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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시문집 제18권 / 서(書) / 한혜보에게 답함
‘국화를 읊은 시’의 서문(序文)은 거칠고 졸렬하여 부끄럽습니다. 좀 훌륭한 작품이 있으면 바꿔야겠습니다.
오늘 저녁에 남고(南皐)의 형제 및 주신(周臣 이유수(李儒修)의 자)과 이숙(邇淑) 등이 모두 모이기로 약속을 하였으니 형도 와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국화 확분이 3~4매가 새로 늘어났고 꽃잎도 다시 무성해졌습니다.
이릉(二陵 소릉(少陵)과 대릉(大陵), 즉 이정운(李鼎運)ㆍ권엄(權𧟓)ㆍ오대익(吳大益) 등이 살던 곳)의 여러 노인들이 흉내내고자 합니다만, 제 국화 화분이 5~6개에 불과하니 어찌합니까. 3~4집의 것을 합한다면 10여 매는 될 수 있겠지만 어찌 우리 집의 국화만하겠습니까? 눈에 차지 않습니다.
ⓒ 한국고전번역원 | 박석무 (역) | 1986
答韓徯父
菊影詩序。蕪拙可愧。如有盛作當易之。今夕南臯兄弟及周臣邇叔之等皆已留約。兄亦不可不來觀也。菊盆三四枚。新有所增。花葉更茂耳。二陵諸老 聞欲效顰。其奈菊盆不過五六。若三四家合從。可得十餘枚。安能當吾家影也。冷眼不熱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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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一集詩文集第十六卷○文集 / 墓誌銘 / 南臯尹參議墓誌銘
昔在先朝甲寅之秋九月中旬。南臯尹公携友五六人。登白雲臺絶頂。歗傲詠歌。旁若無人。鏞實與焉。歸而設菊影之燭於竹欄書屋。會者八九人。南臯主盟。酒旣酣。各爲詩數十。唯聲調之激烈而不求其餘。先仲氏巽菴先生及韓徯父,蔡邇叔,尹无咎諸人。咸推公爲詞伯。每作一篇。公曼聲朗誦。曲折瀏亮。四座寂默。唯公之聲是聽。當是時樊翁居相府。
大陵少陵宰輔林立。
而年之未艾者。又追隨會集。風流醞藉。有足稱述。誠蔚然一盛也。越六年己未春。樊翁捐館舍。厥明年夏。先大王升遐。厥明年辛酉春禍作。鏞謫長鬐。凡與鏞有交好者。莫不橫離誤陷。草薙禽獮。以議收司之律。肖翹含生之倫。莫不惴惴栗栗。懼抵機辟。公乃以此時寄詩于長鬐。謫中曰。巖阿散髮劃長吟。瀛海茫茫萬里深。淸淚莫垂何滿子。希音幸保廣陵琴。豈無親友無書到。秖有家鄕有夢尋。千古白雲臺不圮。長留吾輩昔登臨。鏞得此詩。愕然吐舌。不虞淸羸如公。其沈毅至是也。後十餘年。公自原州舟過斗陵。弔我之妻子。遂於書樓。討我茶山諸詩。又曼聲朗誦。悲
憤激切。聽者流淚。戊寅秋。鏞蒙恩還鄕里。後數年。公又自原州過我宿三日。二十年幽鬱。得小抒焉。辛巳秋公歿。厥明年。公之子鍾杰以公詩文遺藁二十餘卷寄之曰。知先人者翁也。知先人之心者翁也。知先人之詩若文者翁也。選之編之。序以弁之。惟翁之爲也。鏞曰我泉下人也。不敢以文字累公。惟泉下之銘。幽而及遠。我其圖之。
按狀公諱持範。辛酉改云奎範。字彝敍。南臯其號也。尹氏世居海南。其源頗遠。逮我朝有進士孝貞。隱於漁樵。而冠冕後裔。是生橘亭衢。仕至弘文館應敎。是生弘中。仕至禮曹正郞。無子取其弟左參贊毅中之子唯幾爲後。仕至江原監司。監司又無子。取其兄禮賓寺副正唯深之子善道爲後。是惟我孤山先生也。以禮曹參議贈吏曹判書。賜諡忠憲公。是生仁美。以孤山之忤於世。仕止成均學諭。是生諱爾錫。蔭仕爲宗親府典簿。無子取從父弟司憲府持平諱爾厚之子斗緖爲後。於公曾祖也。賢而多藝。世稱三絶。號曰恭齋。祖父諱德顯。有文行自晦。號曰浦上老人。恭齋九男。
其第四也。父諱愇。有文行早卒。號曰泛齋。鏞昔序其遺稿。母泗川睦氏。正郞諱時敬之女。兵曹判書昌明之曾孫也。乾隆壬申十二月初二日。生公于漢陽之南靑坡之舍。公生而聰穎。學語已知讀書。五歲失怙。哭泣之哀如成人。觀者感泣。依於外家。受母夫人提誨。晝則從師于外。夜歸讀書于母夫人燈下。至寡婦之子。非有見焉。弗與爲友。因流涕隱痛。益自刻勵。或嬉戲踰時。母夫人有不怡色。公察幾微。幡然改之。柔色怡聲。說之萬端。見其色弛而后已焉。十歲已名噪都下。李判書之億,蔡相國 濟恭。皆撫其頂而譽之曰。此兒文行俱進。眞瑞物也。丁亥遭王母憂。戊子落于海南。鄕村僻陋。公益礪精研慮。治文史不懈。壬辰丁王父憂。乾隆丁酉。我正宗大王御極之元年也。增廣東堂之試。公爲解元。遂中會試。擢丙科。時年二十六也。顏如玉削。文詞藻麗而早登科第。法當羽儀王庭。蜚英藝苑。爲是忠憲公之孫也。衆共枳不用。例付承文院副正字十二年。沈淪海曲。與褐夫同。公夷然不以爲意。日哦詩績文。己酉夏。將改葬我莊獻世子于
水原府北。人稱吉岡。是唯忠憲公之所嘗薦于孝宗之葬者也。上方感念舊事。而注書沈奎魯引公爲假注書。西銓又不付軍銜。上責諭頗嚴。卽夜召銓官付之。冬十月旣葬顯隆園。厥明年庚戌夏。公館于竹圃沈逵之家。特除公成均館典籍。明日除景慕宮令。又明日除兵曹佐郞。媢疾者曰若此不已。將太中大夫矣。賊臣權裕上疏追貶忠憲公誣衊。唯其意欲永枳其苗裔。公卽引疾不仕。上猶不許遞免。一日監軍有命。公不受牌。上曰往役敢如是乎。發院隷十輩。傳呼促受牌。相續于街路。公猶不動。上曰會當以軍律從事。正郞李福潤來傳上諭。適上幸孝昌墓。公待罪于路次。上令左承旨權𧟓引入軍門。聽下諭以遣之。夏季考功之會。公又不參。本曹以曹座不參考中。御筆改書曰曹座難參考上。時上以面癤未寧。召公問生達樹。取其子榨油。可以療瘡癰否。意公有舊聞也。其後有珍山之事。又不調。數年閑居。蔡相公勸奉母北還。公旣還無家。李是釪僑居于少陵。有數間屋尙空。遂往投之。自號曰
寄園。酸寒多苦狀。鏞日追隨勞慰。而申承旨光河,李公家煥,李判書鼎運,參判益運。皆樂與公相聚。所至談諧竟夕。先是上營新邑于水原。賜尹氏第一區。以居忠憲公子孫。乙卯冬。公徙居于此。丙辰春。上幸新邑。召公入侍。語左右曰此人文行具備。至今潦倒。世道之過也。承旨蔡弘遠奏曰尹某作洛南軒頌。文甚奇偉。上顧左相蔡公曰卿亦見之否。對曰臣亦見之。詞氣雄麗。眞傑作也。明日除司憲府持平。且曰此人合置侍從。而登第數十年。沈屈可惜。仍命扈駕。公倉卒無服裝。以白衣從。人皆榮之。上至遲遲臺。停鑾賦詩。命公賡和。至始興行宮。改除司諫院正言。鏞亦以時數言公操履文華。上悔不蚤用。丁巳春。又除正言。適公違召。出補林川郡守。及陛辭。上曰外補爲爾家念舊也。又爲爾家貧親老也。往哉善做。使有聞於予耳也。公至則屏聲妓。却賄遺。詢民所疾苦。蚤夜以求治。郡產毛施布。其細者如綺羅。凡以謬例至者革去之。婦女皆御其粗者。泗沘之沿。其漁戶歲收薨魚之價三萬。悉罷之。簽游民爲軍官。其歲收除番之
錢八萬。悉捐之。以修軍器及水戰之具。歲又饑。損廩以振之。郡有隱漏田結。官與吏分其贓。歲染指數千兩。公以此充災傷之稅。餘又查陳田充額。百姓大悅。治聲四達。上廉知之。對相公及一二近臣。屢稱林川果善治。喜動于天顏。郡有豪族。怙勢播其惡。至殺人。又爲逋逃藪。郡守來者莫之敢誰何。公取其尤強梁難制者數人治之。其人崎嶇鑽穴。得公知舊書盈篋。欲以緩頰。公持之益急。其人竟遁。搜隱丁百餘名。以簽軍額。沿河壖地其泥生爲田者。豪家出公案霸占。以擅其利。公悉奪之以予民。郡介於湖西南。親戚朋知。往來如織。公皆歡然招延。厚其贈遺。庀治其喪事婚具。歲餘逋負至三千餘兩。上謂蔡公曰畀渠百里。爲試其才。且念其貧。今聞逋負多。非予意也。蔡公書報如此。母夫人有疾。四境父老候於官門之外。至瘳而散。公聞之。乃張筵宴會諸父老飮。以與同歡。厚賜之米肉。戊午有災求言。公應旨上疏。陳便宜七條。一請移雙樹城軍餉之穀。以振饑民。二請以戰船漕三稅之米。以省冗費。三請令郡縣間年查陳覈起。使無白
徵倖漏。四請令牧臣募民墾荒。減其稅率。限年停稅。考勤慢以課殿最。五請增設陂池。厲禁山林。以備旱乾。六請河決泥生之地。嚴禁土豪立案。七請倉耗之糶。毋得偏畫於河沿之邑。以防刁踊。上覽之動色稱善。下批嘉納。其戰船輸漕。許之以經綸。令廟堂有司之臣。詳確黏啓之餘。亦詡之以有理。使卽稟處飭諭。倉耗之糶。母得偏畫。以遵禁令。又令沿邑山邑皆較戶量穀。毋得不均。乃備局覆奏。首鼠兩端。上責諭曰卿等食君之祿衣君之祿。絲身穀腹。榮寵備至。蕞一郡守。上疏回啓。乃欲和泥帶水。卿等從重推考。以爲砭俗矯時之一助。仍諭筵臣曰尹某之疏。豈不奇特。以此文識。何施不可。己未首春。大夫人睦氏卒于郡署。部民按例致賻。公却之。民泣乞曰如是無以報侯恩。願鄕出一人以挽繂。公不得已許之。公哀毀踰節。涕洟無已時。藁枕爲腐。未祥而三易之。庚申六月。我正宗大王登遐。禮官議貞純太妃服制曰。正而不體當期年。公欲上疏論齊衰三年。有三朝成命。鏞曰不然。孝廟之體而不正。甲曰庶。乙曰
適。或有可爭之道。大行之正而不體。祖曰祖。孫曰孫。實無相難之言。公曰君言是也。遂已之。辛酉春。都堂會圈。大提學 尹行恁 欲錄公曰此先朝遺意。大臣有沮之者。不果錄。當是時。朝象一變。先朝嚮用之臣。或死或竄。餘波所及。擠陷殆盡。黨人欲抉摘公不得疵。卒爲完人。然自玆十有二年。寸祿不沾。至壬申春。以先朝回甲。凡侍從臣生於壬申者。咸加一級。遂升通政大夫。付龍驤衛副護軍。越七年戊寅冬。時議亦自覺其太甚。始敍公僉知中樞府事。己卯夏。除兵曹參議。冬以病免。辛巳夏除五衛將。八月二十五日以疾終。享年七十。越三月二十一日。葬于南陽府瑚璉山癸坐之原。公風儀秀潔。無塵土腴胖之氣。晚漁亭權公師彦有藻鑑。嘗曰尹彝敍如玉山瑤林。秀出天外。羸弱如不勝衣。至其操守堅確。雖賁育不可撓也。登朝籍四十五年。抑塞沈詘。卒轗軻不振。而怨天尤人之言。未嘗啓口。甲寅乙卯之間。士趨岐貳。出蔡公門下者。攻之太峻。公憂之曰爲樊翁樹敵非計也。故雖衆毀所集。故也無失其爲其故。不知公者。疑公之荏柔。
知公者却以是難之也。世降文衰。詩脈不傳。公以單絲孤竹。颺聲於曲終之奏。其詩淸曠疎澹。不事雕飾。至其摸寫情景。輒以渾全勝碎屑。故鏞每蹙然自以爲不如也。嘗有劍舞篇。樊翁歎曰雖韓渥無以加矣。又嘗有句曰秋至精神生木末。月明消息在樓西。樊翁誦之曰氣像遒逸。可卜其平生。公恬於貨利。輕於施舍。嘗戒子弟曰世之管庫子。皆不曉事。以余觀之。古今蓄財寶營田產者何限。獨魯肅米囷。范堯夫麥舟。千古不朽。是則凡施於人者。乃吾財也。公泊於進取。謹於語默。丙寅春。當路欲得敢言者斥黨人。客有爲公言者。公曰子念我蹇滯。指示徑路。誠厚意也。然雖所秉公正。若以嗾而發。亦鷹犬傀儡耳。嘗直兵曹。有一權宰要公一訪。公曰平生足不及貴人門。今老白首。不敢失壽陵舊步。公事母孝。廁牏汚茵。必躬自洗濯。寒月數以手探衾褥。冷則添薪。雖深夜風雪。必躬自爇之。無則折園柯以繼之。終不肯呼婢喚僕。爲母覺知。且召賤者怨也。配完山李氏。士人虎錫之女。王子臨瀛大君之後也。擧一男二女。男鍾杰。以經義爲進士。女
長適沈學曾。次適丁大修。皆早寡。鍾杰三男。長曰鳳浩。餘幼。二女長適成達修。次適李秉弼。沈學曾一男一女。男曰永老。女幼。銘曰
遙遙己亥。垂二百年。一言觸忤。其禍緜緜。旣雲旣仍。猶曰其延。英年通籍。壹是屯邅。高文潔行。孤標皭然。玉山瑤林。照映雲天。王曰予嘉。相曰其賢。衆共抑壓。太空無權。虎豹毅守。鸞凰遐翩。旣槁旣黃。人亦曰憐。維小司馬。以銘以鐫。叢殘遺馥。有詩千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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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시문집 제16권 / 묘지명(墓誌銘) / 남고(南皐) 윤 참의(尹參議)의 묘지명
옛날 선조(先朝) 갑인년(1794, 정조 18) 9월 중순(中旬)에 남고(南皐) 윤공(尹公)이 벗 5~6인을 데리고 백운대(白雲臺) 꼭대기에 올라 마음껏 읊조리고 노래하되 방약무인(傍若無人)하였는데 용(鏞)도 참여하였다. 돌아와서는 죽란 서옥(竹欄書屋)에서 국영(菊影)의 촛불을 베푸니, 모인 사람이 8~9인이었는데 남고(南皐)가 주맹(主盟)이었다. 술에 취하자 각각 시 수십 편을 짓되 성조(聲調)가 격렬한 것만 취하고 그 나머지는 취하지 않았다. 선중씨(先仲氏 여기서는 정약전(丁若銓)) 손암 선생(巽庵先生)ㆍ한혜보(韓徯父 혜보는 한치응(韓致應)의 자)ㆍ채이숙(蔡邇叔 이숙은 채홍원(蔡弘遠)의 자)ㆍ윤무구(尹无咎 무구는 윤지눌(尹持訥)의 자) 등 제인(諸人)이다. 공을 추대하여 사백(詞伯)으로 삼았다. 시 한 편을 지을 적마다 공이 흐드러진 목소리로 낭랑히 읊는데 굽이쳐 맑게 넘어가니 온 좌석이 고요하게 말없이 공의 소리만 들을 뿐이었다.
이때에 번옹(樊翁 채제공(蔡濟恭)을 말함)이 상부(相府)에 있고 대릉(大陵 오사(五沙) 이정운(李鼎運))과 소릉(少陵 정헌 이가환)의 재보(宰輔)가 임목(林木)처럼 늘어섰으며, 나이
50이 못된 이가 또 뒤따라 모였다. 풍류(風流)가 온자(醞藉 너그럽고 여유 있는 모양)하여 일컬을 만한 점이 있었으니 참으로 울연(蔚然)히 성대한 시대였다.
그런데 6년이 지난 기미년(1799, 정조 23)에 봄에 번옹(樊翁)이 세상을 뜨고 그 이듬해 여름에 선대왕(先大王 정조를 말함)이 승하하고, 그 이듬해 신유년(1801, 순조 1) 봄에 화가 일어났다. 그래서 용은 장기(長鬐)로 귀양가고, 용과 사이좋게 지내던 사람은 모두 억울하게 죄에 걸리고 그릇되게 함정에 빠져, 풀을 베듯 새를 사냥하듯 연좌율(連坐律)로 논죄(論罪)되니, 많은 사람들이 모두 벌벌 떨며 죄망(罪網)에 걸릴까 두려워하였다. 공이 이때 장기(長鬐)의 유배지(流配地)로 내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보내왔다.
두멧골서 산발하고 획연(劃然)히 읊조리니 / 巖阿散髮劃長吟
바다는 아득하여 만리나 멀구나 / 瀛海茫茫萬里深
맑은 눈물 하만자(河滿子)에 흘리지를 말게나 / 淸淚莫垂何滿子
희음(希音)은 다행히도 광릉금(廣陵琴)을 보존하네 / 希音幸保廣陵琴
어찌 친한 벗 없으랴만 편지 오는 것 없구나 / 豈無親友無書到
다만 고향집 있어 꿈속에서 찾도다 / 秖有家鄕有夢尋
천고토록 백운대 무너지지 않거니 / 千古白雲臺不圮
우리 옛날 노닐던 곳 길이 남아 있으리 / 長留吾輩昔曾臨
용이 이 시를 받아보고는 깜짝 놀라 혀를 내두르며 공처럼 맑고 말쑥하던 이가 그 침중(沈重)하고 굳셈이 이에 이른 줄은 생각도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 뒤 10여 년이 지나 공이 원주에서 뱃길로 두릉(斗陵)에 들러 나의 처자(妻子)를 조문하고 마침내 서루(書樓)에서, 다산(茶山)에서 지은 나의 여러 시들을 요구하여 또 흐드러진 목소리로 낭랑하게 읊는데 비분 격절(悲憤激切)하니 듣는 이는 눈물을 흘렸다 한다.
무인년(1818, 순조 18) 가을에 용이 은전(恩典)을 입어 향리로 돌아왔다. 그 후 수년 뒤에 공이 또 원주로부터 나에게 들러 3일을 묵었는데, 20년 답답한 회포를 조금은 풀 수 있었다.
신사년(1821, 순조 21) 가을에 공이 죽었다. 그 이듬해 공의 아들 종걸(鍾杰)이 공의 시문(詩文) 등 유고(遺藁) 20여 권을 보내와 말하기를,
“선인(先人)을 아는 이는 옹(翁 다산을 말함)이시고 선인의 마음을 아는 이도 옹이시고, 선인의 시와 문(文)을 아는 이도 옹이시니, 선택하여 편집하고 서문을 지어 권두(卷頭)에 붙이는 것도 오직 옹께서 할 일입니다.”
하기에 내가 말하였다.
“나는 천하(泉下) 사람이니, 감히 문자로 공을 누되게 할 수 없다. 오직 천하(泉下)의 명(銘)은 유심(幽深)하여 멀리 미칠 수 있으니 내가 그것을 지으리라.”
공의 행장을 상고하면 다음과 같다.
공의 휘(諱)는 지범(持範)이니, 신유년(1801, 순조 1)에 규범(奎範)으로 고쳤고, 자는 이서(彝敍)이며, 남고(南皐)는 호이다.
윤씨(尹氏)는 대대로 해남(海南)에 살았는데, 그 근원이 매우 멀다. 아조(我朝)에 들어와서 진사(進士) 효정(孝貞)이 있으니, 어촌(漁村)과 산촌(山村)에 은거하면서 후예의 으뜸이 되었다. 이분이 귤정(橘亭) 구(衢)를 낳으니 벼슬은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에 이르렀고, 이분이 홍중(弘中)을 낳으니 벼슬은 예조 정랑(禮曹正郞)에 이르렀으며, 자식을 두지 못하여 그의 아우 좌참찬(左參贊) 의중(毅中)의 아들 유기(唯幾)를 데려다 후사로 삼았는데, 벼슬은 강원 감사(江原監司)에 이르렀다. 감사가 또 자식이 없어 그의 형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 유심(唯深)의 아들 선도(善道)를 취하여 후사로 삼았으니, 이분이 곧 우리 고산선생(孤山先生)이다. 예조 참의(禮曹參議)로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고 충헌공(忠憲公)으로 사시(賜諡)되었다. 이분이 인미(仁美)를 낳았는데 고산(孤山)이 세상에 거슬림을 받은 것 때문에 벼슬은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에 그쳤다. 이분이 휘 이석(爾錫)을 낳으니 음사(蔭仕)로 종친부 전부(宗親簿典簿)를 지냈다. 자식이 없어 종제(從弟)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휘 이후(爾厚)의 아들 두서(斗緖)를 후사로 삼으니 공에게 증조가 된다. 어질고 재예(才藝)가 많아 세상에서 삼절(三絶)이라 일컬으며, 호를 공재(恭齋)라 한다. 조부의 휘는 덕현(德顯)이니, 문장과 덕행이 있었으나 스스로 숨겼으며 호를 포상로인(浦上老人)이라 하며 공재(恭齋)는 9남을 두었는데 그 넷째이다.
아버지의 휘는 위(愇)이니 문장과 덕행이 있었는데 일찍 죽었으며 호를 범재(泛齋)라 한다. 용이 옛날 그 유고(遺稿)에 서를 썼다. 어머니는 사천 목씨(泗川睦氏)이니 정랑(正郞) 휘 시경(時敬)의 딸이고, 병조 판서 목창명(睦昌明)의 증손이다. 건륭(乾隆 청 고종(凊高宗)의 연호) 임신년(1752, 영조 28) 12월 2일에 한양(漢陽) 남쪽, 청파(靑坡)의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여 말을 배우자 이미 독서(讀書)할 줄 알았다. 5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곡읍(哭泣)의 애통함이 성인(成人)과 같으니, 보는 이는 감읍(感泣)하였다. 외가에 의탁하여 어머니의 교회(敎誨)를 받았다. 낮에는 밖에서 스승을 따라 글을 배우고 밤에는 돌아와 등불 밑에서 글을 읽는데 '과부의 아들이 드러남이 있지 아니하면 그와 더불어 벗하지 않는다.’ 한 데에 이르러서는 눈물을 흘려 슬퍼하고 더욱 스스로 각고 노력하였다. 혹 때가 지나도록 즐겁게 놀다가 어머니가 기뻐하지 않는 얼굴빛이 있으면 공은 기미를 살펴 곧바로 고치고 부드러운 얼굴빛과 목소리로 만단(萬端)으로 위로하여 그 노한 얼굴빛이 풀어짐을 본 뒤에야 그만두었다.
10세에 이미 이름이 도성 안에 울렸다. 판서 이지억(李之億)과 채상국(蔡相國 제공(濟恭))이 모두 그 이마를 어루만지며 칭찬하였다.
“이 아이는 문학과 조행이 함께 진취하였으니 참으로 보물이다.”
정해년(1767, 영조 43)에 조모의 상을 당하고 무자년(1768, 영조 44)에 해남(海南)으로 내려왔는데, 향촌(鄕村)이 외지고 비루(鄙陋)하였다. 공은 더욱 정신과 생각을 가다듬어 문사(文史)에 노력하고 게을리하지 않았다. 임진년(영조 48, 1772)에 조부의 상을 당하였다.
건륭 정유년(1777, 정조 1)은 우리 정종대왕(正宗大王)이 등극한 원년이다. 증광동당시(增廣東堂試)에 공이 장원(壯元)하고 마침내 회시(會試)에 합격하여 병과(丙科)로 뽑히니 그때 나이 26세였다. 얼굴은 옥을 깎아놓은 듯하고 문사(文詞)는 아담하고 아름다우며, 게다가 일찍 과거에 올랐으니, 법으로는 조정에 벼슬하여 예원(藝苑)에 꽃다운 이름을 드날려야 마땅하다. 그런데 충헌공(忠憲公 윤선도(尹善道)의 시호)의 후손이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함께 방해하여 쓰지 못하게 하였다. 관례에 따라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부직(付職)하고, 12년 동안 바다 모퉁이에 묻히어 갈부(褐夫 너절한 옷을 입은 천한 사람)와 같았다. 그러나 공은 개의하지 않고 태연히 날마다 시를 읊고 글을 지었다.
기유년(1789, 정조 13) 여름에 우리 장헌세자(莊獻世子)를 수원부(水原府) 북쪽에 개장(改葬)하려 하였는데, 사람들이 길지(吉地)라고 일컬었다. 이것은 충헌공(忠憲公)이 일찍이 효종(孝宗)의 장지(葬地)로 천거한 터이다. 주상이 바야흐로 옛날 일을 생각하므로, 주서(注書) 심규로(沈奎魯)가 공을 천거하여 가주서(假注書)로 삼았는데, 서전(西銓 병조(兵曹))이 또 군직(軍職)을 임명하지 않았다. 주상의 책유(責諭)가 매우 엄하여 그날 밤으로 전관(銓官)을 불러 임명하도록 하였다. 10월에 현륭원(顯隆園)에 장사를 마쳤다. 그 이듬해 경술년(1790, 정조 14) 여름에 공이 죽포(竹圃) 심규(沈逵)의 집에 사관(舍館)을 정하였다. 공을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특별히 제수하고, 이튿날 경모궁 영(景慕宮令)으로 제수하고 또 그 이튿날 병조 좌랑에 제수하였다. 시기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여 마지않으면 장차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될 것이다.”
하였다. 적신(賊臣) 권유(權裕)가 상소하여 충헌공(忠憲公)을 폄하(貶下)하여 무함하였으니, 그의 의사는 영원히 그 자손의 벼슬길을 막으려는 데 있었다. 공은 즉시 병을 핑계하고 출사하지 않았는데, 주상이 오히려 체직(遞職)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루는 감군(監軍)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공은 명패(命牌)를 받지 않았다.
주상은,
“왕역(往役)을 감히 이렇게 한단 말인가?”
하고, 정원(政院)의 사령(使令) 10인을 보내어 명패를 받도록 재촉하였다. 사령이 거리에 서로 잇달았으되 공은 그래도 동요하지 않았다. 주상이,
“마땅히 군율(軍律)로 종사(從事)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니, 정랑(正郞) 이복윤(李福潤)이 와서 주상의 하유(下諭)를 전하였다.
마침 주상이 효창묘(孝昌墓)에 거둥하였는데, 공이 길가에서 대죄(待罪) 하였더니, 주상은 좌승지 권엄(權𧟓)을 시켜 군문(軍門)으로 불러 들여 하유(下諭)를 듣게 한 뒤에 보내주었다.
하계(夏季) 고공(考功)의 모임에 공이 또 참여하지 않았다. 본조(本曹 병조를 말함)에서 조좌(曹座 조의 좌석)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여 고적(考績)을 중(中)으로 매기니, 어필(御筆)로 고쳐 쓰기를,
“조좌에 참여하기를 어렵게 여기니 고적(考績)이 상이다.”
하였다. 이때 주상이 얼굴의 부스럼으로 편치 못하였다. 공을 불러 묻기를,
“생달나무[生達樹]의 씨를 가져다가 기름을 짜면 그 기름으로 부스럼을 치료할 수 있는가?”
하였으니, 공이 옛날에 들려 드린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뒤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있어서 또 임용되지 못하고 수년간 한가로이 지냈다. 채 상공(蔡相公 채제공을 말함)이 어머니를 모시고 북(서울)으로 돌아오기를 권하였는데, 공이 서울로 돌아오니 집이 없었다. 이시우(李是釪)가 소릉(少陵)에 우거(寓居)하여 두어 간 집이 아직도 비어 있었다. 마침내 가서 의탁하고 자호를 기원(寄園)이라 하였다. 한산(寒酸)하여 괴로운 상황이 많았는데 용이 날마다 추종하며 위로하였다. 승지 신광하(申光河), 이공 가환(李公家煥), 판서 이정운(李鼎運), 참판 이익운(李益運)이 모두 공과 즐겨 서로 모였는데 가는 곳마다 담소로 밤을 새웠다.
이보다 앞서 주상이 수원(水原)에 신읍(新邑)을 경영하면서 윤씨에게 집 한 채를 하사하여 충헌공(忠憲公)의 자손이 살도록 하였는데, 을묘년(1795, 정조 19) 겨울에 공이 이 집으로 옮겨 살았다.
병진년(1796, 정조 20) 봄에 주상이 신읍(新邑 수원)에 거둥하여 공을 불러 입시(入侍)하게 하고, 좌우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문학과 조행이 구비되었는데 여태까지 불우하였으니 세도(世道)의 잘못이다.”
하였다. 승지 채홍원(蔡弘遠)이 주달하기를,
“윤모(尹某)가 낙남헌송(洛南軒頌)을 지었는데, 문장이 매우 기위(奇偉)하였습니다.”
하니, 주상이 좌상(左相) 채공(蔡公)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경도 보았소?”
하니, 채공이 대답하기를,
“신도 보았는데 사기(詞氣)가 웅려(雄麗)하여 참으로 걸작이었습니다.”
하였다. 이튿날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하고 또 말하기를,
“이 사람은 시종(侍從)의 자리에 두어야 합당한데, 등과(登科)한 지 수십 년 동안 침체한 것이 애석하다.”
하고, 이어서 호가(扈駕)를 명하였다. 공이 창졸간에 복장이 없어 백의(白衣)로 호종(扈從)하니 사람들이 모두 영화롭게 여겼다.
주상이 지지대(遲遲臺)에 이르러 어가(御駕)를 멈추고 시를 읊고는 공에게 갱화(𢉼和)하도록 명하였다. 시흥(始興)의 행궁(行宮)에 이르러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으로 고쳐 임명하였다. 용도 때로 공의 조행과 문장을 자주 말하였더니, 주상은 일찍 등용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다.
정사년(1797, 정조 21) 봄에 또 정언(正言)을 제수하였는데, 마침 공이 소명(召命)을 어겨 외직으로 임천 군수(林川郡守)에 보임되었다. 폐사(陛辭)하게 되자, 주상이 일렀다.
“외직으로 보임한 것은 네 집을 위해 구정(舊情)을 생각한 것이며, 또 네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었기 때문이다. 가서 일을 잘하여 내 귀에 좋은 소문이 들리도록 하라.”
공이 임천 군수로 부임하여서는, 성악(聲樂)과 기생을 물리치고 뇌물을 물리치며, 백성의 질고(疾苦)를 물으며 밤낮으로 잘 다스리기를 강구하였다. 임천군에 모시베가 산출되었는데 고운 것은 비단[綺羅] 같았다. 모든 잘못된 규례로 내려오는 것은 혁파해 버리니 부녀자는 모두 거친 것을 입었다. 사비(泗沘 금강(錦江))의 연안 그 어호(漁戶)에 해마다 훙어(薨魚)의 값으로 3만 전을 거두었는데 다 혁파하였고, 유민(游民)을 등록하여 군(軍)으로 삼고 관에서 해마다 제번전(除番錢) 8만 전을 거두었는데, 다 떼내어 군기(軍器) 및 수전(水戰)의 도구를 수리하였다. 또 흉년이 들자 창고의 곡식을 내어 진휼(賑恤)하였다. 임천군에 은루전결(隱漏田結 숨기고 빠진 전결(田結))이 있었는데 관이 아전과 그 장물(贓物)을 나누어 해마다 수천 냥을 가로챘다. 공이 이것을 재상(災傷)의 부세(賦稅)로 충당하고, 또 진전(陳田)을 조사하여 부세 액수(額數)에 충당하였다. 백성이 크게 기뻐하여 치성(治聲 치적의 명성)이 사방에 들리었다. 주상이 이를 염탐하여 알고 상공(相公) 및 한두 근신(近臣)을 대하여, 임천이 과연 잘 다스려진다고 여러 번 일컫고 천안(天顔)에 기쁨이 넘쳤다.
임천군에 호족(豪族)이 있어 세력을 믿고 그 악을 자행하여 살인까지 하고 또 포도수(逋逃藪 죄를 범하고 도망한 사람이 숨어 있는 곳)가 되었다. 그런데 군수로 온 사람은 감히 무어라 말하지 못하였다. 공이 그 중에 더욱 뻣뻣하여 제어하기 어려운 몇 사람을 잡아다가 다스리니, 그 사람이 어렵사리 구멍을 뚫어 공의 지구(知舊)의 편지를 훔쳐 상자 가득히 넣고 이를 기화로 삼아 청탁하려 하였다. 공이 더욱 엄하게 다스리니 그 사람이 마침내 달아났다.
은정(隱丁 호적에 누락된 장정) 1백여 명을 조사(調査)하여 군액(軍額)에 등록하였다.
강가의 이생지(泥生地)를 전지로 일군 것을 호가에서 공안(公案)을 내어 강제로 점유하여 그 이익을 독차지하였는데, 공이 다 빼앗아 백성에게 주었다.
임천군이 호서(湖西)와 호남(湖南)의 사이에 끼어 있어 친척과 친구의 왕래가 매우 잦았다. 공이 모두 기꺼이 초치하고 맞이하여 증유(贈遺)를 후히 하고 그 상사(喪事)와 혼구(婚具)를 치러 주고 마련해 주니, 한 해 남짓하여 포흠(逋欠 관물을 사사로 소비함)을 3천여 냥이나 졌다. 주상이 채공(蔡公)에게 이르기를,
“그에게 1백 리의 군읍을 주어 그 재능을 시험하고 또 그의 가난함을 염려해 주었더니, 지금 포흠을 많이 졌다 한다. 이는 내 바라던 뜻이 아니다.”
하였는데, 채공이 이것을 편지로 알려 왔다.
공의 어머니가 병이 들자 온 경내의 부로(父老)들이 관문(官門) 밖에서 기다리다가 병이 나은 뒤에야 흩어졌다. 공이 그 말을 듣고 자리를 베풀어 부로들을 모아 잔치하여 그들과 함께 즐기고 쌀과 고기를 주었다.
무오년(1798, 정조 22)에 재변이 있어 구언(求言)하자 공이 상지(上旨)에 부응해 상소하여 편의(便宜) 7조를 진달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쌍수성(雙樹城) 군량의 곡식을 옮겨 기민을 진구(賑救)할 것.
2. 전선(戰船)으로 삼세(三稅)의 미곡을 조운(漕運)하여 잡된 비용을 줄일 것.
3. 군현으로 하여금 한 해 걸려 진전(陳田)과 기전(起田)을 조사하고 밝혀 내어 백징(白徵)하거나 요행히 누락되는 것이 없도록 할 것.
4. 목신(牧臣 지방 수령)으로 하여금 백성을 모집하여 묵밭을 개간하게 하되 그 세율(稅率)을 감하고 연한을 정하여 부세를 면제하게 하며, 근태(勤怠)를 고사(考査)하여 전최(殿最)를 부과할 것.
5. 저수지를 증설하고 산림(山林)을 엄금하여 가뭄에 대비할 것.
6. 강가의 이생지(泥生地)를 토호가 입안(立案)하는 것을 엄금할 것.
7. 창모(倉耗)의 조곡(糶穀)을 하천 연변의 고을에 치우쳐 배정하지 않음으로써 조용(刁踊)을 막을 것.
주상이 보고는 얼굴빛을 변하여 칭찬하고 비답을 내려 가납(嘉納)하였다. 그 중 전선으로 세미(稅米)를 운반하는 것에 대해서는 경륜(經綸)이 있다고 허여하여 묘당(廟堂)의 담당 신하로 하여금 자세히 확정하여 덧붙여 계달하게 하고, 나머지도 사리가 맞다고 허여하고 곧 품처(稟處)하도록 하였다. 칙유(飭諭)하여 창모의 조곡을 치우쳐 배정하지 말고 금령(禁令)을 준수하라고 하였으며, 또 연읍(沿邑)과 산읍(山邑)은 모두 호수를 비교하여 곡식을 헤아림으로써 고르지 않음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그런데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를 머뭇거리며 결정하지 못하였다. 주상이 책유(責諭)하기를,
“경들은 임금의 녹을 먹고 임금의 녹으로 입으며, 깁으로 몸을 싸고 곡식으로 배를 채우는 등 영화와 총애가 한껏 구비되었는데, 조그마한 한 군수가 올린 상소의 회계(回啓)를 곧 얼버무리려 하니, 경들을 종중추고(從重推考)하여 시속을 바로잡는 데 일조로 삼고자 한다.”
하고, 이어서 연신(筵臣)에게 하유하였다.
“윤모(尹某)의 소는 어찌 특이하지 않은가. 이러한 문장과 식견을 어디에 시행한들 불가하랴.”
기미년(1799, 정조 23) 초봄에 대부인(大夫人) 목씨(睦氏)가 군서(郡署)에서 죽으니 관내 백성이 관례에 따라 부의(賻儀)를 보내왔으나 공은 물리쳤다. 백성들이 울며 애걸하기를,
“이러시면 수령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으니, 향중에서 한 사람을 내어 상여줄을 끌게 해주소서.”
하므로, 공이 부득이 허락하였다.
공은 슬퍼함이 절도에 넘어 눈물이 그칠 때가 없었다. 그래서 고침(藁枕)이 썩어 상(祥)이 되기 전에 세 번이나 바꾸었다.
경신년(1800, 정조 24) 6월에 우리 정종대왕(正宗大王)이 승하하니, 예관(禮官)이 정순태비(貞純太妃)의 복제(服制)를 의논하여,
“정(正)이면서 체(體)가 아니니[正而不體] 기년(期年)으로 해야 한다.”
하였다. 공이 상소하여,
“자최(齊衰) 3년은 삼조(三朝)의 성명(成命)이 있다.”
라고 논하려 하였다. 용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효묘(孝廟)의 체이부정(體而不正)은 갑은 서(庶)라 하고 을은 적(嫡)이라 하여 혹 논쟁할 수 있는 길이 있거니와 대행왕(大行王 정조를 말함)의 정이불체(正而不體)는 조(祖)는 조(祖)라 하고 손(孫)은 손(孫)이라 하니, 실로 서로 논란할 말이 없다.”
하였더니, 공은,
“그대의 말이 옳다.”
하고, 드디어 그만두었다.
신유년(1801, 순조 1) 봄 도당회권(都堂會圈)에 대제학(大提學)(윤행임(尹行恁))이 공을 녹선(錄選)하려 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선조(先朝 정조를 말함)의 유의(遺意)이다.”
하였는데, 저지하는 대신이 있어서 녹선되지 못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조정의 상황이 일변(一變)하였다. 선조(先朝)가 아끼고 쓰던 신하를 죽이기도 하고 찬배(竄配)하기도 하며, 여파가 미치는 바에 따라 밀치고 모함하여 거의 다 없애버렸다. 당인(黨人)이 공의 죄를 들추어내려 하였으나 흠을 얻지 못하여 마침내 완인(完人)이 되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12년간 조그마한 녹도 받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임신년(1812, 순조 12) 봄에 이르러 선조(先朝)이 회갑이라 하여, 시종신(侍從臣)으로서 임신년(영조 28, 1752)에 태어난 사람은 모두 한 자급씩 올려주니, 드디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부직(付職)되었다.
7년이 지난 무인년(1818, 순조 18) 겨울에 시의(時議) 또한 너무 심하였음을 스스로 깨닫고 비로소 공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서용(敍用)하였다. 기묘년(1819, 순조 19) 여름에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제수되었다가 겨울에 병으로 면직되었다.
신사년(1821, 순조 21) 여름에 오위장(五衛將)에 제수되었다. 8월 25일에 병으로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70세이다. 3개월이 지난 21일에 남양부(南陽府) 호련산(瑚璉山) 계좌(癸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은 풍의(風儀)가 수결(秀潔)하여 진토(塵土)의 기름진 기미가 없었다. 만어정(晩漁亭) 권공 사언(權公師彦)은 조감(藻鑑 사람을 알아보는 견식)이 있었는데 일찍이 말하기를,
“윤이서(尹彝敍 이서는 윤지범(尹持範)의 자)는 옥산 요림(玉山瑤林 옥으로 된 산과 숲으로, 아름다움의 비유)이 하늘 밖에 빼어난 것과 같다.”
하였다. 야위고 약하여 옷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그 조수(操守)가 확고함에 이르러서는 분육(賁育 옛날 용맹 있는 사람인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임)이라도 동요시킬 수 없었다. 조정에 벼슬한 지 45년 동안에 눌리고 막히고 침체되어 끝내 불우한 채 떨치지 못하였으나,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탓하는 말은 입에서 낸 적이 없었다.
갑인년(1794, 정조 18)ㆍ을묘년(1795, 정조 19) 사이에 선비들의 추향(趨向)이 갈라져서 채공(蔡公 채제공을 말함)의 문하에 벗어난 자를 매우 엄하게 공격하였다. 공이 근심하여 말하기를,
“번옹(樊翁)을 위하여 적을 심는 것은 좋은 계책이 못 된다.”
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뭇 비방이 집중되더라도 친구에게는 그 친구의 정을 잃지 않았다. 공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공이 유약해서인가 의심하였으나 공을 아는 사람은 도리어 이것을 어렵게 여겼다.
세대가 강하(降下)하고 문장이 쇠퇴하여져 시맥(詩脈)이 전해지지 않더니, 공이 단사 고죽(單絲孤竹 홑실과 외로이 난 대)으로 곡종(曲終)의 연주에서 소리를 드날렸다. 그 시는 청광 소담(淸曠疎澹 깨끗하고 텅 비어 넓은 것)하고 다듬거나 꾸밈을 일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정경(情景)을 모사(模寫)함에 이르러서는 문득 혼전(渾全)으로써 쇄쇄(瑣瑣)함을 능가하였다. 그러므로 용이 매양 위축되어 스스로 그만 못하다고 여겼다.
일찍이 검무편(劍舞篇)을 지었는데, 번옹(樊翁)이 감탄하기를,
“비록 한악(韓偓)이라도 이보다 나을 수 없다.”
하였다. 또 일찍이 지은 시에,
가을 되니 정신은 나무 끝에서 나고 / 秋至精神生木末
달 밝으니 소식은 누각 서쪽에 있도다 / 月明消息在樓西
라는 구절이 있는데, 번옹이 읊고 말하였다.
“기상이 도인(道人)ㆍ일민(逸民)과 같으니 그 평생을 점칠 수 있다.”
공은 재리(財利)에 담박하고 은혜를 즐겨 베풀었다. 일찍이 자제들에게 경계하여 말하였다.
“세상의 관고자(官庫子 창고를 관리하는 사람)는 모두 일을 알지 못한다. 내가 살펴보건대, 고금의 재보(財寶)를 축적하고 전지와 살림을 경영한 자가 어찌 한이 있으랴만, 노숙(魯肅)의 미균(米囷)과 범요부(范堯夫)의 맥주(麥舟)만이 천고에 썩지 않았다. 이것은 무릇 남에게 베푼 것은 곧 나의 재물인 까닭이다.”
공은 진취(進取)에 담박하고 말을 삼갔다. 병인년(1806, 순조 6) 봄에 당로자(當路者)가 과감히 말하는 자를 얻어 당인(黨人)을 배척하려 하였는데, 어떤 손이 공에게 말하는 자가 있었다. 공은 말하기를,
“그대가 나의 침체함을 생각하여 지름길을 지시하니 참으로 고마운 뜻이
다. 그러나 주장하는 바가 공정하더라도 만약 사주를 받아 발의하면 또한 응견(鷹犬)이나 괴뢰(傀儡)일 뿐이다.”
하였다. 일찍이 병조에 숙직할 적에 어떤 권재(權宰 권력 잡은 재상)가 공에게 한번 찾아오기를 요구하자 공이 말하였다.
“평생에 발길이 귀인의 집에 이르지 않았는데, 지금 늙어 백수가 되었으니 감히 수릉(壽陵)의 옛 걸음걸이를 잊지 못하겠다.”
공은 어머니를 효성껏 섬겨, 측간의 바라지[牖]나 더러운 침구를 반드시 몸소 세탁하고, 추운 철에는 자주 손으로 이부자리를 만져보고 차면 땔나무를 더 때되 아무리 깊은 밤, 눈보라가 치더라도 반드시 몸소 불을 때었고, 땔나무가 없으면 동산의 나뭇가지를 꺾어서 이어대고 끝내 여종이나 남종을 불러 어머니가 알게 하려 하지 않았고, 또한 천한 사람의 원망을 사려하지 않았다.
부인은 완산 이씨(完山李氏)인데 사인(士人) 호석(虎錫)의 딸이니 왕자 임영대군(臨瀛大君)의 후손이다.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종걸(鍾杰)이니 경의(經義)로 진사(進士)가 되었다. 딸로 맏이는 심학증(沈學曾)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정대수(丁大修)에게 출가하였는데, 다 일찍 과부가 되었다. 종걸은 3남을 두었으니 맏은 봉호(鳳浩)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두 딸은 맏은 성달수(成達修)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이병필(李秉弼)에게 출가하였다. 심학증은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영로(永老)이고, 딸은 어리다. 명은 다음과 같다.
멀고 먼 기해년은 / 遙遙己亥
이백 년이 되었네 / 垂二百年
한 마디 말 거슬러 / 一言觸忤
그 화가 이어져 / 其禍緜緜
칠대ㆍ팔대 먼 자손까지도 / 旣雲旣仍
오히려 뻗치었네 / 猶曰其延
꽃다운 나이에 급제했건만 / 英年通籍
한결같이 어려웠네 / 壹是屯邅
웅대한 문장, 조촐한 행검 / 高文潔行
고고한 기상 환하였고 / 孤標皭然
옥산 요림 맑은 풍채 / 玉山瑤林
운천에 비치었네 / 照映雲天
임금은 가상히 여기고 / 王曰予嘉
정승은 어질게 여겼네 / 相曰其賢
뭇 사람들 억누르니 / 衆共抑壓
태공(太空 임금)은 권한 없네 / 太空無權
호표(虎豹)처럼 꿋꿋이 지키고 / 虎豹毅守
난봉처럼 멀리 날았었네 / 鸞鳳遐翩
시들고 떨어지니 / 旣槁旣黃
사람들도 슬퍼했네 / 人亦曰憐
병조 참의 관함으로 / 維小司馬
명에 쓰고 돌에 새기네 / 以銘以鐫
총잔한 끼친 향기 / 叢殘遺馥
시 천 편이 있도다 / 有詩千篇
[주-D001] 하만자(何滿子) : 사곡(詞曲) 이름. 당(唐) 나라 개원(開元 현종(玄宗)의 연호) 연간에 창주(滄洲)의 가자(歌者)의 성명인데, 처형당할 때에 이 곡을 올려 죽음을 속죄하려 하였으나 끝내 면하지 못하였다. 뒤에 가곡의 이름이 되었다.《白氏長慶集 何滿子 自註》[주-D002] 광릉금(廣陵琴) : 금곡(琴曲)의 이름. 진(晉)의 혜강(嵇康)이 은자(隱者)에게 배운 것이라 하나 그가 죽은 뒤에 전하지 않음. 혜강이 동시(東市)에서 처형당할 적에, 태학생(太學生) 3천 명이 스승으로 삼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혜강은 해 그림자를 돌아보고는 거문고를 찾아 타며, “광릉산(廣陵散)이 지금부터 끊어졌다.”고 하였다.《晉書 嵇康列傳》[주-D003] 과부의 …… 않는다 : 《예기(禮記)》 곡례(曲禮) 하편과 《소학(小學)》등에 보인다.[주-D004] 태중태부(太中太夫) : 관명(官名). 한(漢) 나라에서는 논의를 맡았는데, 질(秩)이 비천석(比千石)이었다. 한 문제(漢文帝) 때 가의(賈誼)가 20세에 박사(博士)로 진출하여 문제의 총애를 받아 같은 해에 태중태부(太中太夫)에까지 뛰어 올랐다. 결국 가의는 대신들의 시기를 받아 장사왕 태부(長沙王太夫)로 좌천되었다.[주-D005] 왕역(往役) : 부름에 응해 가서 역(役)에 종사하는 것.[주-D006] 효창묘(孝昌墓) : 정조의 제1자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무덤.[주-D007] 진산사건(珍山事件) : 정조 15년(1791) 전라도 진산(珍山)의 진사(進士) 윤지충(尹持忠)이 천주교도로서 그의 어머니의 상을 당했으나 신주(神主)를 모시지 않고 그 외종형(外從兄) 권상연(權尙然)도 같은 교도로 그 숙모의 제사를 행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안 조정에서는 진산 군수 신사원(申史源)에게 이들의 체포를 명하고 심문했으나 배교(背敎)를 거부하고 모두 처형되었다.[주-D008] 제번전(除番錢) : 번상(番上)을 면제하는 댓가로 받는 돈.[주-D009] 이생지(泥生地) : 냇가에 있는 모래 섞인 개흙땅.[주-D010] 삼세(三稅) : 전세(田稅)ㆍ대동(大同)ㆍ삼수(三手). 삼수미(三手米)는 훈련도감(訓鍊都監) 소속의 포수(砲手)ㆍ살수(殺手)ㆍ사수(射手) 즉 삼수군(三手軍)의 방료(放料)로 하기 위하여 전답에 구별없이 1결(結)에 미곡 2두 2승을 거두었음.[주-D011] 백징(白徵) : 조세를 면제한 땅이나 납세 의무가 없는 사람에게 세금을 물리거나, 아무 관계 없는 사람에게 빚을 물리는 일.[주-D012] 전최(殿最) : 관찰사가 각 고을 수령의 실적을 조사하여 중앙에 보고하는 일. 고사할 때 상(上)을 최(最), 하(下)를 전(殿)이라 함.[주-D013] 조곡(糶穀) : 환자(還上) 제도는 봄에 각 고을의 사창(社倉)에서 창고에 있는 곡식의 반(半)을 백성들에게 빌려주고 가을에 이자를 얹어서 받아들이는 것인데, 조곡은 봄에 창고의 곡식을 백성들에게 빌려주는 일.[주-D014] 조용(刁踊) : 교활한 방법으로 물가를 조종 농간하는 것.[주-D015] 종중추고(從重推考) : 벼슬아치의 죄과를 신문하여 그중 중벌에 따라 징계하는 것.[주-D016] 고침(藁枕) : 상제가 상중에 베는, 짚으로 만든 베개.[주-D017] 정순태비(貞純太妃) : 영조(英祖)의 계비(繼妃). 경주 김씨(慶州金氏)이다.[주-D018] 정(正)이면서 체(體)가 아니니[正而不體] : 적손(嫡孫)을 세워 후사(後嗣)로 삼은 것. 정(正)은 적자(嫡子)와 적손(嫡孫)으로 계승하는 것. 체(體)는 부자간을 말함. 정조는 영조에게 정이기는 하나 체(體)는 아니라는 뜻이다.《儀禮 喪服傳》,《與猶堂全書 喪禮四箋 卷10 喪期別父子 2~5》[주-D019] 도당회권(都堂會圈) : 도당(都堂) 즉 의정부(議政府)에 모여 홍문관(弘文館)의 교리(敎理)ㆍ수찬(修撰)의 후보자를 권점(圈點) 찍어 선정함. 도당록(圖堂錄).[주-D020] 계좌(癸坐) : 계방(癸方)을 등진 좌향. 정남에서 서쪽으로 15도 되는 방위를 중심으로 한 각도의 안.[주-D021] 곡종(曲終)의 연주 : 세속(世俗)의 음악을 연주한 다음에 다시 바른 음악을 연주하는 것. 종국의 아름다움을 말함. 곡종이주아(曲終而奏雅).《史記 司馬相如傳》[주-D022] 한악(韓偓) : 당(唐) 나라 사람. 자(字)는 치요(致繞), 또는 치광(致光)ㆍ치원(致元). 호는 옥산초인(玉山樵人). 10세에 시를 지을 줄 알았다. 벼슬은 소종(昭宗) 때 병부 시랑(兵部侍郞)과 한림학사(翰林學士)ㆍ승지(承旨)를 지냈고, 애제(哀帝) 때 주전충(朱全忠)의 역절(逆節)을 미워하여 민(閩) 땅에 피하였다. 그의 시는 강개 격앙(慷慨激昂)하고 충분(忠憤)의 기가 가득 넘쳤다.《향렴집(香奩集)》에는 염체(艶體)의 글이 실려있는데, 이것을 향렴체(香奩體)라 일컫는다.《한내한별집(韓內翰別集)》이 있다.《唐書 卷183 韓偓傳》원문의 한악(韓渥)은 한악(韓偓)의 오자임.[주-D023] 노숙(魯肅)의 미균(米囷) : 노숙(魯肅)은 삼국 시대 오(吳) 나라 사람. 자는 자경(子敬). 가재(家財)가 부유하였는데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여 향읍의 환심을 얻었다. 집에 각기 쌀 3천 섬이 저장된 곳집 두 개가 있었는데, 양곡을 요구하는 주유(周瑜)에게 한 창고를 주었다. 뒤에 주유를 대신하여 대장이 되었다.《三國志 卷 54 周瑜傳》[주-D024] 범요부(范堯夫)의 맥주(麥舟) : 범요부(范堯夫)는 송(宋)의 명재상 범중엄(范仲淹)의 아들 범순인(范純仁). 자(字)가 요부(堯夫)다. 벼슬은 관문전 태학사(觀文殿太學士)에 이르렀다.《宋史 卷314》맥주는 보리를 운반하는 배. 여기서는 범순인(范純仁)이 석만경(石曼卿)에게 배에 실린 보리를 주어 그의 상(喪)을 도와준 고사. 범중엄이 아들 순인을 고소(姑蘇)에 보내어 보리 5백 섬을 운반하게 하였는데, 배가 단양(丹陽)에 닿았을 때 장사를 지내지 못하는 석만경을 보고 배에 실린 보리를 그에게 주고 집에 몰아왔다 한다.《冷齋夜話》[주-D025] 수릉(壽陵)의 옛 걸음걸이 : 자기가 평소에 배운 바를 지키는 것의 비유. 수릉(壽陵)은 연(燕)의 지명.《장자(莊子)》 추수(秋水)에, “그대는 수릉(壽陵)의 청년이 한단(邯鄲 조(趙) 나라 수도)에서 한단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배운 것에 대해 듣지 못하였는가. 한단의 걸음걸이를 습득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 나라의 걸음걸이까지도 잊어버리고 기어서 자기 나라로 돌아왔다.” 하였다. 한단지보(邯鄲之步). 여기서는 자기 본분을 지키겠다는 뜻.[주-D026] 기해년 : 조선 제17대왕 효종이 승하한 해로 1659년인데, 즉 기해예송(己亥禮訟)이 일어난 해. 효종이 죽고 인조(仁祖)의 계비(繼妃)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를 송시열(宋時烈) 등 노론이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고 남인(南人)인 윤선도(尹善道) 등은 3년설을 주장하였는데, 결국 기년설이 채택되자, 윤선도는 현종 1년(1660) 4월에 삼수(三水)에 유배되었다. 뒤에 당쟁으로 번져, 남인인 윤선도 후손은 집권당인 노론에 핍박을 받았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정섭 (역) |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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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산집 제9권 / 서(序) / 남고 윤공의 문집에 대한 서문〔南臯尹公文集序〕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은 서로 구한다. 그리하여 성인(聖人)이 출현함에 만인이 우러러본다.”라고 하고, 《시경》에 이르기를 “훌륭한 많은 선비들이 이 왕국에 태어났도다. 왕국에서 잘 길러 내니 주나라의 동량(棟樑)이 되리로다.”라고 하였는데, 이 때문에 세상에 반드시 신성하고 지혜로운 군주가 있어야만 어질고 밝은 신하가 있게 되는 법이니, 이는 이치와 정세가 그러한 것이다. 우리 정종대왕(正宗大王 정조)께서 총명하고 신성한 자품으로 강건하고 독실한 학문을 몸소 실천하시니, 전장(典章)과 법도가 찬란하게 아주 새로워지고 예악과 문물이 이에 융성해졌다. 그리하여 당시에 태어난 선비는 규장특달(圭璋特達)의 재주가 있거나 보불(黼黻)과 생용(笙鏞)의 그릇을 지닌 것이 아니라면 아마도 감히 형구(亨衢)에 발자취를 들여 성상의 마음에 부합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궁벽하고 먼 지방에 살고 곤궁하여 어려운 처지에 몸을 둔 자 중에 또 풍운(風雲)에 감응하여 제때를 만나 온 세상을 놀라게 하는 자가 있다면 그의 문장과 행실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남을 더욱 알 수 있다. 보잘것없는 나는 뒤늦게 태어난 터라 융성했던 정종대왕 당시를 보지 못하였는데 지금 남고 윤공의 문집을 읽어 보니 실로 느껴지는 바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은 숙묘조(肅廟朝)의 명신 충헌공(忠憲公)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선생의 6세손으로, 그의 학문을 계승하고 충정(忠貞)을 자연스레 배웠으니, 정묘(正廟)께서 공을 은혜롭게 돌보아 주신 것은 이 때문이며, 공이 정묘를 위해 벼슬한 것 또한 은혜를 받은 것이 있어서이다. 주구(珠丘)를 받들어 이장할 때에는 효성스러운 성상의 생각이 옛 신하에게까지 미쳤고 신읍(新邑)을 두루 살필 적에는 은사(恩賜)가 바로 집을 하사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군직(軍職)을 부직할 때에는 엄한 하교를 번거롭게 내리게 하는 데 이르렀고 병조에서 고과를 낮춰서 준 것을 바른 점수로 되돌릴 적에는 또한 어필을 수고롭게 하였다. 백의를 입고 종반(從班)하였을 때에는 간관(諫官)의 풍도가 볼만하였고 군수의 인장(印章)을 차고 외직에 보임되었을 적에는 온 묘당(廟堂)에 은혜로운 유지(諭旨)가 간절하였으니, 이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일로 신하 된 사람의 지극한 영광이다. 만일 정호(鼎湖)의 용어(龍馭)가 조금만 더 세상에 머물렀더라면 우(虞)나라 조정의 전(典), 훈(訓)을 도와 이루는 일을 누가 담당하였겠는가. 그러나 〈낙남헌송(洛南軒頌)〉 한 수가 이미 정종대왕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보면 그가 지은 변려문(騈儷文)이 모두 〈낙남헌송〉과 같은 수준일 것이고, 지지대(遲遲臺)에서 지은 갱운(賡韻)이 이미 정종대왕의 찬상(讚賞)을 받았고 보면 모든 영가(詠歌)가 모두 지지대에서 지은 갱운과 같은 수준일 것이고, 성지(聖旨)에 응해 올린 봉사(封事)가 정종대왕의 칭찬을 받기에 이르렀고 보면 경륜을 온축하고 이치를 담은 모든 저작들이 모두 성지에 응해 올린 봉사와 같은 수준일 것이니, 어찌 꼭 문단의 맹주(盟主)로 동관(彤管)을 쥐고 자발(紫綍)을 펴야만 국가의 융성함을 울리게 하여 영원토록 보전되기를 도모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더구나 요전(遶電)의 옛 갑자(甲子)가 다시 돌아온 때에는 비옥(緋玉)의 은혜가 정종대왕과 동갑(同甲)인 유신(遺臣)에게까지 내려졌으니, 생삼계합(生三契合)의 의리가 어찌 헛된 것이겠는가.
보잘것없는 내가 일찍이 건릉(健陵)에서 봉축(奉祝)을 한 적이 있다. 이곳은 현륭원(顯隆園)에서 벋어 나온 한 줄기 산기슭에 위치해 있는데 노송나무와 잣나무와 오동나무와 옻나무가 우거져 숲을 이루고 있었다. 이에 윤씨 댁의 소재를 물었는데, 용주사(龍珠寺)의 중이 나를 바라만 볼 뿐 대답하지 못하였다. 아아, 인사(人事)의 변화가 과연 이러하단 말인가. 공의 증손 윤주국(尹柱國)이 힘써 이 문집을 간행하였는데, 이 문집이 간행된 것은 후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데 공이 될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정종대왕이 어진 사람을 중히 여기는 정성과 문(文)을 숭상하는 다스림을 볼 수 있다.
[주-D001] 남고(南臯) 윤공(尹公) : 윤규범(尹奎範, 1752~1821)으로 남고는 호이다. 본관은 해남(海南), 초명은 지범(持範), 자는 이서(彝敍)이다. 1777년(정조1) 증광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윤선도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벼슬에 오르지 못하다가 정조의 특명으로 서용되었다. 여러 관직을 거쳐 임천 군수(林川郡守)가 되었다가, 정조가 붕어하자 사직한 뒤 12년 동안 은거하면서 지냈다. 그러다가 1812년(순조12)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이 되었고 이후 오위장 등을 지냈다.[주-D002] 규장특달(圭璋特達)의 재주 : 특출한 재주를 지녔음을 뜻한다. 규장은 사자(使者)가 타국에 가서 예식을 행할 때에 사용하는 귀한 옥을 가리킨다. 공자가 “옛적에 군자가 덕을 옥에 비유하였다. 온윤하면서도 광택이 남은 인이고 세밀하면서도 엄숙하게 보임은 지이고……규장 한 가지만으로 통하는 것은 덕이다.[夫昔者 君子比德於玉焉 溫潤而澤 仁也 縝密以栗 知也……圭璋特達 德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禮記 聘義》[주-D003] 보불(黼黻)과 생용(笙鏞)의 그릇 : 보불은 《서경》 〈익직(益稷)〉에 순(舜) 임금이 우(禹) 임금에게 이르기를 “내가 해와 달과 별과 산과 용과 꿩을 무늬로 만들고, 종묘의 술그릇과 물풀과 불과 흰쌀과 보와 불을 수놓아서 다섯 가지 채색을 다섯 가지 빛깔로 물들여 옷을 만들고자 하거든, 그대는 그것을 밝게 만들라.[日月星辰山龍華蟲 作會 宗彝藻火粉米黼黻 絺繡 以五采彰施于五色 作服 汝明]”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임금을 잘 보좌하는 것을 의미한다. 생용은 악기의 종류인 생황(笙簧)과 대종(大鍾)을 말하는데, 왕정을 행하는 도구나 조정의 귀한 인재를 비유한다.[주-D004] 형구(亨衢) : 사방팔방으로 탁 트인 길로, 여기서는 벼슬길을 뜻한다.[주-D005] 풍운(風雲) : 풍운제회(風雲際會)의 준말이다.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좇는다.[雲從龍 風從虎]”라고 한 데서 온 말로, 훌륭한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난 것을 말한다.[주-D006] 주구(珠丘)를 …… 미쳤고 : 주구는 구슬이 쌓여 이루어진 아름다운 언덕이라는 뜻으로 흔히 왕릉(王陵)을 이르는 말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현륭원(顯隆園)을 가리킨다. 옛 신하는 윤선도를 가리킨다. 1789년(정조13) 여름에 장헌세자(莊獻世子)를 수원부(水原府) 북쪽에 개장(改葬)하려 하였는데, 이곳은 윤선도가 일찍이 효종(孝宗)의 장지(葬地)로 천거한 곳이기 때문에 정조가 옛날 일을 생각하였다고 한다. 《茶山詩文集 卷16 南臯尹參議墓誌銘》[주-D007] 신읍(新邑)을 …… 이르렀다 : 정조가 수원(水原)에 신읍을 경영하면서 윤씨에게 집 한 채를 하사하여 윤선도의 자손이 살도록 하였는데, 1795년(정조19) 겨울에 윤규범이 이 집으로 옮겨 살았다고 한다. 《茶山詩文集 卷16 南臯尹參議墓誌銘》[주-D008] 군직(軍職)을 …… 이르렀고 : 1789년 장헌세자의 묘소를 개장할 적에 정조가 옛날 일을 생각하자, 주서(注書) 심규로(沈奎魯)가 윤규범을 천거하여 가주서(假注書)로 삼았는데, 병조에서 또 군직에 임명하지 않자, 정조가 매우 엄하게 꾸짖고 그날 밤으로 전관(銓官)을 불러 임명하도록 하였다. 《茶山詩文集 卷16 南臯尹參議墓誌銘》[주-D009] 병조에서 …… 하였다 : 1790년 여름 고공(考功)의 모임에 윤규범이 또 참여하지 않자, 병조에서 좌기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여 고적(考績)을 중(中)으로 매기니, 정조가 어필로 고쳐 쓰면서 이르기를 “병조의 좌기에 참여하기를 어렵게 여기니 고적이 상(上)이다.”라고 하였다. 《茶山詩文集 卷16 南臯尹參議墓誌銘》[주-D010] 백의를 …… 볼만하였고 : 1796년 봄에 정조가 수원에 거둥하여 공을 불러 입시하게 하고, 좌우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문학과 조행이 구비되었는데 여태까지 불우하였으니 세도(世道)의 잘못이다.” 하였다. 승지 채홍원(蔡弘遠)이 주달하기를 “윤모(尹某)가 〈낙남헌송(洛南軒頌)〉을 지었는데, 문장이 매우 빼어났습니다.” 하였다. 채제공(蔡濟恭)도 그 작품을 보았는데 사기(詞氣)가 웅려(雄麗)하여 참으로 걸작이었다고 하였다. 이튿날 사헌부 지평에 제수하고 또 말하기를 “이 사람은 시종(侍從)의 자리에 두어야 합당한데, 등과(登科)한 지 수십 년 동안 침체한 것이 애석하다.” 하고, 이어서 호가(扈駕)를 명하였다. 윤규범이 창졸간에 복장이 없어 백의(白衣)로 호종(扈從)하니 사람들이 모두 영화롭게 여겼다. 《茶山詩文集 卷16 南臯尹參議墓誌銘》[주-D011] 군수의 …… 간절하였으니 : 1797년(정조21) 봄에 정언(正言)에 제수되었는데, 마침 공이 소명(召命)을 어겨 외직으로 임천 군수(林川郡守)에 보임되었다. 정조가 이르기를 “외직에 보임한 것은 네 집안을 위해 구정(舊情)을 생각한 것이며, 또 네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었기 때문이다. 가서 일을 잘하여 내 귀에 좋은 소문이 들리도록 하라.”라고 하였는데, 이 일을 두고 말하는 듯하다. 《茶山詩文集 卷16 南臯尹參議墓誌銘》[주-D012] 정호(鼎湖)의 …… 담당하였겠는가 : 정호는 황제(黃帝)가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는 곳이고, 용어(龍馭)는 제왕이 타는 수레를 가리키는 말이다. 정호의 용어가 세상에 머무르지 않았다는 말은 정조가 승하하였다는 뜻이다. 전(典), 훈(訓)은 〈요전(堯典)〉과 〈순전(舜典)〉 및 〈이훈(伊訓)〉 등 정치의 요체가 담긴 《서경》의 편명으로, 여기서는 정조의 훌륭한 치세(治世)를 가리킨다.[주-D013] 지지대(遲遲臺)에서 지은 갱운(賡韻) : 1796년 봄에 정조가 지지대에 이르러 어가(御駕)를 멈추고 시를 읊고는 윤규범에게 갱화(賡和)하도록 명하였다. 시흥(始興)의 행궁(行宮)에 이르러 사간원 정언으로 고쳐 임명하였다. 《茶山詩文集 卷16 南臯尹參議墓誌銘》 갱운은 임금이 지은 시의 운에 맞춰 시를 짓는 것을 말한다.[주-D014] 성지(聖旨)에 …… 이르렀고 : 1798년 재변이 있어 정조가 구언(求言)하자 윤규범이 상소하여 편의(便宜) 7조를 진달하였는데, 정조가 이를 보고는 얼굴빛이 변하여 칭찬하고 비답을 내려 가납(嘉納)하였다고 한다. 《茶山詩文集 卷16 南臯尹參議墓誌銘》[주-D015] 동관(彤管)을 …… 펴야만 : 동관은 자루가 붉은 붓으로, 옛날에 여사(女史)가 가지고서 궁중의 정령(政令) 및 후비(后妃)의 일을 기록하던 것이다. 《시경》 〈패풍(邶風) 정녀(靜女)〉에 “정숙한 여인이여 아름답기도 한데, 나에게 붉은 붓대 선물하였네,[靜女其孌 貽我彤管]”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자발(紫綍)은 임금의 조서(詔書)를 뜻하는 말로, 《예기》 〈치의(緇衣)〉에 “왕의 말은 실오라기 같은데 일단 나오면 굵은 명주실처럼 되고, 왕의 말은 굵은 명주실 같은데 일단 나오면 밧줄처럼 된다.[王言如絲 其出如綸 王言如綸 其出如綍]”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16] 요전(遶電) : 임금의 생일을 가리킨다. 황제(黃帝)의 모친인 부보(附寶)가 기(祁) 들판에 있을 적에, 번개가 크게 치며 북두칠성의 첫째 별을 휘감는 것을 보고는 감응하여 잉태한 뒤 24개월이 지나서 황제를 낳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史記 卷1 五帝本紀》[주-D017] 비옥(緋玉)의 …… 내려졌으니 : 비옥은 비단옷에 옥관자(玉貫子) 차림을 한 것으로, 당상관을 말한다. 1812년(순조12) 봄에 정조의 회갑이라 하여, 시종신으로서 1752년(영조28)에 태어난 사람은 모두 한 자급씩 올려주니, 윤규범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용양위 부호군에 부직되는 은전을 받은 일을 가리킨다. 《茶山詩文集 卷16 南臯尹參議墓誌銘》[주-D018] 생삼계합(生三契合)의 의리 : 생삼은 나를 낳아 주고 세상에 살아갈 수 있게 한 세 분인 부모와 스승, 임금을 가리킨다. 진(晉)나라 대부 난공자(欒共子)가 “백성은 세 분 밑에서 살아가니 그들을 똑같이 섬긴다.[民生於三 事之如一]”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國語 晉語》 여기서는 윤규범이 정조와 잘 계합했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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