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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 애거서 크리스티
1. 초대받은 사람들
요즘 현직에서 물러난 워그레이브 판사는 일등 흡연차 구석에 앉아 담
배를 피우며 타임즈의 정치 기사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신문을 내려놓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기차는 서머셋을 달
리고 있었다. 그는 시계를 보았다――앞으로 두 시간이다.
판사는 인디언 섬에 대해 신문에 난 모든 기사를 마음속으로 되새겼다.
요트를 좋아하는 미국인 부호가 섬을 사들여 이곳 데븐셔 바닷가 가까
운 섬에 사치스러운 근대적인 저택을 세웠다는 게 첫번째 기사였다.
그런데 미국인 부호의 세번째 아내가 뱃멀미를 심하게 해서 섬과 저택
을 팔려고 내놓았다. 사람의 눈길을 끄는 광고가 몇차례 났다. 그리고 오
윈이라는 사람이 사들였다는 짤막한 기사가 실렸다. 그로부터 여러 가지
소문이 일기 시작했다.
인디언 섬을 산 사람은 헐리우드 영화배우 게이브리얼 털 양이다! 그녀
는 1년 가운데 몇 달 동안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 섬에서 살려고 한다!
<소문난 참새>난 필자는 어떤 고귀한 사람의 별장으로 팔렸다고 했다.
<기상대>난은 신혼여행 때문이라고 썼다. 젊은 L경이 마침내 큐피트의
화살을 맞았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조너스>는 확실한 정보라고 하며 해
군 본부가 샀다고 전했다. 극비에 속하는 실험을 하기 위해서라고. 확실
히 인디언 섬은 큰 뉴스거리였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주머니에서 한 통의 편지를 꺼냈다. 거의 글자를 알
아보기 어려운 필적이었으나, 군데군데 뜻밖으로 여겨질 만큼 명확히 알
수 있는 글귀가 있었다.
그리운 로런스님……당신의 소식을 듣지 못한 때로부터 오랜 세월……
꼭 인디언 섬에……참으로 아름다운 곳에서……이야기 하고 싶은 게 잔
뜩……아쉬웠던 옛날 일을……자연과 벗하여……햇빛을 받으면서……패
딩턴 역을 12시 40분……오크브리지에서 기다렸다가……그리고 보낸 이
는 <당신의 콘스턴스 캘민턴>이라고 아름다운 필적으로 서명되어 있었
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콘스턴스 캘민턴 부인과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
였던가 회상했다.
7년 아니, 8년도 더 된 옛날 일이었다. 그때 그녀는 일광욕을 하며 자
연과 농촌을 즐기기 위해 이탈리아로 여행하려던 참이었다. 그 뒤 그녀는
다시 흠뻑 일광욕하고 자연과 유목민과 친숙해지기 위해 시리아로 갔다
고 한다.
확실히 콘스턴스 캘민턴은 섬을 사들여 수수께끼 같은 생활을 할 만한
여자였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자기가 내린 결론에 스스로 만족하며 머리를 떨어
뜨렸다. 그는 잠자기 시작했다.
다른 다섯 승객과 함께 삼등차에 타고 있던 베러 크레이슨은 머리를
뒤로 기대로 눈을 감았다.
기차로 여행하기에는 무척 더운 날이다. 바다에 닿으면 얼마나 기분 좋
을까. 참으로 이번 일자리를 얻게 된 것은 굉장한 행운이다. 휴가 기간의
일이란 대부분 많은 어린이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비서 일은 거의 없었
다. 직업소개소에 부탁해도 어려웠다.
그런 중에 편지가 왔던 것이다.
――당신 이름을 직업소개소에서 듣고, 또 추천장도 받았습니다. 직업
소개소에서는 당신을 잘 알고 소개하여 준 것으로 생각합니다.
당신이 바라는 급료로, 8월 8일부터 일해 주기 바랍니다. 패딩턴 역을
12시 40분에 떠나는 기차를 타고 오면, 오크브리지 역으로 마중나가겠습
니다. 여비와 그 밖의 비용으로 5파운드 함께 보냅니다.
유너 낸시 오윈
편지 윗머리에 데븐셔 주 스티클헤이븐 인디언 섬이라는 소인이 찍혀
있었다.
인디언 섬! 요즘 자주 신문에 나고 있는 섬이다. 여러 가지 소문이 나
돌았지만, 어느 것이나 모두 걷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저택은
틀림없이 어떤 부호에 의해 세워져 호사스럽기 이를 데 없다고들 떠들어
대고 있다.
고된 교사 근무로 지쳐 있던 베러 크레이슨은 늘 생각했다.
(삼류 학교 교사로 있어 봐야 볕들 날이 없다. 좀더 좋은 학교로 옮겨
갈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노라면 언제나 서글픔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 학교에 있게 된 것만도 다행이야. 검시관의 심문을 받았다
는 사실이 어딜 가나 걸리적거리거든. 비록 검시관이 무죄 판결을 내렸다
해도!)
그녀는 검시관으로부터 침착한 태도와 용기를 칭찬받았던 일을 생각해
냈다. 검시관으로부터 심문받은 자가 이토록 유리한 판정을 받은 일은 전
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해밀턴 부인도 그녀에게 친절했다. 단 유고만
이――.
(그러나 이제 유고는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아!)
기차 안이 찌는 듯 가운데도 베러는 갑자기 몸을 떨면서 바다에 가는
것을 그만두는 게 좋을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그때의 일이 뚜렷하게 그녀 마음속에 떠올라 왔다. 시릴의 머리가 떴다
가라앉았다 하면서 바위 쪽으로 헤엄쳐 가고 있다. 떴다 가라앉았다――
떴다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녀 자신은 정확한 수영법으로 그 뒤를 헤엄치
고 있다――물을 가르고 나아간다,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느끼며…….
바다, 그 깊고 따뜻함이 감도는 푸르름――모래 위에 함께 나란히 누워
지내던 아침. 유고――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한 유고……아니, 유고를 생
각해선 안 된다.
베러는 눈을 뜨고 마주앉아 있는 남자의 얼굴을 흘끗 바라보왔다. 푸르
스름한 얼굴, 엷은 빛깔의 눈. 키가 크고 입 언저리가 몹시 냉혹해 보일
만큼 뻔뻔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녀는 가만히 생각했다.
(늘 여행하며 여러 가지 재미나는 경험을 가진 남자임에 틀림없어.)
필립 롬버드는 마주앉은 아가씨를 흘끗 보고 생각했다.
(꽤 매력있군. 어쩐지 여선생 같은 데가 있는데. 아마도 쌀쌀한 마음을
지녔을 거야.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는 여자다――사랑에 있어서도,
싸움에 있어서도. 친구가 될 수 있다면 재미있겠는데…….)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안 돼.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돼. 일이다. 일에
정신을 집중시켜야 한다.
대체 어떤 일일까, 하고 그는 다시 생각했다. 모리스는 참으로 수수께
끼 같은 말을 했다.
「자네가 승낙하든 않든 나는 어느편이나 좋네, 롬버드 대위.」
롬버드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1백 기니라고?」
1백 기니의 돈쯤 그리 큰 건 아니라고 투로 그는 물었다. 식사도 충분
히 할 수 없을 만큼 어려웠던 때의 1백 기니! 그러나 그는 모리스를 속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돈 때문에 모리스에게 거짓말할 수는 도저히 없었
다.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롬버드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물었다.
「그 이상 자세한 것은 말할 수 없나?」
아이적 모리스는 조그만 대머리를 옆으로 저었다.
「말할 수 없네. 롬버드 대위. 지금 이야기한 것만으로 결정해 주기 바
라네. 이 일을 나에게 의뢰한 사람은, 자네가 만일의 경우 힘이 될 수 있
는 사나이는 것을 잘 알고 있네.
자네가 데븐셔 주 스티클헤이븐으로 가기를 승낙하면, 나는 자네에게 1
백 기니를 주게 되어 있네. 가장 가까운 역은 오크브리지고, 마중나온 자
가 그곳에서 스티클헤이븐까지 데리고 가 다시 모터 보트로 인디언 섬에
실어다 줄 거야. 그곳에서 자네는 나에게 의뢰한 사람에게 몸을 맡기면
되네.」
롬버드는 불쑥 물었다.
「기간은?」
「무슨 일이 있어도 1주일을 넘지 않네.」
조그만 입수염을 비틀며 롬버드 대위는 말했다.
「올바르지 않은 일이라면 손대지 않겠네.」
그는 말하면서 상대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모리스는 두터운 입술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리며 신중하게 대답했다.
「만일 옳지 않은 일을 요구받으면, 언제든지 돌아와도 좋아.」
한마디 말로는 듣지 않는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모리스는 미소지었다.
롬버드의 지난날 행동이 언제나 정직하지마는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웃음이었다.
롬버드 자신도 입술을 조금 벌리고 엷게 웃었다. 확실히 자기는 한두
차례 위험한 다리를 건넌 일이 있다. 그러나 언제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
고 끝났다.
비록 옳지 못한 일이라도 그리 마음에 꺼려 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아니, 오히려 위험한 다리를 건너 보고 싶다. 그는 인디언 섬에 재미있는
일이 기다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미스 에밀리 브랜트는 언제나처럼 몸을 꼿꼿이 하고 금연차 안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65살, 기차 안에서 기분나는 대로 떠들어대는 일에는 단연코 반
대였다. 옛스러운 풍속을 중히 여기는 대령이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예의
범절에 엄격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버릇이 없어. 기차 안에서의 예절이나
그 밖의 여러 가지 의미에서도.
에밀리는 자기가 옳다고 믿는 주장을 굳게 갖고, 붐비는 삼등차에 꼿꼿
이 앉아 불쾌함과 더위를 꾹 참고 있었다.
요즘 사람들은 누구나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떠들어댄다! 이를 뺄 때는
주사를 요구한다,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약을 먹는다, 언제나 부드러운 의
자며 쿠션을 바라고, 여자 아이들은 예의없이 행동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
게 여기며, 여름이 되면 벌거벗은 거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바닷가에서 뒹
군다.
이러한 모든 일이 못마땅하여 에밀리의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스스로 모범을 보이려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지난해 여름 휴가를 생각했다. 그러나 올해는 사정이 달라졌다.
인디언 섬. 그녀는 이미 몇 번이나 본 편지를 다시 한 번 읽었다.
미스 브랜트님.
나를 기억하실는지요. 우리들은 여러 해 전 8월, 벨헤이븐의 바닷가 호
텔에서 함께 서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했었습니다.
나는 지금 데븐셔 주에 있는 인디언 섬에서 가족적인 그룹을 만들려고
합니다. 간단하고도 맛있는 식사와 예의바른 조용한 손님을 모토로 하고
싶습니다. 필요 이상 몸을 드러낸다든지, 밤늦게까지 축음기를 트는 사람
은 이곳에 오지 않습니다.
만일 당신이 올 여름 휴가를 인디언 섬에서 지내 주신다면 그보다 더
한 기쁨이 없겠습니다. 물론 나의 손님으로 와주시므로 비용은 필요없습
니다. 8월 첫무렵이면 어떻겠습니까? 8일에 오시면 좋겠습니다만.
당신의 성실한
UN
몇 번이나 읽었을까. 몹시 알아보기 힘든 글씨다. 에밀리 브랜트는 초
조해 하며 생각했다.
(요즘은 읽을 수 없는 서명을 하는 이가 많아 곤란해.)
그녀는 벨헤이븐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떠올려 보았다. 두 해 여름동안
계속 그곳에 있었다. 분명 중년 여성이 하나 있었다. 그녀의 이름이 무엇
이었더라. 아버지는 지위높은 승정이었다. 미스 올턴, 오먼이었던가? 아
니, 틀림없이 올리버였다. 그렇다. 올리버다.
인디언 섬! 요즘 인디언 섬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가 신문에 나고 있
다. 영화배우가 어떻게 했다던가――아니, 미국의 부호였는지도 몰라. 물
론 이런 곳에 매우 싸게 손에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섬은 누구에게나 알
맞은 게 아니다. 처음에는 낭만적으로 여겨져 사들이지만 살다 보면 불편
한 점이 많아 다시 내놓는 수가 많다.
에밀리 브랜트는 생각했다.
(어쨌든 공짜로 휴가를 즐길 수 있는 거야.)
수입이 줄어들어 꼭 써야 할 데에도 쓰지 못하는 형편에 참으로 귀가
솔깃한 이야기였다. 다만 그녀――미스 올리버였다고 생각되지만, 그녀에
대해 좀더 생각해 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매커스 장군은 차창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기차가 갈아탈 엑서터 역에
닿을 무렵이었다. 아무래도 지선의 기차는 느려서 못마땅해. 거리로 오면,
인디언 섬과 코와 눈 사이다.
그는 오윈이라는 사나이가 어떤 인물인지 머리 속에 뚜렷이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스푸프 레이거드의 벗이고, 조니 다이어의 친구임에는 틀림
없지만.
――각하의 옛 친구도 보실 수 있습니다――옛이야기를 나눌 것을 하
나의 즐거움으로 아시고…….
아무튼 옛이야기는 나쁘지 않다. 요즘은 사람들이 애써 그를 피하려 하
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것은 모두 저 가시돋친 소문 때문이다! 벌써
30년 전 일인데도. 아마 아미테이지가 지껄인 것이겠지.
지독한 녀석이다! 뭘 알고 있다고. 그러나 마음아파 해도 아무 쓸데없
다. 사람은 마음에 두지 않아도 좋을 일을 마음에 둔다. 이상한 눈초리로
보게 되면 아무것도 아닌 일까지 마음꺼려 한다.
인디언 섬은 그도 가보고 싶다고 여겼던 곳이었다. 여러 가지 소문이
나돌고 있다. 해군, 공군, 육군이 손에 넣었다는 이야기가 뿌리도 잎도 없
는 터무니없는 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미국의 젊은 부호 엘머 롭슨이 저택을 세웠다는 것은 사실이다. 많은
건축비가 들었다 한다. 온갖 사치스러운 시설을 다했다는 것이다.
엑서터! 여기서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는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한시 빨리 목적지에 닿고 싶었다.
암스트롱 의사는 모리스를 타고 솔즈버리 평야를 달리고 있었다. 그는
지쳐 있었다. 오늘날의 명성을 얻기까지의 생애가 이 같은 피로를 가져다
준 것이다.
예전에 할리 거리의 진료실에서 흰 가운을 입고, 최신식 기구의 호화로
운 시설에 둘러싸여 성공이냐 실패냐의 두 갈래 길을 걷고 있었던 시대
가 있었다.
결국 그는 성공했다. 운이 좋았던 것이다. 물론 솜씨도 훌륭했다. 그러
나 의사로서 성공하려면 솜씨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운도 필요했다. 그는
그 운을 붙잡은 것이다.
올바른 진단, 부인 환자로부터 감사를 받았다. 재산과 지위가 있는 부
인 환자로부터. 그리고 소문이 퍼졌다.
「암스트롱에게 보이면 좋아. 아직 젊지만 참으로 착실한 의사지. 팸은
오랫동안 여러 의사에게 보여 왔었는데, 그 의사는 단 한 번에 병의 원인
을 밝혀 냈어요!」
마침내 공은 구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암스트롱 의사는 자신이 바라던 것을 이루었다. 병원은 사람으로 붐볐
다. 거의 쉴 틈도 없었다.
며칠 동안 런던을 떠나 세븐셔 바닷가의 섬에서 8월의 더위를 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휴가라고 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
가 받은 편지로는 웬지 확실한 것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함께 들어 있는 수표는 의심할 나위 없는 현실이었다. 더욱이
생각지도 못한 액수였다. 오윈이라는 사람은 돈이 남아도는 인물임에 틀
림없다. 아내의 건강을 염려하는 남편이, 아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진찰
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신경이――.
신경! 의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부인 환자에게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의사로서는 이런 환자가 가장 힘들다. 진찰을 받는 부인은 몸의
이상은 조금도 없고, 다만 무료할 뿐이다. 그러나 명확하게 그대로 이야
기하면 그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가 병을 발견하는 것은 덧없
는 일이다.
「좀 이상은 있습니다만――.」
여기서 길고 어려운 이름을 들어 병명을 이야기하고는 다시 말을 잇는
다.
「그러나 대단치는 않습니다. 이대로 두면 안 됩니다만, 뭐, 처방은 간
단하지요.」
약은 신념을 되찾는 수단이다. 더욱이 그의 태도는 상대방에게 신뢰감
을 더해 주었다. 희망과 신념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10년――아니, 15년 전 사건 뒤에 그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
던 것은 운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한때는 다시 일어설 수 없다고 생각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분발했다. 술도 끊었다. 참으로 위험한 고비였
다.
갑자기 고막이 터질 듯한 경적이 들리고 스포츠 경기용 자동차 댈메인
이 시속 80마일쯤의 속력으로 그를 앞질렀다. 암스트롱 의사는 하마터면
길가 울타리에 자동차를 처박을 뻔했다.
예사롭게 난폭한 운전을 하는 젊은이임에 틀림없다. 의사는 그런 젊은
난폭자가 싫었다. 하마터면 자동차를 길가 울타리에 처박을 뻔했지 않은
가. 참으로 싫은 녀석이다!
앤터니 머스틴은 자동차를 달려 미어로 들어가며 생각했다.
(어째서 느릿느릿 달리는 자동차가 많은 것일까? 방해되어 참을 수 없
어. 더욱이 그런 차들일수록 도로 한가운데를 달리고 있단 말이야! 아무
튼 영국에서는 자동차 여행을 할 수가 없어. 프랑스 같지 않아.
여기서 자동차를 멈추고 목을 축일까, 이대로 앞으로 달려나갈까. 아직
시간은 넉넉하다. 앞으로 1백 마일 조금 더 남았다. 진과 진저 맥주를 마
시고 가자. 아주 더운 날이니까!
그 섬의 저택은 틀림없이 유쾌할 거야. 날씨만 좋다면. 그건 그렇고, 오
윈 부부는 어떤 사람일까? 아마도 돈은 있으나 그리 유쾌하지는 않은 인
간들이겠지.)
배저는 그런 사람들을 잘 냄새맡는 것이 특기다. 물론 그 자신은 돈이
없으므로 그런 사람을 잡지 않으면 안 되지만…….
어떻든 술만은 흠뻑 마시고 싶다. 돈은 벌었지만 쓰는 방법을 모르는
인간이다. 게이브리얼 털이 인디언 섬을 샀다던 이야기가 소문에 지나지
않는 게 유감스럽다. 영화배우와 벗하여 노는 것은 재미있는 일임에 틀림
없는데. 거기에 젊은 아가씨가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그와는 호텔을 나와 몸을 쭉 펴고 기지개를 켠 뒤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보고 댈메인에 올라탔다. 아가씨 몇 명이 그의 모습을 부러운 듯 쳐다보
고 있다. 균형잡힌 6피트의 몸집, 좀 짧은 고수머리, 햇볕에 그을린 얼굴,
깊이 있는 푸른 눈.
그는 자동차를 출발시켜 좁은 길을 맹렬한 속도로 달려갔다. 노인과 소
년이 놀라서 길을 비켰다. 소년은 달려가는 자동차를 부러운 듯 바라보았
다.
앤터니 머스턴은 승리에 찬 개선장군처럼 자동차로 달려가고 있었다.
블로어는 플리머스에서 오는 느린 열차에 타고 있었다. 그말고는 눈이
흐린 점원 같은 노인이 타고 있을 뿐이었다. 노인은 지금 잠들어 있었다.
블로어는 조그만 수첩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그는 혼자말을 했다.
「이게 모두다. 에밀리 브랜드, 베러 크레이슨, 암스트롱 의사, 앤터니
머스턴, 워그레이브 판사, 필립 롬버드, 매커서 장군, 하인 로저스 부부.」
그는 수첩을 덮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한구석에서 자고 있는 노인
을 바라보았다.
블로어는 생각했다.
(취해 있군.)
그는 마음속으로 빠진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면밀히 생각했다. 그는 자
신에게 말했다.
「문제없는 일이야.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괴이하지만 않으면 되는
거지.」
그는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거울에 비친 얼굴에 입수염을 기른 어딘
지 군인 같은 모습이 남아 있다. 표정은 거의 없었다. 눈동자는 회색이고
눈과 눈 사이가 굉장히 좁았다.
블로어는 말했다.
「소령으로 보아 줄까? 아니, 잊었었군. 늙은 장군이 있었지. 금방 꿰뚫
어 볼 거야. 역시 남아프리카 좋아. 남아프리카에 관련된 이는 하나도 없
고, 나는 여행 안내서를 읽었으니 어떤 이야기든 할 수 있거든.」
다행히도 식민지 사람에는 여러 타입이 있다. 남아프리카에서 사업을
하던 사나이로 해두면 어떤 이들 속에 섞여 들어도 의심받을 리 없다.
인디언 섬. 그는 소년 시절에 인디언 섬을 알고 있었다. 바위투성이 섬
으로 갈매기가 가득 모여 있었다. 바닷가로부터 1마일쯤 되는 거리였다.
그 이름의 유래는 사람 머리를 닮아 있는 데서 나왔다. 미국 인디언의 옆
얼굴과 비슷했던 것이다.
그 섬에 저택을 짓다니 괴상한 취미를 가진 사람도 있군! 바다가 거칠
어지면 지독한 곳이다. 그러나 돈 많은 부자 가운데에는 괴상한 사람이
많은 법이다.
구석의 노인이 눈을 뜨고 말했다.
「바다는 알 수 없어――알 수 있는 게 아니지!」
블로어는 화난 사람을 달래듯 말했다.
「그렇소. 알 수 없지요.」
노인은 두 번이나 딸꾹질하고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태풍이 올 거야.」
「그럴 리 없소. 이토록 날씨가 좋은데!」
노인은 성난 듯 말했다.
「틀림없이 태풍이 올 거요. 나는 알고 있소.」
블로어는 거스르지 않고 말했다.
「어쩌면 당신 말대로일지도 모르지요.」
기차가 역에 닿자 노인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여기서 내려야지.」
그는 손을 떨며 창가를 더듬거렸다. 블로어가 그의 몸을 부축해 주었
다.
노인은 통로에 서서 위엄있게 한손을 들고 흐릿한 눈을 깜박거리고 있
다가 말했다.
「기도해야 돼. 기도해야지. 심판의 날이 가까이 왔도다.」
노인은 플랫폼에 떨어져 넘어졌다. 그리고 넘어진 채 블로어를 쳐다보
며 감격어린 투로 말했다.
「자네에게 말하는 걸세, 젊은 양반. 심판의 날이 바로 옆까지 와 있네.
」
블로어는 자리로 돌아왔다.
(자기 쪽이 심판의 날에 가까이 다가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블로어의 생각은 틀려 있었다.
첫댓글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