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 하나님의 말씀 VS 역사적 산물
기독교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2,000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성경의 절대성에 대한 비판과 의문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교회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용납하지 않았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지켰고 경전(canon)으로서의 위치를 잃지 않았다. 긴 기독교의 역사에서 성경의 경전성은 대체로 지켜졌다.
하지만 근대 이후에 성경이 역사적 산물이라는 견해가 대두되었다. 과거에는 소수의 사람들이 부분적으로만 성경의 경전성에 대해 회의를 가졌다. 그러던 것이 현대로 오면서 성경의 경전성에 대해 어느 때보다 강하게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오늘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혹은 역사적 산물인지에 대한 논쟁은 상당히 진행되었다.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교인들에게 이 논쟁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1. 계시종교
현대로 접어들면서 기독교는 여러 가지 도전과 어려움에 봉착했다.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기독교 안과 밖에서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교인들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다. 하지만 근래에는 기독교 내부에서조차 성경이 역사적 산물이라는 인식이 상당히 커졌다. 요즘은 일반 교인들도 성경에 대한 경외심이 높지 않다. 성경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무언중에 성경책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교회에는 공동으로 사용하는 성경책이 있다. 우리가 어릴 때만 해도 교인들은 성경책을 사용하거나 정리할 때 경건한 마음으로 대했다. 요즘은 장년부터 주일학교 어린이까지 성경책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친구들과 장난을 치며 성경책을 던지기도 하고, 컵라면을 익힐 때 눌러놓기도 하면서 아무렇게나 대한다.
21세기에 기독교가 직면한 가장 큰 위협은 성경의 ‘권위’에 대한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상실하면, 기독교는 기독교로 존재하지 못한다. 기독교에서 성경의 ‘권위’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이 ‘권위’라는 말에 거부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성경과 연관해서 말하는 ‘권위’는 흔히 말하는 힘에 의한 권력이나 교회의 고압적인 자세와는 상관이 없는 용어이다. 성경의 권위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절대성에 대한 권위를 뜻한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가진다는 의미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지금까지 기독교에 대한 다양한 공격과 비판이 있었다. 기독교는 그런 도전에 대해 다양하게 반응을 했다. 때로는 외부적인 비판을 거부하기도 하고, 때로는 비판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기독교는 성경의 권위에 대해서는 결코 양보하지 않았다. 가톨릭교회, 동방정교회, 개신교 모두 이 부분에 대해서는 유사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개신교는 다양한 종파에 따라 강조하는 교리에 차이가 있다. 또 진보적인 교파와 보수적인 교파에 따라서도 교리에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성경의 권위에 대해서는 개혁교회, 루터교회, 감리교회와 같은 대표적인 개신교 교파뿐만 아니라, 성공회, 침례교회, 오순절교회도 이구동성으로 분명한 입장을 취한다. 물론 어느 교파든지 그 교파에 속한 목회자나 신자 중에는 성경이 역사적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아직까지는 개인적인 주장이고 공식적인 견해는 아니다. 기독교의 각 교파는 공식적으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입장을 여전히 견지하고 있다. 기독교가 성경의 경전성에 대해 왜 이렇게 양보할 수 없는 강경한 입장을 가지는지 살펴보자.
기독교가 성경의 권위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기독교가 ‘계시’(啓示)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계시는 ‘열어서 보여준다’라는 의미로,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해 준다는 말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계시해 준 것을 받아들이는 종교이다. 그 하나님의 뜻이 기록된 것이 다름 아닌 성경이다. 따라서 인간은 오직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기독교의 절대적인 경전의 위치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를 계시의 종교 혹은 경전의 종교라고 부를 수 있다.
모든 종교, 철학, 이념은 ‘진리’에 대한 나름의 체계와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드러내는 ‘계시’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의 기준이 된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성경으로 집약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이 진리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진리의 근거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진리 체계는 인간이 어디 가서 진리를 찾아오는 구조가 아니다. 인간이 ‘이것이 진리다!’라고 제시할 수 없다. 인간이 스스로 깨닫거나, 자신의 힘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기독교는 진리를 성경에서 찾는다. 진리는 언제나 성경에 근거해서 그 타당성을 검증받는다. 바로 이 점이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독특성이다. 계시종교의 특징을 가진 기독교는 자기 해탈을 추구하는 불교와 완전히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불교는 인격적 신 개념이 약하고, 오히려 모든 중생이 각성(覺性)을 통해 열반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또 기독교는 자연종교와도 정반대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자연종교는 인간이 이성이나 자연을 통해 신에게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성을 통해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입장은 이신론(理神論)으로 발전했고, 자연을 통해 신을 발견하려는 입장은 범신론(汎神論)으로 나타났다. 이신론은 철학의 형태에서 많이 보이고, 범신론은 원시종교로부터 다양한 종교의 형태에서 발견된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기독교가 다른 종교나 철학과 구별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성경의 경전성 때문이다. 기독교는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경전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한다는 것은 기독교의 토대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를 상실한다면 성경이 더 이상 진리의 근거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점에서 성경의 중요성은 절대적이다. 성경이 경전으로서의 가치를 잃으면 기독교는 더 이상 설 곳이 없어진다.
현대에 와서 기독교에 도전을 주는 많은 주제들이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주제보다도 먼저 성경의 경전성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한다면, 그 어떤 신학적인 주제도 논할 여지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성경을 역사적 산물이나 문학적 작품이라고 본다면, 성경은 절대적 가치를 상실하고 만다. 그렇다면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근거도 상실하게 된다. 성경이라는 근본적인 텍스트가 흔들리면 여기에 바탕을 둔 어떤 주제에 관해서든 논의하는 것이 무의미해질 것이다.
2. 경전성에 대한 의문
“성경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가?” 이런 의문은 기독교 역사에서 언제나 있었다. 어느 사회에나 괴짜도 있고, 조금 엉뚱한 사람도 있는 법이다. 기독교가 국교인 기독교 국가에서도 성경에 대한 비판은 있었다. 하지만 성경에 대한 이런 의문은 대체로 개인적이었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겨도 될 정도였다. 16세기의 종교개혁처럼 강력한 개혁운동도 교회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지 결코 성경의 권위에 대해 대적하지는 않았다. 기독교 내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개혁운동은 성경대로 행하지 못하는 교회에 대한 불만에서 일어났다. 기독교 내에서 성경의 권위를 의심해서 일어난 운동은 없었다.
그런데 17~18세기, 유럽 사상사에 큰 영향을 미친 계몽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그 후 인간의 사회는 계몽주의 이전과 확연히 달라지는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계몽주의가 전 유럽으로 확산되면서 인간의 이성이 강조되고, 이성에 바탕을 둔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이 보편화되었다. 이 시기가 되면서 유럽에서 대학 교육이 아주 활기를 띠게 되었다. 무엇보다 자연과학이 획기적인 발전을 하고, 인문과학 분야에서도 역사학을 위시한 다양한 학문의 분과가 생겨났다.
계몽주의를 거쳐 현대로 오면서 기독교도 큰 변화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기독교의 주요 교리에 대해 많은 논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예수님의 기적, 부활, 동정녀 탄생, 성령의 신성(神性), 성경무오설 등이 주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논쟁의 근저에는 성경의 경전성이 놓여 있었다. 왜냐하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고한 위치를 가질 수 있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기적이나 부활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성경이 절대성을 상실하고 역사적 산물로 간주된다면, 성경의 모든 내용도 절대성을 잃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는 성경의 절대성에 대해 있는 힘을 다해 권위를 지키려 애썼던 것이다.
하지만 계몽주의를 거쳐 현대로 오면서 과거와 달리 성경의 권위는 상처를 받게 된다. 기독교 내부에서 성경을 역사적 산물로 보려는 입장이 상당히 힘을 얻게 된 것이다. 사실 기독교 외부에서 성경에 대한 공격을 해와도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타 종교에서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에서는 타 종교인이나 종교가 없는 사람들을 선교의 대상으로 생각했다. 그들이 성경을 비난해도 ‘잘 몰라서 그렇다’라고 생각하고 더욱 전도에 열심을 내었다. 원래 기독교는 외부의 압박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주님을 위한 핍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태도가 선교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고, 때로는 기독교 본연의 정신을 왜곡시키기도 했다. 하여튼 역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는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공격에 의해 위기를 맞이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기독교 내부의 공격이다. 원래 내부에서 일어나는 혼란이 대처하기가 더 어려운 법이다. 신학교로부터 시작해서 교회의 일반 신자까지 성경을 역사적 산물로 보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는 신학을 전문으로 하는 신학자와 일반 신자 모두에게 일어난 현상이다.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이 이런 분위기가 확산되는 데 크게 영향을 미쳤다. 20세기가 되면서 신정통주의 신학의 등장으로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력이 줄어들지만, 성경을 역사적 산물로 보는 주장은 갈수록 강화되는 상황이다.
이런 이야기가 한국 교회의 교인들에게는 좀 의아하게 들릴지 모른다.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신학의 흐름에 대해 관심이 적은 교인들은 이 말이 오히려 혼란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다 해도, 성경의 권위는 이미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도 어쩔 수 없이 이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일반 교인들도 반드시 알아야 할 주제인 것이다.
이제 왜 성경의 경전성이 의심받게 되는지를 살펴보자. 성경의 경전성에 대한 논쟁과 같은 큰 사건은 어떤 하나의 이유 때문에 나타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얽혀 시대의 흐름이라는 큰 변화와 함께 나타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이유 중에서 성경의 경전성에 가장 큰 타격을 준 두 가지 원인을 살펴보자. 이 두 가지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발전하였다.
첫째, ‘과거’에 대한 이해의 능력이 증대하면서 성경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게 되었다. 근대가 되면서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발전으로 우주, 자연, 인류, 그리고 지나간 과거에 대해 더 많은 이해를 하게 되었다. 많은 유적들이 발견되면서 지나간 시대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선조들이 어떤 옷을 입고, 무엇을 고민하며, 뭘 좋아하며 살았는지 더 많이 알게 된 것이다. 계몽주의 이후 물리학, 화학, 지질학, 고고학 등 자연과학의 발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이해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자연과학은 인류의 과거 발자취뿐만 아니라, 연구의 범위와 폭을 점점 넓혀갔다. 심지어 지구의 탄생과 우주의 형성에까지 접근하였다. 인류가 어떻게 출현했는지 연구하고, 생명 자체가 어떻게 탄생했는지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였다.
인문과학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역사학, 교육학, 경제학, 사회학, 심리학 등이 학문의 새로운 분과로 나타나면서 철학을 중심으로 발전된 인문과학 분야가 완전히 재편되었다. 이 중에서도 역사학의 발전은 정신사적으로 큰 영향을 미쳐 역사학이 인문과학 분야에서 중요한 분과로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과거 역사에 대한 관심과 함께 역사적 자료를 통해 과거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실제로 다양한 학문의 발전과 함께 인간과 이 세계에 대한 이해가 놀라울 만큼 증진되었다. 지나간 역사를 일정한 관점에서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다양한 사관(史觀)들이 나타났다. 과거에 대한 사료(史料)만 있으면, 과거에 접근하고 재현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이런 움직임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확신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근대로 들어서면서 인간은 정말 자신에 차 있었다.
여러 학문의 발전은 신학 연구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 영향으로 성경이 형성되고 교회가 처음 형성되던 당시의 사회와 경제적 상황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되었다. 성경을 구성하는 자료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형성되었는지 활발한 연구가 일어났다. 네 복음서가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날의 형태로 확정되었는지에 대한 다양한 학설도 제시되었다. 네 복음서는 완전한 형태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여러 조각의 말씀들이 전승 과정을 거치며 완성되었다는 이론이 점차 확산되었다. 그러면서 상당수의 신학자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금 성경에 대한 다양한 비평학을 소개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실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즉 성경의 형성에 대한 다양한 접근과 연구의 결과가 성경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성경도 결국 하나의 역사적 산물’이라는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다.
근대에 시작되어 현대로 오면서 성경에 대한 다양한 역사 비평학이 봇물 터지듯 나타났다. 역사 비평학을 전개하는 모든 학자들이 성경을 역사적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 비평학의 결과는 성경을 역사적 산물로 간주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지금은 성서학을 연구하는 상당수의 신학자들이 성경을 역사적인 ‘텍스트’로 보고 연구를 하고 있다. 신학교에서도 역사 비평학을 기본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역사 비평학의 효용성이나 장단점을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은연중에 일반 교인들도 성경을 역사적 산물로 보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둘째, 다양한 분야에서 자료를 대하는 ‘해석학’(解釋學)이 성경 해석에 영향을 미쳤다. 역사학 분야에서 과거의 자료를 대하고 해석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이 나타났다. 역사가의 주관성이 개입되지 않고 어떻게 과거를 객관적으로 대할 수 있는지에 대한 주제도 중요한 논쟁점이었다. 또 역사적 자료에 대한 ‘의미’도 중요한 논의를 거치게 되었다. 단순히 자료를 발굴하는 차원을 넘어, 그 자료가 주는 역사적 의미를 어떻게 파악할지도 중요한 문제였다. 문학이나 철학에서도 해석학은 중요한 분야가 되었다. 과거에는 시를 해석할 때 오직 저자의 의도를 찾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그러나 이제는 저자의 의도뿐만 아니라, 텍스트를 해석하는 독자의 반응과 권한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시나 소설에 있어 저자가 해석의 권한을 독점할 수 없다는 인식인 것이다. 시나 소설이 대중에게 노출된 이후에는 그 시와 소설에 대한 해석이 공공성에 맡겨진다는 발상이다. 이런 생각은 참으로 획기적인 것이었다. 철학에서도 텍스트로부터 의미를 추구하는 다양한 이론이 발전되었다. 지금은 포스트모던과 해체주의를 거치면서 문자와 의미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고 있다.
해석학의 발전은 성경 해석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성경은 원래 ‘본문’이 중요하기 때문에 교회의 역사에서 해석학의 역할이 중요했다. 하지만 근대 이전의 성경 해석학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전제 위에서 행해졌다. 즉 성경의 원문을 찾는 작업, 성경의 내용을 영적으로 해석하는 방법, 비유나 우화로 해석하는 방법 등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성경을 하나의 ‘텍스트’로 보는 학문적 조류가 대세를 이루게 되자, 성경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학의 방법을 적용하게 되었다. 때로는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성경 해석학이 다른 일반 해석학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근대 이전에 비해 신학자들의 숫자도 늘어나고, 신학자들의 신학적 경향도 다양해졌다. 따라서 상당수의 신학자들이 역사, 문학, 철학, 심리학 등에서 나타난 해석학의 주요 방법들을 성경에도 적용하게 되었다.
지금은 성경에 어떤 해석학을 적용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 차이는 있지만, 성경을 근대적 방법으로 해석하는 것에는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드디어 인간이 성경 해석의 주체가 된 것이다. ‘인간’이 성경을 해석할 때 어떤 방법을 적용할지를 결정한다. 이 결정에 따라 성경은 다르게 해석된다. 그리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두려움은 점차 옅어지게 된다.
위에서 언급한, 성경을 역사적 자료로 보는 시각과 해석학의 방법들은 함께 발전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이 약해진 것이다. 19세기에서 시작되어 20세기로 넘어오기까지 유럽의 많은 기독교 국가에서 성경의 경전성에 대한 강력한 문제 제기가 일어났다. 당시 많은 기독교인들은 당황했지만, 이런 시대적 조류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랐다. 당시 개신교 정통주의는 성경의 경전성에 대해 적절한 신학적 대응을 하지 못하였다. 역사 비평학과 일부 해석학의 방법에 대해서 반대는 하였지만, 무엇이 문제인지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개신교 정통주의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교리적 입장만 반복하였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정신 속에서 이런 고백적 선언만으로는 교인들에게 충분한 설득력을 주지 못하였다. 따라서 유럽의 교회들이 이 시기에 공신력을 많이 상실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19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면서 유럽 교회의 교인들이 많이 줄게 된 것이다. 그 후 지금까지 유럽의 기독교는 예전의 활기를 되찾지 못하고 있다. 유럽의 교회들이 당시 다양한 시대적 도전들 앞에서 적절한 응답을 하지 못한 것이 주된 이유였다. 성경의 경전성에 대한 도전에 충분하게 대응하지 못한 것이 중요한 이유 중이 하나였다. 성경의 경전성이 의심받는 상황에서, 교회의 권위를 지키기 위한 시도나 교리에 대한 수호는 우스꽝스러운 것이었다.
이제 한국 교회에서도 성경의 경전성에 대한 회의가 다양한 모양으로 확산되고 있다. 급격한 시대정신의 변화 앞에서 성경의 경전성이 의심받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교인들에게 ‘무조건 믿어라’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는 동안, 교인들은 실망하고 교회를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