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성을 몹시도 뜨겁고 열렬하게 사랑하는 청년이 있었다. 그녀를 볼 때마다 그의 마음은 기쁨과 희망으로 설레었다. 그는 그녀를 자신의 완벽한 짝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몸살을 앓을 정도로 사랑에 깊이 매료된 사람이 있다면 다름 아닌 바로 그였다. 그 어떤 형용사도 그의 사랑을 묘사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잠시도 사랑의 마음을 전하지 않고서는 못 배길 정도였던 그는 선물을 사주고,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고, 노래를 하고, 춤을 추고, 요리를 하고, 꽃을 따다 주었을 뿐 아니라 종종 인간의 언어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끼면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말로 사랑을 표현했다. 그의 사랑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흘러나왔다.
그 여성도 그를 사랑했다. 사실, 그녀는 그를 몹시 흠모하고 있었다. 그녀는 때로 그가 건네는 말과 선물, 사랑의 기쁨을 담아낸 창조적인 표현들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기쁘게 받아들였다. 물론, 그녀도 나름대로 자신의 감정을 전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명절을 제외하고는 선물을 하는 법이 없었다. 또, 그림이나 노래나 춤이나 시나 요리로 사랑을 표현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표현수단은 단지 ‘말’ 뿐이었다.
물론, 그런 식으로 관계를 맺는다고 해서 사랑이 없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의사표현 방식이다. 남자는 목소리, 재능, 시각적인 창조성, 섬김의 행동과 같은 표현방법을 통해 사랑의 마음을 전했고, 여자는 말이라는 한 가지 방법만을 사용했을 뿐이다.
이런 관계는 공평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하나님과 그런 식으로 관계를 맺는다. 하나님은 주변 사람은 물론, 그림, 상징, 음악, 풍경, 맛, 자연의 소리, 풀과 나무의 냄새, 향기, 빗물, 부드러운 미풍, 파도 등을 통해 우리에게 사랑을 표현하신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할까? 단조롭게도 대개 아침이나 저녁에 잠시 갖는 경건의 시간이 고작이다. 또 말 외에 다른 표현수단을 사용하는 법도 거의 없다.
물론, 우리의 말은 진심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다양한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하시는 하나님과 비교할 때, 말은 단지 일차원적인 방법에 불과할 뿐이다. 말만으로는 사랑을 표현하기에 턱 없이 부족하다.
하나님이 성경의 인물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어떤 식으로 표현하셨는지 생각해 보자. 하나님은 꿈과 환상은 물론, 사람들의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셨다. 노아에게는 무지개로, 야곱에게는 환상 속의 사다리로, 모세에게는 불붙은 가시떨기로, 이스라엘에게는 언약궤와 성막으로, 다윗에게는 골리앗이라는 거인으로, 솔로몬과 그의 연인에게는 결혼으로, 이사야에게는 가족으로, 예레미야에게는 무화과로, 에스겔에게는 마른 뼈로, 호세아에게는 아내로, 요나에게는 박 넝쿨로, 스가랴와 요한에게는 말 탄 사람들로, 하나님은 스스로를 드러내셨다.
하나님의 음성도 우레 소리, 폭포 소리. 노래 소리, 바람 소리, 불길이 이는 소리, 부드럽게 속삭이는 소리와 같은 다양한 형식을 취했다. 또한, 하나님은 향기, 소리, 감축, 맛 등 우리의 감각을 자극할 수 있는 수단을 사용하셨다.
참 사랑이나 진정한 감정은 억제할 수 없다. 말만으로는 사랑의 감정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 우리는 교회라는 집단적인 차원에서 음악과 의식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데는 제법 능숙하다.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참 사랑은 억누를 수 없으며, 수많은 방법으로 표출된다. 참 사랑은 창조적인 성격을 지닌다.
이런 창조적인 기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우선 이 책에 사용된 단어들의 의미를 분명히 밝혀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우선, “창조적”이라는 말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창조행위를 뜻하지 않는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바라”와 “아사”라는 두 단어로 묘사한다. “바라”는 무로부터 유를 창조하는 행위를 뜻한다. 즉, 인간이나 다른 피조물은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창조행위를 뜻한다. 인간은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다. 다만 하나님의 사역에 협력할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창조를 기원하는 기도사역을 통해 창조사역에 동참할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하신다.
한편, “아사”는 기존의 재료를 이용해서 새로운 것을 만드는 행위를 가리킨다. 창세기 1장을 예로 들어보자.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고(바라), 궁창과 태양과 달과 별들을 만드셨다(아사), 하나님은 칠 일째 되던 날에 모든 창조사역(바라와 아사)을 마치시고 안식하셨다(창 2:3). 번역 성경의 경우에는 이 두 단어가 마치 상호호환이 가능한 듯이 “바라”를 “만들다”로 “아사”를 “창조하다”로 번역하기도 한다. 하지만 두 단어의 의미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인간은 “바라”의 뜻을 지닌 창조행위를 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책에 사용된 “창조적”이라는 말은 “아사”의 의미에 국한된다. 다시 말해, 이 말은 “예술적이고, 독창적이며, 비전과 상상력이 뛰어난”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인간을 신격화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 내가 이 책에서 사용하는 “창조적” 또는 “창조하다”는 말은 현대에 흔히 사용하는 뜻을 따른 것이다.
“기도”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구하는 행위를 기도로 생각한다. 물론, 기도에는 그런 의미가 포함된다. 하지만 넓게 보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시하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도 모두 기도에 해당한다. 이 책에서 기도는 하나님과 서로 주고받는 대화를 가리킨다. 하나님과의 대화는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창조적인 기도 생활”이다.
나는 앞으로 이 책에서 인간의 창의성을 폭넓게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 좀더 창조적인 표현을 사용하라는데 그치지 않는다. 창조적이고 다양한 표현, 즉 하나님이 허락하신 모든 능력과 재능을 다해 하나님과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길을 보여주려 한다. 위에서 말한 대로, 한 여성과 열애에 빠진 청년은 자신의 사랑을 말로만 표현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런 사랑을 우리와 나누고 싶어 하신다.
하나님의 언어로 기도하라
크리스 티그린 저. 조계광 역.
생명의 말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