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 익숙하되 어려운 단어
당사자 면접. 이따금 국회의사당역을 지나며 보던 장애인 인권 시위 현장이 떠오르는 단어다. 커다란 피켓과 팜플렛에 적혀 있는 문장이 지금도 생생하다.
우리의 힘은 전문성이 아닌 당사자성에 있다
복지는 결국 그 복지혜택을 받을 당사자가 제일 잘 알 것이니 복지를 기획하고 실천하는 데에 있어 당사자를 배제해선 안 된다는 것을 불과 몇 개월 전에 배웠다. 지난 봄학기 장애인복지론 수업을 들으며 자꾸만 시선이 쏠리곤 했던 그 시위에 이어, 이번엔 실천 현장에서 마주한 단어가 반갑고도 신기했다.
다만 나는 지금껏 당사자 면접을 받아본 적이 없으니 긴장이 되는 것은 별수 없었다. 인터넷 화상 면접에서도 덜덜 떨려 배와 입꼬리에 힘을 주었으나, 처음 맞이하는 형태의 면접은 어떻게 이겨내야할지 막막했다.
제 나름 새하얀 머릿속에서 답변을 끄집어내며 성실히 참여하려 노력했고, 누구도 나무라는 사람이 없어 이내는 추억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끝에 와서, 결국 따스한 면접관님들에게 '선생님, 얼굴이 너무 빨개졌어요. 릴랙스, 릴랙스!' 하는 반 놀림조의 걱정을 듣고 말았다.
공간을 메꾸는 웃음소리
본디 길을 잘 헤메는 성정인지라 여유있게 시간을 잡고 면접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교통 상황이 순조로워 무려 30분이 넘게 일찍 도착하고 말았다. 빼꼼 고개를 들이미니 면접장에선 때마침 면접준비가 한창이었다. 복지사 선생님이 한 분, 중학생뿐 아니라 어린이들까지 복작복작한 공간은 하나의 쉼터이자 놀이장 같았다. 밖에 세워두거나 조금 이따 방문해줄 수 있겠냐 묻는 대신 안쪽에서 기다려달라며 문을 활짝 열어준 친절한 면접관님들. 마치 시험 문제를 미리 봐버린 기분으로 면접 책상 저 뒤쪽에 붙어 시간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아이들은 제각기 자신만의 질문을 준비하는 듯싶었고, 서로 자기가 먼저 생각한 질문이니 네가 바꾸라는둥, 이름표를 더 예쁘게 만들거라는둥 일상적이고 활달한 내용의 대화가 오갔다. 활기가 가득했다.
정적이고 긴장만이 가득한 일반 사회의 것과는 비교되는, 내가 찾아간 면접장은 온통 웃음바다였다.
옮아오는 아이들의 순수함
면접을 준비하는 기간이 있었는데, 예상 질문을 꼽지 않았다 말할 수 없다. 어떻게 하면 나를 어필할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며 나의 장점들을 나열했다. 나의 조곤조곤하고 차분한 말씨, 경청과 공감에 최적화된 MBTI, 국어교육원에서 단기지만 교정교열 알바를 뛴 경력도 있으니, 중학생 친구들 중 국어를 어려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공부 방법을 알려줄 수도 있을 것이고… 하지만 면접관들이 건네는 질문은 내 상상을 초월했다.
좋아하는 색이 뭔가요, 최근에 봤던 애니메이션이 있나요, 요즘 중학생들은 뭐하고 노는지 아시나요, 평소 뭘하며 시간을 보내시나요, 취미는 뭔가요, 좋아하는 머리스타일은 뭔가요, 요즘 가장 힘든 일은 무엇인가요…
어쩌면 허를 찌른 질문일 수도 있겠다. 지금까지 건너왔던 자소서와 면접 이력이 쓸모 없어지는 질문들이었다. 나름 원하는 인재상과 원하는 답이 정해져 있는 취업 질문과는 달리 아이들은 내 장점이 아닌 나, '김하은'에 대해 물어왔다. 졸업반인 만큼 근래 토익 공부, 기타 자격증, 알바 등에 시간을 할애하며 평소 좋아하는 글쓰기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실정이었다. 나는 답변을 하며 천천히 '나'를 다시 되새길 수 있었다.
나는 보라색을 좋아하고, 근래엔 애니메이션보단 웹툰을 보고, 멍때리기를 좋아하지만 울적할 땐 손을 많이 움직일 수 있는 종이접기를 하고, 글쓰기와 피아노를 좋아하고… 집안에서도 슬슬 내 앞가림할 나이가 되었다며 큰딸 김하은으로 자리매김한 지금은 누구도 묻지 않는 부분들이다.
아이들의 질문은 나를 평가하기보단 나와 친해지기 위한 수단처럼 보였다. 자기 자신을 소개하고, 친구가 소개할 적에 친구가 말 안 한 특징과 취향을 한마디씩 더 얹고, 서로 웃고 떠들며 나를 대화 사이에 끌어다놓았다. 나와 공통점이 있으면 좋아하고, 우린 잘 맞는 거 같다며 거들었다.
당사자 면접은, 간만에 내가 맛보았던 순수한 사교장이었다.
한 사람의 친구로서
근래 <복지요결>과 EBS 다큐를 보며 선행연구를 하고 있다. 결국 사회복지사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지역사회를 잇되 주체가 행동하도록 돕는 사람, 그저 돕는 사람이었다. 무심코 머릿속에 그려넣었던 여행 계획 속 나는 아이들을 내가 기획한 안대로 어떻게 설득할까 고민을 했던 것도 같다. 주체가 내가 되지 않도록, 내가 가르치고 이끄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보조하는 위치임을 잊지 않되, 아이들에게 즐거운 추억을 심어줄 수 있는 친구가 되고 싶다.
말걸기 편하고, 어렵지 않은 상대. 더 나아가 도움을 요청하고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까지 발전하기엔 이 한 달은 너무 짧은 기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들이 편견이나 꾸밈없이 '나'를 궁금해하고 손을 뻗어준 것처럼, 나도 미적미적거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아이들과 소통하고자 한다. 아이들이 다가와줬으니 나도 다가간다면 우리들의 교집합은 빠르게 커질 수 있지 않을까.
이제 막 입구 앞에 선 상황임에도, 나는 까마득함보다는 따스함과 기대를 느끼고 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실습은 나에게 좋은 시간과 경험이 될 것이라는 조짐임에 틀림이 없다.
첫댓글 하은 선생님 빠르게 글 써줘서 고맙습니다.
와 하은 선생님 글 진짜 잘쓰네요!
'당사자' 이번 여름은 자주 사용할테니 익숙해질거예요^^
선행연구도 잘 부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