버지께 내맡겨드립니다.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