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복입은 영웅이 존경받는 나라 만들겠다."
박민식 국가보훈부장관 인터뷰
올해는 6·25 정전(휴전) 70주년이자 한미동맹 70주년으로 꺾어지는 의미 있는 한 해다. 윤석열 정부 출범이후 지난 10년간 여러 가지 이유로 해이된 국방과 안보 의식 을 다잡는 정책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한미 동맹이 기축이 어 꽉 막혔던 한일 관계 에 물꼬가 터졌고, 이어 한미일 삼각관계가 정상화 었다. 이 극적인 분위기 전의 한가운데에 결단의 리더십을 보인 윤석열 대통령이 자리매김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 같은 분위기 변화의 흐름을 타고 조용히 그러나 바쁘게 움직인 또 한 사람이 있다. 지난 6월 5일로 국가보 훈처를 국가보훈부로 승격시킨 초대 박민식 장관(57)이 바로 그 사람이다. 물론 보훈부 승격은 윤대통령의 공약 이고 정부 직제를 고쳐야 하는 정부 차원의 일이지만, 입법권을 전횡하는 민주당의 국회를 통과하기란 여간 어 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뚝심 으로 야당을 설득하고 국민 공감대를 이끌어 냈다. 박장관은 강하게 말한다. “보훈에는 여·야가 없고 진보·보수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보훈이 정치에 흔들리 면 나라가 흔들립니다. 보훈 정책이야 말로 보수,진보 진영으로 갈라진 망국 적인 갈등과 분열을 치유할 국민통합 의 기제입니다”. 이같은 그의 확고한 인식과 철학, 그리고 통합의 리더십이 어느 정부를 막론하고 필요성을 인 정하면서도 손을 선뜻 대지 못한 “보 훈부 승격”을 이루어 내는 바탕이 되 었다. 보훈에 대한 그의 철학도 확고하다. “대한민국을 자랑스런 나라로 만들 려면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영 웅들을 기억하고 제대로 대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의 보훈 정책 캐 치프레이즈는 “영웅을 기억하는 나 라”다. 이 한마디에 모든 것이 함축되 어 있다. 그의 사무실 책상 뒤에는 이 한마디가 적혀 있는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다. 출입할 때마다 한 번씩 되 뇌이며 마음을 다잡는다. 지난 6월 25일 6·25전쟁 73주년을 맞아 전쟁 참전 노병들에게 “영웅 제 복”을 입혀 드린 것도 그의 아이디어 였다. “말로만 영웅이 아니라 본인들 이 실감할 정도로 대접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한미 동맹 70주년 을 기념해 제작한 ‘6·25 참전 용사 10 대 영웅’ 영상을 뉴욕 맨하탄 타임스 퀘어 전광판에 상영한 것도 그의 작 품이다. 한미연합사령부와 공동으로 선정한 10대 영웅에는 백선엽 장군, 맥아더 장군 등이 포함되었는데 30초 의 동영상에 담긴 메시지는 바로 ‘피 로 맺은 동맹의 중요성과 영웅들의 희생과 헌신에 대한 감사‘다. “오늘날
우리 모두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번 영, 그리고 평화는 먼 곳에서 달려온 참전 용사 여러분들의 희생 덕분이다. 한국전 영웅들의 희생과 헌신을 영원 히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박장관이 심혈을 기울여 온 중요 한 것 중 하나가 “보훈문화”를 우리 생활에 확산, 정착시키는 일이다. ‘보 훈’을 어느 날 국립현충원에 가서 머 리를 숙이는 제사 정도로 생각해서 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미국 수도 워 싱턴DC에 갔을 때 알링턴 국립묘지 에 관광객들이 몰리고 일반 시민들이 가족 단위로 찾는 것을 목격하고 솔 직히 부러웠다”고 밝힌 박장관은
“우리의 동작동 국립묘지도 그렇게 되어 야 한다”고 강조했다. 많은 이들이 주 말에 가족과 손잡고 국립묘지를 찾아 ‘이 분들이 목숨을 바쳐 지금의 우리 가 있구나’라고 느끼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박장관은 지난 6월 15일 국가보훈부 승격 첫 보훈정책 설명회 를 개최하고 포부를 밝혔다. 그는 제 일 먼저 “서울 현충원을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처럼 모든 시민이 365일 쉽 게 즐겨 찾는 대한민국 호국 보훈의 성지로 재창조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서울 현충원, 용산 호국보훈공 원,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호국 역사 벨트를 조성해 국가의 품격을 높이는 세계적 명소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국가보훈부는 ‘서울현충원 재창 조 자문위원회’를 설치해 국민여론조 사 등을 거쳐 기본 구상을 확정할 계 획이다. 또 보훈부는 ‘국민이 하나되는 보 훈, 다시 도약하는 대한민국’ 비전 아래 보훈문화 조성·확산을 위한 정책 연구를 수행할 독립기관으로 ‘보훈정 책개발원’ 설립을 추진한다. 그리고 5 대 중점과제로 ▲국민생활 속 보훈문 화 조성 ▲영웅에 대한 최고의 예우 ▲경제적 보훈 안전망 구축 ▲고품격 보훈의료체계로 도약 ▲국제사회에 자유의 가치 확산 등을 선정했다. 이밖에 천안 목천에 있는 독립기념 관의 전시·교육·연구 업무를 강화하 고, 아직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해 외 안장 독립유공자의 유해봉환을 추 진할 계획이다. 또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의 묘소를 올해 광 복절에 즈음해 서울 현충원 독립유공 자 묘역에 부부 합장묘 형태로 복원 할 계획이다. 박장관의 보훈에 대한 열정은 그의 태생에서 비롯된다. 그 자신이 보훈 가족이다. 부친 박순유 중령은 1972 년6월 베트남전에서 전사했다. 당시 일곱 살이었던 박장관은 ‘아비 없는 자식’이라든가, ‘불쌍한 아이’라고 주 위로부터 동정을 받으며 자랐다. 어 머니는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친 자랑 스런 군인의 아들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훈육했다. 나이가 들면서 ‘나 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에게는 국 가가 그만한 대접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같은 경험과 생각이 지금의 보훈정책의 뿌 리가 되었다. 원호대상이었던 아이가 커서 보훈부 장관이 되었으니 어찌 보면 운명이다. 박장관의 경력을 보면 화려하면서 도 이색적이다. 외교관→ 검사→ 변호사 → 국회의원을 거친 그의 공직 경력은 그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말해준다. 서 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외무 고시(1988년)와 사법시험(1993년), 이 른바 고시 양과를 패스했다. 자기 적 성에 맞지 않았던 외교관 생활 5년을 과감히 접고 사법시험을 거쳐 검사의 길에 들어선다. 특수통 검사로 활약 하면서 법조계(신건), 외교부(임동원) 대선배를 구속시키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어찌나 직선적으로 일했던지 그 때 얻은 별명이 ‘불도저 검사’였다. 국 회의원 시절에는 계파 수장이나 당론 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소신에 따른 목소리를 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주 위에서 ‘혼자 튀는 정치인’이라고 지 적을 받을 정도로 ‘소신파’였다. 윤석열 정부에 보훈처장으로 참여 한 후에는 그의 행정능력이 시험대 에 올랐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바탕 한 보훈 철학을 주위에 설파했다. “제 복의 영웅이 대접받아야 한다”라든가 “한 나라의 국격은 나라를 위해 목숨 을 받친 영웅들을 어떻게 대접하느냐 에 달려 있다”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강조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보훈부 직원들로부터 는 ‘보훈 전도사’, ‘보훈에 미친 분’이 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다. 이 같은 보 훈을 향한 그의 열정과 뚝심이 보훈 부 승격이라는 결과를 빚어낸 것이다. 그는 “젊은 세대에게 대한민국은 정 말 자랑스럽고 자부심을 가질만한 나 라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싶은 것이 나의 꿈”이라고 했다.
“영웅을 기억하는 나라 만들고 싶어요” 박민식 장관의 취임 일성에 기대를 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