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네딕도회와 원산 대목구
1. 베네딕도회의 한국 진출과 백동 수도원
1) 베네딕도회의 진출 배경
1905년 11월 17일 한일협상조약(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한국민들은 강제로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의병 투쟁과 애국 계몽운동(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면서 애국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많은 학교가 설립되었는데, 그 결과 1908년경 전국 각처에는 4,000~5,000여 개의 사립학교가 생겼다.
이 시기 한국 천주교회에서도 꾸준히 학교를 설립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선교라는 종교적인 성과뿐만 아니라 민족의 시련기에 국권 회복을 위한 노력에도 동참하였다. 그러나 당시 천주교계 학교들은 공통적으로 재정과 교사의 부족에 직면해 있었다. 특히 교사들은 학생을 가르치는 데 필요한 기초 교육뿐만 아니라 종교 교육도 담당해야 했기 때문에, 유능하고 적절한 교사를 구하는 것이 매우 큰 문제였다. 게다가 당시 경쟁 관계에 있던 프로테스탄트교회는 천주교의 2〜5배 이상의 학교를 설립하여 활발하게 교육 선교를 펼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뮈텔 주교를 비롯한 한국의 선교사들은 천주교계 학교를 발전시킬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뮈텔 주교는 교사를 양성할 수 있는 사범학교의 설립을 계획하게 되었고, 동시에 이를 맡아줄 수도회의 진출도 모색하였다.
뮈텔 주교는 학교와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07년에 일본에서 교육사업에 종사하고 있던 마리아회(Marianisten, S.M.)의 한국 진출을 타진하였다. 그러나 마리아회에서는 인원 부족을 이유로 뮈텔 주교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이후 뮈텔 주교는 유럽에서 수도회를 찾기로 결정 하고 1908년 1월 하순 프랑스로 떠났다. 그는 유럽에서 성모 승천회(Augustinians of the Assumption) 등 여러 수도회와 접촉했으나, 이들도 인력 부족을 이유로 한국 진출을 거절하였다. 그런 가운데 뮈텔 주교는 1908년 6월에 로마에 있는 베네딕도회의 성 안셀모 성당을 방문했고, 그곳의 원장 힐데브란트(Hildebmnd) 신부로부터 성 베네딕도희 오틸리엔 연합회(Congregatio Ottiliensis Ordinis Sancti Benedict!)가 한국에 진출하기 쉬울지 모른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뮈텔 주교는 1908년 9월 14일 오틸리엔 수도원을 방문했다. 그리고 수도원의 한국 진출을 설득한 끝에 베버 (Nobertus Weber) 아빠스로부터 진출 약속을 받았다. 베버 아빠스의 한국 진출 결정에는, 당시 자신들이 처해 있던 상황과 1907년 로마에서 개최된 베네딕도회 총연합 총재 회의가 하나의 자극이 되었다. 즉 이 시기 오틸리엔 수도원은 동아프리카에 진출해 있었지만, 그곳에서는 수도원을 설립하지 않은 채 교구 중심의 전교 활동을 전개하였고, 1907년의 회의에서는 아시아에 아빠스좌 수도원을 설립하는 문제가 논의되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8년 상트 오틸리엔의 한국 진출 결정은, “아시아 지역에서 수도
생활을 중심으로 한 선교 활동”이라는 두 가지 요구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정에 따라 1909년 2월 25일 보니파시오 사우어 신부와 엔스호프 (Dominicus. Enshoff) 신부가 수도원 설립 준비를 위한 선발대로 서울에 도착하였다.
2) 백동 수도원의 설립
선발대가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09년 3월 15일, 포교성성으로부터 수도원의 설립을 허가한다는 문서가 도착했다. 이에 선교사들은 7월 9일 백동에 수도원 부지를 마련하기 시작했고, 9월 6일에는 임시 수도원을 짓기 위한 정지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12월 6일에 완공된 작은 단층집으로 이사하였다. 이후 12월 11일에는 백동수도원이 원장좌 자치 수도원으로 인가되어 보니파시오 사우어 신부가 초대 원장으로 임명되었고, 12월28일에는 카시아노 니바우어(Cassianus Niebauer) 신부와 파스칼 팡가우어(Paschalis Fangauer) 수사 등 2명의 신부와 4명의 수사가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처럼 회원들이 증가하자 사우어 신부는 수도원 본관 신축 계획을 수립하고, 1910년 6월에 정지 작업을 마쳤다. 그리고 1911년 9월 14일에 3층의 신축 건물로 이사했고, 12월 27일에 건물 축성식을 거행했다. 그 사이 1911년 2월 21일에는 카니시오 퀴겔겐(Canisius Kugelgen) 등 6명의 신부와 수사들이 새로 서울에 도착하였고, 12월 12일에는 안셀모 로머(Anselmus Romer) 신부가 입국하였다. 그리고 1912년 5월 25일에는 야누아리오 슈뢰터(Tanuarius Schrotter) 수사가, 11월 16일에는 카예타노 피 어하우스(Cajetanus Vierhaus) 신부와 에우제니오 오스터마이어(Eugenius Ostermeier) 수사가 도착하였다.
1913년 5월 15일 백동 수도원은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되었고, 보니파시오 사우어 원장 신부는 초대 아빠스로 임명되었다. 이것은 선교지에 세운 오틸리엔 연합회 최초의 아빠스좌 수도원이자 동아시아 최초의 베네딕도회 아빠스좌 수도원이었다. 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는 6월 8일 상트 오틸리엔에서 아빠스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이후에도 베네딕도회 회원들의 입국은 계속되어, 1913년 12월 6일에는 레오폴도 다베르나스(Leopoldus Graf des Effants d’Avemas) 신부와 세바스티아노 슈넬(Sebastianus Schnell) 신부가 도착하였고, 1914년 5월 16일에는 제르마노 하르트만(Gemianus Hartmann) 수사, 고델리보 아우어 (Godelibus Auer) 수사, 바실리오 하우저(Basilius Hauser) 수사가 도착했다. 그 결과 1914년 당시 백동 수도원에는 21 명(신부 9명, 수사 12명)의 베네딕도회 회원들이 있게 되었다.
3) 숭공 • 숭신학교의 설립
⑴ 숭공학교
뮈텔 주교가 베네딕도회를 초청한 일차적인 목적은 교사를 양성하는 사범학교의 설립에 있었다. 그러나 베네딕도회는 진출 당시부터 사범학교뿐만 아니라 실업학교 중고등학교 등 다양한 학교를 설립하려고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1910년에 먼저 목공소를 설치했는데, 이 목공소에는 1910년 9월 초까지 13명의 한국인이 일을 배웠다. 그리고 수도원에서는 이 목공소를 토대로 1911년 초경 정식 실업(직업)학교인 숭공학교를 설립하였다. 승공학교의 숭은 ‘하느님 흠숭’을 뜻하며, 공은 육체노동’을 뜻한다. 따라서 이것은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라는 베네딕도회의 모토를 번역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우어 원장은 숭공학교의 교육이 신자들의 생활을 향상시킬 뿐만 아니라, 신앙의 전파에도 큰 역할을 할 것을 기대하였다.
숭공학교의 교육 과정은 3년이었다. 수업은 매일 2시간의 학과 수업과 8시간의 실습 시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배우는 과목은 종교, 한문, 일본어, 산수, 작문, 제도, 상업 부기(마지막 학년) 등이었다. 학과는 대목공부, 소목공부, 정밀 금속부, 철공 부, 재차부, 재단부, 원예부로 다양했으며, 1914년 부활절에 제1회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숭공학교는 사회의 평판이 좋았다. 그리하여 1914년에는 재학생 수가 70명이었는데, 200명이 지원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독일이 일본의 적성국이 되자, 독일에서 진출한 베네딕도 수도원에도 일제의 압박이 가해졌다. 특히 숭공학교와 관련해서는 11월 하순에 총독부의 폐쇄 요구가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인인 뮈텔 주교가 사우어 아빠스 대신 교장직을 맡게 되면서 승공학교는 계속 운영될 수 있었다.
하지만 교사로 일하던 4명의 수사가 징집되어 학생 수를 늘릴 수 없었고, 독일이 패전국이 되면서 수도원은 독일로부터의 경제적 지원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1919년 5월, 일제는 독일인이 경영하는 승공학교를 적산으로 몰수하려 하였다. 이에 서울 대목구에서는 형식적이지만 숭공학교의 경영권을 넘겨받았고, 프와넬 신부가 ‘분도회 소속 재산 관리 위원’이 되면서, 학교의 재산과 운영이 유지될 수 있었다.
한편 1920년 베네딕도회는 원산 대목구의 사목을 맡게 되었다. 그러면서 1921년에 승공학교의 폐교가 결정되었고, 재학생들이 졸업하는 1923년에 완전히 문을 닫았다. 폐교될 때까지 숭공학교에서는 여러 가지 물품을 제작하였는데, 그중 유명한 것으로 1915년 3월 뮈텔 주교의 주교 서품 25주년을 맞이하여 선물로 제작한 명동성당의 강론대가 있다.
⑵ 숭신학교
승공학교에 이어 베네딕도회에서는 1911년 6월에 사범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고, 임시 수도원 건물을 교사로 하여 9월 16일에 ‘숭신학교’를 개교하였다. 2년제인 숭신학교의 초대 교장은 안드레아 에카르트(Andrea Eckardt) 신부가 맡았고, 개교 당시 학생 수는 25명이었다. 그리고 1912년 4월에 신축된 학교 건물로 이사하였다.
강의는 에카르트 신부와 니바우어 신부, 2명의 한국인 교사가 담당하였고, 교과목은종교, 윤리, 교육학, 한국어 문법과 작문, 한문, 일본어, 세계사, 지리, 수학, 과학, 음악, 미술, 체조 등 이었다.
제1회 졸업식은 1913년 7월 1일에 거행되었고, 17명이 졸업장을 받았다. 그러나 얼마 뒤인 9월 베네딕도회에서는 숭신학교의 폐교를 결정하였다. 그 이유는 1913년 9월의 지원자가 4명밖에 없다는 것이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한국인 교사의 양성을 원치 않았던 일제의 교육정책 때문이었다. 일제는 사범학교를 폐교시키고, 그 대신 4년제 중등학교를 만들어 그 교육 과정 중에 1년 동안의 교직 과목을 넣도록 하였다.
그러나 숭신학교를 그러한 체제로 변경하게 되면, 적어도 2명의 일본인 교사를 채용해야 하며, 매주 10시간의 일본어 수업을 해야 했다. 그리고 학생들은 일본어로 시험을 치러야 했다. 따라서 이러한 조건은 숭신학교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그 결과 베네딕도회에서는 숭신학교의 폐교를 결정했던 것이다. 이외 사우어 아빠스는 숭신학교를 폐교한 원인으로, 프랑스 선교사들이 재정난으로 졸업생들을 교사로 고용하여 봉급을 지불할 형편이 못되었다는 점과 베네딕도회 신부들이 종신토록 학교 교사로 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는 점도 들고 있다.
2. 원산 대목구의 설정과 덕원 수도원
1) 원산 대목구의 설정과 베네딕도회
한국 진출의 첫째 목적인 숭신학교의 운영이 좌절되고, 1914년 7월에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베네딕도회의 활동은 위축되었다. 즉 일본이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함으로써 베네딕도회는 ‘적국 안의 수도단체’로 일제의 견제와 압박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1914년 9월부터 베네딕도회의 활동은 모두 금지되어, 그들은 수도원 안에서 조용히 지내야 했고, 고해성사 말고는 모든 선교 활동이 불가능하였다. 그리고 행동의 자유도 제한되어, 장소를 이동할 때마다 경찰에 신고해야 했다. 따라서 종전 후 베네딕도회가 조선에 계속 머물러있기 위해서는 교육사업 외에 다른 활동 분야를 찾아야만 했다.
한편 베네딕도회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부터 본당 사목을 희망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프랑스 선교사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숭신학교의 폐교로 활동 기반을 상실한 상태에서, 사우어 아빠스는 1914년부터 사목할 선교지를 물색하였고, 뮈텔 주교 역시 사우어 아빠스의 생각에 일정 부분 동의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920년 초 남만주의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한국인 신자 7,000명을 돌보는 간도 지방(의란현, 연길현)을 다른 선교 단체에 넘김으로써 부담을 덜고 싶다는 뜻을 뮈텔 주교에게 전해왔다. 뮈텔 주교는 이 문제를 사우어 아빠스와 의논 했고, 사우어 아빠스는 그 지역 선교를 베네딕도회에 맡겨 달라고 요청하였다. 아울러 서울 대목구의 북부 지역인 함경남북도를 독립 선교지로 넘겨줄 것도 요구하였다. 뮈텔 주교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안남북도를 맡도록 제의했으나, 사우어 주교는 이미 그곳에 정착한 프로테스탄트와 경쟁하기 어렵다는 판단하에 함경도지역을 택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1920년 8월 5일, 교황청에서는 서울 대목구에서 원산 대목구를 분리, 설정하고, 이 지역의 사목권을 베네딕도회에게 위임하였다. 그리고 8월 25일 사우어 아빠스는 초대 원산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고, 1921년 5월 1일 명동성당에서 주교 성성식을 가졌다.
원산 대목구의 분할 배경은 1911년까지 소급된다. 즉 뮈텔 주교는 당시 조선 대목구의 신자 수, 지역의 넓이, 교회의 지속적인 발전 등을 고려하여 조선 대목구를 분할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911년 4월 8일에 대구 대목구가 조선 대목구에서 분리, 설정되었다. 그런데 뮈텔 주교는 원래 조선 대목구에서 남부 지역(대구 대목구)과 함께 북부 지역도 분할하여 세 대목구 체제를 만들 계획이었다. 그러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1911년에는 대구 대목구만이 분리되었고, 1920년에 와서야 세 대목구로의 분할 계획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원산 대목구의 설정으로 베네딕도회에서는 함경남북도와 북만주 대목구(길림 대목구)에서 분리된 간도의 연길, 의란 지역까지 관할하게 되었다. 당시 함경도 지역에는 원산과 내평 본당이 있었고, 연길, 의란지역에는 용정, 영암촌(삼원봉), 팔도구(조양하) 등 3개의 본당이 있었는데, 이제 이 지역의 사목은 서울 대목구 소속 신부를 대신하여 베네딕도회 신부들이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원산 본당에는 1921년 1월에 안드레아 에카르트 신부가, 내평 본당에는 1921년 5월에 세바스티아노 슈넬 신부가 각각 부임하였다. 그리고 1921년6월에는 칼리스토 히머 (Callistus Hiemer,) 신부가 용정 본당에, 카니시오 퀴겔겐 신부가 팔도구 본당에, 카누토 다베르나스(Canute Grafdes Effants d,Avemas) 신부가 삼원봉 본당에 도착하였다.
2) 덕원 수도원의 설립
원산 대목구를 맡게 된 베네딕도회는 새 수도원의 건립 계획을 세우고 부지를 물색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원산 인근의 덕원 어운리에 적합한 곳을 발견하고 부지 매입에 착수 하였다. 이 지역의 땅은 원산 본당의 에카르트 신부가 1921년 10월 25일에 처음으로 구입하였고, 이후 계속해서 소유지를 확장해갔다.
이렇게 마련된 땅에 신학교 건물공사가 먼저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1926년 10월까지 정지 작업을 마쳤으나, 계획이 변경되어 1926년 11월 10일에 신학교를 지으려던 부지에 수도원을 세우고, 신학교는 200m 떨어진 평지에 세우기로 결정되었다.
1266년 겨울, 카예타노 피어하우스 신부가 수도원 설계도를 완성했다. 그리고 공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1927년 9월 서울로부터의 이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덕원의 건물들이 아직 완공되지 않았기 때문에, 베네딕도회 회원들은 임시로 원산 본당 사제관에서 지내야만 했다. 그러다가 1927년 11월 17일 수도원의 축성식을 가짐으로써, 이제 백동 수도원 시대를 마감하고 덕원 수도원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수도원 성당은 1929년 7월에 기초 공사를 시작하여 11월에 기공식을 가졌으며, 1931년 12월에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3) 본당의 증설
베네딕도회가 원산 대목구를 맡았을 당시, 함경도 지역에는 원산과 내평 본당이 있었고, 연길, 의란지역에는 용정(1909년 설립, 1932년 용정 하시 본당으로 개칭), 영암촌(삼원봉, 1909년 설립, 1931년 대립자 본당으로 개칭), 팔도구(조양하, 1910년 설립) 등 3개의 본당이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사제가 부족하여 기존에 있던 본당의 신부들 자리를 채우는 데에 그쳤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 유럽에서 선교사들이 증원되면서 새로운 본당 설립에 착수 했는데, 그 결과 함경도 지역에는 회령 본당(1925년 10월), 청진 본당(1926년 7월), 함흥 본당(1927년 5월), 덕원 본당(1927년 11월경) 등이 설립되었고, 연길 지역에는 연길 본당(연길 하시 본당, 1922년 11월), 육도포(1923년 4월) 본당, 훈춘 본당(1924년), 다조구(대령동,1926년 6월) 본당, 돈화 본당(1926〜1927년) 등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의란 지역에는 1924년 7월에 송화강 지류인 부금에 본당이 세워졌고, 1926년 가을에는 부금 남쪽 가목사에 본당이 신설되어 중국인 신자들을 돌보았다.
한편 1928년 7월 교황청에서는 원산 대목구에서 연길 지목구와 의란 포교를 분리시켰다. 이것은 사우어 주교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 그 결과 이제 원산대목구는 함경남북도만을 사목하게 되었다. 대목구의 분할 이후 1931년에는 영흥 본당, 1933년에는 고원 본당, 1935년에는 북청 본당, 1936년에는 흥남 본당과 나남 본당, 나진 본당이 각각 설립되었고, 내평 본당은 1930년 초 신고산으로 이전하면서 고산 본당으로 개칭하였다.
제2절 원산 대목구의 분할
1. 연길 지목구와 의란 포교지의 설립
원산 대목구 설정 당시, 대목구의 관할 구역에는 함경도와 연길(간도), 의란 지역이 포함되었다. 사우어 주교가 이 넓은 지역을 관할 구역으로 삼고자 한 것은, 오틸리엔 연합회의 전체 활동 지역을 동아시아로 옮기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제1차 세계 대전 후 영국이 독일 선교사들의 활동을 제한하여 오틸리엔 연합회의 아프리카선교가 어렵게 되자, 독일 수도원에서 양성된 선교사들이 동아시아로 와서, 간도와 의란 지역에 수도원을 설립 하고, 수도원들이 독립적인 대목구를 맡아 서로 긴밀히 유대하며 이 지역을 담당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1926년 영국이 독일 선교사들에게 동아프리카에서의 활동을 다시 허락함으로서, 베네딕도회의 활동이 분산되어 사우어 주교의 동아시아 선교 구상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사우어 주교는 부족한 인원으로 광대한 지역과 늘어나는 신자들을 다 사목할 수 없었기에, 간도와 의란 지역을 독립시켜 자신의 관할 구역을 축소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그는 원산 대목구의 분할을 교황청에 요구했고, 그 결과 교황청에서는 1928년 7월3일 의란 지역을 ‘의란포교지’로, 1928년 7월 19일에는 북간도 지역을 ‘연길 지목구’로 설정하였다.
연길 지목구가 설정되면서, 1929년 2월 5일 연길 본당의 테오도로 헤르만 브레허(Theodor Hermann Breher) 신부가 초대 지목구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의란 포교지는 다른 선교회에 위임될 때까지 사우어 주교의 관할하에 있게 되었다. 사우어 주교는 부족한 인원으로 거리가 먼 의란 지역을 관리할 수가 없어 가능한 빨리 이 지역을 다른 선교회에 넘기고자 하였다. 그 결과 의란 포교는 1933년 3월 31일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위임되었고, 카푸친회에서는 9월에 북티롤(오스트리아 티롤주의 북부) 관구에 이 지역을 맡겼다. 이후 의란 지역은 ‘가목사 지목구’로 승격 되었으며, 초대 지목구장에 카푸친 작은형제회의 헤르메네질드 힌트링거(Isidor Hermenegild Hintringer) 신부가 임명되었다.
2. 연길 지목구의 발전과 대목구 승격
1) 본당의 증설과 변화
1928년 연길 지목구에는 용정, 영암촌, 팔도구, 연길, 육도포, 훈춘, 다조구, 돈화 등 8개의 본당이 있었고, 교우 수는 11,764명이었다. 그리고 브레허 지목구장이 담당하던 연길 하시 본당이 지목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연길지역에는 여러 개의 본당이 증설 되었는데, 가장 먼저 설립된 본당이 1929년 10월 용정 본당에서 분리된 두도구(간도성 연길현) 본당이었다. 이 시기 간도 지역에는 이민자들이 계속해서 도시로 유입되었고, 주민들도 농촌에서 도시로 집중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브레허 지목구장은 점차 도시화되어 가던 두도구에 코르비니아노 슈래플(Corbinanus Schrafl) 신부를 파견하여 본당을 설립 했던 것이다.
두도구 본당에 이어 1930년에는 합마당(간도성 연길현) 본당이 설립되었고, 1931년에는 대령동 본당의 공소였던 명월구(옹성라자, 간도성 연길현)가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1931년에는 연길 상시 본당이 연길 하시 본당에서 분리되었다. 연길 하시 본당은 만주인들의 시가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성당에 가는 데는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있었다. 이에 브레허 지목구장은 한국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연길 상시에 본당을 세우기로 결정하고, 퀴겔겐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이후에도 본당 설립은 계속되어, 1934년에는 합마당 본당에서 관할하는 왕청(간도성 왕청현) 준본당이 설립되었고, 1935년에는 목단강(빈강성 영안현) 본당, 1936년에는 신참(길림성 액목현) 본당과 용정 상시 본당이 차례로 설립되었다. 그리고 1937년 연길 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된 이후에는 삼도구 본당(1940년)이 두도구 본당에서 분리되었고, 1941년에는 연길 대목구의 마지막 본당인 도문 본당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그사이 1931년에는 불안한 시국 때문에 돈화 본당이 폐쇄되었고, 1932년에는 육도포 본당의 호노리오 트라버(Hcmorius Traber) 주임 신부가 본당을 경흥으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육도포 성당과 사제관은 1934년에 공산당에 의해 소실되었다. 아울러 대령동 성당도 1935년 3월에 공산당의 방화로 전소되어 다조구(간도성 연길현)로 본당을 이전하였다.
자료: 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한국천주교회사” 제5권